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슨 본이 돌아왔다.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세계를 헤매 다니던 이 남자, 처음엔 별로 매력적인 줄도 모르겠더니 어느 순간 세계가 기다리는 반영웅(Anti-Hero)이 됐다. 자신의 근원을 찾겠다며 그 난리더니, 이번엔 아예 CIA 본부로 쳐들어가 최후통첩을 날린다. 도대체 어떻게 촬영을 한 건가 싶은 장면이 줄을 잇고, 아드레날린이 미친 듯이 분비되더니 마침내 모비(Moby)의 엔딩타이틀곡 Extreme Ways가 들리는 순간, 심장근육이 오그라졌다 펴지는 기분을 느끼고 말았다. 세상에! 첨단무기 하나 안 나오고, 건물 하나 날려먹지 않았는데, 변신로봇이나 이무기가 나와서 도시를 헤집은 것도 아닌데, 이렇게 경탄스러워도 되는 건가! 이거 완전 반칙 아냐? 그러나 영화를 곰곰 돌이켜 볼수록, 미국에서 개봉한지 3일 만에 손익분기점을 넘길 만큼 관객을 동원했다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렇다. 대체 누가 그를, 이 영화 <본 얼티메이텀>을 외면할 수 있겠는가.
기억을 잃은 스파이, 그 흥미로운 시작
알려져 있다시피 본 시리즈 <본 아이덴티티> <본 슈프리머시> <본 얼티메이텀>의 출발점은 소설가 로버트 러들럼(Robert Ludlrum)이다. 1927년 뉴욕에서 태어나 시리즈의 첫 영화 <본 아이덴티티>가 만들어지던 2001년 플로리다에서 세상을 뜬 그는 바로 이 독특한 스파이시리즈로 톰 클랜시 뺨치는 인기를 누렸다. 과거의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스파이라는 독특한 설정에서 출발한 소설 본 시리즈는 하드보일드한 스타일과 자신의 정체성에 집착하는 스파이의 위기와 극복이라는 흥미로운 이야기로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이채롭게도 그 출발은 1800년대 후반을 살았던 한 남자의 이야기다. 로드아일랜드에 살고 있던 안젤 본(Ansel Bourne)이라는 이름의 목사가 그 주인공. 어느 날 기억을 잃은 뒤 불면증과 정체성 혼란에 시달리던 이 남자는 결국 1887년 펜실베이니아로 이주, 상점을 연 뒤 브라운(Brown)이라는 새 이름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러나 3개월 뒤, 본으로 살던 기억이 돌아왔고 아이러니하게도 브라운으로 살았던 기억을 잃었다. 본이자 브라운이었던 이 남자는 대체 왜 자신이 펜실베이니아에 살고 있는지를 알 수 없었고 덕분에 또 한 번 괴로워해야 했는데, 이 흥미로운 이야기가 로버트 러들럼의 주의를 끈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기억을 잃은 스파이의 놀라운 이야기가 세상에 태어났다.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당연히 영화화를 하고 싶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 사람 또한 많았다.
유쾌한 할리우드 보이, 전설의 문을 열다
소설 <본 아이덴티티>의 영화화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은 다름 아닌 감독 덕 라이먼이다. 경비행기 조종사 자격증을 갖고 있던 그는 어느날 밤 러들럼이 칩거하고 있던 글라시에 국립공원까지 비행기를 몰고 갔다. 그리고 이 작품을 영화화할 수만 있다면 어떤 일이라도 하겠다며 러들럼을 설득한다. 한 밤중에 비행기를 몰고 온 이 할리우드 보이(러들럼이 라이먼을 가리켜 붙여준 애칭)의 정성에 러들럼은 판권을 넘겼고, 덕 라이먼은 그 즉시 유니버설을 찾아가 자신의 비전을 보여준 뒤 영화화에 착수한다. 작업은 순조로워 보였다. 그러나 제이슨 본 역할을 제의받았던 최초의 배우 브래드 피트가 <스파이 게임>을 이유로 고사를 하고, 제작이 지연되면서 음악감독이 카터 버웰(Carter Burwell)에서 존 파웰(John Powell)로 바뀌는 등 우여곡절을 겪는다. 피트의 고사 뒤, 데뷔 이래 하버드 출신이라는 지적인 이미지에 매여 있던 맷 데이먼이 주인공 제이슨 본을 흔쾌히 맡고, <롤라 런>을 인상 깊게 본 덕 라이먼의 뜻에 따라 상대역에 독일 최고의 여배우 프란카 포텐테를 섭외하는 등 영화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지만, 문제는 또 있었다. 여러 가지 일정의 지연으로 개봉이 늦춰지더니, 심지어는 맷 데이먼이 목소리를 연기한 <스피릿>과 개봉이 겹친다는 이유로 스튜디오가 반대의사를 표명, 결국 2002년 6월 14일에야 영화 <본 아이덴티티>는 관객을 만날 수 있었다.
