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어떤 자매님께서 제게 가까이 다가와 말을 겁니다.
“저기요. 인상이 너무 좋으세요. 영이 너무나 맑으세요.”
느낌이 좋지 않았습니다.
예전에도 이렇게 말문을 트면서 “도를 아십니까?”라는 식의 물음을 하는 경험이 몇 차례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 자리에서 화를 내고 싶지 않아서 그냥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는 얼른 가던 길을 가려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조상님의 큰 기운이 느껴집니다.”라면서 계속해서 말을 붙이는 것입니다.
할 수 없이 예전에 했던 방식으로 “저 가톨릭 신부입니다.”라고 말한 뒤에야 그분과의 짧은 만남을 마칠 수 있었지요.
사실 그 후는 체험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대체적으로 잘 되는 방법이 있다면서 조상님께 제사 비슷한 것을 해야 한다며 금품을 요구한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 때문에’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생길까요?
조상의 덕을 받아서, 부적을 달고 있어서, 어떤 특정한 행동을 했기 때문에 등등 외부의 이유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자기 자신 안에서 이유를 찾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자기 자신을 먼저 바라보면 문제의 해결 방안을 쉽게 찾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외부에서만 문제의 해결을 찾는 경우는 늘 불평불만의 연속입니다.
부모 때문에, 자녀 때문에, 친구 때문에, 심지어 하느님 때문에 라는 말들로 책임을 외부에 묻는 경우 분명히 불평불만을 입에 달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도무지 해결해주지 않았다면서 다시는 성당에 가지 않겠다는 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렇다면 주님의 일은 얼마나 하셨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자신은 남들보다는 더 열심히 살았다면서 억울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마르타는 열심히 예수님을 시중들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의 집에 가시겠다고 하셨나요?
아닙니다.
이 여인이 부탁해서 자기 집으로 모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시중을 들면서 불평불만을 합니다.
첫 번째는 자신의 일을 돕지 않는 마리아라는 동생의 모습입니다.
또 하나는 이 동생이 언니를 돕도록 말하지 않는 주님께 대한 불만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르타의 원래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그저 주님을 자기 집에 모시는 것뿐이었습니다.
집에 모시는 데 있어 마리아나 예수님의 모습이 불평불만의 원인이 되지 않습니다.
일만 하고 있는 자기 자신만을 바라보다보니 첫 마음을 잃어버렸던 것이지요.
그래서 원하는 대로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셨음에도 불구하고 불평불만의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결국 누구에게 문제일까요?
마리아일까요? 아니면 예수님일까요?
바로 마르타 본인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이 선택한 몫에 충실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남을 바라보면서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불평불만을 마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한 첫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그 해결을 외부에서 찾지 마십시오.
바로 내 안에 그 답이 있습니다.
- 인천교구 갑곶순교성지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마르타와 마리아를 방문하시다>
마르타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인 것은 예수님께 식사를 대접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의 집에 들어가신 뒤에도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예수님 혼자만 마르타의 집에 가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도 함께 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마르타의 동생 마리아, 마르타의 오빠 라자로 외에도 마을 사람들도 함께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가르치시는 동안에 마르타는 음식을 만들고, 만든 음식을 나르면서 바쁘게 일하고 있고, 마리아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이 상황을 겉으로만 보면, 마르타만 바쁘게 일하고, 마리아는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대단히 중요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르타는 왜, 동생에게 직접 말하지 않고 예수님께 불평했을까?
마르타의 말은 아마도 자기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싶은데 할 일이 너무 많아서 그러지 못하고 있다는 하소연일 것입니다.
(‘하소연’으로 생각한다고 해도, 마르타가 예수님께 한 말은 결과적으로 예수님을 비난하는 말처럼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좀 더 잘 대접하려다가 예수님께 불편함만 드린 셈이 되어버렸습니다.)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라는 예수님 말씀에서
‘많은 일’은 너무 많은 음식을 뜻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의 일을 뜻할 수도 있고,
음식 접대와 말씀을 듣는 일, 둘 다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은, 너무 많은 음식을 만들지 말라는 뜻일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의 일은 신경 쓰지 말고 자신의 일에만 집중하라는 뜻일 수도 있고,
가장 중요한 일부터 하라는 뜻일 수도 있는데,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라는 말씀과 연결해서 생각하면, “지금 네가 그 일을 하는 이유와 목적을 잊지 마라.”로 해석됩니다.
