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은 페스트다.
이글은 우리 사회가 건강해졌으면, 이제 좀 덜 망가졌으면 하는 한 인간으로서의 간절한 염원에서 쓰는 글이다. 이 글의 제목을 보고 정치적 성향 운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역으로 정치적인 사람이다. 한 명의 사회인으로서 의당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억지로 정치적 프레임에 가두려고 애쓰는 사람이니, 정치적인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이재명은 정치인이 아니다. 그는 우리 사회에 찾아온 치명적 병균이며, 지상에 군림한 악마이다. 그런 존재를 못 견디는 사람을 정치적 프레임에 가두려는 사람은 인간다운 삶, 인간다운 사회에 대한 모색을 포기한 사람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 병과 죄와 악에 대한 ‘반항’을 거부한 사람으로 볼 수밖에 없다.
죄에 둔감한 사람, 죄를 용인하는 사람도 죄인이다. 이 글을 토론 마당에 싣지 않고 칼럼 란에 올리는 것은 그 때문이다. 나는 죄에 만연한 우리 사회가, 죄에 둔감해진 우리 사회가 안타까워 이 글을 쓰는 것이지, 죄를 외면하고 용인하는 사람, 심지어 죄의 편을 들기까지 하는 사람과 토론하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내게는 그런 사람과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른지 토론할 시간도 없고 기력도 없다. 그저 악이 횡행하는 우리 사회가, 그런 악에 익숙해져 그 악을 당연시하는 우리 사회가 너무 안타까울 뿐이다. 어떻게 우리 사회가 그런 병에서, 그런 악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기진맥진할 정도로 애쓰며 모색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제발,
그 악을 묵인하는 사람이 그 악을 못 견디는 사람을 정치적 프레임에 가두려 하지 마라. 이 글을 정치적 글이라고 생각하며 왜 이런 글을 여기 실었냐고 비난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제발 부탁한다. 이재명의 죄를 용납하듯 내 간절함도 그냥 받아들여라. 혹은 이재명의 죄를 외면하듯, 내 글도 그냥 외면하라.
『이방인』이라는 소설로 유명한 프랑스 소설가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를 다시 읽는다. 내 판단으로는 문학사에서 하나의 정점(頂點)을 찍은 작품이다.
작품의 무대는 알제리의 오랑이라는 도시이다. 어느날 그 도시에 느닷없이 페스트가 찾아온다. 오랑 시 사람들은 처음에는 이 야릇한 사건 때문에 놀라고 불안해하지만 별 탈 없이 일상을 영위해 나간다. 한동안의 해프닝으로 끝나고 곧 사라지겠지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사태가 점점 심각해진다. 이윽고 도시가 폐쇄되자 사람들은 자신들이 독 안에 든 쥐가 되었다는 것, ‘페스트’가 피할 수 없는 ‘실존’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재앙은 도시의 어느 구석 하나 남김없이 손을 댔으며 사람들은 똑같이 유배된 상태에서 페스트가 물러가기를, 이전의 평화가 찾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린다.
그런데 페스트가 지속되면서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페스트에 갇혀 지내면서 페스트가 사람들의 일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시민들이 페스트에 너무 익숙해져 자기가 페스트의 지배하에 살고 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내게 ‘아, 이재명이 바로 페스트로구나’라는 생각이 떠오른 것은 바로 이 부분에서이다.
이재명이 저지른 죄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잘못을 어쩌다 저질렀어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괴로워하던 사람들이 이제 이재명의 죄에 너무 익숙해져 죄 자체에 둔감해져 버린 현상과 너무나 흡사하지 않은가! 이재명의 죄악이 우리를 온통 뒤덮고 있다는 현실을 인식조차 못 하게 되어버린 현상과 너무나 흡사하지 않은가!.
‘판사’라는 직책을 가진 사람의 이재명 구속 적부심 기각 사유의 글이, F 학점을 줄 수밖에 없는 학생의 리포트보다 더 비논리적인 글이 되어버린 현상, 정말 갈 데까지 가버린 그 현상! 그 판사의 행태가 페스트라는 병에 걸렸거나 그 병, 혹은 그 죄에 너무 익숙해져 버린 사람의 행태로 여겨지지 않는가!
