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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5:5절)
우리들의 입 안에는 치아와 혀가 같이 살고 있습니다. 치아가 강할까 혀가 강할까. 물론 단단하기는 치아가 단단합니다. 그러나 강하기는 혀가 더 강합니다. 치아는 부러지기도 하고 병균에 썩기도 하고 닳기도 합니다. 그러나 혀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병원도 치과는 있는데 혀 과는 없다고 합니다. 치아는 겉으로 보기에 단단하다 보니 이렇게 약하고 혀는 겉으로 보기에 부드럽다 보니 이렇게 강한 것입니다. 갈릴리 민중의 틈에서 사역하셨던 주님도 부드러움으로 사람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셨습니다. 저 강한 로마의 빌라도 총독이나 헤롯 왕, 유다의 대제사장과는 완전히 다른 부드러운 모습을 보이신 것입니다.
미국인들은 서부 개척시대에 시작된 로데오 경기에 아직도 열광합니다. 로데오 (Rodeo)는 길들여지지 않은 말이나 소를 타고 굴복시키거나 버티는 경기로서 미국 서부 카우보이들의 솜씨를 겨루는 데서 발단한 놀이 경기입니다. 들판에서 붙잡힌 야생마는 힘이 넘치고 자유분방하기 때문에 누구든지 등에 올라타면 마구 날뛰며 미친 듯이 뒷발질을 하고 좌우로 흔들며 광란함으로 카우보이들의 노련한 솜씨도 당해낼 재간이 없을 정도입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노련한 조련사입니다. 아무리 거친 야생마라 할지라도 특별한 조련사의 손에 잡히면 꼼짝을 못하고 항복하고 마는 것입니다.
서울에 압구정동이라는 동네가 바로 그런 곳입니다. 자유롭고 쾌활하고 활기가 넘치는, 세상에서 길들여지지 않은 젊은이들이 한데 모여 야성의 미를 마음껏 뽐내는 곳이 압구정동에 있는 로데오 거리입니다. 그곳에 드나드는 젊은이들은 압구정동 이외의 동네를 길들여진데 빗대어 뒷구정동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참으로 젊은이들의 자유로운 발상이요 재치 있는 말인 것 같습니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돌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역사와 문화의 기록을 남겼습니다. 갈대로 만들어진 파피루스 종이는 잘 찢어지고 망가지기 때문에 종이 대신에 돌에 새기는 문화를 발전시켰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큰 돌로 가장 큰 신전과 무덤을 짓고 가장 큰 비석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전통이나 문화는 오래 보존되지 못했고 후대에 전해진 것을 거의 없습니다.
모세도 십계명을 돌 판에 새겼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파피루스에 기록되어 후대에 전해졌습니다. 십계명의 돌 판은 사라졌지만 파피루스에 적은 성경은 수천 년이 지나도록 보존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습니다.
어떤 유명한 사람이 고령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의 회고록을 작은 책으로 한 권 남겼습니다. 그 분의 유언은 자신의 무덤도, 비문도 새기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종이는 얇고 약하지만 비석보다는 오래 가고 멀리 갑니다. 때로는 붓이 칼보다 강하고 문인이 무인보다 더 무서운 법입니다. 작은 물방울이 바위를 뚫듯이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억센 것을 삼키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온유한 자' 라는 말 '호이 프라에이스' 는 시편에서 처음 나온 말입니다.
*시37:11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이 시의 주제는 한 인간이 역경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하신 하나님께서 의로운 자를 끝까지 보살피실 것을 굳게 믿는 신앙으로 인하여 마침내 기업을 차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온유'에 대하여 학자들마다 각기 다른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를 몇 가지 들자면..
메튜 헨리는 말하기를 '성을 내지 않고 자제하며 침착하고 부드러울 뿐만 아니라 예의범절을 아는 것.' 이라고 하였으며
렌스키는 말하기를 '온유란 온순하고 부드럽고 인내력이 있는 성품으로 자신이 당한 악행에 대해 복수하지 않는 것.' 이라고 했습니다.
