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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군 동쪽은 난하와 요령성에서 후에는 만리장성 안쪽, 영양왕 때는 조백하 동쪽이 모두 고구려 땅이었다-2
○ 왕검성(王儉城) 역시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 칠로도산 동쪽 개주시(개평)
사마천의 사기 기록에 의하면
“동옥저(東沃沮)”는 『고구려(高句驪) 개마대산(蓋馬大山) 동쪽에 있다.』 동쪽으로 큰 바다(海. 河)에 림하고, 북쪽으로 읍루(挹婁)와 부여(夫余)가 있으며, 남으로 예맥(濊貊)이 접하였다. 그 땅은 동서가 좁고 남북은 길다. 사방 가히 천리(千里)이다. 땅은 기름지고 좋으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있고, 마땅히 오곡이 있고, 밭농사도 좋다.
➡ 注[一]
“개마는 현의 이름으로 현도군에 속한다. 그 산(蓋馬大山)은 지금의 평양성 서쪽에 있고, 평양은 공 촹검성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東 沃 沮 在 高 句 驪 蓋 馬 大 山 之 東[一] 東 濱 大 海; 北 與 挹 婁、夫 余, 南 與 濊 貊 接。其 地 東 西, 南 北 長[二] 可折方千里.土肥美,背山向海,宜五穀,善田種,
➡ 注[一] 【山 : 】 (王 儉 城)이다.”(『蓋馬,縣名,屬玄菟郡.其山在今平壤城西.平壤即王險城也』)
일본인들이나 한국의 사학자들은 개마대산을 일본시대 지어진 이름인 지금의 낭림산맥 개마고원(또는 백두선)이라 주장하고 그 개마고원 동쪽의 함경와 연해주에 옥저가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오늘날 역사 지도에도 그럴헤 표시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역사학자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지금의 함경도와 연해주 지방에 평양성이 있고 이 평양성은 왕검성이란 사기의 기록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가? 또 연해주 북쪽에 부여와 읍루가 존재해야 하는데, 연해주 북쪽에 어찌 부여와 읍루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식민사학자들은 일본인들의 주장을 추종하여 새빨간 거짓말을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의 견해로 개마대산은 지금의 중국 개주시(개평)의 서쪽에 있는 칠로도산을 말하는 것이 분명하며, 개마대산의 동쪽 평양은 지금의 개주시(개평) 부근일 것이다. 그러므로 칠로도산의 동쪽에 위치한 개주시(개평)가 평양, 곧 왕검성일 가능성이 높다. 단재 신채호 역시 평양 왕검성의 위치는 개주시(개평)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당나라 때 장수절(張守節)이 쓴 《사기정의》이다. 그 중 집해(集解)에서는,
“〖집해〗서광이 말하기를 창려에 험독현이 있다. 색은에 험독현이 있다 색은에 위소가 말하기를 옛 고을의 이름이다. 서광이 말하기를 창려에 험독현이 있는데, 응소가 주를 달기를 지리지의 요동 험독현은 조선왕의 옛 도읍이다. 신찬이 말하기를 왕검성은 낙랑군 패수현의 동쪽에 있다((〖集解〗徐廣曰 昌黎有險瀆縣也 索隱韋昭云 古邑名 徐廣曰 昌黎有險凟縣 廣劭注 地理志遼東險瀆縣 朝鮮王舊都 臣瓚云 王儉城在樂浪郡浿水之東)라고 하였다.
즉 창려(昌黎)라는 곳이 예전의 험독(險瀆)이고 이곳이 옛 조선의 수도 왕검성이었으며, 낙랑군 패수(영정하?)의 동쪽이라는 말이다. 일부 학자들은 이 창려가 지금의 진황도시 부근이라고 하며, 지금도 창려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고 하였다.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 따르면 왕검성은 광녕현(廣寧縣) 동남에 있다고 하였다. 왕검성의 위치가 요서지방에서 다소 이동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삼국사기에도 평양의 위치가 변동되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자치통감에는 ”낙랑군의 치소는 조선현으로서 우거가 도읍으로 했던 곳이다”((樂浪郡治朝鮮縣蓋以右渠所都爲治所也()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조선현을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평양에 위치해 있었다고 하지만, 조선현은 후술하겠지만 고구려의 서쪽 국경 지역 수양제의 침략경로 좌12군 10번째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어서 만리장성 안쪽 조백하 부근으로 추정된다.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 고구려 11대 동천왕 조에는 관구검의 침입으로 당시 도읍지인 환도성이 파괴되어 도읍지로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새로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사직을 평양성으로 옮겼다고 했는데, 이때의 평양성은 번조선(번한)의 도읍지 왕검성의 성터가 있던 지역이라고 하였다.
