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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성사 특강(2021)
-. 두가지 명약
영생불사약-성체성사
만병통치약-두첩-구약, 신약
-. 옛계약과 새계약
옛 계약-짐승의 피-하느님&백성관계
새 계약-그리스도의 피-하느님(아버지)-자녀관계-성체성사
-. 두 개의 식탁
말씀의 식탁-육화
성찬의 식탁-그리스도화
-. 성체의 삶-“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밀과 포도가 부서지고 빻아져서 밀떡과 포도주가 되는 과정
-. 성체조배의 중요성
성체를 닮으려는 노력-성체와 친숙
-. 성체변화-실체변화
사제직의 중요성-요한바오로2세와 환속한 사제의 고해성사
성 프란치스코와 스캔들 있는 사제의 만남
-. 최상의 기적-피조물이 창조주로 변하는 기적
사제의 한 말씀에 복종하여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오심.
1. 옛 계약과 새 계약
하느님은 우리 인간과 두 번의 계약을 맺으셨는데, 하나는 구약이요, 하나는 신약이다.
옛 계약인 구약은 모세를 통해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시며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되리라" 라고 약속을 하시며 계약의 표지로 백성들로 하여금 어린 양을 잡아 번제물로 바치게 하였다.
한편 신약에 와서 하느님은 당신 외아들을 통하여 새로운 계약을 맺으시는데, "새 계명을 지키면 너희는 내 자녀가 되고 나는 너희의 아버지가 되리라"고 하시며 계약의 표지로 어린양이신 당신 아들의 피로써 징표를 삼으셨다.
-. 구약과 신약의 차이는 무엇인가?
우선 계약에 사용된 제물에 있어서 현저한 차이가 있다. 구약의 번제물은 어린 양이었지만, 신약의 제물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다. 하느님의 아들의 피한 방울만으로도 온 세상의 죄를 다 씻고도 남는다고 성 토마스는 성체찬미가에서 노래하고 있다. 그만큼 고귀한 예수님의 피로써 맺는 새 계약이야말로 구약의 제사보다 훨씬 고귀한 가치를 지니는 계약이다.
이를 증명하듯이 구약으로 맺어진 하느님과 이스라엘백성과의 관계는 "하느님-백성"의 관계였지만, 신약의 효과로서 우리는 하느님과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한층 가까워진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로써 맺어진 관계이기 때문에 이만큼 가까워진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우리들의 관계는 어떤 관계인가? 몇 촌간이 되었나?
2촌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맏형이 되신 것이다. 무엇을 통해서요? 새로운 계약을 통해서.
이 새로운 계약이 바로 성체성사인 것이다.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을 시켜 새로운 계약을 맺기까지는 그만한 까닭이 있었다. 하느님은 우리 조상 아담과 하와가 원죄로 인하여 에덴에서 쫓겨난 후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으셨으며, 오매불망 우리를 잊지 못하시고 마음 졸이시며 때를 기다리시어 드디어 때가 차자 당신 외아들을 인간 세상에 파견하신 것이다. 하느님의 이 심정을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이렇게 고백하고 계신다.
"어미가 자식을 어찌 잊을가 보냐. 어미가 비록 제 자식을 잊는다 해도 나는 너희를 결코 잊지 못하겠다!"(이사49,15)고 하느님의 모성적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예수님도 수난하시러 예루살렘에 당도하시어 언덕에서 예루살렘 시내를 내려다보시며 탄식하시기를,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아래 모으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들을 모으려 했던가! 그러나 너는 응하지 않았다."고 하시며 하느님을 외면한 예루살렘의 성전은 돌 하나도 첨 놓이지 않고 다 무너져 내리리라고 예언하셨던 것이다.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에 대한 배신은 그 보속도 클 수밖에 없는 것이다.
2. 펠리칸 새-성체성사 제정
예수님의 십자가상 제헌을 가톨릭성가 198번은 펠리칸 새에 비유하여 노래하고 있다. "자애로운 예수 펠리칸이여!"
펠리칸 새는 어미 새가 자기 가슴팍의 살을 뜯어 새끼에게 주고 자신은 기꺼이 죽어가는 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우리 죄를 당신이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시어 죽어주셨다. 그러니 펠리칸 새가 아닌가!
그러면서도 당신을 배반한 인류를 형제라 부르시고 섭섭하다는 말씀 한마디 없이 우리를 위해 대신 죽어주시면서 "내가 다 이루었다!"고 하시고 만족해 하셨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부활 승천하신 후에도 세말까지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라"고 피 흐름 없는 제사를 사제를 통해 봉헌하도록 성체성사를 제정하시고 성체성사에서 당신 살과 피를 우리에게 음식과 음료로 제공해주신다. 당신 살과 피를 우리에게 나눠주셔야 마음이 흡족할 만큼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이시다.
-. 성체성사의 의미
1. 성체는 가톨릭교회의 가장 중요한 보배
2. 그리스도 현존은 하느님 나라에서 뵈올 바로 그분이다.
3. 밀떡 형상 안에 자신을 감추신 것은 주님께서 배려하신 것-만일 주님의 살을 직접주신다면 살덩어리를 우리가 감히 어떻게 영할 수 있으랴!
4. 성체는 임금님이신 주님이시니 성체조배는 임금님 알현이다. 그런데 임금께서 당신 알현을 거부한 적이 있는가? 면회사절을 하신 적이 한 번도 없다. 너무 쉽게 만날 수 있어서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닌지?
5. 지금부터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과 친숙하도록 사귀자. 그래야 하늘나라에서 그분을 뵈올 때도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 오상 비오신부님과 성체성사
미사성제를 드릴 때 비오 신부님은 온 정성을 다하여 그리스도의 피흐름 없는 제사를 당신 친히 손과 발의 피를 흘리며 그리스도의 골고타 산상에서의 십자가의 고통을 재현하면서 봉헌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그 미사에 참여한 사람은 누구나 과거에 타성에 젖어 준비 없이 미사에 참여하였던 것을 통회하게 되었고 공동 집전한 사제들에게 그동안 습관적으로 성의 없이 미사봉헌 하였던 것을 통회하도록 각성시켜주었던 것이다.
비오 신부의 미사에서 “이는 내 몸이라. 이는 내피라”고 할 때 비오 신부의 눈에서는 눈물이 방울져 흐르고 울먹이던 나머지 어깨가 들썩거렸다고 한다. 이때야말로 그리스도와 완전히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다.
바오로 사도의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라는 말씀 그대로였다.
습관적으로 준비 없이 또는 성의 없이 미사 드리는 우리들의 습관적인 태도에 경종을 울리면서, 오상 비오 신부님은 이마에 구슬땀을 흘려가며 다섯 상처에서 피를 흘려가며 예수성심의 은총의 진원지에서 생수를 퍼 올렸다. 그에게 닿는 즉시 영혼은 다시 생기를 되찾아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매 미사 때마다 골고타 현장에 와있는 것이었다. 골고타는 미사 때마다 현존했다. 이 미사에 참여하는 이들은 모두 그 골고타 언덕 위에 와 있었다.
