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도전이다.
건설현장에서 최하의 막노동을 하다 보니 성공을 해야겠다는 오기가 발동을 한다.
그래 내가 맨날 말단에서 허덕이고만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성공을 한단 말인가?
나는 머리로 벌어먹고 살 놈이 아니라 몸으로 벌어먹고 살 놈이니 기술을 배워야 한다.
인천 경인에너지 [현, 현대정유] 발전소와 정유공장의 1차, 2차 건설공사를 약 4년간 해야 하는데, 당시엔 한국이 기술이 빈약해 미국의 건설회사에서 건설을 맡아 일을 하게 되었다.
미국의 [후로] 라고 하는 회사인데 나는 마치 호로 자식, 사촌쯤 되는 회사인줄 알았다.
[후로] 라고 하면, 후레자식, 후레달놈, 후미로 밀려날 놈, 후미지다. 아무리 더듬어 봐도 6.25 전쟁 후 우리나라를 많이 도와준 나라의 한 건설회사 이름으로서는 좀 맡지 않는 회사의 이름이다.
그 회사가 와서 건설을 맡은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는 기술자들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그 회사가 와서 많은 기능공들을 양성하면서 건설을 하게 되었다.
급여를 주면서 가르쳐 써먹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많은 기술 중에 어떤 기술을 배워야 급여를 제일 많이 받는가? 하고 탐색을 하였다.
수 백 가지의 기능공 중에 어떤 기술을 배워야 최고의 대우를 받는가 하고 탐색을 하다 보니, 용케 1급 비밀인 급여의 매뉴얼을 알게 된 것이다.
매뉴얼엔 수 백 가지의 직종 중에 중장비 크레인 기사의 급여를 제일 많이 지불한다고 쓰여 있었다.
중장비도 불도저, 페로이다, 포크렌, 지게차 등등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크레인이 제일 많이 지불한다는 규정이 정해져 있는 것이다.
왜 크레인이 제일 금여가 많은가? 하고 알아보았다.
다른 장비들은 여러 기능공들과 비슷비슷한데, 크레인만큼은 작은 장비부터 큰 장비로 올라가면서 헤비급까지 있다고 한다.
20톤, 30톤, 50톤, 100톤, 200톤, 300톤, 등등으로 장비가 있는데, 큰 장비를 운전하려면 당연히 급여지급의 기준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100톤 이하는 다른 기능공들과 비슷한 반면, 100톤 이상은 헤비급으로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올치 나는 무조건 크레인을 배운다.
사람이 이왕 직업전선으로 뛰어들려면 최고로 알아주는 기술을 배워 최고의 대우를 받아야지, 맨날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는다는 것은 나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타고난 욕심으로 무조건 크레인 조수로 들어가 기름을 무치고 기름강아지가 되어 기술을 배우게 되었다.
육지에서 섬으로 둑을 쌓아 길을 내고 섬에다 공장을 짓는데. 출근을 하려면 출퇴근 신간 외엔 버스들이 없었다.
그래서 기술을 배우기 위해 새벽 일찍 캄캄할 때 약 8킬로 정도인 현장으로 뛰어가서, 운전사가 오기 전에 미리 장비에 시동을 걸고 운전을 배우는 것이다.
낮에는 건설 일을 하느라고 바쁜데 잘못하여 양 코쟁이들 눈에 걸렸다 하면 그야말로 당장 모가지가 잘리고 만다.
그러니 남몰래 배우느라고 새벽 일찍 출근을 하여 배우고, 낮에 점심시간에 모두들 구석구석마다 모여 앉아 졸기도 하고 이야기들을 하는데 나는 혼자서 기술을 배우는 것이다.
사나이 이왕 몸을 담았으니 악바리로 악착같이 해보자.
최선을 다해서 남보다 더 노력을 해보자고 그야말로 눈곱 띨 시간도 없이 기름강아지 노릇을 하였었다.
당시엔 학원도 없었고 각자가 알아서 책방에서 책을 사다가 공부를 했다.
1년에 한번 씩 시험이 있는 자격증을 따려고 우리 회사에서 40영명이 시험장엘 가서 시험을 치렀는데, 나 하고 또 한사람과 두 명만 합격하여 자격증을 취득하였다.
그렇게 하다 보니 9개월 만에 수 십 여명의 조수들 중에 내가 제일 먼저 승진을 하였다.
운전사로 올라가니까 대번 급여가 몇 곱으로 올라가고 이젠 조수에서 조종사로 변한 것이다.
참고로 중장비 자격증엔 운전 면허증이 아니라 [중장비 조종사] 라는 자격증이 나온다.
인천에서 1차 2차 공사를 마치고 미국사람들은 미국으로 가고, 한국 사람들은 서로 각자가 직장을 찾아서 흩어지고 말았다.
그러데 2년 뒤에 인천에서 일하던 [후로] 회사가 여수에 세계에서 제일 큰 종합화학 공장을 맡아가지고 일을 하게 되었다고 그런다.
