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아버님은 현재 나이 72세로 저희자식들에게 당신이 격은 시절을 자서전 비슷하게 쓰셔서 저희에게 들려주셨읍니다. 대부분 이 통신을 하는 여러분들 나이에 격은 이야기라고 할수있읍니 다. 지금으로 부터 50년전 이야기이닌 깐요. 다음에 쓴글은 아버님께서 친필로 써주신글중에서 8.15와 관련된 내용 을 베오란 여러분에게 다섯으로 나눠서 소개해들릴까 합니다. 해방 50년을 맞이 했건만 아직도 유일하게 나라가 둘로갈려 있는 슬 픈 우리민족이 빨리 통일되기를 바라면서 이글을 올립니다.
하나:결혼과 징용으로 끌려가기
시국은 불안하여 일본놈이 전쟁이 극에 달하는 시기가 되어 젊은 청년 남녀는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정책에 시달려 남자는 군인으로 또는 노 무자로 끌려가고 여자는 정신대로 동원되는 시대였다. 그래서 급하게 부모님의 명령대로 서로 보지도 않고 부모가 하라는 대로 결혼을 서둘 렸다. 그리고 살지도 죽지도 모르는 생이별을 할지도 모르는 결혼을 그때만해도 서두루는게 유행이었다. 일본은 우리나라를 식민지 통치하 고서 또 중국하고 선전포고하여 전쟁을 확대하였고 승리도 못하면서 미국과 전쟁을 벌이고 끝내는 소련까지 전쟁하였다. 그래서 날로 전쟁이 심하여 하나뿐이 없는 형님은 일본규슈로 징용을 가서 해방되기전에 바로 도망나와 귀국하여 돌아왔다. 나는 제 1기 징병검사를 받고 나서 몇달후에 출정하라는 영 장이 나왔다 할수없이 일본군인으로 입대하기위해 집을 나섰다. 당시만 해도 전쟁이 격심한 시기라서 집대문밖에 나가면 살아 돌아오 기가 어려운 때였다. 1945년 5월6일 나는 충남 해미 일본신사당에서 면민이 모인가운데 전쟁 을 이기고 돌아오라는 축수 환송을 받으며 떠났다. 서울용산에 집결하 여 2주간 대기훈련을 받던중 어느날 새벽에 모이라는 명령에 집합을 해보니 외국으로 출전한다는 것이다. 어디로 가는지 궁금하여 기차의 기 관차 방향을 보니 북쪽으로 향한것을 보고 중국으로 가는구나를 알았다. 기차는 출발하여 북으로 북으로 달리는 것이다. 실려가면서 생각하니 기가찻다. 아무 의미도 없는 전쟁터에로 끌려가서 죽으면 억울하다 생각 하니 도망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남의나라의 전쟁에 목숨을 받쳐야한 다니 참 한심하기 그지없었지만 운명에 맡기고 끌려갔다. 적지에가면 마음대로 집에 편지도 못할것 같아 기차안에서 흔들리면서 편지를 서로 써서 함경남북도 기차정거장 근처에 가면 동포들 보고서 편 지를 던져주면 남녀불문하고 급히 주어다 우체통에 ?ⅷ㉭沮羚駭?. 기차가 쉬면 그때마다 동포들이 쫏아와 물도 주고 먹을것을 조금이라도 주는데 뜨꺼운 동포애를 느꼈다. 밤낫 쉴새없이 만주 넓은 벌판을 달리어서 새벽녘에 도착하여보니 동서 남북을 분간 못하였다.