미사 때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현존, 곧 천사가 그를 둘러싸서 그를 돕기도 하고, 사탄은 이를 훼방을 놓기도 했다.
미사를 방해하는 사탄과 격투가 벌어지고 그는 이기기는 했으나 녹초가 되어 버렸다.
또 거룩하시다 부분을 낭독할 때부터는 그의 이마에서 구슬땀이 흘러내리고 그의 얼굴을 뒤덮었다. 그는 그야말로 죽음과 싸우는 고통의 인간이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고독하셨듯이, 비오 신부님은 인간적으로는 무척 고독하였다. 과장된 선전에 제동을 걸고자 하는 교회의 신중한 태도가 비오 신부님에게 한때 성무집행정지를 명하였다. 그토록 생명을 걸고 봉헌하던 미사를 금지당하고 영혼구령을 위해 온 정성을 다해 주던 고해성사를 금지 당했을 때 비오 신부님의 마음은 얼마나 허전했을 것인가? 비오 신부님의 이고독이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절규인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예수님의 고독에 동참하여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가는 그의 성덕에 보탬이 되었다.
성인에게는 "미사는 나의 존재목적이요 내 삶의 전부"라고 할 만큼, 숭고한 일과였다. 그러기에 미사도중 그리스도의 수난고통을 똑같이 느끼며 눈물범벅이 되고 다섯 상처에서는 중단 없이 피가 흐르는 처절한 성체성사시간이 보통 두 시간씩 계속될 때, 동료 수사신부님이 미사가 빨리 끝나기를 화살기도 할 정도로 비오 신부님은 성체성사 때 온 정신을 쏟았던 것이다.
비오 신부는 성체성사의 의미를 되새겨준 기도하는 사제 상을 심어주었다.
-. 성체성사와 성모 마리아
하느님이 사람이 되어 오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신 분이 마리아이다. 그분 없이는 하느님이 사람이 되실 수 없었다. 하느님이 세상 안에서 거처하실 장소로 마리아를 택하신 것이다. “너의 도움 없이 너를 창조하신 분이 너의 도움으로 너를 구원하고자 하신다.”(아우구스티누스)
히브리서10,5: “당신은 저를 인간이 되게 하셨습니다. 저를 참 제물로 받으시려고 인간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려 왔습니다.” 아들이 인간이 되신 것은 마리아가 아버지 뜻에 완전히 순종하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 마리아는 최초의 감실
루가복음: 1,35에서- “성령이 감싸 주신다”-이는 곧 만남의 장막 위에 머물면서 하느님 현존을 알렸던 구약의 거룩한 구름을 암시한다. 이로써 마리아는 새로운 거룩한 장막, 살아있는 계약궤가 된다. 마리아의 “예”라는 응답에 하느님이 땅에 거처할 장소가 생겼다. 세상이 감히 받을 수 없는 하느님이 마리아 몸속에 머무르신다.
요셉은 꽃이 핀 지팡이로 표현되어 대사제로 상징되고, 주교의 원형이요, 마리아는 살아있는 교회로 표현된다. 성령이 거처하시는 새 성전인 것이다.
-. 인류의 어머니 마리아
성모님은 하느님의 아들을 낳아주신 어머니시며 우리 인류의 어머니시다.
루가복음에 “마리아는 맏아들을 낳았다”고 하였다.
마리아는 평생 동정이시기 때문에 육신적인 둘째 아들이 없었다.
다만 영신적인 둘째 아들이 있었으니 우리 인류가 영신적인 둘째 아들로 예수님의 동생들인 것이다.
그러면 마리아는 우리를 어디서 낳으셨는가? 갈바리아 동산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유언에 따라 인류를 자녀로 받아들이셨다.
산고를 많이 겪고 낳은 자녀일수록 더 사랑스럽다.
마리아는 당신 천상아들의 십자가상 죽음을 지켜보는 가운데 당신성심에 이 한 칼날이 꽂히는 극도의 고통 중에 우리를 낳으셨다.
난산중의 난산이었다. 그러기에 더욱 마리아에게 있어서 우리는 사랑스러운 존재이다.
갈바리아 동산은 천상 아드님 예수님을 성부께 봉헌하시고 죄 많은 우리를 당신 자녀로 받아들이신 장소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리아는 그때부터 구세주의 지체들의 영적 어머니가 되셨다.”고 하였다.
마리아는 신자들을 교회에 태어나게 하는 어머니역할을 하신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 고귀한 피값을 치르고 사신 몸이요, 성모님의 통고의 희생을 치르고 사신 것이다.
성모님은 언제나 하느님의 뜻에 일치를 이루셨다. 성부께서는 인류구원을 위해 성자의 십자가상 희생을 원하실 정도로 인간을 사랑하셨다. 마리아는 이 성부의 인류애를 본받아 당신 아들의 십자가상 제헌을 동의하셨다. 그러므로 우리자신은 성부와 마리아께서 당신 사랑하는 아들을 우리를 위해 희생제물로 기꺼이 봉헌할 만큼 고귀한 존재로 사랑받고 있는 것이다.
십자가상에서 그리스도는 유언으로 마리아에게 “이는 당신의 아들입니다.”고 하셨고,
요한에게는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고 하셨다.
즉 인류와 마리아를 모자관계로 맺어주셨다.
-. 마리아의 모성애
예수님은 요세파 성녀에게 "나는 내 어머니에게서 사랑을 배웠노라"고 고백하셨다. 예수님의 사랑은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배우셨다고 했다. 사랑의 성사인 성체성사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은 어머니 마리아의 모성적 사랑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모든 어머니들의 사랑을 다 합쳐도 마리아의 우리에게 대한 사랑에 비할 수 없다.
동물도 본능적으로 새끼를 보호하는 본능이 있다.: 고래는 새끼가 위험한 파도에 쫓기게 되면 입을 벌려 새끼를 배안에 보호한다고 한다.
마리아는 우리를 위험 중에 당신 태중에 보호하시고 만또 안에 보호하시면서 하늘나라 포구에 안전하게 도착하기까지 보살펴주신다.
마리아의 이사랑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에 비례한다.
마리아의 우리에 대한 사랑은 하늘과 땅을 다 태워버릴 만큼 크다. 모든 성인들의 사랑을 다 합쳐도 성모님의 사랑만하지 못하다.
하느님께 대한 마리아의 이 사랑은 우리에 대한 마리아의 사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제사바친 모리아산의 제사가 믿음의 완전한 표본이 되었는데, 마리아의 천상아들의 십자가상제사와 어느 것이 더 큰 봉헌인가?
아브라함의 이사악제사보다 더 큰 봉헌이 갈바리아에서의 마리아의 예수님봉헌이다.
