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네 반갑습니다.
이제 반야심경에서 아직도 지금 제목을 하고 있는 중인데요.
왜 그러냐면 반야심경의 제목을 보면
마하 반야바라밀다 심경
인데요. 지금 이제
바라밀다
에 대한 이야기를 몇 시간에 걸쳐서 지금 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 이유가 이제 반야바라밀 혹은 바라밀다라는 것이 이 중생이 저 깨달음의 언덕으로 어떻게 갈 수 있느냐의 문제거든요.
쉽게 말하면 우리가 수행이 무엇이냐에 대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다다를수 있느냐?
그래서 무엇이 우리를 깨닫게 하느냐?
이 부분이 바로 바라밀다이기 때문에 초기 불교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본다면 중도
中道를 대승불교에서는 반야바라밀이라고 이렇게 했다고 설명을 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이 반야바라밀 혹은 바라밀다라는 것은 어떻게 하면
도대체 내가 중생인데 깨달을 수 있느냐?
이 문제이기 때문에 중요한 겁니다.
그리고 이곳을 제가 오랜 3시간 동안 계속 얘기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가 생각하던 방식과는 다르기 때문이에요.
부처님의 중도 라는 것 대승불교의 반야바라밀은 우리를 깨닫게 하는
방법 아닌 방법이고
길아닌 길이거든요.
근데 세상의 모든 방법은 가는 길이 있잖아요.
가는 방법이 있고 가야 하는 정확한 목표 지점이 있고 여기서 저기로 가는 거거든요.
근데 이 공부는
무소득
반야심경의 의미상 핵심을 이루는 단어는 또
이무소득고
라고 뒤쪽에 이제 나오는데요.
쉽게 말하면 무소득인 까닭이다.
이렇게 나와요 무소득이라는 단어가 상당히 중요한 건데
즉 이 공부는 무소득이란 말이에요.
그럼 공부할 필요가 없게 느껴지잖아요.
우리 분별심에 의해서 생각해보면.
얻을 바가 없다. 가질 것이 없다.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얘기를 한단 말이죠?
무소득이니까 무소득이라는 말은 그럼 얻을 게 없다는 얘기냐.
불교는 깨달음이라는 무언가를 얻는 가르침이 아니에요.
본래 깨달아 있구나 라는 것을 그냥 확인하는 거예요. 본 래부처구나.
내가 더 가져야 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구나.
본래 원만 구족했구나
라는 사실을 그냥 문득 확인하면 어제 드러났는데 오늘도 이런것이구나.
늘 나는 이런 깨달음이었구나.
이곳을 그냥 온도 확인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디로 가는 게 아니죠?
어떤 방법이 있는 게 아니죠?
방법이 있으려면 여기서 저기로 가야 되니까
그러다 보니까 이 바람이라는 게 쉽지 않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바람이라는 말은 뭐냐하면 깨달았다.
이 소리거든요. 지혜를 완성했다. 중생의 번뇌망상 괴로움을 소멸시켰다. 이 소리거든요.
사성제로 따지면 고집멸도 괴로움의 원인을 제거해서 괴로움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거거든요.
그게 지혜의 완성이고 반야바라밀이에요.
그러면 이 반야바라밀이 뭐냐를 좀 다른 측면에서 보기 위해서. 부처님만 깨달았나?
부처님 말고 깨달은 사람이 인류 역사 속엔 당연히 많이 있겠죠.
그러면 이 깨달음에 대한 문제 어떻게 깨달을 수 있느냐에 대한 문제를 좀 살펴보기 위해서 다르게 깨달은 사람은 없을까?
좀 다른 것처럼 느껴지는 깨달음은 없을까를 한번 살펴보는 걸 통해서 그 깨달음과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 왜 다르지 않고 같은 것인지를 좀 확인해 보는 게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지금 이제 얼마전에 그 팀라탄 스님이 열받아서 좀 그 큰 뉴스가 됐었죠. 특예탐 스님이 계실 때만 해도 그 살아있는 세계의 영적인 교사 스승이라고 했을 때 서양에서는 달라이 라마스님 틱야탄스님 그리고 에카르트 톨레라고 이렇게 3명을 영적인 교사라고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람이었어요.
