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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교회의 목회와 실제(20)
권징이란 무엇인가?① : 교회의 권징64)
벨직신앙고백서 제32조에 보면 교회의 질서와 권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교회를 다스리는 자들이 몸된 교회를 유지하기 위하여 어떤 질서를 세움이 유익하고 좋은 것일지라도 그들은 항상 우리의 유일하신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지를 살펴야 한다는 것을 믿습니다.65)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도입되어 어떤 방식으로든 양심을 속박하고 강요하는 모든 인간이 만든 고안물이나 규범들을 배격합니다.66) 우리는 오직 조화와 일치를 보존하고 증진시키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든 신자들을 지키기 위해 적합한 것만을 받아들입니다.67) 이 목적을 위하여 권징과 출교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시행되어야 합니다.68)” 벨직신앙고백서의 이런 방식으로 권징의 문제를 도입하는 것은 교회에 사활이 걸린 것이다. 본 신앙고백서에서 권징과 출교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시행되어야 한다고 했다. 참고 구절인 마태복음 16:19절에 “천국 열쇠”라는 성경적인 표현을 사용하면서, 본 신앙고벡서는 시작부터 몇 가지 중요한 사실들을 아주 명확하게 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교회의 권징 실행은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사도들에게 천국 열쇠를 주시고, 당신의 교회에서 반드시 사용하라고 요구하셨던 분은 바로 그리스도셨다. 만일 그 교회(특정한 지역 교회)가 참된 교회라고 한다면, 다시 말해서 신실한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이 권징이 반드시 실행해야 한다.
또, “천국 열쇠”라는 이 표현은 우리가 말하고 있는 이 권징이 세상에서 실행되는 것과는 크게 다르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시민정부는 나라의 법을 집행하기 위해서 물리적인 방편들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가 가지고 있는 열쇠들은 하늘에 속한 것이며, 또 그러하기에 영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단지 성령 하나님의 권징만을 실행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교회에 이 천국 열쇠를 주심으로 성령 하나님의 권징과 능력 하에 교회를 두셨다는 것이 분명하다. 이 사실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교회 위에 충만하게 부어지셨던 오순절 이래로 특별한 방식으로 분명하게 되었다. 교회를 자극하시고, 통제하시고 다스리실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며, 또 그 외에 어느 누구일 수 없다. 그러므로 주의 날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교회를 성령 하나님의 권징 하에 두셨다. 권징에는 그리스도의 말씀의 권징과 그리스도의 사랑의 권징이 있다.
I. 그리스도의 말씀의 권징
우리가 권징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 교인들의 가정을 방문하거나 공적인 공포를 하는, 또 가능한 그 다음 절차인 출교를 하는 장로들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죄와 전쟁하기 위해서 엄격한 규범들(stringent measures)을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단지 특정한 회원들이 이와 같은 종류의 권징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권징”이라는 단어가 지닌 진정한 의미에서 권징은 당회가 가담하기 오래 전에 시작한다는 것을 반드시 인식해야만 한다. 첫 번째 권징은 하나님 말씀의 권징 즉 강설이다. 그리고 이 권징(강설)은 몇몇 일부 회원들에게만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회원들에게 매주일 거듭 영향을 끼친다.
우리는 “권징”이라는 단어가 “가르치다” 혹은 “교훈하다”는 동사에서 나왔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권징을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서 관련된 용어인 “제자들(disciples)”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제자들”은 학습 과정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그리스도께서는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고 하셨다. 다시 말해서 “가르침과 강설을 통해서 모든 사람을 제자로 삼으라!”는 이 명령을 당신의 제자들에게 하셨다. 그러므로 천국의 첫 번째 열쇠는 참으로 복음의 강설이다. 성령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의 권징을 시행하는 것은 바로 복음 강설을 통해서이다. 전 교인들이 하나님의 강력한 말씀 아래 놓여 있다. 교회 전체가 이 말씀에 의해서 모여서 형성되고 인도받고 다스림을 받는다.