마르타가 바쁘게 일하는 것은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를 추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만일에 ‘일’만 생각하고서 예수님을 잊어버린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대접하는 일이 아닌 것이 되고, 하느님 나라를 추구하는 일이 아닌 것이 됩니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라는 말씀은,
마르타보다 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가장 좋은 방식을 선택하였다는 뜻입니다.
(마르타가 나쁜 몫을 선택하였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중단하고 너도 여기 와서 내 말을 들어라.” 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았기 때문에,
마르타가 하고 있는 일을 예수님께서 인정하셨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똑같이 하느님 나라를 추구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마르타에게는 마르타의 방식이 있고, 마리아에게는 마리아의 방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르타는 마리아의 몫에 대해서 간섭함으로써 자신이 선택한 몫의 가치를 떨어뜨렸습니다.)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마리아의 몫을 빼앗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얻든지 간에 하느님 나라의 행복은 최상의 가치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 이야기를 조금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마르타가, 또는 마리아가, 또는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르타가 원한 것은 예수님께 좋은 음식을 드리는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원하신 일은 사람들이 당신의 말씀을 듣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의 집에 들어가신 것은,
음식을 받아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을 먹이기 위해서였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리아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던 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말씀’을 받아먹은 일이 되고,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행동한 것이 됩니다.
마르타의 경우에는 예수님께 음식을 드리는 일만 생각하느라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말씀을 받아먹는 일을 소홀히 한 셈이 됩니다.)
이 이야기는 마르타의 방식과 마리아의 방식을 비교하거나 대립시킨 이야기가 아닙니다.
즉 마르타의 방식은 덜 좋은 방식이고, 마리아의 방식은 좋은 방식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활동 중심의 신앙생활보다 묵상 중심의 신앙생활이 더 우위에 있음을 강조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무엇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가?”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의 이유와 목적은 무엇인가?”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일을 하다가 일이 너무 많아서 이웃을 잊어버리고, 사랑을 잊어버리고, ‘일’만 생각하지는 않는가?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걸어가다가, 걸어가는 일만 신경 쓰느라고 목적지가 하느님 나라라는 것을 잊어버리지는 않는가?
성당에 열심히 다니지만 일에 치여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하는 경우도 있고...
이런 일은 마르타에게만 생기는 일이 아니라 마리아에게도 생기는 일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앉아 있으면서도 말씀은 듣지 않고, 말씀을 듣고 있다는 상황 자체에만 빠져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듣기는 하지만 말씀 속에 들어 있는 가르침은 생각하지 않는 경우도 있고...
- 전주교구 신풍 성당
♣ 조욱현 토마 신부님의 묵상글
<마르타와 마리아의 모습>
예수님을 집으로 모신 마르타는 깊은 애정으로 지극히 거룩하신 분과 그분의 제자들을 위해 음식을 장만하고 있다.
그래서 몹시 분주하였다.
그런데 그의 동생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39절)
이것은 무엇을 하였다는 것인가?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마태 5,6)
주님의 발치에서 시장한 마리아는 바로 이 샘에서 정의의 곳간에서 먹고 마시고 있다.
즉 자기가 귀 기울여 듣고 있는 그분의 진리를 먹고 있었다.
주님은 “나는 진리다.” (요한 14,6)라고 하신 분이시다.
그분은 생명의 빵인 당신을 마리아에게 먹이고 계셨다.
그분은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요한 6,41)라고 하셨다.
그 빵은 사람을 먹여 기르되 결코 줄어들지 않는 빵이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모습에서 보듯이 덕은 한 가지의 모습이 아니다.
한 쪽에는 분주한 섬김이 있고, 다른 쪽에는 하느님 말씀에 대한 경청이 있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일이 분주하게 일하는 것보다 우선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42절)라고 하신다.
그러니 아무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지 못하는 것을 얻도록 노력하자.
시중드는 일로 바빠서 거룩한 말씀에 관한 지식을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
마르타가 열심히 시중을 들어 책망을 들은 것이 아니다.
