쫄리 쫄리 신부의 아프리카 사랑
살레시오회 이태석 신부
전기도 전화도 없다. 물도 먹을 것도 거의 없다. 있는 것이라면 섭씨 50도를 넘나드는 더위와 가뭄, 모래바람이고 나병과 결핵, 말라리아와 온갖 질병들, 그리고 죽음으로 가는 전쟁밖에.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도저히 상상할 수조차 없이 가난한 아프리카 남수단. 그곳에서 주민들과 함께 벗이 되어 살아가는 이가 있다. 살레시오회 이태석(요한·43)신부이다.
“처음에는 워낙 가난하니까 그들과 함께 이것도 하면 좋겠다, 저것도 하면 좋겠다 혼자서 계획을 많이 세우곤 했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물질적 도움보다는 같이 있어주는 것, 함께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전쟁이나 어떤 어려움이 닥친다 해도 그들 곁을 떠나지 않고 그들을 버리지 않고 함께 있어주고 싶습니다.” 그는 언제까지나 우리와 함께 있겠다 하신 스승 예수처럼 늘 그들과 함께 있고 싶다 했다.
사제품을 받고 며칠 지나지 않은 그가 집전하던 미사를 기억한다. 새 신부의 깨끗함, 하느님께 봉헌된 영혼의 아름다움과 살레시오회 수사들 특유의 낙천적이고 유머러스함이 가득 풍겨져오던 그였다. 그가 청소년 가톨릭성가집에 실린 곡 ‘묵상’을 작사 작곡할 만큼 음악적 달란트가 많다는 것, 의대를 졸업하고 인턴과정까지 마쳤지만 의사의 길을 접고 수도자의 길을 선택했다는 이야기도 몇몇 이들에게 전해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가 아프리카 선교사가 되어 수단으로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로부터 4년이 흐른 유난히 무더운 올 여름, 고국에 휴가차 나온 그를 만났다. “더우시죠?” 묻고 나서 아차 싶어 웃었다. “말라리아엔?” 자주 걸린단다. 새 신부 때보다 훨씬 야위고 하얀 이가 두드러질 만큼 검게 그을린 얼굴이 그간의 고생을 말해주는 듯했지만 그는 마냥 행복한 미소를 띄었다.
수단의 희망인 아이들
50여 년 전 식민지 상태에서 독립한 수단은 인구의 80퍼센트를 차지하는 북부의 아랍인과 남부 원주민간의 내전이 22년 동안 계속되어오고 있는 나라다. 정권을 장악한 북부 아랍인들은 남북간의 모든 경제교류를 차단시키고 남부 고사작전에 들어갔다. 게다가 국제사회의 무관심까지 더해져 남부 원주민들의 삶은 처참하기 그지없다. 전쟁과 가뭄, 기아 등 악순환이 계속되는 상황에 놓인 남부 수단의 톤즈, 그곳에서 이 신부를 비롯한 두 명의 신부와 세 명의 수녀가 원주민들과 함께 살고 있다.
이 신부는 톤즈에서 진료소를 맡아 일한다. 진료소라고는 하지만 의료 장비가 충분하게 갖추어져 있을 리 없다. 어떤 의료 장비를 써야 할지 선택의 여지도 없다. 높은 기온 때문에 환자들의 상처도 쉽게 낫지 않는다. 질병은 물론 뱀에 물리거나 지뢰를 밟아 상처를 입는 경우가 빈번하고 무엇보다 환자가 무속신앙에 의지하다 거의 죽어갈 때쯤에야 진료소를 찾을 때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지금도 병을 낫게 하기 위해 굿을 할 만큼 원시부족의 문화와 풍습을 그대로 지니고 사는 주민들이지만 이 신부는 그것들을 바꾸려하기보다 자신이 적응하고 이해하기 위해 늘 마음의 문을 열어놓는다.
