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색, 흑색기와층 |
제 3 문화층 |
붉은색 기와층 |
제 2 문화층 |
청회색 기와층 |
제 1 문화층 |
일반적으로 층위학적 견지에서 보면 맨 밑에 있는 층위가 이르고 그 우에 덮힌 층위가 그 보다 늦은 시기에 해당된다. 이러한 견해를 따라 장수산일대의 기와층을 보면 맨 밑에 깔린 청회색 기와층이 제일 이르고 그 우에 쌓인 회색, 흑회색기와층이 제일 늦은 시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매개 문화층의 선후관계는 매 문화층에 포함된 유물 춤새를 통하여서도 알 수 있다.
청회색기와가 기본을 이루는 층위에는 굳기가 연한 청회색 단지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청회색질그릇 쪼각이 포함 되여 있다. 연질의 청회색단지는 대체로 바탕흙이 보드랍고 그릇 살이 얇은 것이 특징이다. 단지는 아기리가 밖으로 해바라지고 목이 길며 어깨는 둥그스럼하고 밑으로 내려가면서 밋밋하게 좁아진 것이 많다.
또한 바탕흙에 모래가 많이 섞이고 그릇 몸이 두꺼운 작은 단지와 네모난 꼭지손잡이가 달린 단지뚜껑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유물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른 시기 고구려무덤에서 드러난 유물들과 많은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
2세기말의 고구려무덤으로 추정된 은파군 금대리 1,2,3호 무덤들에서는 여러 가지 질그릇이 나왔는데 대부분이 청회색의 연한 단지이다. 단지는 몸이 얇고 바탕흙이 보드라우며 어깨가 둥그스럼하게 퍼졌다. 그리고 아가리는 밖으로 해바라졌다.
* ≪력사논문집≫ 9, 김일성종합대학출판사, 1985년판, 9-64페지.
청회색기와층의 유물 갖춤새에서는 또한 1-3세기 서북조선에 널리 보급되였던 문화의 전통이 농후하게 나타나고 있다. 서북조선의 1-3세기 문화의 내용은 질그릇과 기와 벽돌에서 볼 수 있다. 질그릇은 바깥쪽이 보드라운 점토로 만들어졌는데 그릇들은 얇고 아가리가 밖으로 해바라졌다. 그리고 목은 짧고 어깨가 퍼졌다. 단지의 몸은 어깨로부터 밋밋하게 내려가다가 배가 나왔다.
기와는 노끈무늬가 새겨진 회색기와이며 벽돌은 노끈무늬와 릉형무늬가 결합된 회색벽돌이다. 그런데 이러한 문화의 전통은 우에서 본 바와 같이 청회색기와가 기본을 이루는 층위의 유물에서 강하게 엿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청회색기와층은 층위관계로 보아 맨 밑에 놓여있으며 거기에는 고구려가 서북조선을 차지하기 이전시기의 문화전통이 깊이 스며있다.
다음으로 붉은 기와가 기본내용을 이루는 문화층에는 아가리가 밖으로 해바라진 굳은 회색 비치류와 작은 독이라고 할만한 크기의 회색단지, 도기류 등이 포함되여 있다. 회색단지는 아기리가 밖으로 해바라지고 목이 없으며 퍼진 어깨는 아래로 내려가면서 점차 좁아졌다. 단지는 바탕흙이 보드라운 점토로 만들어졌는데, 두께는 얇고 굳기가 연하다. 도기는 나팔병이다. 즉 아가리가 나팔주둥이처럼 밖으로 퍼지고 목이 잘룩하며 어깨는 퍼졌다. 도기의 어깨에는 물결무늬를 돋치였다. 이 문화층에서는 이와 함께 쇠보습과 쇠아궁틀 등 고구려의 고유한 철기류가 많이 포함 되여 있다. 또한 회색벽돌로 많이 드러났는데 벽돌에는 노끈무늬가 없어지고 여러 가지 기하무늬가 새겨져있다. 드러난 벽돌가운데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기년명이 있는 벽돌이 있는 것이다.
