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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절 성안 기와의 년대와 장수산성의 축조연대
장수산성의 축조년대는 성안에서 나온 유물을 통하여 밝힐 수 있다. 성안에서 나온 유물가운데서 년대를 밝힐 수 있는 것은 기와이며 그 가운데서도 붉은 기와는 산성의 년대와 직접 련관된 유물이다. 이미 앞에서 도시유적의 년대를 론하면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장수산성 부근 유적에서 나온 기와는 청회색 붉은색 회색기와이며 청회색기와가 제일 이른 시기의 것이고, 붉은 기와는 그 다음시기, 회색기와는 제일 늦은 시기의 것이다.
그런데 장수산성 안에서 드러난 기와는 붉은 색 회색기와이다. 그러므로 붉은기와는 성안에서 나온 기와 가운데서 제일 이른 시기의 것으로 되며 그것은 고구려의 전형적인 기와로서 산성의 축조년대와 가장 밀접히 련관된 유물이다. 따라서 산성의 년대는 성안에서 나온 붉은 기와의 년대만 밝혀지게 되면 스스로 밝혀지게 될 것이다.
성안 붉은 기와의 년대는 산성과 련관된 도시유적에서 드러난 붉은 련꽃무늬기와 막새를 통하여 밝힐 수 있다. 붉은 기와의 편년에서 우선 중요한 자료로 되는 것은 ≪영가 7년≫명 벽돌이다.
앞에서도 구체적으로 서술한 바와 같이 기년명 벽돌은 아양리 도성안의 붉은 기와를 맨 밑에서 노끈무늬를 새긴 붉은기와, 청회색 기와와 함께 드러났다. 그런데 기년명벽돌과 같은 형식의 벽돌은 붉은기와가 드러난 산성1호건물터와 산성 아래 월당리 고구려 건축지의 붉은기와층에서도 드러났다. 이것은 붉은기와와 회색벽돌의 시기적인 밀접한 관계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으로서 장수산성과 그 부근 유저에서 나온 붉은기와가 벽돌에 새겨진 년대와 같은 시기거나, 조금 늦은 시기에 보급되어 씌어진 것으로 볼 수 있게 한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붉은 기와 가운데서 노끈무늬가 새겨진 기와이다.
노끈무늬는 서북조선의 1-3세기 문화전통으로서 고구려에서 처음으로 쓰인 무늬형식은 아니며, 이미 고구려 이전시기에 널리 보급되었던 무늬이다. 붉은 기와에 새겨진 노끈무늬는 그와 같은 문화적요소의 반영으로서 붉은 기와 가운데서 초기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산성 안 붉은 기와의 년대는 이 일대에서 붉은 기와가 보급되기 시작한 초기에 해당되는 4세기 초 중엽으로 볼 수 있다. 붉은 기와의 편년에서 다음으로 중요한 자료로 되는 것은 기와막새이다.
장수산성과 부근 유적에서는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여러 점의 붉은기와막새가 드러났는데 대부분이 련꽃무늬기와 막새이다.
그러면 고구려에서 련꽃무늬가 언제부터 보급되기 시작하였는가. 지금까지 편년된 기와 가운데서 대부분은 련꽃무늬 기와막새이다. 그런데 평양과 집안일대에서 발굴수집되고 편년된 련꽃무늬 수키와 막새들은 장수산성과 그 부근 유적에서 드러난 붉은색 련꽃무늬 수키와 막새와 공통한 것이 적지 않다.
련꽃무늬 수키와 막새는 평양이방에서는 대성산성과 그 부근 유적에서 알려졌으며 집안일대에서는 동대자 유적을 비롯하여 집안현 리수원자남 유적, 태왕무덤, 장군무덤, 천추무덤, 장천2호무덤, 만산무덤떼, 산성자산성 등 여러 유적들에서 드러났다. 그 가운데서 주목되는 것은 집안현 마선중학교의 서북쪽 50m 지점에서 드러난 기와막새이다.
막새에는 ≪기유≫라는 글자가 있다.
* ≪고고≫(중문) 1985년판 7기.
이 기와에 대한 소개자는 고구려에는 3세기 중엽부터 련꽃무늬기와 막새가 생산보급되기 시작하였다고 하면서 ≪기유≫라는 글자를 년호로 인정하고 그 시기를 329년에 해당한다고 해석하였다.
련꽃무늬는 고구려 사람들이 일찍부터 건축장식의 하나로 널리 도입리용한 무늬의 한 종류이다. 특히 고구려사람들은 련꽃무늬장식을 건물의 지붕이나 기와 무덤벽화 등에 많이 하였다.
고국원왕 무덤에는 피장자부부가 각각 평상 우에 앉은 장방을 비롯하여 방앗간, 우물, 부엌, 창고, 마구간 등 여러 채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이 건물들은 어떤 환상적인 것이 아니라 당시의 지상건물을 그대로 옮겨 그린 것이다. 피장자부부가 앉아있는 장방의 지붕은 지상건물의 지붕과 같은데, 지붕마루의 량쪽끝 처마에는 련꽃무늬를 장식하였다. 이러한 지붕장식은 마구간, 부엌 등 모든 건물의 지붕들에도 다 하였다. 그리고 건물마다에는 기오를 넣었는데 기와의 한 끝에는 막새기와를 넣었다.
