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친 내눈을 깨우며 쏟아지는 햇살에 오늘도 난 못이긴척 담배에 불을붙여 내가 왜 일어나는지 이유도 알지못한 채 메마른 내입술은 또 하루를 살겠지..]
블루데이. 파란 가을 하늘이 어울릴 것 같은 그런 날.
그런데 왜 노래 가사는 이다지도 서글픈 걸까.
# 블루데이 [짧은 이야기] #
노래가 흘러나온다.
높은 음인데도 삑사리 한번 없이 쭉쭉 뽑아대는 가창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을 만큼 훌륭하다. 제목은 아마도 '블루데이'.
가수의 이름은 잘 모르겠다.
블루데이.
어쩐지 제목에 이끌려 다운받은 곡이다. 파란색이 주는 이미지는 희망, 밝음, 기대 같은 좋은 것들 뿐이기에 요즘처럼 우울한 기분을 달래는데 좋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때문에 선택한 곡이다.
하지만 가사는 이상할만큼 우울해서 속이 탄다.
[..지친 내눈을 깨우며 쏟아지는 햇살에 오늘도 난 못이긴척 담배에 불을붙여 내가 왜 일어나는지 이유도 알지못한 채 메마른 내입술은 또 하루를 살겠지..]
256메가의 MP3에 담긴 곡이라곤 고작 이거 하나뿐이라 제목과는 달리 우울하기만 한 노래는 빙글빙글 지치지고 않고 귓가를 맴돈다.
내 옆자리에 앉는 녀석은 이름대신 왕따라고 불리는 녀석이었다. 녀석은 매일매일 흙바닥을 굴렀고, 제대로된 교재를 손에 쥐어본적도 없으며 얼굴과 몸에는 항상 크고 작은 상처를 달고 다녔다. 아버지의 괴팍하고 불같은 성격을 그대로 닮은 나로선 그것이 결코 마음에 드는 상황이 아니었지만, 그 모든 일을 작은 반항 하나 없이 모두 참고 견뎌내는 녀석에게 더 화가 치밀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척, 들리지 않는 척 무시하곤했었다.
그러다 딱 한번, 녀석을 괴롭히는 놈들에게 주먹을 내질렀던 적이 있었다. 단순히 괴롭힘을 넘어선 폭력에 기가막혔던 탓이다. 그리고 그 날 이후부터 녀석은 내 뒤를 졸졸 쫓아다니기 시작했고 난 조금뿐이긴 해도 녀석의 괴롭힘을 막아주기 시작했다. 이유는 없었다. 어쩌면 단순히 영웅놀이를 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성질은 불같고, 하는 짓은 기행이란 소리가 나올만큼 괴팍했지만 성실하고 정이 많던 분이셨다. 일찍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언제나 아버지와 함께 했던 난 순식간에 혼자가 되었다.
친척조차 없는 내 어깨를 아버지의 친구분들과 동료분들이 툭툭 치며 위로해주는 것으로 장례를 마쳤다.
하지만 한번 가라앉은 기분은 쉽게 나아지지 않았고, 그날부터 5일정도 학교에 가는 대신 무작정 길거리를 헤매기 시작했다. 친구놈들의 걱정어린 연락조차 귀찮아 핸드폰도 밧데리와 분리시켜 시꺼먼 한강물에 던져버렸다.
그런 때 녀석을 발견했던 건 어쩌면 우연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날도 난 여전히 번화가를 뱅뱅 맴돌고 있었다. 그러다 소란스런 무리속에 녀석이 여러명에게 둘러싸여 몰매를 맞고 있는 걸 보게됐다.
머리속에서 파팟하는 소리가 들린 듯한 착각이 일더니 정신을 차렸을 땐 귀를 멍멍하게 만드는 요란스런 사이렌속에서 녀석은 하얀 병원차에, 난 두명의 남자에게 이끌려 경찰서로 향하고 있었다.
"야, 이놈아. 내가 니놈 시끼 이렇게 될 걸 진즉에 알아봤다."
강력계 형사로 순직하신 아버지의 동료분이 날 알아보자마자 대뜸 욕부터 날렸다.
"안녕하셨어요."
"뭐어? 안녕하셨어요? 니 아버지도 쌩미친놈이었지만, 너도 진짜 제대로 미친놈이다. 허참."
장례식 이후로 처음보는 거라 꾸벅 인사를 했더니 아저씨는 기 막혀 하며 가슴만 팡팡 쳤다. 게다가 아버지까지 싸잡아 욕을 날리는 훌륭한 애정까지 보여줬다.
아저씨는 한동안 쇠창살을 사이에 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가며 삿대질까지 하다가 잠시 한숨을 쉬며 숨을 골랐다. 그리고는 날 측은하게 바라보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니놈 시끼가 패대기 친 놈들이 한 둘이 아니야. 그래서 합의보는데 시간이 좀 걸릴거다. 그때까진 지겨워도 그 안에 좀 있어야 할거야. 근데 말이다."
아저씨의 부름에 무심히 숙였던 고개를 들어 눈을 맞췄다. 아저씨는 방금까지 흥분하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만큼 차분하고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니가 엄한 짓을 했을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아. 니 아버지가 널 얼마나 잘 키웠는지는 내가 보장하니까. 게다가 그 놈들도 근방에선 질 나쁘기로 소문이 나있어. 그러니까 왜 그 놈들을 패대기 쳤는지 좀 말해봐. 그래야 일이 쉽게 풀려."
