이명박 대통령은 지난달 15일 워싱턴으로 출국하기에 앞서 라디오 연설에서 "(한국 정치의) 고질적인 문제엔 대증(對症)요법보다는 근원적인 처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념과 지역으로 갈라진 민심,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권력형 비리와 부정부패, 상대에 무조건 반대하는 정쟁의 정치 문화' 등을 지적하면서 "이런 문제들을 극복하고 우리 사회를 한 단계 도약시킬 수 있는 방안"을 깊이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근원적 처방'이란 곧 개헌 아니겠느냐는 관측도 나왔으나, 이 대통령은 아직 해답을 내놓지 않았다. 유럽 순방을 마치고 14일 귀국한 뒤 그에 관한 구상을 밝힐지 궁금하다.
그런데 정치권에서는 개헌론이 솔솔 피어오르고 있다. 김형오 국회의장은 이미 작년 9월 '헌법연구자문위원회'를 만들어 운용해 왔다. 김 의장은 17일 제헌절 기념행사에서 본격적인 개헌 논의를 촉구할 가능성이 크다. 여야 의원들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미래한국헌법연구회'라는 의원연구단체는 한나라당 이주영, 민주당 이낙연, 자유선진당 이상민 의원 등 3명이 공동의장을 맡고 있으며, 회원 수가 186명에 이른다. 이 모임은 며칠 전 역대 국회의장들을 초청하여 개헌에 관한 의견을 들었다. 거기서 '권력 분산'의 구체적 방향까지 여러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1948년 제헌(制憲) 이후 험난한 헌정사(憲政史)를 거쳐 1987년에 9번째로 개정된 현행 헌법은 지난 22년간 큰 탈 없이 나라를 지켜왔다. 성공적인 헌법이었던 셈이다. 지금까지 진정한 국민 합의로 만들어진 헌법은 제헌 헌법과 현행 헌법뿐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권력자(쿠데타 집권세력 포함)의 뜻에 국민의 동의(同意)가 강요되는 절차를 거쳐 만들어졌다. 얼룩진 헌정사의 교훈은, 국민이 원해야 개헌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개헌 논의의 출발점에서 짚어야 할 점은 과연 헌법에 문제가 있어서 나라가 잘되지 않느냐는 의문이다. 대통령에게 권력이 너무 집중된 현행 제도가 문제이니 고쳐야 한다는 것이 국민 다수의 생각이라면 개헌 주장은 힘을 받을 것이고, 문제는 결국 제도보다 운용에 달렸다는 것이 다수 견해라면 개헌은 반드시 능사가 아니다.
지금 피어오르기 시작한 개헌 논의는 사실 현 정부 들어 갑자기 나온 것은 아니다. 지난 대선을 앞둔 2007년 초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개헌 추진 의사를 밝혔으나, 대선 정국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지 모른다는 야당의 의혹과 국민들의 우려 때문에 힘을 얻지 못했다. 그해 대선 과정에서 여야 후보들은 대체로 '다음 대통령 임기 중 개헌'에 동의하는 입장이었다.
만약 현 대통령 임기 중에 개헌을 할 것이라면, 개헌 논의가 가능한 시간은 앞으로 길어야 2년이다. 2012년 12월 대선에서 역산(逆算)하면 늦어도 그해 초에는 개헌이 되어 있어야만 선거 일정이 순조로울 것이다. 그러자면 2011년 하반기에는 국회 의결과 국민투표를 거쳐야 한다. 가령 12월에 국민투표를 한다면 8~9월에는 개헌안이 발의(發議)되어야 한다.
개헌안 발의는 국회(재적의원 과반수) 또는 대통령이 할 수 있다. 국회 쪽에서 먼저 개헌 논의를 시작한다면 대통령은 개헌에 반대한다든가, 아니면 자신에게 주어진 개헌안 발의권을 행사(行使)하겠다든가 포기하겠다든가, 입장을 표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 후 주변 원로와 참모들은 임기 중 섣부른 개헌 논의가 권력 누수 현상을 앞당길 것이라고 조언해 주었다. 그러나 정치권 일부에선 벌써 '내년 6월 지방선거 이전까지 개헌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하는 판에, 누수를 우려해 무대응으로만 넘어갈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하기에 따라선 대통령이 개헌 정국을 적절한 속도와 수위로 관리해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개헌 여부(與否)와 개헌할 경우의 큰 시간계획에 대해 이 대통령이 결심해야 할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