다만 더 좋은 몫을 택한 마리아가 인정을 받은 것이다.
복음에서 보면 마르타는 마리아보다 더 뜨겁게 사랑했다.
주님께서 도착하시기 전부터 시중들 준비를 했고, 라자로를 살리시려고 주님께서 오셨을 때도 먼저 달려나가 그분을 맞이하였다.
언제나 하느님과 하느님의 일에 따르려고 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관심사가 되어야 하고, 갈림 없는 마음으로 쫒는 길이어야 한다.
다른 것은 아무리 중요해 보이더라도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야 한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는 이런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의 전형을 보여주는 성경의 아름다운 예라고 할 수 있다.
마르타는 주님과 그분의 제자들을 위해 시중드는 매우 거룩한 봉사를 하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 그분의 영적 가르침에 모든 주의를 기울였다.
그렇다고 마르타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지만, 비판하지도 않으셨다.
다만 마리아가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42절) 하심으로써 마르타의 몫은 남에게 빼앗길 수 있는 것이라고 하신다.
육신을 시중드는 일은 섬김을 받는 사람이 그곳에 있는 동안에만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마리아의 영원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실천하는 모습은 끝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그분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 수원교구 상하성모세 성당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
이 가을, 기도하고 싶고, 사랑하고 싶고, 그러면서도 홀로 고요하고 싶은 계절입니다.
김현승 시인의 '가을의 기도'가 떠오릅니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오늘 <복음>은 예수님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가던 중, 마르타의 집을 방문했을 때 있었던 일을 들려줍니다.
오늘 <복음말씀>의 핵심은 마지막 구절의 예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마르타 마르타야!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루카 10,41-42)
그렇습니다.
결코 빼앗겨지지 않는 그 무엇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그러니 먼저 우리는 ‘결코 빼앗기지 않을 것을 지니고 있다’는 이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할 일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죽으시러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베타니아에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후,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빼앗지 못할 기쁨” (요한 16,23)에 대해서도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처럼, 결코 ‘빼앗기지 않을 그 무엇’, ‘아무도 빼앗지 못할 기쁨’인 그 무엇이 우리에게는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실상 필요한 한 가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이 “한 가지”는 ‘전부’인 하나입니다.
이것 하나만 지니고 있으면, 다른 모든 것을 얻게 되는 “한 가지” 입니다.
그것은 그분께로부터 주어진 것이요, 선사받은 것입니다.
결코 나의 공로로 얻은 것이 아니요, 내가 만든 것, 내가 획득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는 ‘이미’ 받았습니다.
그런데, ‘필요한 한 가지’, 결코 ‘빼앗기지 않을 그 한 가지’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오늘 복음에서 세 번 반복되고 있는 “주님”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신께서 우리의 “주님”이시라는 이 사실,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실상 필요한 한 가지’요, ‘전부인 한 가지’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빼앗겨지지 않는 사실이요, 그 아무도 앗아갈 수 없는, 거부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진정 그러기에,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그 어떤 처지에서도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로지 이 “한 가지”로 하여, 우리는 행복합니다.
이“한 가지”로 이미 더할 수 없는 충만한 행복입니다.
그 어떤 것도 이 행복을 대신할 수 없는 행복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주님이 주님 되시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마치 마리아가 주님의 말씀을 경청으로 주님을 주님 되시게 해 드렸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자신을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장소요 공간으로 내어드리는 일을 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당신께서 나를 사랑하실 수 있도록 자신을 승복하는 일이요, 동시에 당신께서 나를 섬기시도록 허용하는 일입니다.
당신께서 나를 섬기도록 자신을 허용해드리는 이 일이야말로 바로 진정 당신을 섬기는 일이요, 당신이 주님 되게 해드리는 일일 것입니다.
바로 이 일이 우리에게 실상 필요한 꼭 한 가지요, 그것은 주님을 주님으로 모셔 들이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섬김은 주님을 주님 되시게 해 드리는 일인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도, 정작 하지 않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無爲而無不爲의 단계, 곧 무위(無爲)의 도(道)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아무 것도 하지 않음에도 사실은 전부를 하는 신령스런 도(道)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멘.