갈바리아의 십자가상 제사 때의 제물인 그리스도가 모리아 산에서의 이사악이라는 제물보다 더 큰 제물일진대, 그렇다면 마리아의 희생제사는 아브라함의 희생제사보다 더 큰 제사임은 자명하다.
마리아는 당신 자신 보다 더 사랑하시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것이다. 이 마리아의 모성적 사랑은 우주를 태우고도 남는 사랑이다.
묵시록에 “마리아가 태양을 입고 달을 밟고 별이 열두 개 달린 월계관을 머리에 쓰고 나타났다”(묵시12,1)고 기록하고 있다.
태양과 달과 별은 세계 도처에 아니 비치는 곳이 없다.
성모님의 사랑도 인류 중 그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마리아를 우리 어머니로 모신 것을 감사해야한다. 또한 마리아를 우리 어머니로 내어주신 예수님께 감사해야한다.
그 감사의 표현으로 우리 자녀들은 어머니의 마음에 드는 생활을 해야 한다.
성모성심을 위로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 세상죄인들도 어머니의 아들들이니 그들의 잘못을 우리 기도와 희생으로 기워갚고 어머니께 효도하는 생활을 하도록하자.
새로운 삶 - 성체의 삶
성체성사의 재료가 밀과 포도인 점을 주목하자.
밀이 빻아지고 으깨어지고 반죽이 되고 찜통에서 쪄져야 비로소 빵이 된다. 또 포도는 으깨어지고 쥐어짜져서 발효되는 고통스럽고 지루한 과정을 거쳐야만 맛좋은 포도주가 된다. 밀이 빻아져서 빵이 되고 포도가 으깨어져서 포도주가 되는 과정은 하느님의 일꾼이 되기 위한 삶의 과정을 축약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성체성사에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hoc facite in meam commemorationem)"고 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밀과 포도가 밀떡과 포도주가 되어가는 성체의 삶을 살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성체성사에서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사랑을 확인하였다.
마치 밭에서 진주를 발견한 사람이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사듯이 우리는 나를 위해 당신 살과 피를 내어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되었으니 무엇을 망설이고 무엇이 아까우랴! 성서 안에 예수님을 만난 영혼들의 태도 변화는 무궁무진하다. 그래서 복음은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소식인 것이다.
향수는 향기를 발산해야 사명을 완수하는 것이다. 냄새만 간직하는 것만으로는 향수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신자는 성체를 받아 모셨으니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고 열매를 맺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다.
-. 성체조배의 소중함
어느 감실 앞에 씌어진 글:
여기 24시간 개방된 무료상담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잠잘 때에도 들어주시고 비밀이 보장됩니다.
여기 24시간 개방된 무료병원이 있습니다. 오진도 없고 응급처치도 하며 비상약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곳은 아무나 쉬어갈 수 있는 쉼터입니다. 한번 다녀간 사람은 다시 오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이곳은 이상스리 한적하기만 합니다.
주인은 오늘도 애가타서 호소합니다.
“거기 누구 없소!”
성암브로시오의 글:
“상처가 낫기를 원하십니까? 이분은 의사이십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십니까? 이분은 영원한 생명을 지니셨습니다.
영신적 굶주림을 느끼십니까? 이분은 생명의 빵이십니다.“
-. 성체조배요령
아르스의 성자 비안네 성인과 시골노인과의 대화:
“나는 주님 바라보고, 주님은 나 바라보고 있노라면 한 시간이 금방 지나갑니다.” 이것이 성체조배이다.
가을이 오면(김용식 동시)
“나는 꽃이예요. 잎은 나비에게 주고,
꿀은 솔방벌에게 주고,
향기는 바람에게 보냈지요.
그래도 난 잃은 건 하나도 없어요.
더 많은 열매로 태어날 거예요, 가을이 오면....”
-. 성체변화-실체변화(Transsubstantiatio)
4세기 교회 교부들은 성체가 실재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라 이해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성 치릴로는 “예수님께서는 명시적인 방식으로 <이는 나의 몸이다>, <이는 나의 피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우리가 보는 것이 <단지 비유에 불과하다>고 판단하지 않도록 하셨습니다.”라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오는 성체에 대해 “<축성을 통해 본질 자체가 변화한다>”고 가르칩니다. 이렇게 4세기 교부들의 가르침에서 알 수 있듯이, 성체 축성은 빵과 포도주의 “본질”을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로 변화시키며, 성체는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임이 아주 분명합니다.
이는 왜 성 아우구스티노가 성체에 대해 “성체를 흠숭하기 전에는 성체를 영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렇게 성체를 흠숭함으로써 우리는 죄를 범하지 않게 된다. 또한 만일 우리가 성체를 흠숭하지 않는다면 죄를 짓는 것이 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성 토마스께서는 어째서 빵과 포도주가 축성 후에도 빵과 포도주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없는지에 대한 매우 좋은 이유를 제시하셨습니다: “만일 <라트리아> 흠숭으로써 흠숭받을 수 없는 어떠한 실체가 그곳에 있다면, 그것은 이러한 성사에 대한 공경에 반대되기 때문이다.” 만일 빵과 포도주가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면, 가톨릭 신자들은 그것을 흠숭함으로써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리적인 (physical) 빵과 포도주는 그대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트리엔트 공의회 (1545-1563)는 성 토마스와 조화를 이루어 무류적으로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신성하고 거룩한 성체성사 안에 빵과 포도주의 실체 (substance) 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와 함께 남아 있다라고 말하며, 빵과 포도주의 외양 (species; appearance) 만 그대로 남아 있고 <빵의 실체 전부>가 살로 변하며, <포도주의 실체 전부>가 피로 변하는 이 훌륭하고도 유일무이한 변화, 즉 가톨릭 교회에서 가장 적합하게 <실체변화> (transubstantiation) 라고 부르는 이 변화를 부인한다면 저주받을지어다.”