아사노 중이찌는 말하기를 '온유란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과 거의 같은 의미로서 자기 존재가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아는 겸허한 마음' 이라고 하였으며
핸드릭슨은 말하기를 '심령이 가난한 자와 온유한 자를 구분하여 볼 때 전자는 자신의 상한 심령의 상태를 나타내는 반면 후자는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 및 자신과 이웃과의 관계에 나타나는 태도이다.' 라고 하였고
윌리엄 바클레이는 말하기를 '온유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격분과 태평하는 마음 중간에 해당하는 중용을 의미하며 다른 하나는 길들여진 동물에 적용되는 말로서 자기의 본능과 충동과 격정을 억제하는 자제된 상태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칼빈은 말하기를 '온유는 부드러운 마음으로 살며 노하기를 더디하며 절제할 수 있는 행동이다.' 라고 하였고
아리스토 텔레스는 말하기를 '자연적 격노에 대하여 관용을 취하는 덕성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상의 말들을 종합해 보건데 온유란 외형적인 폭력이나 잔인함의 반대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사랑으로 인하여 고통 받고 그 고통을 오래 참음으로 인내하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마음의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온유는 무능하고 약한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잘못 생각하면 온유란 나약하고 무능하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온유는 약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넉넉하고 여유가 있음을 말합니다. 약하고 무능한 사람은 매사에 조급하고 쫓기는 삶을 살아갑니다. 반면에 여유가 있는 느긋한 사람은 강한 사람이요 현명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온유한 분이시지만 세상의 그 누구도 거역하거니 침범할 수 없었던 가장 강한 분이셨습니다.
주님께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라고 하셨습니다. 놀라운 말씀입니다. 인간의 오만이나 교만하고는 너무나 거리가 먼 말씀입니다. 이것 가지고는 세상에서 성공하기가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오만이나 치욕은 땅 위에서, 역사에서 사라져 버렸으나 온유한 자는 오늘날까지 땅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사실 세계의 인물들을 보면 위대한 인물의 영광은 온유와 겸손이었다는 것이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폭군이나 정복자들은 그 영광이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우리 인간은 얼마만큼 노력을 하면 엔지니어, 의사, 사업가, 정치가, 부자도 될 수 있고 좋은 집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온유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남녀가 배우자를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상대의 환경, 배경, 교육, 생활능력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신 말씀도 바로 이것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본성적인 것, 본질적인 것, 이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생이란 것은 그가 무엇을 만들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누구냐 하는 이것이 문제라고 합니다.
사람의 성품은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이 있습니다. 이 중에 선천적인 성품을 '천성' 이라고 하고 후천적인 성품을 '습관' 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모든 성품은 이 두 가지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온유는 천성도 아니고 습관도 아닙니다. 온유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가지고 계신 성품으로 우리가 그의 제자가 될 때만이 그것을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온유한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배우며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사람이 날 때부터 타고난 본성으로는 절대로 온유한 심령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온유는 예수님께서 우리가 거듭날 때 창조해 주시는 제 이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어려운 것입니다. 인간으로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온유는 수평선의 온유와 수직선의 온유가 있습니다. 수직선의 온유에서 수평선의 온유가 나타나는 것이 성도들의 온유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온유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가롯 유다를 제외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가 온유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처음부터 온유한 성품의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성정이 급하고 변덕이 심한 사람이었습니다. 가나안인 시몬은 열심당원으로 혈기가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요한과 야고보 형제도 우뢰의 아들처럼 성격이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온유한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훈련을 통하여 변화되고 바뀌었던 것입니다.
헬라어로 온유는 '프라우스'입니다. 주인이 원하는 대로 그 힘을 사용할 준비가 된 상태를 말합니다. 이 '프라우스' 를 헬라 사람들은 '덕' 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우리가 용기를 이야기할 때 용기가 없는 것을 비겁이라고 하고 용기가 지나치는 것을 만용이라고 합니다. 비겁도, 만용도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좋으냐 할 때 '덕' 이 좋습니다.
우리가 재물을 생각해 볼 때 인색한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허비하고 낭비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무엇이 좋습니까. 관대한 덕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관용을 베풀라고 하였습니다.
또 화를 내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화를 내어야 하는데 안 내는 것도 문제요 지나치게 화를 내는 것도 문제입니다. 화를 잘 내는 사람만큼 상대방을 불안하게 하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화는 자신의 내면적 불안감이나 불편함을 그대로 남에게 신경질적으로 전가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있는 곳에는 평화와 질서는 사라집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 고 하였습니다.
