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 론
2001년 최고의 화제가 된 드라마 '피아노'로 조재현은 늦은 나이에 일약 스타덤에 오를 수 있었고 하반기 연기 대상에서 최우수조연상을 받았다. 이후 김기덕 감독의 '나쁜 남자'라는 영화에 캐스팅 되면서 사람들의 관심은 조재현이 출연하는 '나쁜 남자'에 자연스럽게 전이되었다. 그것은 곧 영화의 흥행으로 이어졌고 흥행작이라고 하기에는 정말 이례적인 소재를 가진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충격적인 영상과 말도 안되는 설정은 아직까지도 마지막 장면이 생생하게 기억될 만큼 나에게 너무나도 크게 작용했던 영화였다.
나쁜남자가 상식적이고 좋은 영화의 취지로 만들어졌을까? 그것은 아니다. 이 영화의 매력을 제대로 찾기 위해서는 왜 구태여 그런 인간구도를 만들었는지, 그런 설정에서 감독은 뭘 표현하고 싶었는지, 묘한 설정들에서 이 영화의 매력은 정말 어디에 있는 것인지를 찾아야 한다. 다시말해 상식에 얽매이지 말고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지, 어떤 느낌을 껴안은 영화인지 포인트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어찌보면 이 영화는 이성과 감성 모두를 충분히 화나게 하는 영화일 수도 있는 것 같다. '샤만카' 같은 영화는 여성에게서 이성을 없애고 성에만 반응하는 일종의 짐승같은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굉장한 문제작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 작품은 나름대로 예술적 가치가 느껴지기도 하고 난폭하지만 완성도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 영화 보는 내내 끔찍했는지도..) 정말 끔찍한 영화이지만 어찌보면 감독의 상상력에서 출발한 일종의 시도이고 실험이었다.
'나쁜 남자'의 경우도 남자주인공에게서 '성'의 윤리를 제거한 일종의 실험적인 설정이다. 실제 그런 남자가 있다면 정말 끔찍하다. '나쁜 남자'의 가장 큰 특징은 성과 사랑이 일체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의 성을 직업으로 따로 떼어놓는다는 것이다. 정말 비상식적인 설정이다. 하지만 시도와 실험에서 오는 비정상적임.
영화를 보는 동안 일종의 갈등과 내 상식에 자꾸 분노를 일으키는 심리가 계속되어서 여운이 굉장히 찝찝하고 기분 나쁘고 또 묘하지만 영화의 다양성을 경험하기엔 나름대로 재미있었던 영화였다.
도덕적 역겨움과 도덕적 행위 주체... 본고가 영화평이나 감상문의 형식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긴 하지만 정말 어려운 질문이 아닐 수 없다.
도덕적 역겨움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비도덕적 행위라고 할 수 있고 그것은 곧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상식적이고 기본적인 도덕 윤리에서 벗어난 행동이나 행위라고 정의해 보자.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도덕적 역겨움의 시작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도덕적 역겨움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나쁜 남자'의 간단한 줄거리를 알아보고 주인공 '한기'와 '선화'의 역할이 가져다 주는 도덕적 역겨움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한다.
Ⅱ. '나쁜 남자' - 나의 애인 창녀 만들기
사창가 깡패 두목인 한기는 여대생 선화에게 매혹 당하지만, 그녀의 차디찬 경멸에 강제 키스로 응답한다. 그리고 심한 모욕을 당한 한기는 복수심과 소유욕에 불타서 선화를 창녀로 만들 계략을 실행한다. 계략에 말려들어 창녀가 된 선화의 방 거울은 밀실의 유리와 연결되어, 한기는 밀실을 통해서 매일 밤 서서히 창녀로 변해가는 선화를 지켜본다.
치욕과 공포에 찌들어가는 선화를 지켜보면서 한기는 이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한 자괴감을 느낀다. 선화는 그녀를 좋아하는 한기의 부하 명수로 인해 한기의 계략에 대해 듣게 되고, 명수를 이용해서 창녀촌을 탈출할 기회를 얻는다. 그러나 그녀는 집 앞에서 한기에게 잡혀 창녀촌으로 끌려온다.
창녀촌의 일상에 젖은 선화가 자신의 주위를 맴도는 한기를 밀어내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있을 즈음 한기는 숙적인 달수파의 공격을 받는다. 한기 부하인 정태는 이에 대한 복수로 달수를 죽이지만 한기가 정태를 대신해 사형 선고를 받는다.