카뮈의 『페스트』는 도저히 그 병을, 그 병이 초래한 현재 상황을 있는 그대로 수락할 수 없어 그에 저항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페스트라는 악에 대해 저항한 사람들 이야기이다. 이 작품의 화자이기도 한 의사 리외는 ‘페스트 때문에 겪게 되는 불행과 고통을 직접 목격한다면 미치거나 눈이 멀었거나 비겁한 사람이 아닌 한 페스트에 대해서 체념할 수는 없을 겁니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병에 대해서만 저항한 것이 아니라 체념에 대해서도 저항한다.
그런데 그 저항의 방법이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각자 다르다. 그리고 그 저항은 모두 감동적이다. 악이나 불행을 하느님이 인간에 대해 내린 징벌이라고 말했던 파늘루 신부조차 “중간지대란 없다. 우리는 하느님을 증오할 것인가, 혹은 하느님을 사랑할 것인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히 누가 하느님을 증오하는 길을 선택할 것인가?”라고 말하며 페스트와 싸우는 길을 과감하게 선택하라고 사람들에게 설파한다.
이 작품의 화자인 의사 뢰외는 “이 모든 것이 끝난 뒤에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나는 모릅니다. 지금으로서는 환자들이 있고 그들을 치료해야 한다는 것밖에 없습니다. (……) 당장 급한 건 그들을 치료하는 겁니다. 최선을 다해 그들을 보호하는 것, 그게 전부입니다.”라고 말하면서 그러려면 온 힘을 다해 페스트와 싸우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그리고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이라고 말한다.
리외 와는 전혀 다른 식으로 페스트와의 싸움에 뛰어든 사람도 있다. 바로 신문사 특파원으로서 파리에서 온 신문기자 랑베르이다. 그는 자신은 이곳 사람이 아니라며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한다. 탈출이 성공할 수도 있던 순간 그는 혼자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며 오랑 시에 남아 페스트와의 싸움에 함께 참여한다.
한편, 지식인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 타루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은사람은 누구나 제 안에 페스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페스트는 이 세상 그 누구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 그 외의 것들, 말하자면 건강, 청렴, 순결함 등은 의지의 산물이고 그 의지는 결코 중단되어서는 안 됩니다. 훌륭한 사람, 다시 말해 거의 그 누구도 감염시키지 않는 사람이란 페스트에 걸리지 않은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방심하지 않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리고 절대로 방심하지 않기 위해서는 의지와 긴장이 필요합니다!(……)
나는 단지 이 세상에는 재앙이 있고 희생자가 있다, 그러니 가능한 한 재앙의 편에 서는 것은 거부하겠다고만 말하고 싶을 뿐입니다. 나는 올바른 길을 걷기 위해 정확하게 말하고 행동하기로 결심했습니다. (……) 그래서 저는 피해를 줄이기 위해 어떤 식으로건 희생자들 편에 서야겠다고 결심한 겁니다.“
카뮈의 『페스트』에서 페스트라는 악과 싸우는 인물들은 그런 영웅적인 인물들뿐만이 아니다. 그랑이라는 아주 평범한 인물, 그러나 아주 중요한 캐릭터도 등장한다. 그는 시청 비정규직 직원으로서 낮에는 시청 업무를 처리하고 저녁에는 리외를 도와 통계수치 정리를 도와주며 집에 가서는 조금도 진전이 없는 글쓰기에 몰두하는 위인이다.
그는 리외처럼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직업인 인물도 아니고 타루처럼 삶의 진정한 의미를 추구하는 인물도 아니다. 그는 짬을 내어 리외의 일을 돕는 것 외에는 평상시의 일을 묵묵히 행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작품의 화자인 리외는 ‘이 이야기 속에 영웅이 한 명쯤은 꼭 있어야 한다면 화자는 바로 이 영웅, 보잘것없고 눈에 띄지 않는 이 영웅, 약간의 선량한 마음씨와 정말로 우스꽝스러운 이상(理想) 외에는 가진 것이 없는 이 영웅을 제시하고 싶다.’라고 쓴다.
