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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 국경선 통과
나는 유럽 여행 중에서 나라와 나라 사이 넘어가는 마디, 국경선에 대하여 궁금했고, 그만큼 관심있게 보아왔다. 스위스에서 이탈리아로 넘어가는 국경선도 예외가 아니다. 커다란 눈으로 국경선을 찾았는데 확인하기 힘든, 의미 없는 국경선을 통과해 버렸다. 기사가 내려서 몇 가지 신고만 하면 된다고 들었는데, 우리가 탄 버스가 이탈리아 버스라서 쉬울 거라 했는데, 기사가 내리지도 않고 그냥 무사통과다. 이런 국경선도 있던가. 국경선이 이리도 쉬이 넘는 것을 우리나라는 왜 그리도 어려울까. 아름다운 국경선에서 나는, 조국의 국경선이 슬프게 떠오른다. 언제쯤이면 조국의 국경선이 얇아지고, 무사통과가 가능할까. 그날이 오길 빌어본다. |
* 스위스와는 전혀 다른 풍경들
국가와 국가 간의 행정, 문화에 대한 차이는 지붕의 색깔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스위스와는 다르게 집의 지붕 색깔이 붉은 색이다. 스위스가 무거운 톤의 갈색 지붕이라면, 이탈리아는 가벼운 톤의 빨간색 지붕이다. 스위스의 주택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면 이탈리아는 한 마을에 다닥다닥 모여 있다. 평지의 농토 가운데 붉은 기와지붕 물결이다.
땅이 보인다. 농토가 보인다. 산의 형태도 한국과 유사하다. 초지가 아니다. 날씨가 화창하다. 하늘이 투명하다. 빙산이 없다. 이런 등등의 전혀 다른 풍경들이 스쳐 지나간다. 점점 낯익은 평지의 나라 풍경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지우개로 뇌 속의 스위스 풍경을 지우고 새로운 이탈리아의 풍경을 그리는 기분이다. 나름대로 아름답다.
* 코모 호수
이탈리아의 산은 구조에서부터 스위스와는 다르다. 스위스는 보이는 것은 알프스 산맥이어도 도로는 낮은 지대로 나 있었다. 산악지대는 아예 터널로 길을 내어 높은 산을 돌아가거나 고지의 길을 타고 다닌 적이 없다. 빨간 기차가 들녘을 달리기도 하는 곳이 스위스다. 그런데 이탈리아는 아니다. 금새 한국의 어느 산 허리를 넘듯 유로버스가 산을 끼고 돌아간다. 그때 우측으로 아름다운 호수가 보이는데 그것이 바로 코모 호수다. 물빛이 푸르고 아름다워서 이탈리아가 가장 사랑하는 호수다. 내 고향 보령의 거대한 청라 저수지와 유사하여 한참을 보았다. 산과 어우러진 고운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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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 고속도로
지금 달리고 있는 고속도로의 형태가 한국과 비슷하다. 박정희 대통령이 이탈리아에 와서 본떠다가 만들었기 때문이다. 가드레일, 중앙분리대는 이탈리아의 것을 모방했고, 도로 형태는 독일 아우토반을 본떠다가 한국의 고속도로를 만들어서 그렇다. 어쩐지 독일 하이델베르크 성에 갈 때 달린 아우토반 고속도로가 낯설지 않았다. 이탈리아 고속도로도 낯설지 않다. 어느 한국의 고속도로를 연상케 한다. 스쳐 지나가는 들녘 풍경도 우리나라와 유사하여 더욱 그렇다. |
* 롬바르디아 평원
갑자기 산이 하나도 없다. 농사짓는 평야만 눈 앞에서 눈 끝까지 이어진다. 땅을 빨갛게 갈아놓은 농촌 풍경이 보인다. 스위스와는 전혀 다르다. 초지가 아니고 땅이, 흙이 보인다. 초지와 땅이 섞어서 보이기도 한다.
평야지대라서 안개가 많다. 그래서 구름기호를 고속도로변에 설치했다. 이탈리아는 광활한 땅을 소유한 반도국가다. 지중해 연안에 있는 기름진 영토이어서 롬바르디아 평원은 상당히 값진 땅이다.
* 한국과 비슷한 것들
이탈리아는 한국과 비슷한 점이 많다. 집도, 길도, 들판도, 도둑이 많은 것까지 유사하다. 인간적인 정, 음식, 언어도 닮았다. 돈을 좋아하고, 노래와 춤추기 좋아하고, 남부로 갈수록 머리도 까맣고 우리 정서와 유사하다. 남부일수록 농업 지역이어서 더욱 그렇다. 이태리어로 ‘아모레’ 는 사랑을 뜻하며 한국 화장품 상표로 쓰고 있지 않은가. 또한 ‘논노’ 는 할아버지를 뜻하며 한국에서 옷 상표로 쓰고 있다. 그 외 ‘아쿠아’ 는 물 주세요... 등등 이태리어를 한국에서 사용하는 것이 많다. 같은 반도국가라서 그럴까. 바다를 끼고 살며 형성된 문화라서 그럴까. 신기할만큼 닮은 점이 많다. 육안으로도 나무 모양새, 다양한 들녘의 잡풀 모양새, 가옥구조, 농사짓는 형태, 까만머리 등등 한국과 닮은 것들이 참 많다. 낯설지 않아서 좋기도 하지만 신비로움이 떨어지기도 하는 여행이다. 아무튼 한국과 이탈리아가 이토록 유사점이 많음을 알게 된 것도 큰 배움이다. |
* 음악 용어
이탈리아는 음악 유학생이 많은 나라다. 나는 실제로 비행기 안에서 이탈리아로 가는 한국 음악 전공 학생을 만났다. 정열적인 감성이어서 음악과 미술에 대한 발전이 큰 나라인 것 같다. 우리가 쓰는 음악용어가 모두 이태리어라는 사실을 알고 나는 놀랐다. ‘피아노’ 라는 용어는 ‘느리게’ 라는 음악용어다. 지금까지 영어권의 서양 음악 용어로 알고 있었다. 대단한 발견이며 대단한 정보다. 그래서 여행은 가장 큰 교육투자라 했던가. 명소를 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경지에 이르러 ‘나’를 새로운 ‘나’ 로 익혀가는 것이 여행이다. 특히 국외 여행은 더욱 그렇다. |
* 북부와 남부의 차이
북부는 젠틀맨으로 한국의 서울 쪽과 유사하고, 남부는 시골 향기 물씬 나는 한국의 남부 쪽과 유사하다. 그러니까 북부는 사무직, 남부는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빈부의 차이도 북부와 남부는 크다. 그래서 오히려 남부 쪽이 물가가 싸다며 남부에서 사라고 할 정도다. 물론 질적인 면에서는 조금 떨어진다.
남부인들이 조금 기가 죽어서 사는 것도 사실이다. 외형적인 주택 모습에서도 가난한 티가 난다. 어느 국가든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고달프고 배고픈 삶인가 보다. 그러나 한국의 현실은 이보다는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농촌이라도 모든 문화시설, 현대문명이 갖추어져 있고 농사도 기계 도입으로 그리 힘들지 않으며, 어찌보면 한국의 농촌 삶이 더 풍요롭다.
하지만 이런 모든 것들은 국가를 이루는 조화다. 이탈리아가 유난히 차이가 나는 것일뿐이지만 그런 조화 속에서 균형을 이룬다고 생각된다.
* 이탈리아의 날씨
스위스에서 이탈리아로 넘어오자 확연히 다른 날씨를 만난 것은 결코 그 순간의 우연이 아니다. 여행 중 내내 그토록 화창한 날씨였다. 한국의 4월이 이곳에서는 한국의 6월 날씨 정도로 느껴진다. 더워서 반팔 T를 입고 시가지 구경을 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지금 4월 중순에 누가 반팔 T를 입고 다니겠는가. 같은 유럽인데 이탈리아의 날씨는 별천지다. 그로 인하여 바깥 풍경도 다른 유럽과는 많이 다르다. 나무가 무성하고, 풀의 종류가 다양하며 우거져 있다. 꽃도 많고, 녹음의 나라다. 이런 연유로 이태리는 휴양 국가로서 외객의 걸음이 끊이지 않는 나라다. |
* 로마로 가는 길
지금 가장 큰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다. 편도 4차의 크고, 넓고, 긴 도로가 시야에 들어온다. 이곳은 로마까지 타고 내려가는 길이다. 도로 표지판에 ‘A8-1’ 이라는 문구가 있다. A8번 도로인데 첫 번째 육교가 나타난다는 뜻이다. ‘8번 국도, 1번 육교에서 사고가 났다’ 고 말한다. 우리가 지금 타고 가는 유로 버스는 Volvo 이며 상당히 비싸다. 그만큼 많은 길과, 많은 시간 동안 운행하는 이유로 해석된다. 이탈리아가 지리적으로 긴 나라이기도 하지만,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한다는 전성시대가 떠올라 나는 역사의 한 축을 지나는 느낌이 들었다. |
* 밀라노 도착
밀라노 시내에 들어온 것은 오후 5시경이다. 나무와 주변 풍경이 한국과 아주 비슷하다. 밀라노는 한국의 서울격인 도시다. 상업과 패션 도시로 돈이 많은 도시다. 상공업이 발전하여 직업도 다양하다.
밀라노와 피렌체는 GNP도 4만불이다. 잘 사는 만큼 외형도 단단하고 중후한 향기가 흐르고 있다. 건물에서부터 그렇게 느껴진다. 아파트 형태의 주택이 푸른 나무 사이로 보이는데, 중세 고전풍의 조각이 새겨진 건축물로 풍요로움이 돋보인다. 색상도 파스텔조의 톤으로 고상하다.
차량도 많이 왕래하고, 사람도 많고, 상가도 즐비하고 일부의 다른 풍물을 빼고는 진짜로 한국의 잘 발전된 도시에 온 기분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구성한 도시 밀라노, 참 화려하다.
* 밀라노의 전철
밀라노에는 전철이 단 2가지 선이 있다. 2호선 지하철로 구성된 교통수단이다. 발전된 도시인 것에 비하면 참으로 단조로운 교통수단인 셈이다.
노란 전차는 구형이고, 녹색 전차는 신형이다. 도로 곳곳에서 이런 차들이 목격된다. 노란 전차는 작고, 녹색 전차는 길고 많은 사람이 오르내린다. 신기한 풍경이다. 육로로 달리는 전철이 신기하여 정차하는 순간 달려가 가까이에서 보기도 했다. 이탈리아의 여행은 밀라노에서부터 발로 걸으며 이렇게 시작된다.
* 밀라노 구시가지 광장
고성 벽이 높이 남아 있는 아름다운 광장이다. 중앙에는 분수가 원형으로 크게 자리하고 있다. 밀라노 도심에 있어 많은 이태리인들이 모여 있다.
밀라노는 경제, 문화 중심지여서 활발한 거리 표정이다. 인구가 300만명이고 유동인구가 200만명인 도시다. 그만큼 상공업 유동인구가 많다. 구시가지 광장은 밀집된 밀라노를 보는 인상이다.
* 두오모 성당
세계 3대 고딕 양식 성당 중 하나다. 노틀담 성당, 퀠른 성당, 밀라노 두오모 성당인데 밀라노 두오모 성당이 가장 아름답다. 동상이 3159개, 성경 속 인물의 거대 조각상이 외부에 장식되어 있고 100m 높이의 유리첨탑이 135개 솟아 있다. 길이 157m, 높이 109m로 바티칸의 산 피레트로 사원에 이어 세계 2번째로 큰 규모다. 1386년 잔 갈레아치오 비스콘티 공작의 명으로 착공하여 450년간 지은 건축물이다. 1,2차 세계대전 때도 무너지지 않았다. 모두 대리석으로 지어 오래되면 까맣게 때가 껴서, 지금 앞면만 2002년부터 청소하고 있는데 사방을 다 하려면 아마 50여년은 걸릴 거라고 한다. 동상 하나 하나 일일이 손으로 닦으며 청소한다. 교황만이 다니는 문이 따로이 있다. 버스에서 내려 성당 가까이 갔을 때 처음 보이는 한 면에서부터 대단함을 느꼈다. 높고 넓게 자리한 것이며, 가도가도 끝이 없는 성당의 길이, 외벽에 붙어 서 있는 조각 군상들, 비처럼 뾰족이 하늘로 솟은 첨탑들, 말과 글로 다 표현치 못할만큼 크고 웅장하다. 내 생애 가장 크고 아름다운 성당 앞에 와 있다. 성당 내부의 스테인드 글라스와 명화가 또한 아름답고, 본전 정면도 웅장하다. 인간이 만들었다고 보기 힘든 성당이다. |
* 회랑
두오모 성당 뒤편에 있는 긴 건물이다. 외부의 조형 구조도 아름답고 한참을 걸어가 만난 지붕의 천정 그림이 걸작이다. 말 그대로 모여서 회의하는 사랑채 같은 건물이다. 십자로 네 갈래 길도 있고, 돔 형식의 유리 지붕이 독특하다.
지금은 한갖 상가로 들어차 있지만 한 시대의 번화했던 길과 건물을 보고 있다. 잘 꾸며놓은 재래시장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아직도 잘 보존하여 외객의 걸음이 드나드는 것을 보며 타국이지만 문화재에 대한 소중함이 돋보인다.
* 스칼라 극장
회랑을 지나자 아름다운 정원에 다빈치 동상이 서 있는 스칼라 극장을 만났다. 맞은 편에는 현재는 시청으로 쓰는 궁전이 있고 곁에는 은행 건물이 보인다.
한국의 예술의 전당과 같은 곳이다. 오페라 극장이다. 세계적인 오페라의 메카 스칼라 극장은 1778년에 세워졌으나 제2차 세계대전 때 파괴되었다가 1946년에 재건되었다. 푸치니, 로시니, 베르니 등 세계적 오페라 작곡가 작품이 초연된 곳이다.
심플한 외관과는 대조적으로 3000여명 수용 가능하고 내부에는 붉은 카펫이 깔려 있고, 화려한 샹들리에가 늘어져 있어 고급스럽다. 오페라 시즌은 12월부터 다음해 7월까지며 9월부터 11월까지는 콘서트나 발레가 공연된다.
사실 겉으로 보아서는 그리 웅장하거나 아름다운 건물은 아니다. 낙조가 드리우는 다빈치 동상이 더 아름다워 나는 그 동상 곁에만 맴돌았다. 이곳 역시 수많은 이태리 자국인과 외객의 걸음으로 발디딜 틈이 없다. 낭만의 군집이다.
