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영해군 , 그 책에 실을 광고 카피[copy]입니다
昭德祠고장 남원 詩山君 후예 집성촌 유래
영해군. 차남 길안도정 義의 장남 詩山君 이정숙의
휘는 정숙, 호는 삼사당, 시호는 문민이다.
시산군은 어머니(여산송씨)를 일찍 여의고 외가 정읍 칠보에서
자랐으며, 서울에서 조광조와 도학으로 의리를 맺어 친히 사귀며,
중종반정 이후 조선 유학자의 우두머리가 되어 중종에게 송나라
장이천과 주희의 글을 올리며 굳건한 왕도정치를 위해 힘썼으나,
기묘사화 때 조광조가 억울한 누명으로 탄핵 되자 시산군도 같은
士林이어서 삭탈관직 되었고, 중종 16년 (1521년) 10월 16일 신사
무옥(안처겸의 옥사)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16일 처형되고, 17일
날 외아들 (위威, 15세)도 그 연좌제로 죽임을 당하였으나, 선조대
왕 때 복원되고, 정조대왕 17년 정의대부 시산군 시산부정으로 증
직되고 시호가 내려졌다.
(그 이야기가 이석규의 역사소설 (후예 1 시산군)'의로 2024년 5월
에 출간되었다.)
자손이 없어 동생 청화수의 차남 용성정 열이 시산군의 양자로 입
적하였다. 그의 4남 경여 (후천공)이 할아버님이신 시산군처럼 정사
에 휘말려 화를 당할까 봐 새로운 둔 거지를 고르던 중에 한응태 외
삼촌이 사시는 남원시 사매면 여의터(매안이)로 선조 27년 1594년
29세 때 낙남落南한다.
그 자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해마다 날마다 번성하는데 이곳 매
안이에 (영해군. 할아버지 사당, 昭德祠가 있는 탓일까?) 그 자손 중
에 만석꾼 이교항 씨, 제헌의원 이정기 씨, 우리나라 2~6대 상공회
의소 회장 이석동(문화연필 사장)이 나와 나라와 宗嗣에 크게 이바
지하였으며, 남원 3.1독립만세의거 때는 이 마을에서 11명의 독립
운동가를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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