근데 지금 뭐 서양 서구의 영성계에서는
에카르트톨레
가. 어떤 독보적인 독보적인 어떤 깨달음을 선호하고 있는 그런 서양에서 그러니까 외국 영화 같은 거 서해양 영화 같은 거 많이 보면요. 영화에도 많이 나와요. 이렇게 사람들이 막 스트레스 받을 때에요. 아 내가 좀 명상을 해야 되겠다. 그러면 잠시 앉아서 에카르트 톨레의 명상의 문구를 듣기도 하고 이런 장면이 영화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독보적인 어떤 영상가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 에카르트톨레가 그럼 어떻게 깨어났느냐? 부처님처럼 고행주의 수행을 갈고 닦았는데 이게 아니구나.
선정주의 수행을 갈고 닦았는게 이게 아니구나. 이렇게 해서 깨달으신 게 아니고요.
그래서 내 독자적인 중도라는 길을 발견해서 깨달았다.
결과적으로 보면 같은 이야기인데 이게 이제 에카르트 툴레에게는 어떤 방식으로 일어났는지를 한번 보자 말이죠.
에크로톨렌은 어릴 때부터 그 아주 뭐랄까 아웃사이더이기도 했고요.
좀 왕따 같은 것도 했었다고 그러고 깊은 좀 우울증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서 많이 힘들게 젊은 날을 보냈다고 그럽니다.
2차 대전이 일어나고 나서 성인이 되면서도 그 어린 날에 힘들고 우울하고 좀 괴로웠던 그 삶이 여전히 희석되지가 않고 이렇게 선생님 어학을 가르치는 선생님의 역할을 하면서도 여전히 그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래요.
그래서 죽을 만큼 그 괴로운 우울증과 또 뭐 불안감 또 두려움 고통들이 성인이 되어서까지도 막 계속해서 목재에 왔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 에카르트톨레는 이 괴로움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내가 살 수 없겠구나.
내가 이렇게 괴로워가지고 어떻게 살 수 있겠나 해서 단 하나의 관심사는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야 되겠다. 이거였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나를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해주지 하는 궁금증을 가지고 찾았습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모든 것들을 찾았는데 그때 에카르트 선레가 주목했던 것은 철학
철학을 열심히 공부하면 뭔가 삶의 이치를 알 수 있지 않겠나?
그리고 또 심리학을 공부하면 알 수 있지 않겠나?
또 문학을 공부하면 알 수 있지 않겠나 해서 이런 것들을 두루두루 찾으면서 공부를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그곳에서 근원적인 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고 그래요.
아니 괴로움을 본질적으로 해결해 주지는 못하는구나.
우리가 뭐 심리학이니 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서도 그렇고 그때그때 문제를 해결할 수는 있지만,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또 다른 문제가 내 인생에 자꾸만 등장을 하죠.
어느 순간 아 내가 이렇게 임시응변적인 어떤 임시방편적인 언발의 오줌누기 식의 단편적인 답을 가지고는 근데 근원적인 노병사라고 하는 괴로움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겠구나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죠.
그래서 에카르트톨레는 그런 깊은 그런 찾고 찾았는데도 못 찾다 보니까 더욱더 우울해졌어요.
그래서 이 우울증이 깊이 시달리다가 나중에는 막 자살 충동이 일어날 정도로 깊은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스스로도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다 해봤는데 어디서도 답을 찾을 수 없다 보니까 절망에 빠져서 그냥 쓰러져 잠에 들어간 거죠.
근데 그러고 나서 눈에 잠에서 깼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진 거예요.
어제와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 버린 거예요.
결론의 문제가 해결이 돼버린 거예요.
우울함이 없어지고 뭔가 어제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어떤 안목을 가지고 세상을 보게 되더라는 거죠?
왜 이렇게 괴로움이 사라졌지 이유를 알 수 없는 거예요.
근데 자신이 보는 어떤 안목이 달라졌구나
나는 어제 내가 아니구나라는 그 하나는 분명하단 말이죠.
