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아아아...... 2000.07.05에 리메이크된 새로운 하늘에 비하면 얼마나 허접한 지 함 보세요....;; 새로운 하늘도 못 썼지만 이거에 비하면........;; 1999.11.11에 썼겠죠???......... 이딴 걸 내는 이유는........... 흠............ 저도 잘 모르겠군여~~;; 제딴엔, 제가 보다 높은 단계로 올라서기 위해, 제 생각의 편린들 - 지금 보다도 더욱 부족했던 것들을 공개함으로써 제가 더욱 분발할 수 있도록 하고 여러분에게도 도움을....;; 과연 도움이 될 지는 의문..... 해가 되지 않으면 다행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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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하늘
1
창문이 깨지면 나는 도움이 없는 한 17분 36초 469 뒤에 죽는다. 기압을 다루는 기능이 퇴화된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창문 너머로 이름을 알고 싶지 않은 별 바다를 본다. 이렇게 쓰고 나니 이름을 갑자기 알고 싶다. 어차피 알 방법이 없지만. 옛 권력이 스스로의 필요에 지어냈을 이름 따위는 치우자.
창문 밑 탁자에 놓인 보물 지도를 다시금 내려다본다. 별들이랑 별들 사이 거리가 중수소 분자 안에 있는 원자들 거리만큼만 떨어져서 정밀 표시되어 있다. 웬만큼 좋은 내 눈으로도 택이 없어서 전자 현미경을 조작하여 작업하고 있다.
아무리 장비가 좋아도 전자 현미경은 크기가 커야 작은 걸 볼 수 있기 마련이다. 성질 나쁜 빛 때문에 제아무리 기술이 좋아져도 이 점만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 조금이나마 위안을 받는다. 전성기 때의 무한제국도 이 점만은 우리랑 똑같았을테니까.
내 골동품 전자 현미경은 방 안을 다 채우고도 모자라 위쪽 몇 층까지 점거하고 있다. 아까운 공간이지만 어쩔 수 없다.
보물 지도를 좀더 빳빳하게 당긴다. 지도는 두루마기 같은 것에 둘둘 말려 있고 펴면 쉽게 빳빳해진다.
이게 보물 지도가 맞는 건가. 이거 찾겠다고 엄청난 에너지를 낭비하는 놈들이 수두룩한 걸 보면 일단 믿어야지. 협상 대상은 된다. 권력은 있는 게 아니라 있다고 믿는 거다.
보물 지도엔 지도 제작자의 품위를 의심케하려는 의도인 듯 가 온통 범벅이 되어 표시되어 있다. 물론 범벅까지는 아니다. 지금껏 염병할 때문에 5만 6013개의 장소를 뒤지고 그보다 1000배는 넘게 목숨을 걸고 모험을 한 걸 생각하면 무한 허공에 알몸으로 번지점프를 때리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러면 얼마못가 늑대들이 눈치 못 채게 박살나겠지, 흐흠.
지도에 있는 탐색 안 한 들 가운데 지금 있는 곳에서 가기가 가장 쉬운 관계로, 목표로 삼은 동네는 지독한 촌구석이다. 무한제국의 가장 변두리 국부 은하단의 가장 변두리 미리내의 가장 변두리 태양계의 가장 변두리 행성이니까.
끝내 주는군. 가장 변두리, 가 몇 번이야. 무지렁이들은 상대하기 짜증스러운데.
또 빌어먹을 도약을 몇 번이나 해야 되나. 에너지 탱크 잔고가 남아질 않겠어. 지금껏 제대로 된 걸 못 찾는 바람에 배당금을 계속 미뤄서 투자자들이 이를 갈고 있는 판인데, 제길.
괜찮아.
여차하면 지도 팔아먹고 토끼면 돼. 가짜 보물들은 잔뜩 만들어 놨어. 소문도 잘 퍼지고 있는 편이고. 더욱이 횡령한 걸 들킬 수는 더더욱 없는 노릇이다.
지점을 뒤진 결과 갈색 난쟁이별로 위장되어 있던 다이아몬드 별을 32 개 찾아냈다. 별이 수소 다 써먹고 무너질 때 중심 핵에 있던 탄소들이 눌리고 열 받아서 다이아몬드가 된 것 위에다가 갈색 치장을 발라 놓은 걸 벗겨 내니까 평균 지름 1만 7천 km짜리 물방울 다이아가 나왔다.
그 물방울 다이아들을 쪼게서 팔아먹고 번 에너지를 몇몇 악당들이랑 같이 다 빼돌린 걸 들켰다가는 온 무한제국에서 현상금 사냥꾼들이 달려들 테니까 들키면 안 된다. 빼돌린 것은 자잘한 것까지 합치면 더 많지 않은가. 남들이 생각하는 것만큼은 가치가 없어도 나름대로 괜찮은 지도다. 뺏길 수는 없지.
<렉슬리!>
내 귀엽고 예쁜 이름이다. 높은 톤이다. 또 싸움질인가?
시꺼먼 의자에서 튕기듯이 일어나서는 모니터를 바라봤다. 수많은 빛 공들이 어지럽게 떠돌고 있다. 폭발하는 빛들 사이로 평균 지름 140m의 둥그런 전투기들이 가속된 입자 분출을 이용해 모든 방향으로 움직이면서 죽음의 막대로 춤춘다. 전투다. 펄스 레이저, 반물질 미사일, 레일 건, 마이크로웨이브. 피가 끓어오르고 분노가 솟구친다.
<무슨 일이야, 자르딘?>
자르딘의 멋진 얼굴이 모니터에 뜬다. 잘 다듬은 적갈색 머리카락은 속에 새하얀 다이아몬드를 잔뜩 품고 있는 것 같이 아름답다. 음, 다이아몬드 별. 자르딘에게 비듬이나 이 같은 건 없다. 그랬다가는 강인하면서도 세련된 얼굴에 블랙홀을 떠올리게 하는 눈이 뭐가 되겠어.
자르딘의 눈은 진짜 블랙홀 같다. 새까만 동공을 둘러싼 홍체는 깨끗하고 정밀하게 무지개처럼 둘레의 빛을 빨아들이고 있다. 자르딘은 겉보기 형질이 남성형인 녀석치고는 괜찮게 생겨 먹었다. 겉보기 형질이 여성형인 나만큼 예쁠 리는 없지만.
물론 지금 그딴 건 신경 쓸 때는 아니다. 자르딘이 답한다.
<주기럼이 배신했어. 전투기들이 몰려들었다>
주기럼은 이 동네 블랙 홀 발전소를 차지하고 있는 촌뜨기 영주다. 게네메스인지 뭔지 하는 변두리에 사는 주제에 충전기에다 마이크로 파를 쏘는 시간이 다른 데 보다 자그마치 3분씩이나 더 걸릴 거라고 깡다구를 부리기에 몇 번 협박도 했다. 하지만 계속 출력이 나쁘다고 엄살을 떨었었다. 검사까지 해보니 실제로 안 좋은 기계를 쓰고 있기는 했다. 요즘 기계들이 다 낡았지 그러면서 너스레를 떨더니만. 주기럼, 언젠가는 튀겨 먹고 말겠다.
<워프를 하려면 얼마나 걸리나?>
오퍼레이터가 말한다.
<23초입니다>
<지금 당장 목표를 향해 1차 도약 준비한다>
내가 자르딘에게 말한다.
<21초만 버텨. 그런 다음 들어와. 놈들은 우리가 어디로 가는 줄은 모르니까 우리가 유리해>
<18초 남았군>
자르딘은 떠돌이 기사(機士)다. 초광속은 커녕 준광속도 제대로 못내는 고물 우주선 타고 오로지 조종술만으로 요리조리 피해 다니는 걸 고용했다. 쓸만한 기사다. 내 휘하 전사들을 몽땅 부하 기병대로 몰아줄 정도로 난 녀석에게 믿음을 보여줬다. 물론 그 전투기들은 단추 하나만 눌러 주면 몽땅 자폭하게 만들 수 있다.