그렇다면 강설자의 과업을 생각해 보자. 강설자는 본질적으로 성령 하나님께 속한 교도관(disciplinarian)이다. 매주 반복해서 강설자는 주님의 길로 사람들을 교훈해야만 한다. 그는 반드시 말씀의 열쇠를 사용해야만 하며, 그리고 말씀의 열쇠로 천국의 문을 열고 닫아야 한다. 모든 강설이 거듭 시금석이 된다. 이 열쇠가 바르게 사용되고 있는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말씀에 의해서 권징을 받고, 즉 주님의 길로 가르침을 받고 있는가? 천국 열쇠로서 강설에 대한 이와 같은 이해는 강설자에게 분명한 요구들을 부과한다. 이제 이 사실은 목사가 강단에서 자신의 견해를 쏟아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한다. 왜냐하면 단지 하나님의 말씀만이 구속력이 있기(binding) 때문이다.
강설이 담대하고 명료해야만 한다는 것 또한 분명해졌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실수가 없고 분명하기 때문이다. 강설에는 항상 충실하고도 견실한 외침(ring)이 있어야 하고 또 절박한 호소가 있어야만 한다. 본 신앙고백서는 강설을 “선포하고 공적으로 증거하는 것”으로 본질을 나타내었다. 이 두 말 속에 있는 유익한 설명에 주목해보자. ‘선포한다’는 말은 권위를 가지고 공적으로 공포한다는 뜻이다. ‘공적으로 증거한다’는 말은 진리(the Truth)를 공적으로 입증한다, 그리고 확신과 권위를 가지고 그렇게 행한다는 뜻이다. 강설은 대단히 명료하고 직설적이어야 한다.
강설을 듣고 난 뒤에 아무도 “목사가 말한 것이 뭐예요”라고 질문할 수 없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분명하게 듣고 오해의 여지를 남겨 놓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자주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이 말씀을 담대하게 선포했다는 것을 읽을 수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 말은 제자들이 호전적이고 오만했다는 것을 뜻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솔직하고 두려움 없이 확신을 가지고 강설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담대함은 매우 중요한데, 왜냐하면 강설자들 역시 단지 사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복음(The Gospel)은 또한 사람의 욕정과 반대된다. 강설자들 역시 이따금씩 약함에 의해서 비난받고, 두려움에 의해서도 공격받고, 또 거침없는 솔직한 강설의 결과들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질 수도 있다. 사랑받고 존경받고자 하는 것이 사람들이 가진 기본적인 욕구이며, 그러하기에 강설자들은 자주 강설 내용을 완화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기도 하고, 특정한 부분들을 언급하지 않은 채 놔두기도 한다. 강설에서 바른 균형을 유지한다는 것은 항상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권징에 대해서 말할 때에, 본 신앙고백서는 우리에게 강설이 반드시 균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데 있어서 대단히 유익하다. 강설은 천국을 열기도 하고 닫기도 하는데, 신자들에게 열고 그리고 불신자들에게는 닫는다. 두 가지 요소 모두가 강설에서 한 자리씩을 차지해야만 하고 동시에 각기 그 자리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강설은 소위 동전 양면과도 같고, 혹은 성경 자체가 말씀하고 있듯이, 예리한 칼날과도 같다. 강설은 동시에 위로하고 동시에 권면하는 내용이 있다.
우리는 심지어 위로하는 메시지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천국의 첫 번째 열쇠인 강설은 먼저 천국을 열어야 한다. 모든 강설에 있어서 첫 번째 메시지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이것은 의심에 여지없이 그리스도의 말씀의 권징이다. 매주 거듭해서 우리는 이 사실을 믿도록 권면을 받는다. 믿음의 헌신이 항상 새롭게 되어야만 한다. 매주 목사는 ‘여러분들의 죄가 실제로 용서받았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이 사실을 참된 믿음에 의해서 받아들일 때마다 이 유익이 여러분들의 것입니다”고 말할 것이다.
이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살아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을 거부한다면 우리는 이미 죽어 있다. 하나님의 진노와 영원한 정죄는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는 한 불신자들과 외식하는 자들에 얹혀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신자들과 외식하는 자들에게 갑자기 엄습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이미 그들 위에 있고, 그리고 회개하지 않는 한 그들 위에 얹혀져 있을 것이고, 머물러 있을 것이다. 이것이 본질이며, 모든 강설의 핵심이다. 좁은 길과 넓은 길, 즉 따라야 할 두 길이 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고, 그분을 거절하는 자는 정죄를 받을 것이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이 모든 메시지가 선포되어야 하고, 또 그러하기에 천국 열쇠가 사용되어야 한다. 이 단순한 메시지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아무도 강설의 능력과 적용에서부터 제외될 수 없다.