벽돌에는 ≪永嘉 7年≫(영가 7년)이라고 씌여져 있다. 이런 글자가 새겨져있는 벽돌은 다른 벽돌과 함께 붉은 기와층의 맨 밑 청회색기와의 우에서 즉 붉은기와층과 청회색기와층의 거의 맛 닿은 층위에서 드러났다. 붉은기와층문화의 특징은 서북조선 1-3세기 문화의 전통이 청회색기와층에 비하여 거의 없어지고 그 대신 새로운 문화전통의 비중이 높아진 것이다. 그것은 기와에서 뚜렷이 찾아볼 수 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붉은 기와는 서북조선 1-3세기 문화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것이며, 청회색기와와는 질적으로 구별되는 새로운 종류의 기와이다. 붉은 기와는 색깔에서뿐 아니라 바탕흙과 굳기 무늬가 청회색기와나 1-3세기 서북조선의 기와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실례로 기와의 무늬를 들어보면 1-3세기 서북조선의 기와무늬는 노끈무늬이다. 이에 대하여서는 학계의 공인된 견해이다. 그런데 붉은기와에서는 격자무늬가 기본을 이루고 있다.
격자무늬는 붉은 기와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새로운 무늬형식이다.
청회색기와층에 비하여 새로운 문화의 비중이 높아진 것은 또한 질그릇에서도 볼 수 있다. 우에서 본 바와 같이 붉은 기와 중에서 드러난 물결무늬단지. 질이 굳은 회색비치류 등은 청회색 기와층에서는 볼 수 없던 유물로서 붉은 기와층이 형성되던 시기에 새롭게 나타난 것들이다.
이와 같이 붉은 기와층의 유물에는 청회색 기와층에서는 볼 수 없던 여러 가지 유물이 포함 되여 있으며 청회색기와층에 다분히 포함 되여 있던 서북조선의 고구려 이전시기 문화와는 다른 요소가 많이 보인다. 그것은 다른 측면에서 보면 청회색기와층이 형성되던 시기와 붉은 기와층이 형성되던 시기의 생산기술과 문화의 발전수준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례를 들면 붉은기와층에서 나온 유물 가운데 물결무늬를 가진 유약바른 단지, 쇠로 주조한 개마모형, 등은 붉은 기와층이 형성되던 시기 이전에는 없었던 것들이다. 이러한 제반 사실은 청회색기와층이 붉은 기와층보다 먼저 형성되였다는 것을 말하여 주고 있다. 다음으로 회색기와에 대하여 보기로 한다.
회색기와가 기본내용을 이루는 문화층의 우물들을 전반적으로 검토하여보면 우선 붉은기와층에 다소나마 보이던 1-3세기 서북조선문화의 잔재가 완전히 없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례를 들면 붉은 기와층에 포함되여 잇던 회색벽돌은 없어졌으며 붉은 기와에 새겼던 노끈무늬를 회색기와에서 전혀 볼 수 없게 되였다. 또한 붉은기와층에 얼마간 포함되여있던 도기류의 수가 많아졌으며 매우 다양해졌다. 이와 함께 회색기와와 같이 나오는 유물가운데는 검은 회색의 기와가 드문드문 섞이여 있다. 검은 회색기와는 고려시기의 기와와 함께 나오는 것으로서 고려초기까지 씌여진 기와의 한 종류이다. 이와 같이 회색기와층에는 붉은 기와와 함께 나오는 유물보다 늦은 시기의 유물이 함께 드러난다.
결국 회색기와는 붉은 기와보다 늦은 시기의 것이라는 것을 말하여 준다. 따라서 장수산일대 유적에서 드러난 기와의 변천과정은 세단계를 거쳐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첫 단계는 고구려가 장수산 일대를 차지한 첫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여전히 청회색기와가 보급되였으며 아직은 고구려 이전시기의 문화전통이 강하게 남아있었고 새로운 혁신적인 요소가 매우 희미하였다.
둘째단계는 첫단계와는 달리 고구려 이전시기의 문화전통이 희박해지고 새로운 고구려 고유의 문화가 형성 발전되던 시기이다. 이 단계의 문화는 붉은 기와를 기본 내용으로 하는 유물갖춤새가 문화의 기본특징으로 되고 있다.
셋째단계는 고구려 고유의 문화가 보다 높은 단계에로 발전한 시기이다. 이 시기의 문화는 회색기와가 기본 내용을 이루고 있다. 첫째단계와 둘째단계의 문화는 거기에 고구려 이전시기의 문화전통이 스며있는 것이 공통하며 차이는 첫째단계는 고구려 이전시기 문화의 전통이 강하고 새로운 요소가 희미한데 둘째단계의 문화에는 고구려 이전시기 문화전통이 현저히 약화되고 그 대신 새로운 고구려 고유의 문화전통이 강화된 것이다. 그리고 셋째단계의 문화는 둘째단계의 문화와 공통하면서도 보다 높은 생산력 발전모습이 깊이 스며있다. 따라서 장수산 일대의 기와는 첫 단계로부터 두 번째 단계에로, 두 번째 단계로부터 세 번째 단계에로 발전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이 기와를 기본으로 하는 문화층 관계와 매 문화층의 내용은 기와의 변천관계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으로서 청회색기와층이 제일 이르고 붉은 기와층이 그 다음이며 회색기와층이 제일 마지막층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청회색기와 |
→ |
붉은색기와 |
→ |
회색기와 |
이상의 도시유적에서 나온 세 종류의 기와가 속한 문화층관계와 기와의 변천관계는 도시유적의 년대를 밝히는데 있어서 중요한 자료로 된다. 도시유적의 년대를 밝히는데서 가장 중요한 자료로 되는 것은 ≪영가 7년≫명 벽돌이다.
