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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패도지(一敗塗地)
싸움에 한 번 패하여 땅에 떨어진다는 뜻으로, 한 번 싸우다가 여지없이 패하여 다시 일어나지 못함을 이르는 말이다.
一 : 한 일(一/0)
敗 : 깨뜨릴 패(攵/7)
塗 : 진흙 도(土/10)
地 : 땅 지(土/3)
출전 : 사기(史記) 卷8 고조본기(高祖本紀)
한 번 패하여 땅을 더럽힌다는 뜻으로, 실패하여 다시 수습(收拾)할 수 없음을 형용한 말이다.
이 성어는 후에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되는 유방(劉邦)이 봉기하기 직전에 한 말이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방(劉邦)은 패현(沛縣; 지금의 강소성) 사람으로 자(字)는 계(季)다. 유방(劉邦)은 패현(沛縣) 사수(泗水)지방의 한 정장(亭長)으로 죄수들을 여산으로 호송하여 가는데 죄수들이 도망치자 모두 풀어 주고 자신도 자신을 따르는 무리와 함께 떠돌이 신세가 되었다.
이때(기원전 209년) 진승(陳勝)과 오광(吳廣)등이 대택향(大澤鄕)에서 봉기를 일으키자, 패현의 현령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고 자신에게 해가 미칠까 두려워 하였다.
그는 유방이 백성들에게 위엄과 신망을 받고 있다는 말을 듣고 번쾌(樊噲)를 보내 유방을 모셔오기로 했다. 그러나 현령은 정작 유방이 이끄는 무리들이 오자 두려운 마음이 들어 성문을 닫으라고 명령하며, 그들을 들여보내지 않았다.
유방은 백성들에게 알리는 편지를 써서 화살에 묶어 성안으로 쏘아 보냈다. 유방은 편지에서 백성들에게 현령을 제거하고 진나라에 저항함으로써 자신들의 안전을 도모하자고 외쳤다.
백성들은 과연 현령을 죽이고 성문을 열고 유방을 맞아 들였다.
백성들은 그를 현령으로 추대하려 하자, 그는 사양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천하가 뒤죽박죽이 되어 각지에서 제후가 봉기하였습니다. 우리도 봉기는 하였으나 지도자가 똑똑하지 못하면 여지없이 패해 다시 일어설 수 없습니다. 나는 결코 내 목숨이 아까워서 사양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직 나로서는 여러분의 장래를 책임질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의논들 하셔서 보다 훌륭한 인물을 지도자로 내세워 주십시오."
劉季曰 : 天下方擾, 諸侯並起, 今置將不善, 壹敗塗地. 吾非敢自愛, 恐能薄, 不能完父兄子弟. 此大事, 願更相推擇可者.
⏹ 일패도지(一敗塗地)
단번에 실패하여 상처로 땅에 피 칠을 한다는 뜻으로, 처참하게 패배하다는 의미의 말이다.
진시황(秦始皇)이 기원전 221년 중국 최초의 중앙집권제 국가를 세웠다. 그러나 통일한 11년 만에 진시황은 죽었고, 그 해부터 사방에서 반란이 일어나 207년 진나라는 망했다.
맨 처음 반란을 일으킨 사람은 진승(陳勝)이었는데, 사방에서 호응했다.
진나라의 고을 원들도, 반란군에 붙는 경우가 많았다. 한(漢)나라의 시조가 된 유방(劉邦)의 고향인 패현(沛縣)의 고을 원도 진승에게 호응하기로 했다.
그 때 패현의 아전으로 있던 소하(蕭何)와 조참(曹參)이 원에게, "그냥 호응하면, 백성들이 따르지 않을 수 있으니, 피신한 유방을 불러 들여 그 힘을 빌리면, 백성들이 복종할 것입니다"고 건의했다.
유방이 나타나자, 고을 원은 마음이 변하여 성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 때 유방은 천하의 정세를 설명하는 편지를 써서 화살에 꽂아 성안으로 날려 보냈다. 성 안의 사람들이 원을 죽이고, 유방을 맞이했다.
고을 사람들이 유방을 원에 추대했다. 유방이 말하기를, "세상이 어지러워 각 지역의 영웅들이 막 일어나고 있소. 이런 때 장수를 잘못 두면 단 번에 패배해 시체가 으깨져 땅바닥에 바르게 될 것이오. 이 일은 큰일이니, 사람을 잘 골라 추대해야 할 것이오"라고 사양했다. 그러나 유방은 원으로 추대됐고, 한(漢)나라를 세웠다.
'장수를 잘못두면 그 시체의 피가 땅 바닥에 바르게 될 것이다'는 유방의 말은, 마치 선거에서 참패한 야당을 위해 미리 준비해 둔 말 같다.
이제 여당은 야당의 협조를 구할 필요 없이 모든 안건을 처리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얻었고, 야당은 어떤 안건에서도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킬 수 없는 처참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대통령이나 여당이 잘한 것도 아닌데, 결과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는 지도력 부재와, 잘못된 공천과, 소극적인 준비와 선거운동, 등등과 그리고 시대의 흐름을 너무 몰랐다. 집권당의 정책에 반대만 해서는 안 되고, 새로운 미래를 제시해야 하는데, 전혀 그러지 못했다.
당지도부가 완전히 괴멸된 상황에서 다시 재기하려면 쉽지 않을 것이다. 각자 개인적인 집착을 버리고, 비상한 결심으로 심기일전(心機一轉)하여 새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 史記 本紀 卷08 高祖本紀
이 편은 한(漢)나라의 제1대 황제인 고조(高祖) 유방(劉邦)의 역사적 기록이다. 유방은 진나라 말기에 군사를 일으켜 진왕(秦王)으로부터 항복을 받았으며, 4년간에 걸친 항우와의 쟁패전에서, 항우를 대파하고 천하통일의 대업을 실현시켰다.
유방(劉邦)의 자는 계(季)이며 강소성(江蘇省) 풍읍(豊邑)의 농민으로 태어나 한때 도둑의 두목이 되었다가 진시황(秦始皇)이 죽은 다음 해에 군사를 일으켜 항우(項羽) 등과 합세하여 함양(咸陽)을 점령하고 한왕(漢王)이 되었다. 그 후 항우를 멸하여 천하를 통일하고 장안(長安)에 도읍하였다.
사마천은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서, "항우(項羽)는 포학하였으나, 한왕(漢王)은 공을 세우고 덕을 베풀었다. 한왕은 파촉과 한중(漢中)에서 발분하여 군대를 이끌고 돌아와 삼진(三秦)을 평정하였다. 항우를 죽이고 제왕의 업을 이루어 천하가 안정되자 제도를 개혁하고 풍속을 바꾸었다. 이에 제8편 '고조본기(高祖本紀)'를 지었다"고 하였다.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당시 황제의 이름을 말하는 것이 대역죄에 해당하였으므로 유방(劉邦)이라고 기록하지 못하고 고조(高祖), 유계(劉季), 패공(沛公), 한왕(漢王), 고황제(高皇帝), 고제(高帝) 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여기에서의 고조(高祖)는 한나라 초대 황제 유방의 사후 추존된 묘호(廟號)이므로 역사 기록상 유방이 되어야 함에도 고조로 기록하고 있다.
1
高祖, 沛豐邑中陽裏人, 姓劉氏, 字季. 父曰太公, 母曰劉媼.
고조(高祖; 劉邦)는 패현(沛縣) 풍읍(豐邑)중양리(中陽里) 사람으로 성은 유(劉), 자는 계(季)이다. 아버지는 태공(太公)이며 어머니는 유온(劉媼)이다.
其先劉媼嘗息大澤之陂, 夢與神遇. 是時雷電晦冥, 太公往視, 則見蛟龍於其上. 已而有身, 遂產高祖.
고조가 태어나기 전 어머니 유온이 일찍이 큰 연못가에서 쉬다가 꿈속에서 신을 만났다. 이때 천둥이 치고 번갯불이 번쩍 하더니 어두컴컴해지자 태공이 가서 보니 교룡(蛟龍)이 유온의 몸 위를 올라타고 있었다. 머지않아 임신이 되어 마침내 고조(유방)를 낳았다.
2
高祖為人, 隆準而龍顏, 美須髯, 左股有七十二黑子.
고조의 생김새는 콧날이 오똑한 것이 용의 얼굴 같았으며 멋진 수염을 길렀으며, 왼쪽 넓적다리에 72개의 검은 점이 있었다.
仁而愛人, 喜施, 意豁如也.
常有大度, 不事家人生產作業.
어질고 다른 사람을 좋아했으며 베풀기를 즐겨하고 도량이 넓었다. 늘 큰 뜻을 갖고 있어 집안의 생산 작업을 돌보지 않았다.
及壯, 試為吏, 為泗水亭長.
廷中吏無所不狎侮, 好酒及色.
장년이 되어 시험을 쳐서 관리가 되었는데, 사수정(泗水亭)의 정장(亭長)이 되었다. 관아의 관리들 치고 그를 업신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그는 술과 여자를 좋아했다.
常從王媼武負貰酒, 醉臥, 武負王媼見其上常有龍, 怪之.
항상 왕온(王媼)과 무부(武負)의 술집에 가서 외상술을 마셨으며 술에 취하면 드러 누웠는데 무부와 왕온이 그 위에 항상 용이 서리는 것을 보고는 괴이하게 생각했다.
高祖每酤留飲, 酒讎數倍.
及見怪, 歲竟, 此兩家常折券棄責.
고조가 매번 술을 마시는 날에는 술이 몇 배나 더 팔렸다. 이런 괴이한 일들을 보고는 연말이면 두 술집은 늘 외상 장부를 찢어버렸다.
3
高祖常繇咸陽, 縱觀, 觀秦皇帝, 喟然太息曰: 嗟乎, 大丈夫當如此也.
고조는 일찍이 함양에서 부역을 하였는데 볼 기회가 주어져 진시황의 행차를 보았는데 길게 한숨을 쉬며 탄식하여 말했다. "아!, 대장부라면 응당 저래야 할 것이다."
4
單父人呂公善沛令, 避仇從之客, 因家沛焉.
단보(單父) 사람 여공(呂公)이 패현 현령과 친하여 원수를 피해 현령의 빈객이 되어 패현에 정착하게 되었다.
沛中豪桀吏聞令有重客, 皆往賀.
패현의 호걸과 향리들은 그들 현령에게 귀한 손님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모두 가서 축하를 드렸다.
蕭何為主吏, 主進, 令諸大夫曰: 進不滿千錢, 坐之堂下.
소하(蕭何)는 속관인 주리(主吏)로서 예물을 주관했는데 여러 대부들에게 말했다. "예물이 1천 전을 넘지 않으면 당 아래에 앉으시오."
高祖為亭長, 素易諸吏, 乃紿為謁曰, 賀錢萬, 實不持一錢.
고조는 정장으로서 평소 여러 관리들을 업신여겼기에 명함에다 거짓으로 '축하금 1만 전'이라 썼지만 실은 한 푼도 갖고 오지 않았다.
謁入, 呂公大驚, 起, 迎之門. 呂公者, 好相人, 見高祖狀貌, 因重敬之, 引入坐.
명함이 전해지자 여공이 크게 놀라며 일어나 문까지 나와 맞이했다. 여공은 관상 보기를 좋아했는데 고조의 생김새를 보고는 매우 정중하게 그를 이끌어 자리에 앉혔다.
蕭何曰: 劉季固多大言, 少成事.
소하가 말했다. "유계는 늘 큰소리 만치지 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高祖因狎侮諸客, 遂坐上坐, 無所詘. 酒闌, 呂公因目固留高祖. 高祖竟酒, 後.
고조는 여러 빈객들을 업신여긴 채 상석에 가서 앉는데 사양하는 기색이라곤 없었다. 술자리가 끝날 무렵 여공이 눈짓으로 고조를 남게 했다. 고조가 술자리가 끝날 때까지 남았다.
呂公曰: 臣少好相人, 相人多矣, 無如季相, 願季自愛. 臣有息女, 願為季箕帚妾.
여공이 말했다. "제가 어려서부터 관상 보기를 좋아하여 많은 사람의 관상을 보았는데 유계 당신만한 상은 없었으니 스스로를 귀중하게 여기시길 바랍니다. 제게 딸자식이 있는데 그대가 청소나 하는 첩으로 삼아 주십시오."
酒罷, 呂媼怒呂公曰: 公始常欲奇此女, 與貴人. 沛令善公, 求之不與, 何自妄許與劉季.
술자리가 끝나자 여공의 아내가 여공에게 화를 내며 말했다. "당신은 전부터 늘 우리 딸이 남다르다며 귀인에게 주겠다고 했습니다. 패현의 현령이 당신과 친분이 있어 딸을 달라고 할 때는 주지 않더니 어찌하여 마음대로 유계에게 주려고 하십니까?"
呂公曰: 此非兒女子所知也.
여공이 말했다. "이는 아녀자가 알바가 아니오."
卒與劉季. 呂公女乃呂后也, 生孝惠帝魯元公主.
끝내 유계에게 딸을 주었다. 여공의 딸이 바로 훗날의 여후이며, 효혜제(孝惠帝)와 노원공주(魯元公主)를 낳았다.
5
高祖為亭長時, 常告歸之田.
고조가 정장(亭長)으로 있을 때 늘 휴가를 얻어 시골집으로 돌아왔다.
呂后與兩子居田中耨, 有一老父過請飲, 呂后因餔之.
여후가 두 아이와 밭에서 김을 매고 있었는데 한 노인이 지나가다가 물을 달라고 하자 여후가 먹을 것까지 대접했다.
老父相呂后曰: 夫人天下貴人.
노인이 여후의 관상을 보더니 말했다. "부인은 천하의 귀인이 될 것입니다."
令相兩子, 見孝惠曰: 夫人所以貴者, 乃此男也.
두 아이의 관상을 보게 하자 효혜를 보고 말했다. "부인이 귀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아들 때문입니다."
相魯元, 亦皆貴.
딸인 노원의 상을 보고는 역시 모두 귀한 상이라고 했다.
老父已去, 高祖適從旁舍來.
