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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 - 폴로나루와,담불라,시기리아,캔디,콜롬보
인도 남부 첸나이 관광 후 16:05분 비행기로 탑승하여
스리랑카 수도 콜롬보로 이동 1시간 20분 소요
스리랑카 콜롬보에 17:25분 도착 후 스리랑카 여행
콜롬보에서 중세 불교 최대 유적지 플로나루와로 이동 6시간 소요
스리랑카 지도
<스리랑카>
남부 아시아 인도의 남쪽 인도양에 있는 섬나라이다. 18세기 말부터 영국 식민지로 지내다 1948년 영국연방 자치령으로 독립하였다. 1972년 국명을 실론(Ceylon)에서 스리랑카공화국으로 바꾸고 영국연방에서 완전 독립하였다. 1978년 스리랑카 민주사회주의공화국으로 국명을 바꾸었다.
정식명칭은 스리랑카 민주사회주의공화국이다. 북서쪽으로 만나르 만을 사이로 인도의 타밀나두 주와 마주 대한다. 동양의 진주라고 불릴 만큼 경치가 아름답고 인도 문화의 영향을 받아 불교 등 고대 문명이 풍부하게 녹아 있는 문화의 보고다. 또한 세계 굴지의 보석 산출국이다. 1985년 수도를 이전하여 콜롬보는 행정수도이고, 스리자야와르데네푸라코테는 입법과 사법수도이다.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해양 실크로드 요충지로 고대부터 주목 받아왔다. 인구는 남서부에 집중해 있다. 행정구역은 9개 주로 이루어져 있다.
국토 면적은 남한 전체의 3분의 2 정도다. 기후는 적도에 가깝고 계절풍의 영향을 받아 연중 고온다습한 것이 특징이다. 연평균 기온은 27~28도 정도에 이른다. 지역에 따른 기후변화도 적은 편이다.
<스리랑카 폴로나루와>
콜롬보에서 중세 불교 최대 유적지 플로나루와로 이동 6시간 소요
폴로나루와:쿼드랭글 유적군(갈포타, 옛 불치사 흔적 하타다게 등), 폴로나루와 궁전, 랑카틸라카, 포토굴 비하라&수수께끼 석립상, 갈 비하라
폴론나루와는 화려했던 중세시대 싱할라 왕조의 수도였다. 12세기 건축양식의 사원과 수도원 등의 건출물이 잘 보존되어 있다. 대표 관광지는 파라크라마바후 1세의 궁전이 있는 왕궁, 스리랑카의 최대 석비 갈포타를 볼 수 있는 쿼드랭글, 14세기에 세워진 바위 위 서있는 랑카틸라카, 포토굴비하라, 갈비하라, 수수께끼 석립상 등이다. 폴로나루바라고도 불리는 이 도시는 368년 이후 실론의 중심지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폴로나루와는 9세기경 인도 타밀족의 침입으로 수도가 아누라 다푸라에서 이 곳으로 옮겨졌다. 993년에 아누라다푸라가 파괴된 이후부터 건설된 고대 도시로 스리랑카의 두 번째 수도였다. 폴로나루와 고대도시에는 촐라 왕조가 세운 브라만교의 기념물뿐 아니라, 12세기에 파라크라마바후 1세가 만든 전원도시의 놀라운 기념물 폐허가 남아 있다.
13세기 후반까지 수도로서 번영하였으나 타밀족의 침공을 피하여 다시 천도했기 때문에 폐허가 되었다. 12세기경의 대규모 불교유적이 복구 중이며 옛 관개용 저수지가 마을 주변에 남아 있다.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도시 근처에 마하웰리 강이 흐른다. 고대 실론의 수도였으나 오랫동안 잊혀져 있다가 현대에 들어와 그 중요성을 되찾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서는 쌀과 담배가 경작되는 주변 농업지역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근처의 오래된 저수지가 복구되면서 현대도시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철도역이 있으며 대부분 12세기에 건립된 많은 불교사원과 불교건축물들이 남아 있다. 유적으로는 높이 24m, 두께 3.5m의 담으로 둘러싸인 길이 52m의 건축물이 훌륭한 것으로 꼽힌다. 그밖에도 조심스럽게 발굴되어 보존되고 있는 많은 유물들이 있다.
폴로나루와 고대 도시는 몇 개의 문명에 대해 말해 주고 있는데, 특히 브라만교를 신봉한 정복 세력 촐라 왕조의 문명과 12세기와 13세기 동안 독립을 유지했던 신할리즈족의 문명을 찾아볼 수 있다. 12세기에 과대 망상적인 군주 파라크라마바후 1세가 건설한 이 어마어마한 수도는 역사상 가장 놀라운 도시 건설 중 하나이다. 이는 그 특별한 규모 때문이기도 하고 건물과 자연환경의 매우 특수한 관계 때문이기도 하다.
폴로나루와 고대 도시는 불교와 신할리즈족 역사의 성지이기도 하다. 폴로나루와 고대 도시의 전성기는 12세기였다. 당시 두 군주가 연속하여 기념물들을 남겼다. 파라크라마바후 1세(1153~1186)는 3중벽으로 된 성곽 안에 굉장한 전원도시를 만들었다. 이 도시의 궁전과 성지들은 전원의 매력을 한층 돋보이게 했다. 뒤따르는 기념물들은 그의 치세 기간에 만들어졌다.