뜻밖에도 선화는 한기에게 죽어서는 안된다고 절규하고, 이것을 본 정태가 자수를 하는 바람에 한기는 감옥에서 풀려난다. 한기는 선화를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보낸다. 그러나 둘은 바닷가에서 재회한다. 한기는 트럭을 타고 다니며 자기의 여자를 다른 남자에게 판다. 두 사람이 탄 빨간 트럭이 바닷가 마을을 벗어나 또 다른 운명의 공간을 찾는다.
Ⅲ. 도덕적 역겨움 1. - 사랑과 성(性)의 분리
서론에서도 잠시 다루었듯이 '나쁜 남자'에서 가장 큰 특징이자 모티브가 되는 것이 사랑과 성(性)의 분리이다. 이것이 곧 도덕적 역겨움의 해답이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동방예의지국이라하여 유교사상에 입각한 도덕을 중요시하여 왔다. 하지만 옛날에도 성의 윤리에 있어서 도덕적 역겨움의 실체를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대를 잇는다는 목적으로 씨받이 같은 것이 있었고 한 번도 보지 못한 상대방을 배우자로 맞이하여 살아가야 했던 경우도 많았다.
비록 그 때 당시에는 그런 행위들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지만 '나쁜 남자'에서 얘기하고자 하는 도덕적 역겨움을 설명하자면 그러한 시대적 상황이라든지 배경 자체가 중요하게 작용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그런 면에서 김기덕 감독은 현 시대에 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인간들의 도덕적 윤리의식의 부재를 고발하고자 한 것은 아닐까?
분명 '한기'는 '선화'를 사랑하는 것 같다. 아니 사랑한다. 하지만 '한기'의 사랑법은 매우 특이하다. '선화'를 사창가의 여자로 만들어 버리고 '선화'를 훔쳐보는 것이 그것이다. 이 과정에서 절대적인 원칙은 폭력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폭력에 저항하지만 결국 그것에 길들여지는 것 또한 인간이다. 그러한 복잡한 인간의 정서, 즉 전혀 도덕적이지 못한 것을 스크린에 펼쳐 놓았다.
직접적인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지만 그러한 덫을 놓은 것도 폭력이다.
'한기'는 자신이 사랑한다는 여자를 왜 다른 남자들에게 몸을 팔게 함으로써 자신의 여자로 만드는 것일까?
이 질문에는 정확한 답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지만, 이 질문 자체가 도덕적 역겨움의 실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Ⅳ. 도덕적 역겨움 2. - 이상세계로의 탈출시도 부재
소제목이 거창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극중 '선화'는 한 번의 탈출을 시도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늘의 일상에 젖게 된다. 더 이상의 반항도 저항도 없다. 나중에는 결국 '한기'에게 어떤 묘한 감정까지 느끼게 된다.
'한기'와 '선화'는 각각 자신의 행동이 도덕적으로 또는 상식적으로 가능한 행동인지 전혀 느끼지 못한다. 다만 그것에 차츰 길들여질 뿐이다. 영화 자체에서 그러한 설정을 배제시켰다. 이상세계로의 탈출이나 구원의 모습은 전혀 찾을 수 없다. 그렇게 함으로 인해 관객들로 하여금 마지막까지 도덕적 역겨움을 유도해 낸다.
마지막 장면이 다시금 떠오른다.
빨간색 천막을 친 한 대의 트럭 안에서 아무런 말도 없는 하지만 전혀 불행해 보이지도 않는 두 사람. '한기'는 어느 해변에 차를 세우고 낯선 남자에게 돈을 받는다. '선화'는 자연스럽게 낯선 남자와 함께 천막 안으로 들어간다. 그동안 '한기'는 담배 한 개비를 피운다. '한기'와 '선화'는 또다시 다른 곳으로 운명을 향해 떠난다.
