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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군대 얘기와 느낌이 약간 다른 얘기
글,편집: 묵은지
요즘 날씨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겨울에도 눈이 쌓이는 것을 좀처럼 보기가 힘들더니 봄을 지나 지금까지 계속되는 가뭄은 비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논과 밭을 거북 등짝같이 바싹 메마르게 갈라놓고 있습니다. 유월에 접어들면서도 어찌된 일인지 가뭄과 무더위가 계속 기승(氣勝)을 부리며 높은 수은주(水銀柱)로 인해 한여름의 삼복(三伏)더위를 무색(無色)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런 유별(有別)난 날씨가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유월을 맞았으며 조국을 위해 희생(犧牲)하신 고귀(高貴)한 분들의 넋을 기리는 6일의 현충일(顯忠日)과 25일에는 전쟁(戰爭)이 발발(勃發)한 날로 우리 민족(民族)에게는 분단(分斷)의 아픔과 함께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싸워야 했던 민족의 큰 비극(悲劇)이 시작된 달이기도 합니다. 묵은지는 전쟁직후 세대(世代)라 비록 6.25와 같은 전쟁의 아픔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군(軍) 생활시절 보병중대(步兵中隊)의 무선통신병(無線通信兵)으로 군복무(軍服務)를 하며 전쟁놀이와도 같은 각종 전투훈련(戰鬪訓鍊)에 유난히도 많이 참여를 했었습니다.
더군다나 서부전선(西部戰線) 최전방(最前方)에서 근무(勤務)를 했었던 탓에 수색정찰(搜索偵察)이라도 할라치면 철책선(鐵柵線) 너머로 큰 소리를 지르면 들릴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 북한군(北韓軍)과 마주하고 있어서 직접적(直接的)으로도 전운(戰雲)의 음기(陰氣)(?)를 피부로 느끼며 긴장감(緊張感)속에 지냈던 것 같습니다. 암튼 묵은지가 있던 곳이 보병사단(步兵師團)이다보니 3년의 군 생활을 통해 전술훈련(戰術訓鍊)이 끊이질 않았고 때마침 간직하고 있던 훈련 기록부(記錄簿)를 확인해 보니 기록상으로도 장장 사단급 훈련 1회와 연대 RCT 2회, 대대 ATT 3회, 중대 ATT 3회, 유격훈련 2회 그밖의 해마다 실시하는 동계훈련(冬季訓練) 등은 군 생활 내내 전쟁에 관한 훈련(訓練)만 지겨울 정도로 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묵은지가 감회(感懷)가 새로웠던 것은 그 옛날 군 시절(時節) 때만 하더라도 온통 철조망과 지뢰밭으로 뒤덮혀 있던 그런 곳이 지금은 시원스럽게 고속도로(高速道路)가 놓여지고 '자유로'라는 이름으로 그 위를 빠르게 달리는 많은 차량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야말로 세상이 변해도 이렇게 변했나 하는 남다른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끼게됩니다. 우습게도 묵은지의 군대 얘기가 생각보다 좀 길어진듯 합니다. 하여간에 군대 갔다온 남자들은 묵은지도 역시 마찬가지지만 군대 얘기만 꺼내면 신들린듯 하며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 ㅋㅋ
동국대 교수이면서 작가(作家)인 '조정래'씨가 쓴 유명한 대하소설(大河小說) '태백산맥(太白山脈)'의 주요 등장인물(登場人物)과 그 주 무대(舞臺)로도 펼쳐진 이른바 '빨치산'에 대해 여러분들은 얼마나 알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신세대(新世代)들에게 빨치산이란 말은 쉽게 와닿지 않겠지만, 소설을 통해 알았거나 실제로 살육(殺戮)의 전쟁속에서 낮에는 국군과 밤에는 공산군에게 주야(晝夜)에 따라 이념(理念)을 바꾸며 시달리던 사람들에게 빨치산을 물어본다면 대개는 '산에 숨어 들어가서 전쟁하던 빨갱이들을 말하는거 아냐?'라는 정도로 기억하고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과거 6.25 전쟁을 전후(前後)로한 이른바 빨갱이 빨치산이 민간인(民間人)에게 저지른 숱한 만행(蠻行)을 생각해 본다면 그렇게 말하는 것이 크게 무리도 아닐거라는 생각도 들긴 합니다만 빨치산(Partisan)이란 용어는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빨갱이의 의미보다는 동·서 유럽에서 오래 전부터 사용되어 온 비정규군인 게릴라(Guerrilla)를 일컫는 군사적 전문(專門) 용어 입니다.