거대한 불상을 잘 보존하고 있는 커다란 벽돌 구조물 랑카틸라카, 신할리즈족 예술의 걸작으로 꼽히는 거대한 바위 조각품이 있는 갈 비하라, 자타카(부처의 전생을 묘사한 설화)를 묘사한 13세기 벽화인 티반카 필리마게 등이 그것이다. 니삼카말라는 파라크라마바후 1세의 것만큼 정교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뛰어난 기념물들을 빠르게 건축했다. 그중 지름 175m, 높이 55m의 거대한 사리탑인 랑코트 비하라가 가장 인상적인 것 중 하나이다. 그 배치와 규모가 아누라다푸라에 있는 다가바(석가의 유골을 넣은 성 건조물)를 연상시킨다.
이 황금시대 이후 폴로나루와 고대도시는 마지막에 쇠퇴하기까지 1세기 동안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 도시는 타밀족과 마가족에 의해 침략당하고 위태로운 체제에 재정복당했다. 쿠루네갈라에서 정권을 세운 브후반나이카부하 2세가 침략한 13세기 말까지 이 도시는 정기적으로 수도가 되었을 뿐이다. 폴로나루와는 10~12세기 당시 신할리 왕조의 고대도시였다. 당시 상당한 규모의 불교 도시로 영화를 누렸다고 전해진다. 이곳은 시기리아 바위요새로도 유명해졌다.
1.폴로나루와 쿼드랭글 유적군(갈포타, 옛 불치사 흔적 하(바)타다게)
스리랑카의 최대 석비 갈포타를 볼 수 있는 쿼드랭글는 스리랑카 중앙부의 고대도시 폴로나루와에 있는 불교유적이다. 갈포타, 사트마할 프라사다, 하타다게, 바타다게, 와다다게, 라파 만다파야, 투파라마 등이 있다.
폴론나루와에서 가장 예술적인 건물이다. 도로에서 2m 정도 높은 곳에 서 있는 아름다운 건물이다. 궁전 북쪽 일대에 펼쳐져 있으며, 싱하리 왕조 때는 불치사가 있던 지역이다. 거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투파라마는 불당으로 사용되던 곳으로 옛 싱하리 양식으로 지어졌다. 벽돌 건물은 힌두교의 영향을 받았으며, 내부에는 석가모니의 여러 모습이 그려져 있다. 투파라마 북동쪽에는 둥근 바타다게 불당이 서 있다.
네 군데 위치한 입구 계단 앞에는 반월석과 가드 스톤이 있고, 계단을 올라가면 네 군데에 모두 좌불상이 있다. 불당 건너편에 불치사의 유적인 하타다게가 있고 하타다게 서쪽에는 비자야 바후 1세가 세운 불치사 유적 아타다게가 있다. 하타다게 동쪽에 있는 스리랑카 최대 석비인 갈포다는 니산카 말라 왕이 미힌탈레에서 가져오게 한 것인데, 장식에서 힌두 문화의 영향을 발견할 수 있다.
유적지 중 쿼드 랭글은 신발을 벗고 입장하므로 얇은 덧버선이나 물티슈 준비할 것.
쿼드랭글 바타다게
2.폴로나루와 궁전
스리랑카 중앙부의 고대도시 폴로나루와에 있는 파라크라마 바후 1세의 궁전 유적이다.
중세 스리랑카 왕국의 영광을 엿볼 수 있는 궁전이다.
파라크라마 사무드라 호숫가의 레스트 하우스 동쪽에 있다. 니산카 말라 왕의 목욕장과 벽돌로 지은 집회소 등이 있으며, 동쪽 구성벽 내부에 파라크라마 바후 1세의 궁전 유적이 있다. 궁전은 한 변이 각각 45.7m인 정사각형의 건물이었는데, 지금은 3층 벽까지만 남아 있다. 36개의 돌기둥은 당시의 홀 지붕을 받치고 있었던 것이며, 방이 50개나 되었다.
서기 10세기 남인도의 강성한 촐라왕조의 등장으로 아누라다푸라에서 남동쪽 폴론나루와로 수도를 옮긴 싱할라 왕조의 파라쿠라마 바후 1세는 이곳에 거대한 왕궁을 만들었다. 캄보디아의 앙코르 와트와 유사하다. 이 왕궁의 본래 규모는 가로 31m, 세로 13m의 규모로 당시 기술로는 획기적인 7층의 높이 30m에 육박하는 거대한 왕궁이었다. 30개의 튼튼한 벽과 기둥으로 만들어진 이 건물엔 총 50개의 방과, 두개의 거대한 홀이 있었다. 3층까지는 벽돌로 지어졌고, 나머지 4개의 층은 나무로 지어졌다.
폴로나루와 궁전
3.폴로나루와 랑카틸라카
14세기 세워진 바위 위 불교사원으로 거대한 불상을 잘 보존하고 있는 커다란 벽돌 구조물이다.
4.포토굴 비하라&수수께끼 석립상
포토굴 비하라는 도서관 유적이다.
포토는 책, 굴은 도서관, 비하라는 사원을 의미한다. 둥근 건축구조의 불교 서적 도서관이다.
인도에서 들여온 불경서적을 많이 전시했다. 저수지 부근에 위치하고 있다.
수수께끼 석립상은 4m 높이의 거대한 석상이다. 누군지는 알려지지 않아서 의문 가득한 수수께끼 석립상이라고 부른다. 그 어떤 사실도 전해지는 것이 하나도 없다. 석상은 머리에 모자 같은 형태의 물건을 얹고, 손에는 책도 칼도 아닌 구부러진 이상한 물건을 들고 있고 있다. 어떤이는 이 석상이 폴로나루와를 세운 파라쿠라마왕 1세라고 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인도에서 스리랑카에 왔던 아가스타야 스님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두 설일뿐 아무 것도 밝혀진 것이 없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수수께끼 석립상이라 부른다.
