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여 년간 DVD 플레이어 광픽업(빛을 쏘아 디스크를 읽어주는 부품) 시장에서 세계 1위였던 일본 산요가 최근 이름도 생소한 한국 중견기업에 1위 자리를 빼앗겼다. 새로운 1위는 우리나라 부품 회사인
아이엠. 올 3분기 현재 29.4%의 시장 점유율로
산요(27%)·
소니(19%)·
히타치(9.2%) 같은 일본 기업들을 모두 물리쳤다.
미국발(發) 금융·실물 경기 침체라는 악재 속에서 부품 세계 1위라는 자랑스러운 기업들이 속속 생겨나고 있다. 경쟁 상대도 부품 분야에서 세계적 경쟁력을 자랑하는 일본 업체들로, 산업계 현장에서 '극일(克日) 신드롬'이 싹트고 있는 셈이다. 이들은 글로벌 불황을 오히려 시장 점유율 확대의 호기로 보고, 공격 경영을 구체화하고 있다.
- ▲ 경기도 화성시 반월동에 있는 아이엠의 화성 공장에서 개발자와 숙련공들이‘블루레이용 광픽업 부품’시제품을 들어 보이고 있다.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日 잡은 기술'은 기술력이었다
지난 21일 찾아간 경기도 화성에 있는 아이엠의 화성 공장. 버스 정류장에서 도보로 10분쯤 떨어져 있는 2층짜리 공장 건물 안에는 136.5㎡(41평) 규모의 개발 라인에서 10여명의 엔지니어와 숙련공이 차세대 고화질 DVD인 블루레이에 들어갈 광픽업 부품을 개발하고 있었다. 블루레이는 기존 DVD의 약 10배를 저장할 수 있는 차세대 대용량 광디스크다.
이수권 아이엠 연구소장은 "DV D플레이어용 광픽업 부품에는 렌즈가 5~6개 정도 들어가지만 새로 개발 중인 블루레이 광픽업 부품에는 렌즈가 12개나 들어간다"고 말했다. 연구실은 비좁고 허름하지만 이곳에서 개발 중인 제품에는 세계 최고의 기술이 담겨있다. 개발된 제품은 중국 공장에서 생산돼 전세계로 팔려간다.
이 소장은 "산요를 추월한 원동력은 기술력"이라며 "지난 2~3년간 DVD플레이어 가격이 내리는 와중에도 아이엠은 매년 2개씩 신제품을 개발하며 기술력을 향상시킨 게 비결"이라고 말했다.
휴대전화용 칩배리스터(전자 제품의 회로를 손상시키는 정전기를 방지하는 부품) 업체인
아모텍도 2004년 일본의 TDK와 무라타제작소를 누르고 세계 1위로 올라섰다. 올해 세계 시장 점유율만 30~35%로 예상된다.
PC에 쓰이는 스테핑모터(정밀제어용 모터) 시장에서는
모아텍이 데스크톱용 모터 시장 75%를 석권, 1위를 차지했고 노트북용 모터 시장은 35%로 2위를 기록하고 있다. 휴대전화용 소형마이크 시장에서는
비에스이가 48~52%라는 압도적인 시장 점유율로 세계 시장을 평정했다. 모아텍은 2002년 일본 산쿄, 비에스이는 2005년 일본 호시덴을 누르고 1위에 오른 후 정상을 지켜오고 있다.
◆1위는 흔들릴수록 더 강해진다
이들의 성공 비결에 대해 모아텍의 김성호 상무는 "세계 최고의 공정·제조기술이 1위를 차지한 힘"이라며 "원화가 일본 엔화 대비 800원대일 때도 견디며 시장 점유율을 높여 왔다"고 말했다. 아모텍의 김병규 사장은 "일본 부품 대기업인 TDK, 교세라보다 휴대전화용 칩배리스터 완성품을 먼저 개발했다"며 "기술력에서 승부가 났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세계 경기 불황으로 내년에 휴대폰, PC, 가전제품, 소형 IT기기 등 모든 종류의 전자 제품이 판매 위축에 시달릴 것으로 보고 공격적인 시장 확대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아모텍의 김 사장은 "내년에 세계 휴대전화 시장이 20~30%까지 감소할 수 있다"며 "벌써 대기업들은 부품 구매 물량을 줄이며 2~3개이던 공급업체 수를 1~2개로 줄이고 있는데, 이런 현상은 1위 업체에 더 유리하다"고 말했다. 재무 상태가 안 좋은 군소 업체들이 도태될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 글로벌 1위 업체들에게는 오히려 '기회'가 된다는 판단이다. 아이엠 등 세계 1위 부품업체들은 내년에 세계 시장 점유율이 5~10%포인트 정도씩 높아질 것으로 전망했다.
이들은 연관 부품 시장으로의 진출도 모색하고 있다. 비에스이는 휴대전화용 소형마이크 기술력을 바탕으로 소형스피커 시장에 진입할 계획이며, 모아텍은 PC용 스테핑모터 시장에서 복사기·프린트·자동차용 스테핑모터 시장을 겨냥하고 있다. 아모텍은 휴대전화용 칩배리스터에서 LCD TV·PDP TV용 칩배리스터 시장으로 영역을 확대할 방침이다.
해당 분야에서 새로운 세계 1위 경쟁자들도 소니·산쿄 같은 일본의 부품 대기업들이다. 최근의 엔고(엔화 가치 상승) 현상도 이들의 도전에 유리하다는 분석이다. 김성호 모아텍 상무는 "일본 본사의 고정 비용 상승 등으로 일본 제품의 가격이 상대적으로 높아지는 만큼 승산이 어느 때보다 높다"며 "위기를 기회로 적극 공략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