빨치산은 원래 12세기경부터 프랑스어의 '파르티(Parti)'에서 비롯된 말이며 '파르티잔'이라 발음(發音)합니다. 처음에는 열성적(熱性的)인 당원(黨員)을 의미하는 뜻으로 사용되다가 나중에 스페인어에서 나온 게릴라와 같은 '유격대원(遊擊隊員)'의 뜻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알다시피 유격대원은 적(敵)의 후방(後方)에 침투(浸透)하여 적을 교란(交欄)하는 임무(任務)를 수행(遂行)하는 비정규군을 말하는데 세계 2차 대전 당시 소련군이 빨치산을 군 작전(作戰)에 활용(活用)하므로서 독일군에게 많은 타격(打擊)을 입히고 큰 전과(戰果)를 올린 전적(前績)이 있습니다. 또한 그 이전(以前)인 20세기 들어 스페인 내전(內戰)이 한창일때 스페인 제2공화국을 지원(支援)하기 위해 세계 53개국에서 모인 약 3만 2천여명으로 이루어진 '국제여단(Brigadas Internacionales)'은 대다수가 1차 대전과 아일랜드 독립전쟁(獨立戰爭) 등으로 전투(戰鬪) 경험(經驗)을 쌓은 노련한 용병(傭兵) 출신으로 게릴라전에 능통(能通)하여 한 때는 프랑코군을 수세(守勢)로 몰거나 몹시 괴롭히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빨치산의 역사는 전쟁이나 내전을 겪은 나라마다 그 변천사(變遷史) 만큼이나 불려지는 의미(意味)가 달랐지만 대개는 게릴라전과 맥락(脈絡)을 같이하며 사용되어 왔습니다. 빨치산은 게릴라전의 특성상 침투한 해당(該當) 지역(地域)에 지리(地理)나 지형(地形)에 밝아야 하며 무엇보다도 그 지역의 주민(住民) 지원(支援)이나 협조(協調)가 없이는 성공적인 임무를 수행하기가 어렵습니다. 따라서 빨치산 대원(隊員) 중에는 그 지역 주민인 남녀를 가리지 않고 포함되는 경우가 종종(種種) 있게됩니다. 그래서인지 잘 훈련된 특수(特殊)한 게릴라도 있지만 그야말로 두서(頭緖)없이 형성(形成)된 오합지졸(烏合之卒)과 같은 무리도 있습니다. 이러한 양상(樣相)은 스페인 내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으며 결국에는 승산(勝算)없는 소모전(消耗戰)으로 일관(一貫)하다가 무기력(無氣力)하게 자멸(自滅)하는 경우가 이러한 원인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해방(解放)된 직후 우리나라에도 빨치산 태동(胎動)의 시초(始初)라 할 수 있는 빨치산의 전반기(前半期)가 시작되는데 1946년 남한지역(南韓地域)에서 '남로당(南勞黨)'으로 좌익(左翼) 활동을 하고있던 박헌영 등에 대한 미군정(美軍政)이 체포령(逮捕令)을 내리자 이들 조직(組織)이 지하화(地下化)하며 소규모(小規模)의 게릴라로 조직화하여 '야산대(野山隊)' 라는 이름으로 저항(抵抗) 활동을 한 것이 시작입니다. 1948년 '여순반란(麗順叛亂)사건(事件)'인 군 내부의 반란을 일으키고 쫒겨온 잔당(殘黨)들과 합류(合流)해 빨치산을 자처하며 6·25 전쟁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후방을 교란하며 많은 활동을 했었다는 특이점(特異點)도 있습니다. 여순반란사건은 총체적(總體的)으로 국군이 창설(創設)부터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는 것을 잘 나타나게한 사건이었습니다. 