이제 강설에는 훨씬 더 많은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한 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강설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서부터 옛 것들과 새 것들을 가르쳐야만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교인들은 매 주간 강설자들로부터 견실한 본문(solid material)을 기대해야만 한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매주간 마다 거듭해서 같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것이 강설의 핵심일 것이다. ‘그분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들은 구원을 받습니다.’ 다시 말해서 천국이 열린다.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한다면 정죄 하에 있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천국은 닫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단은 아주 강력한 반면에 우리 홀로는 철저하게 연약하기 때문에 우리는 매주일 거듭거듭 이 메시지를 들어야만 한다. 매일 우리는 복음의 위로와 권면을 필요로 하다.
말씀의 권징 즉 복음 강설의 권징이 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교회로 출발하는 곳에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개인들로서 교회로서 동일한 말씀에 의해서 전적으로 나아가고, 동일한 한 성령 하나님의 권징 하에 놓여 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서 교회에서 공적인 예배 시에 강설을 하는 동안 주요한 결정들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지속적으로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자리를 비운다면 또한 주요한 결정들(Major decisions)이 내려질 것이다. 결정을 요구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그리고 당신의 말씀에 의해서 결정하도록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이 열쇠는 강력한 도구다. 우리는 히브리서 4장에서 복음 즉 좋은 소식, 구원의 소식이 신속하게 받아들여져야 하고, 아니면 훨씬 더 강력하게 정죄하는 쪽으로 이끌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읽을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오늘 너희가 말씀을 들을 때에,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라”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자유하게 하든 아니면 정죄하든 둘 중에 하나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읽었던 바처럼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기”때문이다(히 4:12).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은 심오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안식을 주고 또 하나님과 화평하게 한다. 아니면 반대로 강퍅하게 만들고 또 안식을 없애버린다. 말씀의 권징은 강설자가 종종 추측하거나 평가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강력하고도 효력이 있다. 목사들이 가끔은 냉소적일 때도 있다. 모든 강설이 실제적으로 일정한 효력을 발생시키는가? 이 복음의 증거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심판하실 것이다.
천국은 강설의 공적인 증거와 일치한다. 많은 사람들이 참으로 복음 강설을 통해서 무죄방면을 받게 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복음 강설에 의해서 정죄를 받는다. 성령 하나님의 도구인 이 하나님 말씀의 열쇠가 열고 닫혀져 항상 이것이 바르게 사용된다. 말씀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들을 벌거벗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해서, 공적으로 강설자가 되어, 권징을 받도록 스스로를 내어 놓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때에, 그들은 다른 열쇠 즉 두 번째 열쇠인 교회의 권징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 두 번째 열쇠인 권징을 사랑의 권징이라고도 부른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두 번째 논점에 이르렀다.
Ⅱ. 그리스도의 사랑의 권징
이 두 번째 열쇠가 비록 첫 번째 열쇠와는 다르다고 할지라도 첫 번째 열쇠와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강설은 총체적인 혹은 일반적인 권징이라고 부를 수 있고, 그리고 이 열쇠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된다. 그러나 교회의 권징은 특별하다. 다시 말해서 교회의 권징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해서 스스로를 눈에 보이도록 강퍅하게 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본 신앙고백서가 말하고 있는 바처럼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지만 교리와 생활에 있어서 비기독교인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은 교회의 권징에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 가르치시는데 아무런 방편들을 사용하지 않은 채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당신의 백성들을] 돌보신다. 교회의 권징은 그리스도의 크신 사랑의 일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빈번하게 권징에 대해서 반감이 있는 자유분방한 사회에서, 권징은 공정하다고 인정할 수 없는 무력 혹은 압력의 문제로 치부되는 실정이다. 현재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규칙이란 사람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하는 것이며, 그리고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자유를 향유하도록 놔두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진실로 사랑의 모습인가? 만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방법대로 가도록 허용하셨다면 우리는 전적으로 파멸과 지옥에로 유도하는 길로 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교회에게 권징을 실행하고 또 그렇게 해서 당신의 백성을 위한 당신의 사랑을 입증하라고 명령하셨다.