5.폴로나루와 갈 비하라
불교사원으로 거대한 화강암를 깎아 입상, 좌상, 부조상 등 부처상이 있다.
길이가 13m인 부처의 누운 상이 있다.
플론나루와 불교 유적을 대표하며 돌 조각 기술의 정수를 보는 사원이다.
갈비하라는 파라크라마바후왕이 건립한 것으로서, 바위면에 조각한 열반상, 입상, 좌상의 거대한 불상이 있다. 높이가 4.6m인, 한가운데 팔을 교차 시키고 서 있는 조각은 석가의 수제자인 아난다이다. 곁에 누워 있는 그의 스승 석가가 열반에 들어 슬픔에 젖은 모습을 표현했다고 한다. 눈 주위나 교차 시킨 팔에서 그의 슬픔이 전해져 온다. 연꽃 대좌에 서 있어서 제자가 아니라 깨달음을 얻은 석가라는 설도 있다. 높이는 7m이다.
그 옆에 13m의 열반상이 바로 부처이다. 유선형의 평온한 자태로 누워 열반에 들려 하고 있다. 그 얼굴은 부드럽고 우아한 표정을 짓고 있다.
<스리랑크 담불라>
폴로나루와에서 담불라로 이동 2시간 소요
담불라 시내 관광:담불라 석굴
담불라는 스리랑카 최대의 석굴이 있는 도시다.
담불라는 스리랑카 중부 거점의 센트럴주 시기리야에 있는 고대도시 관광의 거점이 되는 작은 마을이다. 스리랑카 황금사원과 최대 석굴사원으로 유명하다. 담불라 석굴사원은 5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다양한 불상과 프레스코화로 유명하다.
석굴사원은 높은 바위산 중턱에 조성되어 있다. 제1굴에는 열반불과 힌두교의벽화, 제3·4굴에는 채색된 입불상과 좌불상 등 2,000년이 넘는 유물들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BC 1세기경 아누라다푸라에서 쫓겨난 바타가마니 왕이 이곳에서 수도 수복의 기회를 노렸으며, 아누라다푸라로 돌아가게 된 후 감사의 뜻으로 석굴사원을 건립한 것이다.
1.담불라 석굴 사원
담불라는 스리랑카 최대의 석굴이 있는 도시다. 담불라는 바위라는 뜻의 담바(Damba)와 샘이라는 뜻의 율라(Ulla)가 합쳐진 지명이다. 담불라 석굴사원은 B.C 1세기 경 5세기에 걸쳐 만들어졌다. 다양한 불상과 프레스코화로 유명하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180m의 높은 바위산 중턱에 홀로 우뚝서있는 거대한 5개의 석굴사원에는 다양한 불교 설화를 다룬 벽화가 있다. 15~20여분 정도 바위산을 오르면 동굴사원 입구에 이르며 평지에 솟은 바위산이라 주변 숲의 경관이 좋다. 20Km 떨어진 시기리야 록도 멀리 보인다. 평지에서 우뚝 솟은 거대한 흑갈색 바위산에 있는데 ‘황금색으로 빛난다.’는 뜻의 ‘란기리(RAN GIRI)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기원 전 1세기경에 건조된 사원으로 그 당시 신할라 왕인 발라감 와라감바후 왕이 당시 수도였던 아누라다푸라로에서 타밀군의 침략에 추방당해 이곳 담불라로 피신한 뒤 피신해 타밀군을 무찌르고 왕권 회복을 꾀하였다. 담불라 석굴사원은 그 당시 5개의 동굴 피난처가 있던 곳이다. 다시 왕좌에 오른 바후 왕은 감사의 뜻으로 이곳을 사원으로 바꾸었다. 1번부터 5번 둥굴까지 하나의 바위에 연결되어 있다. 바위 위에다 하얀 옻칠을 하여 다양한 불교설화 벽화를 제작하였다. 하나의 바위는 불처님이 열반에 든 모습을 하고 있다.
제1굴에는 열반불과 힌두교의벽화,
제3·4굴에는 채색된 입불상과 좌불상 등
1굴부터 4굴까지 열반불과 힌두교의 벽화, 채색된 입불상과 좌불상 등
2,000년이 넘는 유물들이 있다.
현지인들은 '담불라 가라' 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원 안 오른쪽으로 동굴을 따라 복도가 있고 5개의 동굴이 나란히 있다. 첫번째 동굴은 약 14미터정도의 자연석에 새겨 놓은 열반에 든 와불상이 있다. 벽에는 15세기에서 18세기사이에 그려진 프레스코 형식의 다양한 그림들이 남아 있다. 가장 크고 잘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2번째 동굴에는 다양한 신들의 조각상과 수많은 불상이 보존되어지고 있다. 천장 또한 프레스코 형식으로 부처의 삶을 그려 놓았으며, 이 벽화는 싱할라인들의 역사를 연구하는 중요한 지표가 되고 있다. 플론나루와와 캔디 시대에는 각 시대의 왕에 의해 여러 차례 보수공사가 이루어졌다.
담불라 석굴은 인도의 아잔타 석굴처럼 동굴을 파내고 만든 것이 아니라, 원래 바위산의 자연 동굴에 스님들이 머무르면서 고쳐 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암벽에 홈을 파서 빗물이 동굴안으로 흘러들지 못하게 하고 동굴 내의 바닥은 고르게 정비하여 굴 속은 구석구석 하얀 옻칠을 하여 그 위에 그림을 그렸다. 시간이 지나 벽화의 색이 바래면 그 위에 또 다시 새로운 그림을 그렸는데 원래 있던 그림의 무늬를 그대로 활용한 경우도 있고 전혀 다른 그림을 그린 경우도 있다. 불상을 포함하여 벽도 전면이 채색되었으며, 그 선명하고 다채로운 색조는 아직까지 거의 변하지 않고 있다.