둘: 전쟁끝남과 8.15 해방
지명을 알아보니 목단강성 이라 한다. 소련 국경이 가까운 지역이었다. 다음부터는 군사훈련을 시키는데 내가 받은 훈련은 공병부대 배치였다. 다리를 놓고 다리를 부스고 또치카 탱크를 폭파 시키는 훈련을 받았다. 본래는 정기6개월 훈련받을 것을 3개월로 단축시켜 1등병 게급장을 달 아 주었다. 소위 관동군이 된 것이었다. 전쟁은 하루하루 다르게 격 전이 계속 되고 1945년 8월8일은 소련과도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을 시 작했다. 그날부터 소련비행기가 하늘을 떠다니며 위협사격을 시작하였다. 우리부대에도 소련탱크부대가 쳐들어오기 시작하여 부대가 후퇴하기 시 작했다. 군수품 창고에 가서 전부 무기와 군복을 새로입고나머지는 전부 불지르고 떠났다. 만주벌판은 연기에 덮히고 일본군 기마병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소련 탱크부대를 방어하고 물리쳐야 된다고 난리를 부렸다. 처음에는 일본 고참병이 나가 싸우고 이튼날 연병장에서 1차후퇴후 점호 하는것을 보니 눈에 띄게 사람수가 줄어들어 있었다. 계속 죽어 줄어드는 것이었다. 탱크부대를 막기위해 2차 진군을 한다는데 이번에는 결사대라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내차례가 돌아왔구나하며 죽을 것을 각오하니 만감이 교차하였다. 남의나라 전쟁에 끼어들어 억울한 죽음을 당하게 된것이었다. 이제나 저제나 결사대로 끌려갈 것을 생각하고 있는데 부대안에 사역을 갔다온 동료가 공기가 이상하게 느낀다고 하였다. 조금있다가 전쟁이 중 지되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일본이 항복했다는 얘기는 없었다. 2.3일후 부대에 전체 집합이 있어 모여보니 부대장 말이 당분간 전쟁을 중지하니 방심하지 말고 제 2의 전쟁준비를 하고 있으라는 것이고 일절 항복하여 전쟁에 패했다는 말은 없었다. 그러면서 부대를 이동하여 산으로 데리고 가서 임시대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완전 무장해제 한다는 통지가 왔다. 내려가 보니 소련 탱크부대가 들어와서 일본군 무기 총포를 일제 점검하 고 차에 싣고 가는 상황이었다. 그때서야 무조건 항복했다는 사실을 털 어놓았다. 일본에서 원자탄 투하를 하는 바람에 전쟁은 완전히 끝났다고 했다. 1945년 8월 19일이었다. 그리고 나서 일본 부대장 말이 우리 조선 동포군인을 모아놓고 하는말이 우리 동양사람끼리 동양평화를 위해 전쟁 을 이기려고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졌으니 이제는 해산하는 수밖에 없 다. 우리가 책임지고 고향까지 데려다 주는것이 도리지만 패전병의 신세 에 어쩔수 없으니 그리알고 알아서 돌아가라는 말과 앞으로 일본은 30년 후에 다시 일어서 또 그때 만날수 있을것이다 하며 남으로 남으로 내려가 라는 얘기로 끝이났다. 그때 부대장이 한말 30년후에 보자는 말은 내가슴 속에 깊이 새겨져있어는데 그들이 다시 30년후에 세계를 지배하겠다는 각 오로 들렸는데 현재 생각하면 그들이 세계경제를 지배하고 있으니 하나도 틀린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셋: 소련군의 포로로 포로신세
우리 조선사람 군인들끼리 떠나기로 결심하고 고향앞으로 가기 시작했다. 산에서 내려오니 소련탱크부대 군인들이 좋아라고 군가를 세게 부르며 탱 크와 트럭으로 길을 꽉메우고 있었다.우리는 패전병 신세로 군복만 입고 남으로 남으로 걸어서 고향으로 가는 것이었다.만주 벌판에서 고향까지 수천리를 걸어서 가야한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처량한 신세였다.차도 없고 돈도 없고 식량도 없으니 하루 아침에 군인 거지가 된 셈이였다.서로 조 선 동포들끼리 의지 하며 살으나 죽으나 같이 가자고 서로 의지하며 신세 타령하며 가는데 어느덧 석양에 해가 저물어 어두어 지는데 길이 막히며 못가는 것이었다. 