권징에 대해서 가르치는 모든 성경은 권징은 사랑의 문제라고 말한다. 권징은 사람의 상호 관계에서도 그렇다. 예를 들어, 잠언에서 자식을 진실로 사랑하는 아비는 자녀를 권징 한다고 했다. 성경은 과감하게 자녀를 권징하지 아니하는 자는 자녀들을 미워하고, 자녀들을 황폐화시키도록 방치하는 일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또 우리는 이 사실을 이해하는가, 아니면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가? 자녀들이 바른 길로 자라가도록 반드시 권징을 시행해야 한다. 권징은 우리가 자녀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녀들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어떤 분들은 사랑은 없고 권징만 독려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죄인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에게 가혹하게 판단하는 자리에 앉아 있다. 이들은 항상 강력한 규범을 옹호하나 그러나 곁길로 빠진 형제자매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일어서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권징은 성경이 말하는 권징이 아니다.
교회의 권징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문제라는 것이다. 권징에 가담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항상 사랑을 기억하고 또 보여주어야 한다. 심지어 힘든 말을 해야 할 때에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사랑을 비춰야 한다. 요한계시록 3장을 보면 우리는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읽을 수 있다. 이 편지는 아주 힘든 편지인데 소위 이 편지 안에서 주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아끼지 아니하셨다. 주님께서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고 말씀하셨다(계 3:15-16). 참으로 하기 힘든 말들이 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에 있는 신자들 가운데 이 권징이 공인되지 않은 부당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그리스도께서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라”고 덧붙이셨다(계 3:19). 우리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내가 권징한다”라는 말로 바꿔 쓸 수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라오디게아에 있는 당신의 교회를 돌보지 않으셨다면, 그분은 라오디게아 교회가 제 갈 길로 계속해서 가도록 방치하셨을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자들을 내가 징계하노라”(계 3:19). 징계는 죄인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그분은 죄인이 죽기를 바라지 않으시고, 오히려 회개하여 살기를 바라신다. 권징 또한 모든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만일 죄가 교회 회중 안에서 도전도 저지도 받지 않은 채 허용된다면 이 죄는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끼친다. 성경이 말씀하듯이 죄는 누룩과도 같다. 소량의 누룩이 온 교회에 영향을 끼친다. 그러므로 권징은 그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얻기 위해서 싸워야 한다. 우리는 주님의 길에서 피차를 보호하기 위해서 싸워야만 한다. 우리는 피차를 위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반드시 보여주어야만 한다. 이런 필연성은 권징이 진행되는 절차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야 한다. 본 신앙고백서는 교회의 권징을 단번에 당회나 장로들에게 연결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교회 안에서 상호 형제애로서 권면이 있다. 우리는 특정한 한 사람이 아니라 피차 구원을 위해서 분투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죄를 짓는 형제와 자매를 목격하였다면 보지 못한 채 하면서 눈을 닫아서는 안 되며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비참한 꼴을 보이도록 하지 말고 반대로 우리는 형제애를 가지고 권면하러 가야 한다. “형제를 사랑하는 방식으로”라는 말은 스스로가 오직 은혜에 의해서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겸손하고, 깊은 사랑을 가지고, 끝없이 인내하면서 다가선다”는 뜻이다. 우리는 있는 그대를 말해야 한다. 그러나 항상 사랑과 이해로서 해야 한다. 그리고 오직 누군가가 스스로 죄 가운데서 강퍅하게 할 때에만이, 다른 사람을 [증인으로] 가담시켜야 하고 그리고 교회가 가담해야 한다. 이렇게 한 다음 교회가 싸우기 시작해야 한다. 이 사람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을 위해서 싸워야 한다. 누구든 즉각적으로 쫓아내지 않는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오히려 권징의 과정이 유일한 한 가지 목적 즉 죽음과 황폐한 길에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시작하는 것이다. 권징은 반복해서 권면하고, 끊임없이 가르치고, 지속적으로 경고하는 문제이다.
권징의 절차는 긍휼과 사랑의 절차여야 한다. 권징의 절차는 단 몇 주 만에 종료해서는 안 되고, 오랫동안 권면의 기간을 설정해야 한다. 부모로서 우리는 우리 자녀들에게 상당히 오랫동안 인내하지 않는가. 참으로 부모들은 자주 자녀들에 대해서 대단히 오래 인내하는데, 심지어 자녀들이 자주 아주 힘들게 함에도 불구하고 인내하는 이유는 자녀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교회가 힘든 형제들과 자매들에 대해서 또한 대단히 인내해야 하지 않겠는가? 인내라는 요인에는 권징의 세 가지 단계가 있다는 것을 아실 것이다. 교회가 죄인을 위해서 기도하고 방문하고 그리고 그의 구원을 구하는데 점차적으로 총력을 기울이는 세 단계가 있다.