한참을 잘 싸우던 자르딘이 제 우주선을 몰고 주기럼의 블랙 홀 발전소로 돌진한다. 저 바보가!
<빨랑 돌아 와. 널 고용한 건 나야. 계약서엔 니가 나한테 충성을 바치면 난 보금자리를 준다고 되어 있어>
<잠깐만 기다려>
<못 기다려! 시간 안에 안 돌아오면 넌 끝이야>
주기럼의 블랙 홀 발전소에서 온갖 무기가 빗발친다. 자르딘은 그걸 모든 방향으로 왔다갔다하며 피하며 펄스 레이저를 쏘아 갈긴다. 전투기는 아주 무섭다. 워낙 작다 보니 거대 건축물의 틈새로 잘 파고들어 급소에 펄스 레이저를 갈긴다.
그러면 단 일격에 치명타를 받을 수도 있다. 더욱이 거대 건축물은 대부분 낡아빠진 것들이라 더 쉽게 부서질 수도 있다. 그 점은 나드낫셀 호도 다를 게 없다.
주기럼의 전투기 조종사들은 실력이 별로다.
조금 불리해지자 몇몇 전투기가 블랙 홀 발전소 쪽으로 향한다. 블랙 홀 발전소는 장원의 중심지니 죽어라고 지키려 들겠지.
블랙 홀 발전소가 부서지면 장원은 무너진다. 별을 공 모양의 뚜껑으로 덮어씌워서 에너지 효율을 극대화시키는 흔해빠진 다이슨구 따위보다도 훨씬 대단한 에너지원이니까.
이걸 노렸군, 자르딘. 하지만 3초 밖에 안 남았다. 그때까지 나드낫셀 호의 아가미 꼴 도킹 홈에 못 들어오면 넌 해고야. 이런 상황에서 해고는 곧 죽음이기 매우 쉽다. 자르딘, 빨리 와라.
자르딘이 반전하더니 나드낫셀 호를 향해 달겨들며 외친다.
<렉슬리, 출발하지 마>
<왜? 멋지게 시간에 맞췄으면서>
<다이슨 펄스 레이저가 준비될 만큼 충분한 시간이 흘렀어. 워프하다가 얻어맞으면 끝장이야>
다이슨 펄스 레이저. 가까운 곳에서라면 무시무시한 무기다. 장원의 방어용 최강 병기.
다이슨구 내벽에 있는 지름 수 백만 km짜리 오목 거울들에서 빛은 출발된다. 별빛이 오목 거울에 튕겨지면 그것은 별이랑 내벽 사이에 떠 있는 몇 천 km짜리 집광기로 모이는데 일부는 태양열 발전이 되어 자급자족에 이바지된다. 나머지 빛은 집광기에 있는 거울을 통해 다이슨구 극점에 있는 작은 구멍에 들어간다. 구멍에도 복잡한 거울들이 있어서, 장원 복판에 있는 감마 집중 장치에 여러 군데에 있는 다이슨구에서 모은 빛이 모이게 된다. 평소엔 감마 집중 장치에서 전기 만든다.
감마 집중 장치에서 일부러 흘리거나 미처 못 모은 빛은 감마선으로 바뀌고 진동되어 펄스 레이저로 바뀐다. 여러 곳에서 오는 이것은 보통 최종 거울에 비치지 않고 열원에 모인다. 열원은 엄청난 에너지를 만들어내곤 한다. 언제나 이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것을 열원 아닌 공격 목표에 쏘면 다이슨 펄스 레이저다. 머리 빠개지는 시공 계산이 필요하기 때문에 한 번 쏠 때마다 수십 만의 농노들이 징집되어 병렬식으로 늘어앉아 점토판에 흠집을 낸다.
제길, 확 에너지 빔이라도 갈겨?
안 돼. 전기 아까야 돼. 얼마 없단 말야.
<자르딘, 나더러 어쩌라는 거냐?!>
저 같잖은 기사한테 전투기 지휘권을 몽땅 넘긴 게 후회된다. 나, 렉슬리 같은 일류 마법사가 저깟 기사랑 동업자인 양 굴어도 되나?
어쩌랴. 자르딘은 다른 놈들 여럿하고도 계약을 맺고 있다. 그들 가운데서는 내 사업의 투자자들에 라이벌들까지 있다. 이걸 다 알고 있으니 자르딘은 이따위로 구는 것이다. 아예 죽일 작정이 아니라면 존중해야지. 다이슨 펄스 레이저를 피할 방법을 알지도 모르니까.
나에게는 남의 기억을 바꿔치기 하거나 남의 머리 속을 포맷해버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약간의 기계 장치에 다소 간의 노력을 접붙이면 능력은 움직인다. 아쉽게도 이 능력은 몇몇 하등 동식물에게 밖에 통하지 않는다. 오랫동안 이 기술은 잊혀지고 다듬어지지 못했다.
가까스로 상속받은 기술이 이딴 모양인 게 한 둘이 아니다. 빌어먹을 놈의 퇴보. 10억 년 동안의 퇴보. 알고 있었다면 정신의 지배력을 공고히 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거야. 남의 정신을 강탈하여 소유하는 느낌이 어떠했을지 알고 싶은데 말이다.
어느새 나드낫셀 호 안에 기어들어 온 자르딘이 말한다.
<전투기 몽땅 회수하고 그냥 얻어맞아>
<뭐?! 나드낫셀 호가 얼마나 비싼 건지 알아? 비록 몇 억 년이나 된 구닥다리지만 그깟 전투기 몇 백 만 대를 가지고 와도 못 바꾸는 거야. 이곳 저곳 땜질한 데가 많기는 해도....>
<난 기사니까 마법사인 너보다는 지식이 얕지. 하지만 너한테 많이 배웠잖아>
<내가 뭐하러 알켜줬을까>
<이런 촌구석에 있는 다이슨 펄스 레이저가 세면 얼마나 세겠어? 괜히 워프하다가 그 순간에 얻어맞아서 작살나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일리 있는 말이다.
시공간에 전기적 구조를 구성하여 전자기력을 투영하면 나오는 물리 전자석에 의해 발생하는 반중력으로 시공간을 구부려, 잠깐 생기는 웜홀에 우주선을 동댕이치는 게 워프 항법이다.
중력 제어를 하게 되지만, 중력자가 스스로를 고정시킬 정도로 시공간을 오래 휘게는 않으므로 블랙 홀이 되지는 않는다. 그때엔 몹시 불안정하기에 - 한 순간에 두 시공에 있게 되는데다 나드낫셀 호의 방식은 겨우 지름 50km로 열린 웜홀에다 순간적으로 준광속을 내어 억지로 우주선을 밀어 넣는 것이다 - 즉 맞았다가는 끝장이다.
으윽. 주기럼을 깔본 게 화근이야. 변두리 장원 영주라고 공짜로 전기 받아먹으려다 큰코다치겠구나. 하긴 이미 목표 전기량은 거의 다 받았으니 제대로 튀면 된다.
적 전투기들이 슬슬 뒤로 빠지는 게 심상찮다. 주기럼의 비행사들은 조종 실력이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었지만 많이 죽었겠다. 보아하니 딴 영주랑 싸우다가 부랴부랴 돌려서 온 모양이던데 이제 주기럼, 너는 끝장이다. 주기럼의 초광속 우주선은 전선에 있을 것이다. 그러니 다이슨 펄스 레이저를 쓰겠지.
은백빛 문이 열리며 자르딘이 주조종실로 뛰어든다. 자르딘이 말한다.
<내가 나드낫셀 호를 조종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지도 몰라>
순간 진동이 인다.
내 고운 실 같은 길다란 파란 머리카락 몇 올이 살짝 산들거리는 정도 진동이다. 빨간 로브 자락 정도는 흔들거릴 줄 알았는데.