呂后具言客有過, 相我子母皆大貴.
노인이 떠난 뒤 고조가 마침 이웃집에서 나왔다. 여후가 객이 지나가다가 우리 모자의 관상을 보고는 모두 크게 귀하다고 하더라는 이야기를 모두 해주었다.
高祖問, 曰: 未遠.
고조가 노인이 어디로 갔는지 물으니 대답했다. "멀리 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乃追及, 問老父, 老父曰: 鄉者夫人嬰兒皆似君, 君相貴不可言.
고조가 바로 뒤쫓아가 노인에게 물으니 노인이 말했다. "방금 전에 부인과 아이들의 관상이 모두 그대와 비슷하고 그대의 상은 무어라 말할 수 없이 귀한 상입니다."
高祖乃謝曰: 誠如父言, 不敢忘德.
고조는 이에 감사를 드리며 말했다. "과연 노인 말대로라면 은덕을 잊지 않겠소."
及高祖貴, 遂不知老父處.
고조가 귀한 몸이 되었으나 결국 노인이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6
高祖為亭長, 乃以竹皮為冠, 令求盜之薛治之, 時時冠之, 及貴常冠, 所謂劉氏冠乃是也.
고조가 정장으로 있을 때 대나무 껍질로 만든 모자를 쓰기를 좋아해 구도(求盜)를 설현(薛縣)까지 보내 만들게 했으며, 늘 이 모자를 썼고, 귀한 몸이 되어서도 늘 썼으므로 이른바 '유씨관(劉氏冠)'이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7
高祖以亭長為縣送徒酈山, 徒多道亡.
고조는 정장으로서 현을 위해 여산(酈山)으로 죄수들을 호송한 적이 있었는데 도중에 많은 죄수들이 달아났다.
自度比至皆亡之, 到豐西澤中, 止飲, 夜乃解縱所送徒. 曰: 公等皆去, 吾亦從此逝矣.
여산에 도착할 때면 모두 다 달아날 것으로 생각하여 풍읍의 서쪽 늪지에 이르자 가던 길을 멈추고 술을 마시고, 밤이 되자 호송해가던 죄수들을 풀어 주었다. 그리고 말하기를, "그대들 모두 가시오, 나 역시 여기서 달아날 것이오"라 했다.
徒中壯士願從者十餘人.
죄수들 중 장사 10여 명이 따르길 원했다.
高祖被酒, 夜徑澤中, 令一人行前.
고조는 술에 취하여 밤중에 늪지의 좁은 길을 가면서 한 사람을 앞장 세웠다.
行前者還報曰: 前有大蛇當徑, 願還.
앞서 가던 자가 돌아와 보고했다. "앞에 큰 뱀이 길을 막고 있으니 돌아가는 게 낫겠습니다."
高祖醉, 曰: 壯士行, 何畏.
술에 취한 고조가 말했다. "장사가 가는 길에 무엇을 두려워하랴!"
乃前, 拔劍擊斬蛇.
蛇遂分為兩, 徑開.
行數里, 醉, 因臥.
이에 앞으로 가더니 칼을 뽑아 뱀을 베어 죽였다. 뱀은 두 동강이 났고 길이 열렸다. 몇 리를 가다가 취기를 이기지 못해 누워버렸다.
後人來至蛇所, 有一老嫗夜哭.
人問何哭, 嫗曰: 人殺吾子, 故哭之.
뒤따라오던 사람이 뱀이 있던 곳에서 한 노파가 한밤중에 통곡하는 것을 보았다. 그 사람이 왜 우냐고 묻자 노파가 말했다. "어떤 자가 내 아들을 죽였기에 우는 것이오."
人曰: 嫗子何為見殺.
그 사람이 물었다. "노파의 아들이 어째서 죽임을 당한 것이오?"
嫗曰: 吾, 白帝子也, 化為蛇, 當道, 今為赤帝子斬之, 故哭.
노파가 말했다. "내 아들은 백제(白帝)의 아들로 뱀으로 변신하여 길을 막고 있었는데 적제(赤帝)의 아들이 베어 죽여서 울고 있던 것이오."
人乃以嫗為不誠, 欲告之, 嫗因忽不見. 後人至, 高祖覺.
그 사람은 노파가 허황된 말을 한다고 여겨 때리려 하자 노파가 홀연히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뒤에 오던 사람이 도착하니 고조가 술에서 깨었다.
後人告高祖, 高祖乃心獨喜, 自負.
諸從者日益畏之.
뒤에 온던 사람이 고조에게 이를 고하자 고조는 속으로 혼자 기뻐하며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따르는 사람들이 갈수록 고조를 더 두려워했다.
8
秦始皇帝常曰: 東南有天子氣, 於是因東游以厭之.
진시황제는 일찍이 말하기를, "동남쪽에 천자의 기운이 있다"고 하여 동방 순시를 통해 이 기운을 누르고자 했다.
高祖即自疑, 亡匿, 隱於芒碭山澤巖石之閒.
고조가 자신의 기운을 말하는 것이라고 의심하여 도망쳐 숨었는데, 망산(芒山)과 탕산(碭山) 일대의 늪지 깊은 골짜기 사이에 숨었다.
呂后與人俱求, 常得之, 高祖怪問之.
여후는 사람들과 함께 고조가 있는 곳은 어디든지 언제나 찾아냈다. 고조가 괴상하게 여겨 물었다.
呂后曰: 季所居上常有雲氣, 故從往常得季.
여후가 대답했다. "당신 있는 곳에는 늘 구름 같은 기운이 있어 그것을 따라가면 언제나 당신을 찾을 수 있었지요."
高祖心喜. 沛中子弟或聞之, 多欲附者矣.
고조가 마음속으로 기뻐했다. 패현에 있는 젊은이 중 어떤 자는 이런 이야기를 듣고 따르고자 하는 자들이 많았다.
9
秦二世元年秋, 陳勝等起蘄, 至陳而王, 號為張楚.
진(秦) 2세황제 원년 가을, 진승(陳勝) 등이 기현(蘄縣)에서 봉기하여 진현(陳縣)에서 왕을 칭하고 나라 이름을 '장초(張楚)'라 불렀다.
諸郡縣皆多殺其長吏以應陳涉.
沛令恐, 欲以沛應涉.
여러 군현에서 모두 고급관리들을 죽이고 진섭에게 호응했다. 패현 현령도 겁이 나서 패현의 백성들과 함께 진섭에게 호응하고자 했다.
掾主吏蕭何曹參乃曰: 君為秦吏, 今欲背之, 率沛子弟, 恐不聽. 願君召諸亡在外者, 可得數百人, 因劫眾, 眾不敢不聽.
옥연(獄掾)과 주리(主吏) 벼슬에 있던 소하와 조참이 이에 말했다. "현령께서는 진나라의 관리인데 지금 진나라를 배반하여 패현의 젊은이들을 이끌려 한다면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현령께서 다른 곳으로 달아난 패현 사람들을 부르면 수백 명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니 그들을 이용해 젊은이들을 겁주면 젊은이들은 감히 듣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乃令樊噲召劉季.
劉季之眾已數十百人矣.
이에 현령은 번쾌(樊噲)에게 유계(劉季; 劉邦)를 불러오도록 했다. 유계의 무리는 이미 백 명 가까이 되었다.
10
於是樊噲從劉季來.
이에 번쾌(樊噲)를 따라 유계(劉季; 劉邦)가 왔다.
沛令後悔, 恐其有變, 乃閉城城守, 欲誅蕭曹.
패현 현령이 후회하며 변고가 생기지 않을까 두려워서 성문을 닫고 성을 굳게 지키면서 소하(蕭何)와 조참(曹参)을 죽이려 했다.
蕭曹恐, 踰城保劉季.
소하와 조참이 겁이 나서 성을 넘어 유계에게 몸을 맡겼다.
劉季乃書帛射城上, 謂沛父老曰: 天下苦秦久矣. 今父老雖為沛令守, 諸侯并起, 今屠沛. 沛今共誅令, 擇子弟可立者立之, 以應諸侯, 則家室完. 不然, 父子俱屠, 無為也.
유계는 곧 비단에 글을 써서 활로 쏘아 성 안으로 보냈으며, 패현의 부로(父老)들에게 이렇게 일러 말했다. "천하가 진나라로 인해 고통을 받은 지 오래 되었습니다. 지금 부로들이 비록 패현의 현령을 위해 성을 지키고 있으나 제후들이 함께 일어나 곧 패현을 도륙할 것입니다. 패현 사람들이 지금 함께 현령을 죽이고 젊은이들 중에서 우두머리를 골라 세워 제후들에게 호응하면 집안을 보전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자가 모두 도륙을 당해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父老乃率子弟共殺沛令, 開城門迎劉季, 欲以為沛令.
부로들이 곧 젊은이들을 이끌고 함께 패현의 현령을 죽이고 성문을 열어 유계를 맞아들여 패현의 현령으로 삼고자 했다.
劉季曰: 天下方擾, 諸侯并起, 今置將不善, 壹敗涂地. 吾非敢自愛, 恐能薄, 不能完父兄子弟. 此大事, 願更相推擇可者.
유계가 말했다. "천하가 바야흐로 어지러워져 제후들이 너나할 것 없이 들고 일어나는데 지금 무능한 장수를 두면 단 한 번의 패배로 참살을 당하게 되고 말 것이요. 내가 감히 나 자산을 아껴서가 아니라 능력이 부족하여 부형과 젊은이들을 지키지 못할까 두려워서 입니다. 이는 대사이니 다시 함께 감당할 능력이 있는 사람을 추천하시기 바랍니다."
蕭曹等皆文吏, 自愛, 恐事不就, 後秦種族其家, 盡讓劉季.
소하와 조참 등은 모두 문관으로 몸을 사렸으며 거사를 성공하지 못하면 나중에 진나라에게 집안이 멸족당할까 두려워 모두 유계에게 양보했다.
諸父老皆曰: 平生所聞劉季諸珍怪, 當貴, 且卜筮之, 莫如劉季最吉.
여러 부로들이 모두 말했다. "평소 듣기에 그대에게는 기이한 일들이 있다고 들었으니 귀한 사람이 틀림없고 또 점을 쳐보니 그대만큼 길한 사람이 없다고 하였소."
於是劉季數讓. 眾莫敢為, 乃立季為沛公.
이에 유계가 몇 차례 사양했다. 아무도 감히 하려는 자가 없어 유계를 패공(沛公)으로 세웠다.
祠黃帝, 祭蚩尤於沛庭, 而釁鼓旗, 幟皆赤.
유계는 패현의 뜰에서 황제(黃帝)와 치우(蚩尤)에게 제사 지내고, 가축의 피를 북과 깃발에 바르는 의식을 행하고 군대의 깃발은 모두 붉은색으로 했다.
由所殺蛇白帝子, 殺者赤帝子, 故上赤.
전에 죽인 뱀이 백제(白帝)의 아들이고, 뱀을 죽인 사람이 적제(赤帝)의 아들이기 때문에 붉은색을 숭상하게 된 것이다.
於是少年豪吏如蕭曹樊噲等皆為收沛子弟二三千人, 攻胡陵方與, 還守豐.
이에 소하, 조참, 번쾌 등과 같은 젊고 걸출한 아전들이 패현의 젊은이 2, 3천 명을 거두어 호릉(胡陵)과 방여(方與)를 공격한 뒤 돌아와 풍읍을 지켰다.
11
秦二世二年, 陳涉之將周章軍西至戲而還.
진 2세황제 2년(기원전 208년), 진섭의 부장(部將)인 주장(周章)의 군대가 서쪽 희수(戲水)까지 갔다가 돌아갔다.
燕趙齊魏皆自立為王. 項氏起吳.
燕(연), 趙(조), 齊(제), 魏(위)나라가 모두 스스로 왕위에 즉위했다. 항량과 항우는 오현(吳縣)에서 봉기했다.
秦泗川監平將兵圍豐, 二日, 出與戰, 破之.
진나라의 사천군감(泗川郡監) 평(平)이 병사를 거느리고 풍읍을 포위했으나 패공이 이틀 뒤 출전하여 싸워 격파했다.
命雍齒守豐, 引兵之薛.
泗州守壯敗於薛, 走至戚.
패공은 옹치(雍齒)에게 명하여 풍읍을 지키게 하고 병사를 이끌고 설현으로 진격했다. 사천군수 장(壯)이 설현에서 패하여 척현(戚縣)으로 달아났다.
沛公左司馬得泗川守壯, 殺之. 沛公還軍亢父, 至方與(周市來攻方與), 未戰.
패공의 좌사마(左司馬) 조무상(曹無傷)이 사천군수 장을 붙잡아 죽였다.
패공은 항보(亢父)로 군대를 돌려 방여(方與)에 이르기까지(주불이 방여를 공격하기까지) 싸움이 없었다.
陳王使魏人周市略地.
진왕(陳王; 진승)은 위(魏)나라의 주불(周市)에게 풍읍을 탈취하도록 했다.
周市使人謂雍齒曰: 豐, 故梁徙也. 今魏地已定者數十城. 齒今下魏, 魏以齒為侯守豐. 不下, 且屠豐.
주불은 옹치에게 사람을 보내 말했다. "풍읍은 옛날 양(魏:魏)나라가 천도한 곳이다. 지금 위(魏) 땅으로 평정된 곳이 수십 개 성에 이른다. 옹치(雍齒) 네가 지금 위나라에 투항하면 위나라는 너를 후에 봉해 풍읍을 지키게 할 것이다. 투항하지 않으면 장차 풍읍을 도륙할 것이다."
雍齒雅不欲屬沛公, 及魏招之, 即反為魏守豐.
옹치는 본래 패공에 귀속되고 싶지 않았는데 위(魏)나라가 투항을 권유하자 곧 패공을 배반하고 위나라를 위해 풍읍을 지켰다.
沛公引兵攻豐, 不能取.
沛公病, 還之沛.
패공이 병사를 이끌고 풍읍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패공이 병이 나서 패현으로 돌아갔다.
沛公怨雍齒與豐子弟叛之, 聞東陽甯君秦嘉立景駒為假王, 在留, 乃往從之, 欲請兵以攻豐.