끝으로, 교황 바오로 6세께서는 가장 명확하게 가르치셨습니다: 미사의 축성 후에는 “빵과 포도주의 (냄새, 맛 등의) <외양> (species) 을 제외하고는 빵과 포도주는 전혀 남아 있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몸들이 어떠한 장소에 있는 것과 같은 방식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총체적으로, 육체적으로도 (corporeally), 즉 당신의 <물리적> ‘실재’ (physical reality) 로서 현존하신다.” 그래서, 축성 후에 남는 <“물리적인” 것> (physical thing) 은 빵과 포도주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 - 제단 위에 있는 빵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거룩해진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잔 속에 든 것은 그리스도의 피이며 하느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거룩해졌습니다. 그것은 잘 받아들이면 여러분에게 유익할 것입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 - 주 예수 그리스도여 당신께서는 성체 안에 참으로 현존하시며 당신의 활동은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놀랍습니다. 겸손되이 맹세하오니, 제가 당신에 대해 쓴 것이 진리와 일치하는지 알게 해주소서!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성체 찬미가는 성체 안에 예수그리스도의 실체와 거룩한 성찬과 미사 성제에 대한 가톨릭의 가르침을 설명한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 구세주께서는 지극히 거룩한 성체성사를 세우셨다. 그것은 참으로 실제로 그분의 살과 피를 감추고 있어서 그것을 먹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
예루살렘의 치릴로 - 영적인 찬미가들로써 우리를 거룩하게 한 후, 우리는 자비로운 신이신 그분께서 빵을 그리스도의 육체로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피가 되도록 제대 위에 놓여 있는 봉헌물들 위에 당신의 성령을 보내주시기를 청원합니다. 성령께서 건드리신 모든 것은 거룩하게 되고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신비 교리교육, 5, 7)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 잔 속에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걸러져 내린 것 자체입니다. 빵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몸입니다."(고린토 전서에 대한 강론 24)
밀라노의 암브로시오 - 그는 성체성사의 희생제사적 성격을 자주 강조하였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희생 제물이시면서 동시에 사제이셨듯이, 미사 때에도 제대 위의 제물과 사제로 계신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주님의 축성말씀의 능력으로 제병이 주님의 몸으로 본질적으로 변화된다고 명백하게 가르친다. 그는 성체의 효과, 즉 영원한 생명의 양식임을 자주 강조하였다.
성 유스티노 - 빵과 포도주는 일상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주님의 몸과 피이며 구원을 위하여 꼭 필요한 것이라고 유스티노는 강조한다.
알렉산드리아의 끌레멘스 - 주님께서는 너희는 나의 살을 먹고 나의 피를 마시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유익한 음식물들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살을 주시고 우리에게 피를 부어주십니다. 어린이들이 성장하는데 부족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 놀라운 신비여!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오래된 음식처럼 이전의 육적인 부패를 버리라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것인 다른 새로운 양식에 참여하고 가능하면 그분 자신을 받음으로써 그 음식을 우리 안에 두고 가슴속에 구세주를 모실 것을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명하십니다. 그러나 당신은 이러한 방법으로 지향하는 것을 원하지 않고 아마도 더 공통적인 방법으로 지향하는 것을 원할 것입니다. 또한 당신은 이러한 방법으로 아십시오. 살은 비유적으로 성령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에 의하여 살이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피는 우리에게 말씀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말씀께서는 풍부한 피로 생명 안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두개의 것들의 일치는 어린이들의 음식입니다. 주님께서는 성령이시고 말씀이십니다.
<<주님은 우리곁에 계신다>>(베네딕토16세)
말씀의 육화(Incarnation)-장막(skene(그리스어);schekhina(히브리어))-만남의 장막(Tent of Meeting)-예수 그리스도-성전-하느님의 자비로운 현존-계약궤(마리아)안에 하느님 현존=그리스도
마리아-하느님 육화의 장막-교회의 출발-새 예루살렘의 출발
* 하느님사랑과 인간의 갈증의 만남의 장소-야곱의 우물가
예수의 갈증-하느님의 인간애의 갈증-인간의 신적 사랑에 대한 목마름(사마리아 여인)
예수님의 생수제공-창에 찔린 옆구리상처-피와 물-영원한 생명수
세족례의 의미-1). 유다의 물욕과 탐심, 독단적인자세로 하느님 거부 & 2). 경건주의자-베드로의 잘못된 겸손-위장된 교만-스스로의 힘으로 정결해지려함.
하느님은 이 두 가지를 모두 씻겨서 깨끗해지는 겸손을 원하심-자신을 우리에게 주신다.
Ex-1: 교황 요한 바오로 II 와 환속한 거지 신부의 만남-교황이 고해성사를 청함-교황의 권한으로 환속한 사제에게 사제권을 회복시키고 고해성사를 청하고 회개한 사제의 사제직을 되돌려줌.
Ex-2: 아씨시 성 프란치스꼬와 스캔들 있는 사제와의 만남-성인이 그 사제에게 무릎 꿇고 강복을 청하므로 사제의 회개를 일으킴.
그리스도의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나의 피다.”-구약의 모든 제사의 불완전함을 완성함
하느님은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신다-사랑받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겸손의 능력(내 힘으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받는다는)뿐이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릴 피다.-주님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피를 흘리셨으며(포괄적 성격), 동시에 구원사건이 갖는 제한적 성격으로 “거부하는 사람을 제외하고 받아들이는 많은 사람이 구원되리라”는 인간에게 허용된 거부의 자유가 표현됨
새 계약-새로운 심장-새로운 사랑으로부터-하느님과 인간의 피로 맺은 친교-형제관계
십자가사건-죽음을 사랑과 기도의 언어로 바꾸어 놓으심=예수의 복음선포에 대한 인간의 응답-십자가에 못 박으시오(처형): 그리스도교의 출발-십자가를 통해 성공-예수의 증인은 십자가의 표지를 받아들이는 사람들.-그리스도인의 DNA-십자가
우리에게 감동 주는 교회의 신비-세상과 타협하는 법에 능란한 사람들의 교회 아니다. 오히려 고난 받는 이들의 교회-희망(ex: 꼴베신부, 순교자들)-고난 받는 교회는 하느님을 증거한다.-세상 속에서 하느님이 거두신 승리요, 우리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표지.-인간을 정화하고, 하느님이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실 수 있도록 문을 열어드리는 생명의 능력을 뿜어내는 표지.
과월절의 어린양- 예수님의 옆구리-아담의 갈비뼈: 같은 단어 사용
요한-예수님이 죽음의 잠에 빠진 어둠 속으로 내려가 새로운 인류의 출발을 연 새로운 아담으로 묘사-옆구리에서 사랑의 헌신 속에서 창에 찔려 열린 옆구리로부터 전 역사를 기름지게 할 샘이 솟아 흐름-예수의 죽음을 통한 헌신-피와 물, 성체와 세례-새로운 공동체의 원천-교회의 근원적 출발점-말씀, 죽음, 부활- 일체를 이룸-파스카신비-성체성사의 근원-죽음을 극복한 생명의 신비
성체성사-우리가 선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하느님 스스로가 우리에게 선물하신다.
요한3,16:“하느님이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시어 외아들을 보내주시고 그를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심”
하느님과 화해 하십시오(2고린5,20): 우리가 하느님께 빚을 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우리에게 오셔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화해하기를 원하신다.
아브라함-희생제물-하느님이 준비하신 덤불속의 어린양-그리스도의 예표
최후의 만찬 설교-성체성사의 본질
두 가지 새로운 요소
1. 제사의 특성-경배와 찬양-말씀(회당)예배
2. 부활하신 분의 영광에 대한 기쁨-성찬례
성체-“만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요한6,53)“나는 강한 자의 빵이다. 나를 먹으면 내가 너를 변화시켜 나의 일부로 만들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의 환시)
“이것은 나의 몸이다”-이것은 나의 육체 안에 존재하는 전체 인격이다.