또 성경은 해가 지기까지 분을 품지 말라고 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마음의 분을 자제하고 참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감정으로 남을 불쾌하게 하거나 당황하게 하지 않습니다.
선과 악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 세상의 법칙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칙은 악을 선으로 갚는 것입니다. 이것을 관용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로마 군병들을 향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바울은 반대자들의 핍박과 고난을 감수하고 그들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이 모든 것은 수평선의 온유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수평선의 온유만이 온유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온유한 자가 복이 있나니' 라고 하실 때에 온유는 수직선의 온유입니다. 수직선의 온유는 헬라 사람들이 말하는 '덕' 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성도의 온유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 죄인입니다.' 그 마음, 그 태도가 온유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성도의 온유는 두 가지 내용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순종은 복종과는 달리 강제성을 띠지 않습니다. 순종은 따르는 자의 자발적인 행위이며 스스로의 결정입니다. 누구의 지시나 권고를 받지 아니합니다.
'순종'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샤마' 혹은 '쉐마'입니다. 이 말은 '듣다' 라는 것으로 누군가의 말을 듣는 것이 순종입니다. 헬라어 '휘파쿠오' 라는 말도 ..아래에서 '듣다' 라는 뜻입니다. 구약시대는 하나님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종 모세나 여호수아의 말을 듣는 것도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다른 신들의 말은 듣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는 형통의 복이 있습니다. 듣는 자와 듣는 귀를 가진 자가 복이 있습니다.
*신28:1-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중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잠23:19 내 아들아 너는 듣고 지혜를 얻어 네 마음을 정로로 인도할지니라.
*잠8:34-35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대저 나를 얻은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모세는 가시나무 떨기에 불이 붙은 것을 보고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고 그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출3:5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신을 벗는다.' 는 말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➀ 인간의 타락된 품성과 행위, 허물과 죄로 오염된 거짓과 세속을 벗어라. 는 것입니다.
➁ 인간 스스로의 재능과 오만, 판단과 자존심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➂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고난도 각오하라는 뜻입니다.
➃ 거룩하신 하나님께 깨끗한 심령으로 경배를 드리라는 말입니다.
➄ 부패한 인간은 중보자의 피가 없이는 하나님과 동거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신을 벗었다는 말은 없으나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을 것입니다. 실로 인간이 자신의 신을 벗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모세의 온유인 것입니다.
모세가 애굽에 내려가서 애굽 왕 바로 앞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내 백성을 내 보내라.' 그 용기와 힘이 어디서 나왔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 앞에 신을 벗은 수직선의 용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다윗도 노년에는 깨달았습니다.
*시37:3-6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은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긴다는 것을 다윗은 깨달았던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뜻에 인내하는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인내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약속을 신실하게 믿고 인내하는 사람에게 축복을 주십니다. 우리는 종종 여러 가지 시험을 받을 때 '하나님의 때' 까지 인내하지 못하고 좌절하고 주저앉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조급한 성정과 연약한 믿음 때문입니다.
*약1:2-4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야고보는 교인들이 박해를 받아 세상에 흩어져 살아가기 때문에 먼저 그들이 시험에 들지 않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항상 기도해야 하며 일단 시험을 맞게 되면 잠시는 근심하게 될지라도 그것을 기쁘게 여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시련은 그것이 뜻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중도에서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참고 견디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련의 숨은 뜻은 구약시대에 희생 제물에 흠이 없었던 것같이 우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흠이 없는 주의 백성으로 다듬어 가시는 것입니다.
중국의 당나라 측천무후 시대에 남방의 어떤 마을에 아홉 대가 한 집에 같이 살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화목하게 잘 지내는지 온 마을뿐만 아니라 전국에 소문이 자자하였습니다. 마침 황제와 무후가 그곳이 지나가게 되어 그 사람들에게 가정화목의 비결을 보고하라는 명령을 하였습니다. 며칠이 지나고 황제가 도착하였을 때 그 집의 가장이 한 필의 천 두루마리를 황제에게 바쳤습니다. 그 두루마리에는 참을 인(忍) 자가 365개가 쓰여 있었습니다. 가족의 화목의 비결은 오로지 '참는 것' 이었다고 합니다.