* 네온사인이 없는 나라
유로버스로 도심을 다닐 때 신기한 광경을 보았다. 도로 중앙에 높이 떠 있는 종 모양의 가로등이다. 줄지어 매달려 있어 아름답다. 알고 보니 이 나라는 네온 사인이 없는 나라여서 가로등을 그리 매달았다.
밀라노뿐만 아니라, 로마 등 이탈리아 전역이 네온사인 등을 허락지 않는다. 번쩍 번쩍 휘황찬란한 간판이 없다. 그래서 큰 도둑이 없고, 큰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나라다. 현란한 밤의 조명으로 심기를 교란시키지 않아서 그렇단다.
정열의 나라, 화려한 나라에서 철저한 규제로 사회를 잘 다스린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런 건전한 문화는 품고 가야 할 목록이다.
* 이탈리아 약국
나의 작은 아들이 약사다. 그래서 나는 약국을 유심히 보았다. 우선 약국을 나타내는 십자마크가 모두 녹색이다. 멀리에서 녹십자 마크가 보이면 반드시 그 건물에는 약국이 있다.
약국에 대한 문구도 FARMACIA, 첫 알파벳 글자가 P가 아니고 F로 시작한다. 발음은 파마시아, 동일하지만 표기가 다르다. 여러 곳에는 만나는 약국마다 모두 그렇다. 나는 세계적으로 동일한 문구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변용시킨 약국 문구도 있음을 알았다.
* 변용된 영어 표기
변용된 영어 표기는 수도 없이 많다. 그것은 비단 이태리에만 보는 것은 아니다. 영국의 영어를 그들 나라만의 독특한 양상으로 조금씩 알파벳을 변용하여 단어를 지어서 사용하고 있음을 보았다. 이탈리아에서 본 은행은 BANCA, 경찰은 POLIZA(폴리찌에), 스위스에서 본 학교는 Schul, 학교구역은 그대로 Schul zone 등이다. 우리가 배운 영어에서 조금씩 표기만 다를 뿐 읽어지는 발음을 그대로여서 대충 판독이 가능하다. 이것도 새로운 사항으로 나는 신기하여 큰 눈으로 보고 읽었다. |
* 이탈리아 경찰
밀라노 두오모 성당 주변에 경찰이 깔렸다. 그만큼 사건이 많음을 의미한다. 남녀 서너명씩 뭉쳐 다니며 지키고 있다. 경찰차로 순시하기도 하고 내려서 단속하기도 한다.
이 나라는 큰 도둑보다는 좀도둑이 많다. 큰 사건보다는 작은 사건이 많다. 그래서 여권과 가방을 조심하라는 충고도 들었다. 경찰이 분주한 것으로 보아 사실임에 틀림없다.
나는 다가가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하였더니 고개와 손을 내저으며 안된다고 했다. 이들은 절대로 사진을 찍지 않음을 뒤늦게 알았다. 자기 임무에 충실하고자 함이라 하니 아름다운 거절이다.
* 이탈리아의 주택
집 벽이 얇다. 겨울에도 지중해성 기후로 따뜻해서 그리 짓는다. 방음이 안 되기도 하지만 불편없이 산다. 도시의 주택은 다른 유럽의 주상복합상가건물처럼 쭉이어져 붙어 밀집되어 있는데 도시 변두리, 혹은 농촌 주택은 붉은색 지붕의 단독 주택이 많다. 이태리 집의 특징 중 하나는 집 안의 중앙에 반드시 정원이 공통으로 있다는 점이다. 두 집이든, 열 집이든, 한 집이든 그렇게 중앙에는 정원을 반드시 짓는다. 밖에서는 모르지만 들어가면 그렇게 지어져 있다. 낭만이 깃든 나라, 주택도 낭만을 드리워 지어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
* 이탈리아인의 밝은 표정
사람들 표정이 밝고 활발하다. 나무가 무성하고, 날씨가 화창하고 그런 영향으로 인성이 그렇게 형성된 것 같다. 상가 앞의 비치 파라솔 의자에 모인 젊은이들의 의상도 확실한 노출로 개성을 드러내고, 분위기 또한 잘 꾸며 놓았다. 도심 곳곳의 사람들마다 한국의 명동에서 스쳐 지나가는 화사한 표정이다. 어찌보면 안정감이 결여된 가벼운 인상이지만 나라마다 기후와 환경이 만들어낸 독특한 개성이기에 이런 모습도 국외 여행에서 얻어지는 소중한 자료다. |
* 이탈리아 운전 기사
참으로 미남이다. 머리가 노르스름한 것 빼고는 잘 생긴 한국 중년 남자다. 키도 한국인과 비슷하고 연신 웃는 인상이다. 그래서 여행 내내 편안한 분위기였다.
그는 이탈리아 남자다. 애인이 있다고 했다. 아내는 아내고, 애인은 애인이라 했다. 아내가 남편이 딴 여자를 만나러 갈 때면 콘돔부터 챙겨준다 했다.
일본인보다는 한국인이 좋다 했다. 일본인은 돌아서서 흉을 보지만 한국인은 그 자리에서 지적해 주는 것이 좋다 했다. 한국인처럼 마늘이 들어간 음식을 먹으며 한국과 한국인을 사랑한다 했다.
이런 이야기는 한국에서 함께 동행한 김상미 가이드로부터 통역으로 전해 들었다. 60세가 조금 넘은 남자, 대형유로버스로 힘든 직업을 가진 남자, 그에게서 편안함과 행복함이 느껴지는 것은 자유로운 사랑이 가능해서라고, 아내의 너그러운 배려라고 느꼈다. 성숙한 문화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남녀간의 로맨스다.
그들의 생활상을 쉬이 드러내는 것도, 오픈된 사회의 한 단면이다. 한국은 아직도 먼 거리에서 바라보는 강 건너 이야기다. 저 이탈리아 기사에게 애인이 있다면, 그 기사의 아내에게도 애인이 있다는 논리다. 혼자서 사랑은 불가능하지 않은가. 왜 이곳에서는 아름다운 로맨스로 보일까. 그것도 문화의 큰 차이다.
* 밀라노 호텔
밀라노 관광을 마치고 호텔로 갈 때, 가는 길은 피렌체 쪽이다. 도로가 큰 것으로 보아 고속도로 같은데 가로등이 하나도 없다. 왕복 6차선 도로를 차들의 불빛만으로 주행한다.
어둠에서 보이는 시골 풍경이 한국과 유사하다. 농토와 나무들, 씨 뿌리려고 밭을 갈아 놓은 모습 등이 그렇다. 초여름의 냄새가 나는 아름다운 풍경이다.
한참을 달려온 밀라노 호텔은 한적한 곳에 있었다. 새로 지은 신형 호텔로 대리석 내장의 넓고 호화로운 룸에서 행복한 여장을 풀었다.
내일은 로마로 가기 위해 밀라노에서 로마 쪽으로 많이 내려와 호텔을 잡은 것이다. 고속도로 변의 전원 속에 지은 밀라노 호텔, 아름답고 편안한 숙소였다.
2006년 4월 17일 월요일 이탈리아 피첸체, 로마 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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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라노 출발
밀라노 파크 호텔에서 오전 8시에 출발했다. 피렌체로 가기 위해서다. 장화 모양의 긴 이탈리아 땅을 북부에서 남부로 내려가며 여행하고 있다. 국토가 길고 넓은만큼 차를 많이 타고 다닌다.
오늘 이태리 날씨는 비가 온다는데, 지난 밤 미국은 태풍으로, 유럽은 다뉴브강 범람으로 난리라 한다. 내가 가 본 헝가리 도나우 강변도 예외 없이 물난리로 고통이라 하니 비록 남의 나라 이야기지만 염려가 된다.
유로버스는 지금 롬바르디아 평원 지대를 지나고 있다. 어제 본 대평원이다. 안개가 자욱하다. 다 그런 것이 아니고 워낙 넓은 평원이고 보니 어느 한 지역에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 차는 점점 밀라노에서 멀어지고 피렌체로 달리고 있다.
* 피렌체 가는 길
스위스에서 이탈리아에 진입하며 느낀 대로 우리 나라 어느 지역을 여행하는 기분이다. 집도, 들판도 한국과 너무 닮아서 그렇다. 창고에 너줄하게 물건을 놓아 둔 것조차 동일하다. 농기구 창고가 허술하고 집 아래에 지어 놓은 것도 똑같다. 오전 8시 30분, 안개가 서서히 걷힌다. 이제 평원지대를 벗어나는 것 같다. 밀라노에서 피렌체까지는 버스로 4시간 간다. 오늘 오후에는 피렌체에서 로마까지 또 4시간 버스로 간다. 8시간의 긴 버스 여행을 하는 날이다. 하지만 지루함보다는 이탈리아 곳곳의 풍경과 도로 등을 디카에 담으며 공부하는, 내게는 소중한 시간이다. |
* 이탈리아 휴게소
밀라노에서 1시간 30분을 달려온 오전 9시 30분, 휴게소에서 잠시 휴식했다. 유료 화장실에서 유로화 동전 50센트, 한화로 700원 정도 내야 소변을 본다. 돈을 내고 화장실에 간다는 것이 한국의 문화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유럽 여행 중에서 익숙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유로화 동전을 들고 간다.
이탈리아 휴게소의 상점은 들어가는 문과 나오는 문이 다르다. 입구의 문에서부터 물건을 보거나, 산 후에는 반대쪽으로 따라 나가야 계산대가 있다. 나는 과일사탕 1.62E$짜리 2봉지와 멘탈 박하사탕 1.65 유로짜리 2봉지, 총 6.64E$를 지불하고 샀다. 차 안에서 일행과 나누어 먹고 1봉지씩은 한국의 두 아들에게 갖다 주려고 가방에 넣었다. 깨끗하고 시설이 잘 된 휴게소다.
* 아펜니노 산맥
양을 기르는 목장을 지나, 배꽃 하얗게 핀 과수원을 지나, 보리가 패어 놀놀하게 익어가는 농촌 들녘을 지나, 푸르름 가득한 이탈리아의 풍경을 보며 한동안 달려왔다. 한국보다 분명 계절이 빠르다.
우람한 산이 왼편으로 병풍처럼 진을 친 산마을을 본다. 알프스 산줄기인 아펜니노 산맥이다. 우리는 지금 알프스 산맥의 한 줄기를 넘어가고 있다. 독일에서부터 보아온 길고 긴 산맥이다. 프랑크푸르트에서 하이델베르그로 갈 때 해뜨는 알프스 산맥의 발원 줄기를 보았고, 지금은 스위스에서 뻗어내려온 알프스 산맥의 끝부분을 보고 있으니, 나는 알프스 산맥을 모두 본 것이다.
지금 보는 산맥은 한국의 산세와 아주
* 꽃의 도시 피렌체
이태리는 피렌체 말을 국어로 사용하고 있다. 단테 〈신곡〉에 나오는 말을 그대로 사용한다. 단테의 생가가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학창 시절 읽어도, 읽어도 판독하기 힘든 단테의 〈신곡〉을 이곳에서 들으니 가슴이 벅차오른다.
피렌체는 꽃의 도시다. 입구에서부터 하얀 꽃이 반긴다. ‘플로렌체’ 로 불리우기도 하는 피렌체는 인구 35만명의 작은 도시다. 200년전 정신각성운동인 르네상스 발상지다. 단테뿐만 아니라 〈데카메론〉의 복카치오,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갈릴레이, 로시니(음악가)의 고향이다. 교과서에서 배웠던 문학가, 미술가, 음악가의 숨결을 만나고 있다.
이태리 중부에 위치한 피렌체는 14세기~15세기 메디치 가문의 후원에 힘입어 르네상스를 꽃피운 도시다. 도시 전체가 하나의 아름다운 작품으로, 도시의 역사지구 전체가 198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피렌체는 이태리 관광의 메카이며 로마 역사와 문화의 장이다.
유럽 유적지 80%는 이태리에 있고, 르네상스 미술품 70%는 피렌체에 있다. 모든 미술품은 메디치 가문에 보관되어 있다. 피렌체는 정치가가 아니고 상인이 이끌던 공화정의 도시다.
꽃의 도시라 함은 아르노 강변에서 꽃피운 르네상스의 꽃과, 아르노 강변에 핀 식물의 아름다운 꽃들을 함께 이르는 말이다. 나는 꽃의 도시라 하여 예쁜 꽃을 찾았는데, 생각보다 그리 꽃이 많지는 않았고 르네상스 문화의 꽃물결을 많이 보았다. 365일 중 300일이 오늘처럼 맑다는 나라에서 화창한 꽃을 본다.
* 스파게티 중식
이탈리아 정통 스파게티로 중식을 했다. 이태리는 자신의 음식을 고집한다. 전통식을 먹는다. 스파게티는 이런 종류의 일종이다.
상당히 큰 식당에서 우아한 테이블에 앉아 이태리인처럼 먹었다. 단단한 빵에서부터 스파게티, 후식 과일까지 메뉴가 참 좋다. 특히 본 메뉴인 스파게티는 한국에서 먹는 것보다 훨씬 담백하다. 올리브유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야채도 올리브유 샐러드다. 결코 기름지거나 느끼하지 않다. 먼길을 달려왔기에 참으로 맛있게 잘 먹었다. 후식으로 나온 오렌지가 속살이 핏빛으로 빨간 것도 신기하다. 맛도 좋다. 남부지방의 오렌지는 모두 이렇게 붉으며 맛이 좋다고 한다. 이색적인 식단, 이색적인 후식까지 아름다운 식사다.
* 메디치 가문과 예술
피렌체는 돈이 많았던 메디치 가문의 상인들에 의해 예술이 발전한 도시다. 1735년까지 350년간 지배했다. 상인들이 돈을 벌어 양반 신분을 샀다. 그 중에서도 메디치 가문은 왕가 귀족에게 딸을 시집 보낸 가문이다. 유럽의 소용돌이에 이 가문이 작용한 것이다. 대문호, 대예술가에게 돈을 뿌렸다. 상품과 재능을 사준자가 돈많은 메디치 가문이다. 예술가들을 포섭하여 ‘음악을 만들어 달라’, ‘그림을 그려 달라’ 주문하여 보관하다가 망할 때는 절대로 밖에 내가지 말라고 단속했다. 지금 우리는 14~15세기의 그 유명한 예술의 도시, 문화의 한 유적지를 걷고 있다. 아무튼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의 예술을 발전시킨 명가문이다. |
* 이탈리아의 종교
이탈리아에 오면 성당을 다니게 된다. 한국에서 기독교 종교를 가진 가이드가 이 나라에 와서는 천주교 성당을 다닌다 했다. 곳곳에 성당이 많기도 하지만 98%의 국민이 천주교인이기에 그리된다.