알아보니 소련군인들이 앞뒤로 둘러사여 책임자가 무 엇이라 손짓 발짓하는데 자고 가라는 것으로 짐작하고 길옆에 앉아서 의 논하였다. 우리는 항복했으니 죽이지는 않을것이라고 하면서 서로 불침 번을 서면서 밤을 새우고 다음날 상황을 살펴보니 완전 포로가 된 신세 였다. 몇일전 도착한 일본군들에게 물어보니몇천명이 꼼짝못하고 포로생 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엇다. 그래서 우리도 일본군인들 처럼 집도 없이 강냉이대를 걷어다가 임시 음막을 지어서 머리만 가리고 몇일동안을 살 었다. 죽지 않으려고 강냉이대를 꺽어먹고 호박도 날로 먹고 사는데 그것도 다 떨어져 굶어죽게 되엇다. 소련군이 그형편을 보고 도리없이 또 끌고가는 데 거기있는동안 밤이되면 소련군이 시계달라 만년필 달라 권총으로 때리 고 성화대는데 혼났다. 소련군이 앞뒤로 배치하여 끌려가는데 한참을 가 다 보니 어느 중국 중소도시 돈화를 지나갔다. 가면서 살펴보니 시내벽 보가 붙어있어보니 우리 조선 해방?┳럽鳴? 태극기와 연합군기가 합쳐져있 는 포스터를 보게 되엇다. 그때서야 완전 우리나라가 해방된걸 알고 우리 동포들끼리 앞뒤로 연락하여 단결하여 행동하기로 다짐하고 돈화시내에서 우리 동포를 발견하고 우리는열에서 이탈을 못하고 조선말로 도와달라고 얘기하니 우리교포가 놀라 ???아왔다. 우리동포가 여기 몇십명 일본군인들
틈에 포로로 잡혀 끌려가고 있는데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될 지도 모르겠으니 교포아저씨가 대책을 알려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동포는 그말에 지금 가는곳은 비행장으로 가는데 거기 끌려가면 영영 포로신세가 되니 따라가지말고 열외로 빠져나오라는 얘기였다. 빠져나와 교포사무실 에 찾아오면 고국에 가게 해주겠다고 해서 우리 동포 몇십명은 따라가지 않고 옆으로 빠져나와 소련군인 책임자를 만날것을 요청하였다. 소련책임자는 총을 들고 ???아왔다. 우리는 지도를 펴놓고 손짓 발짓으로 한반도를 가리키면서 우리는 여기서 온사람들이다하면서 전쟁을 하지않고 땅이나 파고 일이나 했다고 햇지만 통하지 않아 그들은 수용소로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
넷: 따뜻한 동포애로 남으로 남으로
그때마침 하늘이 도왔는지 우리동포사람중에 집에서 한복을 입고 찍은 부모님 사진을 가져온사람이 있어 사진을 소련사람에게 보여주었더니 그 책임자는 바로 "코레쓰키"라 하면서 악수를 청하였다. 조선사람이라는 것이 인정된 순간이었다.모두들 악수하고 우리는 이수용소에서 나가겠다고 문을 가리키자 그는 우리들보고 나가도록 허락했다. 그리고 증명을 써달라고 하여 증명서를 받아 た?교포사무실을 찾아갔다. 교포들은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며 우리나라도 이제 일제 에서 해방되어 독 립정부를 수립할예정이라고 소식을 들려주어 우리는 서로 반가워 울고 불 고 얼싸안고 만세를 불렀다. 남북으로 한반도가 둘로 갈릴줄은 꿈에도 몰랐다.그리고 나서 교포들은 우리보고 군복을 입고 서는 고국의 못 돌아가게 되니 전부 벗어 버리고 옷을 한복으로 갈아 입고 가야 된다고 했다.그래서 우리는 교포들이 옷을 주는대로 갈아입고 앞가슴에 코 리아라고 영어로 쓰고 고국을 향하여 떠나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일본인으 로 오인하여 잡히는 일이 없도록 하기위함이었다. 남쪽으로 남쪽으로 가는데 배가 고프면 밭에 들어가 보리감자를 케서 웃저 고리에 담아 가지고 배고프면 먹고해서 몇일 만에 간도성 용정에 도착하였 다.용정읍에 들어가니 교포들이 반가이 맞아주 며 얼마나 고생들 하였느냐 하면서 동장이 앞장서서 교포집을 일일이 찾 아다니면서 전부 방에서 푹 쉬도록 배려하여 주었다.자고 나서 아침을 먹 고 가다가 배고프면 먹으라고 쌀은 없으니 조한되씩 일일이 배급하여 주었 다.