패공은 옹치와 풍읍의 젊은이들이 배반한 것을 원망하여 동양현(東陽縣)의 영군(寧君)과 진가(秦嘉)가 경구(景駒)를 초나라의 임시 왕으로 삼아 유현(留縣)에 머무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경구에게 달려가 군사를 빌려 풍읍을 공격하고자 했다.
是時秦將章邯從陳, 別將司馬夷將兵北定楚地, 屠相, 至碭.
이때 진나라의 장수 장한(章邯)은 진왕(진섭)을 추격하고, 별장 사마이(司馬夷)는 병사를 거느리고 북쪽으로 초 땅을 평정하고 상현(相縣)을 도륙한 뒤 탕현(碭縣)에 이르렀다.
東陽甯君沛公引兵西, 與戰蕭西, 不利.
동양현의 영군(甯君)과 패공은 병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진격하여 소현(蕭縣) 서쪽에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했다.
還收兵聚留, 引兵攻碭, 三日乃取碭.
因收碭兵, 得五六千人.
병사를 수습하여 유현으로 돌아와 다시 모아 군사를 이끌고 탕현을 공략하니 3일 만에 탕현을 함락시켰다. 이에 탕현의 병사들을 거두니 5,6천 명의 군사를 얻게 되었다.
攻下邑, 拔之, 還軍豐.
하읍(下邑)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풍읍으로 회군하여 주둔하였다.
聞項梁在薛, 從騎百餘往見之.
項梁益沛公卒五千人, 五大夫將十人.
沛公還, 引兵攻豐.
항량이 설현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기병 100여 명을 이끌고 가서 항량을 만났다. 항량은 패공에게 병사 5천 명과 오대부급 장수 10명을 보태주었다. 패공이 돌아와 병사들을 이끌고 풍읍을 공격했다.
12
從項梁月餘, 項羽已拔襄城還.
項梁盡召別將居薛.
패공이 항량(項梁)을 따른 지 한 달여 항우는 이미 양성(襄城)을 함락시키고 돌아와 있었다. 항량은 별장들을 모두 설현으로 소집했다.
聞陳王定死, 因立楚後懷王孫心為楚王, 治盱臺.
진왕(陳王; 진승)이 확실히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초나라의 후손 회왕의 손자인 웅심(熊心)을 초왕으로 옹립하고 우대(盱臺)에 도읍을 정했다.
項梁號武信君. 居數月, 北攻亢父, 救東阿, 破秦軍.
항량은 스스로 무신군(武信君)이라 불렀다. 몇 달 뒤 북쪽으로 항보(亢父)를 공격하여 동아(東阿)를 구원하고 진나라의 군대를 격파했다.
齊軍歸, 楚獨追北, 使沛公項羽別攻城陽, 屠之.
제나라의 군대가 돌아가자 초나라 군대가 홀로 패주하는 적을 추격했고, 패공과 항우에게는 별도로 성양을 공격하게 하여 도륙했다.
軍濮陽之東, 與秦軍戰, 破之.
복양(濮陽) 동쪽에 주둔하여 진나라의 군대와 싸워 격파했다.
13
秦軍復振, 守濮陽, 環水.
진나라의 군대가 다시 병력을 정비하여 복양(濮陽)을 지키고 해자를 팠다.
楚軍去而攻定陶, 定陶未下.
초나라 군대는 철군하여 정도(定陶)를 공략했으나 정도를 함락시키지 못했다.
沛公與項羽西略地至雍丘之下, 與秦軍戰, 大破之, 斬李由.
패공은 항우와 서쪽 땅을 공략하며 옹구(雍丘)에 이르러 진나라의 군대와 싸워 대파하고 이사(李斯)의 아들 이유(李由)를 참하였다.
還攻外黃, 外黃未下.
군대를 돌려 외황(外黃)을 공격했지만 외황은 함락되지 않았다.
14
項梁再破秦軍, 有驕色. 宋義諫, 不聽.
항량은 두 차례 진나라의 군대를 격파하자 교만한 기색을 드러냈다. 송의(宋義)가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秦益章邯兵, 夜銜枚擊項梁, 大破之定陶, 項梁死.
진나라는 장한에게 병력을 증원하여 밤에 병사와 말에게 하무를 물리고 항량을 공격하여 정도(定陶)에서 대파했으며 항량은 전사했다.
沛公與項羽方攻陳留, 聞項梁死, 引兵與呂將軍俱東. 呂臣軍彭城東, 項羽軍彭城西, 沛公軍碭.
패공과 항우는 진류(陳留)를 공격하고 있을 때 항량의 죽음을 듣고 병사를 이끌고 여신(呂臣) 장군과 함께 동쪽으로 진군했다. 여신은 팽성 동쪽, 항우는 팽성 서쪽, 패공은 탕현에 주둔했다.
15
章邯已破項梁軍, 則以為楚地兵不足憂, 乃渡河, 北擊趙, 大破之.
장한은 항량의 군대를 격파한 뒤 초 땅의 군대는 걱정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바로 황하를 건너 북쪽으로 조나라를 공격하여 대파했다.
當是之時, 趙歇為王, 秦將王離圍之鉅鹿城, 此所謂河北之軍也.
그 당시 조나라는 조헐(趙歇)이 왕이었는데 진나라의 장수 왕리(王離)가 거록성(巨鹿城)에서 포위하니, 이들이 이른바 하북군(河北軍)이었다.
16
秦二世三年, 楚懷王見項梁軍破, 恐, 徙盱臺都彭城, 并呂臣項羽軍自將之.
진 2세황제 3년, 초회왕은 항량의 군대가 패하자 두려워하여 우대(盱臺)에서 팽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여신과 항우의 군대를 합류시켜 몸소 통솔했다.
以沛公為碭郡長, 封為武安侯, 將碭郡兵.
패공을 탕군의 군장으로 삼고 무안후(武安侯)에 봉해 탕군의 병사들을 이끌게 했다.
封項羽為長安侯, 號為魯公.
항우는 장안후(長安侯)에 봉하고 노공(魯公)이라고 불렀다.
呂臣為司徒, 其父呂青為令尹.
여신은 사도(司徒)로 삼고 그의 아버지 여청(呂靑)은 영윤(令尹)에 임명했다.
17
趙數請救, 懷王乃以宋義為上將軍, 項羽為次將, 范增為末將, 北救趙.
조나라에서 몇 차례 구원을 요청하자 회왕은 송의를 상장군에 임명하고, 항우를 차장으로 삼고 범증을 말장으로 삼아 북쪽으로 조나라를 구원하게 했다.
令沛公西略地入關. 與諸將約, 先入定關中者王之.
패공에게는 서쪽을 공략하여 함곡관으로 들어가게 했다. 그러면서 장수들과 약조하기를 관중에 먼저 들어가 평정하는 사람을 왕으로 삼겠다고 했다.
18
當是時, 秦兵彊, 常乘勝逐北, 諸將莫利先入關.
이 당시 진나라의 병력은 강력한데다 항상 승세를 타고 달아나는 적을 추격해 오던 상황이라 장수들은 관중으로 먼저 들어가는 것이 이롭다고 여기지 않았다.
獨項羽怨秦破項梁軍, 奮, 願與沛公西入關.
항우 만이 진나라가 항량의 군대를 격파한 것에 원한이 맺혀 분통을 터뜨리며 패공과 함께 서쪽 함곡관으로 들어가길 원했다.
懷王諸老將皆曰: 項羽為人彊悍猾賊. 項羽嘗攻襄城, 襄城無遺類, 皆阬之, 諸所過無不殘滅. 且楚數進取, 前陳王項梁皆敗. 不如更遣長者扶義而西, 告諭秦父兄. 秦父兄苦其主久矣, 今誠得長者往, 毋侵暴, 宜可下. 今項羽彊悍, 今不可遣. 獨沛公素寬大長者, 可遣.
회왕의 여러 원로 장수들이 모두 말했다. "항우는 사람됨이 강하고 사나우며 교활하고 간악합니다. 항우가 일찍이 양성(襄城)을 공격하였을 때 양성에는 남아난 것이 하나도 없었으니 모두 생매장하였고 항우가 지나간 곳에는 살아남은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또 초나라가 여러 차례 공격했지만 전에 진왕(陳王)과 항량이 모두 패한 적이 있었습니다. 차라리 다시 덕이 있는 사람을 보내 인의를 베풀며 서쪽으로 진군하면서 진나라의 부형들을 회유하는 것만 못합니다. 진나라의 부형들은 그들의 군주에게 오랫동안 괴로움을 당했기 때문에 지금 진실로 덕이 있는 사람이 가서 포악하게 굴지 않는다면 응당 항복할 것입니다. 항우처럼 사나운 자를 지금 보내서는 안 됩니다. 오직 패공처럼 평소 관대하고 덕이 있는 사람이라야 보낼 만합니다."
卒不許項羽, 而遣沛公西略地, 收陳王項梁散卒.
마침내 항우를 허락하지 않고 패공을 보내어 서쪽을 공략하게 하니 진왕과 항량의 패잔병들을 수습하였다.
乃道碭至成陽, 與杠裏秦軍夾壁, 破(魏秦)二軍.
이어 탕현을 따라 성양(成陽)에 이르러 강리(杠里)의 진군과 대치하며 진나라와 위나라의 두 군대를 격파했다.
楚軍出兵擊王離, 大破之.
초나라의 군대도 출병하여 왕리(王離)를 공격하여 대파했다.
19
沛公引兵西, 遇彭越昌邑, 因與俱攻秦軍, 戰不利.
패공은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진군하다가 창읍에서 팽월과 만나 함께 진나라 군대를 공격했으나 전세가 불리했다.
還至栗, 遇剛武侯, 奪其軍, 可四千餘人, 并之.
철수하여 율현(栗縣)에 이르러 강무후(剛武侯)를 만나서 그의 군사 4천여 명 가량을 빼앗아서 합류시켰다.
與魏將皇欣魏申徒武蒲之軍并攻昌邑, 昌邑未拔. 西過高陽.
위나라의 장수 황흔(皇欣), 신도무포(申徒武蒲)의 군사와 함께 창읍을 공격했으나 창읍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서진하여 고양(高陽)을 거쳐서 갔다.
酈食其(謂)監門, 曰: 諸將過此者多, 吾視沛公大人長者.
역이기(酈食其)가 문지기에게 말했다. "여러 장수가 이곳을 많이 지나갔지만 내가 보기에 패공이 대인이고 덕이 있는 분이시오."
乃求見說沛公. 沛公方踞床, 使兩女子洗足.
그리고는 패공을 만나 유세하고자 했다. 패공이 마침 침상에 걸터앉아 두 여자에게 발을 씻기게 하고 있었다.
酈生不拜, 長揖, 曰: 足下必欲誅無道秦, 不宜踞見長者.
역생(酈生)은 절을 하지 않고 허리 굽혀 인사하며 말했다. "족하께서 반드시 무도한 진나라를 토벌하고자 하면 걸터 앉아서 덕이 있는 사람을 만나서는 안 됩니다."
於是沛公起, 攝衣謝之, 延上坐.
이에 패공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며 사죄하고 상석으로 이끌었다.
食其說沛公襲陳留, 得秦積粟.
역이기는 패공에게 진류를 습격하여 진나라가 쌓아 놓은 식량을 손에 넣으라고 권했다.
乃以酈食其為廣野君, 酈商為將, 將陳留兵, 與偕攻開封, 開封未拔.
이에 역이기를 광야군(廣野君)으로 삼고 역상(酈商)을 장수로 삼아 진류의 군사를 거느리고 함께 개봉(開封)을 공격했으나 개봉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西與秦將楊熊戰白馬, 又戰曲遇東, 大破之.
서쪽으로 진군하여 백마(白馬)에서 진나라 장수 양웅(楊熊)과 교전하고, 또 곡우(曲遇) 동쪽에서 싸워 대파했다.
楊熊走之滎陽, 二世使使者斬以徇.
양웅이 형양으로 달아나자 진 2세황제가 사신을 보내 참수하여 도성에 내걸었다.
南攻潁陽, 屠之.
因張良遂略韓地轘轅.
패공은 남쪽으로 영양(潁陽)을 공격하여 도륙하였다. 장량(張良)과 함께 한(韓)나라의 땅 환원(轘轅)을 공략했다.
20
當是時, 趙別將司馬卬方欲渡河入關, 沛公乃北攻平陰, 絕河津.
이 당시 조나라의 별장 사마앙(司馬卬)이 막 황하를 건너 함곡관에 진입하려고 했다. 패공은 바로 북쪽으로 평음(平陰)을 공략하여 황하 나루를 막았다.
南, 戰雒陽東, 軍不利, 還至陽城, 收軍中馬騎, 與南陽守齮戰犨東, 破之.
또 남쪽으로 진군하여 낙양 동쪽에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자 회군하여 양성에 이르러 군중의 기병을 모아 남양 태수 여의(呂齮)와 주현(犨縣) 동쪽에서 싸워 격파했다.
略南陽郡, 南陽守齮走, 保城守宛.
남양군이 공략당하자 남양태수 여의(呂齮)는 달아나 완성(宛城)을 굳게 지켰다.
沛公引兵過而西.
패공이 병사를 이끌고 완성을 지나쳐 서쪽으로 진군했다.
張良諫曰: 沛公雖欲急入關, 秦兵尚眾, 距險. 今不下宛, 宛從後擊, 彊秦在前, 此危道也.
장량이 간하였다. "패공께서 비록 서둘러 함곡관으로 진입하려 하시지만 진나라 병사가 여전히 많고 험준한 곳을 이용하여 저항하고 있습니다. 지금 완성을 함락시키지 않으면 완성이 뒤에서 공격하고 강력한 진나라가 앞에서 버티게 되니 이는 위험한 방법입니다."
於是沛公乃夜引兵從他道還, 更旗幟, 黎明, 圍宛城三匝.
이에 패공은 그날 밤으로 병사를 이끌고 다른 길로 돌아와 깃발을 바꾸고 동이 틀 무렵 완성을 여러 겹으로 포위했다.