개인적으로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던 장면이었다. 내가 상상하고 있던 영화의 막바지 이야기는 '한기'와 '선화'는 진정한 사랑을 깨닫고 행복하게 잘 살다가 '한기'는 결국 말을 할 수 있게 되는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나쁜 남자'는 끝까지 그런 상상을 등진다. 영화의 어디에도 이상세계로 탈출하려는 흔적이 없다. 그래서 '나쁜 남자'를 싫어하는 관객들은 더욱더 그 영화에 대해 수치심을 표현하고 분노하는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한 감독에 따르면 《최근 한국 영화는 여성의 육체와 심리를 직접적으로 공격하고 훼손함으로써 여성에게서 자아 및 자율성, 자기 존중감을 박탈하고 있다고 한다. 그 극단에 바로 김기덕 감독의 영화들, 특히 ‘나쁜 남자’가 존재한다고 하는데 ‘나쁜 남자’ 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이 등장하는 것 때문에 나쁘다 고는 보지 않고 그 폭력이 어떤 맥락에서, 어떤 방식으로 작용하며, 결국은 어떤 정치적 효과를 갖는가를 말한다.
김기덕 감독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나쁜 남자'에서도 밑바닥 인생을 사는 아웃사이더 남성의 분노는 여성에게 집중된다. 협박, 구타, 강간 등을 포함해 그녀에 대한 폭력적 지배는 그에게 보상과 치유, 자기 확증을 가져주면서 나쁜 남자의 ‘자기 완성’ 과 평범한 여성의 ‘자기 절멸’ 의 이야기를 반복한다.
영화에서 남성의 우월성과 힘은 오로지 남성이라는 사실, 즉 ‘페니스’ 에서 나올 뿐이다. 즉 이 영화에는 현실에서 절대 용납될 수 없는 ‘페니스 파시즘’ 이 ‘예술’ 이라는 이름으로 소통되고 있는 셈이다.
‘운명’ 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되는 ‘나쁜 남자’ 속의 ‘기이한 사랑’은 아주 교묘한 메시지를 반복하고 있다. 그 메시지는 바로 여성의 성의 본질은 ‘창녀’라는 역할에서 구현되고 여성은 그 사실을 받아들일 때 구원된다는 것이다. 또 그런 모든 과정이 한 여성에 대한 한 남성의 깊은 이해와 사랑의 구현이라는 메시지도 관객들에게 강요하고 있다. 달리말해 이 영화는 여성에 대해 어떤 성찰도 없는, 한 남성의 무책임한 사회적 배설 행위일 뿐이다. 한국 사회에서 이런 영화가 존재하고 소통된다는 사실 자체가 여성에 대한 위협이고 어떤 이유에서든 이 영화를 지지하는 행위는 여성들에 대한 모욕일 뿐이다.》 이렇게 말할 정도였고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본 한 여성 관객은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나쁜 남자' 포스터를 갈기갈기 찢었다고 한다.
아무튼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의 시놉시스에서 도덕적 역겨움은 계속 이어졌고 더 큰 충격은 도덕적 역겨움을 탈피하려는 의도가 없었다는 것 자체에서도 도덕적 역겨움을 찾을 수 있었다고 말하고 싶다.
Ⅴ. 결 론
이 영화를 좋은 영화라고 표현한 사람도 적지 않다.
나는 여주인공을 창녀로 설정했다는 것 자체가 비판의 표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문제는 '소재 자체가 아니라 그 소재를 어떻게 형상화할 것인가?'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소재적 측면해서만 바라본다면 아무 것도 얻어낼 게 없다. 요컨대 김기덕 감독은 ‘나쁜 남자’를 통해 매매춘에 대한 인류학적 내지는 사회학적 보고서를 쓸 의도는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감독은 ‘플라토닉 러브’ 라는 거창한 관념이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는 몸과 몸의 부대낌 속에서 '몸과 마음의 합일가능성' 즉 위에서도 얘기한 '사랑과 성(성)의 합일가능성'을 추구하고 있는 것 같다. 진실하고도 지독한 사랑의 가능성 말이다. 그렇다면 이는 역설적으로 소재의 승화가 아닌가?
영화 자체가 도덕적 역겨움의 대상은 아니다. 하지만 영화의 소재는 분명히 내가 말하고자 하는 도덕적 역겨움을 내포한다.
성(性)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고 가장 중요한 것이다.
자본주의, 상업주의의 발달과 고속 경제성장으로 인한 폐단이라고도 할 수 있는 우리나라 접대문화나 성문화에서 점차 도덕적 질서가 사라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이 영화를 보고 소재에서 문제를 찾지 말고 시야를 넓혀 우리 시대가 가져다 주는 도덕적 질서에 대한 파괴를 한번 생각해 보고 우리를 다시 한번 되돌아 보고 깨달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