그래서 이것이 무엇일까?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무슨 일이 나에게 일어난 거지에 대해서 되게 궁금해했어요.
그래서 이게 뭔가를 이제 찾아봤죠.
온갖 철학 철학자들 중에도 이런 걸 체험한 사람이 없는 것 같아요.
종교 서양에서 중요한 종교들을 찾아보니까 그것도 아닌 것 같아요. 그래서 절에서 사찰에서 좀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래요. 그러면서 사찰에 있으면서 경전 같은 것들을 보면서 아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라는 사건이 일어난 것인가 보다 하는 어떤 느낌을 받은 것 같아요.
이제 선불교에서는 돈오 점수라고 해서 도노라는 뭘로 깨닫는 어떤 견성이라는 사건이 일어나더라도 거기서 모든 것이 다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도노 후에 점수라는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그래요.
그 점수의 시간을 보낼 때 우리가 이제 수행이라는 어떤 일들을 일일이 자연스럽게 저절로 일어나게 되고 윗바사나라고 이름 붙인 또 명상이라고 얘기하는 그런 것들이 억지로 해야 되는 그런 수행이 아니라 저절로 일어나는 이제 자연스러운 수행이 수행하는 수행이 일어나는 것이죠.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바른 암목 경전과 어록과도 같은 이 깨달음에 대한 바른 안목을 갖춘 이런 경전이나 어록 같은 것 혹은 스승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 도노 후의 어떤 점수와도 같은 이 작업이 에카르트 톨레에게 있어서는 불교 경전 그리고 선오록들이었다고 그래요. 에카르트 톨레뿐만 아니라 서양의 수많은 영성의 어떤 지도자 여성의 교사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본인들이 어찌어찌하다가 깨어나긴 했는데 깨어남 이후에 어떤 보임이라고 하는 부분들을 전부 다 불교 경전과 특히 선어록 같은 곳에서 많이 어떤 가르침을 받았다는 얘기를 고백을 하고 있어요. 특히 어떤 영상의 스승 같으면 황벽스님의 전신 법여나 완능록 같은 이런 책들에 대해서 놀랍게 어떤 도움을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 말을 듣고 이제 옛날에 옛날에 이제 한 10. 몇 년 전에 그런 서양의 영성계에 대해서 되게 관심이 많았을 때였어요. 근데 그때 그 얘기를 접하고 저도 이제 그때 황벽스님의 도움을 받았단 말이야. 그래서 황벽스님의 전신법에 안 능록을 다시 꺼내서 읽어보고서는 너무 놀라웠어요. 되게 충격적이었고 그리고 또 놀라웠던 점은 서양의 어떤 스승들이 써놓은 책들이나 이런 것 막 가르치는 말이나. 이런 것들을 보면 어떤 불교 경전이나 선어록처럼 이렇게 옛날 방식이라거나 우리가 들어도 뭔 얘긴지 모르겠다 하는 방식이 아니라 상당히 요즘 사람에게 맞는 어법을 구사하고요. 되게 쉽게 설명을 하고요. 선불교라는 게 이렇게 쉽게 다가갈 수 있구나라는 것들을 어 놀랍게 힌트를 주거든요. 우리가 서양의 영성계 스승이라고 하는 뭐 에카르톨레나 좀 이따 설명할 바이런KT나. 아디아 찬티 이런 사람들이 사실은 선불교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근데 상당히 요즘 언어로 되게 쉽게 설명을 하고 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제가 그 당시에 20년 10년 20년 전에 그런 사람들의 책들에도 되게 관심이 많았었어요. 그런데 이들이 환경이나 선사 스님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서 뒤늦게 이제 제가 다시금 선호록들을 뒤지곤 했는데 그때 다시 펼쳐봤던 선호록은 너무 놀라웠어요. 