담불라 석굴 입장시 신발을 벗고 들어간다. 민소매 및 반바지 차림으로는 입장이 불가하다. 담불라 석굴 주변에는 원숭이들이 많이 있다. 먹을거리를 들고 사원에 입장하면 원숭이들의 공격을 받을 수 있다.
담불라 석굴군 개요
황금사원-입장권 구해야 된다. 부처님 사리 모신곳.1990년 건축.
제 1 동굴(데바 라자 비하라)
가장 오래된 석굴 사원으로 사원 최대의 불상인 열반들이 있다, 벽과 같은 자연석으로 조각된 열반상 전체 길이는 14m이다. 전신이 황금색으로 칠해져 있는데 발바닥은 빨갛게 꽃무늬가 그려져 있다. 스리랑카에서는 불상의 발바닥을 빨갛게 물들이는 특징이 있는데 이것은 기원전 5세기에 비자야 왕이 인도에 도착했을 때 그의 손바닥이 새빨갛던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제 2 동굴(마하 라자 비하라)
폭이 약 52m, 깊이가 약 25m, 높이는 입구 부분이 약 6m이고 안으로 들어갈수록 낮아지는데 담불라 최대의 동굴이다. 동굴 안에는 56개의 불상이 모셔져 있으며 벽과 천장에는 석가의 생애 및 스리랑카의 역사에 대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제 3 동굴(마하 알트 비하라)
18세기의 왕인 킷티 사리 라자하에 의해 지워졌으며 길이 9m의 와불을 비롯해 약 57개의 불상이 있다.
제 4 동굴(파스시마 비하라)
‘서쪽의 절’ 이란 의미인 이 동굴에는 좌상이 많다. 주 불상은 명상하는 부처상이다. 가장 작지만 아름다운 벽화와 조각품이 많다. 중앙에는 아름다운 색상의 불탑도 있다. 담불라 석굴을 처음 건설한 바라감 바후 1세의 부인 소마와티의 귀한 소장품이 여기에 보관되어 있다는 설로 1980년 도굴 당하기도 했다.
제 5 동굴
1915년에 지어진 가장 근대의 절이다. 와불상과 11기의 부처상이 있다. 가장 늦게 건축한 신의 사원으로 한때는 창고로 쓰이기도 했다.
<스리랑카 시기리아>
담불라에서 시기리아로 아동 30분 소요.
시기리아:물의 정원 테라스 가든, 시기리아 미녀도, 정상 궁전터 등
시기리아는 사자산이란 뜻이다. 고대도시로 푸른 초원에 우뚝 솟은 시기리아의 상징이다. 199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되었다.
카샤파왕의 피난처이자 바위궁 성터 로 시기리아 미녀도, 정상 궁전터 등이 있다. 카시야파 왕의 성 유적과 함께 있는 불교 고고학 유적지다.
'시기리아'라는 말의 어원은 '사자(Sinha)'와 '목구멍(Giriya)'의 합성어로 '사자 바위'로 알려진 천연 요새 왕궁이다. 400년 동안 전설로만 전해오던 이 바위는 19세기 후반, 영국의 식민지 시절에 발굴되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높이가 200m에 이르는 이 거대하고 웅장한 바위에 기원전 475년 카사파 1세가 요새 겸 성채를 건축했다. 바위의 정상에는 카사파 왕의 연회장, 목욕장, 왕궁 등의 유적이 남아있다.
시기리야, 즉 '사자의 암석'은 매혹적인 고고학 유적으로, 그 중심부에 있는 입방체 형태의 바위 언덕이 이곳을 온통 지배하고 있다. 화산의 폭발로 생성된 이 바위 언덕의 높이는 370m로, 네 면이 다 깎아지른 듯한 수직이다. 꼭대기 부분의 평평한 표면 넓이는 1.4헥타르에 이른다. 시기리아 바위요새로 폴로나루와도 유명해졌다. 시기리아는 5세기경 신할리 왕조의 왕궁으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바위산 자체가 하나의 왕궁인 셈이다.
시기리야는 4세기의 불교 수도원이었으며, 주위에 조성된 단지는 한 세기 이후에 카시야파 왕이 세운 도시일 것이라 여겨진다. 이 유적지와 정글 사이에는 정원들이 있어 서로 분리되어 있는데, 진흙으로 된 해자가 정원 가장자리 경계선을 긋고 있다. 바위 언덕 꼭대기에는 카시야파 왕이 요새 삼아, 혹은 유희용 궁전 삼아 지은 성의 유적이 남아 있다. 이 성의 저수지 유적이 남아 있어 오늘날에도 볼 수 있다. 왕이 죽은 후, 건물들은 예전처럼 수도원으로 되돌아갔으나 16세기에 접어들었을 때는 쓰이지 않게 되었다.
시기리아는 기원전 475년 부왕을 살해한 왕 카샤파 1세가 피난을 위해 사자바위 위에 세운 거대한 요새도시다. 물을 공급해주는 저수지 기능을 하던 물의 정원과 테라스의 정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프레스코화 유적의 18미녀도, 사자의 입구, 정상에 자리한 카샤파 왕의 연회장, 왕궁 등의 유적이 있다. 멀리서 보면 마치 사자가 웅크리고 앉아있는 드 웅장하며 정상에서는 시기리아 지역의 절경을 볼 수 있다.