특히 안시성은 옛 번조선(번한)의 도읍지인 왕검성王儉城이 있던 성터였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동천왕이 새로 옮긴 곳은 안시성이거나 또는 개주시(개평) 부근이 평양성일 가능성도 있다.
빅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옛 안시성은 개평현(開平縣) 동북 70리에 있는데 지금의 탕지보(湯池堡)가 바로 그곳이다. 지금 하북성 개평부(탕지보) 동북쪽으로 70리를 가면 천령 또는 천산이라 불리는 부근에 탕지보가 있는데 이곳이 바로 고구려의 안시성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은 환단고기에서 "안시는 개평부 동북 70리에 있다“라는 기록과 정확히 일치한다. 여기에서 논급된 평양이나 안시성은 지금의 북경과 멀지 않은 곳이며, 결코 지금의 평양이나 평양 근처가 될 수 없다.
또 현재 한국역사학자들은 낙랑국이 평양에 있였다고 주장하지만, 호동왕자가 낙랑왕을 만난 불과 27년 후 5대 모본왕이 상곡, 어양, 우북평, 태원에서 후한과 전쟁한 기록을 보면 낙랑국은 한반도 평양이 아니라, 요서지방에 있었다.
이상의 여러 기록을 보면, 고조선 이래 중국과의 여러 전쟁으로 인해 수도를 여러 번 옮겼기 때문에 평양 왕검성에 대한 여러 기록 간에 다소 차이는 있지만 평양 왕검성은 지금의 평양이 결코 아니고, 요서 지방에 있었음이 분명한 것이다.
○수양제의 고구려 침공 역사 요약
AD 604년 즉위한 수양제는 만리장성의 보수와 대운하의 건설에 착수했는데, 무리한 공사로 인하여 당시 죽은 사람만 해도 250만이 넘는다고 한다. 수양제는 수도 장안을 무리해서 낙양으로 옮겼고, 고구려에 조공과 입조를 요구했지만 고구려는 이를 거절하고 오히려 요서 지역을 공격하여 차지하였다. 수양제는, 즉위 7년 후인 영양왕 22년(AD 611)년
삼국사기 영양왕조의 기록을 보면,
영양왕 22년(AD 611년) 정 2월 봄에 수양제가 고구려 토벌을 하명하명는데, 2개월 후인 하4월에는 탁군(涿郡) 이막궁에 도착하였으며, 각지의 병사들이 이곳 탁군으로 집결하였다.
수양제는 조명을 내리기를 “고구려는 작고 추잡한 것들이(小醜) 혼미하고 불공하여 발해와 갈석 사이를 점령해 있고(碣發之間 崇聚), 요동 예맥의 땅을 잠식했으며...글안의 무리와 해변을 지키는 수나라의 사병을 죽이고, 또 말갈의 항복자와 요서를 침범하였다....요동(遼東), 현도(玄菟), 낙랑(樂浪)의 아름다운 강토를 돌아보니 이제 모두 오랑케의 땅이 되었다....거란의 무리들과 합세하여 바다의 우리 수병을 살해하였으며, 정복한 말갈의 군사와 함계 요서(遼西)를 침략하였다....나는 풍속을 살피러 유주와 삭주에 순행을 왔으니 이에 고구려의 죄를 물으려 다시 올 수 없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참고: 위에서 수양제는 고구려가 발해와 갈석을 점령해 있다고 스스로 한탄한다. 또 요동, 예맥의 땅을 잠식했다고 하며, 말갈의 무리와 요서(遼西)까지 침범하였다고 분개한다. 수양제가 분개한 고구려의 점령지역 갈발지(碣發之間간)은 어디인가? 갈발지간이란 지금의 갈석산 사쪽과 하북성 발해신구 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다. 고구려가 공격한 요서지방 역시 조백하 서쪽 지방 천진시 부근으로 보아야 한다.