南陽守欲自剄. 其舍人陳恢曰: 死未晚也.
남양태수가 자결하려고 하였다. 남양태수의 사인 진회(陳恢)가 말했다. "나중에 죽어도 늦지 않습니다."
乃踰城見沛公, 曰: 臣聞足下約, 先入咸陽者王之. 今足下留守宛. 宛, 大郡之都也, 連城數十, 人民眾, 積蓄多, 吏人自以為降必死, 故皆堅守乘城. 今足下盡日止攻, 士死傷者必多; 引兵去宛, 宛必隨足下後; 足下前則失咸陽之約, 後又有彊宛之患. 為足下計, 莫若約降, 封其守, 因使止守, 引其甲卒與之西. 諸城未下者, 聞聲爭開門而待, 足下通行無所累.
그리고는 성을 넘어가 패공을 만나 말했다. "신은 족하께서 함양에 먼저 진입하는 사람을 왕으로 삼는다는 약속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족하께서는 이곳에 머물며 완성을 포위하고 있습니다. 완성은 큰 군의 도성으로 수십 개의 성이 연이어 있고 인구도 많고 식량도 많이 비축되어 있으며, 관리와 백성이 항복하면 반드시 죽게 될 것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모두 성을 굳게 지키고 있습니다. 지금 족하께서 하루 종일 이곳에 머물며 공격하게 되면 사상자가 틀림없이 많을 것이고, 병사들을 이끌고 완성을 떠나시면 완성은 틀림없이 족하를 추격할 것입니다. 족하께서 전자를 따르면 함양의 약속을 잃게 되고, 후자를 따를 경우 완성의 강군이 추격해 올 우려가 있게 됩니다. 족하를 위해 계책을 올리자면, 항복을 약속받은 뒤 완성 태수를 봉하여 그에게 이곳을 남아서 지키게 하고 족하께서는 병사들을 이끌고 서쪽으로 진군하시느니 만 못합니다. 그러면 아직 함락되지 않은 성들도 이 소식을 듣고 다투어 성문을 열고 기다릴 것이고, 족하의 통행도 걱정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沛公曰: 善.
패공이 말했다. "좋다."
乃以宛守為殷侯, 封陳恢千戶.
引兵西, 無不下者.
바로 완성의 태수를 은후(殷侯)로 삼고, 진회에게 1천 호를 봉해 주었다. 이어 병사를 이끌고 서진하니 항복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
至丹水, 高武侯鰓襄侯王陵降西陵.
단수(丹水)에 이르니 고무후(高武侯) 새(鰓)와 양후(襄侯) 왕릉(王陵)이 서릉(西陵)에서 투항했다.
還攻胡陽, 遇番君別將梅鋗, 與皆, 降析酈.
패공이 회군해 호양(胡陽)을 공략하고 파군(番君)의 별장 매현(梅鋗)을 만나 함께 석현(析縣)과 여현(酈縣)을 항복시켰다.
遣魏人甯昌使秦, 使者未來.
是時章邯已以軍降項羽於趙矣.
위나라 사람 영창(寧昌)을 진나라에 사신으로 보냈으나 사신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이 때 장한은 이미 조나라에서 군대를 거느리고 항우에게 투항했다.
21
初, 項羽與宋義北救趙, 及項羽殺宋義, 代為上將軍, 諸將黥布皆屬, 破秦將王離軍, 降章邯, 諸侯皆附.
당초 항우는 송의와 함께 북쪽으로 조나라를 구원하러 나섰다가 항우가 송의를 죽이고 그를 대신해서 상장군이 되었고, 경포 등 여러 장수들이 모두 항우에게 귀속되어 진나라 장수 왕리를 격파하고 장한을 항복시키니 제후들이 모두 항우에게 귀의했다.
及趙高已殺二世, 使人來, 欲約分王關中.
조고가 진 2세황제를 시해한 뒤 사신을 보내 관중을 둘로 나누어 각자 왕이 될 것을 약조하려 했다.
沛公以為詐, 乃用張良計, 使酈生陸賈往說秦將, 啗以利, 因襲攻武關, 破之.
패공은 이를 거짓으로 판단하여 장량의 계책을 받아들여 역생과 육고(陸賈)를 보내 진나라의 장수들을 설득하고 뇌물을 주어 유혹한 다음 바로 무관을 습격하여 격파했다.
又與秦軍戰於藍田南, 益張疑兵旗幟, 諸所過毋得掠鹵, 秦人喜, 秦軍解, 因大破之.
또 진나라의 군대와 남전(籃田) 남쪽에서 싸웠는데, 가짜 군사와 깃발을 늘리고 지나는 곳에서 약탈을 하지 못하도록 하니 진나라 사람들이 기뻐했고 진나라의 군사들은 해이해져 대파할 수 있었다.
又戰其北, 大破之, 乘勝, 遂破之。
또 남전 북쪽에서도 진나라 군사와 싸워 대파하고 승세를 타고 마침내 무찔렀다.
22
漢元年十月, 沛公兵遂先諸侯至霸上.
한 원년 10월, 패공의 군대가 마침내 제후들 보다 앞서 패상(覇上)에 이르렀다.
秦王子嬰素車白馬, 系頸以組, 封皇帝璽符節, 降軹道旁.
진(秦)나라 왕 자영(子嬰)이 흰말이 끄는 흰 수레를 타고 인끈을 목에 감고서 황제의 옥새와 부절을 봉하여 지도(軹道)의 옆에서 항복하였다.
諸將或言誅秦王. 沛公曰: 始懷王遣我, 固以能寬容. 且人已服降, 又殺之, 不祥.
장수들 중 누군가가 진왕(秦王)을 죽이자고 했다. 패공이 말했다. "처음 회왕께서 나를 보낸 것은 실로 내가 관용을 베풀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 진왕이 이미 항복을 했으니 죽이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다."
乃以秦王屬吏, 遂西入咸陽.
이에 진왕을 옥리에게 맡기고 마침내 서쪽으로 진군하여 함양에 입성했다.
欲止宮休舍, 樊噲張良諫, 乃封秦重寶財物府庫, 還軍霸上.
궁중에 머물며 편히 쉬려고 하자 번쾌와 장량이 간하자 진나라의 보물과 재물 창고를 봉한 뒤 패상으로 회군했다.
召諸縣父老豪桀曰: 父老苦秦苛法久矣, 誹謗者族, 偶語者棄市. 吾與諸侯約, 先入關者王之, 吾當王關中. 與父老約, 法三章耳. 殺人者死, 傷人及盜抵罪. 餘悉除去秦法. 諸吏人皆案堵如故. 凡吾所以來, 為父老除害, 非有所侵暴, 無恐. 且吾所以還軍霸上, 待諸侯至而定約束耳.
회군한 후 여러 현의 부로와 호걸들을 불러 말했다. "부로들이 진나라의 가혹한 법에 시달린 지 오래되었으며 비방하는 자들은 멸족하였고, 모여서 불평하는 자들은 저잣거리에서 처형당했습니다. 내가 제후들과 약속하기를 관중에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왕이 되기로 하였으니, 내가 관중의 왕이 되어야 합니다. 부로들과 법을 세 조항으로만 약속하고자 합니다.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고, 사람을 다치게 한 자와 도둑질 한 자는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할 것입니다. 나머지 진나라의 법은 모두 없애겠습니다. 관리와 백성들은 모두 전처럼 편안하게 지내면 됩니다. 요컨대 내가 온 것은 부로들을 위해 해로움을 없애기 위해서이지 포악한 짓을 하려는 것이 아니니 조금도 두려워하지 마시오! 또 내가 패상으로 군사를 돌리는 것은 제후들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규약을 제정하려는 것일 뿐이오."
乃使人與秦吏行縣鄉邑, 告諭之.
이어 사람을 시켜 진나라의 관리와 함께 현, 향, 읍을 순시하며 이를 널리 알리게 했다.
秦人大喜, 爭持牛羊酒食獻饗軍士。
진나라의 백성들은 크게 기뻐하며 앞을 다투어 소와 양, 술과 먹을 것을 가지고 와서 군사들에게 대접하려 했다.
沛公又讓不受, 曰: 倉粟多, 非乏, 不欲費人.
패공은 또 사양하고 받지 않으며 말했다. "창고에 양식이 많아 부족함이 없으니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겠습니다."
人又益喜, 唯恐沛公不為秦王。
백성들이 더욱 기뻐하며 오직 패공이 진나라의 왕이 되지 못할까봐 걱정했다.
23
或說沛公曰: 秦富十倍天下, 地形彊. 今聞章邯降項羽, 項羽乃號為雍王, 王關中. 今則來, 沛公恐不得有此. 可急使兵守函谷關, 無內諸侯軍, 稍徵關中兵以自益, 距之.
누군가가 패공에게 권하여 말했다. "진나라의 부유함은 천하의 열 배나 되고 지형은 견고합니다. 지금 듣자하니 장한이 항우에게 항복하고, 항우는 그를 옹왕이라 부르며 관중의 왕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지금 만약 그들이 온다면 패공께서는 이곳을 차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서둘러 병사를 보내 함곡관을 지켜 제후군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관중에서 병사를 징발하고 우리의 병력을 보태서 그들을 막으십시오."
沛公然其計, 從之.
패공은 그 계책을 옳다고 여겨 그대로 따랐다.
十一月中, 項羽果率諸侯兵西, 欲入關, 關門閉.
11월 중순, 항우가 과연 제후의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진군해 함곡관에 진입하려 했으나 관문이 닫혀 있었다.
聞沛公已定關中, 大怒, 使黥布等攻破函谷關.
패공이 이미 관중을 평정했다는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경포 등에게 함곡관을 쳐부수도록 했다.
十二月中, 遂至戲.
12월 중순에 마침내 희수(戲水)에 이르렀다.
沛公左司馬曹無傷聞項王怒, 欲攻沛公, 使人言項羽曰: 沛公欲王關中, 令子嬰為相, 珍寶盡有之. 欲以求封.
패공의 좌사마 조무상(曹無傷)이 항왕이 노하여 패공을 공격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는 사람을 시켜 항우에게 고했다. "패공이 관중의 왕이 되려고 자영(子嬰)을 재상으로 삼아 진귀한 보물들을 모두 다 차지하려 합니다." 조무상은 이런 말로 작위를 받고자 한 것이다.
亞父勸項羽擊沛公. 方饗士, 旦日合戰.
아보(亞父:범증)가 항우에게 패공을 공격하라고 권했다. 이에 병사들을 배불리 먹이고 날이 새면 교전하고자 했다.
是時項羽兵四十萬, 號百萬; 沛公兵十萬, 號二十萬, 力不敵.
이때 항우의 병력은 40만 명인데 1백만이라 했고, 패공의 병력은 10만 명인데 20만 명이라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會項伯欲活張良, 夜往見良, 因以文諭項羽, 項羽乃止.
마침 항백이 장량을 살리려고 밤에 장량을 만나러 갔고, 이로 인해 장량이 항우를 설득하여 항우가 공격을 중지했다.
沛公從百餘騎, 驅之鴻門, 見謝項羽.
패공은 100여 기병을 데리고 홍문으로 말을 몰아 항우를 만나 사죄했다.
項羽曰: 此沛公左司馬曹無傷言之. 不然, 籍何以生此.
항우가 말했다. "이 일은 패공의 좌사마 조무상이 말한 것이오. 그렇지 않았다면 이 항적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까지 하겠소!"
沛公以樊噲張良故, 得解歸.
歸, 立誅曹無傷.
패공은 번쾌와 장량의 도움으로 벗어나 돌아올 수 있었다. 돌아오자마자 조무상을 죽였다.
24
項羽遂西, 屠燒咸陽秦宮室, 所過無不殘破.
항우가 마침내 서쪽으로 진군하여 함양 진나라의 궁실을 도륙하니 가는 곳마다 파괴되지 않은 곳이 없었다.
秦人大失望, 然恐, 不敢不服耳.
진나라 백성들은 크게 실망했으나 두려워 복종하지 않을 수 없었다.
25
項羽使人還報懷王. 懷王曰: 如約.
항우가 사람을 보내 회왕에게 보고했다.
초회왕이 말하기를 "약속대로 하라"고 했다.
項羽怨懷王不肯令與沛公俱西入關, 而北救趙, 後天下約.
항우는 회왕이 패공과 함께 서진하여 함곡관으로 들어가지 않게 하고 북쪽으로 조나라를 구원하게 하는 바람에 천하의 약속에 뒤처진 것을 원망했다.
乃曰: 懷王者, 吾家項梁所立耳, 非有功伐, 何以得主約. 本定天下, 諸將及籍也.
이에 항우가 말했다. "회왕은 우리 집안 항량 숙부께서 세운 사람일 뿐이니 공로가 있는 것도 아닌데 어찌 맹약을 주도할 수 있단 말인가! 본래 천하를 평정한 것은 여러 장수들과 나 항적이다."
乃詳尊懷王為義帝, 實不用其命.
짐짓 회왕을 의제(義帝)로 높였으나 실제로는 그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 이 장의 내용은 항우본기(項羽本紀)의 내용과 유사하며, 항우(項羽)는 제후들에 대한 분봉(分封)을 마치고 각자의 제후국으로 돌아간 후 초나라 의제(義帝)를 죽였다.
제나라와 조나라가 분봉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고, 한왕(漢王) 유방(劉邦)이 회군하여 다시 관중으로 돌아와 초회왕의 약속을 지킬 것을 주장하여 초한전쟁이 시작되었다.
26. 항우(項羽)의 분봉(分封)
正月, 項羽自立為西楚霸王, 王梁楚地九郡, 都彭城.
정월, 항우가 스스로 서초패왕(西楚覇王)으로 즉위하여 양(梁)과 초(楚)의 땅인 아홉 개 군을 통치하며 팽성을 도읍으로 삼았다.
負約, 更立沛公為漢王, 王巴蜀漢中, 都南鄭.
당초의 약속을 어기고 패공을 한왕(漢王)으로 바꾸어 파, 촉, 한중 땅을 다스리게 하고 남정을 도읍으로 정했다.