참으로 동포애가 철철 넘쳐서 우리는 감격하고 감사하다 인사하면서 또 남으로 떠나기 시작하였다.또 얼마나 걸어서 같는지 알수 없지만 드디어 두만강에 도착하였다.그리고 우리 조국 회령으로 들어가는 다리를 만나 고 국으로 들어오면서 감개가 무량하여 모두들 눈물을 흘렸다. 목적없이 전쟁 터에 끌려갔다 살아돌아오니 천만다행이라 생각했다. 모두 조상님 부모님 덕분에 고국에 돌아왓으니 발걸음이 가벼워지며 집에 다온 기분이었으나 아직도 천리가 넘는 길이 꼐팀羚畢? 조선땅에 들어와서 종일 걷다가는 초가집 용두세[지붕위의 모양세]가 길죽한 집에가서 염체불구하고 ?광봅튼? 인사하고 징용갔다돌아가는 길이라고하면 누구나 할것없이 반갑게 맞아 들어오라고 하며 하루밤 묵게 해주고 식량도 주었다. 참으로 한민족이 하 나가 된순간이었다. 나그네 신세로 몇일만에 함경남도 청진에 도착하니 그곳도 소련군이 점령하여 군인들 수송차가 다니고 있었다. 기차역에 가서 화물 차 지붕꼭대기라도 좋으니 남으로내려 가도록 부탁하니 위험하다고 하면 서 주의하여 타라고 하며 허락해주었다. 가는데 고통은 이루말할수 없었 다.북한은 산이 많아 턴널도 많은데 기차가 턴널을 지나면 그때만해도 기차가 석탄을 때고 달리던 때라 턴널을 빠져나오면 석탄가루와 연기로 얼굴은 까많게 되고 눈만 말똥말똥 남아있었다. 옷과 얼굴이 온통 검게 그을리면서도 하루라도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은 맘으로 계속 화물차 지붕위에 올라타고 남으로 남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강원도 원산을 지나 경기도 연천군에 도착했다. 더이상 남쪽으로 못간다는 것이었다. 도착하여 연천군에 내리니 여기서 부터 삼팔선으로 남쪽은 미국 북쪽은 소련군이 각각 점령하여 주둔한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소식이었다. 약한 나라의 신세 가 이렇구나를 다시한번 느끼며 남으로 내려가려니 국경이 생겨 다리를 건 널수가 없었다. 다리가 불통하니 할수없이 임진강에서 배를 타고 건너 연천읍으로 들어갔다. 연천에서 부터는 미국이 주둔하여 대부분 신사적 으로 대해주었다. 물자도 북쪽에 비해 풍부한것 같고 북한【??친일파를 소탕한다고 난리 야단법석이었는걸 보아왔는데 이곳에 오니 모두가 조용하 고 라디오에서는 노래소리가 들려나왔다. 벌써 일제의 압박을 잊고 오히려 친일한사람들이 큰소리치고 사는 상황인걸 직감할수 있었다.
다섯: 고향의 부모님 곁으로
연천에서 부터는 화물차 대신에 여객차를 오랜만에 타고 서울역에 도착하 니 환영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역전광장에 각도별로 천막을 치고 각각 음 식을 차려놓고 식사을 제공하고 각고향으로 가는편을 도와주고 가족을 상 봉하는 경우도 있었다. 같이 왔던 동포들을 헤어질 시간이었다. 눈물로 헤 어지고 나는 장항선을 타고 홍성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그리운 고향 해미 로 다시 차를 타고 가서 걸어서 집에 도착하니 집안식구 모두가 맨발로 뛰 어나와 반겨주었다. 나의 어머니는 해방되자마다 매일 십오리 해미읍으로 밥만 먹으면 ?광봅튼?
둘째 자식이 돌아오는건만 계속 기다렸다는 것이었다. 큰아들은 일본에 징 용갔다가 해방될지음 몰래 빠져나와 고향에 도착해 있어 작은아들만을 속 타게 기다렸던 것이었다. 그렇하길 30여일 하다가 지쳐서 않고 누워있는 데 자식이 돌아왔으니 얼마나 기쁘랴. 죽은줄 알았던 자식이 돌아왔으니 어머니는 몇시간이 지나도 자식곁을 떠날줄모르며 울다가는 확인해보고 하였다. 어머니의 자식사랑은 끝이 없다는 걸 그때 다시한번 느꼈다. 전쟁끝무렵 에 끌려나가 전쟁터에서 죽었더라면 그보다 큰 슬픔은 없어으리라. 내주위에도 수없는 죄없는 목숨을 일본군의 명령에 받친 친우들이 많이 있다. 그혼령들을 위해서라도 우리나라가 잘되어 빨리 통일이 되고 민족 이 똘똘 뭉치는 모습을 보고싶을 뿐이다.