역사는 대부분 종교 전쟁이다. 유럽에서 터진 세계 대전의 이유는 영토분쟁이지만 종교의 힘이 작용한다. 로마에는 천주의 고유한 영역인 바티칸 시국이 단일국가로 인정받아 통치되고 있다. 그 위력은 세계를 움직일만큼 크다. 이탈리아는 로마 카톨릭의 메카다.
* 두오모 성당(꽃의 성모 마리아 성당)
두오모 성당은 밀라노에서도 보았다. 피렌체의 두오모 성당은 일명 ‘꽃의 성모 마리아 성당’ 으로 불린다. ‘두오모’ 라는 뜻은 ‘신의 거처’ 란 의미이며 어느 한 성당에만 붙여지는 것은 아니다. 이곳 피렌체 두오모 성당은 원래는 벽돌로 지었으나 지금은 세 가지 색의 대리석으로 지어져 있다. 두오모 성당 자체가 그 도시의 대표 성당이기에 꽃의 성모 마리아 성당은 피렌체의 대표 성당이다. 1418년부터 20년 동안 필립보가 로마시대 건물을 재현하여 지은 성당이다.
2중 돔 양식의 꽃처럼 아름다운 성당은 피렌체 어느 곳에서나 보이는 아주 크고 높은 건물이다. 외부 안에 내부의 길이 있어 꼭대기까지 오를 수 있다. 지오도가 만든 종탑을 본떠 만들었는데 모든 세례당은 8각으로 지어졌다.
지붕의 돔은 신양식으로 첨탑을 없애고 올렸다. 베이지 색, 팥죽색, 연녹색의 세 가지 대리석 천연색의 조화가 대단한 아름다움이다. 꽃처럼 여성적이며 화사한 건물이 밀라노의 두오모 성당과는 다른 이미지로 다가온다.
1억 인구 중 1/4이 죽어간 페스트가 사라진 기념으로 조각문을 만들었고, 미켈란젤로는 그 작품을 ‘천국의 문’ 이라 명명했다. 정말 천국의 문에는 조각상이 많이 장식되어 있고, 사람들이 입장하려고 장사진이다.
주위 관광수단으로 마차가 있고, 붉은 시티투어 버스가 순환하고 있다. 이곳 역시 사건다발지역으로 경찰이 많이 나와 있다. ‘가능한 한 장엄하게, 더욱 더 화려하게’ 라는 컨셉에 따 라 완공된 붉은 돔지붕의 본당은 피렌체의 아름다운 한송이 대형 꽃이다.
* 단테 생가
조상이 외교관 대사로 십자군에 참전한 집안이다. 단테는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어 여인을 사랑하지 못하는데, 베아뜨리체는 그의 첫 눈에 반한 첫 사랑 여인이다. 그러므로 글로 열정을 태웠다. 하나님, 예수님이 있어야 사랑이 가능하던 시대에. 단테는 다 빼고도 즉 하나님과 예수님 없이도 사랑이 가능하다고 쓴 사람이다. 700년 전에 부모가 사망시 울면 잡아갈 때, 내 마음대로 하던 사람이다. 그가 바로 단테다. 그런 삶이었기에 불후의 명작 <신곡>을 낳은 것이다. 단테 생가는 골목길 옆에 있었다. 집 벽에 흉상과 그의 사진이 담긴 벽보가 걸려 있고 집안은 공개되지 않고 있다. 나는 한국의 시인이다. 대문호 괴테를 만나고, 이곳에서 단테를 만나는 것이 유럽 여행에서 으뜸으로 꼽히는 기쁨 중 하나다. |
* 시뇨리아 광장
길드 조합 21개 상인 단체가 세운 광장이다. 길드 대장들이 시뇨리아다. 화려한 조각상들이 있고, 조국의 아버지 쿠시모 메르치아 동상이 기마상으로 세워져 있다. 그의 현품은 아니지만 바다의 신 포세이돈, 미켈란젤로의 작품 다비드상이 있다. 중세 이래로 피렌체의 중심인 시뇨리아 광장은 오늘날까지도 피렌체 사람뿐만 아니라 관광객들을 모으는 정치적 연설과 시위 장소로 남아 있다. 공회주의의 이상이 명백히 표현된 절대군주의 표상인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에서부터 여인의 강간까지, 이곳에 있는 건축물에서 신화와 과거의 정치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광장도 웅장하지만 연극 무대 모양의 단상이 웅장하다. 조각상과 그림으로 가득찬 무대가 아주 독특하게 시선을 끈다. 수많은 내외국인이 들어와 있어 얼마나 큰 관광명소인지를 드러내고 있다. 철저하게 인간 본성을 드러낸 나신의 조각상들이 어찌보면 천박해 보이지만 상업이 지배하던 한 시대의 호화로움이 그대로 재현되는 역사의 한 장이다. |
* 시청
동탑이 100m 높이로 남아 있는 올드 궁전, 즉 낡은 궁전이다. 정치 사무실로 쓰던 건물인데 14c에 요새처럼 지었다. 정치로부터, 정치가로부터 보호 구역으로 ㅁ자로 사방을 막아서 지었다.
시뇨리아 광장에 있다. 지금은 시청건물로 사용되는데 꽃으로 잘 가꾸어 놓아 화사하다. 한 나라, 한 도시의 시청 건물은 그 나라, 그 도시의 상징으로 그 나라의, 그 도시의 색깔을 드러내고 있다. 피렌체 시청은 상업인의 손으로 부흥한 역사적 향기가 그대로 배어 있다.
* 십자가 성당
시뇨리아 광장 한 켠에 있다. 첨탑마다 십자가가 있어 그리 부르는 성당인가보다. 다른 성당에 비하면 조촐하지만 천재들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갈릴레이 등등이 지하에 있는데 단테는 이곳에 없다. 유럽은 성당 지하가 유명인의 묘지다. 신기한 일이다. 햇살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십자가 성당을 뒤로 하고 다음 행선지로 이동했다. |
* 아르노강
피렌체의 르네상스가 꽃피던 아름다운 강이다. 피렌체 도심을 흐르는 이 강은 염색용 물로 사용되는데 피렌체 염색 장인의 한 몫을 담당하고 있다.
지금 본떼 다리를 지나고 있다. 꽤 넓은 강이다. 강가에는 풀이 우거져 운치 있고 요트와 여러 가지 배들이 떠 있다. 피렌체 여행 중 여러번 만난 강이다.
이탈리아는 구도로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대형 버스를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다. 그래서 우리의 유로 버스도 아르노 강변의 주차장에 주차하고, 우리는 발로 많은 시간을 걸어서 구경했다. 아름다운 꽃이 피고, 아름다운 역사의 꽃을 피운 아르노강은 참 고운 이름이며 고운 풍경이다.
* 미켈란젤로 언덕
미켈란젤로는 1375년 생, 금년이 탄생 700주년 되는 해다. 기념 행사가 곳곳에서 열리고 있다. 아르노 강을 건너 올라오는 길에는 높고 큰 싸이플러스 나무가 있다. 위로만 곧장 자라는 푸른 나무로 이 나무 근처에는 공동묘지가 있다고 한다. 높은 언덕, 넓은 광장에 미켈란젤로의 작품 <다비드 상>이 있다. 모조품이지만 현품처럼 대단한 위용이다. 그 앞에서는 유럽의 집시들이 음악과 악기 연주로 한결 예술적인 분위기를 더해준다. 피렌체 붉은 기와지붕 물결과 꽃봉오리처럼 우뚝 솟아오른 두오모 성당의 돔지붕이 한 눈에 들어온다. 유명한 다리, 낡은 다리도 가까이 보인다. 참으로 아름다운 곳에 미켈란젤로의 숨결을 담아 놓은 광장, 언덕이다. 피렌체 가이드는 노련한 사진 솜씨로 전망 좋은 곳에 일행들을 세워 놓고 일일이 기념사진을 찍어 준다. 나의 사진 속에도 붉은 꽃물결, 꽃의 도시 피렌체에서 예술의 향기 속에 담겨진 우리 문인 부부의 소중한 사진이 있다. 미켈란젤로 광장 앞에는 차도가 있고 건너편에 분수와 아름다운 꽃정원이 있다. 주차장에는 수많은 차들이 즐비하다. 그만큼 이곳은 피렌체의 대표적 명소다. |
* 피렌체 시가지
피렌체가 꽃의 도시이며, 11세기~16세기에 걸친 많은 문화 유산들이 간직된 도시라는 것은 발로 걸으며 몸으로 느꼈다. 하지만 그것은 도심 속에서 한 단면씩 본 것이고, 지금 미켈란젤로 언덕에 올라 눈으로 바라보는 피렌체 시가지는 초대형 붉은 꽃무리다.
붉은 기와지붕 물결이 체코 프라하성에 올라서 본 프라하 시가지와 흡사한 풍경이다. 그때도 환상적인 기쁨이었고, 그때도 오롯이 솟은 성당 건물 하나가 정열로 피어오르는 꽃봉오리더니, 지금도 환상적인 기쁨이고, 지금도 오롯이 솟은 성당 건물 하나가 정열로 피어오르는 꽃봉오리다.
아르노강이 눈 바로 아래에서 낭만의 줄기로 흐른다. 멀리 다리가 보이는데 유명한 ‘낡은 다리’ 베키오 다리다. 피렌체는 여러 면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꽃의 도시다.
* 낡은 다리
우리는 아르노강 다리를 여러 번 넘어 다니며 피렌체 도심을 여행했다. 아르노 강은 한강보다는 폭이 좁지만 꽤 큰 강이다. 한강 다리처럼 여러 개의 다리가 있다.
그 중에서 낡은 다리로 부르는 베키오 다리는 아르노 강 남쪽에 있는데 가장 아름다운 다리다. 미켈란젤로 언덕 광장 끝에서 내려다 보니 피렌체 시가지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아치형으로 다리 아래 부분은 장식하여 중세의 향기가 배어 있다. 미켈란젤로 언덕 쪽의 마을과 피렌체 도심을 이어 주는 다리다.
* 로마 가는 길
피렌체에서 로마까지는 3시간 30분 소요되는 먼 거리다. 그것도 순조로운 교통일 때 그렇고, 오늘은 부활절이 낀 요일이라서 더욱 긴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한다. 오후 4시 10분 피렌체에서 출발했다. 이태리 안내원 최영록은 긴 시간 동안 로마 역사에 대하여, 세계 역사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는 통역사 자격증만 있고 관광 가이드는 아니라 했다. 관광 가이드는 이태리 국적을 가진 자만이 시험에 응시 가능한데 겨우 1년전에 국적을 얻어서 지금 시험 준비 중이라 한다. 그래서 중요한 관광 명소에서는 전문가이드인 이태리인 여자가 나와서 곁에 들러리격으로 서 있다. 유럽은 본토의 안내원이 있어야 관광이 가능한 곳이 있어서다. 철저하게 관리하는 관광 산업이다. 피렌체에서 로마 가는 중에도 농토, 산, 농지, 농산물 재배, 집 등의 풍경이 동양적이다. 역시 한국과 닮았다. 붉은 기와 지붕이 우리와 다를 뿐 넓고 두루뭉실한 둔덕을 깎아서 농사짓는 모양새는 똑같다. 한국보다는 드넓은 들녘이다. 큰 산맥을 지나고 나면 들녘이 나오고 넓은 농토가 전개된다. 전반적으로 산이 그리 많지는 않다. 전 국토에 산이 많이 산재해 있는 한국과는 좀 다른 풍경이다. 왜 이토록 우리나라와 비슷할까. 한반도의 1.5배 되는 반도 국가, 바다 속에 몸통을 담그고 있다는 공통점 때문인 것 같다. 바다와 땅의 만남으로 형성된 땅이어서 수종, 풀종류도 다양한 것이 유사하고 산세와 지형까지 동일하다. 로마 가는 길은 상당히 길었다. 그래서 로마에 대하여, 이태리에 대하여 많은 것들을 만나고 보는 체험의 시간이다. |
* AUTO GRILL 휴게소
이탈리아의 휴게소마다 ‘AUTO GRILL' 이라는 글씨가 크게 위에 있다. 알고 보니 체인식 휴게소의 상호다. 글자 형태까지 똑같이 씌여 있다. 휴게소가 체인으로 운영되는 것은 이태리에서 처음 보았다. 고속도로변에 이 영문글자가 보이며, 그 곳은 반드시 휴게소다. 이 곳 화장실에서는 남자도 유료다. 어떤 곳에서는 여자만 받고, 남자는 무료인데 지금 들른 이곳은 늙은 여자가 지키고 서서 받는다. 이제는 가이드 말처럼, 화장실 요금이 아니라 팁으로 생각된다. 1인당 30센트, 남편과 나는 잘 몰라서 2E$짜리 코인을 주니 1E$ 50센트를 거슬러 준다. 올리브 나무가 은빛 잎사귀를 피워 곳곳에 서 있다. 이태리 남부로 가까워지고 있음을 나타내는 표식이다. 상쾌한 이탈리아의 공기를 마시는 소중한 휴게소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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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리브 나무
이탈리아의 특산물 중 하나가 올리브유다. 까만 올리브 열매로 기름을 짜서 수출하고, 식용으로 쓴다. 피렌체 부근에서부터 잎사귀가 완전히 푸르지도 않고 은빛서린 녹색의 올리브 나무가 보였다. 처음엔 무슨 저런 나무가 있을까 궁금했는데, 올리브 나무였고 이태리 전역에서 재배하고 있다. 특히 산 언덕진 곳에는 과수원처럼 재배하고 있다. 의학이 본격적으로 연구되면서 올리브유는 식용으로 뛰어난 기름이기 때문에 이 나라의 큰 수입원이다. 보통 식용유가 콜레스테롤을 높이는데 올리브유는 콜레스테롤을 반대로 낮추어 주는 기름이어서 이태리산 올리브유는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는 식용기름이다. 중요한 것은 불에 데우면 안 된다. 샐러드 용으로 사용해야 된다. 변용되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갈 때 면세점에서 올리브유를 많이 사 가지고 왔다. 웃어른께 인사도 드리고, 우리 집에서도 먹기 위해서다. 여행 중 그 나라의 고유한 특산물은 알맞은 가격일 때 사오면 좋다. 이곳에서 올리브 나무와 올리브 유에 대하여 좋은 공부를 했다. |
* 서양의 경제
한국은 정치 속에 경제가 있지만 서양은 그렇지 않다. 브루조아 시뇨리아가 경제를 이끌어 왔다. 상인들에게 국가 경제를 위해 돈을 꾸고, 국고로 갚으면서 그들에게 상업의 길을 열어 주었다.