암벽 한쪽 면을 깎아 만든 테라스에는 '거울의 벽'이라 알려져 있는 길이 140m, 높이 40m의 벽이 있다. 이 벽의 벽토 위에는 머리에 꽃을 장식한 500명의 아름다운 여인들을 나타낸 프레스코화 스무 점이 그려져 있다. 과거에는 최대 500점의 프레스코화가 있었던 듯하나, 세월이 흐르면서 사라져 버렸다. 다양한 색으로 채색된 벽화들은 수백 년이라는 세월에 걸쳐 수백 명의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어 그들이 쓴 사랑시가 벽에 남아 있다.
테라스 위에는 폭이 좁고 철로 만든 나선형 계단이 돌로 된 사자의 두 앞발 사이에 놓여 있다. 이 두 앞발은 '사자의 문'에서 남아 있는 유일한 부분인데, 원래는 사자의 머리도 달려 있었다. 방문객들은 아마 크게 벌어진 사자의 입을 통해 성 안으로 들어갔던 것 같다. 계단을 통해 관광객들은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으며, 주변의 평원들 너머로 몇 마일이나 멀리 펼쳐져 있는 경치를 즐길 수 있다. 계단은 몹시 좁아서 한 계단에 한 발만 겨우 올려놓을 수 있을 정도이다. 높은 곳을 힘들여 올라가야 한다.
등정 시에 최대한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힘든 경우 포터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포터의 도움을 받으실 경우 $5~10 팁을 개별적으로 지불한다.
1.물의 정원
건기에 사용할 물을 가두어 두려고 만든 정원이다. 길 양편으로 균형있게 잘 조성했다. 시각형 연못인데 궁중 목욕탕이었다고도 한다.
2.돌의 정원
시기리야 지역엔 돌이 많다. 그래서 돌의 정원도 있다. 크고 작은 바위로 정원을 잘조성해 놓았다.
3.테라스 가든
돌과 바위가 많아서 경사진 곳에 돌이나 벽돌로 장치하여 완만하게 조서했는네 그 형상이 테라스처럼 생겨서 테라스가든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바위 곁에는 굴도 많아 불교 수행처로 쓰였다.
4.시기리아 미녀도
시기리아 바위요새를 건설한 사람은 5세기 신할리 왕조의 카사파 왕이다. 부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 후 후환을 걱정해 높이 200m의 바위산에 왕궁을 건설했다. 바위산 절벽의 철제 계단을 따라 오르면 돌출된 바위 벽면에 1400년 전에 그린 벽화가 남아 있다. 풍만한 가슴을 매력적으로 드러낸 18명의 미녀도다. 안쪽에는 500명 여인의 프레스코화가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선명하게 색채가 살아 있다. 절벽 사이로 이어진 긴 회랑 `미러월`도가 있다. 정상에 위치한 궁전 정원을 향해 나 있는 사자의 계단은 당시의 위용을 잘 보여준다.
3.정상 궁전터(시기리아 록).시기리야 바위 요새
시기리야 록은 스리랑카 세계유산 7개중 하나다. 5세기에 건설된 180미터 바위절벽 왕궁이다. 아버지를 살해한 왕 카샤파 1세에 의해 세워진 수도의 폐허다. 자신의 위세를 높이고자 했던 카샤파 왕이 바위의 아랫 부분을 깎아 사자 모양으로 만들고 정상에 궁전을 지었다. 예술가이자 정신이상자이기도 했던 카사파왕이 부왕을 죽이고 왕좌에 오른 뒤 후환이 두려워 바위 꼭대기에 세운 궁전터이다. 해발고도 370m, 산 위에 암산의 높이만 200m이다. 넓은 마당에서 사자바위 절벽에 판 계단 1200개와 60도가 넘는 가파른 철제 계단을 올라가면 암산 위에 궁전 터가 있다. 이곳이 세계적인 명소가 된 것은 스리랑카의 대표적인 예술작품으로 평가 받는 시기리야 벽화 때문이다. 시기리야 벽화는 왕의 시녀들의 시중을 받고 있는 압사라라는 요정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 '시기리야의 숙녀들'은 당초 500명이 넘었지만 지금은 훼손돼 18명만 남아 있다.
테라스 위 바위에 설치된 철계단 및 돌계단을 올라가야 된다(약 50분).
폭이 좁고 나선형 철계단으로 교행하기도 힘들고 매우 위험하다.
개인적인 신체 특성에 차이가 있을 수 있으므로 부득이하게 일정 참가가 어려우신 분들은 오르기 전 미리 가이드와 상의.
<스리랑카 캔디>
시기리아에서 스리랑카 제2의 도시 캔디로 이동 2시간 30분 소요
캔디:불치사, 스리랑카 대표 민속춤 공연 관람
캔디는 스리랑카 중부 구릉지대의 스리랑카 제2의 도시이며, 제1의 관광도시다. 14세기 스리랑카의 수도였다. 캔디는 수많은 유적이 남아 있는 도시다.
캔디는 콜롬보 북동쪽 115km, 580m 고원에 위치해 있다. 인구는 10만 4000명이다. 15세기에 건설된 고도로 19세기 초 영국이 침입할 때까지 싱할라 왕조 최후의 수도였다. 캔디 왕조 왕궁과 박물관 등이 남아 있다. 유럽의 영향을 받지 않은 채 전통적인 면모를 간직하고 있다. 남서쪽 6km 페라데니야에는 스리랑카 대학이 있다.
시가지 중앙에는 인조 호수가 있고, 호수의 북안에 있는 달라다말리가바사원 불치사에는 석가모니의 치아가 봉납되어 있다. 새로 취임하는 총리는 이 사원에 참배하는 것이 관례이며, 매년 8월에 대제가 열린다. 고원에 위치하여 경관이 아름답고 교통, 상업의 요지이며, 문화, 교육의 중심지이다.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스리랑카 문화의 중심지이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캔디 자치회가 1865년 지방자치제 법령에 의거 1866년 수립되었다. 14세기 수립된 도시인 캔디는 많은 변화를 겪는 동안, 황조의 최후 성채로 남아 있다. 비록 콜롬보가 교역, 행정의 중심으로 스리랑카 제1의 도시인 반면, 캔디는 풍부한 역사 유물을 가진 스리랑카의 제 1의 문화 중심지이다.