딱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마주쳤던 눈을 돌려버렸다.
"이놈아! 내가 진짜 너때문에 피가 말라! 그렇게 입 꾹 다물고 있으면 없던 죄도 옴팡 뒤집어 쓴다고! 그놈들은 니가 먼저 시비를 걸었다면서 고소를 하네 어쩌네 난리 지랄들인데, 넌 왜 가만히만 있는거야!"
"...그 말이 맞아요. 내가 먼저 시비를 걸었어요."
그랬다. 맞고 있던 녀석을 구해준다는 핑계로 난 화풀이를 했을뿐이다.
"너 대체 왜 이래. 그 맞고 있던 쪼그만 놈 구하려다 그런 거라고 한마디만 하면 되는 데. 너 정말 왜 이렇게 막가는거야."
더는 말이 없는 날 향해 답답하다는 듯 한숨만 푹푹 쉬던 아저씨는 누군가의 호출로 밖으로 나가버렸고 난 다시 혼자가 되었다.
주변이 북적북적 했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적막할 정도였고, 바쁜 아버지 덕에 집에서 혼자 밤을 새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이런 내 곁에 있어주는 친구들이 있었고, 때때로 아버지의 동료분들이 내 안부와 먹거리등을 챙겨주었기에 외로움을 느낄 새는 없었다.
그런데 외로워졌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에 혼자 놀라버렸을 정도로 외로워졌다.
그래서 평소에는 무심코 지나치던 모든 이들의 존재가 뼈에 사무칠만큼 크게 느껴졌다.
다음 날엔 화를 참느라 얼굴이 허옇게 변한 친구놈이 내 MP3를 가지고 찾아왔다. 그리고 MP3를 던지듯 건네주며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 왜 여기에 있는거야! 학교에는 왜 안나왔어! 아버지 돌아가신 건 왜 안 알린거야! 왜 나한테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거야! 니 눈엔 내가 물로 보이냐! 니 병신같은 썩은 동태 눈깔엔 내가 보이지도 않냐! 이써글놈아!"
그 모습에 풉 하고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자, 기집애마냥 눈을 치뜨며 더욱 화를 냈다.
"좋은 일도 아닌데 알릴게 뭐 있어. 어쨌든 땡큐."
MP3를 흔들며 가볍게 인사하자 친구놈은 써글놈, 써글놈을 중얼대다 몇가지 바깥 상황을 전해주고는 돌아갔다.
심심하지 말라고 던져주고 간 MP3지만, 단 한 곡밖에 들어있지 않은 탓에 더 쓸쓸해지고 말았다. 그리고 제목과는 달리 우울한 노래에 짜증이 치밀때 쯤,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이 분들한테 인사해라. 니놈 합의 보느라고 엄청 애쓰셨어."
아저씨가 가르킨 곳에는 점잖게 생긴 중년의 남자와 울었는지 눈가가 새빨간 여자가 날보며 서있었다.
"감사합니다."
"좀더 성의있게는 못하냐, 엉?"
꾸벅 인사를 하자 아저씨가 머리를 콩 때리며 잔소리를 해댔다.
"우리 애 때문에 고생이 많았다며. 몸은 괜찮니?"
"네...그런데 저 때문에 이렇게까지 애쓰실 필요는 없었는데요."
무슨 헛소리냐며 아저씨가 열을 올렸다. 그리고 날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자가 날향해 나직이 입을 열었다.
"어차피 고소할 생각이었으니 걱정 하지 않아도 된다. 차라리 잘된 셈이니까. 그리고,"
남자의 손이 내 어깨를 굳세게 잡았다. 그 손이 어쩐지 아버지를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녀석이 그렇게 뭐든 혼자 짊어지는 게 아냐. 니 눈에는 못나 보이는 어른들이래도 기대고, 응석부려도 돼."
그 눈이 따뜻해보여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날뻔했다. 흔들리는 내 눈을 읽었는지 어느 새 아저씨가 머리를 쓱쓱 쓰다듬고 있었다.
녀석은 전치 4주로 꽤 많이 다쳤다고 했다. 그래서 녀석이 있는 병원으로 가기 위해 남자의 차에 오르기 전, 그 때까지도 복잡한 시선으로 날 흘겨보던 아저씨에게 물었다.
"블루데이의 뜻이 뭐에요?"
"으잉? 건 또 왜 물어?"
"그냥요. 아무래도 파랗고 희망찬 날은 아닌 것 같아서요."
"뭐, 그렇지. 블루데이는 우울한 날이란 의미야."
"우울이요?....하지만 역시 블루데이는 파랗고 희망찬 날인 것 같아요."
"어째서?"
"오늘은 기분이 꽤 좋거든요."
눈이 시리게 파란 하늘을 가리키며 웃어보이자, 아저씨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싱겁긴,하고 중얼댔다.
첫댓글 할말은 이것밖에...브라보~(짝짝!!)<-박수치면서 하고있다..-_-;;
........ㅠ_ㅜ
지르셨군요..예쁘겠어요-_ㅠ 암튼 오랜만의 소설인걸 같아서 좋네요^-^
슬이도.. 아가들 많이 사던데.. 블루데이.. 맞아 우울하단 뜻이지 뭐^ㅡ^; 완전 반대야;
인형값이 353만원... 너무 쎄.;;
감동.....ㅠ.ㅠ
슬쩍 들렸다가 갑니다. 기억하실런지요. ㅋ... 잘 읽고 갑니다.
그날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