모직물 장사하는 사람들이 인도에 처음 들어가자 영국과 프랑스의 다툼에서 영국이 승리했고, 다시 영국은 중국에 들어가 비단과 차를 수입해 갔다. 그러던 중 아편전쟁시 영, 중 싸움에서 영국 승리로 150년간 홍콩을 소유해 왔다.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고, 다수가 소수 지배로 역사는 변화한다. 영․프․벨․오는 분할이 다 끝나고 독일과 이탈리아가 뒤늦게 자리잡았다. 형님 땅 뺏으려는 싸움이 세계 1,2차 대전이며 1648년까지 종교 전쟁 끝나고 다시 2차 대전까지 500년간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이제야 EU 통합으로 화합의 무대를 이루며 산다.
보이게, 보이지 않게 국가의 힘은 경제다. 한국의 경제를 자유 경쟁으로, 정치에서 조금은 이탈하여 크게 발전시켜야 국가의 위상이 높아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로마의 고속도로
장장 15만km의 고속도로다. 그래서 모든 길은 로마로 이어진다. 천년 동안 이루어낸 로마다. 지금 나는 그 로마의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다. 로마가 길을 낼 때 동양은 만리장성을 쌓았다. 그래서일까. 동양은 어쩐지 폐쇄적인 느낌이 들고, 서양은 오픈된 느낌이 든다. 길에서부터 확 뚫리며 모든 분야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진 유럽은 분명 동양보다 한 수 위의 대륙이다. |
* 파인 트리
피렌체 도심에서부터 이상한 소나무를 보았다. 수종은 소나무인데 위로 자라지 않고 동그란 우산 땅으로 자라고 있다. 이름은 피냐, 대왕송, 또는 우산 소나무라 부르는 나무다. 전지 작업을 해 놓아서 모양새가 동글게 예쁘기도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기후가 좋아서 소나무가 위로 크지 않고 옆으로 자라는 것 같다. 아무튼 이 파인 트리는 이태리 곳곳 들녘, 또는 도심에서 많이 보았다. 가로수로 키우기도 하고, 들녘의 농토 경계 표시로도 기르고 있다. 다른 식물은 대부분 비슷한데 유난히 우리나라의 소나무와 다르다. 기둥 위 오롯하게 짙푸른 덩이가 뭉쳐진 파인트리는 보아도 보아도 여심의 향기로 아름답다. |
* 모든 법은 로마로 통한다
유럽은 경제가 정치를 지배하고, 동양은 정치가 경제를 지배한다. 유럽의 법은 경제를 위한 법이고, 동양의 법은 정치를 위한 법이다. 중세 천년을 이끈 두 사람은 교황과 황제다. 교황은 하늘을 지배했는데 땅의 한계를 느끼고는 황제를 만들고 황제와 손을 맞잡고 결혼했다는 것이 맞다. 둘이 단합하여 하늘과 땅을 지배하며 잘 지내다가 싸움이 시작되고, 11세기 중반 신성의 대표 교황은 세속의 대표 황제에게 핵 폭탄을 쏘자 스위스로 가던 황제가 카롯사에서 3일간 석고 대죄한 것이 〈카롯사의 굴욕〉이다. 교황이 전쟁을 감행하여 1차~8차까지 십자군 원정의 200년 전쟁을 치르며, 다시 전쟁을 통해서 교황과 황제는 화합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돈을 거두기 시작했고 그러므로 은행이 탄생된 것이다. 경제의 대출발이고 정치보다 우위에서 아직까지도 지배적으로 이끌어가는 경제를 위한 법, 그 힘은 여전히 위대한 존재였다. |
* 로마 진입 톨게이트
길가의 양떼를 보며 서서히 로마에 접근할 때 톨게이트에는 자동차가 한가득 몰려 있다. 예외 없이 도심으로 진입하는 통행문은 이 나라에서도 붐빈다. 부활절에 도심을 벗어났던 차량이 일시에 몰려서 그렇단다. 유럽의 차들은 작다. 과시용이 아니고 실질적인 면을 고려하여 차를 산다. 98년 최우수차로 마티즈가 뽑혔다. 유럽에서는 한국의 마티즈가 인기다. 지금 모여든 차들이 대부분 중소형이다. 저편에는 하얀 트럭이 줄지어 섰다. 로마를 진입하기는 첫 관문에서부터 힘들었다. 많은 시간을 도로에서 보내야 했다. 서울 진입 톨게이트만큼 드넓은 데도 여전히 차량은 줄지 않는다. |
* 로마 입성
유로 버스의 문을 열고 오르내리며 기다렸던 로마 진입 톨게이트를 통과하자 어둠이 내리고 있다. 어차피 로마 관광은 내일부터 이루어지므로 로마의 어둠은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
볼펜 새 것 한 자루를 다 쓰고 두 번째 새 볼펜을 꺼내 글을 쓰고 있다. 나는 그 동안(1주일) 볼펜 한 자루 분량의 글을 쓴 것이다. 고집스럽게 글을 받아 적고, 고집스럽게 곳곳의 사진을 적는다.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적는 일들이 고단한 여정이지만 나의 개인적 역사를 쌓기 위해서 이루어내는 작업이기에 나는 행복하다.
로마의 밤거리는 조용하다. 역시 네온사인이 없는 도시다. 하얀 불빛만이 각 상가 건물에 비추고 있다. 그래서 정신을 교란시키지 않고, 그래서 술을 싫어하고, 그래서 범죄율이 낮다.
Roma를 거꾸로 하면 Amori 아모레, 즉 ‘사랑’ 이란 뜻이다. 한국말 속에 로마 말이 많다. 로마는 사랑의 도시, 영원의 도시다. 고전과 현대가 공존하는 도시, 50년후에 와도 그대로일거라고 말한다. 13,750보를 걸어야 로마를 본다는데 기대되는 여행지다. 로마의 한강, 떼베르강이 어둠의 줄기를 타고 흐르며 외객을 반기는 이 순간, 참 행복하다.
*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4대 문명 발상지인 중국 황하, 인도 인더스강, 메소포타미아, 나일강, 모두 동방이다. 모두 받아들인 나라가 그리스다. 그리스는 국가라기보다는 터키 영향을 받은 문명권이다. 갈갈이 찢어진 문명을 묶은 곳이 그리스다. 난세 때는 철학가가 탄생한다. 그리스에서는 소크라테스 외, 중국 춘추 전국 시대에서는 순자, 노자, 맹자 등등 동서 지성체계 형성시기는 동일하다. 그리스, 로마 신화로 지어 공부시킨 오리엔트 문화 이야기는 신의 이야기가 아니다. 나침반, 종이, 화약, 인쇄술, 4대 발명품 모두 중국에서 발명되었는데 실제 사용은 서양에서 먼저다. 동양은 이데올로기가 정치를 지배하는 유교사상으로 발전이 늦었다. 서양은 아니다. 모든 주도권이 여자에게 있는 것만 봐도 아는 한 대목이다. 2008년에는 동유럽까지 EU 통합국이 된다. 그럼 유럽은 자기들끼리 민족주의가 형성될 것이다. 그러면 제3국이 들어오기 힘들게 된다. 일본, 한국인도 더욱 체류하기 힘들 것이다. 대통령제와 내각 책임제 동시 시행하는 나라가 이태리다. 현재는 유럽이 전 세계 문명을 지배하고 있다. 의복, 패션, 등 유럽풍이 유행시킨다. 일본은 만화가 인기다. 이태리에서도 일본 만화는 자막까지 그대로 방영한다. 일본은 만화보다도 만화 주인공 캐릭터 산업으로 돈을 번다. 한국의 삼성과 LG는 전 세계에서 잡으려고 난리다. 그런데 한국의 삼성을 일제 소니로 생각하는 게 문제다. 한국도 세계 속에 파고 들어 발전시켜야 이민자들이 편하게 살 수 있다고 이태리 8년차 거주 한국가이드 최영록은 말한다. 바티칸 시국에 가서 〈천지창조〉와 〈최후의 만찬〉을 보면 로마를 다 보는 것이란다. 미켈란젤로 그림 복원 비용으로 300억불이 들었고, 그 복원 비용은 일본에서 대고 창호지 한지는 우리 것으로 사용했다. 그런데도 모두 일본 것으로 변용하여 박물관에 소장시키고 일본에서 그 유명화의 사진 촬영을 금지시켜 절대로 사진 찍어가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한국은 정신차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오늘 첫발을 디딘 것이 마지막 발이라고 믿고 시간 시간마다 기억하라고, 많은 것을 배우고 얻어가라고 힘주어 말하는 이탈리아 로마의 내 동포에게서 뼈아픈 교훈을 얻었다. 한국은 2년 후에만 가도 집 위치가 다를만큼 유행에 민감하지만 영국 버버리는 몇 백년 전통을 쌓은 상품이라며 유럽의 전통을 상기시켜 준다. 오랜 곳에 가치를 두는 곳이 유럽이다. 변화가 느리지만 멈춘 것 같은 흐름 속에서 아름다움이 있다. 건물도 한국은 겉에서 부자인데, 유럽은 300년, 500년된 건물이 아직 그대로 남아 사용됨에 안에 들어가 보아야 부자인지 가늠할 수 있다. 끈질기게 맥을 이어오는 유럽의 문명이 참으로 부럽다. 이태리, 프랑스에 연간 6~7천만명의 세계인이 다녀간다. 세계 여러 나라 중 방문객이 가장 많은 두 나라다. 시저가 말하기를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했다. 오늘의 이 번영이 어디 하루 아침에 이루어졌겠는가. 중세의 문화를 이룩하고, 지금까지 고스란히 보전하여, 수만보를 발로 걸으며 본다 해도 결코 후회하지 않을 소중한 여행지다. 구시가지를 그대로 고수함에 대형차가 진입하지 못하고, 세계인들은 땀을 비오듯 흘리며 4월의 로마를 보고 간다. 과거가 없는 현재가 어디 있으며, 현재가 없는 미래가 어디 있겠는가.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고스란히 이어지는 로마는 세계인들의 가슴에 큰 깨달음과 가르침, 애국심, 조국애를 부여하는 뜻깊은 유적이다. 작은 것 하나라도 소중히 전수하여 내 조국 한국도 미래에는 훌륭한 보고의 유적지가 되고, 그래서 세계인들의 걸음이 찾아들어 배우고 가도록 해야겠다고 나는 다짐했다. 그것은 어느 한 사람의 일이 아니며 우리 국민 모두가 안고 가야 할 예쁜 숙제다. |
2006년 4월 18일 화요일 이탈리아 폼페이, 카프리 섬
로마 호텔 출발, 폼페이 가는 길, 주지사 선거 벽보, 로마 유적지, 어감과 날씨, 외국에서 보는 일본인과 중국인, 이탈리아의 이혼, 이탈리아의 복지, 이탈리아의 교육, 이탈리아의 직업, 폼페이 가는 고속도로, 거대한 구름덩이, 베수비오 화산, 폼페이 최후의 날, 폼페이 유적지, 폼페이 역, 폼페이 기차, 남부 빈민 도시, 오렌지 나무, 소렌토 역 도착, 소렌토 항구, 카프리 섬 유람선, 카프리 섬 셔틀버스, 카프리 섬 리프트, 카프리 섬 정상의 비경, 나폴리 행 유람선, 나폴리 미항, 나폴리 항구 도착, 로마로 돌아가는 길, 고속도로에 핀 개나리, 로마 도착
* 로마 호텔 출발
지난 밤 늦은 시간에 호텔에 들어와 보지 못한 주변 풍경을 아침 일찍 일어나 둘러 보았다. 창문을 여니 로마 시가지의 도로가 눈 높이로 다가온다. 호텔에서 보는 이런 풍경이 독특하다. 밖에서 본 호텔은 상당히 높고, 정면은 트였는데 후면은 언덕인 듯 싶다.
오늘도 폼페이 유적지와 카프리 섬에 가는 날이다. 새벽 5시에 기상, 6시 조식, 7시 출발이다. 역시 먼 길을 버스로 이동해야 하고 많은 것을 관광해야 하므로 서둘렀다.
호텔 주변에는 높은 아파트가 있다. 야자수가 도로변에 있는 것으로 보아 따뜻한 기후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선거 홍보용 벽보도 게시판에 붙어 있고, 호텔 바로 앞으로는 출근하는 차량으로 분주한 움직임이다.
벌써부터 가슴이 벅차오른다. 로마의 첫 아침은 참으로 상쾌하다. 우리를 태운 유로버스는 즐거운 하루를 열어 주고 있다.
* 폼페이 가는 길
로마에서 폼페이까지는 270km, 약 3시간 30분이 소요되는 거리다. 계속 이탈리아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긴 이탈리아 반도를 타고 내려가며 이태리 전역을 보는 것이다. 폼페이에 간다는 것에 대하여 의미는 더욱 크다. 가슴 아픈 유적지이기에 아직도 그런 아픔이 남았는지 궁금하고, 역사 속으로 내가 들어가는 기분이다. 로마 시가지의 울창한 가로수를 뒤로 하고 버스는 폼페이를 항하여 달리고 있다. |
* 주지사 선거 벽보
이탈리아의 주지사 선거 벽보다 도로변 게시판에 한 가득 붙어 있다. 커다란 사진과 함께 일렬로 늘어선 벽보를 보며, 선거에 대한 홍보 방법이 우리나라와 동일하다고 느꼈다.
어느 나라든지 선거에 대한 열의는 대단하지만 이토록 장황하게 홍보 벽보가 붙은 풍경은 우리나라와 이태리에서만 목격했다. 캐나다에서는 한 사람씩 도로변에 큼직하게 세워둔 것을 보았고, 영국에서는 허름한 벽에 몇 명씩 붙어 놓은 것을 보았다. 선거용 홍보사진인지, 어느 나이트 무대를 소개하는 사진인지 구분이 가지 않아 사진에 담았다가 지운 적도 있었는데, 이탈리아의 주지사 선거 벽보는 시선이 닿을 때 선거 홍보용 벽보임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만큼 모든 것이 한국과 유사하다는 증명이다. 글씨는 무슨 내용인지 판독이 불가능해도, 외형상의 느낌으로는 금새 느껴진다. 이런 풍경도 그 나라의 한 단면을 읽는 좋은 자료다.