<겨우 이거야? 피해 상황이야 뻔하군>
오퍼레이션 센터에 있는 317명의 마인 계집애들이 집계된 피해 상황을 알려 온다. 예상 대로다. 고칠 필요도 없겠다. 이런 고물 우주선에 이쯤 피해 밖에 못 주는 다이슨 펄스 레이저를 가지고 있다니. 주기럼은 내가 손 안 봐도 망하겠다. 물론 애초에 손 댈 생각도 없었다. 에너지를 낭비하는 건 삶을 깍아 먹는 짓일 뿐이다.
내 초광속 우주선 나드낫셀 호로 가는 목적지는, 우주 팽창의 영향력이 너무나 커서 무한제국 내부 중력이랑 팽팽한 긴장을 내고 있는 이곳과는 정반대인 그런 곳이다. 그렇다고 정신 없이 수축하는 곳도 아니다.
자, 가자!
2
<저거 세르딘이 사는 데 맞아?>
5개의 행성이 다이슨구도 안 씌워진 작은 별을 돌고 있다. 5번째 행성이 목적지인데 지름이 고작 3310km이고 이름은 텐타다. 텐타에는 크레이터가 잔뜩 뚫려 있다. 지름 250km인 나드낫셀 호를 끌고 멀찍이 두니까 꼭 위성 같다. 중력 교란이 일어날 정도로 가까이 두지는 않았다.
텐타를 보니 지름 200미터 밖에 안되는 전파 망원경들이 동그스름한 방벽에 싸인 체 올망졸망 흩어져 있는 게 눈에 띈다. 거죽 모두에 걸쳐 퍼져 있어서 텐타 모두를 통해 우주를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옛날에 그렇게 쓰던 곳이었던 모양이다. 보물이 없으면 텐타를 통째로 끌고 가버려? 그렇게만 해도 비싸게 먹힐 것 같다.
텐타는 주기럼의 장원에서 거리로는 엄청나게 먼 곳이다. 거리로만 따지면 훨씬 가까운 영역이 얼마든지 있는데도 무한제국 외곽을 따라 뱅뱅 돌면서 몇 개월 동안 전기 공급받고 워프하면서 와야만 했던 짜증스러운 이유가 있다.
그냥 갔다가는 군주들 사이 싸움질에 휘말려서 워프 초광속 우주선 떼에 둘러싸이기 딱 좋다. 나드낫셀 호는 변두리에서나 괜찮지 은하계 중심 근처에서 노는 대군주들 초광속 우주선에 비하면 장난감이다.
은하계 사이에 펼쳐진 너른 진공으로 가는 방법도 있지만 마찬가지다. 가끔 오가는 초광속 우주선이 있는데다 텃세는 어딜 가나 심한 법이다.
게다가 나는 마법사다. 빌어먹을 신관들이 교주한테 일러바치면 둘레 영주들이 싸움을 갑자기 멈추고는 마법사 잡겠다고 몰려들 것이다. 영주들 및 신관들은 적대적 공존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계를 선의의 경쟁이라고 여기는 극우파들 말엔 난 관심이 없다.
군주들을 피해 오느라 에너지는 거의 다 떨어졌다.
괜찮다.
여차하면 반물질 폭탄으로 이 태양계의 중심 항성을 붙잡아다 터뜨린 다음 그때 나오는 에너지를 모으면 된다.
그렇게 할 필요가 있는 지 타진해 본다. 반물질 폭탄 수가 모자라기 때문에 신중하게 해야 한다.
나는 기다리는 동안 상념에 잠시 잠긴다.
워프 초광속 우주선이라는 건 괴물이지. 무한제국에서 생산되는 에너지의 대부분을 워프 초광속 우주선이 전쟁 놀이하느라 탕진한다는 건 다 아는 사실이다.
내 삶 저 깊숙한 곳으로 어둠이 깃드는 걸 느낀다. 어둠은 속삭여 주는 것 같다. 무한제국은 전쟁을 통해 평형에 이르렀다. 10억 년에 걸친 기나긴 퇴보도 이제 느려지고 있다. 평형과 퇴보. 내 삶을 얽어 메는 두 신이다.
끝도 없이 칙칙한 무한 허공이 사방을 감싸고 있다. 무한제국 외곽은 어디나 이 모양이다. 빛이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다. 이런 판이니 저 별을 부수는 건 마지막까지 피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마저 부수면 이곳은 훨씬 더 황량해 보일 것이다.
나는 다시 적어도 빛이 비치는 곳으로 눈을 돌린다.
무한 허공을 보며 두려워하는 건 도대체 폐소 공포증인가 광장 공포증인가. 그것조차 알 수 없도록 만드는 어둠에 빠져드느니 저 보잘것없는, 진흙탕들이 바글대는 빛알갱이들이 점점이 박힌 어둠의 세계를 본다.
텐타엔 그 흔해빠진 링 월드도 없다. 궤도 엘리베이터마저 없다! 도대체 저기 사는 세르딘들은 제 정신인가? 아직 다이슨구를 어떻게 만들 수 있는 기술은 남아 있는데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다이슨구 안에 있는 별을 초광속 우주선으로 가끔씩 갈아주는 일을 어떻게 하겠나.
자르딘이 어느새 다가와 말한다.
<같은 세르딘으로서 이해가 안 간다>
가끔 자르딘은 유치한 소리를 한다.
<착륙하자. 자르딘, 같이 가자>
<좋지>
기사 자르딘은 등에 뉴트로늄 바스타드 소드를 메고 있다. 저런 깡촌에 전사가 있을 리 없지만 자르딘은 그냥 가지고 간다.
뉴트로늄 바스타드는 중성자성이랑 똑같은 밀도를 지닌 시꺼먼 칼이다. 평소에도 전자기 역장이 걸려 있다. 안 그랬다간 나드낫셀 호를 안쪽에서 박살 내버릴 게 뻔하다. 그리고 들고 다닐 수도 없다. 전자기 역장이 중력자를 묶어두지 않으면 질량이 느껴질 것이다. 그 질량은 자르딘 허리를 끊어버릴테지만 자르딘은 전자기 역장 덕분에 잘만 가지고 다닌다.
그렇다고 가벼운 바스타드는 아니다.
손잡이 질량이 장난이 아니다. 초소형 축전지가 들어 있어서 그런지 어마어마하게 무겁다. 자르딘이 장난으로 던지는 걸 받다가 하마터면 허리를 삘 뻔했다. 저 칼 때문에 깍아먹는 전기가 만만치 않다. 비싼 칼이라기에 봐주고 있는 것이다.
여차하면 자르딘을 죽여버린 다음 칼을 팔아 먹어야한다. 기회가 있을지 가끔 가늠해보고 있다.
전투기에 나란히 탄다.
전투기는 두 사람에게는 엄청나게 크지만 정작 조종실은 좁아 터졌다. 이러니 귀족 출신 밖에 조종을 못 하지. 귀족은 계산 능력만 아주 뛰어나서 암산만으로 전투기를 몰 수 있다.
내가 투덜댄다.
<밀지 마!>
<이거 원래 1인승이야. 좀 참아>
<근데 왜 지름이 151m나 되는 거야?>
<거의 다 연료 탱크랑 축전지랑 레이저 발사 장치랑 미사일이거든. 전투기 조종 좀 해라, 렉슬리>
<렉슬리는 전투기 조종술 따위 안 키워. 조종이나 잘 해>
자르딘이 어깨를 으쓱댄다. 작은 동작인데도 더럽게 커 보이네.
210cm가 넘는 자르딘은 확실히 거구다. 나도 덩치가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지만 나보다도 5cm나 더 크고 몸무게는 17kg 더 무겁다. 그러면서도 균형이 딱 맞는 몸매다. 자르딘은 넘치는 생명력을 앳띈 얼굴부터 진홍빛 부츠에 이르기까지 뻗치고 있다. 가끔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다. 용모만 보면 자르딘은 가장 멋진 세르딘이라고 할 만하다.