교회 권징은 자주 상상하는 바처럼, 장로들에게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권징은 실제적으로 교회 회원들에게서 시작하며, 그리고 교회 회원들은 모든 경과를 다 밟는 동안 권징에 가담한 채로 있어야 한다. 권징은 다음과 같은 몇 단계를 따라야 한다.
1. 만일 누군가가 그의 형제의 죄를 본다면, 그는 죄를 지은 형제를 반드시 권면해야 한다. 형제가 죄짓는 것을 본 사람은 곧바로 장로들이나 목사들에게 가지 말아야 한다. 또 다른 사람들에게 그 죄에 대해서 말하지도 말아야 한다. 반드시 혼자 죄를 범한 사람에게 찾아가서 말해야 한다. 만일 죄를 지은 사람이 회개하였다면 그렇다면 더 이상 아무 것도 말하거나 행해서는 안 된다. 문제는 일단락되었고, 그리고 그 사람의 평판을 위해서 잘못했던 일을 목격한 사람은 이 일에 대해서 반드시 침묵해야 한다.
2. 그러나 만일 형제가 형제애로서 권면하는 것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하고, 죄에 대해서 슬퍼하지 않고 또 행동을 개선할 것을 약속하지 않는다면, 그때 죄를 목격한 사람은 한 사람 혹은 두 사람을 반드시 데리고 가서 함께 권면하고, 또 그의 반응에 증인이 되어야 한다(마태복음 18:17을 참조하라).
3. 여전히 그 형제가 회개하기를 거절한다면, 이 문제를 장로들에게 넘겨주어야 한다. 단지 이 시점에서만이 당회가 가담할 수 있다. 당회는 두 세 사람의 증거에 입각하여 가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당회는 죄인을 권면해야 하고, 그 죄인에게 장로들이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부여받았던 권위를 상기시켜야 한다(마태복음 18:17을 참조하라).
4. 장로들의 권면이 직접적인 회개로 이끌지 못했다면, 그 죄인은 성찬에서 제외된다. 이 국면에서 교인들에게 알려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하는 것을 우리는 “침묵의 견책(silent censure)”이라고 부른다. 이 기간 동안에 직분자들이 계속해서 그 형제를 권면할 기회를 얻게 된다. 주의 식탁에 배제된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다. 우리는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우리가 떡을 먹고 잔을 받듯이, 확실하게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제사에 참여하는 확실한 표징이다. 만일 우리가 주의 식탁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받지 못한다면 그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유익들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확실한 표이다.
5. 수많은 권면이 있고 난 뒤에, 회개가 없다면, 그때 교인들에게 첫 번째 공포가 시행된다. 교인들은 교회 안에 있는 한 형제(이름이 거명되지 않은 채)가 특정한 죄를 범하였다는 것을 통보받는다. 교인들은 주님께서 이 형제에게 회개하도록 해주실 것을 간절하게 기도하게 된다.
6. 만일 더 진전된 권면이 있은 뒤에 그 사람이 죄 가운데 있기를 고집한다면, 장로들은 교회 권징의 두 번째 공포를 계속하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하기 전에, 장로들은 노회의 동의를 받고, 그리고 노회는 그 죄와 당회가 이 사람을 회개하도록 수행했던 노력에 대해서 경청해야 한다. 만일 노회가 이 사람의 행동이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정반대되고, 또 장로들이 바르고도 충분하게 권면하였다는 것이 확인된다면, 그들은 장로들이 두 번째 단계를 계속하는데 동의한다. 두 번째 단계에서, 그 죄인의 이름이 교회 중에서 천명되는데,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은 [교회에게] 그 형제를 위해서 기도하고 또 말할 것을 격려하는 것이다.