1815년까지 실론 최후의 왕조의 왕도로서 지금도 왕궁이나 사원, 민속무용 등이 훌륭히 보존되어 있는데 매년 7~8월에 걸쳐 10일 동안 열리는 에살라 페라헤라 축제로 유명하다.
최초 이곳에 도시를 수립한 위크라마바후 3세 이후, 뒤를 이어 15세기 1473~1511년동안 통치했던 세나삼마타 위크레마부후가 캔디를 왕국의 새로운 수도로 발전시켰다. 1818년에 일어난 반란으로 영국 통치가 강화되기 시작된 이후, 캔디의 도시 풍경에 급격하게 변화되기 시작했다. 로리의 기사에 의하면, 1818년의 반란 때, 캔디 지역에서의 영국법은 수치심과는 거리가 멀었다. 주된 가문들은 거의 죽음을 맞이했다. 총과 칼에 살아남은 이들중 콜레라와 천연두, 영양 결핍으로 수백명이 죽어갔다. 사람들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냉담해져 갔다. 그 뒤, 많은 해를 거듭해가는 동안 정부의 노력은 시작과 포기만이 계속되었다라고 당시 반란의 여파를 서술하고 있다.
1.캔디 불치사佛
스리랑카를 대표하는 불교사원으로 스리랑카에서 가장 중요한 유물인 부처님의 치아 진신사리가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유명한 절이다. 불치는 기원전 543년 인도에서 석가를 화장할 때의 것으로 현재 이 불치는 캔디시 중심의 아스기리야 마하 비하라에 봉안되어 있다. 불교의 보물이면서 왕권의 상징이기도 하다. 불치사 1층에는 선명하고 아름답게 그려진 프레스코 벽화가 있으며 힌두교와 불교의 예술이 공존하고 있다.
분홍빛 벽에 붉은 기와를 얹은 전형적인 싱힐라 건축양식의 사원으로 내부에 부처의 치아를 담은 금빛 사리함이 있다. 탑 모양의 사리함은 루비와 사파이어, 다이아몬드 등으로 장식되어 있고, 둘레에 7겹의 황금띠를 둘렀다.
이곳에 모셔진 부처의 치아는 362년 인도 남부 칼링가왕국에서 보내온 것이다. 당시 칼링가 왕국은 대기근과 전쟁이 그치질 않았는데, 어느날 국왕의 꿈에 부처가 불치(佛齒)를 스리랑카로 보내면 기근과 전쟁이 없어질 것이라 하였다. 왕은 신통력이 있는 헤마말라 공주를 시켜 불치를 스리랑카로 보냈다고 한다. 이 때 불치는 아누라다푸라의 담마찻카에 모셔졌으며, 매년 무외산사에서 불치제를 올렸다. 불치는 이후 왕위 계승의 상징이 되었으며, 스리랑카인들의 확고한 신앙대상으로 자리잡았다. 지금도 매년 여름 11일 동안 페라헤라(불치) 축제가 열린다.
캔디가 영국에 양도하는 캔디약정이 맺어진 1815년 바로 직전에 건립된 "파띠리푸와라는 8각형탑이 이곳에 자리하고 있다. 캔디 왕조의 수도로서 캔디가 도시로서 발전하게 되었던 시기다. 15세기 1473~1511년에 통치했던 세나삼마타 위크레마바후 왕 이후, 혼란한 정세를 바로 잡기 위해 위마라드하마수리야 1세로 알려진 코나뿌 반다라는 델가무와에서 캔디로 부처의 치아사리를 들여와 사원을 지어, 치아사리를 모시게 되면서 통합된 불교를 가질 수 있었다. 달라다 말리가와에 있는 8각탑과 그림같은 캔디 호수는 캔디 왕조의 마지막 왕인 스리 위크레마 라자싱헤 때 건립되었다. 하루에 세 번 거행되는 푸자를 볼 수 있다.
민소매 및 반바지 착용 시, 입장이 불가능하다. 사원 입장시 신발을 벗어야 한다.
2.스리랑카 대표 민속춤 캔디댄스 공연 관람
스리랑카의 문화를 느낄 수 있는 전통 공연(KANDYAN DANCE) 관람 60분 소요
스리랑카의 대표적인 민속춤
스리랑카 각 지역의 민속무용이 가미되어 있는 캔디안 댄스는 스리랑카 캔디 왕조의 궁전 연회 때 추던 춤이다. 강렬한 북소리와 다양한 전통악기가 만들어내는 음률과 함께 남성 댄서들의 기민하고 박력 넘치는 움직임을 볼 수 있다. 여성 댄서의 화려한 의상과 부드러운 율동의 조화는 색다른 매력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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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 콜롬보>
캔디에서 스리랑카의 수도 콜롬보로 이동 3시간 소요
콜롬보:강가라마 사원, 포트지구
콜롬보는 스리랑카의 구 지명 실론의 수도다.
스리랑카 섬의 서해안에 있는 항구도시다. 켈라니 강 바로 남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인도양의 주요항구이다. 이 항구는 5세기중국의 여행가 법현의 기록에서 카오란푸라는 이름으로 최초로 문헌에 등장한다. 콜롬보는 스리랑카 최대의 도시로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해상 수송의 중계지로서 발전해 왔고 지금은 스리랑카의 경제, 정치의 중심지로 부동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아랍 상인들이 향료와 보석을 교환해가는 교역장을 시작으로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의 식민지 지배하에 항만 도시로 발전하게 되었다.