이곳엔 무한제국 외곽답게 초은하단 생성 과정에서 빠져버린 성간 가스가 꽤 많이 흩어져 있다. 그래 봐야 너무 옅어서 에너지로 쓰려면 수지가 안 맞아서 안 쓰지만.
나랑 자르딘은 텐타의 거죽으로 향한다. 이런 깡촌 태양계에도 용케 숨어 있던 마인에 따르면 텐타 땅 밑엔 그럭저럭 사는 도시가 몇 군데 있다고 한다. 슬슬 불안하다. 보물이 있을까?
전투기는 입자 가속식 로켓을 통해 중력과 어우러지면서 내려앉는다. 이곳은 지대가 꽤 낮아서 산들이랑 크레이터들이 높이 멀리 보인다. 역사를 들춰보면 이런 후진 행성을 개척할 때엔 낮은 곳에다 기지를 세웠다.
문을 연다.
자외선 차단막이 내려가면서 시야가 흐려진다. 거추장스런 우주복. 질량은 고작 15kg이지만 귀찮아 죽겠다.
자르딘은 방사능 탐지기랑 금속 탐지기로 가까스로 입구를 찾아내곤 뚜껑을 열었다. 별로 무거운 뚜껑은 아니었다. 고작 300kg이었으니까. 텐타의 별 볼 일 없는 중력 가속도를 감안하면 있으나마나 한 무게다.
회색빛 칙칙한 복도가 펼쳐져 있다. 공기가 빠져나가기 전에 자르딘이 잽싸게 닫는다. 앞쪽에 문이 있다. 자르딘이 재빨리 연다.
<너 좀도둑 출신이니? 진짜 잘 연다>
<가끔 하고 다녔지. 넌 아니었냐? 마법사로 굴러먹으려면 별 짓 다 해야 살텐데>
자르딘의 옆구리를 살짝 찌르면서 미소짓는다.
<당연한 걸 왜 묻니?>
<으, 제발 그렇게 굴지 마! 꼭 둘 이만 남으면 그러더라. 평소엔 뭐 저런 게 다 있나 하는 생각이 들게 굴면서>
<자르딘!>
자르딘이 종종걸음으로 앞서 나간다. 진짜 귀여워. 이런 맛에 저 기사를 데리고 다니는 지도 모르겠다. 자르딘, 너랑 계속 노닥거릴 수는 없다는 건 잘 알지?
나는 금새 평소의 차갑고 당당한 얼굴로 돌아가서 자르딘이 다른 문을 여는 걸 지켜본다.
쓸데없이 문만 많은 곳이다. 블라스터로 다 부숴버려? 구조도 제대로 모르면서 그런 짓을 할 수는 없다. 깔려 죽기는 싫으니까. 세르딘이 살기는 사는 곳인가?
슬슬 지루해진다. 자르딘도 지루했는 지 이번 문은 발로 대충 차서 열어버린다. 저런 짓은 죽는 지름길이야!
<야, 자르... 엇!>
갑자기 웬 쭈그렁바가지 같은 것들이 떼거지로 몰려온다. 다들 자그마한 막대기 같은 걸 들고 몸을 떨어 대고 있다. 자르딘이 그것들한테 얻어맞으면서 내 쪽으로 다가든다.
<자르딘, 이 멍청한 놈. 당장 죽여>
블라스터를 빼내어 진동을 최소로 맞춘 다음 갈겨댄다. 펄스 레이저의 진동을 세게 했다가는 복도가 무너질 지도 모른다.
피가 물보라처럼 뒤쪽으로 번져 나간다. 내 동공이 크게 열린다. 역시 직접 피를 보는 게 가장 좋단 말야. 몇 방울이라도 튀면 좋겠다. 고삐가 서서히 풀리는 가학적 욕망이 느껴진다. 이런 감정은 전투할 때 도움이 안 되므로 추스르려 애쓴다.
자르딘이 내 허리를 붙잡고 몸을 날린다. 천장이랑 바닥이 여러 차례 뒤엉킨다. 블라스터 구멍이 여러 곳에 난다. 블라스터 손잡이로 자르딘의 뒷덜미를 세차게 내리친다.
<뭐하는 거야?!>
<저들은 세르딘이야. 함부로 쏠 필요는 없잖아>
<저런 괴물들이?>
그들은 노화 현상의 포로들이었다.
세르딘은 두 개체가 서로 몸을 젤리 상태로 녹여 융합시킨 다음 다시 떨어지면 체세포에 활력을 줄 수가 있다. 이때 다시 태어난 체세포가 가지게 되는 활력은 양쪽 체세포가 지닌 활력의 중간 쯤이다. 즉 젊은 세르딘이랑 늙은 세르딘이 섞이면 중늙은이 세르딘 둘이 나오는 것이다. 활력을 되살리는 이 의식을 갱생이라고 부른다. 인구가 많다면 태어나는 이들도 많아서 젊은 활력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이 태양계는 워낙 외따른 곳이어서 인구가 아주 적다. 영주란 세르딘도 이 태양계를 내팽개쳐 버리는 바람에 다른 장원으로부터 공급되는 젊은 인구도 거의 없다. 그러니 생산력을 유지하려면 늙은 세르딘들은 유배되어야 한다. 텐타는 바로 그 유배지였던 것이다. 이해하기 어려웠다. 세르딘은 가까운 이들끼리는 서로 아주 잘 돕는 종족인데 텐타 같은 유배지가 생기다니.
진짜 말세다.
내가 몇 명 죽인 건 정중한 사과랑 건전지 몇 개로 해결되었다. 이렇게 라도 해결을 질 필요가 있었다. 안 그러면 더 협조를 안 할 테니까. 장비가 빈약한데다 언제 고장날 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그럴 필요가 있다.
그들은 나랑 자르딘의 젊은 몸을 탐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갱생 의식이라도 치러 달라는 모양인데 내가 미쳤냐.
복도 어디쯤에 사무실을 차려 놓고 나드낫셀 호에서 마인들 몇 명을 수송기로 불러다가 심부름시키고 있는 판인데 자르딘이 들어온다.
<웬 세르딘이 우리를 좀 보고 싶다는데>
<돌려보네>
<신관이었데>
나는 벌떡 일어나서 자르딘 얼굴에 얼굴을 가깝게 들이댄다. 자르딘이 잠깐 놀란다.
<이 딴 촌구석에?>
<그럴 수도 있잖아>
<그래, 맞아. 신관이라면 도움이 될지도 몰라>
나는 내가 신관이라고 속였다. 마법사나 신관이나 하는 역할은 거의 같으니까 별로 크게 속인 건 아니다.
자르딘이 문을 열고 나가더니 작달막한 늙은 세르딘을 데리고 온다.
지독하게 많은 주름이 패여 있는 얼굴이다. 눈매는 아직 날카로웠지만 노리끼리했다. 이런 별에는 희생양이 오기 마련이다. 너무 착하거나 너무 약하거나 너무 강하거나. 나도 같은 처지였다면 이런 취급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상대가 신관이었다는 것이 내게 어떤 라이벌 의식을 느끼게 하면서, 상황에 나를 집어넣을 수 있게 한 것이다. 이래저래 슬픈 별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지만 화가 치민다. 분노, 절망, 슬픔 같은 걸 느꼈을 거다.
나는 동정의 눈길을 보내지 않으면서 묻는다.
<신관이었다고요? 이름이 뭡니까?>
젊을 때엔 꽤 예뻤을 것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겉보기 형질이 여성형로군 그래.
<렉슬리, 나는 다이스케린이라고 해요>
<다이스케린,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무한제국 밖에도 미리내가 있다는 걸 알아냈어요>
숨이 턱 막혀 온다. 이건 대단한 발견이야. 지난 77억 년 동안 우주엔 무한제국 밖에 없다고 믿어 왔다. 수천 만 개 밖에 안 되는 미리내가 우주의 전부라고 믿었던 것이다. 무한제국은 우주의 의미 있는 부분들을 모두 세르딘이 차지했다는 오만에서 나온 이름이다. 나름껏 강력한 근거에 싸여 있는 이름이기도 했다. 무한제국이 차지한 곳 밖에 다른 미리내는 그림자도 안 보였으니까. 새로 발견된 미리내가 있다.