고국원왕 무덤벽화의 건물은 바로 이 무덤을 만들던 당시 건물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 서북지방에서 고국원왕 무덤을 축조하던 4세기 중엽을 전후한 시기에는 련꽃무늬가 지상건물의 지붕장식에 널리 쓰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장수산성과 그 부근 유적의 련꽃무늬 기와막새도 이 시기에 해당되는 기와막새로 추정할 수 있게 한다. 다시 말하여 붉은기와막새는 4세기 중엽을 전후한 시기에 쓰인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산성 안 붉은기와의 년대를 4세기초 중엽으로 편년할 수 았으며 결국 붉은기와와 시기를 같이하는 산성의 축조년대를 4세기 중엽을 전후한 시기로 편녆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장수산성의 축조년대는 그와 가장 밀접한 련관을 가진 도시유적과 무덤의 년대에 비추어 보아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며 다음의 사실 자료들을 보아도 산성의 년대 고증을 더욱 안받침 할 수 있다.
우선 이 시기 고구려가 이 일대에 장수산성을 쌓을 수 있는 전제가 충분히 마련되여 있었다는 점이다. 장수산성과 같은 대규모의 산성은 선행한 준비단계를 거치지 않고 당시 이 지방에 갑자기 건설 되였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때문에 그 전제가 이미 마련되여 있었을 것은 명백하다. 이와 관련하여서는 이 일대유적의 청회색 기와층이 보여주고 있다. 청회색기와층은 이 일대에서 이 기와층의 유물갖춤새는 고구려가 이 지방을 차지한 첫 시기에 쓴 무덤형식인 평천정돌칸흙무덤의 유물갖춤새와 공통하다.
그런데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이 일대의 평천정돌칸흙무덤의 년대를 3세기 후반기-4세기 초로 추정되는 조건에서 고구려는 4세기 중엽 경에 장수산성과 같은 남방진출을 위한 위력한 요새를 장수산 일대에 건설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고구려가 3세기 후반기에 장수산 일대를 포함한 황해도일대를 차지하고 자기의 영향력을 행사하였다는 것은 황해남도 신천군 새길리에서 발견된 새길리1호무덤을 통하여서도 잘 알 수 있다. 새길리 1호 무덤은 장방형의 외칸무덤으로서 길이 3.1m, 너비 2.1m 정도의 그리 크지 않은 벽돌무덤이다. 이 무덤은 바닥에도 벽돌을 깔고 네 벽도 벽돌로 쌓았다. 무덤의 벽면들이 밖으로 호형을 이룬 것이라든다, 벽체가 우로 올라가면서 점차 안으로 기울어지게 쌓은 것 등은 벽돌무덤 일반에서 볼 수 있는 형식이다.
그러나 천정은 고구려의 평천정돌칸흙무덤의 천정처럼 두 장의 판돌도 덮은 평천정이다. 무덤에서 나온 질그릇갖춤새에서도 고구려적인 요소가 있다. 즉 새길리1호무덤은 구조형식에서 벽돌무덤일반에서는 볼 수 없는 고구려 돌칸흙무덤의 일부 요소를 배합한 절충형의 무덤이다. 또 이 무덤에서 나온 관못 같은 것도 고구려 무덤들에 흔히 볼 수 있는 유물이다.
* ≪문화유산≫과학원출판사, 1962년 3호, 76-77페지.
이처럼 새길리 1호 무덤에서는 고구려문화의 영향이 이모저모에서 보인다. 그런데 이 무덤의 벽에서는 정시 9년 3월 20일에 건축 기사 왕덕이가 이 무덤을 만들었다는 의미의 글이 발견되었다. ≪정시9년≫은 248년에 해당하므로 새길리 1호 무덤은 3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무덤이였던 것이다.
4세기 중엽경 장수산성 축조의 충분한 전제는 고구려의 남하에 겁을 먹고 287년에 대방, 락랑국 두 나라 사람들이 신라에 투항*하였거나 300년에 이르러 락랑, 대방의 일부 봉건통치배들이 또 다시 집단적으로 신라에 망명한 사실*과 일부 지배층이 백제로 망명한 사실을 통하여서도 알 수 있다.
* ≪삼국유사≫ 권 1, 기이, 북대방
* ≪삼국사기≫ 권 2, 신라본기, 기림리사금 3년 3월.
즉 3세기말 4세기초 락랑, 대방국의 거의 전지역이 고구려에 의하여 완전히 통합되여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4세기 장수산성의 축조는 당시 고구려의 남진정책의 추진과 비추어볼 때도 현실적이라고 본다. 삼국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고구려의 남진 정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한 시기는 4세기부터 이며 이 시기 고구려는 례성강계선에서 백제와 대치하고 있었다.