* 로마 유적지
로마 외곽에는 유적물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농로를 따라 달리는 길이라서 속력을 내지 못함에 들녘 풍경이 자세히 들어온다. 초지 사이에 무너진 건물 잔재가 곳곳에 흩어져 있다.
왼편으로는 아드리해가 있고 맞은 편은 지중해가 있는, 크게 보면 거대하게 솟은 바다 위 땅을 달리고 있다. 기름진 땅에 짙푸른 야자수 나무도 많고, 감자를 재배하는 농가도 있다. 그 사이 사이 빙그르 돌며 지나가는 길에서 로마의 묵은 향기가 맴돈다.
* 어감과 날씨
이탈리아의 날씨는 연중 화창하여서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 떠들며 산다. 그래서 남자들도 골격이 작고 화술에 능하다. 카사노바는 이태리 바람둥이 남자의 대표다.
이태리 언어와 한국 언어에는 닮은 점이 많은데 희한한 발음이 몇 가지 있다. 홍합은 꽃쩨, 남자의 성기는 까죠, 우리는 한바탕 웃었다. 우연이겠지만 어감이 한국어로 해석하는 대단한 희학이다. 이태리 가이드가 수산시장에 가서 홍합을 달라는 것이 그만 ‘까죠’를 달라고 해서 주인으로부터 황당함을 당했다는 경험을 섞어 많이도 웃겼다.
그 외 일본은 돈벌기 좋아하는 어감이고, 한국은 싸움하기 좋은 어감이고, 등등 나라마다 어감이 다르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의 어감이 외국에서 느끼기에 싸움하기 좋은 어감이라는 대목에서 소슬하게 놀랐다. 그것은 사계절을 거치며 다져진 다부진 언어의 형성이기도 하겠지만 외부에 의한 전쟁과 억압에서 탄생된 아픈 고리가 언어에까지 배인 것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이태리 어감은 시끄럽다. 우중충한 독일의 어감이 무거운 것에 비하면 상당히 가벼운 느낌이다. 날씨가 가져다 주는 큰 선물이다. 표정도 밝고, 언어도 밝고, 유럽의 화사한 나라에서 행복한 시간이다.
* 외국에서 보는 일본인과 중국인
‘너 일본인이냐?’ 하면 기분이 좋고, ‘너 중국인이냐?’ 하면 기분이 나쁘다는 저 가이드의 말을 어떻게 해석할까. 분명 한국인, 우리 동포인데 우리를 힘들게 했던 일본인의 색깔을 더 선호하고 닮고 싶어 한다.
일본인이라고 하면 웬지 돈이 많아 보일 것 같아서, 중국인이라고 하면 웬지 지저분해 보일 것 같아서라고 한다. 중국인은 머리를 감지 않아 항상 새집을 짓고, 복이 나간다 하여 목욕을 하지 않아 냄새가 나지만 일본인은 단정하고 깔끔하기 때문이다. 중국인의 바지단이 짧아서 더욱 가난한 티가 난다.
누구나 동일하게 느끼는 부분이다. 내가 가 본 중국이 그랬고, 내가 가 본 일본이 그랬다. 다시 가고 싶지 않은 나라가 중국이고, 다시 가고 싶은 나라가 일본이다. 그렇다면 답은 쉽게 나오며, 저 가이드의 말은 자명한 것이다.
한국인의 위상을 높여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문화, 경제, 정치, 교육 등등 모든 분야에서 고상하게 높여 세계 어느 곳에서든 ‘너, 한국인이냐?’ 하면 기분이 좋도록 해야겠다. 그것은 한국 국민 각자의 몫이며 공동 노력 사항이다.
*이탈리아의 이혼
이탈리아의 이혼율은 저조하다, 그 이유는 이혼 절차가 까다로와서다. 법원에 서류 제출하면 1년간 다시 생각해 보라고 돌려보낸다. 1년 후에 가면 또 다시 생각해보라고 돌려보낸다. 그런 법적 제도 속에서 이혼은 신중하게 선택해야 하고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결혼을 하지 않으려는 풍조다. 보통 33세쯤 아기 아빠가 되는데 그건 보기 드문 일이다. 결혼을 기피하는 현상은 세계적인 추이다. 각국에서 공통으로 듣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혼제도는 나라마다 다르다. 아무튼 한국도 이런 까다로운 이혼 제도는 배워가야 될 것 같다. 결혼 후 쉽게 헤어지는 절차로 자꾸 가정이 깨어진다는 것은 국가적 손실이다. 현명한 이탈리아의 이혼제도다.
*이탈리아의 복지
병원, 교육 등에서 이민 온 사람들에게 혜택이 있다. 자국민에게 복지 혜택이 좋은 것은 당연하지만 이민자에게까지 베풀어주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그래서 이곳에 이민 온 한국인이 못 나간다는 경험담을 들으며, 한편으로는 기분 좋은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한 일이었다.
아이가 위․대장 협착증인데 한국에 나가면 수술비가 억대라서 못 나간다는 것이다. 아이의 병원비 혜택으로 이탈리아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 서글픈 일 아닌가. 그것도 나가야 되는 상황에서 말이다.
나는 행정가가 아니어서 복지제도 수립에 대하여 잘 모른다. 하지만 그 분야의 전문가는 알 것이다. 우리나라도 더 시간을 앞당겨 선진 복지 제도를 도입하여 노후, 질병시 마음놓고 대처하여 편안히 살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탈리아의 교육
이곳에서는 음악학원에 1년간 다녀도 ‘도, 레, 미 … 도’ 옥타브 정도 더듬는 수준이다. 피아노는 나중에 배워도 되지만 손가락 운지법 훈련은 상당히 중요하므로 피아노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플롯 등의 악기로 손가락을 지도한다.
한국 학생이 이탈리아에 오면 적응이 쉽다. 반대로 이탈리아 학생이 한국에 가면 적응이 어렵다. 한국은 속도 위주의 주입식 교육이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가장 싫어하는 교육이 주입식이다. 시대가 변해도 한국은 여전히 주입식 교육이다.
중졸 후 고교 4년제 학교 입학하는데 과목을 본인이 선택하여 들어간다. 물리학교, 국문학교… 등등 그만큼 세분화된 고교에는 전문성이 강조되어 있고 일찍이 자신에게 맞는 교육진로를 택하는 것이다.
유럽의 대졸자는 평균 5%다. 전 세계에서 대졸자가 가장 많은 나라가 한국이다. 잘못된 교육이다. 그래서 실업율도 높고 사회불안요소 중의 하나다. 나는 전직교사다. 나의 아들이 뒤를 이어 고교 교사다. 교육에 대하여 많은 대화를 나눈다. 나라의 교육은 그 나라의 기둥이다. 아이 하나 하나에게 알맞은 교육을 받도록 하여 자신의 몫에 충실히 하는 것이 국가를 지탱하는 큰 힘이라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이탈리아의 직업
TV 수리할 때 출장만 와도 50~90유로다. 한화로 10만원 정도는 기본으로 지불해야 한다. 그래서 버려야 한다. 다시 사는 것이 더 낫다. 기능공 대우가 그만큼 좋다는 것을 상징하는 이야기다. 바지단을 줄이는 비용도 한국의 서너배다. 세탁비보다 바지단 수선 비용이 더 비싸다. 장인정신이 대단히 작용하는 면도 있다. 이런 이야기도 선진국 여행에서 수없이 들어온 이야기다. 그래서 직업에 귀천이 없고, 굳이 대학에 가려고 몸부림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본의 20대 청년 트럭기사가 한화로 500만원 보수라는 말을 일본 여행 중에 들었다. 그때도 나는 매우 놀랐다. 직업에 대한 개념과 자신의 재능에 따라 사회의 따가운 시선 없이 택하는 올바른 직업 선택관을 젊은이들에게 심어 주어야 할 것이다. |
*폼페이 가는 고속도로
어제까지 운행하던 유로버스 기사는 다시 서울 손님 받는다고 떠나고 새로운 기사가 운행하고 있다. 나이 지긋한 노련한 남자 운전기사다. 길이 그리 넓지 않은 평범한 고속도로인데 가끔씩 운무에 싸여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 구간이 많은데도 흐름을 잘 타고 있다.
지중해성 기후라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라는데 나는 매우 놀랐다. 그러다가 해가 보인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투명한 하늘이다. 그때의 창 밖은 올리브 나무 과수원과 포도재배 농가도 보이고 평화로운 들녘 풍경이다.
길가에는 개나리도 피어 있고 우거진 풀들이 하늘거린다. 역시 한국의 자연과 아주 유사하다. 다른 것은 트럭 색깔이다. 모두 하얗다. 또한 속도를 내지 못하도록 요철을 장치해 두어 차가 가끔씩 덜컹거린다.
또한 자국내에서도 밀라노에서 피렌체, 피렌체에서 로마의 풍경은 동일한데 로마에서 폼페이 가는 풍경은 다르다. 이태리 북부는 소득이 4만불이고, 남부는 소득이 8천불이다. 북부지역의 농가가 평원의 곡식 재배라면 남부의 이 지역은 특수 오렌지 작물이다. 폼페이는 가까이 갈수록 그 변화는 더욱 심하다.
*거대한 구름덩이
구름덩이가 지상에 내려온 풍경이 육안으로 보인다. 빠른 속도로 차가 지나가면 거대한 구름덩이는 차의 반대 뒤편으로 둥둥 떠나간다. 그런 장면이 한두 차례가 아니다. 수없이 반복된다.
대단한 예술이다. 어느 화가의 손으로 저런 작품을 그려내겠는가. 산자락을 타고 내려온 구름은 마을 위로, 나무 사이로, 농토 위로 신선처럼 떠다닌다. 문제는 그 구름층을 차들이 뚫고 달린다는 것이다.
내가 보는 것은 조금 떨어진 곳의 구름덩이지만 나를 태우고 달리는 버스는 구름 속에 파묻혀 달리고 있다. 지중해 연안이라서 구름과 안개가 잦고, 속도를 내지 못하도록 요철을 짧은 간격으로 설치하여 철저한 대비운전이다.
차창 밖으로 떠가는 거대한 구름덩이를 따라 나의 시선이 뒤로 끌리던 기억은 이탈리아 여행 중에서 소중한 추억이 되리라.
*베비수오 화산
폼페이에 거의 이르렀을 때 왼편 차창으로 베스비오 화산이 보인다. 우뚝 솟은 높은 산, 꼭대기가 평평한 것 빼고는 보통 산과 똑같은데 2000년전 저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인근 도시 폼페이가 불바다가 된 것이다.
전면으로 조금씩 드러나는 슬픈 도시가 폼페이다. 어찌보면 폼페이의 보호산처럼 둘러 진을 치고 있다. 높아서 베수비오 화산은 이 지역 여행 중 곳곳에서 보인다.
* 폼페이 최후의 날
소설 제목인데 비참한 최후의 순간을 상징하는 하나의 고유 문구다. 베수비오 화산의 자연재해일뿐인데, 신이 노하여 형벌을 내린 사건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그 당시 시대 상황이 그렇게 기록한 탓도 있으리라. 모든 것이 종교적으로 해석되고, 그래서 신의 분노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리라.
또한 그 당시 폼페이는 환락의 도시였고, 재앙에 대한 경고를 여러 차례 했는데도 돈과 환락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사람들이 당한 천연재해다. 오늘날이라 해도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다.
거대한 산,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폼페이는 불바다가 되고, 흘러들어온 화산재가 뒤덮어 69m 해안 절벽의 높은 도시를 새로이 형성시켰다. 얼마나 장엄한 폭발이었는지 짐작이 간다.
*폼페이 유적지
2천년전 생활상을 박제한 도시다. 귀족들의 찬란한 도시가 하루 아침에 몰락하였기에 고스란히 박제된 것이다.
번영하던 로마 제국의 도시 폼페이는 서기 79년 8월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도시 전체와 2만여명의 주민이 함께 화산재에 파묻힌 비운의 도시다. 베수비오 화산 폭발 전 폼페이는 로마 제국의 그 어느 도시보다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위락시설로 로마 귀족들 사이에서 인기 높은 리조트 도시였고 농업, 상업도 발달해 있었다.
1800년대까지 잊혀진 도시였는데 전세계 고고학자가 아래로 뚫고 들어와 연구해서 유명해진 곳이다. 아직도 연구 중이며 유적지는 점점 넓게 드러나고 있다.
입장권을 내고 들어서니 싸늘한 건물의 뼈들이 해골처럼 우리를 맞는다. 밟는 땅도 대리석 돌조각이고, 높고 낮게 서 있는 건축물의 잔재도 대부분 대리석이다.
맨 처음 멈춘 곳이 제우스 신전 자리다. 큰 마당이 있고 신전의 기둥이 앙상하게 남아 있다. 폼페이 유적지가 그리 넓은 줄 모르고 사람들은 처음 만난 이곳에서 쉬이 떠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점점 아래 마을로 내려가며 몇 블록을 꺾어 돌고 돌아도 끝이 나지 않는 거대한 유적지였다.
창녀촌 25가구는 입구에 남자 성기가 그려져 있고, 하수구, 말 매던 구멍 2개짜리 돌, 화산재에 묻혀 고통스럽게 죽은 동상 2개, 마차길, 포도주 항아리, 빵 공장, 우물, 귀족 동상이 서 있는 부잣집 높은 대문, 정원, 목욕탕 등등 수많은 유적이 상처받고 무너진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특히 임산부가 엎드려 죽은 동상은 눈시울을 붉힌다. 그 당시 사용하던 술병과 그릇들은 건물 속에 진열해 두었는데 상당한 분량이다. 대부분 토기라서 깨진 것도 많다.
이곳은 열린 도시가 아니었다. 밖으로 나가는 문 7개만 있었고 철저히 닫혀진 환락의 도시였다. ‘바다의 문’ 앞에서 아래 마을이 보인다. 이 문을 열고 나가면 바다를 만난다.