그곳엔 도대체 어떤 보물들이 숨겨져 있을까. 투자자들이 많은 에너지를 주겠는 걸. 또 다른 정복이 이어질 것이다. 그곳에서 나, 렉슬리는 새로운 마왕으로 등극할 것이다.
그러려면 투자자들에게 흔들어 줄 증거가 있어야 한다. 나는 속으로는 벌써 반쯤은 믿었으면서 비꼬는 투로 말한다.
<그걸 어떻게 믿지요?>
<따라오세요. 낡은 전파 망원경이 있습니다>
텐타는 대기가 없는 행성이니까 전파 망원경 짓기엔 좋다.
나는 마인들을 보고 말한다.
<너희는 여기 남아서 조사를 계속해>
저 마인들은 수사들이라고 속였다. 신관 체계랑 마법사 체계는 너무 구조가 비슷해서 속여먹기도 아주 쉽다.
3
외진 복도로 좀 멀리 나오자 난 다이스케린에게 물었다.
<당신 전공이 뭐였나요?>
<천문학이었죠>
내 천문학 지식은 항해학에 필요한 만큼뿐이다. 아니지. 내가 아는 그 지식마저 천문학이라기보다는 천체 물리학이다. 그나마도 다른 모든 학문들처럼 옛날에 있던 것이 끊임없이 퇴보해 가는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것뿐이다. 신관들이 학문 체계의 대부분을 독점한 체 풀어 주지 않는다. 과학 기술은 잘 키우지 않으면 사라지기 마련이다. 마법사들은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몇몇 마법사들이 안간힘을 쓴다고 세상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학문 따위엔 신경도 안 쓰는 기사들, 학문이 낡아 가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쥐고만 있으면서 자신들이 학문들을 지킨다고 여기는 신관들, 모든 걸 때려부수려는 해적들 때문에 무한제국은 10억 년 동안 퇴보를 거듭한 것이다. 사회가 진보하는 데엔 500만 년으로 충분했다지.
닫힌 사회에서 모든 건 뒷걸음질치고 부서져 간다. 새삼스레 끓어오르는 신관을 향한 증오를 삭이며 난 다이스케린에게 묻는다.
<그렇게 멀리엔 암흑물질 밖에 없다고 경전에 써 있지 않나요?>
<경전에 진리만 쓰인 건 아니죠>
오호. 난 자르딘을 보며 미소띈다. 신관에게서 이런 말을 듣게 되다니.
<신성 모독을! 위대한 무한제국의 신을 모독하다니. 화형 당하고 싶은 가 보군요>
이 늙은이, 내가 마법사인 걸 알면 무슨 표정을 지을까. 게다가 나는 마법사들 가운데서도 골수 경전 반대파에 속해 있는데.
<난 죽음을 눈앞에 둔 늙은 몸이에요. 또 자연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게 우주의 신께 더욱 큰 찬미를 바치는 것이라 여겨요>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못 하는 말이지.
<외따른 곳에서 만난 신관 동료를 구경거리로 만들고 싶지는 않아요>
<계속 말씀드려도 되나요?>
<계속하세요>
갑자기 다이스케린이 쿨럭거리더니 복도에 스며들듯 주저앉는다.
<왜 그래요?>
<몸이, 몸이>
살갗에 손을 대보니 겁이 날 정도로 차갑고 심하게 떨리고 있다. 빌어먹을. 아직 너는 죽으면 안 돼! 자르딘이 다이스케린을 끌어안고 사무실로 가려고 몸을 튼다.
나는 자르딘의 어깨를 붙잡았다. 자르딘이 돌아선다.
<자르딘>
<왜?>
<멈춰. 니가 여기서 갱생 의식을 해 줘>
<니가 해도 되잖아?>
<나나 너나 젊고 팔팔하긴 하지. 그러나 니가 지금 안고 있지?>
<좋아. 옆에서 잘 지켜 줘>
갱생하는 동안에 무방비 상태가 된다. 내가 블라스터를 꺼내 들자 그제야 안심한 자르딘이 다이스케린을 껴안고 온몸을 밀착시킨다.
자르딘이랑 다이스케린에게서 투명한 젤리가 나와서 두 세르딘을 오롯이 덮어버린다. 그 젤리 안에서 둘이 녹아들어 핏덩이가 되어 몇 번 꿈틀거리더니 다시 형상을 갖춰 간다.
꽤 오랜 과정이다.
난 하품을 하면서 둘이 섞어 드는 걸 지켜본다. 페로몬 향내가 가득차오른다. 세르딘은 페로몬이 무척 발달되어 있다. 갱생하는 동안 둘레에 페로몬을 풍겨 세르딘의 공격성을 떨어뜨린다.
잠깐 졸았나 보다. 자르딘이 내 어깨를 가볍게 친다.
자르딘은 갱생하기 전이나 지금이나 거의 똑같다. 기사들 가운데서는 생명력이 넘쳐 나서 몇 번 갱생해도 끄덕 없는 것들이 있다는데 자르딘이 바로 그들 가운데 하나였던 모양이다. 다이스케린은 젊어져 있겠다.
<다이스케린 양을 소개하겠어!>
그래. 잘도.... 내 입이 쩍 벌어진다. 너무 예쁘다. 다이스케린은 물에 젖어 든 투명한 요정처럼 변해 있었다. 살랑거리는 검은 머리카락은 잘 다듬은 공예품을 떠올리게 한다. 키도 보통 보다 알맞게 커서 197cm다.
자르딘이 피곤하기는 했는지 배설을 하곤 그걸 받아먹는다. 세르딘은 에너지 효율이 굉장히 높은 몸을 지녔다. 배설물을 거듭하여 먹음으로서 이를 뒷받침한다. 그래서일까, 세르딘에게서는 몇몇 준지성체들에게서 발견되는 생식기 혐오를 조금도 볼 수 없다. 또 하나 세르딘의 배설물은 영양가가 높고 맛도 좋은 편이다. 내가 보기엔 진짜 멋진 속성이다.
다이스케린이 활기 넘치는 크고 높은 목소리로 말한다.
<이제 곧 전파 망원대 통제실로 갈 수 있어요>
고대의 전파 망원경이라면 암흑물질 속에 싸인 미지의 미리내라도 볼 수 있을 지 모른다. 빛은 많은 대역을 가지고 있으니까.
몇가지 기계 장치만이 놓여 있는 썰렁한 방이다.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어서 한적한 느낌을 더한다.
다이스케린이 차 만드는 기계에 재료를 집어넣는다. 모든 기계가 다 이렇게 되어 있다. 재료랑 에너지만 공급해 주면 지네가 알아서 제품 만들고 자가 수리까지 한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점점 낡아 가고 망가져가는데다 그 기계들을 개선할 과학 기술이 잊혀져 간다는 사실이다. 간단한 기계가 가끔 만들어지곤 하지만 점점 퇴보해 간다. 마법사들만 안간힘을 쓰고 있다.
다이스케린이 차를 나랑 자르딘에게 건넨다.
<이제 곧 늙은이들이 몰려와서 갱생해 달라고 조르겠군요. 그러면 곧 다시 쭈그러들겠죠. 그 전에 제 지식을 두 분 앞에 풀어놓겠어요>
얼마든지 환영이지. 해적, 마약상, 세르딘 고기상, 노예상, 밀매업자, 용병, 보물 사냥꾼, 모험가, 마법사, 암흑 영주 따위로 이루어진 방대한 암시장이 이 발견을 통해 더욱 더 커다랗게 되면 빛의 권력을 무너뜨릴 수 있을 지 모른다. 거대 관료 체제를 발판 삼아 공개 처형에 공개 고문을 일삼는 빛의 권력 따위는 망해야 싸다. 암시장은 모두 빛의 권력에서 벗어나고자 한 이들로 채워져 있지 않은가.