三分關中, 立秦三將; 章邯為雍王, 都廢丘; 司馬欣為塞王, 都櫟陽; 董翳為翟王, 都高奴.
관중을 셋으로 나누어 진나라의 세 장수를 봉하니, 장한(章邯)을 옹왕(雍王)으로 삼아 폐구(廢丘)를 도읍으로 정하고, 사마흔(司馬欣)을 새왕(塞王)으로 삼아 역양을 도읍으로 정하고, 동예(董翳)는 적왕(翟王)으로 삼아 고노(高奴)를 도읍으로 정했다.
楚將瑕丘申陽為河南王, 都洛陽.
초나라의 장수 하구(瑕丘)의 신양(申陽)은 하남왕으로 삼아 낙양에 도읍하게 했다.
趙將司馬卬為殷王, 都朝歌.
조나라의 장수 사마앙(司馬卬)을 은왕(殷王)으로 삼아 조가(朝歌)에 도읍하게 했다.
趙王歇徙王代.
조왕 헐(趙王 歇)은 대(代)를 다스리게 했다.
趙相張耳為常山王, 都襄國.
조나라 재상 장이(張耳)는 상산왕으로 삼아 양국(襄國)에 도읍하게 했다.
當陽君黥布為九江王, 都六.
당양군 경포를 구강왕으로 삼아 육현에 도읍하게 했다.
懷王柱國共敖為臨江王, 都江陵.
회왕의 주국 공오를 임강왕으로 삼아 강릉에 도읍하게 했다.
番君吳芮為衡山王, 都邾.
파군 오예를 형산왕으로 삼아 주읍에 도읍하게 했다.
燕將臧荼為燕王, 都薊.
연나라의 장수 장도를 연왕으로 삼아 계현에 도읍하게 했다.
故燕王韓廣徙王遼東.
廣不聽, 臧荼攻殺之無終.
전에 연왕이었던 한광은 요동으로 옮겨 왕으로 삼았다. 한광(韓廣)이 듣지 않자 장도가 그를 공격하여 무종에서 죽였다.
封成安君陳餘河閒三縣, 居南皮.
성안군 진여에게는 하간의 세 현에 봉하여 남피에 머물게 했다.
封梅鋗十萬戶.
매현에게는 10만 호의 후에 봉했다.
27
四月, 兵罷戲下, 諸侯各就國.
4월, 제후들이 휘하 군사를 철수시켜 각자의 봉국으로 떠났다.
漢王之國, 項王使卒三萬人從, 楚與諸侯之慕從者數萬人, 從杜南入蝕中.
한왕이 봉국으로 갈 때 항왕은 병사 3만 명을 따르게 했는데 초나라와 제후들 중에서도 존경하여 따르는 자가 수만 명이었으며, 두현(杜縣) 남쪽을 따라 식(蝕) 땅으로 들어갔다.
去輒燒絕棧道, 以備諸侯盜兵襲之, 亦示項羽無東意.
군대가 지나온 뒤 곧 잔도(棧道)를 불태워 끊어 버림으로써 제후와 도적의 습격을 방비하고 또 항우에게 동쪽으로 갈 뜻이 없음을 보여준 것이다.
至南鄭, 諸將及士卒多道亡歸, 士卒皆歌思東歸.
남정(南鄭)에 도착할 무렵 도망쳐서 고향으로 돌아간 장수와 병사들이 많았으며, 병사들은 모두 노래를 부르며 동쪽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韓信說漢王曰: 項羽王諸將之有功者, 而王獨居南鄭, 是遷也. 軍吏士卒皆山東之人也, 日夜跂而望歸, 及其鋒而用之, 可以有大功. 天下已定, 人皆自寧, 不可復用. 不如決策東鄉, 爭權天下.
한신(韓信)이 한왕에게 권하여 말했다. "항우가 장수들 중 공을 세운 사람들을 왕으로 봉했는데 오직 왕만 남정에 머물게 한 것은 유배시킨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 군의 장교와 병사들은 모두 산동 출신으로 낮이나 밤이나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발돋움하며 바라고 있으니, 이런 날카로운 기세를 활용하면 큰 공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천하가 안정된 후 사람들이 모두 안녕을 찾으면 다시 활용할 수 없습니다. 계책을 마련하여 고향이 있는 동쪽으로 진군하여 천하의 패권을 쟁취하느니만 못합니다."
28
項羽出關, 使人徙義帝, 曰: 古之帝者地方千里, 必居上游.
항우는 함곡관을 나서자 사람을 보내 의제를 옮기게 하면서 말했다. "옛날 제왕들의 땅은 사방 천 리에 지나지 않았고 반드시 강의 상류에 기거했습니다."
乃使使徙義帝長沙郴縣, 趣義帝行.
그리고는 사신을 보내 의제(義帝)를 장사(長沙)의 침현(郴縣)으로 옮기게 하고 의제의 행차를 재촉했다.
群臣稍倍叛之, 乃陰令衡山王臨江王擊之, 殺義帝江南.
신하들이 점차 의제를 배반하자 은밀히 형산왕(衡山王)과 임강왕(臨江王)에게 의제를 공격하도록 명하여 강남에서 의제를 죽였다.
項羽怨田榮, 立齊將田都為齊王.
항우는 전영(田榮)에게 원한이 있어 제나라의 장수 전도를 제나라 왕으로 세웠다.
田榮怒, 因自立為齊王, 殺田都而反楚, 予彭越將軍印, 令反梁地.
전영이 노하여 스스로 제나라 왕이 되어 전도를 죽이고 초나라를 배반하였으며, 팽월에게 장군의 도장을 주어 양 땅에서 반란을 일으키게 했다.
楚令蕭公角擊彭越, 彭越大破之.
초나라는 소공각(蕭公角)에게 팽월을 공격하게 했으나 팽월이 그를 대파했다.
陳餘怨項羽之弗王己也, 令夏說說田榮, 請兵擊張耳.
진여는 항우가 자신을 왕에 봉하지 않은 것에 원한을 품고, 하열(夏說)에게 전영을 설득하게 해 군대를 요청하여 장이를 공격하게 했다.
齊予陳餘兵, 擊破常山王張耳, 張耳亡歸漢.
제나라가 진여에게 병사를 주자 상산왕 장이를 격파했고, 장이는 한왕에게로 도망쳐 귀순했다.
迎趙王歇於代, 復立為趙王.
趙王因立陳餘為代王.
진여는 조왕 헐을 대(代)에서 맞이하여 다시 조왕(趙王)으로 세웠다. 조왕은 그로 인해 진여를 대 땅의 왕으로 삼았다.
項羽大怒, 北擊齊.
항우는 대노하여 북진하여 제나라를 공격했다.
29
八月, 漢王用韓信之計, 從故道還, 襲雍王章邯.
8월, 한왕이 한신의 계책을 써서 옛길을 따라 돌아서 옹왕 장한을 습격했다.
邯迎擊漢陳倉, 雍兵敗, 還走.
止戰好畤, 又復敗, 走廢丘.
漢王遂定雍地.
장한은 진창(陳倉)에서 한(漢)나라를 맞이하여 공격했으나 옹왕 장한의 군대가 패하여 도주했다. 호치(好畤)에 머물러 다시 싸웠지만 또 패하여 폐구로 도망쳤다. 한왕이 마침내 옹 지역을 평정했다.
東至咸陽, 引兵圍雍王廢丘, 而遣諸將略定隴西北地上郡.
동진하여 함양에 이르러 병사를 이끌고 폐구에서 옹왕 장한을 포위하여, 여러 장수들을 보내 농서, 북지, 상군을 공략하여 평정했다.
令將軍薛歐王吸出武關, 因王陵兵南陽, 以迎太公呂後於沛.
장군 설구(薛歐),왕흡(王吸)에게는 무관을 나가 남양의 왕릉의 군대를 빌려 태공과 여후를 패현에서 모셔오게 했다.
楚聞之, 發兵距之陽夏, 不得前.
초나라가 이를 듣고 군사를 보내 양하에서 막아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令故吳令鄭昌為韓王, 距漢兵.
전에 오현의 현령이었던 정창을 한왕(韓王)으로 삼아 한(漢)나라 군대에 저항했다.
▶️ 이 장은 초한전쟁의 시작에 대한 기록으로 초한전쟁(楚漢戰爭)은 기원전 206년 진나라의 멸망 후 서쪽의 초나라 패왕 항우(項羽)와 한나라 왕 유방(劉邦)과의 5년에 걸친 전쟁이다.
초 회왕이 먼저 진(秦)나라를 격파하는 사람을 왕으로 세우겠다고 약속하여 유방이 처음으로 함곡관을 점령하였는데 항우가 이를 시기하여 유방을 제거하려는 데부터 시작되었다.
30 초한전쟁의 시작
二年, 漢王東略地, 塞王欣翟王翳河南王申陽皆降.
한왕 2년, 한왕이 동쪽 지역을 점령하자 새왕 사마흔, 적왕 동예, 하남왕 신양이 모두 투항했다.
韓王昌不聽, 使韓信擊破之.
한왕(韓王) 정창이 말을 듣지 않자 한신(韓信)에게 격파하도록 했다.
於是置隴西北地上郡渭南河上中地郡, 關外置河南郡.
이에 농서, 북지, 상군, 위남(渭南), 하상(河上), 중지(中地) 등에 군을 두었으며, 함곡관 밖에는 하남군(河南郡)을 설치했다.
更立韓太尉信為韓王.
다시 한태위(韓太尉) 신(信)을 한왕(韓王)으로 세웠다.
諸將以萬人若以一郡降者, 封萬戶.
장수들 중 1만 명의 병사나 혹은 군 하나를 바치고 투항하는 자는 만호후에 봉했다.
繕治河上塞.
하상군(河上郡)에 요새를 수리했다.
諸故秦苑囿園池, 皆令人得田之, 正月, 虜雍王弟章平.
이전의 진나라의 원유(苑囿)와 원지(园地)들을 모두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 농사짓게 해주었으며, 정월에 옹왕 장한의 아우 장평(章平)을 사로잡았다.
大赦罪人.
죄수들을 대사면하였다.
31
漢王之出關至陜, 撫關外父老, 還, 張耳來見, 漢王厚遇之.
한왕은 무관(武關)을 나와 섬현(陝縣)에 이르러 관 밖의 부로들을 위로하고 돌아왔으며, 장이(張耳)가 와서 알현하자 한왕은 후하게 대우했다.
32
二月, 令除秦社稷, 更立漢社稷.
2월, 진나라의 사직단(社稷壇)을 폐기하고 한나라의 사직단으로 다시 세우도록 하였다.
33
三月, 漢王從臨晉渡, 魏王豹將兵從.
3월, 한왕이 임진(臨晉)에서 황하를 건너자 위왕(魏王) 표(豹)가 군사를 이끌고 따랐다.
下河內, 虜殷王, 置河內郡.
南渡平陰津, 至雒陽.
하내를 함락시키고 은왕 사마앙을 포로로 잡은 뒤 하내군을 설치했다. 남쪽으로 평음진(平陰津)을 건너 낙양에 이르렀다.
新城三老董公遮說漢王以義帝死故.
신성(新城)의 삼로(三老) 동공(董公)이 한왕을 가로막고 의제가 죽은 연유를 말했다.
漢王聞之, 袒而大哭.
遂為義帝發喪, 臨三日.
한왕이 이를 듣고 왼쪽 어깨를 드러낸 채 크게 통곡하였다. 마침내 의제를 위하여 상(喪)을 발표하고 사흘 동안 곡을 하였다.
發使者告諸侯曰: 天下共立義帝, 北面事之. 今項羽放殺義帝於江南, 大逆無道. 寡人親為發喪, 諸侯皆縞素. 悉發關內兵, 收三河士, 南浮江漢以下, 願從諸侯王擊楚之殺義帝者.
한왕은 사신을 보내 제후들에게 고하였다. "천하 제후들이 함께 의제를 옹립하여 북면하여 섬겼다. 지금 항우가 멋대로 의제(義帝)를 강남에서 살해하니 대역무도한 짓이다. 과인이 몸소 발상 하였으니 제후들은 모두 소복을 입으라. 관중의 모든 병사를 동원하고 삼하(三河)의 군사를 거두어 장강과 한수를 따라 남하하려 하니 제후왕들은 나를 따라 의제를 죽인 초나라를 공격하기 바란다."
34
是時項王北擊齊, 田榮與戰城陽. 田榮敗, 走平原, 平原民殺之. 齊皆降楚.
당시 항왕은 북진하여 제나라를 공격하여 전영과 성양에서 교전했다. 전영이 패하여 평원으로 달아나자 평원의 백성들이 그를 죽였다. 제나라가 모두 초나라에 항복했다.
楚因焚燒其城郭, 系虜其子女. 齊人叛之.
초나라는 제나라 성곽에 불을 지르고 자녀들을 포로로 끌고 갔다. 이에 제나라의 백성들이 초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田榮弟橫立榮子廣為齊王, 齊王反楚城陽.
전영의 동생 전횡이 전영의 아들 전광을 제왕으로 세우고, 제왕 전광은 성양에서 초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項羽雖聞漢東, 既已連齊兵, 欲遂破之而擊漢.
항우는 비록 한나라가 동진한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이미 제나라의 군대와 잇따라 싸우고 있어 이들을 격파한 뒤 한나라를 공격하고자 했다.
漢王以故得劫五諸侯兵, 遂入彭城.
한왕은 이런 까닭에 다섯 제후의 군대를 겁박하여 마침내 팽성에 입성했다.
項羽聞之, 乃引兵去齊, 從魯出胡陵, 至蕭, 與漢大戰彭城靈壁東睢水上, 大破漢軍, 多殺士卒, 睢水為之不流.
항우가 이를 듣고 바로 군대를 이끌고 제나라를 떠나 노현에서 호릉으로 나와 소현에 이르러 한나라의 군대와 평성과 영벽(靈壁) 동쪽의 수수(睢水) 가에서 크게 싸워 한나라의 군대를 대파했으며, 많은 병사들이 죽어 수수가 흐르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乃取漢王父母妻子於沛, 置之軍中以為質.
