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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오슬로가 이번에는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절)’의 파리를 이야기합니다. 역사를 주름잡았던 18, 19세기의 명사 100여 명이 〈파리의 딜릴리〉(2018), 이 한 작품을 위해 총출동했어요. 피카소, 르누아르, 모네, 콜레트, 로트렉, 알폰소 무하, 파스퇴르, 프루스트, 드뷔시, 까뮈, 로댕, 까미유 끌로델, 에펠… 등등. 그림들이 얼마나 정성스러운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이름과 건물들이 제법 됩니다. 그런데 그 중 〈파리의 딜릴리〉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허락한 인물은 엠마 칼베와 마리 퀴리, 사라 베르나르, 그리고 혁명가인 루이즈 미셸입니다. 모두 여성이죠. 이 도시에서는 여자아이들이 사라지는 흉악한 사건이 연일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마스터맨’이라는 자들이 하는 짓이었는데요. 사라진 소녀들을 구하기 위해 여성 영웅들이 지혜를 모읍니다. 하지만 진짜 대단한 일을 해낸 사람은 식민지 출신 꼬마 ‘딜릴리’였어요.
배제의 법칙:
“충분히 희지도 충분히 검지도 않은” 딜.릴.리.
딜릴리는 프랑스령 뉴칼레도니아 지방인 카나키 태생입니다. 뉴칼레도니아에 유배 중이던 혁명가 루이즈 미셸에게 고급 프랑스어를 배웠고, 몰래 올라탄 배에서 만난 백작부인에게 상류층의 예절과 관습을 익힌 딜릴리는 웬만한 프랑스인보다 프랑스인답습니다. 하지만 피부색은 까맣죠. 딜릴리는 그저 자신의 피부색을 인정해주는 곳에 살고 싶어서 밀항을 했어요. 부모 중 한 쪽은 카나키인이고 다른 한 쪽은 프랑스인인 딜릴리는 카나키에서는 프랑스인이라 불렸고, 프랑스에서는 카나키인이라고 불렸습니다. 카나키에서 딜릴리는 충분히 검지 않았고, 프랑스에서는 충분히 희지 않았죠. 파리에서 딜릴리는 심지어 원숭이 같다는 말을 듣습니다. “이번에는 내가 저들을 구경할 차례야.” 테마파크에서 카나키족 역할을 하던 딜릴리가 퇴근하면서 오렐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오렐과 딜릴리는 함께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마스터맨 검거에 공을 세우는데요. 그러다가 마스터맨들에게 납치되고 말죠.
마스터맨 소굴에서 딜릴리가 만난 세계는 벨 에포크의 화려함과는 너무 달랐어요. 납치된 여자아이들은 ‘네 발’이라고 불렸습니다. 검은 천을 뒤집어쓴 채 의자나 탁자가 되고 기어 다니기를 종일 훈련받았어요. 여자들이 대학에 가고 권력을 쥐면서부터 세상이 이 꼴이 되었다고, 마스터맨 두목은 한탄을 합니다. “마스터맨이 지배할 것이다!” “부패한 파리를 숭고한 파리로!” 그들이 서로 만날 때마다 주고받는 암호문입니다. 그들은 불편한 존재들을 배제(제거)하고 검은 천을 덮어씌워 깔고 앉으면 세계를 깨끗하게 할 수 있다고 믿었던 거지요.
반면 딜릴리는 여성들이 ‘네 발’이라 불리는 세계에서, 그들이 두 발로 걸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기억하게 해주었어요. 복종하지 않으면 하수구에 던지겠다고 마스터맨이 협박할 때는 보란 듯이 스스로 몸을 던져 탈출합니다. 그리고 동지들과 함께 소녀들을 구하러 다시 지하로 내려갔어요. 예쁘디예쁜 이 영화는 실상 경계인으로서 폭력과 배제의 도시를 관찰한 이 작은 여자아이가 편견에 저항하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야말로 파리가(그러니까 우리가) ‘숭고함’을 지키는 비결이라고 말해요. 숭고함이라고 쓰면서 저는 지금 그리스도인들의 거룩함과 복음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언어만으로는 익힐 수 없는, 포옹의 촉감
엄연한 존재를 비존재로 만들고, 맘에 안 드는 더러움을 제거하는 것이 숭고함과 거룩함을 지키는 최선의 방법은 아니겠지요.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저는 ‘르뵈프’라는 남자에 주목해보겠습니다. 르뵈프는 엠마 칼베를 모시는 운전사였는데요, 마스터맨의 술책에 빠져 딜릴리를 지하 세계로 유괴했다가 마스터맨 조직을 폭로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칼베와 오렐을 데리고 딜릴리를 구출하러 갑니다. 그런데 하수구에 몸을 던져 시궁창 물 범벅이 된 딜릴리가 가장 먼저 달려가 안긴 것은 바로 이 르뵈프의 품이었어요.
“그런데 지금 저를 안아주는 거에요? 이렇게 더러운데요?” 딜릴리가 뒤늦게 자신의 상태를 깨닫고 물었어요. 진짜로 더럽고 부끄러운 것은 지하의 그들이라고 말하며 르뵈프와 오렐과 칼베는 모두 함께 이 꼬마를 껴안아줍니다. “네가 거기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우리가 다 봤어, 얼마나 멋지게 저항했는지도.” “네가 자랑스러워.” 칼베와 르뵈프가 말했어요. 미로슬라브 볼프는 포옹이 여러모로 포용과 닮았다고 말했죠. 카나키인들에게도 프랑스인들에게도 ‘다르다’는 이유로 배제되었던 딜릴리는 이제 가장 더럽고 냄새나는 모습으로 포용을 경험합니다.
사실 딜릴리에게 가장 먼저 ‘포옹’을 가르쳐준 사람은 마담 칼베였습니다. 공교롭게도 르뵈프에게 무시와 수모를 당한 후였죠. “포옹이 뭔가요?… 이건 처음 배우는 건데, 참 좋네요.” 마담의 품에 다시 폭 안기면서 딜릴리가 행복해 합니다. 고급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딜릴리였지만, 포옹이 누군가의 무릎에 앉아 가슴에 얼굴을 기대고 심장 소리를 듣는 두근거리는 일이라는 것까지 몸으로 익히지는 못했던 거지요. 파리의 컴컴한 지하수로에서 딜릴리를 품에 안고 당대 최고의 소프라노가 노래를 합니다.
칼베는 또 소녀들을 구출하는 긴박한 순간에 한 사람씩 들어 올리며 눈을 맞추고 다정한 인사를 건넸어요. “안녕, 작은 별.” “꾀꼬리 같은 아이구나.” “안녕, 꼬맹아.” 이렇게요. 그리고 곧 ‘끔찍한 일을 겪은 아이들을 위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해요. 검은 천을 뒤집어썼던 비-존재들은 칼베의 노래를 들으며 다시 어느 집 귀한 아기씨들이 되어 하늘을 나는 배에 오릅니다. 영화 속 누군가의 대사처럼, 그리하여 세상이 다시 아름다워졌다지요. 이것이 바로 복음(Good News)이고 진짜 숭고함이라고, 이 땅의 마스터맨들에게 간절히 정중하게 고하고 싶어집니다.
최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