<수나라 좌12군의 진격로>
”이에 친히 6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한다....좌12군(左十二軍)은 1) 누방(누방), 2) 장잠(長岑), 3) 명해(溟海), 4) 개마(蓋馬), 5) 건안(建安), 6) 남소(남소), 7) 요동(遼東), 8) 현도(玄菟), 9) 부여(夫餘), 10) 조선(朝鮮), 11) 옥저(沃沮), 12) 낙랑(樂浪) 등의 길(道)로 나아가고,
< 수나라 우 12군의 진격로>
우십이군(右十二軍)은 1) 점선(黏蟬), 2) 함자(含資), 3) 혼미(渾彌), 4) 임둔(臨屯), 5) 후성(후성), 6) 제해(提奚), 7) 답돈(답돈), 8) 숙신(肅愼), 9) 갈석(碣石), 10) 동이(東𦖮), 11) 대방(帶方), 12) 양평(陽平) 등의 길(道)로 나아가 계속 진군하여 평양에 총 집합하라“고 하였다.
그해 3월 고구려 국경 지역인 요수(遼水: 지금의 조백하)에 도착하여 강을 건널 부교를 건설하여 고구려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부교가 불과 1장(丈:약 3m)이 모자라서 강을 건너기엔 짧았고, 고구려 군의 반격으로 인해 1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수양제는 요수(遼水: 조백하)를 건너와서 6월 말에야 겨우 요동성 남쪽에 도착하였다. 고구려 침략 5개월 후에야 겨우 수양제가 요동성에 도착한 것이다. 그러나 이후 요동성을 포위한 수양제의 군대는 단 한 명도 요동성 성벽을 넘어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내호아가 지휘하는 수군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들은 양제는 우중문과 우문술에게 300,000명의 별동군을 편성해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을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수양제의 별동대 305,000명은 수십 kg에 달하는 식량을 등에 업고 요동성에서 평양성까지 험난한 천산산맥을 하나하나 넘어가며 진격해야 했고, 무거운 군장 때문에 수나라 군사들은 갈 때마다 야음을 틈타 천막 속에서 몰래 식량을 땅에 파묻었다. 그로 인하여 수나라 군대는 식량이 떨어졌고 굶주려 싸울 힘이 없었다.
결국 살수(청천강)를 건넌 수나라 별동군이 평양성을 포위했지만 이미 싸울 힘이 없는 수나라 군사들의 포위는 의미가 없어 퇴각을 결정했고, 그해 7월 후퇴 와중에도 이어진 고구려군의 기습 공격에 기진맥진한 수군이 살수를 건널 때 고구려군의 총공격을 받아 수나라 30만 별동군은 전명되고 말았다. 이때 수나라 305,000명 중 하루 밤낮 사이에 450리 거리에 달하는 압록수까지 도망쳐서 수양제의 포위 진지인 요동성까지 살아 돌아간 군사는 2,700명이었다.
***참고: 위의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수양제가 고구려를 침략할 당시 만리장성의 안쪽에 있던 낙랑과 현도를 비롯하여 요동까지 고구려 오랑케 따이 되였다고 한단하는 것이다. 또 고구려가 요서를 공격하였고, 갈발지간(갈석과 하북성 발해신구 지역)까지 빼앗았다고(崇取)했다고 스스로 한탄하고 있다.
또 수양제가 6월 말에야 겨우 요동성 남쪽에 도착했는데, 따로 별동대를 만들어 고구려를 공격한 수군 30만이 1개월도 안 되어서 평양성 30리 까지 진군했다가 후퇴도중 7월 살수에서 전멸했다. 이 기록을 보면 요동성과 수천리 떨어진 지금의 평양을 수군이 공격한 것이 아니다. 요동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평양성이 있었기 때문에 불과 1개월 내의 기간동안 평양 가까이 진격했다가 살수로 철군한 것이며, 당시의 평양성은 지금의 조백하 가까이 있던 요동성과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지금의 평양은 당시 명칭이 평양성이 아닌 장안성이었다는 임찬경박사의 학설도 있다.
이후에도 수양제는 2차, 3차 및 4차에 걸쳐서 4번이나 고구려를 침략했지만, 요동성조차 함락하지 못한 채 패퇴하였고, 이후 수양제는 당태종에게 멸망하고 만 것이다.
○수양제의 침략 경로와 한사군의 관계
삼국사기에 기록된 수나라의 고구려 침략 전쟁에 대한 기록 중 일부이다. 수양제가 고구려를 침략하기 위해서 수나라에서 고구려 평양으로 향하는 길에 위치한 좌 12군의 12개 지역과 우 12군의 12개 지역 합계 24개 지역이 고구려와 수나라 중에서 어느 곳에 속하는가에 대해서 필자는 매우 고심을 하였다.