쇠창살 대문도 있고, 뜨락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파란 풀이 송송 눈뜨고 바라본다. 더러는 곳곳에 개도 앉아 있다. 해는 투명한 빛을 쏟아 놓는다. 소슬한 유적지에 뜨거운 기운이다.
잘 모르는 시골 노인들은 뼈다귀만 남은 귀신 나올 것 같은 곳을 왜 데리고 왔느냐고 항의도 한단다. 역사를 보고, 소설을 보고 이곳이 어떤 곳인지 모른다면 그 답은 충분하다.
나오는 순간까지 비운의 도시 폼페이의 앙상한 유적들은 그날을 상기시키고 있다. 예고된 운명을 대비하지 못한 졸작인데 이태리는 이로 인해 엄청난 관광 수입을 얻고 있다.
*폼페이 역
폼페이 유적지에서 나와 점심식사를 하고 카프리 섬으로 가기 위해 폼페이 기차역으로 갔다. 한적한 시골의 간이역 향기가 난다. 이곳에서 쏘렌토 역까지 30분 정도 기차를 탄다. 오고 가는 기차가 잠시 정차하고는 다시 들녘을 달려간다. 철로변에는 한국의 농촌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더운 날씨로 역사 건물 주변에서 열차를 기다렸다. |
*폼페이 기차
한국의 전철 같다. 내부는 기차처럼 양편으로 2명씩 앉는 의자가 마주 보고 있는데 땅에서부터도 낮고 위로부터도 낮다. 즉 공간이 기차라기보다는 전철의 가벼운 기운이 서리어 있다.
그러나 속도는 상당히 빠르다. 길고 긴 터널도 여러 개 지나고 남부 빈민 도시의 아파트도 스쳐지나가고, 오렌지 나무 과수원도 지나 소렌토 역으로 달린다.
폼페이 항구가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낸다. 모두들 그날의 참상을 잊고 고요하다. 기차를 탄 이곳 주민들은 눈을 감고 가지만, 나는 한시도 창가에서 눈을 떼지 않고 주변 풍경을 담았다.
*남부 빈민 도시
밀라노와 피렌체, 로마와는 확연히 다른 도시 풍경이다. 북부는 부자가 살고 남부는 가난한 자가 산다는 말이 실감난다. 그것은 북부는 상공업이, 남부는 농업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주택과 건물이 허술하고, 허름한 아파트 저층의 베란다에는 초라한 빨래가 걸려 있다. 우리나라의 가난한 농촌 마을을 보는 것 같다. 폼페이 역에서 소렌토 역까지 가는 기차 안에서 보는 밖의 풍경이 연속해서 그렇게 비추인다.
*오렌지 나무
피렌체에서 이탈리안 스파게티를 먹은 후 후식으로 나온 오렌지가 겉모양은 일반 오렌지와 똑같은데 껍질을 벗기자 핏빛 빨간물이 흐르고, 알갱이가 모두 진홍색이었다. 처음 보는 오렌지가 신기했는데 그게 바로 이탈리아 남부에서 생산하는 오렌지다.
향과 맛이 좋아 인기 좋던 오렌지가 지금 차창 밖 과수원 오렌지 나무에 노랗게 맺혀 있다. 기후 조건에 따라 결정되는 속살의 색상이 그리도 독특할까. 얼핏보면 피를 머금은 듯, 먹는 입안이 흉측하고 껍질을 벗긴 손이 새빨갛게 물들어 징그러운데 입안에서 느끼는 맛은 참 좋다.
뉴질랜드에서 먹던 오렌지는 겉모습과는 달리 속이 빈약하고, 씁쓸하여 맛이 없었는데 이탈리아에서 먹는 오렌지는 전혀 다르게 맛이 좋다. 오렌지 나무가 하나, 둘 서 있는 농가도 있고 과수원 재배하는 농가도 많다. 이태리 남부 지역의 큰 수입원이다.
*소렌토 역 도착
폼페이 역에서 탄 기차가 소렌토 기차역에 도착했다. 남부의 향수를 느끼게 하는 소박한 역이다. 야자수가 울창하다. 햇살이 따스하여 4월인데도 덥다는 기분이 드는 온후한 남부 도시다.
소렌토의 자랑거리는 계관시인 ‘따소’ 의 고향이라는 것이다. 나는 시인이다. 그래서 예사롭지 않게 바라보이는 영토다. 그뿐만이 아니라 소렌토는 가곳에서도 익히 배운 지명이다.
기차역 광장 앞에서 우리 일행을 배웅나온 셔틀버스를 타고 소렌토 시가지를 달려 소렌토 항구로 이동했다. 바닷가 도시 소렌토는 갯내음과 함께 짙푸른 열대식물로 아름다운 정경이다.
*소렌토 항구
지중해 바다를 품고 있는 항구다. ‘돌아오라 소렌토로’ 가곡을 부르며 꿈결같은 땅을 밟고 있다. ‘아름다운 저 바다와 빛나는 저 햇빛... 돌아오라... 소렌토로, 돌아오라’ 30여년전 학창시절에 배운 것이라서 가사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그 노래의 낭만은 그대로 가슴에 있다.
아름다운 저 바다, 그때는 아무 것도 모르고 배웠는데 지금 눈 앞에 전개되는 저 바다가 바로 그 바다다. 가슴이 뭉클하고 눈시울이 촉촉하도록 나의 감정이 출렁인다. 바다처럼, 푸른 물결처럼 자꾸만 깊고 푸르게 낭만이 나를 감싼다.
소렌토 항구는 꽤 길고 확 트여 있다. 어촌 마을에서 뚝 끊어진 절벽 아래 고요히 열려 있다. 긴 아스팔트에는 휴식 의자도 있고 공원이 조성되어 깨끗하다. 한적한 곳으로 가니 음식점도 있다.
바닷가에는 여러 척의 배가 매여 있다. 우리는 카프리 섬으로 가는 유람선을 기다린다. 카프리 섬에서 나올 때는 나폴리 항으로 간다 하여 이곳 소렌토 항구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더욱 가슴에 품고 싶은 항구다. 1시 15분에 소렌토 역에 도착하여 가까운 이곳 항구에 와서 1시 40분 유람선을 승선했으니 그리 긴 시간 머문 것은 아니지만 내 안 깊은 곳에 온전히 담고 가는 소렌토 항구다.
*카프리 섬 유람선
소렌토 항구에서 승선한 유람선은 하얀 물결을 일으키며 카프리 섬을 향해 바다 위를 질주한다. 바람도 심하여 2층 갑판 위 의자에 앉은 사람들은 머리와 옷깃이 나부낀다.
소렌토에서 32km 떨어진 카프리섬까지는 약 40분 정도 걸린다. 배의 요금을 포함한 카프리섬 관광료는 120유로, 한화로 150,000원이다. 선택 관광인데 우리 일행은 모두 찬성하여 조금 부담이 가는 비싼 요금이지만 카프리 섬으로 가고 있다.
소렌토 도시의 끝자락도 멀어지고, 멀리 폼페이 베수비오 화산도 아련히 보이고, 작은 섬 조각에 해송도 보이고, 바닷물에 씻겨나간 해벽도 보이고, 그러다가 망망대해 가운데로 바람을 가르며 고독한 뱃길을 달리는 유람선에서 사람들은 행복에 젖어 있다.
바다에 대한 낭만과 카프리 섬에 대한 기대로 달려도 달려도 아름다운 시간이다. 나의 시선은 바다 위에 고정되고 가슴은 시심에 젖어 있다. 배는 어느새 카프리 섬의 항구로 들어가고 있다. 정확히 2시 20분에 도착했다. 푸른 나무 사이의 언덕에 사람의 집이 보인다. 유람선에서 바라본 카프리 섬은 평지의 어촌이 아니고 절벽을 깎아 일군 어촌이다. 아름다운 비경이다.
*카프리 섬 셔틀버스
셔틀버스를 타고 섬의 정상으로 오른다. 평지 길은 잠시고, 바다 절벽 구부러진 길로 점점 가파르게 올라간다. 능숙한 운전으로 교행하여 오르내리는 길은 바다 쪽에는 난간 하나 뿐이고, 산 쪽에는 깎아지른 절벽이 하늘 높이 솟아있다. 그 사이로 길을 낸 아스팔트 위로 외객을 태운 카프리 셔틀버스는 흥겹게 달리며 두려움을 잠재운다.
카프리는 두 마을로 나뉘어져 있는데 이곳은 ‘안나 카프리’ 로 기암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반대편은 그냥, ‘카프리’ 로 낮은 지역이다. 총 인구 11,000명, 생각보다는 큰 섬이다.
봄, 여름, 가을에만 이곳 섬에서 일하고 겨울은 일을 하지 않아 겨울 관광은 힘든다. 바다에서 생을 이어가는 섬 치고는 꽤 풍요로운 외경이다.
한동안 오른 버스가 도착한 곳에는 또 다른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다. 15분 정도 달렸으니 가까운 거리는 아니다. 산정 가까이 높은 지역에 상가와 민가 주택이 가득하여 저 멀리 보이는 바다가 아니라면 평지의 도심이다.
이곳에서 한층 더 높은 꼭대기 태양섬에 오르는 리프트가 있다. 셔틀버스는 쉴새없이 리프드를 타려는 손님을 싣고 오르내린다.
*카프리 섬 리프트
긴 줄에 매달린 1인용 리프트가 섬의 꼭대기로 오르는 모습이 아슬하다. 한 사람이 내려오면 빙그르 돌아오는 외줄 위의 1인용 의자에 빨리 앉아야 한다. 안내원이 지켜서서 줄 서 있는 사람을 한 사람씩 태워주고 앞쪽 터진 곳을 쇠막대로 덜커덕 채워준다.
긴 산 능선을 15분간 타고 오른다. 해발 600m의 산정을 향해 오를 때 낯선 두려움이 엄습한다. 산바닥과의 거리는 그리 높지 않지만 건들거리는 의자에 목숨이 매달려 있다. 그 시간 동안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라고 하던 가이드의 말이 뇌리를 스친다.
내가 생각한 것은 두 가지다. 첫째는 건강해야겠다는 것이고 둘째는 돈이 있음으로 얻어지는 행복이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아니면 우리 부부가 어찌 이곳에 오겠는가. 나와 남편은 오늘이 있기까지 참으로 성실한 삶으로 생을 이어 왔다. 그래서 건강과 금전 축복을 받은 것이고 지금의 행복을 선사받은 거라고, 외줄 위 리프트에서 15분 동안 떠오른 상념이다.
그런 생각으로 바라본 카프리 섬 산줄기는 아름다웠다. 발 아래 전개되는 하얀 카프리섬 풍경이 참으로 곱다. 리프트가 도착하는 곳에서도 안내원 남자가 사람들을 재빠른 손놀림으로 받아 내린다. 줄 위의 의자가 자동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정지되는 시간이 없어 속히 내리고 속히 타야 하기에 안내원의 도움은 필수다. 리프트에서 내려 산정에 올랐다.
*카프리 섬 정상의 비경
발이 오르는 순간 뚝 끊어져내린 절벽과 그 아래 천길 낭떠러지 푸른 바다가 감탄의 함성을 자아낸다. 죽음보다 아름다운 절벽, 목숨보다 아름다운 절벽이다.
원래 카프리섬은 나폴리 소유였는데 황제가 섬을 샀다. 황제가 섬으로 들어갈 때는 미소년, 미소녀를 데리고 들어가 Free Sex를 벌렸다. ‘카프리’ 의 뜻은 ‘늙은 염소와 어린 소녀, 소녀’ 다. 그래서 ‘성의 유희의 섬’ 이 되었다. 여자의 성은 철저히 무시당하던 시대의 비극이다. 티베루스 형제는 부인을 새로이 바꾸려고 카프리섬 이곳 절벽에서 본처를 밀어 죽였다고 한다.
전설 같은 이야기도 사라지고 남은 것은 아름다운 풍경이다. 너비 1.6km, 길이 2km의 카프리 섬이 한 눈에 들어온다. 푸른 나무 군락 속에 하얀 집들이 배꽃처럼 어여쁘다. 동화 속 그림처럼 순수하고 아기자기한 섬 풍경이다.
아름다운 것은 섬 풍경만은 아니다. 이곳 꼭대기의 풍경도 아름답다. 뜨락도 있고, 상가도 있고, 화장실 등 편의 시설이 갖춰있고 벽에 아우구스투스 대제 동상이 커다랗게 세워져 있다. 바다와 어우러진 동상의 풍경이 비경이다.
자유시간이 많아서 많은 풍경을 보았다. 다시 리프트를 타고 내려올 때는 디카로 사진을 찍을 만큼 여유로웠다. 오를 때보다 내려올 때의 카프리 섬이 더 아름답게 보인다. 코발트 빛 바다, 하얀 집들, 열대 식물의 초록빛들, 잘 가꾼 카프리 섬이다.
리프트에서 내려 다시 항구로 가는 셔틀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은 길었다. 워낙 많은 세계의 관광객이 모여들어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그 동안 시가지의 상가와 골목을 걸으며 관람했다. 누가 카프리를 바다 위 고독한 섬이라 하겠는가. 즐비한 상가에는 온갖 물건이 다 있고, 개인 주택도 화려하다.
셔틀버스를 타고 내려오는 풍경도 아까와는 또 다르다. 같은 길을 타고 내려오는데 두려움은 사라지고 절벽의 낭만이 대단하다. 꺾어지는 곡예 운전도 멋지고, 좁은 산곡의 길을 오르내리는 차들의 교행이 훌륭하다. 모두가 아름다운 카프리 섬의 비경이다.
*나폴리 행 유람선
카프리 항에서 나폴리로 가는 유람선을 기다렸다. 카프리 항구의 바닷물을 만지며 추억을 담았다. 돌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바닷가에 모여 있다. 개 한 마리가 바다 속을 수영한다. 사람처럼 바다를 사랑하는 개가 대견하다.
오후 5시 2층 갑판 위로 올라갔는데 의자에 사람들이 다 앉아 자리도 없고, 공간도 협소하여 1층 선실로 내려왔다. 1층 선실은 갑판과는 전혀 다르다. 넓고, 모든 시설이 갖춰있다.
선창이 넓어 외경이 선명하다. 창가의 푹신한 의자에서 아주 편안하게 왔다. 상가도 있는데 들고 다니며 음식을 파는 상인도 있다. 바다는 망망대해다. 카프리에서 나폴리까지는 50분 정도 소요된다. 나폴리 항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는 다시 2층으로 오르는 배의 난간에서 나폴리 미항을 보았다.