흥미롭지만 평범한 영화, 새로운 임자를 만나다
마침내 뚜껑을 연 영화 <본 아이덴티티>는 흥미로운 스파이 스릴러였다. 기억을 잃은 채 누구에게 쫓기는지도 모른 채 도망쳐야 하는 제이슨 본은 지적이고 겸손하면서도 매우 단호한,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스파이 캐릭터였고, 스파이물의 정석에 충실한 영화에는 첨단무기나 대단한 미인이 등장하지 않았지만 충분히 흥미진진했다. 맷 데이먼은 여전히 하버드 딱지를 등에 달고 있는 듯 보였지만, 제이슨 본은 액션영웅보다는 고뇌하는 반영웅에 가까웠던 탓에 큰 무리는 없었다. 원작을 읽지 않고 덕 라이먼의 설명에 따라 쓰여졌다는 토니 길로이의 각본 또한 비교적 탄탄했다. 킥복싱과 가라데를 섞은 액션은 시원스러웠고 자동차 추격씬이나 원거리 저격과 같은 장르 특유의 볼거리도 쏠쏠했다. 미국 평단에서는 호의적 평가가 쏟아졌고 관객 반응 또한 좋았다. 그러나 영화 <본 아이덴티티>는 흥미로웠을 뿐 대단한 작품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스파이 스릴러의 공식을 적절히 활용한 영화적 구성은 썩 훌륭한 편이었지만 걸작이라 평가할 만큼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 것은 아니었다. 꽤 재미있고 볼 만한 첩보액션스릴러. 그것이 <본 아이덴티티>에게 최종적으로 부여된 평가였다. 이야기 구성은 기본적으로 탄탄한 편이었지만, 타이트한 스릴러적 리듬 안에서 멜로가 다소 어정쩡해 보인다는 평가도 있었다. 타이틀 롤을 맡았던 맷 데이먼은 속편에는 출연하지 않겠다며 흥행성적에 고무된 제작진과 스튜디오에 찬물을 뿌렸고, 그렇게 시리즈는 종결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상황은 곧 180도 달라졌다. 영국 출신 감독 폴 그린그래스가 속편의 연출자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그와 함께라면!” 맷 데이먼은 당장에 속편 출연으로 입장을 바꾸었다.
속설을 뒤집고 다시 태어난 시리즈
영화 <블러디 선데이>로 2002년 베를린 영화제 금곰상과 선댄스 영화제 관객상을 거머쥔 감독 폴 그린그래스. 그 어떤 재연이나 다큐멘터리보다 실감 넘치는 이야기와 현장감 가득한 카메라, 그리고 빈틈이나 군더더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편집으로 1972년 1월의 아일랜드 데리 시(市)로 관객을 끌고 들어갔던 그를, 할리우드가 탐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첫 할리우드 입성이 첩보액션스릴러가 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더구나 귤이 회수를 넘으면 탱자가 된다는 말처럼, 재능 넘치는 유럽(혹은 남미나 아시아) 출신 감독들이 할리우드로 가서 메가폰을 잡는 순간 이전의 번뜩이던 감각을 잃어버리고 망가진 전례가 한 둘이 아니었던지라, 그의 할리우드 진출에는 우려의 시선도 뒤따랐다. 그의 <본> 시리즈 합류소식은 그래서 놀라우면서도 불안한 일이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예외가 있다고 했던가. 모든 것은 기우였다. 2004년 여름 관객을 만난 <본 슈프리머시>는 전작 <본 아이덴티티>의 속편이었지만, 전혀 다른 영화였다. 폴 그린그래스는 <본 아이덴티티>가 고수했던 첩보스릴러의 전형적 패턴을 그대로 살리면서도 자신만의 스타일로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냈다. 이야기의 밀도는 더욱 높아졌으며 악몽과 상실에 직면한 본의 혼돈은 더욱 구체화되었다. 영화의 쇼트당 평균 길이 1.9초인 영화의 속도는 더욱 빨라졌으며, 핸드헬드로 찍은 대부분의 장면은 드라마의 긴장과 불안, 액션의 현장성을 더욱 증가시켰다. 제이슨 본은 이제 뉴스위크 하나만 쥐어줘도 적을 타격할 수 있는, 고뇌에 찬 반영웅인 동시에 멋드러진 액션영웅이었다. 맷 데이먼 등에 붙어있던 하버드 딱지는 떨어진지 오래였고, 무표정한 얼굴과 파격적인 액션의 묘한 불균형은 보는 이를 사로잡았다. 카메라는 본을 따라 춤추고, 그 사위에 관객은 어쩔 수 없이 놀아나야 했으니, ‘전편보다 나은 속편은 없다’는 영화계의 속설은 그렇게 뒤집혔다. 시리즈는 완전히 새로 태어났다.
