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1일 사순절 첫째 주일 * 삼일절 기념주일
(코로나19 확산으로 평화목교회는 가정예배로 드립니다. 마태복음 4:1-11을 읽고 묵상한 후에 다음 글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찬송묵상은 586장입니다)
1. 세 가지 시험 묵상과 적용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도전을 받는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이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면, 그리스도가 나와 무슨 관계인지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되물어야 한다.
세 가지 시험을 당하신 예수의 이야기가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입증하는 데만 필요한 말씀이라고 생각하면, 이 말씀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 말씀을 읽는 동안 적어도 세 가지 시험이 내게 던지는 도전에 응답할 준비를 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천 년 전 주님이 받은 시험을 성령께서 준비하신 시험이라면, 이 시험은 21세기를 사는 현대 크리스천에게도 매우 중요한 시험이다. 그리고 이 시험은 그리스도인을 서게도 하고 넘어지게도 하는 결정적인 시험이다.
(1) 묵상: 돌로 떡을 만들 수 있다면, 이것은 세상의 수많은 문제를 해결해줄 능력이 된다. 바닷물을 무한정 민물로 만들 수 있다면 사막을 옥토로 바꿀 수 있고, 지구의 온도를 1도만 낮출 수 있다면 온난화의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다. 전쟁과 살상에 쓰일 온갖 무기들도 초능력으로 무용지물이 되게 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토록 바라던 하나님의 평화가 이 땅에 실현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아무리 좋은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 방법과 과정이 올바르지 않으면 안 된다. 마땅한 일은 마땅한 방법으로만 이룰 수 있다. 지천에 널린 돌이 떡으로 보였던 예수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기적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헤매다가 굶주렸을 때 하늘로부터 내린 만나는 하나님의 자비였다.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자비는 임한다. 우리가 바랄 것은 기적적인 만나가 아니라,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신다는 약속이다. 타울러(Johannes Tauler)는 그의 설교집에서 “영적인 만나를 경계하라”고 말한다. 기적만 바라고 살다가는 기적에 취해서 본질을 놓치기 쉽다는 뜻이다.
(1) 적용: 떡이 떡일 뿐인 것처럼 돈은 돈일뿐이다. 배고픈 사람의 허기를 해결하는 떡은 그 역할이 거기까지이다. 돈이 없으면 먹고살 수 없지만, 돈이면 무엇이든지 다 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돈에도 이름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돈이 가진 위력은 포텐셜 에너지(Potential Energy)이다. 말 그대로 위치에너지이다. 돈 그대로 있을 때는 모르지만 그 위력이 발휘되기 시작하면 그 앞에 무릎을 꿇을 사람이 많다. 돈이 없이는 못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선한 일도 구제하는 일도 돈이 한다. 하지만 그 돈은 깨끗한 돈이어야 한다. 땀 흘려 번 돈이어야 한다. 위력이 있다고 교회가 다 받아들이면 돌 가지고 떡을 만들어 보라는 시험에 걸린다. 돌은 돌이고 떡은 떡이다. 돈은 돈이고 신앙은 신앙이다. 제발 물질적 이익을 바라서 자기 신앙을 팔지 말라는 말씀이다.
(2) 묵상: 이제 마귀는 예수에게 성경을 인용하며 시험한다. 성경으로 유혹을 이기니, 다시 성경으로 유혹하는 것이다. 마귀도 성경을 잘 안다는 말이다. 이 말은 우리가 잘 아는 성경 말씀이 잘못 해석되면 오히려 우리를 함정에 빠뜨릴지도 모른다는 의미이다. 만일 우리가 성경 속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본정신을 놓친다면 말이다. 그래서 성경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면 절대로 안 된다.
예수는 두 번째 유혹에 대하여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내가 지금 요구하면 다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여기면 안 된다. 나의 요구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필요에 의하여 일은 일어난다. 그러므로 상식과 이성에 배치되는 일을 벌이면서 하나님이 이것을 이루실 거라고 여기저기 성경 이야기를 끌어대는 짓거리는 감히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시험하는 망령된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2) 적용: 우리는 종종 어려운 일을 자기가 벌여 놓고 하나님이 다 해결하신다는 말을 하곤 한다.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시작하고 하나님께 기도로 매달린다. 그렇게 하는 것이 신앙심 깊다고 생각하고 성사되면 하나님을 찬양한다. 성사되지 않으면 하나님 뜻이 아니었다고 하며 결과를 수용하는 멋진(?) 모습도 보인다. 겉으로 보기에 이것은 세 가지 매우 잘난(?) 신앙의 모습이다. 첫째,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였고, 둘째,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으니 능력 있는 신앙인임을 입증했고, 셋째, 실패해도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신앙인이다.
하지만 그는 평생을 그렇게 살다가 죽는다. 단 일보의 신앙적 전진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안다면, 하나님의 뜻에 맞는 일만 하면 될 것 아닌가? 왜 자기 욕심대로 하다가 성공하면 하나님 뜻이고, 아니면 하나님 뜻이 아니라는 말인가? 성전 꼭대기에서 주님은 성전권력을 차지하는 일이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아닌 것을 요망한 말로 논리를 만들고 포장해서 마치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만들지 말라는 시험이 두 번째 시험이다.
(3) 묵상: 마귀의 세 번째 유혹은 거의 결정적인 유혹이다. 왜냐하면 “큰일”을 도모하는 인간의 심리상태를 정확하게 짚어내는 유혹이기 때문이다. 기적으로도 안 되고, 하나님께 생떼를 써도 안 되면, 인간은 결국 악마에게 자기 영혼을 판다. 이 말의 의미는 해서는 안 되는 일을 벌여서라도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한다는 말이다.