얼씨구절씨구 좋다. 나는 보따리를 열차에 싣고, 잘 ~있거라~ 나는~ 간~ 다.~ 이별에~ 말~ 도 없이 ~떠나가는~ 새벽열차~ 인천 발~영시~ 오십분, 이렇게 노래를 불러가며 각시와 아들 하나를 데리고 여수로 내려와 양 코쟁이 들과 만났다.
뉴맨 이라고 인천에서 우리들을 지도하던 중장비 책임자를 만났는데, 나를 보더니 키가 은진미륵같이 큰데다가 코는 세 뼘 정도나 되고, 손등에 털이 북슬북슬한 손으로 나의 손을 잡고 한참을 흔들어 댄다.
그런데 미국사람들은 손이고, 얼굴이고, 가슴이고 무슨 놈의 털들이 그렇게 많은지 알 수가 없다.
고기를 먹으려면 털이나 뽑고 먹든지 말든지 하지, 털도 뽑지 않고 그냥 통째로 먹는지 온몸에 털이 많이 나는 모양이다.
미국으로 돌아간 2년 동안 고기를 털도 안 뽑고 얼마나 먹어댔는지 어쨌는지 털이 더 많은 난 것 같이 보인다.
털도 안 뽑고 고기를 먹는 민족들하고 같이 일을 하다 보니 노랑내도 나고 좀 고약할 때가 있다.
언제인가? 나는 그 친구들에게 한국에서 살려면 한국인처럼 털이 없어야 한다고 하고 뽑아보자고 하였다.
그냥은 잘 안 뽑힐 것 같아 가마솥에다 물을 끓여가지고 담갔다가 뽑자고 하였더니 그야말로 기절초풍을 하고 도망을 치는 것이다. ㅎㅎㅎㅎㅎ
그들은 또 한국에서 공사를 하여 돈을 벌어가려면 한국말을 배워가지고 대화를 해야 하는데, 한국말을 배우지 않고 꼭 통역을 불러다가 통역을 시키고 있는 것이다.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혀 꼬부라진 말을 하는 것을 보면 가관이다.
유럽에서 아메리카 대륙을 침약 할 때 원주민들을 개잡듯이 잡고, 그래서 지금도 심심하면 권총을 쏴대어 사람들을 많이 죽이는지 보도를 들어보면 깜짝 깜짝 놀라곤 한다.
그 이후로 나는 여수의 건설현장에서 중장비 조종사로 일을 하기 시작했고, 몇 년간 건설을 하면서, 자꾸만 헤비급에서 더 높은 헤비급으로 승급을 하면서 일을 하였다.
건설을 마무리 하고 미국인들을 가고 본 화학공장인 국영기업 직원을 채용한다는 대대적인 보도가 있었다.
1200여명의 직원을 몇 례에 걸쳐서 채용하는데, 나는 용케도 공개채용 첫 발령을 받게 되었다.
당시엔 헤비급으로 기술을 가지고 있는 인원들이 몇 명이 안 되었다.
나는 밑에서부터 차곡차곡 배워 올라가 헤비급으로 오라가 있으니, 그 공장에서 필요한 인원이 된 모양이었다.
본사의 감독관들이 현장에 다니면서 공사하는 3년 동안 필수 요원들을 점을 찍어놓은 모양이었다.
당시에 한국에 그렇게 큰 장비는 부산에 3대 여수에 한대뿐이 설치되지 않았었다.
부두에서 레일을 타고 다니며 일을 하는 800톤짜리 대형 장비인데, 아무나 함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때부터 나는 한국의 최고 기술자 대우를 받아가며 입사하여 정년퇴직을 할 때까지 그 장비를 다루고 일을 하였다.
장비의 몸체가 얼마나 크냐 하면 아파트 한 동 정도로 큰 장비인데, 혹시라도 실수를 하였다면 고치는 데만 수 십 억 원씩이나 들어가는 장비다.
그리고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폭풍이나 태풍이 불어댈 때 엔 조금이라도 허술하게 하였다가는, 1백 억 원 이상 나가는 중장비에 큰 손실을 줄 수가 있다.
너무나 거대한 장비라서 운전석이 지상 70미터 상공에 있다.
그렇게 거대한 장비를 움직여가며 하루에도 몇 번씩 마치 영도다리를 들어서 올렸다 내렸다 하듯, 그 중장비를 접고 이동하여 다시 펴고 하면서 일을 하였었다.
장비도 크고 일도 중요하니까 당연히 대우도 좋아, 당시 보통 기술자들보다 훨씬 많은 대우를 받아가며 일을 하였다.
지금은 사람들이 많이 배우고 전국에 장비들도 많이 설치되어 별로 알아주지 않는 직종이 되어버렸다.
그래, 인생은 도전이다.
나의 목표를 기능공 최고의 헤비급으로 정하고, 자나 깨나 오직 내 목표인 최고의 대우를 받으려고 노한 끝에 기어코 나는 목표를 달성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지금 무슨 자랑을 하려고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
누구든지 이를 악물고 어떠한 일이든 해내고 말겠다는 도전의식을 가지고 한다면, 못해낼 일이 하나도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