주님!
이 한 가지로 하여,
가난을 기쁨으로 살겠습니다.
당신께 속한 자만이
진정 가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한가지로 하여,
낮추어 섬기겠습니다.
속한 자만인 진정 낮아질 수 있고
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음에도
전부를 하는 이 신령스런 일이
바로 당신의 소유가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무슨 일을 하든지
실상 필요한 한 가지만,
주님이신 당신을 주님 되게 하는 일,
바로 그 일만 하게 하소서!
아멘.
-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비교하는 곳에 악이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기의 몫을 행하고 또 그 몫에 기쁨과 감사함을 지닙니다.
자기 몫이 무엇인지 알고 확신이 서 있다면 그 몫을 행하는 것에 배 아플 것도 없고 기쁨이 클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기 몫이 무엇인지 아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일행이 어떤 마을에 들렀는데 마르타라는 여자가 자기 집에 예수님을 모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그 집에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정작 마르타는 시중드는 일에 경황이 없었고, 동생 마리아가 예수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르타가 마음이 상했는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 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주십시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루가10,41-42)
마르타의 몫도, 마리아의 몫도 다 필요하고 좋은 몫입니다.
그러나 우선순위를 따진다면 마리아의 몫입니다.
왜냐하면 ‘들어야 믿을 수 있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이 있어야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로마10,17)'.
말씀을 기초삼지 않은 행동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어 깨닫게 되면 하고 싶은 일을 하기보다 해야 할 일을 하게 됩니다.
내 뜻을 앞세우지 않고 주님께서 원하는 것을 찾게 됩니다.
마르타는 다소 불평어린 어조로 예수님께 말씀 드렸는데, 그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의 역할을 다 했으면 그것으로 족해야지 생색은 왜 냅니까?
왜 동생과 비교합니까?
열심히 일해 놓고 마음에는 화를 잔뜩 담고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어떤 일을 하든 그 일이 내 몫이었으면 그것으로 기뻐해야 합니다.
스스로 주님을 위해 시중을 들었으면 그 자체를 기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마도 마르타는 활동적인 여인인 듯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일에만 집착하면 그 활동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다시 말하면 활동은 기도 안에서, 말씀 안에서 나온 활동이라야 참된 활동이 됩니다.
또한 기도를 하면 할수록 활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도 없는 활동은 무의미합니다.
활동이 없는 기도는 또한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상 안에서 좋은 몫을 택할 수 있는 지혜를 간직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몫이 주어졌든 최선을 다했으면 그 자체로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오히려 너희는 그분의 나라를 찾아라.
그러면 이것들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루가 12,31)
따라서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방해가 되는 것들은 뒤로 미루고, 모든 것에 앞서 주님의 말씀을 먼저 듣기를 희망합니다.
세상을 사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그러나 친구따라 강남 가지 말고, 자기 몫에 충실해야 합니다.
자신을 잃어버리고 남을 따라가다 보면 불평불만이 생기게 되고 결국 악에 지고 맙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좋은 몫이라면 마음껏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부원장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는 언제나 그분 손바닥 안!>
예언자에로의 부르심과 주님께서 주신 사명이 너무나 두렵고 부담스러운 나머지 정신없이 도망가는 요나의 모습에,
제 젊은 시절의 모습이 겹쳐져 한참을 웃었습니다.
요나의 심정이 120% 이해가 되었습니다.
저도 요나와 거의 비슷한 과정을 거쳤기 때문입니다.
사실 요나가 부여받은 예언자로서의 첫 사명은 그 누구라도 받아들이기 힘든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네베로 가서, 그 성읍을 거슬러 외쳐라.
그들의 죄악이 나에게까지 치솟아 올랐다.”
(요나 예언서 1장 2절)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는 요나에게 동족 유다인들이 아니라 앗시리아의 수도 니네베의 멸망을 선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고대근동 지방에서 이스라엘을 약소국인 반면, 앗시리아는 최대강대국이었습니다.
그러니 요나 입장에서 얼마나 큰 부담이었겠습니까?
잘 훈련되고 강력한 앗시리아 군사들을 생각하니 몸서리가 쳐진 요나는 필사적으로 도망가기 시작합니다.