고구려와 백제와의 첫 충돌은 369년부터이다. 369년 9월(음력)에 기병부대와 보병 부대로 편성된 2만 명의 고구려군이 백제의 치양을 공격하였고* 371년 고구려가 또 다시 진군하자 백제군이 패하(례성강)에서 잠복하고 있다가 반격한 것* 등 이 시기 고구려와 백제 간에는 자주 전투가 벌여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 2, 근초고왕 24년.
치양의 위치는 현재 황해남도 배천지방으로 보는 견해* (*≪고구려 력사연구≫, 김일성종합대학출판사, 1985년판 69페지)와 황해남도 금천군 례성강 좌안지방으로 보는 견해* (*≪고구려사≫1.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90년판, 287페지)가 있는데 모두 례성강 류역으로 비정되고 있다.
고구려와 백제간의 전쟁기사는 그 밖에도 자주 나오는데 그러한 자료들을 모두 분석하여 보면 4세기 고구려는 례성강 계선에서 백제와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세기 중엽 백제와의 전쟁을 례성강 계선에서 진행하였다면 이 시기 고구려가 례성강 계선에 많은 방어시설물을 구축하였을 것은 명백한 리치이다.
실제상 장수산성과 그 일대에 분포되여 있는 산성들의 위치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남쪽의 적을 견제하기 위하여 축조된 성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고구려 산성들의 위치는 반드시 강하천을 낀 곳에 선정 되였는데 그것은 산성 방어의 전투적 효과성을 최대한으로 타산한데 기초한 것이다.
그러므로 산성의 위치는 강하천이 있는 아무 곳에나 선택한 것이 아니라 일정한 계선방어와 지역방어에 유리하게 선정되였다. 그것은 고구려가 서쪽 료하계선으로 진출할 당시에 쌓은 산성들이 강의 동쪽에 배치되여 있거나 수도의 방위성들 이었던 산성자산성이나 대성산성 평양성들의 세면이 강하천들로 감싸고 있는 사실을 통하여 잘 알 수 있다.
장수산성은 재령강을 사이에 두고 그 서북쪽에 쌓아졌는데 이것은 강하천이 산성의 위치선정에서 차지하는 중요성과 의의를 고려해 볼때 남쪽에로부터 있을 수 잇는 침입을 막기 위하여 쌓아진 성이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만일 장수산성이 북쪽으로부터 있을 수 있는 침략을 막기 위하여 쌓아진 성이라면 재령강을 사이에 두고 그 동남쪽 어느 곳에 쌓아졌어야 보다 효과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밖에도 황해남북도 일대에는 고구려성으로 알려진 성들이 많다. 황해남북도 일대의 고구려성들로서는 황주성, 후류산성, 수양산성, 대현산성, 태백산성, 치악산성, 봉세산성, 오누이산성, 옹천성, 구월산성 들을 들 수 있다. 이 성들은 주로 강이나 바다를 경계로 그 북쪽에 쌓아졌다. 대표적으로 태백산성, 치악산성 등응 례성강을 경계로 그 서북쪽에 쌓아졌고, 봉세산성, 옹천성, 오누이산성은 서해바다를 낀 북쪽과 서쪽에 쌓아졌는데 모두 남쪽에서 올라오는 적을 견제하거나 남쪽으로 진출하는데 유리하게 되여 있다. 이러한 사실은 장수산성을 비롯한 황해남북도 일대의 고구려 성들이 모두 고구려가 국토통합을 위하여 남쪽으로 진출하던 시기에 쌓아졌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장수산 일대는 당시 례성강 전선으로부터 얼마간 북쪽에 있으므로 그의 축조는 례성강 일대에 있는 고구려 산성들의 축조시기보다 얼마간 앞서 진행되였을 가능성이 많다.
장수산성이 4세기 중엽 경에 축조되였다는 것은 또한 안악지방 고구려 벽화무덤과 련관시켜 보아도 알 수 있다. (안악지방에 있는 고구려벽화무덤들로는 고국원왕 무덤, 안악1, 2호 무덤, 복사리벽화무덤, 봉성리1,2호 무덤, 로암리벽화무덤, 안악읍벽화무덤, 평정리벽화무덤, 월정리벽화무덤 들이다. 그 가운데서 고국원왕무덤은 4세기 후반기무덤이며, 복사리 벽화무덤, 봉성리 1호무덤, 평정리벽화무덤, 안악1호무덤들은 4세기 전반기 또는 4세기 말의 무덤이다. *
* ≪조선전사≫ 3,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91년판, 327페지.
4세기로 추정되는 안악지방 벽화무덤들은 앞에서 론한 장수산성의 축조 년대를 더욱 안받침해주는 자료로 된다. 그것은 장수산성과 불과 100리도 못되는 거리에 있는 안악지방이 당시 봉건지배층만이 쓰던 벽화무덤과 특히는 왕의 무덤을 쓸 수 있을 정도로 고구려의 공고한 후방으로 되자면 늦어도 4세기 초에는 고구려가 안악 이남인 장수산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으며 장수산성이 고구려 남부의 중요한 요새의 하나로 건설 되여 있어야 리치에 맞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보아도 장수산성의 축조년대를 4세기 중엽을 전후한 시기로 추정하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합당하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