그 황벽스님의 전신 버보 같은 책들이 서양의 스승들이 되게 현대적인 감각으로 글을 쓰잖아요. 그래요. 헌법이나 어투나 이런 것들이 되게 세련됐습니다. 정말 세련됐어요. 그러니까 지금 사람들이 봐도와 어떻게 이런 말을 쓸 수 있지? 우리가 선호록하면 뜻의 잣나무야 마삼근이야. 이러고 차 1잔 해라. 그리고 그냥 한 대 때리거나 소리를 뻑지르거나 주장자를 한 번 들어보거나. 그리고 법을 다 설에 마쳤다. 이런 것은 초기 선불교 우리가 초기 선불교를 한 1 200년 동안의 초기 선불교를 선의 황금기라고 부르는데요. 그 당시에 선불교의 주류는 아니었고요. 그 이후 후대에 가면서 이렇게 자상하게 설명했던 어떤 법문의 방식과 어떤 곧바로 가리키는 어떤 이런 방식이 함께 그 방편들이 같이 있었던 초기의 방식이 아니라 나중에 이 자상하게 설명하는 방식들이 어 완전히 발신해서 내가 깨달음에 딱 간절하게 발신했던 엘리트 수행자들에게는 자상하게 설명하는 방식보다 곧바로 드러내 보여주는 분별을 곧장 깨주는 방식이 훨씬 유효했던 거죠. 그리고 그들은 이미 공부는 많이 했던 사람들이라서 자상하게 설명하는 방식보다는 스승이 직접 데리고 공부할 수 있으니까 곧바로 찔러주는 가리켜 보이는 직책인 심의 방식이 훨씬 수월했기 때문에 그것들이 좀 보편화가 된 것 같고 나중에 이제 가나선으로 조직화되면서 공안을 뽑다. 보니까 어 깨어나게 하는 어떤 특정한 기연들을 이제 공안으로 삼아서 만들었다 보니까 그런 것들이 알듯 모를 듯한 이런 것들만 선이다라고 우리가 이렇게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근데 그것은 오해입니다. 오해. 육조 스님의 그 6조 단경에서부터 시작해서 마조 어록이나 임제 어록이나 황벽어록까지 가장 어떤 선의 초기에 활활 발발했던 그 가르침을 드러냈던 가르침들을 보면 어 정말 이렇게 읽어보면요? 뭐랄까? 이렇게 그냥 와닿는 게 아니라 너무 와닿아요. 그냥 정말 그냥 그냥 그냥 어떻게 이렇게 쉽게 이 얘기를 어떻게 이렇게 이렇게 표현을 했을까 놀라울 정도로 그냥 이렇게 확 와닿았거든요. 그런데 이제 오늘날의 다양한 방편들 이 방편 저 방편에 좀 치우친 방편에 이런저런. 것들을 읽어보면 뭔가 모르게 좀 흔연하지 않은 시원하지 않은 뭔가 모르게 좀 찜찜한 이런 것들을 이렇게 느낄 수 있거든요. 근데 그렇지 않고 오히려 선의 초기 선사 선생님들이 가르치는 건 확 와닿는다는 거죠. 또 한 사람을 얘기를 하면요. 서양에서는 서양의 훌륭한 스승이라고 하면 데카르트 톨레와 그 바이이런 케이트를 얘기해요. 근데 에카르트는 스님도 아니고 종교인도 아니에요. 제가 이 사람들의 예를 드는 이유 중에 하나가 우리와 너무 비슷한 사람들이에요. 어찌보면 우리보다 못했던 사람들이에요. 이 바이올린 케이트는 주부였는데 자식이 셋이 있었고 남편하고 불화가 많았고 이혼을 했어요. 이혼을 하고 나서 자식을 키워야 되는데 혼자 키워야 되는데 막 우울증에 시달린 거예요. 그 이 우울증은 과연 KT의 우울증은 한 10년 가까이 갔다고 하고 그중에 한 2년 정도는 아예 집 밖을 나가지조차 못할 정도로 음식을 삼키지도 못할 정도로 정말 막 정말 죽은 사람이나 다를 바 없을 정도로 너무나 깊은 그 고통이었다. 그래요 그러다 보니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으니까 막 분노화만 막 일어났던 거죠. 그러다가 막 피해 망상 막 절망감 이런 것들이 막 계속 자신을 엄습해서 그러다 보니까 그렇게 된 상황이면 어떻겠어요? 나도 모르게 어떻게든 여기서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되는구나. 여기서 벗어나야 되겠구나. 이 괴로움에서 나를 정말 해방시켜 줘야 되지. 이렇게는 못 살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죠. 그래서 도저히 집에서 어떻게 버틸 수가 없더래요? 그런데 집에 있으면 아이들도 힘들게 만들고 주변 사람도 괴롭히는 것 같고 도저히 일으키는 못 살겠다. 그래서 이 괴로움에서 내가 벗어나게 되겠다라는 간절함을 안고 어떻게 해야 되지? 