이어 한왕의 부모와 처자식을 패현에서 붙잡아 군중에 인질로 잡아 두었다.
當是時, 諸侯見楚彊漢敗, 還皆去漢復為楚.
당시 제후들은 강한 초나라에게 한나라가 패하는 것을 보고 모두 한나라를 떠나 다시 초나라를 도왔다.
塞王欣亡入楚.
새왕(塞王) 사마흔이 초나라로 도망쳐 왔다.
35. 경포(黥布)
呂后兄周呂侯為漢將兵, 居下邑.
여후의 오빠 주여후(周呂侯)는 한왕을 위해 병사를 거느리고 하읍(下邑)에 주둔하고 있었다.
漢王從之, 稍收士卒, 軍碭.
漢王乃西過梁地, 至虞.
한왕이 그에게 가서 의탁하며 차츰 병사들을 모으며 탕현에 주둔했다. 그후 한왕은 서진하여 양 땅을 지나 우현(虞縣)에 이르렀다.
使謁者隨何之九江王布所, 曰: 公能令布舉兵叛楚, 項羽必留擊之. 得留數月, 吾取天下必矣.
알자(謁者) 수하(隨何)를 구강왕 경포(黥布)가 있는 곳으로 보내면서 말했다. "그대가 경포로 하여금 군사를 일으켜 초나라를 배반하게 만들면 항우는 틀림없이 그곳에 머무르면서 경포를 공격할 것이다. 몇 달 동안만 머무르게 만들면 내가 반드시 천하를 얻을 것이다."
隨何往說九江王布, 布果背楚.
楚使龍且往擊之.
수하가 가서 구강왕 경포에게 유세했고, 경포는 과연 초나라를 배반했다. 초나라는 용저(龍且)를 보내 경포를 공격하게 했다.
36. 장한(章邯)
漢王之敗彭城而西, 行使人求家室, 家室亦亡, 不相得.
한왕이 팽성에서 패하여 서쪽으로 철군하다가 사람을 보내 가족을 찾았으나 가족 역시 도망쳐 만날 수가 없었다.
敗後乃獨得孝惠, 六月, 立為太子, 大赦罪人.
패하여 도망치다가 아들 효혜(孝惠)만 찾아서 6월에 효혜를 태자로 세우고 죄수들을 대사면하였다.
令太子守櫟陽, 諸侯子在關中者皆集櫟陽為衛.
태자에게 역양(櫟陽)을 지키게 하고, 제후의 자식들로서 관중에 있는 자들도 모두 역양으로 불러들여 지키게 했다.
引水灌廢丘, 廢丘降, 章邯自殺.
更名廢丘為槐里.
물을 끌어들여 폐구(廢丘)로 흐르게 하니 폐구는 항복하고 장한은 자살했다. 폐구를 괴리(槐里)로 이름을 바꾸었다.
於是令祠官祀天地四方上帝山川, 以時祀之.
이에 제사관에게 천지, 사방, 상제, 산천에 제사 지내도록 명하고 이후로는 때맞추어 제사드리도록 했다.
興關內卒乘塞.
관중 내에 있는 군사를 일으켜 변방 요새를 지키게 했다.
37. 경포(黥布)
是時九江王布與龍且戰, 不勝, 與隨何閒行歸漢.
이때 구강왕 경포는 용저(龍且)와 싸워 이기지 못하자 수하(隨何)와 함께 샛길을 이용하여 한나라에 귀순하였다.
漢王稍收士卒, 與諸將及關中卒益出, 是以兵大振滎陽, 破楚京索閒.
한왕은 차츰 병사들을 모아 여러 장수 및 관중의 병사를 더 보태어 출정하니 군대의 위엄이 형양에 크게 떨쳤고, 경읍(京邑)과 색읍(索邑) 사이에서 초나라를 격파했다.
38. 위왕 표(魏王 豹)
三年, 魏王豹謁歸視親疾, 至即絕河津, 反為楚.
한왕 3년, 위왕 표(魏王豹)가 한왕을 배알하고 어머니의 문병을 핑계로 귀국한 뒤 즉시 황하 나루를 폐쇄하고 한나라를 배반하고 초나라와 화친을 맺었다.
漢王使酈生說豹, 豹不聽.
漢王遣將軍韓信擊, 大破之, 虜豹.
한왕이 역생(酈生)을 보내 위왕 표를 설득했으나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한왕은 장군 한신을 보내 공격하여 대파하고 표(豹)를 사로잡았다.
遂定魏地, 置三郡, 曰河東太原上黨.
마침내 위(魏) 땅이 평정되었고, 세 개의 군을 설치하여 하동, 태원, 상당군이라고 하였다.
漢王乃令張耳與韓信遂東下井陘擊趙, 斬陳餘趙王歇.
한왕은 이어 장이와 한신에게 동쪽으로 진격해 정형(井陘)에서 내려와 조나라를 공격하게 하여 진여와 조왕 헐의 목을 베었다.
其明年, 立張耳為趙王.
이듬해 장이를 조왕(趙王)으로 세웠다.
39. 아보(亞父; 범증)
漢王軍滎陽南, 筑甬道屬之河, 以取敖倉. 與項羽相距歲餘.
한왕은 형양 남쪽에 주둔하면서 황하로 통하는 용도(甬道)를 쌓아 오창(敖倉)의 양식을 가져왔다. 이렇게 항우와 1년 넘게 대치했다.
項羽數侵奪漢甬道, 漢軍乏食, 遂圍漢王.
항우가 여러 차례 한나라의 용도를 침공하여 식량을 빼앗아 한나라 군대가 식량이 부족해지자 마침내 한왕을 포위했다.
漢王請和, 割滎陽以西者為漢. 項王不聽.
한왕이 강화를 청하여 형양 서쪽을 한나라 땅으로 떼어달라고 했다. 항왕은 듣지 않았다.
漢王患之, 乃用陳平之計, 予陳平金四萬斤, 以閒疏楚君臣. 於是項羽乃疑亞父.
한왕이 이것이 걱정이 되어 진평의 계책을 이용하여 진평에게 금 4만 근을 주고 초나라의 군신 사이를 이간질시켜 멀어지게 했다. 이에 항우는 아보(亞父)를 의심했다.
亞父是時勸項羽遂下滎陽, 及其見疑, 乃怒, 辭老, 願賜骸骨歸卒伍, 未至彭城而死.
아보는 당시 항우에게 형양을 필히 함락시키자고 권했었는데 자신이 의심을 받자 화가 나서 나이를 핑계로 사직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백성으로 늙어죽기를 원했으며, 길을 떠나 팽성에 이르기도 전에 죽었다.
40. 위표(魏豹)
漢軍絕食, 乃夜出女子東門二千餘人, 被甲, 楚因四面擊之.
한군의 식량이 다 떨어지자 한왕은 밤중에 여자 2천여 명에게 갑옷을 입히고 동문으로 나가게 하니 초나라 군사가 사방에서 이들을 공격했다.
將軍紀信乃乘王駕, 詐為漢王, 誑楚, 楚皆呼萬歲, 之城東觀, 以故漢王得與數十騎出西門遁.
장군 기신(紀信)이 한왕의 수레를 타고 한왕으로 가장하여 초나라 군사를 속이니 초나라 군사들은 모두 만세를 부르며 성 동쪽으로 와서 구경하자 이 사이에 한왕은 기병 수십 명을 이끌고 서쪽 문을 빠져나와 달아났다.
令御史大夫周苛魏豹樅公守滎陽.
諸將卒不能從者, 盡在城中.
한왕은 어사대부 주가(周苛), 위표(魏豹), 종공(樅公)에게 형향을 지키게 했다. 따를 수 없는 장수와 병사들은 모두 성안에 남아 있었다.
周苛樅公相謂曰: 反國之王, 難與守城. 因殺魏豹.
주가와 종공이 서로 말했다. "나라를 배반한 왕과는 함께 성을 지키기 어렵다"며 위표(魏豹)를 죽였다.
41. 원생(袁生)
漢王之出滎陽入關, 收兵欲復東.
한왕은 형양을 빠져나와 관중으로 들어가 병사들을 모아 다시 동쪽으로 진군하려 했다.
袁生說漢王曰: 漢與楚相距滎陽數歲, 漢常困. 願君王出武關, 項羽必引兵南走, 王深壁, 令滎陽成皋閒且得休. 使韓信等輯河北趙地, 連燕齊, 君王乃復走滎陽, 未晚也. 如此, 則楚所備者多, 力分, 漢得休, 復與之戰, 破楚必矣.
원생(袁生)이 한왕에게 권하여 말했다. "한나라와 초나라가 형양에서 대치하며 몇 년을 지내고 있는데 한나라가 늘 곤궁했습니다. 바라옵건대 군왕께서 무관을 나가시면 항우가 틀림없이 군사를 이끌고 남쪽으로 갈 것이니 왕께서는 보루를 높이 쌓고 형양과 성고 일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도록 명하십시오. 한신 등에게는 하북 조(趙)땅을 안정시키게 하시고, 연나라와 제나라가 연합하게 한 후 군왕께서 다시 형양으로 가셔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면 초나라는 지켜야 할 곳이 많아져 병력이 분산되고 한나라는 휴식을 얻어 다시 싸우면 초나라를 틀림없이 격파할 것입니다."
漢王從其計, 出軍宛葉閒, 與黥布行收兵.
한왕은 그의 계책에 따라 완현과 섭현 지역을 나와 경포와 함께 행군하며 병사들을 모았다.
42. 팽월(彭越)
項羽聞漢王在宛, 果引兵南.
漢王堅壁不與戰.
항우는 한왕이 완현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과연 병사를 이끌고 남하했다. 한왕은 군루를 견고히 지키고 싸우지 않았다.
是時彭越渡睢水, 與項聲薛公戰下邳, 彭越大破楚軍.
이때 팽월이 수수(睢水)를 건너서 항성(項聲), 설공(薛公)과 하비에서 싸워 팽월이 초군을 대파했다.
項羽乃引兵東擊彭越.
漢王亦引兵北軍成皋.
항우는 이에 군사를 이끌고 동진하여 팽월을 공격했다. 한왕도 역시 군사를 이끌고 북진하여 성고에 주둔했다.
項羽已破走彭越, 聞漢王復軍成皋, 乃復引兵西, 拔滎陽, 誅周苛樅公, 而虜韓王信, 遂圍成皋.
항우는 팽월을 격파하여 쫓아낸 후, 한왕이 다시 성고에 다시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바로 다시 병사를 이끌고 서진하여 형양을 함락시키고 주가(周苛)와 종공(樅公)을 죽이고 한왕(韓王) 신(信)을 포로로 잡아 드디어 성고를 포위했다.
43.
漢王跳, 獨與滕公共車出成皋玉門, 北渡河, 馳宿修武.
한왕은 성고에서 달아나 등공(滕公) 하후영과 수레를 같이 타고 성고의 옥문으로 탈출하여, 북쪽으로 황하를 건너 말을 달려 수무(修武)에 묵었다.
自稱使者, 晨馳入張耳韓信壁, 而奪之軍.
한왕은 자신을 사신이라 칭하면서 새벽에 말을 몰아 장이와 한신의 성벽 안에 들어가 그들의 군대를 빼앗았다.
乃使張耳北益收兵趙地, 使韓信東擊齊.
그리고는 장이를 북쪽으로 보내 조(趙) 땅에서 병사들을 더 모으게 하고, 한신에게는 동쪽으로 제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漢王得韓信軍, 則復振.
引兵臨河, 南饗軍小修武南, 欲復戰.
한왕은 한신의 군대를 얻자 다시 사기가 올랐다. 병사를 이끌고 황하에 이르러 남쪽으로 가서 소수무(小修武)의 남쪽에 주둔하며 다시 초나라와 싸우고자 했다.
郎中鄭忠乃說止漢王, 使高壘深塹, 勿與戰.
낭중 정충(鄭忠)이 한왕에게 중지하도록 권하면서, 군루를 높이 쌓고 참호를 깊게 판 후 싸우지 말라고 했다.
漢王聽其計, 使盧綰劉賈將卒二萬人, 騎數百, 渡白馬津, 入楚地, 與彭越復擊破楚軍燕郭西, 遂復下梁地十餘城.
한왕은 그 계책에 따라 노관(盧綰)과 유고(劉賈)에게 병사 2만, 기병 수백을 이끌고 백마진을 건너서 초나라 땅으로 들어가서 팽월을 도와 연현(燕縣) 성곽 서쪽에서 다시 초나라의 군대를 치게 하여 마침내 양 땅 10여 성을 다시 함락시켰다.
44. 제왕(齊王) 전광(田廣)
淮陰已受命東, 未渡平原.
회음후(淮陰侯) 한신(韓信)이 명을 받고 동진하여 평원진(平原津)을 아직 건너지 못하고 있었다.
漢王使酈生往說齊王田廣, 廣叛楚, 與漢和, 共擊項羽.
한왕은 역생(酈生)을 제왕(齊王) 전광(田廣)에게 보내 설득하여 전광이 초나라를 배신하고 한나라와 강화하여 함께 항우를 공격하기로 했다.
韓信用蒯通計, 遂襲破齊.
齊王烹酈生, 東走高密.
한신은 괴통(蒯通)의 계책에 따라 제나라를 습격하여 격파했다. 제왕(齊王)은 역생을 삶아 죽이고 동쪽 고밀(高密)로 달아났다.
項羽聞韓信已舉河北兵破齊趙, 且欲擊楚, 則使龍且周蘭往擊之.
항우는 한신이 이미 하북의 병사들을 일으켜 제나라와 조나라를 격파하고 또 초나라를 치려한다는 소식을 듣고 곧 용저(龍且)와 주란(周蘭)을 보내 한신을 치게 했다.
韓信與戰, 騎將灌嬰擊, 大破楚軍, 殺龍且. 齊王廣奔彭越.
한신이 이들과 교전하는데, 기장 관영(灌嬰)이 출격하여 초군을 대파하고 용저를 죽였다. 제왕 전광은 팽월에게 도망쳤다.
當此時, 彭越將兵居梁地, 往來苦楚兵, 絕其糧食.