이상은 아버님의 자선전중에서 8.15해방을 맞이한 부분만 수정없이 그대로 옮겨 놓았읍니다. 갖결혼했던 우리어머니와 헤어져 몇개월 생이별하고 다 시 만나 6남매를 낳고 모두 장성하고 작년에는 결혼 50주년 금혼식까지 마 쳤읍니다. 저도 한민족의 후손으로 아직도 일제의 잔재가 구석구석있고 우 리생활은 일본문화가 안방까지 찾아와 이미 우리를 지배하고 있읍니다. 우리청소년들의 책가방에 일제샤프와 카세트가 하나씩있고 가정에도 그들의 물건이 중요한 가재도구로 자리잡고있읍니다. 총보다 무서운 그들의 문화가 말입니다. 아버님이 어려울 그때 우리민족이 똘똘뭉쳐던 그때처럼 우리는 빨리 당파싸움 지역싸움 이념싸움에서 벗어나 야합니다. 한민족이 뭉쳐서 하나가 되길 간절히바라면서 더러는 말이 좀 이상하고 문장이어가는 모습이 어색하더라도 그시대를 살아 오신 분들의 이야기이고 지금의 젊은신분들이 잊고있는 우리 어른들의 한많은 생을 되돌아보는 것도 괜?광쓴鳴? 생각하여 8.15를 맞아 이글을 베오
안녕하세요. 일주일동안 여러분과 못만난 이영로 입니다. 사실은 교육을 갔다왔거들랑요. 회사생활 하다보면 일년에 한번쯤 똑같은 회사생활에서 벗어나 교육 다녀볼만 합니다. 지금까지의 반복적인 생활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활을 접해볼수 있고 무엇보다도 낮선 사람을 만나서 얘기를 나눌수 있다는 건 더없이 즐 거운 일이었읍니다. 오랜만에 마누라 잔소리를 피해서 살수있는 유일한 피난처 이기도 하 고요.[요부분은 집사람이 보면 안되는데...] 하지만 저녁에 잠자리에 들때면 외롭기는 하대요.[이러면 집사람 맘이 플어질려나] [사실 집사람에게 전화하니 내가없는 밤에는 제대로 잠도 못자는 가련 한 여인이라고 하던데...]
그래서 일주일동안 있으면서 저녁식사후 잔디밭에 앉아 혹은 방에 앉아 맥주한잔씩 마시면서 세상이 야기를 하면서 들은 방친구 이야기를 늘어 놀까 합니다. 네명이 한방 동료들 [영어로 룸메이트라면 간단하지만 좋은 우리 말을 쓰려고 ...사실 제형님이 한글운동하시거랑요] 인데 그사람들 이 야기를 하고 모자른 두명도 교육받은 그곳에서 어떻게 조달해 보겠읍 니다.
1.인천의 S과장
30대 후반의 이양반은 최초로 그곳에서 만난 사람으로 방을 배정받고 내짐을 정리하고 있을즈음 들어와 인사를 나눴다. "7개월동안 병원에 있다가 두달간 요양하고 회사나가니 교육가라고 해 서 들어 왔읍니다. 새로운 부서로 전보되어 업무도 배울겸 해서 들어 왔어요."