스파이액션의 최후통첩, <본 얼티메이텀>
마침내, 시리즈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제이슨 본은 또 다시 돌아왔다. <본 얼티메이텀>이라는 제목을 달고 자신의 정체성의 근원에 기어이 접근하는 본의 활약은 매력적이다. 아니, 매력적이라는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사이 <플라이트 93>으로 또 한 번 관객을 쥐락펴락했던 폴 그린그래스의 연출내공은 또 한 번 일취월장했다. 카메라는 더욱 흔들리고, 영화의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군더더기란 찾을 수도 없고, 어느 장면 하나, 배역 하나도 허투루 넘길 수 없다. 러시아, 프랑스, 스페인, 모로코, 뉴욕 등지를 돌며 찍은 영화는 최근 주된 흐름을 형성했던 화려번쩍한 CG 액션에서 완전히 벗어나 주먹과 주먹, 몸과 몸이 부딪치는 스턴트 액션과 꽉 짜인 작품의 밀도만으로 승부를 건다. <본 슈프리머시>에서도 드러났던, 차라리 복고적인 액션 장면의 쾌감은 더욱 높아졌으며, 잘게 쪼개진, 그러나 마치 한 커트와도 같은 연속성을 보여주는 화면들 안에서 생생한 질감으로 관객의 심장을 바짝 조인다. 다양한 해외 로케이션은 이국적 풍취 제공이라는 양념 역할 외에도 장면과 이야기에 적합한 배경으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고 있으며, 여전히 무표정하지만 살인의 순간 드러나는 갈등어린 본의 얼굴은 매력 그 자체다. 첩보 영화 속에서 늘 당연시되던 국익이라는 가치가 자아를 찾고자 하는 제이슨 본의 거침없는 액션 앞에 도전받는 순간은 심지어 카타르시스마저 느껴진다. 타악 선율이 주가 된 영화의 스코어는 드라마가 가진 리듬감을 한껏 살려주고 있으며, 새로이 편곡된 모비의 주제가는 마지막 장면의 액션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면서 근래 가장 짜릿한 엔딩을 목격하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항공촬영과 핸드헬드가 공존하는 카메라 역시 대단하긴 마찬가지다. 감시와 통제를 은유하는 항공촬영 인서트의 효과적 활용은 물론이요, 아예 사람들 속으로 파고 들어간 카메라는 당장이라도 촬영 뒷이야기를 뒤져보고 싶을 만큼 보는 이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특히 인파가 넘쳐나는 워털루 역의 추격 및 저격 장면과 모로코의 옥상 추격전 및 화장실 격투 장면은 입이 떡 벌어질 정도다. 대체 어떻게 저런 장면을 찍은 거야?!
마술은 끝났지만, 경탄은 계속된다
지난 8월, <본 얼티메이텀>이 북미에서 개봉하자 평론가와 관객들은 일제히 열광했다. 겨우 개봉 3일 만에 제작비를 모두 회수하며 해당 주 개봉작 중 최고 수익을 올린 영화라는 기록을 남겼다. 정체성의 혼란이라는 사뭇 철학적인 주제를 다룬 영화가 남긴 기록이라 보기엔 기이하지만, 그 놀라운 액션장면들, 그리고 쉴 틈 없이 몰아치는 와중에도 밀도를 잃지 않는 드라마를 돌이켜 보면, 이상할 것 없는 결과다. 무엇보다 그 연출자가 폴 그린그래스라는 점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그는 할리우드에서도 자신의 재능과 장기를 유감없이 발휘했으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장르영화에 덧대는 작업을 통해 전형성과 새로움이 모두 살아있는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냈다. 그 결과, 자칫 평범할 뻔했던 시리즈는 걸작 액션 시리즈로 다시 태어났다. 심지어 <본 아이덴티티>에서 클라이브 오웬의 입을 통해 뇌까려지던 “우리를 봐. 그들이 우리에게 준 게 뭔지.”라는 대사는 본의 대사로 다시 태어나, 영화 내내 미스터리를 조장하는 블랙 브라이어와 함께 시리즈의 수미쌍관을 완성하는 역할마저 해낸다. 경탄할 만한 용의주도함 아닌가. 단연코, <본 얼티메이텀>은 올해 우수수 쏟아졌던 모든 3편들 중에 으뜸이며, 올해 개봉했던 액션영화 중에서도 최고라 할 만하다. 근래 이 정도로 심장이 두근거리게 만든 영화는 없었다. 아쉽게도 현재로서는 <본 얼티메이텀>을 끝으로 마술쇼는 더 이상 없다는 소식이다. 있는 대로 사람을 흥분시켜놓고 더는 없다고 하니 안타깝긴 하지만, 당분간 극장에 가면 그들을 만날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할 밖에. 게다가 관객의 심장을 쥐락펴락하던 폴 그린그래스도, 이지적이면서도 단호한 매력을 과시한 맷 데이먼도, 머지않은 언젠가 또 다른 얼굴을 하고 관객을 찾을 것이다. 벌써부터 그들의 새 얼굴이 궁금하다.
글_이지선 영화칼럼니스트(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