몸= 자신을 타인으로부터 구별짓는 경계이며 동시에 타인과의 교제를 하는 가교역할-나눔: 부활=더 이상 경계가 없고 몸이 갖는 교제의 성격만 남은 것-남을 위해 봉사하는 완전히 열려진 존재.
성체를 영함=예수님과 교제에 들어감=부활의 능력을 갖게됨.=부활하신 분을 받아모심.
실체변화(Transsubstantiation)-빵의 본질이 변하여 예수님의 몸이 됨-형상은 빵의 형상
-포도주의 실체가 예수님의 피로 변함-형상은 포도주일지라도: 내면의 본질적인 실체의 변화-성체를 영함으로써 우리의 실체적변화가 일어나야함-회개-내면의 변화-세계의 변화-새 예루살렘 건설
성체변화는 의미변화-기능변화가 아니다(ex:무명천으로 태극기를 만들면 태극기 앞에서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해야한다-그러나 천의 본질이 변한 것이 아니라 의미와 기능이 무명천에서 태극기로 변하였을뿐)
성체조배-주도권이 주님께-주님이 우리기도에 응답하시어 대화하고자 하심.
cf: 자연 속에서 기도-내가 주도권.
성전 휘장이 찢어짐-성속의 구별이 사라졌다는 의미가 아니다(세상은 아직도 불완전하므로, 그것은 새 예루살렘에서나 가능한일)
이스라엘 민족과 다른 민족간의 경계가 사라졌다는 의미-하느님의 계약이 구약과 그의 성전이라는 좁은 틀에서 벗어나 세계 열방을 향해 넓혀졌다는 의미-진정한 거룩함-거룩한 주님이 인류를 사랑하시어 인간이 되셨다는 의미.
성체를 영하는 자는 로마에서 미국에서 한국에서 같은 주님을 모시는 하나의 백성이 된다.
이스라엘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살아온 힘은 하늘의 만나와 말씀의 능력에 의존하여 살았고, 2000년 동안 나라 잃은 백성으로 흩어져 살아도 타민족에 와해되지 않은 저력은 말씀(율법)의 힘으로.
주님 앞에 무릎 꿇어 경배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상실하거나 굴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회복하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 발을 씻어주시기 위해 먼저 우리 앞에 무릎을 꿇으셨다. -그분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그 사랑 안으로 몸을 낮추고 들어감으로써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경험하고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현대인-다리힘줄(아킬레스건)이 끊어진 사람처럼 목표를 향해 달리지 못하고 주저앉아있음; 날개 잘린 새처럼 초월을 향해 날지 못하고 있음(발타살).
세상-신비로움이 사라진 세상-황량함, 암울함-새로운 갈증-“우리는 이미 너무 오랫동안 인간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이젠 제발 하느님에 대해 다시 이야기하기로 합시다.”(블라디미르 막시모프)
말씀을 구명대로 붙잡고, 성체성사-양식으로 영양 섭취하여, 마지막 발악으로 맹렬히 불화살을 쏴대는 사탄을 대적해야 할 것.
-. 시간 안에서의 영원한 삶
영원이란 단순히 무한한 시간이 아니라, 존재의 다른 차원-자아로부터의 해방-내 것 네 것이라는 구별이 없고 우리 모두 공유하고 하느님이 모든 것 안의 모든 것이며 우리는 모두 안의 모두이며 우리 안의 모든 것인 곳-현재와 영원이 공존하는 곳.
로마14,8: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해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도 주님의 것이고 죽어도 주님의 것입니다.”-“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안에 사시는 것이다.”
교황 베네딕도 16세: “주님은 심판 때 우리의 질문을 받으시면 자신의 상처를 보여주실 것이며, 우리는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그분은 그저 우리가 비록 이세계의 논리를 다 이해하지는 못할지라도, 그분의 편에 서서 이 상처가 말하는 것을 믿기를 기대하고 계신다.”
예수님의 다섯 상처는 웅변보다 더 강한 증거 아닌가! 그분의 죽음보다 강한 사랑에 무슨 다른 증거를 더 원하는가!
성체변화는 피조물인 빵이 창조의 살로 변하는 가장 큰 기적이다. 천지 창조와 홍해바다가 갈라진 기적이나, 예리고성이 무너진 기적, 병자 치유의 기적,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기적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피조물이 창조주로 변하는 기적을 믿는다면 성경의 기적내용을 믿기가 어렵지 않다. 동정녀잉태사실도 성체의 기적에 비하면 작은 기적이다.
성체성사의 의미와 성체의 삶
1. 성체성사의 중요성
성체성사는 그리스도교 생활전체의 원천이요 정점(교회헌장 11항)이며, 교회생명의 원천(일치교령 15항)이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원천과 중심”(사제직무 6항)이며, “선교활동 전체의 원천과 정점”(사제직무5항)이요, “성체 안에 교회의 영적 전 재산이 내포되어 있으며”(사제직무 5항) “성체에 의해서 교회는 계속해 살고 증대되며”(교회 26항)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성체성사 거행에 그 원천과 중심을 두지 않으면 결코 건설할 수 없다.”(사제직무 6항)고 교회문헌들은 명시하고 있다.
이같이 성체성사는 가톨릭교회의 원천이요 중심이요 정점이며, 마치 나무의 뿌리와 꽃과 같은 것임을 알 수 있고, 또한 우리 신앙생활의 원천이요 중심이요 정점이 되어야 하며, 우리 신앙생활의 힘이 성체성사에서 우러나와야 하고 성체를 중심으로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루어져야하고 성체 안에서 그리스도와 일치하므로써 우리 신앙생활의 극치가 이루어져야 함을 알 수 있다.
교회 안에 예수님이 현존하는 방법은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 기도할 때나 사제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설교할 때나 성사를 집행할 때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도 성체 안의 현존이 가장 실재적이고 본체적이며 완전한 현존이라고 할 수 있다.
칠성사 중 다른 여섯 가지 성사는 신자들로 하여금 활동하시고 은총을 주시는 그리스도와 상봉하게 하는 의식이라면 성체성사만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리하여 성 토마스는 성체는 “실제로 그리스도 자신을 내포하고 있으며” 또 “영성생활의 완성이요, 모든 성사의 목적”과도 같다고 했다.
2. 실체변화(Transsubstantiatio)의 의미에 대한 교회사적 정의
역사적으로 볼 때 11세기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성체성사에 대한 교의는 현존-제사-식사의 차원으로 의미가 강조되어 왔다.
즉 11세기에서 16세기까지가 개신교 주장들에 대항하여 성체성사의 현존성을 확립하는 시기였다면, 트리엔트 공의회로부터 20세기까지는 미사성제의 의미가 중시되어 발전된 시기였으며,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를 기점으로 하여 일치와 나눔의 의미가 성체신비의 표면에 부상하게 되었고, 성체가 쪼개지고 나누어지듯 우리의 삶도 이웃을 위해 쪼개지고 나누어지는 삶을 살도록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사제가 미사 때 빵과 술을 축성하면 빵과 술의 형상은 그대로 있지만 더 이상 단순한 빵과 술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사실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신앙이 없으면 알아들을 수 없는 참으로 오묘한 신비이다.