이미 언급한바와 같이 기년명 벽돌은 아양리토성안의 붉은기와층 맨 밑에는 노끈무늬를 새긴 붉은기와, 청회색기와 함께 드러났다. 벽돌이 드러난 그 밑에는 청회색기와층이 깔려있었다. 그러므로 기년명벽돌은 청회색기와 붉은기와와 거의 한데 섞이여 드러났던 것이다. 이것은 붉은기와와 회색벽돌 청회색기와와 회색벽돌이 서로 밀접한 련관을 가진 유물들로서 회색벽돌이 붉은기와보다 좀 이른 시기 또는 거의 같은 시기에 씌여진 유물로 볼 수 있게 한다. 또한 기년명벽돌의 년대가 회색기와층의 하한으로 되며 붉은기와층은 청회색 기와층에 잇닿아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기년명벽돌은 도시유적의 년대를 밝힘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기준자료로 될 수 있다. ≪영가≫라는 년호는 두 번에 걸쳐 사용되였다. 처음에는 145년에 1년 동안, 그 다음은 307년부터 7년동안 쓰이였다. 그러므로 ≪영가7년≫명 벽돌의 년호는 307년부터 쓰인 년호로서 그 마지막해의 년호로 볼 수 있으며 그것은 313년에 해당된다.
따라서 기년명 벽돌이 있는 문화층과 잇닿은 붉은기와층은 4세기 이후에 이루어진 층위로 청회색기와층은 4세기초 이전에 형성된 층위로 볼 수 있다. 그러면 장수산 일대의 붉은기와가 언제까지 쓰여졌겠는가. 이것은 도시유적의 맨 마지막 문화층에 속한 회색기와층이 언제부터 형성되였는가 하는 문제와도 결부된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월당리 지역의 문화층이다. 앞에서도 보았지만 월당리 지역의 문화층은 단일한 붉은기와층이며 그 우에는 2.5m이상의 두께로 모래층이 덮여있다.
문화층에 덮힌 모래층은 오랜 시기에 걸쳐 서서히 덮힌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시기에 큰물이 나서 형성된 것이다. 이것은 이 지역에 어느 한 시기 굉장히 큰 수해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월당리지역은 붉은 기와를 쓰던 시기에 큰물에 의하여 폐허로 된 다음 다시는 건설되지 않고 계속 경작지로 리용 되여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안원왕 5년>에는 535년 나라의 남쪽지역에 ≪국남대수≫로 기록된 류례 없이 큰 물이 나서 집들이 떠내려가고 죽은 사람이 200여명이나 되는 큰 자연재해가 일어났다는 기사가 있다. 아마도 재령강 동쪽의 월당리지역, 단일한 붉은기와층과 그 우에 덮씌운 모래층은 535년의 국남대수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장수산일대 붉은기와층은 6세기전반기까지 이루어진 문화층으로 도시유적의 회색기와층은 6세기전반기 이후에 형성된 문화층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장수산성 남쪽의 고구려 도시유적은 4세기초 중엽 이전에 형성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무덤의 년대
장수산성부근의 고구려 유적가운데서 무덤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무덤은 장수산의 동남부 재령강 좌우의 나지막한 산기슭 구릉들에 떼를 지어 분포 되여 있다. 무덤은 아양리지역에는 하니봉 남쪽기슭과 하동진등에 월당리지역에는 로환동, 담동, 남지동, 룡호동, 망녕동, 망우동 그리고 운양리 일대에 모두 1000여기 분포되여 있다. 장수산 일대 고구려 무덤은 평천정동칸흙무덤과 고임천정돌칸흙무덤이다. 이 두 류형의 무덤사이에는 돌칸흙무덤이라는 점, 무덤 안길이 있다는 점들에서 공통성이 있으나 구조형식과 껴묻거리에서 뚜렷한 차이가 있다.