우선 그는 가급적 주님으로부터 멀리 도망가기 위해 항구를 향해 초스피드로 달렸겠지요.
마침 타르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 승선하게 되었습니다.
그제야 그는 겨우 한숨을 돌리며 마음의 여유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웬걸 하느님도 집요하셨습니다.
끝까지 도망가는 요나를 끝까지 따라붙으셨습니다.
요나는 ‘이제야 안심이다!’ 했었지만, 주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그분은 안 계시는 듯 계시는 분, 그 어디든 계시는 분, 지구 끝까지 도망쳐봤자, 요나는 그분 손바닥 안이었던 것입니다.
마침내 요나는 주님 손에 붙들립니다.
그분께서는 요나에게 ‘맛 좀 제대로 봐라!’ 하시면서 깊고 깊은 고래 뱃속에 사흘밤낮 동안 머물게 하시며 단련시키십니다.
그리고 요나를 심연의 어둠, 그리고 당신 뜨거운 사랑의 용광로 속으로 몰아넣으신 후
완전한 새 사람, 새 예언자로 재탄생시키십니다.
그제야 제 정신이 든 요나는 주님의 참된 예언자로 거듭나 그분께서 맡기신 사명을 충실히 이행하기 시작합니다.
돌아보니 저 역시 젊은 시절,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 의기양양하게 길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 길에 들어서니, 뭐 그리도 넘어야 할 산이 많던지.
그게 아니면 준비가 채 되지 않았던지.
그리도 두렵고 힘겨웠습니다.
보따리를 몇번이고 쌌다 풀었다를 반복했습니다.
때로 요나처럼 그분 눈앞에서 최대한 멀어지려고 도망도 많이 가봤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언제나 참담함이었습니다.
막심한 후회였습니다.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분 손에 붙잡혀 다시 돌아오기를 그렇게 반복했었습니다.
그러니 주님께 찍혔다면 더 이상 방법이 없습니다.
그분의 부르심 앞에 도망치지 말아야 합니다.
도망가봤자 다 헛일입니다.
그분께서도 만만치 않으십니다.
끝까지 따라붙으실 것입니다.
그러니 그분 부르심 앞에서는 다른 묘안이 없습니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수용, 그것이 최선의 길입니다.
때로 대단하거나 거창하지는 않지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요나와 비슷한 처지에 놓이게 하십니다.
‘다른 좋은 사람, 훌륭한 사람들도 많은데, 왜 하필 나인가?’
‘왜 주님께서는 이토록 힘에 벅찬 무리한 요구를 내게 하시는가?’
그러나 꼭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주님의 창조주입니다.
그분 손에 놓여있는 한덩이 진흙같은 존재들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일이 있다면, 그게 어떤 일이든 기꺼이 협력해야 마땅합니다.
부족하고 나약한 나란 존재를 통해 당신의 놀라운 업적을 이루시려는 주님의 초대에 감사하며 기쁘게 일어서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장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환대의 구조 - 들음, 회개, 환대>
들음은 회개로, 회개는 환대로 직결됩니다.
그 적절한 예가 우리의 공동전례기도입니다.
우리는 매일 미사와 시편전례 공동전례기도를 바칠 때 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와 동시에 가슴을 활짝 열어 주님을 환대합니다.
주님 역시 가슴 활짝 열고 회개한 우리를 환대해 주십니다.
하여 우리는 주님의 위로와 치유, 기쁨과 평화도 선물로 받고 ‘주님과의 우정’도 날로 깊어갑니다.
회개와 환대를 일상화해주는 ‘회개와 환대의 시스템’ 같은 수도원 일과표가 참 고맙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환대입니다만 역시 마르타의 경우를 통해 회개로 직결됨을 봅니다.
마리아와 마르타 두 자매 모두 주님을 열렬히 환대합니다.
그러나 환대의 방식이 달랐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이 원하시는 바에 따라 주님의 발치에 앉아 주님의 말씀을 경청함으로 주님을 환대했고,
마르타는 자기 식대로 주님을 대접할 식사를 준비하며 주님을 환대했습니다.
환대에도 상대방의 필요를 고려하는 분별의 지혜가 절대적임을 깨닫습니다.