믿기 어려웠던 것은 예수님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 온 살아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6,51)라고 하시자, 유대인들은 “이 사람이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주겠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요한6,52)하고 수군거렸으며, 제자들마저 그만 예수님을 떠나 더 이상 동행하지 않았다.(요한6,66)
상황은 그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성체신비는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이 없다면 황당무계한 이야기로 들릴 따름이다.
교회는 이러한 변화를 실체변화(Transsubstantiatio)라는 용어를 쓰면서 성체성사 제정의 말씀이 사제를 통하여 울릴 때, 실체(Substantia)인 빵과 포도주의 본질적인 존재는 변하고, 우유(accidentia)인 외적으로 나타나는 형상(forma: 물리학적 구조들, 색, 선, 무게, 크기, 맛)은 그대로 남는다고 함에 대하여,
이는 Aristoteles철학에서 유래하는 진부한 개념이라고 하여 목적변화 (transfinalisatio).의미변화(transsignificatio),기능변화 (transfunctionalisatio) 라는 용어를 쓰면서 이를 더 잘 설명하려고도 하지만 의미변화나 목적변화, 그 어느 것도 실체변화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실체변화는 목적변화와 의미변화 모두를 내포하지만 목적변화나 의미변화만으로 실체변화의 의미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례헌장 47항은 성체신비의 다양한 국면들을 상세하게 열거하고 있다. 성체성사는 시대를 초월하여 십자가상 희생제사를 영속화시킨다. 그것은 또한 그리스도께서 먹히시는 하나의 빠스카 잔치이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기념이며, 사랑의 성사이며, 일치의 표지이며, 애덕의 끈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체성사는 첫째, 인류의 죄를 기워 갚고 구원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시고 피를 흘리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음과 부활의 기념제요, 인류를 위한 속죄제사라는 것이다.
둘째로, 기원 전 13세기에 유대인들이 에집트 노예생활에서 해방되었음을 기념하던 빠스카 잔치와 같이 죄와 죽음에서 우리를 해방시킨 참다운 빠스카 잔치요,
셋째로, 예수님께서 “이 잔은 내 피로 맺은 새로운 계약”(1고린11,25;루카22,20)이라고 했듯이 구약에 숫 송아지를 잡아 피를 뿌리며 하느님과 백성 사이에 계약을 맺었듯이(탈출24,4-8), 예수님께서 짐승의 파가 아닌 자신의 피로 새로운 계약을 맺었으니, 성찬을 거행할 때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성혈로 맺으신 새로운 계약을 기억하고 하느님의 새 백성임을 자각해야 하며,
넷째로, 친교와 나눔의 식사이다.
최후의 만찬은 빵의 나눔(사도2,42), 주님의 만찬(1고린11,20), 주님의 식탁(1고린10,21) 등으로 불림과 같이 주님의 몸과 피를 음식으로 드는 특별한 성찬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 식탁에서 같은 음식을 나누어 먹는 공동식사는 일치, 사랑, 나눔, 화목 등의 보편적인 표시이며 방법이다.
성찬이 지니는 나눔의 의미는 그동안 그늘에 가려져 있다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부각되었다.
종합하면, “어제의 예수님(삶과 죽음과 부활)을 되새기는 기념제요 오늘의 그리스도(부활과 현존)를 기리는 찬양제이며 내일의 주님(재림)을 기다리는 희망제이다. 성찬은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우리 님을 모시고 님 따라 살기로 다 함께 다짐하는 그리스도인들의 한마당 축제인 것이다.
3. 성체성사의 의미확장
성체의 신비는 천주성자 강생의 신비의 연장이다. 예수님께서 2000년 전 베들레헴 외양간에서만 강생하려하지 않으시고 세상마칠 때까지 온 세상 방방곡곡 만민의 가슴 속에 강생하시길 원하신다. 그 방법이 성체성사인 것이다.
빵의 모습으로 우리 안에 오시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 또한 사랑 자체인 그리스도께서는 갈바리아 십자가의 죽음 때만이 아니고 순간순간 세상 마칠 때까지 세상 곳곳에서 성부께 자신을 봉헌하고 싶어 하신다.
그 방법도 역시 미사성제를 통하는 방법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 따라서 성체성사는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가장 적절한 표현방법이며 성체성사는 예수님의 최고 걸작품이다.
성자께서 강생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구원이다. 인간구원을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바, 이는 소극적 구원과 적극적 구원이다. 소극적 구원은 물에 빠진 사람을 물에서 건져내는 데 비유한다면, 적극적 구원은 건져낸 사람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좋은 음식을 먹여 훌륭히 교육시켜 아들로 삼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따라서 소극적 구원은 인간해방, 즉 죽음과 죄악의 사슬에서의 해방이다.
이에 반해 적극적 구원은 하느님과의 일치요 인간신화(人間神化)이고, 하느님의 신성에 참여시켜 하느님과 같은 존재가 되게 하는 것이며(Divinisatio), 그리스도화(Christoficatio)하는 것이다. 성 아타나시오는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을 하느님으로 만들기 위함”이라고 했다.
예수님이 성체의 모습으로 우리 마음에 오심도 마찬가지로 우리 구원을 위함이며 강생의 신비의 구체화라고 할 수 있다.
첫째로, 구원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이니 성체성사야말로 죽음에서 해방시켜 주는 영생의 빵이기 때문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죽어도 죽지 않고 영원히 살리라.”(요한6,54)고 하셨다.
아무도 죽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으며 영원히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영웅호걸도 왕후장상도 이 소원을 이루기 못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 간절한 소원을 성체성사 안에서 채워주셨다. 그리하여 “죽음아, 네 승리는 어디 갔느냐? 죽음아, 네 독침은 어디 있느냐?”(1고린15,55)고 노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써 죽음을 이기시고 또한 영생의 빵을 주신 것이다.
둘째로, 성체는 죄악에서 해방시켜 준다. “원수인 악마가 으르렁대는 사자처럼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고”(1베드5,8) 있는데, 인간은 바람에 날리는 갈대처럼 연약하기에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으니”(마태26,4) 죄를 이기고 신앙에 항구하고 주의 계명을 지켜 나가려면 하느님의 도우심과 특별한 보약이 필요하다. 달나라에 가는 인공위성에 특별한 연료가 필요하듯이 천국으로 가는 인간에게도 특수연료가 필요하다. 그러한 보약이나 연료로써 성체를 주신 것이다. 원래 보약이란 병을 고치기도 하지만 몸을 튼튼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성체도 이같이 인간이 오욕의 불을 끄고 칠죄 중에서 벗어나게하는 치료효과가 있을 뿐만 아니라 굳세고 튼튼하고 용감하게 하는 보약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셋째로, 인간신화를 위한 유효한 수단이다. 인간이 하느님과 일치하고 하느님을 닮는다는 것은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기적처럼 어려운 일이다. 이를 위해 하느님이 인간으로 강생하셨듯이 그러기 위해 빵이 되시기까지 하셨다.