왜 그럴까?
그가 이 작품에 나오는 인물 중 가장 페스트의 영향을 덜 받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작품 속 거의 대부분의 인물이 페스트의 영향을 크게 받지만, 그는 페스트가 이 도시에 초래한 전반적인 유배와 이별의 분위기의 영향에서도 벗어나 있다. 그는 페스트가 창궐하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도망간 아내를 ‘구체적’으로 사랑하고 행복을 그리는 인물이다. 페스트 한 가운데서 페스트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았고 그러면서도 페스트와 싸우는 사람을 묵묵히 돕고 있으니 아주 예외적인 인물이며 페스트조차 손대기 어려운 영웅이라고 할 만하다.
일상의 삶을 변함없이 영위하면서 자신만의 작으면서도 더없이 소중한 꿈을 결코 잃은 적이 없는 사람, 그러면서, 아니 그렇기에 페스트라는 악이 끼친 영향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리외는 주저 없이 진정한 영웅이라고 말한다. 나는 우리 사회에 그런 작으면서 큰 영웅이 많았으면 좋겠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민초(民草)란 그런 사람을 뜻한다.
작품에서 결국 페스트는 물러간다. 물론 앞에 소개한 사람들의 싸움 덕분에 페스트가 물러갔다고 말할 수는 없다. 페스트는 찾아올 때와 마찬가지로 갑자기 물러간다. 그러나 만일 그들의 저항과 싸움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오랑 시는 페스트가 물러가기 전에 파멸에 처했을 것이다. 그곳은 ‘인간성’이 사라진 ‘지옥’이 되었을 것이다.
어떤가?
이재명이라는 죄인이 정치인이라는 이름으로, 그것도 버젓이 제1야당 대표로 행세하는 지금의 우리 현실이, 그 죄를 감싸기 위해 ‘정치’가 온통 마비된 현실이, ‘국회의원’이라는 작자들의 머리에서 ‘국가’라는 개념이 아예 떠나버린 현실이 페스트라는 질병이 횡행하는 사회처럼 여겨지지 않는가? 그 질병이 부패, 이권 카르텔, 권력 카르텔, 더 나가 전체주의라는 모습으로 만연해 있다고 여겨지지 않는가? 그 질병이 우리를 숨 막히게 한다고 느껴지지 않는가?
나는 그 질환에 좌파니 진보니 하는 이름을 붙여주는 것을 거부한다. 그 병에 그런 이름을 붙여주는 것은 그 병이 우리 곁에서 물러나지 않을 구실을 주고 보호막, 위장막을 씌워주는 짓일 뿐이다. 우리가 이재명과 문재인을 비롯해 그 무리를 증오하는 것은 그들이 좌파라서도 아니고 진보라서도 아니다. 그것들은 모두 거짓 프레임일 뿐이다.
만일 그들에게 그런 프레임을 붙여준다면 그들을 상대로 한 싸움의 절박함이 현저하게 퇴색한다. 우리는 이념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어느새 잠입해 들어와 우리를 좀 먹는 역병과의 싸움을, 훨씬 더 근본적이고 절박한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우리 사회에 카뮈의 『페스트』에 나오는 리외, 타루, 랑베르 같은 인물, 더 나가 그랑 같은 민초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으며 그들이 건강한 ‘반항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진정한 싸움이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니, 이미 페스트에 오염되었거나, 그에 둔감하거나, 아예 그런 싸움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이여,
그저 조용히 이재명과 그 무리들이 페스트균이라는 자명한 사실이나 인정하고, 그 힘든 싸움을 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손가락질하거나 비난의 눈길을 던지지 마라. 그대들의 생명을 지켜줄 사람도 결국은 그 어려운 싸움을 했고, 하고 있고, 해나갈 사람들이니…… James Last - Humming Chorus From Madame Butterf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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