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典尙右 선비의 女人
서화담(徐花潭)과 황진이(黃眞伊)
- 청산은 내 뜻이요 녹수는 님의 정이라 -
『어우야담(於于野談:유몽인』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가정(嘉靖)초에 송도의 명기 가운데 황진이라는 자가 있었다. 여자들 중에서 뜻이 높고 협기가 있는 자였다. 화담처사 서경덕의 뜻이 고매하여 벼슬하지 않고 또 학문에 조예가 깊다는 말을 듣고 시험하기 위해 조대를 허리에 두르고 책을 끼고서 찾아가 뵙고 말했다.
“첩이 들으니 남자는 가죽띠를 두르고 여자는 실띠를 두른다고 했습니다. 첩은 학문에 뜻이 있어 실띠를 두르고 왔습니다.”
선생이 훈계하고 가르쳤다. 진이가 밤을 타 선생의 몸에 접근하려 하여 마치 마등이 아난존자에게 하는 것처럼 했다. 이같이 하기를 여러 날 했으나 화담은 종시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이후 황진이는 서화담의 문하생이 되었다. 서경덕(1489,성종 20년- 1546, 명종 1년)은 당대의 대석학이었다. 그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과 후학에만 전념하였다.
『
성옹식소록(惺翁識小錄):허균』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선생님, 송도에는 삼절이 있다는데 그것을 아십니까?”
서경덕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첫째는 박연폭포요, 둘째는 선생님이시고 셋째는 진이입니다.”
“이 비록 농담이기는 하나 또한 그럴듯한 말이구나.”
서경덕은 웃으며 대답하였다.
진랑이 오는 날이 뜸해졌다. 밤은 깊고 주위는 적막했다. 우수수 낙엽은 지고 있었다. 영창을 열었으나 주위는 적막했다. 다시금 영창을 닫았다. 불을 껐다. 잠은 십리 밖으로 달아나고 정신은 자꾸만 맑아져갔다. 기다려도 진이는 오지 않았다. 서화담은 초연히 앉아 어둠 속에서 노래를 읊었다.
마음이 어린 후이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운산에 어느 님 오리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귄가 하노라.
진랑인들 스승의 인자한 모습을 보고, 부드러운 음성을 듣고 싶지 않았겠는가? 진이는 문 밖에 와있었다. 자신의 사무치는 마음을 스승도 간직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가슴 깊이 깔려있던 그 동안의 오열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한참을 추스렸다.
내 언제 무신하여 님을 언제 속였관데
월침 삼경에 온 뜻이 전혀 없네
추풍에 지는 닙 소리야 낸들 어이하리오
님을 속여 월침삼경에도 올 뜻이 전혀 없는가.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이렇게도 절절할 수 있는가. 추풍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찌하겠느냐. 님이 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지만 님은 올 생각조차 없다. 잎지는 소리는 환청으로 들려왔고 진이는 낸들 어떻게 하겠느냐고 반문하고 있다.
서화담의 죽음을 진이는 이렇게 한탄했다고 한다.
청산은 내 뜻이요 녹수는 임의 정이요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변할 손가
녹수도 청산 못 잊어 울어예어 가는고
자기 자신을 청산에 비기고 서경덕을 녹수에 비겼다. 녹수는 없고 청산만 남은 것이다. 물 없는 청산이 되었다. 무슨 허무한 인생이란 말인가. 꼭이 서화담의 죽음을 한탄하여 쓴 것만은 아닐 것이다. 흠모했던 인물들을 다시는 만날 수 없어 인생무상을 그리 노래한 것이리라.
정선의 박연폭포
역사인물 가운데 소설로, 혹은 영화로 만들어진 경우가 많이 있지만, 이 가운데서 황진이(黃眞伊)만큼 대중의 사랑을 듬뿍 받은 인물도 흔치 않을 것이다. 소설로, 드라마로 6편, 영화로도 6번이나 만들어져 대중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은 여성은 일찍이 없었다. 우리 회원도 황진이에 대한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는 한두 편 보았을 것입니다. 그녀는 역사상 최고의 미모와 재능, 그리고 도전정신으로 충만했던 여성이었다.
황진이(黃眞伊)의 생몰 연대는 확실 모르고 중종·명종 때 인물로 정사에는 전해지지 않지만 야사에는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시인, 기녀, 작가, 서예가, 음악가, 무희이다. 이름은 진랑(眞娘)이고 기생 이름인 명월(明月)로도 알려져 있다. 시와 그림, 춤 외에도 성리학적 지식과 사서육경에도 해박하여 사대부, 은일도사들과도 어울렸다.
성리학적 학문적 지식이 해박하였으며 시를 잘 지었고, 그림에도 능하였다. 많은 선비들과 이런 저런 인연과 관계를 맺으면서 전국을 유람하기도 하고 그 가운데 많은 시와 그림을 작품으로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으로 대부분 실전되었고 남은 작품들도 그가 음란함의 대명사로 몰리면서 저평가되고 제대로 보존되지도 않아 대부분 인멸되었다.
양반의 얼녀였던 황진이는 16세기 조선사회의 규범에 따라 양반의 첩이 될 운명이었다. 기녀로 산다는 것 또한 신분상의 운명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다른 기녀와는 달랐다. 당시 기녀들의 소망이었던 사대부 첩 자리를 박차고 기녀라는 천한 신분을 택했고 이를 통해 사대부들의 이중성을 고발하고 세상의 조롱거리로 만들어 양반도 상놈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알리고자 했다. 황진이는 학식과 권세를 겸비한 조선사대부들을 희롱하고자 조선 최고의 군자라고 불린 벽계수를 유혹했다.
청산리 벽계수야 쉬이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명월이 만공산할제 쉬어감이 어떠하리.