황제와 무후는 그 때 '참을 인' 자를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참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한자에 '忍' 자는 마음에 칼을 두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위에 서슬이 시퍼런 비수를 꽂아두는 것입니다. 마음을 도려내는 아픔이 없이는 인내는 없습니다.
구약에는 인내에 대한 여러 가지 표현들이 나오는데 그 중에 두 가지만 보겠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대한 기다림입니다.
*시40:1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기다리고 기다렸다.' 라는 말의 문자적인 뜻은 '기다림 속에서 기다렸다.' 는 것으로 기다림이 일순간 적인 것이 아니라 연속적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의 기도가 당장에 응답되지 않아도 오랜 시간 끝에 그 응답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다림'은 하나님께 견고하게 붙어있되 그의 능력과 신실함을 의심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둘째는 범사에 참는 마음입니다.
*전7:8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
어떤 일이든지 끝까지 마감하는 것이 시작만 거창하게 해놓고 중도에 그만두는 것보다 낫습니다. 주님도 말씀하시기를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라고 하셨습니다.
신약에서 인내도 두 가지를 보겠습니다.
첫째 시련과 박해에 대한 오래 참음입니다.
*살전1: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인내는 박해와 순교의 시련 속에서 좌절하지 않으며 재림 때에 이루어질 궁극적인 구원과 영광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미 구원을 얻었지마는 최후의 영광이 나타날 때까지는 구원을 좌절시키려는 악한 세력들의 방해가 있기 때문에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성도의 견인이라고 합니다.
둘째 유혹을 피하며 인내하는 일입니다.
*딤전6:11-12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말일에는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 신화와 끝없는 족보, 헛된 말, 거짓 교사, 돈을 사랑하는 것 등의 미혹을 받아 믿음을 배반하고 떠나는 일이 일어납니다. 믿는 사람들은 이런 유혹을 피하고 인내를 좇으며 참 진리와 바른 교훈으로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세는 아내가 죽자 재혼을 하였습니다. 구스 여자를 아내로 취했는데 이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누나 미리암과 형 아론이 이의를 제기하고 여론을 조성하여 모세의 지도력에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하나님께서 아직 율법을 주시기 이전이었으므로 종교적인 문제가 될 것은 사실상 없었습니다.
요셉도 애굽에서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아내로 맞이하여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낳았지만 야곱은 그들을 열 두 지파에 속하게 했던 것입니다. 미리암과 아론의 문제 제기는 신앙이 아니라 인종 차별이요, 피부 색깔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미리암을 징계 하실 때에 피부 색깔을 희게 하는 문둥병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의 포인트는 모세의 탄원입니다. 누나의 징벌에 대하여 잘 되었다고도 하지 않고, 변명도 않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모든 결정은 여호와께 맡기고 미리암을 위하여 기도하는 모세. 그 맡기는 중심, 그 태도가 온유입니다. 아름다운 온유입니다. 놀라운 온유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온유도 한계는 있었습니다. 그도 사람인지라 므리바의 물 사건에 시험을 이기지 못하고 화를 냅니다.
그러나 진정한 온유가 우리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고난을 받으실 때에 변명도 없이, 위협도 없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시고 순종하셨던 그 어린양의 온유를 몸소 보이셨습니다.
주님께서 '온유한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차지할 것이요.' 라는 말씀만 주신 것이 아니라 온유의 모범을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인간의 모든 악을 용서하시고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바라보고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셨습니다. 그 결과 주님은 땅을 차지하시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고전3:21-23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바울 사도도 땅을 차지했습니다. 바울은 미래도 있었고 장래도 있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땅에서 사람들이 물질에, 지위에, 명예에, 교육에 너무 얽매어 있는 때에 나는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고,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고,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온유한 마음을 주신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위대한 인물의 기초는 온유와 겸손입니다. 땅의 축복의 바탕은 온유입니다. 그러나 내 스스로는 온유한 심령을 소유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새롭게 하셔서 만들어 주셔야 합니다.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해 주시고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할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께 배울 때에 우리 마음이 쉼을 얻고 온유하게 될 것입니다. 이 온유가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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