그러나 당태종이 고구려 정벌 시 지금의 조백하인 요수를 건너 공격한 성이 현도성이고, 현도성 함락 후 인근의 요동성을 공격하였음을 볼 째 현도나 요동은 분명한 고구려 땅이다.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수양제는 ”낙랑, 현도 및 요동의 아름다운 땅이 고구려 오랑케의 땅이 되었다“고 한탄하면서 고구려를 침략하였는데, 이 현도는 수양제의 침략 경로 좌12군 8번 째에, 요동은 좌12군 7번 째에 낙랑은 좌12군 12번 째에, 대방은 우12군 11번째에 각각 포함되어 있어서 모두 만리장성 안쪽 조백하 부근에 위치한 지역임이 확인된다. 그러므로 수양제의 좌우 24군 침략경로는 모두 고구려 서쪽 요서지방의 땅이며, 과거 서한, 후한 및 진나라 때 만리장성 안쪽의 낙랑군과 대방군에 속해 있던 땅이 수양제 침략 당시 영양왕 때는 모두 고구려의 땅이었다.
전한서 지리지에 낙랑군에 관련된 25개 현이 있다고 했는데 다음과 같다. 조선(朝鮮), 남함, 패수, 함자(含資), 점제, 수성(遂城), 증지(增地), 대방(帶方), 사방, 해명(해명), 열구, 장잠(長岑), 둔유, 소명, 누방, 제해(提奚), 혼미(渾彌), 탄렬, 동이(東이), 불이, 잠대, 화려, 야두매, 전막, 부조 등이라고 한다.
위에서 표시된 낙랑군과 관련된 25개 현 중에서
1) 낙랑은 좌12군 12번 째에, 2) 현도는 좌12군 8번째에, 3) 옥저는 좌12군 11번째에, 10) 장잠은 좌12군 2번째에, 6) 점제(黏蟬: 점선)는 좌12군 첫 번 째에 7) 요동(遼東)흔 좌12군 7번 째에 각가 있었고,
4) 임둔은 우12군 4번째에, 5) 대방은 우12군 11번째에, 함자는 우12군 2번째에, 11) 제해는 우12군 6번째에, 12) 혼미는 우12군 3번째에 있었으며,
8) 중지는 검교우어위 호분 낭장 위문승의 진격로에, 9) 수성은 탁군태수 검교 좌무위 장군 최홍승의 진격로에 각각 설정되어 있었다.
이상의 모든 지역이 지금의 만리장성 안쪽 좆백하 부근에 있던 지명이며, 결코 한국 식민사학자들이 말하는 평안도나 압록강 주변이 아니다. 어찌 수양제가 평양으로 진격하면서 식민 사학자들이 주장하는 평안도나 압록가 주변을 침략경로로 삼았겠는가?
후한서에는 낙랑군 중에서 증지( 增地)가 있는데 증지는 《한서》 〈지리지〉의 주석에 따르면 패수(浿水)[가 서쪽으로 증지현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한다. 증지는 천진시 부근으로 추정되며, 이 천진시 부근 지역은 검교우어위 위문승의 고구려 침략경로 이었고, 고구려 땅이었다. 결론적으로 영양왕 때 고구려는 지금의 천진시 부근까지 점령하고 있었다.
○대방군의 속현도 황해도가 아니라, 수양제의 침략 경로에 있었다.
진서(晉書)에 기록된 낙랑군의 속현 중에서도
13) 낙랑의 둔유(屯有)는 우12군 4번째에 14) 혼미(渾彌)는 우12군 3번째에, 15) 누방(鏤方)은 좌12군 1번째에 기록되어 있어서 15개소가 수양제의 침략경로에 기록되어 있다.