7. 만일 이 후속 권면들이 회개의 결실을 거두지 못한다면, 그때 세 번째 단계가 착수되는데, 여기에서 출교의 날자가 확정된다. 그 죄인은 자신이 만일 끝까지 자기 죄를 고집한다면, 정해진 그 날에 출교 예식서가 읽혀질 것임을 통보하게 됩니다. 출교란 어떤 사람이 교회의 교제로부터 단절시키는 것을 의미하며, 심지어 더 준엄하게, 그리스도와의 교제로부터 단절되며 동시에 그의 영광의 나라에 있을 자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 권징은 매우 진지하다. 권징은 단순히 사람들에 의해서 설왕설래되는 말의 문제가 아니다. 권징은 단지 사람들의 판단에 관계된 것만도 아니다. 만일 교회가 누군가를 바르게 출교하였다면, 그는 하나님에 의해서도 빛의 나라에서 배제된 것이고, 그리고 어둠의 나라로 내던져진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교회가 엄청나게 큰 권세를 받은 것처럼 보인다. 맞다. 그리스도께서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태복음 16:19)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회개하도록 하지 못했을 때에만이 출교가 뒤 따라야 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인내와 긍휼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러나 교회는 또한 반드시 확고해야 하고 단호해야 한다. 죄 가운데 있기를 고집하는 사람들은 교회의 교제와 하나님 나라 밖으로 몰아내어야 할 것이다. 이 출교는 문제를 확고하게 종결하기 위한 의도가 아니다. 왜냐하면 본 신앙고백서 역시 출교자들이 삶을 참으로 개선할 것을 약속하고 보여줄 때에 이와 같은 사람을 “다시 받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출교라는 최종적인 조치(措置)조차도 죄인의 구원을 지향하고 있으며, 그리고 교회는 회개할 것을 계속해서 바라고 기도한다.
교회 권징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오래 참고 긍휼을 베풂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형제든 자매든 교회 권징을 받을 때 ‘좋아 나는 세상에서 그냥 지낼 거야’라고 생각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권징의 요구는 “오늘 너희가 말씀을 들을 때에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회개하기를 지체하는 사람들은 돌아갈 길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수찬정지 즉 주의 상에 참여 하지 못하는 권징은 이미 전조가 되는 표인데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여기 지상에서 주의 식탁에 참여할 수 없다면 어떻게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단지 어리석은 사람들만이 사랑을 약함으로 혼동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특별한 권징에서 분명하게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을 이해한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권징이 실행될 때에 그리스도의 이러한 사랑을 증명하신다. 그리하여 어느 누구도 나중에 또 특별히 심판의 날에 “하지만 저는 결코 경고를 받지 않았어요”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도 “저들이 내가 지옥으로 가는데 막지 않았어요”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성령 하나님의 권징에 의해서 다루심을 받은 교회의 회원들은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분명한 사랑을 거절하였도다!”라고 인정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교회에 천국 열쇠를 주셨음을 감사합시다. 그리고 우리가 이 열쇠들을 바르게 사용할 때에 감사하도록 합시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 강설될 때에 믿음으로 반응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만일 우리 방식을 고집하는 일이 발생한다면, 특별하게 권면하도록 합시다. 또한 우리가 우리에게 요구된 믿음과 순종으로 자신들을 권징하도록 합시다.
그리스도께서 “내가 사랑하는 자들을 내가 징계하노라. 내가 말씀의 능력으로 그렇게 하노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여, 당신께옵서 당신의 영의 능력으로 저를 징계하옵소서! 왜냐하면 저는 권징이 필요하기 때문이옵니다”라고 아뢰자. 그렇다. 정말로 말씀과 교회의 권징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쉽게 “나를 살피소서! 오 하나님이여, 나의 마음을 아시나이다.… 그리고 당신의 말씀으로 저를 가르치소서. 이는 당신의 모든 법령 안에서 당신께서 나를 가르치셨기 때문이옵나이다”라고 아뢸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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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이 글은 광주화원교회에서 퍼온글을 조금 수정하였다.
65) 딤전 3:15
66) 사 29:13; 마 15:9; 갈 5:1
67) 고전 14:33
68) 마 16:19, 18:15-18; 롬 16:17; 고전 5:1-13; 딤전 1:20
*강의자 : 손재호 교수
*본글은 2024년 8월 16-17일에 부천개혁성경신학교 2024년 봄학기 집중강의 겸 부천개혁교회 제직교육을 '개혁교회의 목회와 실제'란 주제로 실시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