진료를 받기 위해 30-40킬로미터를 밤새도록 걸어와서 아침 일찍 진료소 앞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환자들을 볼 때면 가슴이 뭉클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진료소에 올 수도 없을 만큼 중증이거나 깊은 숲속의 환자들을 위해 1주일에 한두 번 80여 개의 마을로 이동진료를 나간다. 그리고 처음 톤즈에 도착했을 때 진흙과 대나무로 지은 세 칸짜리 움막과 달랑 침대 하나뿐인 진료소를 어느 정도 병원의 모습을 갖춘 시멘트 건물로 짓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건축자재가 없어 못 하나 나사 하나도 케냐의 나이로비로 주문을 한 뒤 족히 두세 달을 기다려야 하는 형편이다.
이 신부는 오전에는 진료를 하는 의사이지만 오후에는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선생이 된다. 전쟁으로 인해 부모의 죽음을 목격한 상처 등을 갖고 있는 아이들, 언제 총알받이로 가야 할지 모르는 아이들에게 음악은 좋은 치유가 되기 때문이다. 특별한 놀이기구를 갖고 있지 않은 아이들은 피리, 기타, 오르간, 드럼을 배우는 시간을 더없이 즐거워하고 행복해한다.
오랜 가난과 전쟁 탓인지 표정 하나 변하지 않던 아이들의 얼굴이 점점 밝아져가는 것을 볼 때 이 신부는 큰 보람을 느낀다. 아이들 중에는 기타나 오르간을 배운 지 얼마 안 되어 성가 몇 곡을 한 번의 막힘도 없이 연주해버리는 천재 같은 이들도 있다. 이 신부는 그룹사운드까지 만들었는데 그 그룹사운드의 연주 실력이 다른 지역에까지 널리 알려질 정도란다.
톤즈 주민들에게 자신의 시간과 마음을 송두리째 내어주어야 하는 하루하루이지만 이 신부는 그곳에서 참으로 많은 기쁨을 누린다. 거칠기만 하던 아이들이 예의를 갖추며 부드러워질 때,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던 아이들에게서 숨은 잠재력을 발견해낼 때는 더욱 그렇다. 세상이라면 자신이 살고 있는 톤즈와 케냐의 나이로비밖에 모르는 아이들. 달빛 아래서라도 뭔가 배우고자 하는 모습에서 수단의 희망을, 무엇보다 예수님이 그 아이들과 함께하심을 깊이 느끼게 된다.
아름다운 것 두 가지
휴가 기간이지만 이 신부의 스케줄은 아주 빡빡하다. 수단에 돌아가기 전 병원에서 산부인과와 외과 실습도 해야 한다. 이제는 톤즈 주민들에게 어떤 치료가 필요한지를 절실히 알게 된 터라 무엇을 더 배우고 가야 할지 확실해졌다. 그리고 후원금을 마련하기 위한 여러 자선행사에도 참석해야 하고 수도회 가족들은 물론 어머니와 친형제들과도 함께하는 시간을 갖고 싶다. 그리고 해야 할 일들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자신의 영적 성장을 위해 피정의 시간도 갖고 싶다.
지난 7월 30일에는 수원교구장 최덕기 주교를 비롯한 교구민들이 주최한 ‘치박 치박’(톤즈 주민들이 사용하는 딩카어로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말)이란 수단 어린이 돕기 모임 발족행사에도 참석했다. 권선동에서 열린 이날 행사 중에 수단돕기 명예회원이 된 영화배우 권상우(프란치스코·29) 씨가 세례를 받았다. 많은 이들이 수단돕기 행사에 참석하여 권 씨의 세례식도 지켜보았다. 권 씨의 모습을 담고자 학생들은 일제히 자신들의 핸드폰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어린 학생들에게 쥐어진 수많은 핸드폰을 보면서 이 신부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휴가 동안 톤즈 아이들이 자주 생각난다는 이 신부의 말이 떠올랐다.
(글/ 김사비나·사진/ 최연숙 생활성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