여순반란사건은 처음 '4·3 제주사건'을 진압(鎭壓)하기 위해 출동(出動) 준비중이던 14연대 병사들이 출병(出兵)을 거부(拒否)하면서 일어난 사건인데 이미 좌익활동(左翼活動)을 하고 있거나 남로당 측과 연루(連累)된 많은 인원(人員)이 군에 침투해 있던 상황에서 남로당원이었거나 좌익사상(左翼思想)에 물들은 김지회 중위, 지창수 상사 등이 선동(煽動)하여 약 2,500여명의 병사들이 가담(加擔)한 군의 반란 사건은 초창기(草創期) 우리 군의 조직이 얼마나 허술했었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당시의 여론(與論)과 진상파악(眞相把握)에는 그들 나름대로의 명분(名分)이 설득력(說得力)을 지녔는데 미군정 속에 마땅히 제거되야할 친일파(親日派)들이 도리어 요직(要職) 등용(登庸)과 이승만 정부의 일방적인 등장 등에 대한 불만(不滿)은 그럴만한 이유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좌익사상이란 이념적(理念的)인 주장(主張)을 앞세우고 군으로서의 본분(本分)을 저버린채 작전명령(作戰命令)을 정면으로 거부하며 반란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습니다. 결국 이들은 미해군의 엄청난 화력(火力)의 함포사격(艦砲射擊)과 우리 군·경 진압군(鎭壓軍)에 쫒겨 체포(逮捕)되거나 사살(射殺)되었으며 살아남은 자들은 대부분 지리산으로 숨어들어 그 곳에서 북으로부터 남파(南派)되어 빨치산 활동을 지휘(指揮)하고 있던 '이현상'과 합류, 빨치산 후반기(後半期)를 이루는 남부군(南部軍)을 조직하여 유격대로서의 면모(面貌)를 갖추었습니다. 빨치산은 6·25를 깃점으로 이전의 빨치산 활동을 전반기(1대)로 보고 전쟁이 발발한 이후의 활동을 빨치산의 후반기(2대)로 나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인원이 늘고 규모가 커진 이들은 태백산맥(太白山脈)을 중심으로 그들 나름대로 행정구역(行政區域)에 따라 전북도당(全北道黨), 전남도당(全南道黨), 경북도당(慶北道黨), 경남도당(慶南道黨) 등으로 나뉘어 활동을 하였는데 특히 지리산을 배경(背景)으로 빨치산의 활동이 두드러져 지리산은 이들 빨치산의 대명사(代名詞)가 되었습니다.
6·25가 발발하면서 북한은 후방(後方) 교란(交欄)을 위해 초반에는 계속 빨치산 작전을 활용하였는데 전술적(戰術的)으로도 상당한 효과(效果)를 보았으며 병력(兵力)과 군수물자(軍需物資)도 공급(供給)해 주어 그 전투 수행능력(遂行能力)이 왠만한 큰 부대가 작전을 할 수 있는 병력과 화력의 규모를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위세를 떨치려는 즈음, 미국의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仁川上陸作戰)'을 감행(敢行)하여 허리가 끊기게 되면서 이들의 역할과 위상(位相)이 어려워지게 되었습니다. 모든 보급로(補給路)는 물론 연락망(連絡網) 조차 어려워지게 되었으며 이들은 스스로 모든 작전수행이나 보급문제(補給問題)를 독자적(獨自的)으로 해결해 나가야 했습니다. 전투장비(戰鬪裝備)는 물론 탄약(彈藥)과 식량(食糧)의 조달(調達)이 어려워졌으며 겨울에 접어들어서는 산속에서의 은둔(隱遁) 생활로 추위와 배고픔이 극심(極甚)해지면서 전투에서 죽은자 보다 병에 걸리고 굶어죽거나 동사자(凍死者)들이 더 많아 사망자가 급격(急激)하게 늘어났습니다. 더군다나 북한에서 조차 만주일대(滿洲一帶)에서 활동했던 김일성파와 남로당파의 박헌영 등은 권력다툼을 벌여 결국 박헌영과 이승엽이 숙청(肅淸)되는 분란(紛亂)을 겪으며 궁지(窮地)에 몰린 남부군에 관심을 가져주기는 커녕 북한으로부터도 골치덩어리로 외면(外面)받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기습적(奇襲的)인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보급로가 차단(遮斷)된 빨치산을 국군은 토벌작전(討伐作戰)으로 몰아부쳐 '백선엽' 장군의 지휘아래 끊질긴 소탕전(掃蕩戰)끝에 거의 전멸(全滅)을 시켰으며 그들의 우두머리인 이현상 마저 토벌대(討伐隊)와의 교전(交戰)으로 결국 사살(射殺)되고 말았습니다. 