구조형식상 차이는 우선 천정구조에서 볼 수 있다. 고구려돌칸흙무덤의 평천정은 방형, 또는 장방형으로 된 무덤칸을 한 장의 판석이나 몇 개의 큰 천정들로써 평평하게 덮은 것이다.
이것은 무덤의 가장 단순한 천정구조형식으로서 초기무덤이나 규모가 작은 무덤들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이와는 달리 고임천정은 무덤칸의 네벽 끝에서부터 계단식으로 돌을 쌓아올리면서 천정을 안으로 좁히다가 맨 우에 천정들을 덮은 평천정보다 복잡한 천정구조형식으로서 무덤칸의 규모가 비교적 큰 무덤들에서 볼 수 있다.
고임천정의 무덤은 당시 지배층에 속하는 자들이 죽은 다음에도 자기들의 권세와 ≪위엄≫을 시위하려는 목적에서 무덤을 크고 웅장하게 만들려는 요구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다. 무덤을 크게 만들려면 그 만큼 무덤칸의 공간이 넓어지므로 거기에 재래식의 평천정을 하면 자체의 중량과 그 우에 덮은 무덤무지의 압력으로 판돌들이 꺽어질 위험성이 많아지게 된다. 그러므로 외적으로는 무덤무지를 높이 올려 쌓을 수 없으며 내적으로는 무덤칸의 벽을 높이지 않는 이상, 무덤칸 안의 웅장한 감을 보장할 수 없다. 평천정의 이러한 약점을 극복하고 무덤의 내외부를 크고 웅장하게 만들기위한 방도의 하나로써 고임천정과 같은 새롭고 우수한 천정수법을 창안하여 무덤에 도입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고임천장은 평천정의 약점을 극복하고 그것을 가일층 발전시킨 것으로써 평천정보다 늦게 나타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평천정돌칸흙무덤과 고인천정돌칸흙무덤의 구조형식상 차이는 또한 주검칸과 무덤안길의 짜임새에서도 볼 수 있다. 장수산 남쪽(?)의 평천정돌칸흙무덤은 모두 주검칸이 비교적 좁고 길며 무덤안길이 짧고 좁은 것이 특징이다. 또한 주검칸의 높이는 낮다. 그리고 두칸 무덤인 경우에도 평천정무덤은 하나의 무덤 무지안에 무덤 안길이 각각 따로 붙은 좁고 긴 두 개의 무덤칸으로 되여있는데 고임천정돌칸흙무덤은 하나의 무덤무지 안에 하나의 무덤안길이 붙은 두개의 무덤칸으로 되여있고 무덤칸은 거의 장방형에 가깝다.
장수산 일대에 고구려 평천정돌칸흙무덤은 대체로 주검칸의 크기가 길이 2.5m, 너비 1m, 높이 0.7m 안팎이다. 무덤안길은 크기가 길이 0.5m, 너비 0.4m, 높이 0.7m 정도로서 사실상 실용성이 없는 형식적인 시설에 불과하다. 그러나 장수산성 남부의 하동무덤떼를 비롯한 고임천정돌칸흙무덤의 주검칸ㄴ은 크기가 길이 2.8m, 너비 2m, 높이 1.5m로서 모두 방형에 가깝고 주검칸의 전반적 규모도 평천정돌칸흙무덤에 비하여 훨씬 크다. 무덤 안길은 길이 1.3m, 너비 0.8m, 높이 1.5m로서 규모도 크고 실용성도 있다.
이와 같은 장수산성 부근의 평천정돌칸흙무덤과 고임천정돌칸흙무덤의 구조형식상 차이는 류형의 무덤들이 만들어진 시기가 서로 다른데서 생긴 것이라고 인정된다. 그것은 두 류형의 무덤들에서 나온 껴묻거리의 질적 상태를 보아도 알 수 있다. 평천정돌칸흙무덤의 껴묻거리의 특징은 청회색단지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청회색도기제품이며, 간혹 돌각담무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갈색바탕흙의 질그릇이 나완 것이다.
그런데 고임천정돌칸흙무덤의 껴묻거리의 특징은 국은 회색질그릇이 기본을 이루고 있다. 또한 평천정돌칸흙무덤에서는 보이지 않는 붉은 기와가 주검칸에서 흔히 드러났다. 이상의 평천정돌칸흙무덤과 고임천정돌칸흙무덤의 구조형식상 차이와 껴묻거리에서의 차이는 시간적인 차이에서부터 생긴 것으로서 평천정돌칸흙무덤이 고임천정돌칸흙무덤보다 시간적으로 이른 시기의 무덤이라고 볼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장수산성 부근의 고구려 무덤들도 고구려 무덤변천의 일반적 합법칙성에 따라 발전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장수산성 부근 고구려무덤들의 축조를 어느 때로 볼 수 있겠는가.