황진이의 격조 있는 구애시 앞에 벽계수는 군자로서의 허울을 벗어 던졌다. 종친이라는 신분과 당대 최고의 호인인 벽계수를 무너뜨린 일로 황진이는 유명세를 탔다. 벽계수에 이어 그리고 이사종. 소세양과 연정을 나누었으며 불가의 생불로 통하던 면벽10년의 지족선사를 파계시켰고 도학군자로 이름을 날리던 화담 서경덕을 유혹하기도 했다.
황진이의 일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1489~1546)일 것이다. 황진이는 당시 도학군자로 이름을 날리던 화담 선생이 진실한 군자인지 거짓 군자인지 밝혀보고자 했다.
어릴 때부터 남달랐던 서경덕은 늦은 나이인 14세에야 개성의 어느 선생에게서 글을 배웠다. 16세에는 『대학』을 읽은 뒤 그 뜻을 깨닫고는 기쁨에 겨워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34세가 되던 해 그는 남쪽의 여러 곳을 유람하기 위해 길을 떠났고, 그다음에는 제자 토정 이지함과 함께 지리산을 찾아갔다가 남명(南冥) 조식을 만나게 된다.
서경덕은 1519년 조광조(趙光祖)에 의해 채택된 현량과(賢良科)에 수석으로 추천을 받았으나 사양하였고, 어머니 간곡한 권유로 43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공부하였으나 대과에 응시하지 않고 개성으로 돌아와 송악산 자락의 화담 옆에 초막을 짓고 학문에 열중하였다. 그는 이른바 처사(處士)의 길, 벼슬을 하지 않고 초야에서 은둔하는 선비의 길로 일관했다. 서경덕의 호인 화담, 즉 ‘꽃 피는 연못’은 바로 이곳 지명에서 연유하였고, 그때부터 그의 이름이 널리 퍼져 나가게 되었다.
그는 조선의 수많은 성리학자들 중에 스승이 없는 특이한 인물이었다. 서당에서 겨우 한문을 깨우치는 정도의 교육밖에 받지 못한 서경덕의 진정한 스승은 자연과 책이었다. “스스로 깨달아 얻는 즐거움은 결코 다른 사람이 짐작할 바가 아니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한 서경덕은 그런 연유로 아주 독특하고 진귀한 학문적 업적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 그 후 서경덕의 명성을 듣고 개성 일대와 서울에서 수많은 제자들이 몰려들었는데, 서경덕은 출신 고하를 막론하고 배우고자 오는 사람은 누구나 제자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서경덕은 명성답게 끄떡도 하지 않았다. 모든 남성이 황진이 앞에 무릎을 꿇었지만 화담선생만큼은 그녀의 유혹을 뿌리쳤다. 화담선생의 높은 덕망 앞에 황진이는 감복하여 그의 제자가 되기를 자청하고 서경덕에게서 우주의 철리, 인성의 본질, 인간의 참된 삶과 사랑을 배웠다. 그래서 황진이는 그곳에서 서경덕과 영원한 스승과 제자 사이로 인연을 맺게 되었고, 그때부터 기생이 아니라 ‘천리를 터득한 도인’이 되었던 것이다.
황진이는 서경덕(徐敬德)을 사숙(私塾):직접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으나 마음속으로 그 사람을 본받아서 도나 학문을 닦음.)하여 거문고와 주효(酒肴)를 가지고 그의 정사(精舍)를 자주 방문하여 당시(唐詩)를 공부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화담과 황진이 그리고 박연 폭포를 송도 삼절이라 부르고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에 회자되고 있다.
황진이의 여러 시조들은 문학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되어 고전 한국문학의 일부로 인정되며, 교과서에도 실리는 중요한 작품이다.
황진이는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 모른다. 세월이 흘러 개성에서 그녀의 무덤을 발견한 선조 당대의 시인 임제(林梯:白湖)는 평안감사 부임길에 쓸쓸한 황진이의 무덤을 보고 그녀의 부재를 슬퍼하며 술을 한 잔 올리며 시 한수를 읊었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워난다
홍안을 어데 두고 백골만 묻혀난다
잔 잡고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설워하노라.
세월의 덧없음과 인생의 무상함을 노래한 임제는 천민인 기생에 시조를 읊고 제사를 지냈다하여 빈축을 사고 파직 당하고 벼슬을 버리고 평생 야인으로 살았다.
황진이에 관해 전해지는 기록들은 ‘역사학적으로’ 고증하기 힘든 야사, 야담에 가까우며 신뢰할 수 있는 직접적인 사료는 사실상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경덕과 황진이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를 완전한 사실 무근으로 단정하기도 어렵다.
역사는 잘 모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난 것은 잘 모르는 것 아닙니까!
첫댓글 그냥 대충만 알고 지냈던 주요한 관심있는 역사 속 이야기들, 송암의 심도있는 자상한 설명과 소개를 통해, 더욱 관심과 애정을 갖게 되어 고맙소! 우리 까페가 또 하나의 장르에서 전문성을 높이게 되었습니다. ㄱ ㅅ
서화담과 황진의 격조높은 그 영원한 에로스 사랑이여! 감사
역사적인 인물을 재조명하여 현재릐 나를 돌아 보게되는 좋은 글 감사
황진이 인물은 인물 이었나 봅니다 부럽습니다
황진이 인물은 인물 이었나 봅니다 참 부럽네요 ㅋ ㅋ ㅋ
조선 팔도 머스마의 연인황진이 정말 거룩하오 좋은 무직컬이나 오페라를 정성것 만들어 늘 공연했으면 어떨지 명성황후와 같이 그래야 관광객들이 의무적으로 보고 가는 코오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