빨치산 세력(勢力)은 이미 2차 대공세(大攻勢)에 지리멸렬(支離滅裂)하여 조직 자체가 와해(瓦解)되었으며 대부분 생포(生捕)된 인원은 포로수용소(捕虜收容所)에 수감(收監)되었다가 큰 잘못이 없었다면 석방(釋放)시켜 일상(日常)으로 돌아가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산속 깊은 곳에 피신(避身)해 있던 빨치산 일부는 고립(孤立)되어 있는 탓에 이 사실을 모른채 국군과 경찰이 투항(投降)을 알리는 삐라나 확성기의 소리를 들었어도 믿지 못하고 끝까지 저항(抵抗)하다 안타까운 죽음을 맞곤 하였습니다.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도처(到處)에 흩어졌던 남부군 빨치산은 거의 소탕이 되어 이후에는 '망실공비(亡失共匪)'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지역 경찰이나 형사들이 추적(追跡)하여 잔당(殘黨) 처리를 하였습니다. 이렇게 빨치산과의 교전은 1954년 토벌이 완료되기까지 무려 6년간의 전투였으며 6·25 전쟁 보다도 긴 지루한 전쟁이었습니다. 이후 1963년 11월, 지리산 내원골에서 부상을 입은 마지막 여성 빨치산인 '전순덕'이 생포됨으로서 빨치산의 명맥(命脈)은 완전히 끊기며 종식(終熄)되었습니다. 빨치산으로 활동하다 희생된 사람은 대부분 그 지역의 주민이었으며 대한민국 정부도 생포되거나 귀순(歸順)한 이들에 대해 '오도(誤導)되어 가담(加擔)한 선량(善良)한 양민(良民)'으로 간주(看做), 별다른 죄과(罪過)가 없다면 방면(放免)하여 일상으로 돌아가게 해 주었습니다. 이점에 대해선 많은 이견(異見)이 있었는데 이들을 포로교환(捕虜交換) 협정(協定)에 따라야하는 정규군(正規軍)으로 판단하지 않고 비정규군으로 처리(處理)하여 포로교환의 대상(對象)에서 제외(除外)시켜 북한으로 강제북송(强制北送) 되는 것을 막아준 것은 확실합니다.
25일은 우리 민족이 이땅위에 서로 피를 흘리며 전쟁을 시작한 67번째의 해를 맞는 날입니다. 세월(歲月)이 오래 흐른 오늘날 같은 민족(民族)끼리 그깟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몹쓸 전쟁을 겪어야 했던 그런 비극(悲劇)은 이제 가는 세월따라 기억 속에 많이 잊혀지고 가라앉은듯 하지만 전쟁통에 부모형제 자식들을 잃은 가슴아픈 상처는 한 세대가 지나고 있는 지금에도 6월을 맞는 마음들에 아픔으로 남아 영원히 지울수가 없을 것입니다. 무슨 무슨 이념이야 그따위 것을 지닌 사람들의 취향(趣向)이니 자기들의 마음속에 담아두면 되는 몫이고 듣기싫고 볼썽사나운 미사일, 핵, 사드 같은 그런 못된 것들은 일거(一擧)에 모두 없애 버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들 기억 속에 "빨치산이란 빨갱이다!"라는 깊이 못 밖힌 지울수 없는 생각을 바꾸기 위해서라도 너무도 크고깊게 다친 민족의 아픈 상처를 감싸 어루만져 줄 수 있는 따뜻하고 포근한 한민족(韓民族)의 진정한 큰 손길이 기다려지는 유월입니다. 역사는 지금도 흐르는데 언제쯤 민족의 위대한 사람이 어느 쪽에서 '짠~!' 하고 나타나 우리들에게 진정한 행복 속에 평화(平和)와 사랑을 나누며 살게하는 감격(感激)의 큰 손길을 내밀어 줄른지...
첫댓글 행복하고 평화로운 시대가 오겠지요
감사합니다.
전쟁은 많은 아픔을 가저오지요 이제 서로서로 적대행위는 멀리하고 평화로운 한민족이 되어주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