어떻게 해야 되지 하는데 방법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일단 주변 사람들 힘들게 하지 말고 조용히 어떤 방법을 찾아봐야 되겠는데 해서 찾고 찾다가 찾은 것이 뭐였냐면 자기를 받아줄 곳이 없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나를 받아줄 수 있는 곳을 찾다가 보니까 섭식장애인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가는 요양원이 있더래요. 그래서 인제 그 요양원을 갔는데 며칠 안 돼가지고 이 바이런 케이트라는 이 성격도 괴팍한 아줌마가 왔는데 그 요양원에서 요양원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싫어하는 거예요. 짜증이 많고 화가 많고 하니까 난 저 사람하고는 같이 못 산다. 저 사람 보내든지 하라고 막 반발을 하니까 어쩔 수 없이 이 바이런 KT를 다른 사람과 함께 놔두지도 못한 거예요. 그래서 바이론 KT는 혼자 다락방에 살게 됩니다. 차가운 다락방에서 혼자 그냥 생활하게 되는데 다락방에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먹는 시간 아니면 그냥 쓰러져서 누워있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는 거예요. 죽을 것 같은 괴로움과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으니까 그러다가 여기서도 내가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없구나. 길이 없구나. 이 괴로움을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구나 하는 어떤 어떤 벽에 부딪히면서 절망감에 부딪히면서 그냥 완전히 놓아버린 채 쓰러져 잠에 듭니다. 마찬가지로 자고 나서 눈을 떴는데 깨어난 거예요.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지 그 두려움 절망 우울함이 싹 사라져 버린 거예요. 완전 어제와 다른 사람이 돼버린 거예요. 그때부터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이제 그 조금 조금씩 자연스럽게 하지만 조금 조금씩 하면서 가족과도 이제 돌아오고 자식들에게도 잘하고 그러다가 이제 나중에 인연이 되어서 작게나마 사람들과 이렇게 소통하고 이 가르침을 본인이 깨달은 것을 가르쳐주고 이제 이런 역할을 하게 되거든요. 이런 것들을 저도 한 20년 전에 알고서는와 이렇게 깨어나는 수도 있구나. 신기하다 이런 생각을 가졌거든요. 그래서 제가 느끼기에 아 지금의 시대가 이렇게 다양한 방법으로 깨어나는구나라는 것들을 이제 알게 되었는데요. 이 말씀을 드린 이유는 뭐냐 하면 부처님의 깨달음은 어땠을까요? 부처님의 깨달음은 사문 유관이 부처님의 출가를 하게 된 계기가 됐다. 이잖아요. 사문 유관이라는 건 뭐냐하면 동서남북을 다니시면서 늙고 병들고 죽는 사람을 목격하면서 이게 그전에는 늙을 수도 있지 죽을 수도 있지. 이렇게만 받아들였다가 늙는다는 문제가 내 문제로 다가오기 시작한 거예요. 병들고 죽는다는 문제가 이게 내 문제구나. 내가 지금 젊고 건강하고 곧 왕이 될 사람이고 하니까 잠깐 밀쳐놓는 것밖에 안 되는 것이구나. 나도 죽는 것이고 우리 어머니가 나를 낫게 하고 돌아가신 것처럼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구나라는 것을 이 괴로움의 실상에 눈을 뜨기 시작한 거예요. 그러면서 이 괴로움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언제까지 내가 왕으로 살고 왕자로 산다고 해서 지금은 행복하지만 반드시 늙고 병들고 죽음이 나에겐 찾아올 것이다. 이걸 해결해야 되겠다라는 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