차 맛은 무척 좋다. 다이스케린이 말한다.
<저는 스승으로부터 자잘한 지식들을 물려받았지요.
세르딘은 작은 행성을 넘어 끝없이 넓어져 갔어요.
그러나 통신은 결코 쉽지 않았어요.
먼 거리 통신을 할 때마다 잠깐씩 웜홀을 뚫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요. 과학의 전성기였던 그때 과학자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지속적인 웜홀을 만들 수는 없었어요. 웜홀을 만드는 건 방대한 수식과 막대한 에너지를 동원해야만 하는 일이었어요, 그때에도요.
빛을 통한 통신은 점차 쓸모가 없어져 갔어요. 사이버네틱스는 급격히 물러났지요. 이에 편승해 강제적 기억 바꿔치기와 같은 신종 범죄도 더불어 사라져갔어요.
다시금 낡은 방식인 우편 통신이 힘을 얻었어요. 우주선을 탄 우편 배달원들은 강력한 권력 체제에 편입되었죠.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기 어려워진 세르딘들은 소문과 선동에 점점 더욱 더 의지하게 되었어요. 우주 공학이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그렇게 되어 갔어요.
차별과 격차가 다시금 거세게 고개를 들었지요. 미리내들이 정복되면 정복될수록 권력은 거대해져만 갔어요.
두 세르딘이 서로 싸울 때 양쪽 모두 아는 세르딘들이 많다면 둘을 말리겠죠. 그러나 어느 한쪽만 아는 세르딘들이 많다면 패싸움이 될 겁니다. 이를 적게 하려면 중앙 집권 권력이 몇몇 귀족만을 중시하고 백성들을 속이면서 조직화된 종교의 힘으로 사회를 단속해야만 합니다.
민주주의가 한때 사라지게 만든 중앙 집권이 되돌아온 것이죠. 의사 소통이 어려워진 탓에 지켜 내기 어려워진 사회를 폭력으로라도 지켜 내려 했던 선악이 뒤섞인 정치 체제였지요.
새로운 상황은 세르딘을 초광속 우주선과 더불어 수렴 진화하도록 몰아갔던 거지요.
마침내 오늘날 무한제국이라 불리는 초은하단이 세르딘에게 접수되었을 때엔 슬픈 권력은 극한에 이르게 되었지요. 워프 초광속 우주선은 무한제국의 핵이자 꽃이자 악이자 희망이 되어버렸어요>
하품이 나올 뻔한 걸 억지로 참았다.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다 아는 이야기니까. 언 듯 보기엔 서로 이어져 있지 않을 것 같은 것들 사이에 끈이 있다는 걸 밝혀내는 게 과학이라는 걸 제대로 아는 마법사들이 그런 걸 모를 리가 없잖나. 이 여신관 스승이 쫒겨난 마법사였나? 나는 짐짓 놀란 척하며 추임새를 넣어 주고는 다이스케린이 말을 계속하도록 했다.
<처음에는 보다 민주적이던 무한제국은 닫혀버렸고 썩어 갔어요. 권력의 기생충인 전체주의의 승리로 생산성은 내려가고 기술들은 퇴보했으며 문화도 뒷걸음질쳤죠. 고인 물은 썩으니까요.
가까운 곳에서나마 돌아가던 광통신 기술마저 차츰 사라져 갔지요. 결국 곳곳에서 영역 자치권을 확보하려는 반란이 벌어졌고 무한제국은 사실상 무너져버렸죠.
교주가 이름은 황제지만 군주들의 힘이 보다 강하죠. 군주들의 난폭한 정치 때문에 암시장이 생겼죠. 암시장은 군주들의 체제를 모방한 체 굴러갔죠. 거울 같이요. 기사 - 신관이랑 해적 - 마법사는 똑같은 거예요. 조종사 - 정비사죠>
계속 아는 이야기만 할건가? 이거야 원. 그나마 내가 자질구레한 곳까지 더 자세히 아는 이야기를 듣자니 신물나는군. 나는 말한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이야기군요, 개혁자 신관. 나도 그런 이야기는 어렴풋이 알지만 이 상황에서 그리 중요하게 여겨지지는 않는군요. 그 미리내는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이 사진들을 보세요>
나는 내 몸이 부들거리는 걸 억제할 수 없었다. 그 사진은 그 하나 하나가 무한제국이랑 비등한 규모의 초은하단들이 서로 얽혀 두툼한 벽 같은 걸 만들고 있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77억 광년 너머에 그것들이 있다.
<조작한 거 아닙니까?>
<무한제국이 초팽창으로 생겨난 건 77억 년 전이에요. 77억 광년 거리에 있는 빛은 지금쯤에야 올 수가 있지요. 이 초은하단들의 벽은 팽창력이 그리 강하지 않는 영역에 있어요. 계산해 본 결과 무한제국의 내부 팽창률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새로 발견된 영역은 무한제국과는 다른 초팽창을 일으킨 병행 우주에요. 물리적 특성이 매우 비슷하고 같은 빅 뱅에서 나온 거품으로부터 진화했기에 시공간적으로 섞일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런 걸 다 어떻게 알아낸 거지요?>
<경전에도 나오지 않나요? 생명이 살 수 있는 우주는 팽창하는 힘과 수축하는 힘이 균형을 아주 잘 잡은, 극히 적은 확률의 우주뿐이죠. 팽창하는 힘이랑 수축하는 힘은 밀도에 좌우되며 밀도를 보면 질량이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의 경전은 무한제국 둘레에 빛이 없었기 때문에 밖은 암흑물질뿐일 거라고 단정했지요. 그건 당연했어요. 당시의 관측 값들은 그렇게 밖에 결론지을 수가 없는 것이었거든요. 경전이 성립된 건 8억 년 전이에요. 그때의 과학 지식에 걸맞게 실증적으로 잘 편집되어 있지요>
저 여성형은 내가 자기 같은 타입의 신관일 거라고 약간이라도 믿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지원을 해줘서 77억 광년 거리에 있는 우주의 벽에 가게 될 거라고 믿는 건가. 다이스케린이 말한다.
<무한제국의 팽창률은 상당한 비등방성을 가지고 있지요. 하지만 저 우주의 벽은 매우 큰 등방성을 가지고 있을 거예요. 그런 곳에서라면 엄청나게 많은 생명들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겁니다.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
자르딘이 말한다.
<렉슬리, 잘 됐다. 77억 광년이라면 꽤 힘들긴 하겠지만 이론상 못 가는 거리는 아니잖아. 초광속 우주선을 좀더 연구해서 성능을 보강하면 불가능하지 않을 거야>
매우 힘든 일이기는 하지.
<다이스케린, 혹시 당신말고 이 일을 또 아는 세르딘이 있나요>
<없어요>
<그러면 나랑 당장 나드낫셀 호로 갑시다. 당신은 이런 촌구석에 있으면 안 되요>
안 되고 말고. 다이스케린, 너는 내 손에 죽어야 해.
다이스케린이 모든 자료를 챙긴다. 수고를 덜 수 있겠군. 저 자료들을 검토해 보면 건질 게 있을 지도 모른다.
<난 사실 마법사예요>
<그래요? 같이 일하기 더 쉬울 수도 있겠네요>
4
지금 나드낫셀 호는 양로원이 되어버렸다. 자르딘이 눈에 콩깍지가 씌웠는지 늙은 세르딘들을 몽땅 끌고 온 것이다. 갱생 의식은 금지했다. 승무원들이 적기 때문이다. 자르딘에게는 알맞은 암흑 영주에게 이들 늙은이들을 맡기겠다고 했다.
신앙이 폭정의 도구가 되면서 많은 세르딘들은 신이 아닌 악마를 숭배하는 감정을 품기 시작했다. 악마 숭배의 사도가 마법사라면 암흑 영주는 악마 숭배자들에게 영역을 제공해 주는 존재들이다. 암흑 영주들의 영역은 영주들 영역 보다 좀더 자유롭지만 좀더 사악하다. 자유와 악이 함께 갈 수밖에 없는 미친 사회다. 저 늙은이들이 견뎌 낼 수 있으려나 몰라.