인간이 하느님을 닮으려면, 즉 그리스도처럼 되려면 특수한 음식이 필요한데, 그 음식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이다. 그리스도를 먹고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이다.
성체도 음식인 이상 먹힌다는 점에서 다른 보통 음식과 마찬가지지만, 보통음식이 먹는 자의 피와 살이 된다면 성체는 오히려 먹히는 자의 피와 살, 즉 그리스도의 피와 살이 된다는 점이다. 이렇게 하여 인간신화, 인간의 그리스도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느님의 외 아드님은 우리가 당신의 신성에 참여할 수 있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당신이 사람이 되심으로서 우리가 신이 되도록 우리 인성을 취하셨다.”고 했듯이 이러한 인간신화를 위해서 하느님이 인간으로서의 육화가 필요했고, 더 구체적으로 빵의 모습으로 우리 각자에게 강생하심이 필요했다고 할 수 있다.
성체성사는 인간혁신의 수단이다. 즉 성체성사는 인간이 “낡은 인간을 벗어 버리고 새 인간으로 갈아 입도록 하고”(골로3,9),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완전하신 것 같이 완전한 사람이 되도록”(마태5,48)하는 새 인간창조를 위한 수단이다.
그러므로 바오로 사도는 “새로운 마음으로 새 사람이 되라.”(로마12,2; 골로3,9; 에페4,24)고 역설하며, “창조주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새로운 인간으로 창조하시며”(로마11,36; 에페2,10)라 하고 새로운 인간은 무엇보다도 “형제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고 다투어 남보다 앞서서 서로 존경하고”(로마12,9) “기뻐하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기뻐해주고 우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울어주며”(로마12,15)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바칠 수 있는”(요한15,13) 사랑의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새로운 인간을 위한 인간, 종말인간(1고린15,45), 규범인간, 본연의 인간, 미래의 인간이란 말로 표시하기도 하지만 간단히 말해 그리스도를 닮은 인간, 즉 사랑의 인간이다. 그리스도가 되기 위해 그리스도를 먹어야하고 사랑이 되기 위해 사랑을 먹어야 하는 것이다.
넷째로, 성체성사는 사회혁신의 도구이다. 인간을 혁신하는 이유는 인간의 집단인 이 사회를 혁신함에 있다. 교회헌장에 “이 백성의 으뜸은 그리스도 자신이요, 이 백성의 율법은 사랑의 계명이요, 이백성의 목적은 하느님 나라 성취이다.”(교회9)라고 하며 교회의 존재이유를 하느님 나라건설에 있다고 했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 하느님나라가 임하게 되고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재정립되고(에페1,10) 하느님이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이 되고 즉 만물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가득찬 상태를 만드는 데 있다.
“전 인류가 하느님의 한 백성을 구성한 그리스도의 한 몸에 성령으로 한 성전을 건설하게 하기 위함이다.”(교회17)
4. 성체를 영하기 위한 준비
성체가 강생의 신비의 연장이라면 성체를 영할 때마다 우리는 성자잉태의 기쁨을 맛보게 된다. 아기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처럼 정결함과 순명하는 마음으로 모셔야 할 것이다. 2000년 전 베들레헴에서 문전박대당하며 춥고 누추한 외양간에 오셨던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다시 오시는데 인류가 범했던 실수를 되풀이해서야 될 것인가?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최선의 준비를 해야 한다.
만군의 왕이시오 생사대권을 가지신 분이 오시는데 어찌 가만히 있으랴! 영성체는 하늘과 땅의 결합이요 빛과 어둠의 결합이요, 생명과 죽음의 결합이요, 가치와 허무의 결합이요, 임금과 종의 결합처럼 지극히 높은 자와 비천한 자의 결합이니 이 얼마나 감격적인 순간이겠는가!
“드디어 나타났구나!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창세2,23)하고 아담이 하와를 만나 부르짖던 감격적 순간의 재현일 수 있다. 어느 글라라회 수녀는 “빈털털이 방랑자가 부자를 만난 기쁨이요, 앓는 사람이 의사를 만난 기쁨이요, 굶주린 사람이 음식을 본 반가움이요, 목마른 자가 옹달샘을 만난 감격이라”고 영성체의 기쁨을 묘사하고 있다.
영성체를 통하여 천주성자가 성모께 잉태되었듯이 우리 마음 속에서도 강생의 신비가 재현되는 것이다. 그때 우리도 성모님처럼 마니피캇으로 응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큰 은혜가 내리지만 우리가 합당한 준비를 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보배는 비오듯 쏟아지나 받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 다르다.”라는 말처럼 성사를 통한 하느님 은혜가 비록 바닷물처럼 많다 해도 우리의 받을 그릇이 작으면 그 이상 더 받을 수 없는 것이다. 한 홉 짜리는 한 홉, 한 되짜리는 한 되, 한 말짜리는 한말 이상 더 받을 수 없다. 갈바리아 산에서의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똑같이 구원의 순간을 지켜보았지만 우도는 믿음을 발하여 주님의 은총으로 구원되고 좌도는 그렇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오로지 마음의 자세에 달려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성체를 습관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해서는 안 되며 또 자주 영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잘 준비하여 영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먼저 자신을 살펴보고 빵을 먹고 잔을 마셔야 한다.”(1고린11,20) 또 육신의 준비로는 한 시간 공복재를 반드시 지키도록 하고 있다.
5. 성체를 영한 자의 의무-성체의 삶
성체를 영한 자는 무엇보다도 감사해야 한다. 성체(Eucharistia)란 말은 어원상 감사한다는 뜻이다. 감사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 주여, 주여 부른다고 모두 천국 가는 것도 아니고(마태7,21),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는 잘라 버린다(루카13,7)고 했고, “행동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야고2,17)라고 했다. 열매를 맺으려면 두 가지 의무를 완성해야 한다. 첫째는 개인적 의무요, 둘째는 사회적 의무이다.
성체는 우리를 변혁시키러 오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닮은 새로운 인간으로 만들기 위하여 오시는 것이다. 사랑의 인간이 되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를 먹고 그리스도가 되고, 사랑을 먹고 사랑이 되게 하기 위함이다. 성체를 영하고도 새로운 인간으로 탈바꿈하지 못한다면 비료를 주어도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처럼 주님의 저주를 받기에 알맞다.