*나폴리 미항
세계 3대 미항은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 항, 호주의 시드니항, 이탈리아의 나폴리항이다. 배를 타고 들어갈 때 왜 나폴리항이 미항인지 알게 될거라는 가이드의 말에 나는 그 미항을 보기 위해 유람선 난간에서 분주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호주 시드니항은 오페라하우스와 하버브릿지가 비경이었는데 나폴리항은 멀리 베수비오 화산이 비경이다. 바다 위에 뜬 것처럼 보이는 높고 긴 산이 포물선으로 앉아 화산 폭발로 삼켜버린 폼페이를 감싸 안고 있다.
나폴리항이 세계 3대 미항이라는 해답은 나폴리항이 아름다워서가 아니고 원경으로 보이는 베수비오 화산과 폼페이의 눈물겨운 정경에 있다. 폼페이 최후의 날은, 당시의 재앙은 슬픈 비극이지만 현세에 이르러서는 훌륭한 유적지이며, 교훈을 남긴 생생한 현장인데 거기에 더하여 나폴리 미항을 탄생시켰다.
*나폴리 항구 도착
정확한 명칭은 나폴리 산타루치아 항구다. 유람선에서 항구로 들어올 때 부두에는 크고 작은 배들이 즐비하게 매어 있었다. 사람을 실어 나르는 배도 있지만 화물선이 더 많다. 접안시 하선시키기 위해 안전요원들이 닻을 내리고 땅으로 나가는 다리를 두 개 내리며 분주히 움직인다. 나폴리 항구는 번화가였다. 다른 항구와는 분위기가 다르다. 나폴리는 가난한 남부 도시인데 이곳 주변은 북부의 부자 도시 냄새가 난다. 관광객을 위해 도시 정리를 잘 해둔 인상이다. 높은 건물도 있고 깨끗하다. 가장 먼저 보이는 큰 건물은 까스루오보 성이다. ‘새로운 성’ 이란 뜻으로 우람하다. 오후 6시에 도착했으니 일몰의 낙조가 나폴리 미항을 더욱 아름답게 물들인다. 작은 성당을 지나 해안선 도로를 조금 따라가니 수출입 물품을 담당하는 산타루치아 항구가 보인다. 가곡 속에서 배웠던 ‘산타루치아’, 참으로 감명 깊은 항구다. 대단히 큰 항구다. 해변에 대형 선박과 콘터이너 박스에 담긴 크고 작은 상자의 물품이 한 가득이다. 그 짐짝 속에서는 낯익은 글자가 보였다. ‘HANJIN’, 한진이라는 우리나라의 상표다. 한국의 물품이 들어온 것 같다. 흐뭇하다. 산타루치아 항구를 벗어나자 역시 나폴리의 본 모습이 드러난다. 허름한 4~5층의 저층 아파트에 가난의 상징인 누추한 빨래가 너줄하게 걸려 있다. 실업율 35%, 범죄가 많은 나폴리다. 한국 여권은 3개월 동안 유럽에 체류할 수 있어서 도난을 조심하라던 말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은 나폴리 내부의 문제고, 나는 나폴리의 아름다움만 가지고 가리라. 아름다운 지명과, 아름다운 바다, 항구, 유람선, 주변 풍경 등등 낭만과 내 족적의 짙은 추억은 오랜 시간 동안 나를 행복하게 해 주리라. |
*로마로 돌아가는 길
점점 어두워지는 창 밖이다. 오후 7시 20분, 유로 버스는 다시 돌아온 고속도로를 타고 로마로 가고 있다. 나폴리에서 로마까지는 245km 정상적인 주행이라면 3시간이 소요되나, 로마에서 폼페이로 올 때도 3시간 30분 예정시간보다 훨씬 더 걸린 것으로 보아 예측하기 어렵다. 그러나 차 안에서 그 주변 풍경을 보는 것도 큰 여행이어서 시간이 많이 걸려도 좋다. 나폴리도, 폼페이도 점점 멀어지고 하늘엔 남은 빛이 마지막 하루를 비추고 있다. 로마는 지금 폭우가 내린다는데 아직 나폴리에서 가고 있는 로마로 향한 이 길은 평온하다. 올라가면서 보는 이탈리아의 풍경은 아까와는 또 다르게 다가온다. 큰 산줄기인 알프니스 산맥을 지날 때는 석양과 함께 비경이다. |
*고속도로에 핀 개나리
개나리는 유럽 여행 중 각 나라마다 다 피어있다. 한국의 야생꽃인 줄 알았는데 전 세계에 분포하는 생명력이 강한 꽃이다. 고속도로 변에 큰 덩이로 노오랗게 물결치는 저 개나리 꽃무리가 고국에 대한 향수를 부른다. 색깔도 생김새도 핀 형상도 동일하다.
군데 군데 군락을 이루며 어두워가는 저녁을 밝히고 있다. 가이드가 비디오를 준비해와 영화를 틀어주는데, 나는 그보다도 창밖 이탈리아의 풍경에 관심이 더 많아 나의 눈은 지금 고속도로변 창가의 전원 풍경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다. 순간 순간마다 새롭게 지나가는 풍경을 디카에 담기도 하고, 가슴과 두뇌 속에 깊이 각인시켜 저장하고 있다.
노오란 개나리가 고속도로변에서 외객을 기쁘게 한다.
*로마 도착
로마에 거의 이르렀을 때 차가 막힌다. 일시에 로마로 입성하려는 차량이 몰려서 그렇기도 하지만 비가 와서 그렇다. 가늘던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고, 땅에 물이 흥건하다.
창 밖은 이제 캄캄하여 보이지 않는다. 창문에 나의 모습만 그대로 반사되고 있다. 더러는 화장실이 급하여 오랜시간 고속도로에 멈춘 것이 형벌이다. 간신히 휴게소에 당도했을 때 매우 기뻤다.
10시가 넘은 시간에 예약해 둔 한국 식당에 들어갔다. 맛있게 차려 놓은 식단이다. 진종일 폼패로, 카프리섬, 나폴리를 돌아다녀서 고단한 몸을 순수한 한국식 불고기와 김치로 다독였다.
로마에서는 같은 호텔에서 2일간 유숙하므로 다시 그 호텔로 돌아왔다. 내일은 로마와 바티칸 시국을 본다. 구시가지 그대로 보존된 좁은 길을 오늘보다 더 많이 걷는다 하여,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행복한 로마의 밤이다.
2006년 4월 19일 수요일 이탈리아 로마, 바티칸 시국
로마의 출근 풍경, 스페인 광장, 구시가지의 바닥 돌, 2인승 자동차, 트레인 분수, 베네치아 광장, 포로 로마노(로마 공회당), 콜로세움, 대전차 경기장, 진실의 입, 바티칸 시국, 바티칸 박물관, 시스티나 예배당, 성 베드로 성당, 성 베드로 광장, 로마 교황이 사는 집, 자니콜로 언덕, 로마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 네덜란드 암스텔담 도착
*로마의 출근 풍경
오늘은 집중적으로 로마 투어다. 로마의 곳곳을 돌아보는데 오전 8시에 호텔을 출발하여 출근 풍경을 보았다. 호텔에서 시가지 안으로 점점 들어오면서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외곽은 야자수가 많아 쾌적하고, 한국의 야생화와 야생풀이 있어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더러는 조금 높은 아파트가 있다. 그러나 한국처럼 여러 개의 동이 있는 것이 아니고 전원 속에 단 1개의 동이 예쁘게 들어서 있다.
도심에서는 자가용, 자전거 출근이 많고 전차의 러시아우어가 대단하다. 도로에 여러 칸의 전차가 멈추자 승차하려는 사람들이 밀고 들어간다. 아슬아슬하게 두 손으로 차의 문을 잡고 타려는 젊은이의 출근 풍경이 한국과 유사하다. 단지 전철이 아니고 전차라서 광장의 도로에서 이루어지는 진풍경이다.
*스페인 광장
스페인 대사관이 있어서 스페인 광장이라고 부른다. 1700년에 조성된 것으로 낭떠러지를 메워서 지은 광장인데 프랑스에서 고쳐 주었다. 광장에 들어서자 높은 수호천사 탑이 눈에 들어온다. 주변은 상당히 번화가다. 관광 마차도 대기하고 있다.
이곳은 서울의 강남이다. 그래서 오가는 사람과 차량이 많다. 또한 발작, 괴테, 바하, 영국시인으로 28세때 요절한 키치 등이 활동하던 곳이다. 지금은 로마인들의 휴식공간이다.
광장 중앙에는 보트 모양의 분수가 있다. 곁에는 긴 계단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주상 복합 상가의 건물이 세련되고, 높고, 꽃으로 장식된 창들이 아름답다.
영화 ‘로마의 휴일’ 촬영지로 오드리 햅번과 그레고리 팩이 주연하여 유명해진 관계로 한국에도 널리 알려져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로마 시가지에 스페인 광장이라는 명칭이 아이러니컬하지만 스페인과의 쌓아온 역사가 있어 고유한 명칭으로 남은 쾌적한 공간이다.
*구시가지 바닥의 돌
로마는 시가지 자체가 거대한 유적지다. 그래서 구시가지 그대로 보존된 곳이 많다. 관광도 종일 걸어 다니며 한다. 13,750보를 걸어야 로마의 관광이 끝난다는 말을 사전에 듣고 간편한 운동화를 신었다.
그런데 문제는 구시가지 바닥의 돌이다. 대리석 돌을 뾰족하게 뿌리를 만들어 박아놓았기 때문에 정사각형 모양의 검은 돌이 조금 솟아 있다. 보도 블록을 깔아 놓은 것과는 다르다. 돌과 돌 사이의 공간도 추위와 더위에 피해 입지 않도록 조금 띄워놓았다. 그래서 무심코 가다가 돌에 걸려 넘어질 우려가 있다. 조심조심 걸었다.
길바닥의 돌까지도 역사가 배어 있다. 이런 것도 모두 관광자료다. 작은 것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는 이탈리아의 소중한 한 단면이다.
*2인승 자동차
아주 작은 승용차를 보았다. 운전석과 옆자리, 단 2인이 승차가능한 소형 자동차다. 이 차는 은퇴 부부가 선호한다. 퇴직 후 두 부부가 여행하기 위한 자가용으로 사용되고, 더러는 젊은 부부도 소유한다.
한국의 마티즈 풍인데 뒷부분이 없으니 외형이 독특하다. 얼핏보면 앞뒤가 짧아 사고시 위험할 것 같은데, 원래 유럽인은 작은 차를 선호하기에 큰 문제는 아니다.
나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떠올리며 유심히 보았다. 차를 과시용으로 사는 것보다 실속있는 경제성을 고려해서 사야 할 것이다. 좀 더 국민 각자의 노력으로 저런 소형차를 선호하는 풍토를 조성해야 한다.
자가용뿐만 아니다. 골목 언덕길에 주차한 소형 트럭도 있다. 장난감 모형 같은 예쁜 트럭이다. 좁은 도로까지 진입 가능한 실용적인 트럭이 훌륭해 보인다.
소형차보다 훌륭한 것은 소형차의 주인의 검약 정신이다. 실제로 운행하는 노부부와 젊은이를 여러 번 만났다. 여유있고 당당한 표정이 더욱 아름다운 모습이다.
*트레비 분수
골목진 길을 꺾어 내려갔을 때 거대한 건물과 조각상들, 그 앞에 줄줄이 물줄기가 흐른 큰 분수 연못이 있었다. 옆모습이 맨 처음 보였는데 대단한 조형미와 대단한 아름다움이다. 정면에 섰을 때, 내가 역사의 연못으로 걸어 들어가는 환상에 젖는다.
교황 클레멘스 13세에 의해 분수 설계 공모전이 이루어졌는데, 이때 당선된 니콜라 살비의 작품이다. 이 분수의 물은 ‘처녀의 샘’ 이라고 불리우는데 이는 전쟁에서 돌아온 목마른 병사에게 한 처녀가 샘이 있는 곳을 알려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에서 분수가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분수에 등 뒤로 동전을 한 번 던지면 로마를 다시 찾을 수 있고, 두 번 던지면 사랑이 이루어지고, 세 번 던지면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한다는 전설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하여 동전을 던지는데 동전들은 로마시에서 정기적으로 수거하여 자선사업에 사용한다.
포세이돈이 30년간 물 속에 있는 트레비 분수, 쉼없이 흐르는 물줄기가 역사를 잇듯이 위대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분수가에 걸터앉아 쉬기도 하고, 사진을 찍기도 하고 분주한 움직임이다. 주변에는 상가도 많아 둘러보았다. 관광명소인만큼 경찰도 지키고 있다. 모두가 평화로운 풍경이다.
*베네치아 광장
로마 교통의 중심지로 6개의 주요 도로가 만나는 곳에 있다. 꽃밭을 잘 가꾸어 놓아 첫 인상이 참 좋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바라본 주요 건물이 웅장하다.
한국의 독립기념관과 같은 개념의 건물이다. 이태리 통일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1871년 이탈리아를 통일한 임마누엘 2세를 기념해 건설되었으며 1911년에 완공된 네오클라식 양식건축물이다. 맞은 편에는 2차 대전 때 뭇솔리니가 쓰던 사무실도 있고, 곁에는 히틀러가 처음 걷던 길이 있다.
역사는 다 잠들고 지금은 오직 시민의 광장으로 축제 장소다. 30년간 지은 베네치아 광장은 우람한 나무와 우람한 건물, 꽃, 로터리를 돌아나가는 차량들로 고전과 현대의 풍미가 흐르고 있다.