그건 내 알 바 아니다.
암흑 영주가 전체 영주의 8%를, 악마 숭배자가 모든 세르딘의 45%를 차지하도록 만든 무한제국의 역겨운 지배에 책임이 있는 거니까.
가증스런 무한제국, 진공 속에 떠 있는 한 뭉치 미리내들의 버풀이여. 차라리 비웃어 주겠다. 모든 빛의 권력 앞에 당당히 공적 제 1호로 설 수 있을 때까지 죽을 수는 없어.
그런데 이 암흑 영주국도 딴 은하단에 이사 갈 작정인가? 중력 망을 열나게 치는 걸 보니 뻔하다.
자르딘은 지금 다이스케린을 사랑하고 있다. 세르딘의 뇌는 사랑하는 감정을 죽을 때까지 유지시킨다. 상대의 절대적인 무관심이나 격렬한 증오만이 그 감정을 뒤집을 수 있다. 그러나 둘이 하는 짓으로 볼 때 그런 걸 바라는 건 무리일 것 같다.
둘은 아이까지 만들었다.
세르딘이 가진 16개의 성은 ABO식 혈액형이랑 엇비슷하게 조합 방식으로 유전된다. 겉보기 형질 남성형의 정자랑 겉보기 형질 여성형의 난자가 안개처럼 만나게 되면 수정란이 생긴다. 수정란은 1달 동안 여성형에게 있으면서 염색체 통합을 거친 다음 남성형에게 넘어간다. 남성형은 다시 뱃속에서 2달 동안 수정란을 키우고 다시 여성형에게 넘긴다. 여성형의 자궁에서 1달간 다시 통합되고 자라서 씨앗이 된 수정란은 분홍빛으로 매끄럽고 탄력 있으면서도 흙다운 슬흙에 심궈진다. 0.5kg으로 하나에서 다섯 까지 나오는 씨앗은 슬흙에서 영양액을 담뿍 받고 자라 식물 형태가 되었다가 세르딘이 된다. 이때 벗겨진 식물 껍질이 슬흙을 조금씩 변화시킨다. 슬흙은 미생물 덩어리로 세르딘은 이것을 어디를 가든지 가지고 다니며 번식시킨다.
겉보기 형질은 불규칙하게 전환되며 그 정확한 원리는 전승 과정에서 누락되었다. 관찰 기록으로 미루어보건데 겉보기 형질의 전환은 각 영역의 특징과 연관이 있는 것 같다. 즉 영역에 따라 겉보기 형질이 평생 가기도 하고 자주 바뀌기도 한다는 뜻이다.
나는 이런 속성이 매우 훌륭한 것이라고 여긴다. 유전자들끼리의 충돌 대신 화합을 지향한 것이기 때문이다. 유전자 조작의 흔적이 있는 것이야 상관없는 일이다. 보다 이성적인 선택이랄까.
다이스케린, 니 아이는 나랑 자르딘이 잘 키울 테니 저승으로 가는 길이 후회스럽지는 않을 거야. 죽인 다음에 하는 말인가. 나는 다이스케린이 불쾌해 견딜 수가 없다. 자르딘을 꼬셔서 아이까지 만드는 방법으로 스스로에게 집착하게 만들겠다는 거로군. 그러면 자기가 지켜질 수 있을 거라 여기는 모양이지.
퍽!
자르딘은 뉴트로늄 바스타드로 이번에도 상대를 쓰러뜨린다. 이번에도 저 기사가 이겼다. 그 덕분에 내기에서 이겨서 에너지는 많이 들어오지만 마음이 편치는 않다. 암흑 영주에게 노인들을 넘기는 대신 도박판을 벌여 주기로 했는데, 대가인 동시에 자르딘을 죽이기 위한 술책이었다. 그런데 보기 좋게 실패해버린 거다. 자르딘이 저렇게 검술 실력이 좋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나드낫셀 호 한 귀퉁이에 마련된 검투장 객석에서 나오면서 나는 보다 실질적인 작전을 마련해야겠다고 여겼다.
먼저 암시장에서 반물질 폭탄을 더 사들였다.
<자르딘>
<응?>
<다이스케린은 진짜 좋겠어. 요즘도 괜찮니?>
<물론이지!>
<다이스케린이 좋아할 만한 일이 생겼어>
<드디어 우주의 벽으로 갈 만한 에너지가 모인 모양이지>
<그렇게 많이 모일 리야 있니. 어쨌든 많이 모였어. 다 니가 허구헌날 칼싸움에서 이긴 덕이지 뭐. 그런 뜻에서>
나는 엄청나게 비싼 술이 담긴 술병을 통째로 자르딘에게 건넨다. 한 잔 마시고 입안에서 음미하는 그런 술이다. 그러나 통째로. 비싼 만큼 독한 술을 말이다.
술은 전체주의 사회에 만연되는 스트레스를 지속시키기 위한 기제 가운데 하나지. 어릴 때 많이 불행을 겪을수록 술을 좋아하게 되지. 술 가운데서도 불행의 권위를 인정받은 비싼 술을 아낌없이 자르딘에게 건넨다.
<벌컥 벌컥 마셔. 멋지고 강인한 기사에게 홀짝거리는 모양새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아>
<고마워, 렉슬리>
얼마못가 자르딘은 골아떨어진다. 나는 다이스케린에게로 향한다. 가끔 나드낫셀 호 안에서는 살인, 강도, 도둑질이 일어나곤 한다. 아무리 단속해도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게다가 나도 가끔씩 써먹는 일이니까 아예 없으면 오히려 손해다. 희생양으로 삼을 만한 마인은 이미 물색해 두었다.
문을 두드린다.
열리지 않는다. 나는 다시 두드린다.
문이 활짝 열린다.
다이스케린의 눈부신 얼굴에 블라스터를 들이댄다.
<억!>
벽이 다가온다. 세차게 부딪쳤지만 금새 일어나서는 문 쪽을 잡아먹을 듯 노려본다. 자르딘이다. 술을 제대로 먹지 않은 모양이다. 그리고는 맞장구치듯이 드러누운 것뿐이었군 그래.
자르딘이 바스타드 소드를 든 체 말한다.
<니가 장난치는 줄만 알았어. 그런데 나를 배신해?!>
그딴 말을 하는 걸 보니 아직 자르딘은 어리둥절해 하고 있다. 나는 몸을 날려 다이스케린을 붙잡고 귀에 블라스터를 들이댄다. 먼저 자르딘부터 해치워야 한다.
배에 격한 통증이 온다.
다이스케린이 팔꿈치로 내리친 것이다.
그 작은 틈새를 뚫고 자르딘이 덤벼 들어온다. 나는 다이스케린을 벽에 집어던지고 블라스터를 쏜다.
레이저는 보는 순간 얻어맞는 병기다. 즉 원칙상 피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자르딘은 바스타드로 그걸 막았다. 블라스터가 움직이는 궤적을 계속 따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대단한 놈이다. 왜 하필 저딴 걸 동업자로 만들었담.
블라스터 충전기가 어느새 다 달았다.
나는 복도 쪽으로 움직이려 했지만 자꾸만 벽 쪽으로 밀린다.
신관이나 마법사가 되려면 몸속에서 나오는 에너지를 물리적인 현상으로 바꾸는 돌연변이 능력이 있어야만 한다. 그 능력이 없으면 수사나 마인으로 그치고 많은 지식을 받지도 못한다. 강력한 무기를 사용할 수 있어야만 지배층이 될 수 있다. 내 손바닥에서 산소랑 수소가 번지면서 불길이 거세게 치솟는다. 웬만하면 안 쓰려 했는데.
거센 파란 불길이 방안을 가득 채우면서 밀려간다. 이건 바스타드로 막을 수 없을 거다.
