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구르트, 그 다디단 것은 한 줄짜리 만화처럼
금방 바닥이 났다 언니는 아침마다 사라지고
엄마는 밥때가 아니면 미싱을 멈추지 않았다
창고 속에서 여자들이 실밥을 머리에 가득 얹고
노루발을 밀어 면장갑을 만들었다
흰 손바닥들이 언덕을 이루면 미끄럼을 타고 싶었다
심심하면 불을 질러야 했지만
성냥불 불꽃마저 희어서 재미가 없을 것 같았다
일부러 길을 잃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누군가 나를 안아 들고 대문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의자처럼 마당에 앉아 있다가 문득 방으로 가
손거울을 놓고 들여다본 아랫도리는
종일 입에 물고 있어 늘어진 검은 고무 꽈리 같았다
아무나 쓰러지기를 바랐다 아니면 죽거나
그때 내게 옜다, 새빨간 거짓말이라도 누가 던져 주었다면
맴돌던 좁은 마당에서 노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면
그것도 아니면 파란 혀를 가진 개에게 물려
팔뚝에서 보라색 피를 펑펑 흘렸다면 미싱은 멈추었을까
백지에 검고 흰 무지개를 그리면 먹구름이 들어왔다
찾는 사람도 없는데 이불에 숨어 숫자를 백까지 세었다
눈을 떠 보니 흰 머리카락이 무성했다
-『경향신문/詩想과 세상』2024.01.28. -
시인이 기억의 우물에서 건져 올린 것은, 먹구름이 가득한 유년의 빈방이다. 언니는 “아침마다 사라지고”, 엄마는 하얀 “면장갑”을 만드느라 “밥때가 아니면 미싱을 멈추지” 않았다. 이 집에서 아버지는 있어도 없는 존재이다. 빈방에 남겨진 아이는 불장난하거나, 집 밖으로 나가 “일부러 길을 잃”거나, 손거울로 자신의 “아랫도리”를 들여다본다. 이 금지된 놀이도 시들해지면 더 큰 슬픔을 기다리곤 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아이가 인식한 현실은 희거나 검은 무채색이다. ‘흑백 무지개’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아이는 무지개색을 모두 섞어 슬픈 ‘흑백 무지개’를 만들었다. 이 흑백 무지개와 먹구름을 데리고 “이불에 숨어 숫자를 백까지 세”자, 백발노인이 되었다. 아이는 엄마의 미싱을 멈추게 하려고 백발노인이 되었을까.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도 가난한 아이들은 여전히 ‘돌봄’에서 소외된 채 차가운 방에 있고, 엄마들의 기계는 멈추지 않고 돌고 또 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