성찬례 중의 놀라운 변화란 우리가 그리스도화 되는 데 있는 것이다. 보통의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하듯이 보통 사람인 우리가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며, 그리스도가 우리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보통 음식을 먹으면 내가 자라지만 성체를 영하면 내가 자라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나는 점점 작아지고 그리스도가 점점 커지시는 것이다.(요한3,30) 그리하여 사도 바오로처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신다.”(갈라2,20)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내 안에 내가 살지 않고 그리스도가 사신다면 그 그리스도는 무엇을 하시기를 원하실까? 다시 인류의 죄를 보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제헌되기를 원하실 것이고 당신의 살과 피를 사람들에게 음식으로 내어주길 원하실 것이다, 즉 형제들의 밥이 되고자 하실 것이다. 바로 여기에 영성체하는 자들의 사회적 의무가 있는 것이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이 불이 이미 타 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루카12,49)하신 예수님은 이 세상에 사랑의 불을 놓기를 원하신다. 우리를 부르시고 당신의 피와 살로 우리를 양육함은 이 세상에 불을 지르기 위한 볼쏘시개로 쓰기 위함이다. 그런데 이 불쏘시개가 불붙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얼마나 안타까우실까!
“하느님의 나라가 오시기를” 기도하시는 예수님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가 건설되기를 원하신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온 세상이 재건되고 그리스도 안에 모든 인류가 하나 되어(에페1,10) 사랑만이 만물을 완전히 지배할(1고린15,28) “죽음도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새 하늘과 새 땅”(묵시21,1-40을 건설하길 원하신다.
최후만찬 때 예수님께서 “나를 기념하여 이를 행 하여라”(루카22,19; 1고린11,24)하심은 빵을 축성하고 나누어 먹는 예식만 행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최후만찬 때 제자들의 발을 씻음과 같이 그러한 봉사의 생활을 하며, 예수께서 우리 죄를 보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것도 부족하여 당신의 살과 피를 주셨음 같이 우리도 그렇게 희생하고 형제들에게 살과 피를 주는 생활을 하라는 것이다.
즉 우리의 생활이 하나의 미사가 되고 사랑의 나라 건설을 위한 자기 변모가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정에, 우리 교회에, 우리사회에 사랑이 없다고 한탄할 것이 아니라, “사랑이 없는 곳에 사랑을 심으라. 그러면 사랑이 싹트리라.”는 말처럼 크리스찬 생활이란 사랑이 없는 곳에 사랑을 심는 씨앗으로 살아가야 한다.
꽃이 없다고 한탄한다고 꽃이 피는 것이 아니다. 꽃씨를 심어야 하는 것이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며,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하며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다.”(요한12,24-25)
내가 사랑의 밀씨가 되어 떨어져 죽으면 백배의 사랑의 밀씨가 생기고, 그 백배나 되는 사랑의 밀씨가 또 떨어져 죽는다면 만 배의 사랑의 밀씨가 생길 것이고, 이렇게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것이라면 나의 희생이 보잘 것 없다고 주저할 수만 없을 것이다.
6. 성체성사의 신비로 민족중흥의 새 역사 창조
개인으로는 우수하나 단결하지 못하며 분열되기 쉬운 취약점을 지닌 우리 민족이 하나로 화합하고 일치할 수 있는 길은 성체의 신비뿐이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마태22,37-38) 그리스도교의 사랑의 정신 뿐이다. 우리는 한 몸이며 네가 죽으면 내가 죽고 네가 살 때 내가 산다는 그리스도의 신비체 정신이다.(1고린12,12-31)
진정한 애국 애민 정신은 형제를 위해 살과 피를 내어주는 성체의 신비 안에서 살 때 가능하다. 우리 순교자들도 위주치명자(爲主致命者)라고 하지만 육당 최남선 선생은 그뿐만 아니라 위국치명자(爲國致命者)라고 한다. 왜냐하면 “가톨릭 종교야말로 이 나라 이민족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종교다.”는 신념으로 죽었기 때문이라 하며, 자신도 개종 선언문에서 “가톨릭 정신이야말로 이 나라 이 민족을 구할 수 있기에 애국적 차원에서 개종한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선조들인 이벽, 다산 형제, 권철신, 권일신, 이승훈, 이가환 등 당대의 쟁쟁한 학자들이 이 땅에 찬주교를 영입한 것은 단순한 종교적 차원에서만이 아니고 이 종교야말로 이 나라 이민족을 구할 수 있다는 애국적 차원도 있었다고 한다.
우리 모두 사랑의 성사요, 일치의 성사인 그리스도의 성체를 방방곡곡에 전하고 삼팔선을 넘어 북한 땅에도 성체를 모시고 갈 날이 속히 오기를 소망해야하겠다.
성체의 신비로 사랑과 봉사와 희생의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구원의 길인 한편, 참 애국운동이요 구국운동인 것이다.
7. 맺음말
성체는 크리스찬 생활의 뿌리요 꽃이며 성체성사는 강생의 신비의 연장이고 인류구원을 위한 구체적 수단이다. 인류구원은 죽음과 죄악을 이기는 보약으로, 인간을 죽음과 죄악에서 해방시키며 새 인간을 만들어 인간신화(人間神化)를 이룩하고 인간사회를 혁신하는 성사이다, 따라서 이 성사를 합당하게 영하여야 하며 나아가 성체를 영하는 자는 개인적 구원과 사회적 사명을 지닌다. 성체를 닮아 사랑이 되어 이 세상에 사랑의 나라를 건설할 사랑의 씨앗이 되어야할 것이다, 성체를 통하여, 성체 안에서, 성체와 더불어, 새사람이 되어 성체의 신비로 자신을 구원하고 나라와 민족을 구원하여야 할 것이다.
첫댓글 우리 던지실 성당 교우들은 참으로 재수?가 아니고 주님 축복을 받았습니다. 오랫동안 갈망하던 훌륭한 신부님이 오셔서 정말 풍부하고도 영양가 많은 양식을 매일 먹을 수 있으니까요! 주님, 감사합니다.
저는 언제부턴가 하느님이 어디 계시냐는 물음에, 온 우주 전체가 얼마나 큰지 아느냐? 그 큰 우주를 다 내려다 보시는 분이 얼마나 크시겠느냐? 그런 분을 먼지만도 못한 인간이 어떻게 볼 수 있는가? 하며 저 자신이 묻고 저자신이 대답을 하곤 합니다.
그렇게 상상도 할 수 없이 크신 분이 흘리신 한 방울이면 얼마나 많은 양이겠는가? 온 우주를 덮고도 남을 양이 아닌가?
이슬비 한 방울은 아무 역할도 할 수 없지만, 양동이 물을 한 번에 쏟으면 어느 정도의 면적은 깨끗이 할 수 있지 않는가?
하물며 그 엄청나게 거인이신? 분이 흘리신 한 방울이면 온 우주 안의 모든 것의 더러움을 깨끗이 씻고도 남을 것이다.
우문현답인가요? 우문우답인가요??????
예수님과 성모님같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않을 자녀들로 본당신자 모두를 사랑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여러번 읽고 마음에 새겨 실천에 옮길 수 있도록 성령께 도움을 청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