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인계동 31
아나운서의 말이 끝나자 곧 화면은 남산에서 시내를 찍은 화면과 함께 젊은 기자의 얼굴을 비추고
-오늘 아침 기상청은 서해로 부터의 낮은 기압골의 영향으로 많은 양의 비가 내리겠다고 발표를 하였습니다.
이번 비는 강한 바람을 동반한 국지성의 비로서 특히 중부지방에 적지 않은 양으로서 30미리 이상이 될 것이
라고 하였습니다. 더구나 이번 비는 간간히 폭우를 동반할 뿐 아니라 며칠 계속 될 것이기에 저지대의 주민들
은 기상청의 기상예보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이삼일 내릴 비의 양이 많은 곳은 100미리가 넘을 것
이라고 예상됩니다. 이상 케이티시 김청욱입니다.
-예. 다음 소식입니다. 정부는
진철은 장마 뉴스를 들으면서 창밖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뉴스 때문인지 하늘이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라면의 구수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진철은 행주를 들어 라면 냄비의 손잡이를 잡고 발로 책 한권을 밀어
놓은 후 그 위에 냄비를 올려놓는다. 그리고 젓가락으로 라면을 집어 들고 입으로 후후 불며 식혀서 입 안
가득 집어넣는다.
-강원도 명성시의 재래시장에서 오늘 새벽에 큰 불이 났습니다. 수십 채의 상가가 불에 탔고 그 피해도 만만치
않다고 합니다. 강원케이티시 송영옥기자입니다.
아나운서의 말을 들으면서 진철은 화면을 바라본다. 젊은 여기자가 마이크를 들고 서 있었고 그 뒤에 여러
대의 소방차와 시민들 그리고 불이 다 꺼진 것인지 시커먼 연기를 뿜어 올리는 시장 상가의 그림을 보여주
고 있었다.
-오늘 새벽 두시쯤 명성 시장의 한 상가에서 시작된 불은 순식간에 여러 상가를 휩쓸었습니다. 아직 화재의 원
인을 밝혀내지는 못했지만 소방당국은 누전으로 인한 화재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지만
물적 피해는 상당할 것으로 보입니다. 소방당국자의 말을 들어 보겠습니다.
진철은 명성시장이라는 말에 귀가 확 뜨였다. 그 뒤로는 아나운서가 무슨 말을 하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명성 시에 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할 뿐이었다.
‘그래! 명성에 가서 명혜에 대한 소식을 알아보아야 하겠어. 그냥 이렇게 해가지고는 정말 찾을 수 없을지도 몰
라. 생각난 김에, 마침 장마가 온다니 일 하기도 마땅치 않을 거고.’
진철의 라면 먹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4
진우는 아침 일찍부터 서둘렀다. 한 낮의 더위 속에서 움직이는 것보다는 이른 아침 선선할 때 움직이는 것
이 더 낳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샤워를 하고 간단하게 골드크림으로 마사지를 한 후 스킨토너로 닦고 비비
크림을 얼굴에 바르는 것과 아이라이너로 속눈썹 라인을 짙게 한 것으로 화장을 끝내고 립스틱 보다는 립
글로스로 입술을 바르는 것이 오늘 화장의 모든 것이었다. 그리고 티팬티 겉으로 청바지를 입고 위에는 누
드끈 브래지어 위로 하늘색 블라우스를 걸치고 혹 저녁에 서늘할 지도 모른 다는 생각에 흰색 재킷을 걸쳐
입었다. 낮에 더우면 재킷은 벗어 들고 다니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소요산까지 와. 거기가 종점이거든. 그리고 거기서 한 시간에 한 번씩 올라오는 열차가
있는데 그 열차로 이십분 정도 오면 정은 역에 도착할거야. 아니면 소요산 역 건너편에서 버스를 타도되고, 어
쨌든 소요산에 도착하면 전화해. 시간 맞춰서 마중 나갈게.’
박양의 목소리는 전화기 안에서도 들떠있었다. 어쩌면 그 생활을 벗어난 사람에게 찾아간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을 생각한 박양이 인사치례로 다녀가라는 말을 했을 것이고, 그래서 그 누구도 자신을 찾지 않을 것
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진우가 찾아가겠다는 전화를 하자 박양 자신도 놀라움과 함께 반가
움이 넘쳤던 것이다.
진우는 신발장 문을 열고 어떤 신을 신을 것인가를 생각했다. 쉽게 하이힐을 신고가면 무난하겠지만 자유
롭게 움직이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았다. 그냥 편하게 활동할 수 있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스니
커즈를 꺼내어 신고 끈을 조금 느슨하게 묶고 밖으로 나섰다.
팔월의 여름이지만 비가 오려고 하는지 하늘은 검은 구름이 점차 두꺼워지기 시작하였고 바람도 조금 선선
하다. 이런 날씨에 비만 오지 않는다면 여행하기에는 참 좋은 날씨라는 생각을 하면서 시청 버스 정류장으
로 걸음을 옮긴다. 우산을 챙기지 않은 것이 조금 염려스럽기는 하지만 가다가 비가 오면 우산 하나 정도
사는 것도 괜찮을 것이라고 판단을 한다.
진우가 수원역으로 가는 버스에 오르자 찬바람이 가슴을 시원하게 한다. 이른 아침인데도 운전수가 한 여
름의 날씨에 익숙해진 탓인지 습관적으로 에어컨을 킨 모양이었다. 버스는 만원이었다. 하긴 여름휴가 철
이라 하기는 해도 출근하는 사람들은 이 시간대에 출근을 해야 할 테니 버스가 복잡한 것은 당연한 것이리
라.
‘수원에서 오려면 1호선 열차로 청량리까지 와서 갈아타야 할 거야. 승강장이 바로 그 자리이니까 내린 곳에서
타면 되. 수원에서 오는 열차는 청량리가 종점이고 인천에서 오는 1호선이 소요산까지 오는 것이거든.’
박양이 자세하게 설명해준 말이 떠오른다. 수원에서 청량리 그리고 그 자리에서 소요산까지, 소요산에서
정은 역까지. 결국 세 번이나 갈아타야 갈 수 있는 곳이다. 시간도 세 시간 정도는 걸릴 것이라고 했다.
진우는 수원역 개찰구를 빠져나가다가 분식점이 있는 것을 본다. 아무래도 간단한 요기는 하고 가야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여느 때 같으면 지금이 한 밤중일 텐데, 하긴 아침 일찍 서둘렀더니 배도 고픈 것 같았
다. 이대로 점심시간까지 견디기는 힘들겠다는 판단으로 분식점에 들어가 우동 한 그릇을 시킨다. 우동은
채 삼 분도 되지 않아 진우의 테이블 위에 놓여진다. 단무지 몇 점과 함께.
진철이 대문을 나서며 바라본 하늘은 어두웠다. 곧 비라도 쏟아질 것 같은 느낌은 아침 뉴스의 아나운서가
한 말을 떠올리게 했다. 진철은 그대로 나서려다 말고 되돌아 들어가 접이식 삼단 우산을 찾아들고 나섰다.
버스 터미널로 가서 버스로 갈 것인지 아니면 수원역에서 지하철로 청량리로 가서 영동선 열차를 탈 것인
지를 놓고 잠시 생각을 하다가 수원역 방향의 버스 정류소 쪽으로 길을 잡는다. 열차로 갈 생각을 했기 때
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