일반적으로 큰 판돌을 하나, 혹은 몇 개의 큼직큼직한 판돌을 세워 무덤칸을 마련하고 무덤칸 벽 우에 여러 개의 돌을 수평으로 덮은 평천정돌칸흙무덤의 규모는 수평으로 덮은 평천정돌칸흙무덤의 규모는 대체로 고임천정돌칸흙무덤에 비하여 작은데 무덤칸이 좁고 길며 무덤길이 짧고 좁은 것이 특징이다.
실례로 평남도 온천군 성현리 황산남쪽 기슭의 평천정돌칸흙무덤은 큰 판돌로 길게 주검칸을 마련하고 그 우에 몇 장의 판석을 덮은 무덤인데, 무덤칸의 남벽 한쪽에는 무덤길을 내고 무덤문을 세웠다. 그의 크기를 보면 주검칸은 길이 2.53m, 너비 1.2m, 높이 0.76m이고, 무덤 안길은 너비 0.51m, 길이 0.2m이다. 무덤길은 무덤칸의 동쪽에 완전히 치우쳤다.
일반적으로 평천정무덤은 주검칸이 한칸으로 된 것도 있고, 하나의 무덤무지안에 무검길을 따로 따로 마련한 두개, 또는 그 이상의 주검칸을 마련한 것도 있다. 평천정돌칸흙무덤은 대체로 평양천도 이전에 보급되였던 고구려 이른 시기의 무덤 류형으로서 3세기 중엽을 전후한 시기까지 씌여졌다.
장수산성 남쪽 기슭 평천정돌칸흙무덤의 구조형식은 성현리 평천정돌칸흙무덤의 구조형식과 공통할 뿐 아니라, 그 밖의 평천정돌칸흙무덤과도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그의 껴묻거리는 다른 평천정돌칸흙무덤의 껴묻거리와도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
장수산일대의 평천정돌칸흙무덤에서 드러난 단지류는 대부분 청회색의 작은 단지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평천정돌칸흙무덤에서 드러난 단지도 대체로 질이 연한 청회색단지이다.
실례로 성현리 평천정돌칸흙무덤에서는 여러 개의 단지류가 드러났는데 모두 연하고 보드라운 바탕흙으로 만든 청회색 단지로서 장수산 일대의 평천정돌칸흙무덤에서 드러난 것과 같다.
성현리 평천정돌칸흙무덤과 같은 구조형식을 가진 평양 일대의 고구려 무덤들의 축조 년대는 3세기 전반기로 편년 되였다.*
그것은 또한 평천정돌칸흙무덤인 안학궁 3호 무덤에서 나온 질그릇이 청회색단지로서 장수산 일대 평천정무덤에서 드러난 것과 같다.
3세기로 편년된* 안학궁3호무덤은 쌍곽으로 된 평천정돌칸흙무덤이다.
* ≪력사론문집≫9. 김일성종합대학출판사, 1965년판, 61페지
* ≪고구려력사연구≫(안학궁유적과 일본에 있는 고구려관계 유적유물) 김일성종합대학출판사, 1985년판, 95페지.
이와 같이 장수산 일대의 평천정돌칸흙무덤은 구조형식과 껴묻거리상이 평양일대에서 3세기 중엽까지 보급되였던 평천정돌칸흙무덤과 같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장수산 일대 평천정 돌칸흙무덤의 연대를 비정해보면 황산남쪽 기슭의 평천정돌칸흙무덤을 비롯하여 평양일대의 평천정무덤들과 거의 같은 시기의 무덤으로 볼 수 있을 것이며, 늦어도 3세기 후반기부터 4세기 초까지도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고임천정돌칸흙무덤은 평천정돌칸흙무덤보다 늦은 시기의 무덤이다. 그런데 장수산 일대의 고구려무덤에서 드러난 유물을 보면 평천정돌칸흙무덤에서는 청회색기와와 함께 드러나는 청회색단지류가 많이 나왔고, 고임천정돌칸흙무덤에서는 붉은 기와가 드러났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보아 장수산 일대이 고임천정돌칸흙무덤은 평천정돌칸흙무덤에 뒤이어 4세기초 이후부터 씌여졌던 무덤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