저녁에 들어본 이양반의 최근 인생 경험담 정확히 9개월전 그는 그가 가지고 있는 승용차로 교차로에서 좌회전을 하려고 천천히 돌아가는 순간 과속으로 달려오던 버스에 받쳐 정신을 잃고 보름만에 정신을 차려보니 병원이었댄다. 그런 자신의 신세를 깨닫는 순간 눈에는 소리없는 눈물이 병원의베게를 매일 적시는 날이 게속 되었읍니다. 매일 손수건을 꺼내는 아내는 남편이 생명만 부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 하다며 자기가 삶의 용 기를 잃지않도록 계속 노력 해준 덕분에 그도 다시 한번 살아보겠다고 힘을 얻었읍니다. 그리고 사람의 운명이 이렇게도 쉽게 변하는 구나를 느꼈답니다. 그동안 그는 시골에서 태어나 그저 자신의 주어진 환경에 최선을 다한 그의 생활, 군대생활을 더한 20 년을 한직장에서 근무하면서 고등학교뿐인 학력을 성실함 하나로 일한 덕에 과장까지 승진하며 살아온 그는 결혼도 일찍하여 중학생인 아들 하나를 키우며 마누라와 그럭저럭 행복한 생활을 해왔는데.... 그에게 남은 것은 교통사고 후휴증으로 받은 1억이 조금 넘는 돈과 약 해진 육체 그리고 직장에서의 전보발령이었읍니다. 사고전 90킬로 몸무게가 60킬로로 줄어들고 좋아하던 밤낚시를 즐길수 없는 허약한 육체가 바로 현실이었읍니다. 내가 그에게 해줄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읍니다. "용기를 잃지말고 열심히 살아가야 합니다. 새로 태어났다고 생각하고 매일 편한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2.부산의 J 대리 자동차 부품을 생산하는 업체에 근무하는 그는 30대 초반의 활력이 넘 치는 X세대의 사원이었읍니다. 국민학교 교사인 집사람과 아들하나를 낳아 처가에서 거의 키워주며 두 사람은 열심히 저축하여 부산에 30평정도의 아파트도 마련했다며 그저 회사일에 정신없이 매달리다 보면 뒷골이 땡낀다면서 마음편한 직업을 찾고 싶어했읍니다. 대기업에 납품하는 중소기업의 애로사항을 다음과 같이 표현할땐 나도 똑같은 생각을 하였읍니다. "100PPM [PARTS PER MILLION]운동하라하여 이래저래 힘들게 노력해놓으 면 원가절감이 ?┳렝릿? 대기업인 H자동차회사는 가격을 내리랜다. 그래서 가격을 안내릴수 없고 자기네들은 노사분규로 문제생기면 급료만 자기네들 종업원 올려놓고 그 부담은 납품하는 중소기업이 떠맡으니 어디 중소기업에서 근무할 기 분이 나겠어요?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 [참고;100PPM이란 백만개중에 불량품 100개란 뜻임]
3.춘천의 Y 공장장 30대 중반의 나이에 화장품을 생산하는 중소기업 공장장의 책임을 맡고 있는 그는 사장과 잘아는 친인척사이로 느꼈졌다. 대기업에 OEM으로 화장품을 납품한댄다. [참고 OEM이란 주문자 상표생산] 회사에 책임을 갖고있어서인지 자사의 선전과 의욕이 대단함을 느꼈다. 그리고 화장품에 대한 그의 의견 "여성들이 많이 사용하는 화장품에는 여러가지의 색소와 화합으로 이뤄 집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각각 특색있는 화장품을 써야합니다. 외제 화 장품이라서 좋은 건 절대아닙니다. 오히려 잘못쓰면 부작용이 와서 고생 많이 하게되죠. 그리고 한가지 특색있는 이야기를 한다면 고등학생들 을 처음 화장품 접할때 무슨 화장품을 쓰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무슨얘기냐하면 고등학교때 처음쓴 화장품이 평생 그화장품을 쓰게 만 듭니다. 피부란게 묘해서 한번 접한 화장품을 고등학생들의 연한 피부 에 몇일 바르다 보면 그화장품에 맞도록 피부성질이 변하게 됩니다. 처음 그화장품 외에는 다른 화장품을 쓰게되면 그때부터 부작용이 생 기게 됩니다. 그래서 화장품 을 처음 쓰게되는 고등학생들이 대부분 엄마화장품을 몰래 쓰다보면 엄 마가 쓰는 화장품외에는 부작용이 생기게 되어 있읍니다. 그리고 화장 품의 제조과정을 잘아는 사람은 화장품을 안씁니다." 그때서 내의문이 한가지 풀렸읍니다. 화장을 안하는 여의사를 나는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의학적 관점에서 보면 화장을 전혀 안하는게 오히려 피부를 보호하는지도 모르겠읍니다. 그래서 화장에 아직 입문하지 않은 숙녀 초년생들 참고 하세요.