배고픈 자에게는 우선 식사를 제공하는 환대가 우선이겠지만, 주님의 환대는 그분의 말씀을 경청하는 환대가 우선임을 깨닫습니다.
하여 미사의 구조도 우선 말씀의 경청을 통해 주님을 환대한 후에 성찬을 나누라고 ‘말씀의 전례’ 후에 ‘성찬의 전례’의 순서로 배치되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진정한 환대는 마리아처럼 주님의 뜻대로 우선 주님의 말씀을 경청함으로 주님을 환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주님의 환대뿐 아니라 사람의 환대도 대부분의 경우 주님의 환대처럼 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 주는 것임을 체험합니다.
특히 고백상담을 통해 절감하는 사실입니다.
내담자가 원하는 것은 충고나 조언보다는 내담자의 말을 잘 들어주고 위로와 격려를 통한 환대입니다.
들음의 중요성을 통감하기에 실제적으로 청력의 약함은 정말 안타깝고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력과 더불어 청력 역시 영성생활의 절대적 요인입니다.
그러나 마음따라 보는 눈이고 마음따라 듣는 귀이기에 ‘마음의 정화(淨化)’ 역시 필수적임을 깨닫습니다.
이래야 제대로 잘 보고, 제대로 잘 들을 수 있습니다.
하여 마음의 회개를 그리도 강조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마르타의 회개를 촉구하는 주님의 애정 가득한 말씀입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 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분별의 지혜를 발휘하여 우선 주님의 말씀을 경청함으로써 당신을 환대하는 마리아에 대한 칭찬과 더불어 마르타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식사 준비보다 당신의 말씀을 경청하는 환대에 우선 순위를 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는 이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참 좋은 몫임을 깨닫습니다.
말씀을 잘 들어야 순종과 겸손의 덕도 자연스럽게 뒤따릅니다.
하여 구약의 예언자들이 한결같이 강조한 것은 주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베네딕도 규칙도 ‘들어라, 오, 아들아(Obsculta, o fili)’로 시작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음을 통한 회개요, 회개를 통한 개방의 환대입니다.
아마 마리아 역시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회개와 더불어 마음을 활짝 열어 주님을 깊이 환대했을 것입니다.
바로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 중, 말씀 전례 시 우리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오늘 요나서의 말씀 구조를 통해서도 그대로 입증됩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요나는 니네베 성읍 사람들에게 주님의 심판을 선포함으로 이들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이제 사십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정작 무서운 것은 외적 어려움이 아니라 죄로 인해 내적으로 무너져 내리는 것입니다.
니네베뿐 아니라 회개하여 죄악에서 돌아서지 않으면 우리 역시 안에서부터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이런 경우 아무도 도울 수 없습니다.
니네베 사람들의 회개가 참 기민합니다.
‘그러자 니네베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었다.’
짧은 한 마디 말이 이들의 기민한 회개 상태를 요약합니다.
모두가 거족적인 공동회개의 실천으로 마음 활짝 열어 주님을 환대합니다.
이런 니네베 사람들의 회개와 환대에 대한 주님의 응답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그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
니네베 사람들의 기민한 회개와 환대로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오늘 제1독서 요나서입니다.
주님은 개인의 회개와 환대보다 공동체 전체의 회개와 환대를 더욱 기뻐하십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중 당신 말씀을 경청하고 회개를 통해 당신을 환대하는 우리 공동체를
당신 생명과 사랑의 빛으로 가득 채워 주십니다.
“행복하여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들!”
(루카 11,28)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 이기양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 더 좋은 몫 >
가끔 신자 가정에 초대를 받아 갈 기회가 있습니다.
모처럼 여러 이야기도 나누고 살아가는 이야기도 듣고 싶은 마음으로 방문을 하면,
정작 초대한 사람은 말 한마디 못하고 음식 준비로 분주하기만 한 모습을 보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쉬운 마음이 없지 않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도 이와 비슷한 상황에 계신 것 같습니다.
마르타라는 여인이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했는데 음식 만들기와 시중드는 일에 경황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요.