8세기 이후 아랍 상인들이 정착했으며 16세기부터 포르투갈인과 네덜란드인, 영국인들이 차례로 섬에 정착하여 발전시켰다. 1815년 스리랑카인 족장들이 실론 섬 중심부에 있는 캔디 왕국의 왕을 몰아내고 영토를 영국에 양여하면서 실론 섬의 수도가 되었다. 1948년 스리랑카 독립 이후 서구 영향권에서 차츰 벗어나게 되었다. 도시에는 국회의사당과 옛 국제연합 사무국, 시청, 산타루치아 대성당의 돔형 지붕, 도리아 양식 기둥으로 유명한 대법원 및 갈레파체 호텔 건물 등이 있다. 도시 주변에는 많은 공장이 건설되었으며, 지금까지도 여전히 실론 섬의 상업 중심지로 남아 있다.
스리랑카인들은 이 항구를 콜랑바라고 불렀는데, 포르투갈인들은 이 이름이 망고나무 '잎사귀'라는 뜻의 Kola와 '망고'라는 뜻의 amba라는 스리랑카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Koramba가 고대 스리랑카어로 항구나 나루터를 뜻하는 낱말이었다는 해석이다.
8세기 이후 오늘날의 항구 근처에 아랍 상인들이 정착했으며 16세기부터는 포르투갈인과 네덜란드인 및 영국인들이 차례로 섬에 정착하여 발전시켰다. 1815년 스리랑카인 족장들이 실론 섬(지금의 스리랑카) 중심부에 있는 캔디 왕국의 왕을 몰아내고 영토를 영국에 양여하면서 실론 섬의 수도가 되었다. 1948년 스리랑카가 독립한 뒤, 서구 영향권에서 차츰 벗어나게 되었다.
가장 오래된 구역은 항만과 제일 가까운 지역으로서, 포트와 페타 즉 '요새 밖에 있는 시가지'라는 뜻의 타밀어에서 유래되었다. 포트는 지금도 행정과 상업 활동의 중심지이나 옛날보다는 중요성이 줄어들었다. 페타는 작은 가게와 장터 및 노점 등 동양 시장의 독특한 특징을 모두 갖춘 지역으로 발전했다. 주거지역인 시나몬가든스는 네덜란드 식민지시대에 중요한 계피 재배지역이었다.
도시에는 고층 건물은 별로 없지만 국회의사당과 옛 국제연합(UN) 사무국, 시청, 산타루치아 대성당의 돔형 지붕, 도리아 양식 기둥으로 유명한 언덕 위의 대법원 및 갈레파체 호텔이 아름다운 스카이라인을 형성하고 있다. 그밖에 1749년 네덜란드인이 세운 볼벤달 교회, 종합병원, 콜롬보대학교, 불교 사원 및 힌두교 사원들, 그리고 국가원수·총리 관저 등이 있다.
도시 주변에는 많은 공장이 건설되었으며, 지금까지도 여전히 실론 섬의 상업 중심지로 남아 있다. 지방 은행과 외국 은행의 본점, 독점권을 갖고 있는 보험회사, 주식중개소, 관영회사가 모두 이 도시에 자리잡고 있다.
섬의 그밖에 주요도시들과는 철도로 이어져 있다. 시내 및 스리랑카 전역으로 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카투나야카, 라트말라나에는 국제공항이 있다. 수많은 공원과 유원지가 자리잡고 있다. 그 중에서도 바닷가에 있는 갈레파체그린, 비하라마하데비 공원, 골프장 등이 유명하다. 마운트라비니아 해변에서는 해수욕과 파도타기를 즐길 수 있다. 남쪽 경계선 근처에는 데히왈라 동물원이 있다.
1.콜롬보 강가라마 사원
스리랑카를 대표하는 불교 사원으로 켈라니 강변에 위치한 사원이다. 강가라마야 사원은 콜롬보 최대 규모의 사원으로 스리랑카 불교의 불씨를 되살렸던 곳이다.
스리랑카 불교재건 운동을 주도한 히카두레 스리 나야카에 의해 설립된 사원이다.
베일라 호수가에 위치한 강가라마는 물을 다스리는 왕이란 뜻으로 1885년 스리랑카 불교 재건 운동을 주도한 히카두웨 스리 나야카 스님에 의해 설립 되었다. 히카두웨 스님은 스리랑카에서 불교의 맥이 끊어져 굴욕적인 타이, 버마 스님들로부터 수계 받는 사건을 경험하고, 스리랑카 불교 재건운동을 벌인 사람이다. 그가 처음부터 주목했던 부분은 교육으로 1873년 비도다야 피리베나 학교를 남부 해안지대에 설립하였다. 그로 인해 스리랑카 불교의 전성기를 이끌었고 후 바도다야 피리베나 학교는 코테 대학으로 발전 하였다. 강가라마 사원은 100여년 밖에 안되었지만 꺼져가는 스리랑카 불교의 불씨를 다시 되살렸던 모태가 되는 성스운 장소이다. 현재 이곳엔 대법당과, 역대 조사스님들의 흉상과, 유물이 보존된 박물관, 부도탑과, 세계 각국의 귀중한 불교 문화재가 소장된 보물관이 있다.
우리나라의 조계사와 같은 절이다. 각국의 절에서 보내온 부처와 조각상이 있다.