자르딘이 다이스케린에게로 달려든다.
다이스케린이 얼음벽을 만들어 자르딘을 불길로부터 지킨다. 하지만 너희는 이미 진 거다. 내 마법이 다이스케린보다 훨씬 강하기 때문이다. 훨씬 더 오래 쓸 수조차 있다.
등뒤에서 권위의 상징인 로드를 꺼내 든다. 로드는 나무 가지를 자르기만 해도 얻을 수 있는 무기이자 도구다. 세르딘이 파괴적 문화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는 신호이자 세르딘이 우주를 향해 설 수 있는 기틀을 잡기 시작했다는 상징이다. 때문에 로드는 세르딘의 권능의 상징이 된다.
로드에 붙은 증폭 장치가 푸르스름한 빛을 내며 내 마력을 늘려 준다.
확실하게 밟아버려야 한다.
<다이스케린, 너는 내 존재 기반을 부정하고자 했다. 무한제국은 세르딘의 사회생물학적 특징과 초은하단이라는 폐쇄성 등이 낳을 수 있는 거의 으뜸가는 구조다. 어떻게든 다른 세르딘이랑 대화하고자 하는 세르딘의 마음은 초은하단이랑 어우러져 독특하게 균형 잡힌 세계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너의 새로운 발견으로 77억 광년 너머로 가는 길이 열렸다. 빛이 여기까지 오는 77억 년 동안 그 우주랑 우리 우주는 다시 나뉘어지고 둘 사이엔 사상의 지평선이 가로놓이게 되었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새로운 발견만으로도 경전의 권위는 흔들린다.
경전의 권위가 흔들리면 그 혼돈스러운 궤적은 영향력을 키워 결국 지금의 체제를 뒤흔들 것이다. 상황이 빚어낼 수밖에 없는 도덕과 생활 양식은 상황이 변하면 바뀐다.
체제가 뒤흔들리면 과학 기술은 발전하고 무한제국은 더욱 무시무시한 존재가 될 거야. 균형은 깨어져 신관은 강대해지고 마법사는 있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만약 침략이라도 당한다면, 보다 덜 사회 체제에 적응되어 있는 마법사들은 침략자들과 침략자를 옹호하는 신 기득권층에 걸려들어 참혹하게 유린당할 거야.
잘하면 다시 민주주의가 태어날 수도 있는 사회를 왜 파쇼로 몰고 가려 하나?!>
다이스케린이 안간힘을 쓰며 외친다.
아마 꽤 힘들 거다.
<너는 위험한 가설들을 세우고 있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세상이 소중한 거 아냐?>
<그래. 그거 좋지. 내가 선택한 세상을 알려주지.
많은 반물질 폭탄을 모았다. 그것들을 우주의 벽과 무한제국 사이에 터뜨리면 무한제국은 팽창률이 심한 쪽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우주의 벽과 무한제국 사이의 팽창 속도는 광속을 넘을 가능성이 있어. 그 가능성을 깨우고 말겠다. 그러면 두 우주는 확실하게 갈라지겠지. 아무리 저 끝으로 가도 그대로 되돌아오게 될 것이다>
자르딘이 외친다.
<너, 로메탈이지!>
내 행동이 잠깐 느려진다.
안 돼.
자르딘이 바스타드를 풍차처럼 휘저으며 불길을 뚫고오더니 발길질로 나를 날려버린다.
다음 순간 주먹이 내 얼굴을 어지럽게 때린다. 나는 기절한다.
5
그들은 나를 냉동시킬 작정이다. 나는 로메탈이기 때문에 액체 질소 안에 그냥 넣어버리면 될 것이다. 꽁꽁 묶인데다 전자기 교란 때문에 내부 핵융합로를 돌릴 수도 없고 게다가 투명 세라믹스 통 안이다.
끝장이군.
<왜 날 죽이지 않겠다는 거지?>
자르딘이 말한다.
<마지막 관용이랄까? 나드낫셀 호를 빼앗은 처지에 목숨까지 빼앗기는 좀 뭐해서 말야>
<궁금한 게 하나 있어. 내가 로메탈인 걸 어떻게 알았니?>
<로메탈은 사이보그지. 경전을 보면 기계는 결코 세르딘의 역할을 할 수 없다는 말이 있어. 또 기계엔 영혼이 없다는 말도 있지. 경전은 결코 로메탈을 인정하지 않아. 니가 마법사가 된 것도 로메탈이기 때문이었겠지. 신관을 싫어했던 것도 그렇고. 그렇다고 모든 마법사가 로메탈인 건 결코 아니지만 말야.
물론 이런 건 다이스케린에게 최근에 들은 거야. 다이스케린은 너에게 영혼이 없다고 여기지는 않아. 세르딘에게 있다면 너에게도 있고 없다면 너에게도 없겠지.
다이스케린은 니가 상처받은 영혼이라고 했어. 그렇지 않고서야 기묘한 박애주의를 지닌 혁명가가 되지는 않았겠지. 박애주의는 한 지성체가 모든 걸 똑같이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모순 덩어리가 돼.
내가 그때 알아낼 수 있던 건 너무 오래 불길을 뿜어댓기 때문이었어. 로메탈은 몸 안에 작은 핵융합로를 가지고 있어서 훨씬 더 많은 마법을 쓸 수 있지만 세르딘은 생화학 반응으로 마법을 쓰기 때문에 훨씬 약해. 그 덕분에 한 번 쓰면 살이 확 빠지는 것도 치명적인 약점이지. 넌 내 통찰력을 아무래도 너무 얕본 것 같에. 한 번도 갱생을 안 하면서 나를 속일 수 있을 거라고 여겼어? 그건 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세르딘의 모든 걸 교묘하게 알려고 하던 건 또 어떻고.
그때까지 수상쩍었던 게 다 풀리더군.
니가 걱정한 건 마법사의 소멸이 아니었어. 무한제국이 커지면 암시장이 작아질 리가 없어. 커지면 커졌지.
너는 로메탈을 걱정했어. 과학이 발달하면 세르딘은 초지성이 될지도 모르고 로메탈의 정체성은 없어지고 말겠지. 세르딘이 그렇게 안 되더라도 로메탈은 격렬한 탄압을 받게 될 거야. 니가 먼저 가서 자리를 잡더라도 결국 무한제국이 그 빛을 보게 될 것이고 그러면 세력이 훨씬 큰 세르딘이 더 큰 자리를 잡게 될 건 뻔한 일이니까.
너는 세르딘을 좋아했지만 두려워했어. 그렇지 않았다면 열심히 모방하려고 하지도 않았겠지. 단지 넌 로메탈이 좀더 세력이 커진 다음에 77억 광년 너머로 가기를 바랬을 뿐이야. 닫힌 세상에서 로메탈은 진화할 수 없지만 열린 세상은 공포일 뿐이라 이거지.
렉슬리, 너를 죽이지는 않겠어. 우리는 무한제국을 개혁할 거야. 좀더 많은 에너지를 쓸 수 있다면, 직접 민주주의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매우 크다면, 매우 비경제적인 웜홀 통신법이 받아들여질 지도 모를 일이지. 너를 선각자로 기억되게 해줄게.
그리고 널 깨울 준비가 되면 깨울게. 세상이 너에게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줄 수 있을 정도로 개선되면>
낯간지러운 소리만 하고는 액체 질소를 들이붓는다. 망할 세르딘, 머리카락만 빼고는 미끈하게 쭉쭉빵빵이라는 까닭으로 잠깐 좋아했던 것들. 눈이 삐었지.
내 입 안 가득히 액체 질소가 스며온다. 목젖을 타고 내려가는 느낌이 좋지 않다. 의식이 꺼질 때까지 센서를 끄지 않으리라.
증오심과 복수심이 힘있게 움터간다. 그것에 찜찜하게 엉켜 부조화를 이루는, 희미한 연대감과 함께.
연대라는 건 생존에 종속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