이때 팽월은 군대를 양(梁) 지역에 주둔시켜 놓고 오가며 초나라 군사를 괴롭히며 식량 운반로를 끊었다.
45. 조구(曹咎)
四年, 項羽乃謂海春侯大司馬曹咎曰: 謹守成皋. 若漢挑戰, 慎勿與戰, 無令得東而已. 我十五日必定梁地, 復從將軍.
한왕 4년, 항우는 해춘후(海春侯) 대사마(大司馬) 조구(曹咎)에게 말했다. "성고(成皋)를 잘 지켜라. 만약 한나라가 도전해 오더라도 부디 맞서 싸우지 말고 동쪽으로 오지 못하게 하라. 내가 15일 이내에 틀림없이 양 지역을 평정하고 다시 장군과 합류할 것이다."
乃行擊陳留外黃睢陽, 下之.
그리고는 진군하면서 진류, 외황, 수양을 쳐서 함락시켰다.
漢果數挑楚軍, 楚軍不出, 使人辱之五六日, 大司馬怒, 度兵汜水.
한군(漢軍)이 과연 초군(楚軍)에게 여러 차례 도전했으나 초군이 나오지 않자 사람을 보내 대엿새 동안 욕설을 퍼붓자 대사마가 화가 나서 병사를 이끌고 사수를 건넜다.
士卒半渡, 漢擊之, 大破楚軍, 盡得楚國金玉貨賂.
군사들이 반쯤 건넜을 때 한군이 공격하여 초군을 대파하고 초나라의 금은보화와 재물을 모조리 노획하였다.
大司馬咎長史欣皆自剄汜水上.
대사마 조구, 장사 사마흔은 모두 사수 가에서 목을 그어 자결했다.
項羽至睢陽, 聞海春侯破, 乃引兵還.
항우가 수양(睢陽)에 이르러 해춘후 조구가 패전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 병사들을 이끌고 돌아왔다.
漢軍方圍鐘離眛於滎陽東, 項羽至, 盡走險阻.
한나라 군사는 그 때 형양 동쪽에서 종리매(鍾離眛)를 포위하고 있었는데, 항우가 도착하자 모두 험준한 곳으로 달아났다.
46. 한신(韓信)
韓信已破齊, 使人言曰: 齊邊楚, 權輕, 不為假王, 恐不能安齊.
한신은 제나라를 격파한 후 사자를 보내 한왕에게 말했다. "제나라는 초나라와 변경을 맞대고 있고, 저의 권력이 약하기 때문에 임시 왕으로 해주시지 않으면 제나라를 안정시키지 못할까 걱정됩니다."
漢王欲攻之. 留侯曰: 不如因而立之, 使自為守.
한왕이 한신을 공격하고자 하였다. 유후(留侯:장량)가 말했다. "이 기회에 한신을 임시 왕으로 세워 스스로 제나라를 지키게 하는 편이 낫습니다."
乃遣張良操印綬立韓信為齊王.
이에 장량에게 인수(印綬)를 주어 한신에게 보내 제왕(齊王)으로 삼게 했다.
47. 한신(韓信)
項羽聞龍且軍破, 則恐, 使盱臺人武涉往說韓信. 韓信不聽.
항우는 용저의 군대가 패했다는 소식에 두려움을 갖고 우대 사람인 무섭(武涉)을 보내 한신을 설득하게 했으나 한신은 듣지 않았다.
48. 항우의 열 가지 죄
楚漢久相持未決, 丁壯苦軍旅, 老弱罷轉馕.
초나라와 한나라가 오랫동안 서로 대치했으나 승부가 나지 않자 장정들은 군대생활이 괴로웠고 노약자들은 식량 운반에 지쳤다.
漢王項羽相與臨廣武之閒而語.
項羽欲與漢王獨身挑戰.
한왕과 항우는 광무산(廣武山) 골짜기에서 서로 대화를 나누었다. 항우가 한왕과 단 둘이 싸우자고 도전했다.
漢王數項羽曰: 始與項羽俱受命懷王, 曰先入定關中者王之, 項羽負約, 王我於蜀漢, 罪一.
한왕은 항우의 죄상을 열거하며 말했다. "처음 항우 너와 함께 회왕(懷王)의 명을 받아 관중을 먼저 평정하는 자가 왕이 되기로 했으나 항우 너는 약속을 어기고 나를 촉한의 왕 노릇을 하게 한 것이 너의 첫 번째 죄이다.
秦項羽矯殺卿子冠軍而自尊, 罪二.
진나라 항우 너는 왕명이라 속여 경자관군(卿子冠軍) 송의(宋義)를 죽이고 상장군이 된 것이 너의 두 번째 죄이다.
項羽已救趙, 當還報, 而擅劫諸侯兵入關, 罪三.
항우 너는 조나라를 구원한 다음 돌아와 보고해야 하거늘 제멋대로 제후들을 겁박하여 함곡관에 진입하게 한 것이 세 번째 죄이다.
懷王約入秦無暴掠, 項羽燒秦宮室, 掘始皇帝冢, 私收其財物, 罪四.
회왕이 진나라에 들어가 폭력과 약탈을 하지 말라 했거늘 항우 너는 진나라의 궁실에 불을 지르고 시황제의 무덤을 도굴하여 사사로이 그 재물을 거두어 간 것이 네 번째 죄이다.
又彊殺秦降王子嬰, 罪五.
또 항복한 진왕(秦王) 자영(子嬰)을 함부로 죽인 것이 다섯 번째 죄이다.
詐阬秦子弟新安二十萬, 王其將, 罪六.
진나라의 젊은이 20만 명을 신안(新安)에서 속여서 생매장하고 그 장수를 왕으로 삼은 것이 여섯 번째 죄이다.
項羽皆王諸將善地, 而徙逐故主, 令臣下爭叛逆, 罪七.
항우 너는 너의 장수들은 모두 좋은 땅에 왕으로 삼고, 옛 군주들을 내쫓아 신하들이 다투어 반역하게 만든 것이 일곱 번째 죄이다.
項羽出逐義帝彭城, 自都之, 奪韓王地, 并王梁楚, 多自予, 罪八.
항우 너는 의제(義帝)를 팽성에서 내쫓고 너의 도읍으로 삼고, 한왕(韓王)의 땅을 빼앗고 양과 초를 병합하여 다스리며 많은 것을 자신이 차지한 것이 여덟 번째 죄이다.
項羽使人陰弒義帝江南, 罪九.
항우 너는 사람을 시켜 남몰래 강남에서 의제를 시해한 것이 아홉 번째 죄이다.
夫為人臣而弒其主, 殺已降, 為政不平, 主約不信, 天下所不容, 大逆無道, 罪十也.
무릇 신하된 자가 군주를 시해하고, 항복한 사람을 죽이고, 정치를 공평하게 하지 않고, 약속을 주관하고도 신의가 없어 천하가 용납할 수 없는 대역무도한 것이 열 번째 죄이다.
吾以義兵從諸侯誅殘賊, 使刑餘罪人擊殺項羽, 何苦乃與公挑戰.
내가 의로운 군대로 제후들과 함께 남은 도적들을 토벌하고 너에게 형벌을 받은 죄인들로 하여금 너를 공격하게 하면 되는데 무엇 때문에 힘들게 그대와 싸운다는 말인가!"
項羽大怒, 伏弩射中漢王.
漢王傷匈, 乃捫足曰: 虜中吾指.
항우가 대노하여 매복한 궁수에게 쇠뇌를 쏘게 하여 한왕을 명중시켰다. 한왕은 가슴에 부상을 입었으나 곧 발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저 강도가 내 발가락을 맞추었구나!"
漢王病創臥, 張良彊請漢王起行勞軍, 以安士卒, 毋令楚乘勝於漢.
한왕은 상처 때문에 앓아누웠는데 장량이 한왕을 억지로 일어나게 하여 군영을 돌며 병사들을 위로하며 병사들을 안심시키라고 청하니 초나라가 이 틈을 타 한나라와 싸워 승리할 수 없게 했다.
漢王出行軍, 病甚, 因馳入成皋。
한왕이 나가 군영을 돌았으나 병이 더 심해져 급히 성고로 달려 들어갔다.
49.
病愈, 西入關, 至櫟陽, 存問父老, 置酒, 梟故塞王欣頭櫟陽市.
한왕이 병이 낫자 서쪽 관중으로 들어가 역양에 이르러 부로들을 위문하고
술자리를 베풀고 새왕(塞王)이었던 사마흔(司馬欣)의 머리를 역양 저자거리에 효수했다.
留四日, 復如軍, 軍廣武. 關中兵益出.
역양에서 4일을 머무르고 다시 군중으로 돌아와 광무에 주둔하였다. 관중에는 출전할 군사들이 더욱 늘었다.
50. 홍구(鴻溝)
當此時, 彭越將兵居梁地, 往來苦楚兵, 絶其糧食. 田橫往從之.
이 당시 팽월은 병사를 이끌고 양(梁) 땅에 주둔한 채 오가며 초나라의 군대를 괴롭히며 군량 수송을 끊었다. 전횡(田橫)이 팽월에게 와서 의지했다.
項羽數擊彭越等, 齊王信又進擊楚.
항우가 여러 차례 팽성 등을 공격했으며, 제왕(齊王) 한신 또한 출병하여 초나라를 공격했다.
項羽恐, 乃與漢王約, 中分天下, 割鴻溝而西者爲漢, 鴻溝而東者爲楚.
항우가 두려워 한왕과 천하를 정확하게 둘로 나누어 홍구를 경계로 서쪽은 한나라의 땅으로 하고 홍구 동쪽은 초나라의 땅으로 하기로 약속했다.
項王歸漢王父母妻子, 軍中皆呼萬歲, 乃歸而別去.
항왕이 한왕의 부모와 처자식을 돌려 보내자 한나라 군사들은 모두 만세를 불렀으며, 곧 각자의 군대를 철수시키기 시작했다.
51.
項羽解而東歸.
항우가 군대를 철수시켜 동쪽으로 돌아갔다.
漢王欲引而西歸, 用留侯陳平計, 乃進兵追項羽, 至陽夏南止軍, 與齊王信建成侯彭越期會而擊楚軍.
한왕도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돌아가려고 하다가 유후(장량)와 진평의 계책에 따라 군대를 진격시켜 항우를 뒤쫓았으며, 양하(陽夏) 남쪽에서 진군을 멈추고 제왕 한신, 건성후 팽월과 회합하여 초나라 군대를 치기로 했다.
至固陵, 不會.
한왕이 고릉(固陵)에 도착했으나 한신과 팽월은 회합에 참석하지 않았다.
楚擊漢軍, 大破之.
초나라가 한나라의 군대를 공격하여 대파했다.
漢王復入壁, 深塹而守之.
한왕이 다시 성벽으로 들어가 참호를 깊이 파고 굳게 지켰다.
用張良計, 於是韓信彭越皆往.
장량의 계책을 쓰자 한신과 팽월이 모두 왔다.
及劉賈入楚地, 圍壽春, 漢王敗碧陵, 乃使使者召大司馬周殷舉九江兵而迎(之)武王, 行屠城父, 隨(何)劉賈, 齊梁諸侯皆大會垓下.
유고가 초 땅으로 들어가 수춘(壽春)을 포위했으나 한왕은 고릉에서 패했으므로, 이에 사신을 보내 대사마 주은(周殷)을 불러 구강의 군대를 동원하여 무왕 경포를 맞아들여 성보(城父)를 도륙하고, 유고를 따라 제와 양의 제후들이 모두 해하에 대대적으로 모여들었다.
立武王布為淮南王.
무왕 경포를 회남왕으로 임명했다.
52. 해하전투(垓下戰鬪)
五年, 高祖與諸侯兵共擊楚軍, 與項羽決勝垓下.
한왕 5년(기원전 202년), 고조(유방)가 제후군과 함께 초군을 공격하여
해하(垓下)에서 항우와 승부를 지었다.
淮陰侯將三十萬自當之, 孔將軍居左, 費將軍居右, 皇帝在後, 絳侯柴將軍在皇帝後.
회음후 한신이 30만 명을 이끌고 직접 맞섰으며, 공장군(孔將軍)은 그 왼쪽에, 비장군(費將軍)은 그 오른쪽에 진을 쳤으며 황제(유방)는 뒤에, 강후 주발과 시장군(柴將軍)은 한왕의 뒤에 위치했다.
項羽之卒可十萬. 淮陰先合, 不利, 卻.
항우의 병사는 10만 명 가량이었다. 회음후가 먼저 교전하였으나 불리하여 물러났다.
孔將軍費將軍縱, 楚兵不利, 淮陰侯復乘之, 大敗垓下.
공장군과 비장군이 협공하자 초나라의 군대가 불리해지자 회음후가 그 틈에 다시 공격하여 해하에서 초나라 군대를 대파했다.
項羽卒聞漢軍之楚歌, 以爲漢盡得楚地, 項羽乃敗而走, 是以兵大敗.
항우의 병사들은 한나라 군대가 부르는 초(楚)나라 노래를 듣고 한나라가 초나라의 땅을 다 차지한 것으로 알았으며, 항우가 패하여 달아나니 군대가 모두 붕괴되었다.
使騎將灌嬰追殺項羽東城, 斬首八萬, 遂略定楚地.
기장 관영에게 항우를 추격하게 하여 동성에서 죽이고 8만 명의 목을 베어
마침내 초 땅을 평정하였다.
魯爲楚堅守不下.
노현(魯縣)이 초나라를 위하여 굳게 지켜 함락시키지 못했다.
漢王引諸侯兵北, 示魯父老項羽頭, 魯乃降.
한왕이 제후군을 이끌고 북진하여 노현의 부로들에게 항우의 머리를 보이자 노현이 이내 항복했다.
遂以魯公號葬項羽谷城.
이에 항우를 노공(魯公)으로 봉하여 곡성에 장사를 지냈다.
還至定陶, 馳入齊王壁, 奪其軍.
그후 정도(定陶)로 돌아와 제왕(齊王) 한신의 군루로 달려 들어가서 그의 군대를 빼앗았다.
53.