예배당을 건축할 준비도 없이 기적만 바라다가, 하나님의 집이니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라고 생떼를 써도 안 되면, 결국 온갖 편법을 동원하거나 부정까지 저지른다. 신앙이 고개 숙이기 가장 쉬운 마귀의 유혹은 단연코 “돈”이다. 재물은 사람이 가지고 싶어 하는 모든 것을 상징한다. 그것을 얻으려고 고개를 숙이는 순간, 그는 신앙을 버린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얻어내면 신앙이 좋아서 하나님이 이루어주셨다는 논리는 어디서 나온 것인지 신학은 모른다. 신앙인은 자기의 목표를 이룰 수도 있고, 이루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성공과 실패는 아니다. 신앙의 영역에서는 번성과 번영이 아니라 번민과 번뇌가 그 사람을 성숙시킨다.
(3) 적용: 인간은 한 번 뜻을 세우면 포기할 줄을 모른다. 그런데 교회에서 그렇게 내버려두면 안 된다. 교회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판단하실지 생각해보라고 가르쳐야 한다. 자기 욕심대로 사는 인간이 교회 안에 들어오면 하나님의 은혜와 만나게 된다. 교회는 이 은혜가 제발 “값싼 은혜”가 되지 않도록 경계하고, 반대로 하나님의 은혜가 나에게 들어와 끝없는 나의 욕망과 어떻게 투쟁하는지 느끼게 해야 한다.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는 은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악마의 사역이다.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신앙을 이용하는 일은 하나님 대신에 악마에게 자기를 팔아버리게 될 위험이 매우 높다.
“시험하다”(πειραζω)라는 말은 영어로 temptation이다. 이 말은 라틴어로 tento인데, “유혹하다”, “만지다”라는 뜻이다. 영어는 라틴어에서 파생되었다. 그런데 이 단어를 잘 사용한 종교개혁자가 Martin Luther이다. 그는 말씀과 기도를 병행하기를 바랐는데, 말씀과 기도가 완성되는 자리가 바로 tentatio(유혹, 시련)의 현장이라고 보았다. 자기의 삶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나의 기도는 단련의 과정을 겪으며 완성된다. 그러므로 예수의 시험은 바로 나의 시험이 된다. 광야에서 당하는 예수의 시험은 신앙이 모두에게 해당하는 시험이다. 그리고 시험과 유혹이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시험과 유혹은 “검증”(proof)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1) 나는 마땅한 일을 마땅한 방법으로 하는가? (2) 나는 행여나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하며 살지는 않았는가? (3) 혹시라도 부정한 방법으로 내 영혼과 양심을 악마에게 판 일은 없는가? 두고두고 고민해 볼 일이다.
세 가지 시험은 예수만 당하는 시험이 아니라, 우리도 겪는 일상의 시험이다. 예수는 성령에 이끌려 자발적으로 시험을 치렀다. 그리고 그 시험을 이겨냈다. 우리는 시험인줄 느끼지도 못할 때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분별력을 키워야 한다.
2. 3.1절 101주년에 생각할 것
오늘은 삼일절 101주년 되는 날이다. 예수의 세 가지 시험 이야기와 삼일절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 101년 전 삼일절에 비폭력저항을 통하여 나라의 독립을 만방에 알렸던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의 행동이 어떤 신앙적 근거에서 나왔다고 생각했을까?
악마의 시험 앞에서 자기의 마음을 드러낸 예수는 이방민족의 지배로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깊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헤롯가문이나 예루살렘의 고위 종교지도자들은 어용 지도자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101년 전 1919년 삼일절이 의미가 있는 것은 1907 평양 대 부흥 운동이 가져온 내면적 신앙부흥을 10년이 지나 민족의 해방과 신앙을 연결시키는 기점이 되었다는 점이다. 기독교 신앙이 자리 잡으면, 다른 민족을 무력으로 지배하는 일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출애굽의 하나님이 해방과 독립의 하나님이시다. 삼일운동은 전국적이었고 전 기독교적이었다. 일본은 이를 무력으로 제압하였고 기독교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작년 100주년에 나온 여러 자료들에 기독교인의 투옥상황이 그대로 드러난다. 다른 종교와 비교할 때에도 그 참여율과 피해는 놀라울 정도이다.
민족대표 33인 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고, 그중에 체포된 후 변절한 자들도 있다. 재판기록에 보면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기도 하였다. 어쨌든 삼일독립만세운동 이후 기독교인 친일적인 모습이 두드러진다. 일부는 비폭력투쟁을 접고 무력투쟁으로 전환하기도 하였다. 지배자 그것도 타민족의 불법적 식민지배에 힘과 용기가 없어서 반대하지는 못할망정, 그 지배자의 힘을 빌어서 자기의 지위를 유지하고 이득을 얻으려한다면, 그것은 예수의 시험을 자기의 시험으로 삼지 못한 결과이다.
포로에서의 자유와 해방은 우리 민족의 외적인 해방이지만, 우리 개인은 자신을 사로잡은 욕망에서의 자유와 해방을 누려야 한다. 민족을 이끄는 지도자에게도 마땅한 일을 하도록, 그리고 마땅한 방법으로 하도록 우리는 끊임없이 요구하여야 하며, 우리 자신도 나의 욕망과 대적하여 같은 정신으로 살도록 노력해야한다. 아무리 이득이 크다고 하여도 마귀의 것을 따라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