손님을 초대해 놓고 잘 모시려면 바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예수님은 항상 제자들의 무리와 함께 다니셨으므로 한두 명의 식사 준비가 아니었을 겁니다.
일손은 부족하고 마음은 급한데 거듭 도와달라고 청해도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을 뿐입니다.
참지 못한 마르타가 예수님께 와서 하소연을 하지요.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루카 10,40)
예수님께서는 음식 준비도 중요하지만 말씀을 듣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시며
말씀을 듣는 마리아의 좋은 몫을 그냥 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는 해야 할 많은 일들이 있고 필요한 것도 많습니다.
항상 분주하지요.
그런데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라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몫이 있다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 그리고 초대한 손님들을 위해서 음식을 만드는 것, 이 모두가 다 필요하고 좋은 일이지만,
가장 좋은 몫은 역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오늘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마르타와 마리아로 구분되는 두 모습은 우리 성당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확연하게 활동 중심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기도 중심인 사람도 있습니다.
둘 다 바른 모습은 아니지요.
하느님 안에서 말씀을 묵상하거나 기도하지 않으며 활동에만 중점을 두는 사람은 상처받기 쉽습니다.
작은 일에도 상처를 받고 사소한 서운함에 쉽게 노여워하며 일이 끝나면 오히려 그 전보다도 못한 상태로 퇴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말씀 중심의 활동이 아니고 자기 지향대로 움직인 결과 드러나는 모습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활동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성체 조배실만 열심히 드나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른 모습이라고 할 수 없지요.
세상을 떠나 하느님 안에서만 살고자 하는 수도자들도 기도하고 일을 합니다.
가톨릭 교회의 전통 안에서 1,500년 동안 전해 내려오고 있는 베네딕도 수도회의 모토는 ‘기도하고, 일하라.’는 것입니다.
수도자들조차도 기도 못지않게 활동에 비중을 두고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기도 안에서 만나는 하느님을 활동 안에서 드러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외딴 곳에 가서 기도하셨을 뿐 아니라 많은 시간을 활동하시며 지내셨습니다.
예수님의 시간은 틈틈이 기도하시는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이 하느님을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며 치유하는 일에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따라서 언제나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담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활동이 더해져서 우리의 신앙이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실천 없는 믿음은 오히려 천주교와는 동떨어진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자신의 수도에만 정진하는 소승불교가 있고, 대중을 구제하는 데 전념하는 대승불교가 있습니다.
기도와 활동이 함께 어우러진 우리 천주교는 기도로써 자신을 닦고 동시에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이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어가게 합니다.
마치 자기가 수도자인양 기도만 하고 봉사 활동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모습은 결코 바람직한 모습이 아닌 것이지요.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더 좋은 모습으로 말씀하신 부분이 마리아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일입니다.
신자와 비신자가 구분되는 것은 기도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신자나 비신자나 똑같이 여러 사회 봉사와 다양한 활동을 하지요.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담고 기도하며 활동하는 신자의 삶과, 기도 없이 활동만을 하는 비신자의 삶은 하늘과 땅 차이가 납니다.
기도하지 않는 활동은 무의미합니다.
사회 봉사자 정도의 수준이지요.
우리는 많은 경우에 정신없이 살다보면 기도에 소홀해지기가 쉽습니다.
기도에 소홀해지면 그 결과 사소한 일로 이웃과 다투게 되고 작은 부분에도 상처를 받기가 쉽습니다.
옹졸해지지요.
예를 들어 사목자가 어떤 봉사를 요청했을 때 기도하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받아들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빠져나갈 뿐 받아들이지 않지요.
사목자의 눈에는 아주 명확하게 보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어려움을 받아들이면 거기에 하느님의 큰 은총이 함께 한다는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담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마리아의 몫을 강조하심으로써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목자들이 가장 놓치기 쉬운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묵상하지 않은 채 전달하는 말은 연설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 역시 많이 기도하고 더욱 묵상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마르타와 마리아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의도를 알아들어야 하겠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작은 어려움을 마다하지 않고 오히려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은총이 크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요.
지금까지 내가 너무 활동과 세상의 일에만 치우쳐 있었다면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좀 더 기도하고 고요히 머물러 묵상하는 시간을 늘려야 하겠습니다.