4.경주의 B과장
우리교육받을때 학생장인 그는 30대 초반으 젊은 사원 패기가 만만한 그는 지방의 자동차 부품업체에 근무합니다. 5일 교육받는 동안 그의 역할은 교수가 들어오면 차렷 경레 하는것과 이것 저것 전달사항 전해주는게 그의 임무이지요. 한번 체육시간을 갖고 잔디밭구장에서 오랜만에 뛰어본 우리는 한번 더 그맛을 보고 싶어 다음날 오후시간 한시간을 빼 축구한번 더 차기 로 하고 교수 꼬시기 작전에 들어갔읍니다. 한교수가 4시간 연속하기 때문 에 한시간만 빼보기로하고 계속 음료수 가장좋은것을 수업시작전 갖다 놓으면서 조르기 시작했읍니다. 그리고 드디어 한번 해보기로 한다는 교수의 긍정적인 얘기를 듣고 모두 어린아이처럼 와~하고 박수를 쳐댔읍니다. 역시 교육받는 사람은 나이가 40을 먹었건 50을 먹었건 얘들처럼 되 는걸 느꼈읍니다. 단숨에 일금 5000원씩 걷어 분단별 2개팀 11명씩 딱맞아 떨어졌읍니다. 그리고 잠실운동장보다도 잔디를 잘까꾼 운동장에서 40분간 몸사려가며 뛰어 보았읍니다. 운동을 안하다 해보니 나도 이제 20대의 힘이 철철 넘치는 상대에게는 열바짝도 못쫏아 가겠더군요. 조기축구회라도 꼭 해야지 하는 마음 입니다.
5.일본의 나가무라 계장
교육가서 또 일본사람들과 대담할 기회가 있었읍니다. 일본말 할줄아는사람을 찾아 가보니 그곳을 방문해온 일본회사원 10여 명과 마주 앉아 그들과 각회사의 여려가지 문제를 대담하는 자리였읍 니다. 나와 마주 앉은 나가무라 계장은 50대 초반의 남자인데 아직 계장이더군요. 규모는 우리회사정도의 회사인데 역시 그들은 한번들어 간 직장이 평생직장 입니다. 싫으나 좋으나 완전히 정년퇴직때까지 그 회사에 근무하는게 그들의 생리입니다. 미리 자기가 할말을 노트에 다기록해서 가지고 온 그의 준비성에 참 꼼꼼한 친구란걸 느꼈읍니다. 그리고 한국에 처음 방문해본 그의 한국 첫인상은 "자동차가 참 많이 정체 됩니다. 한국의 운전사들의 요리조리 빠져 나가는 모습은 정말 위험 천만 이더군요. 사고가 안나는지 모르겠어 요. 정체안되는곳은 왜그리들 빨리 달리는지 조금 이해가 안됩니다. 그리고 건물들이 일본에 비해서 새건물이 많읍니다.한국이 일본보다 잘사는 것 아닙니까?" 역시 한국의 자동차 붐과 운전습관을 꼬집을때는 조금은 부끄러웠읍 니다. 그리고 너희는 무역적자가 그렇게 많은데 무슨 건물들을 그렇 게 뻔드르하게 짓느냐하는 소리로 들려읍니다. 그들이 입고 있는 옷으 로 보면 우리는 너무나 고급스럽워 읍니다.
이상이 최근에 만나본 특색있는 몇사람 이었읍니다. 그중에서도 자동차 사고를 당한 인천의 S과장을 태우고 버스터미널에 내려주고 혜어질때 나는 그의 손을 꼭 잡고 다시한번 얘기했읍니다. "용기를 잃으면 안됩니다. 꼭 힘을 내시고 생각나면 전화해요.가끔 연락하며 삽시다" 터미날에서 나의 지나가는 모습을 끝까지 쳐다보고 있는 그를 나는 룸미러를 통해 보면서 코끝이 찡해옴을 느꼈읍니다. 그리고 이놈의 자동차가 문명이 이기인지 흉기인지 잘들 다루어야겠 다고 생각했읍니다.
첫댓글상기글은 10년 인터넷이 없던 시기...제가 하이텔에 글을 올리고 있었는데.. 통신하는 사람이 청년들이라 젊은 청년들에세 뭔가 느낌이 가는 글을 쓰고 싶어...그때 아버님의 자선전을 쓴글을 옮긴 것이고 다음글은 지금처럼 언암에 글올리듯...일상생활하면서 올린글입니다. 옛날 글을 읽으니 새론 기분이 드는군요.
첫댓글 상기글은 10년 인터넷이 없던 시기...제가 하이텔에 글을 올리고 있었는데.. 통신하는 사람이 청년들이라 젊은 청년들에세 뭔가 느낌이 가는 글을 쓰고 싶어...그때 아버님의 자선전을 쓴글을 옮긴 것이고 다음글은 지금처럼 언암에 글올리듯...일상생활하면서 올린글입니다. 옛날 글을 읽으니 새론 기분이 드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