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해전과 노량해전은 아는데 순천왜성전투를 모른다면, 석기시대와 청동기,그리고 삼한과 삼국은 아는데...고려를 모르고....조선을 안다는 뜻과 같습니다.
이순신장군과 정운,송희립을 모시는 사당인 충무사도 방문을 했습니다.
정운은 이순신장군의 선봉장을 하신분이죠...송희립장군은 아래 자료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송희립(1553~1623).
본관은 여산(礪山).
호는 삼규당(三規堂).
자는 신중(信仲).
형제로는 형 송대립과 아우 송정립이 있으며, 이후 3형제 모두 임진왜란에 참전을 한다.
1583년 선조 16년, 별시로 치른 무과에 합격하였다.
1592년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녹도만호 정운의 군관으로서 5월 1일 거제에서 왜병을 격파하고, 남해 앞바다에서 머물며, 이순신과 함께 원균 등과 합동 작전을 벌일 것을 주장하여, 옥포해전에서 큰 공을 세운다.
지도만호(智島萬戶)가 되어 형 송대립과 함께 이순신의 휘하에서 활약하였다.
1598년(선조 31) 11월 18일 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마지막 전투가 벌어진 묘도 앞바다에서 송희립 장군은 중상을 당하여 기절하고, 이순신 장군은 전사하고 말았다.
선상의 병사들이 매우 놀라며 이순신 장군이 총탄에 맞았다고 말하자 기절했던 송희립이 이 말을 듣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러고는 영장(令將) 몇 사람으로 하여금 이순신 장군의 아들과 조카 등의 입을 막아 울음을 그치게 하고는 시신을 싸서 초둔(草芚)으로 덮은 후에 이순신 장군을 대신하여 갑옷을 입고 기와 북채를 들고 독전(督戰)하여 수세에 몰렸던 명나라 진린 도독을 구하는 등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끄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송희립은 이듬해 이 공훈을 인정받아 선무원종일등공신에 올랐다.
1601년 5월에는 양산군수를 제수받았고, 8월에는 다대포 첨사(多大浦僉使)로 제수받았다.
이후 1611년 광해군 4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1619년 67세 때 별장으로 재직하였으며, 주사청의 업무로 경상도에 파견되었다.
1623년 3월 12일 (음력)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은 정권을 잃었으며, 그해 12월 20일 7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송희립은 흥양(현 전라남도 고흥의 세충사에 제향되었다.
그후 서동사와 충무사, 무광사 등에서 송희립을 배향하고 있다.
육군에서는 광주 상무대에도 이순신, 정운 장군의 동상과 함께 송희립 장군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첫댓글 순천왜성을 들러보고 느낀 것인데, 위 정왜기공도권대로 복원하여 일본인과 중국인을 끌어들여 임진왜란의 실상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은 공부했습니다.
복원이 가능하다면 먼후일 3국의 화합과 ' 평화의 장'이 되겠지요~!
복원하면 경주시나 제주도 버금가는 효과가...
안타까운것은 이순신의 최후는 알아도 그전에 무엇을 했는지는 역사에서 사라졌고,순천이나 여수사람들조차 모른다는 기막힌 현실...
그러래요. 우리부터 이순신과 순천왜성 그리고 순천왜성이 갖는 역사적인 사실과 의미를 바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복원을 서둘러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