칸디의 불치사(佛齒寺) 혹은 스리 달라다 말리가와는 스리랑카의 가장 신성한 불교 사원으로, 전 세계의 불교 신자들이 순례를 오는 곳이다. 전설에 의하면 부처가 열반에 들어 그 다비장을 치렀을 때 부처의 왼쪽 송곳니가 장작더미의 재 속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치아는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마침내 칸디에 왔다. 불치사는 비말라다르마스리야 1세가 다스리던 1600년경 2층짜리 건물로 처음 세워졌으나 지금은 원래의 건물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고, 키르티 스리 라자싱헤 왕(1747~1781년) 통치 때 재건되었다. 1998년 힌두교도인 타밀족 분리주의자들이 불치사를 폭격했으나 그 후 복구하였다. 붉은 지붕을 이은 흰 벽의 건물이 호숫가에 자리 잡고 있으며 해자와 석조 요새로 둘러싸여 있다.
벽은 겉이 내비치는 세공으로 정교하게 장식되어 있으며, 덕분에 단순한 디자인에 장식적인 요소가 가미되었다. 외관은 단순하지만, 실내는 나무와 상아의 상감 부조와 옻칠한 회화로 호화롭게 장식되어 있다. 해자 위에 놓인 작은 다리를 건너가면 돌로 지은 문루가 나온다. 중앙의 안뜰에는 바다히티나 말리가와라는 이름의 2층짜리 장방형 사원이 서 있다. 박물관으로 통하는 정문은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양쪽에는 두 마리 사자상이 서 있다. 사원의 맨 위층, 금과 보석으로 만든 겹겹의 상자 안에 부처의 송곳니가 모셔져 있다. 불치사는 1803년 스리 위크라마 라자싱헤 왕(1798~1815년 재위)이 지은 파티리푸와 탑과 통로로 이어져 있는데, 이 탑은 야자나무 잎에 기록한 귀중한 필사본들을 보관하고 있다.
이곳 사원 앞에서는 해마다 전통 탈과 복장을 입은 댄서들이 춤을 추며 행사를 벌이며, 종교와 문화가 뒤섞인 화려한 강가 라마 행사에는 매년 훈련받은 코끼리와 수많은 스님들과 시민들이 참가하여 불교문화축제를 벌인다.
2.독립기념 광장
1948년 2월 4일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광장이다. 입구에는 초대 수상이며 독립영웅인 스테펜 세나나야케 동상이 높이 세워져 있다. 스리랑카는 포루투칼, 영국, 네덜란드의 지배를 443년 동안 받았다. 독립하기까지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희생이 있었다. 지하에 희생자들을 기리는 박물관이 있다. 벽면이 없이 기둥과 지붕으로만 된 석조건축물이다. 기둥 사이로 공간이 뚫려 있다. 캔디 양식으로 캔디 불치사 궁전 건축양식과 유사하다. 매년 2월 4일에는 이곳에서 독립기념 축제 행사가 열린다.
3.포트 지구(외관)
츌국차 콜롬보 공항으로 이동하며 본다.
콜롬보의 중심지역이며 식민지 시절의 성채가 남아있는 지역이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의 성채가 있었던 곳으로 현재는 비즈니스 거리로 유명.국회, 관공서, 은행 등이 모여 있는 콜롬보의 핵심 비지니스 지역이다.
넓은 도로와 근대 건물과 좁은 거리에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활기찬 거리로 금속품, 섬유, 의류, 화학 등의 제조업이 발달한 콜롬보의 비지니스 지역의 핵심으로 국회, 관공서, 은행 등이 있다.
포트의 요크 거리에는 고급 상가들이 즐비해 있는 쇼핑의 거리로 유명하다. 포트(Fort)라는 명칭은 16~18세기동안 포르투칼과 독일의 점령지이자 군사적인 요새로 사용되면서부터 유래되었다. 그다지 크지 않은 포트지구 내에는 140년 전에 등대로 사용되었으나, 지금은 시계 역할만으로 남아 있는 시계탑이 있다. 밀러 건물, 중앙 우체국, 차터드 은행 등의 대리석과 유리를 주재료로 하는 오래된 건물이 있는가 하면, 현대식 각종 비지니스 빌딩과 음식점이 즐비하게 자리하고 있다.
석식 후 스리랑카 콜롬보 공항으로 이동
19:00 대한항공 KE474 콜롬보 출발
2/10일 06:10 인천국제공항 도착
스리랑카 콜롬보 1월 날씨
콜롬보의 1월은 평균 최저기온은 22.3℃, 평균 최고기온은 30.9℃ 우리나라의 한여름과 비슷한 기온분포를 보입니다. 평균 일교차는 8.6℃이며, 평균 강수량은 58.2mm로 다소 적은 편이고, 평균 강수일수도 5일로 비가 자주 내리지 않습니다.
비의 양이 적고 자주 오지 않는 편입니다. 기온은 우리나라의 한여름과 비슷해 덥습니다. 얇고 시원한 옷차림으로 여행하시면 좋습니다. 선글라스와 모자 등으로 자외선 차단에 신경쓰시기 바랍니다.
스리랑카 콜롬보 2월 날씨
콜롬보의 2월은 평균 최저기온은 22.6℃, 평균 최고기온은 31.2℃로 더운 여름날씨를 보입니다. 일교차는 평균 8.6℃이며, 평균 강수량은 72.7mm, 평균 강수일수는 5일로 비가 잦은 편은 아닙니다.
비가 많은 편이 아니라 여행 중 비 걱정은 덜으셔도 되겠지만, 더운 날씨를 유의하셔야겠습니다. 우리나라의 한여름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덥기 때문에 자외선 차단제를 꼭 준비하셔서 수시로 덧발라 주시고, 충분한 얼음물을 섭취하셔서 탈수를 예방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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