正月, 諸侯及將相相與共請尊漢王爲皇帝.
정월, 제후와 장상들이 공동으로 한왕을 황제로 추대하길 청했다.
漢王曰: 吾聞帝賢者有也, 空言虛語, 非所守也, 吾不敢當帝位.
한왕이 말했다. "내가 듣기에 황제는 어진 자가 가지는 것이라 했으며, 공허한 말과 빈말로 지켜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오, 나는 황제 자리를 감당할 수 없소."
群臣皆曰: 大王起微細, 誅暴逆, 平定四海, 有功者輒裂地而封爲王侯. 大王不尊號, 皆疑不信. 臣等以死守之.
군신들이 모두 말했다. "대왕께서 미천한 평민에서 일어나 포악한 역도를 토벌하고 천하를 평정하시어 공을 세운 자에게는 땅을 분배하고 왕후로 봉하셨습니다. 대왕께 황제의 존호를 받들지 않으면 모두가 믿지 않고 의심할 것입니다.
신들은 죽음으로 이를 지켜낼 것입니다."
漢王三讓, 不得已, 曰: 諸君必以爲便, 便國家.
한왕이 세 번 사양한뒤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대들이 꼭 그렇다면, 나라가 편하다면."
甲午, 乃卽皇帝位氾水之陽.
2월 갑오일, 한왕이 범수(氾水) 북쪽에서 황제에 즉위하였다.
▶️ 다음은 초한전쟁에서 항우에게 승리하여 천하를 평정한 유방(劉邦)이 황제에 즉위한 후 논공행상을 실시하여 제후들을 분봉하고 관중으로 도읍을 정하는 과정을 기록한 내용이다.
54
皇帝曰義帝無後. 齊王韓信習楚風俗, 徙為楚王, 都下邳.
황제가 의제(義帝)에게 후사가 없다고 언급했다. 이에 제왕(齊王) 한신(韓信)이 초나라의 풍속을 잘 알므로 초왕(楚王)으로 봉하여 옮기게 하고 하비를 도읍으로 정했다.
立建成侯彭越為梁王, 都定陶.
건성후 팽월(彭越)은 양왕(梁王)으로 봉하고 정도(定陶)를 도읍으로 정했다.
故韓王信為韓王, 都陽翟.
옛 한왕 신(信)을 한왕(韓王)으로 삼고 양적(陽翟)을 도읍으로 정했다.
徙衡山王吳芮為長沙王, 都臨湘.
형산왕(衡山王)오예(吳芮)를 장사왕(長沙王)으로 옮기고 임상(臨湘)을 도읍으로 정했다.
番君之將梅鋗有功, 從入武關, 故德番君.
파군(番君)의 장수 매현(梅鋗)이 무관(武關)에 진입할 때 공을 세웠으므로 파군을 치하했다.
淮南王布燕王臧荼趙王敖皆如故。
회남왕 경포, 연왕 장도, 조왕 장오는 모두 전과 같게 했다.
55
天下大定. 高祖都雒陽, 諸侯皆臣屬.
천하가 크게 평정되었다. 고조는 낙양에 도읍했고, 제후들이 모두 신하를 칭하며 복종했다.
故臨江王驩為項羽叛漢, 令盧綰劉賈圍之, 不下. 數月而降, 殺之雒陽.
이전의 임강왕(臨江王) 공환(共驩)은 항우를 위해서 한나라에 반기를 들어 노관과 유고에게 포위하게 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몇 달 뒤 항복하자 낙양에서 공환을 죽였다.
56
五月, 兵皆罷歸家.
5월, 병사들을 모두 해산시키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諸侯子在關中者復之十二歲, 其歸者復之六歲, 食之一歲.
제후의 자제로 관중에 남아 있는 자에게는 12년간 부역을 면제해 주고, 봉국으로 돌아간 자에게는 6년간 부역을 면제해주고 1년 동안 부양하기로 했다.
57
高祖置酒雒陽南宮, 高祖曰: 列侯諸將無敢隱朕, 皆言其情. 吾所以有天下者何. 項氏之所以失天下者何.
고조가 낙양의 남궁(南宮)에서 술자리를 베풀며 말했다. "열후들과 장수들은 짐을 속이지 말고 모두 진정으로 말하도록 하라. 내가 천하를 얻은 까닭이 무엇인가? 항우가 천하를 잃은 까닭은 무엇인가?"
高起王陵對曰: 陛下慢而侮人, 項羽仁而愛人. 然陛下使人攻城略地, 所降下者因以予之, 與天下同利也. 項羽妒賢嫉能, 有功者害之, 賢者疑之, 戰勝而不予人功, 得地而不予人利, 此所以失天下也.
고기(高起)와 왕릉(王陵)이 이에 대답했다. "폐하는 오만하셔서 사람을 업신여기지만 항우는 어질어서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폐하는 사람을 시켜 성과 땅을 공략하게 하여 항복시키면 성과 땅을 나누어 주며 천하와 함께 이익을 함께 하셨습니다. 항우는 자기보다 나은 자를 시기하고 공을 세우면 질투하고 어진 자는 의심하며, 싸워 승리해도 그 사람에게 공을 돌리지 않고, 땅을 빼앗아도 다른 사람에게 그 이익을 나누어주지 않았으니, 이것이 그가 천하를 잃은 까닭입니다."
高祖曰: 公知其一, 未知其二. 夫運籌策帷帳之中, 決勝於千里之外, 吾不如子房. 鎮國家, 撫百姓, 給餽馕, 不絕糧道, 吾不如蕭何. 連百萬之軍, 戰必勝, 攻必取, 吾不如韓信. 此三者, 皆人傑也, 吾能用之, 此吾所以取天下也. 項羽有一范增而不能用, 此其所以為我擒也.
고조가 말했다. "그대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군막 안에서 계책을 내어 천 리 밖의 승리를 결정짓는 일은 나는 자방(子房:장량)만 못하다. 국가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위로하고, 군량을 공급하고 식량 운송로가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은 내가 소하(蕭何)만 못하다.백만 대군을 통솔해 싸우면 반드시 승리하고 공격하면 반드시 빼앗는 일은 내가 한신(韓信)만 못하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인걸들이며. 내가 이들을 기용할 수 있었기에 이것이 내가 천하를 얻은 까닭이다. 항우에게는 범증(范增) 한 사람 뿐이었는데 그마저 기용하지 못한 것이 그가 내게 사로잡힌 까닭이다."
58
高祖欲長都雒陽, 齊人劉敬說, 乃留侯勸上入都關中, 高祖是日駕, 入都關中.
고조가 오랫동안 낙양에 도읍하려고 했는데, 제(齊)나라 출신 유경(劉敬)이 권하고 유후(留侯; 장량)가 고조에게 관중으로 들어갈 것을 권하자 고조는 그날로 어가를 몰아 관중으로 들어가 도읍을 정했다.
六月, 大赦天下.
6월, 천하를 대사면하였다.
59
十月, 燕王臧荼反, 攻下代地.
高祖自將擊之, 得燕王臧荼.
10월, 연왕(燕王) 장도(臧荼)가 반란을 일으키자 대(代) 땅을 공략했다. 고조가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에 나서 연왕 장도를 사로잡았다.
即立太尉盧綰為燕王.
使丞相噲將兵攻代.
즉시 태위(太尉) 노관(盧綰)을 연왕(燕王)으로 임명했다. 승상 번쾌(樊噲)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대(代) 땅을 공략하게 했다.
▶️ 다음은 초한전쟁에서 항우에게 승리하여 천하를 평정한 유방(劉邦)이 황제에 즉위한 후 논공행상을 실시하여 제후들을 분봉하였다. 그 후 제후와 열후들의 반란이 이어져 이기(利幾)와 회음후 한신(韓信)을 제거하고 유방의 형제와 자식들에게 분봉하여 군현제도와 봉건제도를 조화시킨 군국제도를 실시하기 사작했다.
60. 이기(利幾)
其秋, 利幾反, 高祖自將兵擊之, 利幾走. 利幾者, 項氏之將.
이해 가을, 이기(利幾)가 모반하여 고조가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토벌하자 이기가 달아났다. 이기는 항우의 장수였다.
項氏敗, 利幾為陳公, 不隨項羽, 亡降高祖, 高祖侯之潁川.
항우가 패할 때 이기(利幾)는 진현(陳縣)의 현령이었는데 항우를 따르지 않고 고조에게 도망쳐와 투항하여 고조가 영천후(潁川候)에 봉했다.
高祖至雒陽, 舉通侯籍召之, 而利幾恐, 故反.
고조가 낙양에 이르러 명부에 있는 통후(通侯)들을 모두 소집하자 이기가 겁이 나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61. 태공(太公)
六年, 高祖五日一朝太公, 如家人父子禮.
고조 6년(기원전 201년), 고조는 5일에 한 번씩 태공(太公)에게 인사를 드리러 왔는데 평민들의 부자지간의 예절과 같았다.
太公家令說太公曰: 天無二日, 土無二王. 今高祖雖子, 人主也. 太公雖父, 人臣也. 柰何令人主拜人臣. 如此, 則威重不行.
태공의 가신이 태공에게 권하여 말했다. "하늘에는 태양이 둘일 수 없고, 나라에는 왕이 둘일 수 없습니다. 지금 고조가 비록 자식이지만 군주이고, 태공께서는 비록 아버지이기는 하지만 신하입니다. 어찌 군주에게 신하를 알현하게 하십니까! 이렇게 하면 황제의 위엄이 서지 않습니다."
後高祖朝, 太公擁篲, 迎門卻行, 高祖大驚, 下扶太公.
그 후 고조가 알현하러 오자 태공은 빗자루를 든 채 문 앞에서 맞이하면서 뒷걸음을 치니 고조가 깜짝 놀라 어가에서 내려 태공을 부축했다.
太公曰: 帝, 人主也, 柰何以我亂天下法.
태공이 말했다. "황제는 군주이거늘 어찌 제가 천하의 법도를 어지럽힐 수 있겠소이까!"
於是高祖乃尊太公為太上皇, 心善家令言, 賜金五百斤.
이에 고조는 태공을 태상황(太上皇)으로 추존하고, 마음속으로 가신의 말을 훌륭하다고 여겨 황금 500근을 하사했다.
62. 초왕(楚王) 한신(韓信)
十二月, 人有上變事告楚王信謀反.
12월, 어떤 자가 상서해 모반 사건을 보고하면서 초왕(楚王) 한신(韓信)이 반란을 꾀하고 있다고 했다.
上問左右, 左右爭欲擊之.
황제가 좌우 대신에게 물으니 좌우 대신들은 다투어 한신을 토벌하겠다고 했다.
用陳平計, 乃偽遊雲夢, 會諸侯於陳, 楚王信迎,即因執之. 是日, 大赦天下.
고조는 진평(陳平)의 계책을 써서 운몽택(雲夢澤)에 유람하는 척하여 진현(陳縣)에서 제후들을 불러 모았으며 초왕 한신이 맞이하러 나오자 바로 그를 체포했다. 그날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田肯賀, 因說高祖曰: 陛下得韓信, 又治秦中. 秦, 形勝之國, 帶河山之險, 縣隔千里, 持戟百萬, 秦得百二焉. 地勢便利, 其以下兵於諸侯, 譬猶居高屋之上建瓴水也. 夫齊, 東有瑯邪即墨之饒, 南有泰山之固, 西有濁河之限, 北有勃海之利. 地方二千里, 持戟百萬, 縣隔千里之外, 齊得十二焉. 故此東西秦也. 非親子弟, 莫可使王齊矣.
전긍(田肯)이 축하를 올리며 그 틈을 타 고조에게 권하며 아뢰었다. "폐하께서는 한신을 체포하셨고 또 관중(關中)에 도읍을 정하셨습니다. 진나라 지역은 지리적 형세가 뛰어나 황하를 띠처럼 두르고 있고 산으로 막혀 있어서 관동 쪽과는 천 리나 멀리 떨어져 있으니 관동의 백만 대군에 맞서 진나라는 2만 명의 군사로 막을 수 있었습니다. 지세가 유리하여 제후들에게 군대를 출동시키는 것은 마치 높은 지붕 위에서 물병의 물을 아래로 쏟는 것처럼 쉬었습니다. 그리고 제나라 지역은 동쪽으로 낭야(琅邪)와 즉묵(卽墨)의 비옥함이 있고, 남쪽으로는 태산의 험요함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탁하(濁河)의 경계가 있고, 북쪽으로 발해(渤海)의 이점이 있습니다. 땅은 사방 2천 리에 군사가 백만 명이나 되니 천 리 밖에 떨어져 있어 제나라는 백만 대군에 맞서 20만의 군사로 막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나라를 서쪽의 진나라와 같은 동쪽의 진나라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가까운 자제(子弟)가 아니면 제나라에 왕을 시켜서는 안 됩니다."
高祖曰: 善. 賜黃金五百斤.
황제가 "옳다"고 하였다. 이에 황금 500근을 하사했다.
63
後十餘日, 封韓信為淮陰侯, 分其地為二國.
10여 일 후 한신을 회음후(淮陰侯)에 봉하고 초나라 땅을 두 나라로 나누었다.
高祖曰: 將軍劉賈數有功, 以為荊王, 王淮東.
고조가 말하기를, "장군 유고(劉賈)가 여러 차례 공로를 세웠기에 형왕(荊王)으로 삼아 회수의 동쪽을 다스리도록 하라"고 하였다.
弟交為楚王, 王淮西.
동생 유교(劉交)를 초왕(楚王)으로 삼아 회하 서쪽을 다스리게 했다.
子肥為齊王, 王七十餘城, 民能齊言者皆屬齊.
아들 유비(劉肥)를 제왕(齊王)으로 삼아 70여 성을 다스리게 하고, 제나라의 방언을 할 수 있는 백성들은 모두 제 땅에 귀속시켰다.
乃論功, 與諸列侯剖符行封.
그리고 공적을 논하여 여러 열후들에게 부절을 쪼개 주어 봉후의 증빙으로 삼았다.
徙韓王信太原
한왕(韓王) 신(信)을 태원(太原)으로 옮기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