*포로 로마노(로마 공회당)
공식 명칭은 Foro Romano, ‘포로’ 라는 뜻은 공공 광장이라는 의미로 ‘포럼’ 이라는 말의 어원이 여기에서 생겼다고 한다. 이곳은 상업, 정치, 종교 등 시민생활에 필요한 모든 기관들이 밀집해 있던 지역이었다. 로마의 중심지로서 로마 제국의 발전과 번영 그리고 쇠퇴와 멸망이라는 로마 2500년 역사의 무대가 되었고, 중심이 되는 곳을 제외한 많은 건물들이 283년에 대화재로 소실되었다. 기가 막힌 유적지다. 로마의 생활상과 부흥기의 사회상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다 폐허가 된 현재도, 뼈다귀만 앙상한 지금도 이토록 크고 넓고 웅장하거늘, 가히 그 당시의 화려함이 보인다. 포로 로마노 주변은 캄보디오 언덕으로 1900년까지 높은 집이었다. 심한 홍수와 세월의 누적으로 토사가 개선문 꼭대기까지 쌓여 있어서 전혀 모르다가 1900년대에 와서야 드러난 유적지다. 공회당 안에 오면 주변이 월등히 높다. 공회당은 푹 내려 앉아 있어 토사에 묻혔다면 주변의 땅과 평평해지는 위치이다. 승리를 보고하던 개선문에는 이란, 이라크 점령 기념탑이 있고 클레오파트라와 시저가 걷던 길이 길게 뻗어 있다. 시저가 화장된 양철지붕은 최초로 신이 되어 하늘로 날아간 시저를 노래한다. 그 외 이루 말할 수 없을만큼 크고 작은 유적과 유물이 남아 있다. 새로이 돋아난 풀, 나무들이 외인을 반기고, 배웅한다. |
*콜로세움
로마의 상징이며 거대한 원형경기장으로 당시 로마인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 건축물이다. AD 72년에 네로 궁전의 뜰에 있었던 인공 연못에 건설을 시작하여 80년에 완공된 대형 원형 투기장 겸 극장이다.
생사를 겨루는 검투사와 짐승의 80개 정도가 되는 출구에 5만 5000여명이 넘는 관객이 입장할 수 있었다. 고대 로마 유적지 중 가장 큰 규모로, 최대지름 188m, 최소지름 156m, 둘레 527m, 높이 57m의 4층으로 된 타원형 건물이다.
콜로세움은 로마 관광을 위해 유로 버스를 타고 호텔에서 시가지로 들어올 때 멀리서부터 우함하게 보였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유명한 건물, 나는 차 안에서 그 전경을 찍었다. 사실 콜로세움 앞에서 관람할 때는 워낙 높고 큰 대형 건물이라서 아무리 멀리 가도 전체를 사진 속에 담을 수 없었다.
유태인을 데려다가 8년간 지은 건물을 대리석과 대리석을 청동과 납으로 이어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정원에는 신혼부부가 기념 사진을 찍고 있었다. 콜로세움 밖의 뜨락은 상당히 넓어 시민의 휴식처다. 오늘도 사람들로 꽤 붐빈다.
내부는 들어가지 못하도록 잠가 두었다. 외형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기념물이다. 그 옛날을 재현하는 복장 차림의 남자 병사들이 있고, 그 옛날 몰던 잘 생긴 말과 마차가 있다. 모두 돈을 받고 사진 모델, 혹은 관람 순회용이다.
시대는 갔어도 잔재는 고스란히 남아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돌아올 때 대표 티셔츠로 콜로세움 건물이 찍힌 것을 사 가지고 왔다. 이탈리아의 전성기, 높고 튼튼한 역사가 박힌 T셔츠가 역시 가장 아름다워서다. 로마 관광 중 콜로세움은 여러 번 만난 인상깊은 고상하고 위엄있는 색상의 건물이다.
*대전차 경기장
영화 〈벤허〉의 경기장이다. 7바퀴 1/2을 돌던 대전차 경기장이다. 대로변에 버스를 정차하고 내려다본 경기장은 저 아래로 보이는 낮은 지대에 거의 직사각형에 가까운 마당이다.
이 장방형의 길쭉한 건물은 시민들에게 즐거움을 제공해 주기 위해 지어진 전차 경기장으로 1인승 이륜 전차 경기와 검투사들의 검투가 있던 곳이다. 지금은 무너진 흔적만 남아 있는데, 그 크기가 너비 664m, 124m에 이른다. 이 건물은 로마에 있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 중의 하나로 과거에는 25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경기장이었다. 로마의 역사와 견줄 수 있을 정도이며, 중간 중간 계속 증축되었다.
모든 유적지가 그렇듯이 이 경기장의 웅장함도 대단하다. 모두 크고 넓고, 높고, 오늘날의 건축물이나 유적지와는 전혀 다르다. 육중했던 역사를 보고, 배우고 간다.
*진실의 입
거짓말한 자가 손가락을 넣으면 손가락이 잘린다는 곳이다. 농민과 영주의 싸움을 다스리던 곳이다. 영주가 농민 인건비를 안 주고는 줬다 하고, 농민은 받고도 안 받았다 하고, 이런 거짓말을 다스리기 위해 진실만을 말하라는 ‘진실의 입’ 이다.
코스메딘 산타마리아 성당의 입구 한쪽 벽면에 진실을 심판하는 입을 가진 사람 얼굴 모양의 원형 석판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진실의 입〉이다. 이 원형 석판은 해신 트리톤의 얼굴을 조각한 것이다.
원래 이 석판은 기원전 4세기경 로마 시대 하수도 뚜껑으로 사용된 것으로 손을 넣었다 빼면 하수구 냄새가 났다고 한다. 어원적으로 풀어보면 ‘보카 델라 베리타’ 란 이름에서 보카(Bocca)는 입, 베리타(Verita)는 진실을 의미한다.
오드리 햅번과 그레고리 팩도 넣고 뺐다는 영화 〈로마의 휴일〉촬영지며, 거짓말한 자의 손이 잘려 나왔다는 진실의 입은 유명 관광지로 방문객이 장사진이다. 잘리던, 잘라지 않던 〈아픔과 성숙〉이 이루어진 기막힌 재판장의 입술이다.
*바티칸 시국
이태리 수도인 로마 안에는 바티칸이라는 또 하나의 나라가 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독립국으로 잘 알려진 이곳은 전 세계 카톨릭의 총 본산이라는 성스러운 의미가 있다.
그리고 미켈란젤로의 불후 명작인 ‘천지창조’ 와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등 책에서만 볼 수 있던 훌륭한 예술 작품들을 직접 감상할 수 있는 이태리 미술의 보고이기도 하다.
수도도 바티칸이며 인구 1000명인 나라, 어느 아파트 한 단지의 인구보다도 작은 이곳이 국가로 인정받는 곳이라니.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로마 교황이 살며 통치하는 카톨릭의 영토, 국가라기보다 하나의 종교의 위상을 높이 인정하고 세계에 전파하여 평화의 상징으로 존재하는 성역이다. 수신기를 귀에 꼽고 안내원의 설명을 들으며 관람했다. 둘러본 세부 곳곳에 대하여 제목을 붙여 아래에 상세히 적고자 한다.
*바티칸 박물관
관람객이 너무 많아 관람 순서를 바꿔 뒤쪽문으로 들어갔다. 정문은 성 베드로 광장인데 이곳은 박물관 문이다. 잔디 정원에 겉과 속이 다른 우주가 동그랗게 건축미술작품으로 전시되어 있고 파르테논 신전을 본뜬 건물이 있다. 입구에서 미켈란젤로 그림을 사진 찍어 전시해 둔 게시판을 보며 설명을 듣고 입장했다.
조각상들이 수없이 많다. 네로의 식탁, 소크라테스 상, 비너스 동상, 여러 신들의 상 등 계속 이어진다. 이런 조각품은 사진 촬영이 가능하다. 자수화실에는 자수로 수놓은 그림들이 생생히 살아 있는 느낌이다. 대단한 솜씨다. 긴 통로에 전시되어 있다.
로마의 화려했던 역사다. 14세기 아비뇽 유폐를 마치고 교황이 바티칸으로 되돌아 온 이래 교황의 거주지가 된 이 궁전은 20개에 달하는 박물관, 미술관, 도서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의 소장품은 역대
교황이 모은 것을 중심으로 고대 그리스 미술과 미술사적으로 진귀한 다양한 시대의 작품들이다.
*시스티나 예배당
시스티나 예배당은 교황 궐위시 새 교황을 선출할 때 추기경들이 모여 선거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또한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적인 화가 미켈란젤로가 그린 벽화 〈최후의 만찬〉과〈천지 창조〉가 있다.
교황의 명령에 따라서 수십년 간 그린 명화로 가득찬 방이다. 큰 강당처럼 마련되어 있고 벽과 천정에 크고 작은 그림이 붙어 있는데 모두 성경책의 이야기를 그린 그림들이다.
바티칸 시국에서 〈최후의 만찬〉과 〈천지 창조〉를 보면 다 보는 거라고 할만큼 그 가치는 상당하다. 미켈란젤로의 일생을 바칠만큼 긴 시간 동안, 목숨 바쳐 그린 대작은 현품이며 바티칸 시국의 소중한 보물이다.
색상도 아름답고, 사람들의 움직임이 살아있고, 어느 것 하나 의미가 부여되지 않은 것이 없다. 규모도 초대형이고, 그 안에 든 내용물도 초대형이다. 천지창조에서 최후의 만찬으로 마무리되는 역사가 생생히 재현된 예배당이다.
*성 베드로 성당(바울 성당)
성당 326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서 베드로 무덤에 세워진 바실리카식 성당은 1506년 교황 율리우스 2세에 의해 개축이 시작되어 1626년 교황 우르반 8세에 때 성 베드로 성당으로 완공되었다. 성당의 돔은 전 세계에서 가장 크며, 성당 내부에는 유명한 조각상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이 있다. 시스타나 예배당을 지나 들어간 이곳, 일명 바울 성당의 내부는 새로운 우주, 천상의 공간이다. 높은 천정과 스테인드 글라스의 아름다움, 그림들, 조각상들로 신비로운 나라에 온 느낌이 든다. 나폴레옹에게 대관식을 거행한 교황과 그의 무덤 석관도 있다. 그 외 여러 동상으로 당시의 카톨릭 역사를 재현시키고 있다. 모든 색상이 천연 대리석으로 이루어졌으며, 그것이 불가능할 때는 유리가공시 색상을 넣어 만들었다. 그러하기에 불변의 색상들이다. 성당 한쪽에는 작은 예배 장소가 있어, 잠시 앉아서 보았다. 로마 교황이 하느님과 교통하며 인간 세계에 평화와 평온을 선사하는 성역, 경건한 마음으로 가슴 깊이 담아가는 성당이다. 나오는 문에는 수녀들이 저녁 예배를 위해 준비하고, 벌써 성당은 검은 제복의 성가대가 들어와 찬송을 부른다. 평화의 아름다운 메시지다. |
*성 베드로 광장
바티칸 시국의 정문이다. 우리는 이곳 문으로 나왔다. 베드로 성당을 마지막으로 관람하고 나왔을 때 전개되는 강장은 새로운 신천지다. 경사로 비스듬히 내려가는 길도 아름답고, 높은 첨탑이 광장을 빛낸다.
성 베드로 광장은 좌우폭이 240m로 30만명의 군중을 수용하는 장소다. 정면으로 성 베드로 성당 입구가 있고 그 좌우로 반원형의 회랑에 4열의 그리스식 건축 양식의 원주 284개가 서 있다.
광장 중앙에는 서기 40년 칼리굴라 황제가 이집트에서 운반한 높이 25.5m, 무게 320톤의 오베리스크 첨탑이 서 있다. 첨탑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이고 있다. 의자가 있어 먼저 온 사람은 앉아서 기다린다. 광장의 바로 앞에는 로마의 차량들이 줄지어 다닌다. 갑자기 몇 세기를 건너 뛰어 넘어온 세상의 풍경이다.
드넓은 광장은 참으로 아름답다. 어디까지가 바티칸 시국이고, 어디까지가 이탈리아란 말인가. 국경선이 보이지 않는 두 나라가 섞여 있다. 아름다운 나라에서 아름다운 경계선 아닌 경계선을 넘나들며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로마 교황이 사는 집
바티칸 시국은 5개 교주 중 1개만 유럽에 있고 264대 교황까지 이곳에 거주하는 하나의 국가다. 종교 집단이지만 엄연한 단일 국가다. 1475년 개인 성당으로 만들었는데 자꾸 바깥 세상과 부딪혀서 외부와 단절하는 의미로 종교국을 세우고 인정받았다.
한국은 교황이 1명으로 서열 5번째다. 일본은 교황이 2명이다. 교황의 명령으로 화가 미켈란젤로는 4년 8개월에 걸쳐 모형 그림도 없이 상상만으로 그림을 그려 바쳤다. 한 작품을 위해 투자한 시간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돋보이는 영토다.
성 베드로 광장을 중심으로 빙 둘러선 건물 중에서 우편으로 로마 교황이 사는 집이 보인다. 주택이 아니고, 한국의 빌라 높이의 주상복합 건물이다. 저 곳에서 살며 매주 일요일이면 집무실 창문이 열리면서 광장에 모인 군중에게 강복을 내린다.
TV에서나 보던 광장, 성당, 바티칸 시국의 아름다운 풍경이다. 돌아가면, 이런 기억들로 TV에서 카톨릭 교황이 나올 때, 이해가 빠르리라. 이것으로 바티칸 시국의 여행은 끝났다. 꽤 많이 걷고, 많이 보았다. 모나크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 유럽의 작은 국가에서 평화의 큰 선물을 받아가는 행복한 걸음이다.
*자니콜로 언덕
시간이 조금 여유있어 로마에서 들른 마지막 명소다. 로마가 한 눈에 보이는 높은 언덕 광장에는 가리발디 기마 동상이 있다. 가르발디는 '로마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명언을 남긴 장군이다. 그런데 말이 진행하는 방향과 눈의 시선이 다르다. 그의 부인 가르발디 아니타의 묘지가 있는 곳을 응시하기 때문이다. 자니콜로 언덕 아래쪽에 부인의 묘가 있다. 자니콜로 언덕은 그리 넓지는 않지만 붉은 지붕의 로마 시가지를 본다는 것에 깊은 의미를 두는 언덕이다. 비탈진 길을 돌아내려와 콜로세움 가게 면세점에서 올리브유와 기념책, 기념 T셔츠를 사고는 네덜란드로 가기 위해 로마 공항으로 이동했다.
*로마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
이탈리아는 스위스에서 유로 버스로 넘어왔기 때문에 이곳 로마 공항은 처음 오는 곳이다. 버스에서 공항에 내리자마자 아름다운 물이 줄줄 흐르는 곳에 ‘레오나르도 다빈치 에어포트’ 라는 영문 글씨가 있다.
한국의 인천 공항처럼, 이탈리아 로마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이다. 이 공항 설계가 레오나르도 다빈치 작품이어서 그렇게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공항은 규모가 상당히 크다. 이탈리아를 떠나며 아쉬운 마음으로 곳곳을 둘러 보았다. 이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간다. 3박 4일간의 이탈리아 여행은 큰 장으로 기억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