그 바쁘신 중에서도 외딴 곳에 가셔서 새벽까지 기도하신 예수님은
바로 그 기도의 힘으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여러 활동을 하실 수가 있으셨지요.
기도하고 활동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서울대교구 위례성모승천 성당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내 삶의 뿌리와 출발점과 목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베타니아에 있는 마리아와 마르타의 집에 들르십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 드릴 좋은 음식을 장만하는 등 온갖 시중을 드느라 바빴습니다.
그럼에도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집중하여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마르타가 예수님께 다가가 자신의 일을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시라고 청합니다(10,40).
예수께서는 마르타에게 이르십니다.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10,41-42)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의 시중드는 일이 말씀 경청보다 못하거나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슨 일이든 당신께 초점을 맞추어야 하며, 하느님의 새로운 방법으로 해야 함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려줍니다.
따라서 마리아처럼 자신의 행동과 생각과 의지를 멈추고, ‘무엇보다도 먼저’ 말씀하시는 예수께로 다가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지요.
봉사와 말씀 경청은 양자택일의 대상이 결코 아닙니다.
봉사를 하더라도 자기 생각과 계획대로 한다면 그것은 ‘개인사업’에 지나지 않겠지요.
봉사는 하느님의 말씀에 뿌리를 두어야 하고, 자비로우신 주님의 사랑을 품고 주님을 섬기듯이 극진히 섬겨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모든 일은 하느님과의 만남에서 시작되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 실행함으로써 말씀의 육화를 이루어야 함이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사랑만이 삶의 의미를 밝혀주며, 다른 이들과 일치시켜주기 때문입니다.
기쁨이신 주님과 더불어 주님의 일을 할 때에만 영원한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더욱 더 성숙한 영성생활을 하려면 하느님께 뿌리를 두고 모든 것을 그분 안에서 실행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또 무엇이 가장 좋은 것인지를 명확히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이 근본을 망각한 영성과 기도와 신학은 참일 수 없으며, 우상숭배에 빠져들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든 말씀을 경청하고 되새겨 내면화 하도록 힘써야겠지요.
오늘도 ‘먼저’ 예수님을 말씀을 경청하여 ‘사랑으로 변모되어’ 고통 받고 소외된 이들에게로 달려가야겠습니다.
우리가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삶의 태도는 형제와 만물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나 자신을 보는 것임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형식적이고 허황된 소리, 스침의 관계로 채워지는 일상 속에 하느님의 향기로 다가가야겠습니다.
우리는 남남이 아닙니다.
따라서 자신의 앞만 보고, 자기 일만 하며 하느님을 잊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하느님을 듣고 품어 우리 사이에, 이 세상 한복판에 존재하는 사막과도 같은 소외와 갈증을 공감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오늘도 마리아처럼 주님의 사랑의 말씀을 가득 품고 다른 이들의 한숨과 번민을 들어주어야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 단 한 가지가 아닐까요?
- 작은형제회
♣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복음에 나오는 마리아와 마르타의 이야기는 우리를 조금 당혹스럽게 합니다.
편한 자리에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음미할 시간을 가진 마리아보다
손님을 귀하게 모시려고 동분서주 애쓰는 마르타의 모습이 훨씬 더 겸손하고 훌륭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의 편을 들어 주시지 않고 마리아가 정말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고 칭찬해 주십니다.
세상이 발전하면서 사람들의 발걸음이 빨라집니다.
교통이 발달하고 통신도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는데 우리의 걱정거리는 줄어들지 않고 점점 더 복잡해져 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걱정거리는 정작 중요한 일 때문이라기보다는,
바로 우리의 관심과 욕심이 늘어나기 때문에 생겨난 것들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경쟁에서 지지 않으려는 욕심이 우리를 바쁘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자기 자신을 찾는 일이고,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수많은 일을 걱정하기보다 정작 중요한 것들을 놓치지 않고자 우리는 침묵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침묵의 시간은 나의 내면에 흩어져 있는 것들을 차분히 정리해 주고, 진짜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해 줍니다.
그리고 하느님과 만나고 대화하며, 이를 통해 참된 나를 발견하고 만들어 가게 해 줍니다.
-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홍보국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