진서에 나타난 대방군과 그의 속현 중에서는
帶方대방군 소속(列口열구, 長岑장잠, 提奚제해, 含資함자. 海冥해명, 呑列탄열) 중에
5) 대방은 우12군 11번째에, 16) 장잠(長岑)은 좌 12군 2번째에, 17) 제해(提奚)는 우12군 6번째에, 18) 함자(含資)는 우12군 2번째에, 18) 해해(海溟)은좌12군 3번째에 각각 기록되어 있어서 대방군고 소속 군현 7개소 중에서 5곳이 수양제의 침략경로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밖에도 좌12군 4번째에 개마(蓋馬), 9번째에는 부여(夫餘), 우12군 8번째는 숙신(肅愼)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한서, 후한서, 진서 등에 기록된 낙랑이나 대방의 군현들은 거의 전부가 수야제의 고구려 국경 부근 침략경로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 역사학자들이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는 낙랑이 평양이라거나, 옥저가 함경남북도 지방이라거나, 현도가 압록강변 평북 산악지역에서 푸순(撫順)으로 옮겼다는 주장이나, 임둔이 강원도 또는 대관령이라는 주장이나, 점제(黏蟬: 점선)이 평남 용강이라는 주장이나, 낙랑군 누방현이 평안남도 양덕군과 성천군이라고 주장, 심지어 개마가 백두산(또는 개마고원)이라는 주장 등은 일본인들이나 이병도의 잘못된 주장을 추종하고 있는 한국 식민사학자 들의 잘못된 주장이다.
삼국사기 영양왕조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는 수양제의침략경로가 어찌 함경도나, 압록강변이나 평안도나 백두산 또는 강원도 심지어 대관령 지역에 설치될 수 있었겠는가? 수양제의 고구려 침략경로는 고구려 서쪽 국경지여 요서지방에 분명히 있었던 것이다. 패수 역시 한국의 역사학자들이 한결같이 주장하는 대동강이 아니고, 중국의 북경지역을 지나는 영정하로 추정되는 것이다.
○수양제의 침략 경로를 보면 조백하 동쪽은 모두 고구려 땅이다
수양제의 좌우 24개의 침략 경로는 모두 조백하 좌우의 옛 전한이나 후한 및 진나라 때 낙랑군과 대방군 소속의 지역이다. 이 지역이 고구려 영토 였다는 사실은 명백하며, 영양와 때의 고구려 역사 지도는 조백하 동쪽을 모두 고구려 땅으로 표시 하여야 한다.
수양제는 침략 당시 그의 조서에서 갈발지간(갈석과 발해신구 지역)을 고구려 가 숭취(崇取)했고, 요서(遼西: 조백하 서쪽) 지역을 빼앗았으며, 아름다운 땅 현도(玄菟), 낙랑(樂浪) 및 요동(遼東)을 오랑케 고구려가 점령하고 있다고 분개하면서 고구려를 침략한다고 조명을 내린 바 있다. 이들 지역이 모두 조백하의 좌우에 위치한 지역이므로 고구려 전성기의 지도는 이 조백하 동쪽은 모두 고구려 땅으로 표시해야 한다.
식민사학에 젖은 한국 사람들은 필자의 주장을 매우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고구려가 어떻게 조백하 동쪽을 모두 지배하였겠느냐고?
그러나 장수왕 23년(AD 435년)중국의 북부 지방을 지배하던 북연(北燕)의 황제 풍홍(馮弘)이 북위(北魏)에 밀리게 되자 장수왕에게 항복하였다. 이때 북연의 땅 전부는 아니겠지만 일부 지역이 모두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는데, 그 지역이 지금의 천진시를 비롯하여 조백하 지역 과거 낙랑과 대방의 땅이 모두 포함되었고, 고구려의 영토는 이때부터 조백하 동서쪽을 모두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결론
호동왕자가 나랑국왕과 만난 옥저를 현재 한국시학계에서는 함경도와 연해주 지방이라고 하며, 역사교과서에도 그렇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호동왕자와 낙랑왕이 만난지 17년 후 고구려 5대 모본왕은 후한과 상곡, 어양, 북평, 태원을 공격하였는데, 이 지역은 지금의 북경보다 훨씬 서쪽의 지역이다. 또 옥저는 수양제의 침략경로 죄12군 11번째에 있던 고구려 서쪽 국경지대이다. 이를 미루어 고구려는 지금의 압록강 중류 훈강(동강강) 옆 환인(즙안) 지역이 결코 될 수 없고, 요서지방에서 건국되었다.
고구려는 서쪽 요서 지방에서 건국했으며, 고구려가 건국한 비류수는 지금의 난하이거나 연남생의 묘비명에 나오는 패수(浿水: 지금의 영정하??)일 것이며, 고구려가 건국된 졸본(홀본) 역시 영정하나 조백하 또는 최소한 난하 부근으로 비정해야 한다.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멸하고 설치했다는 한사군의 위치는 동으로는 난하를 경계로 그 서쪽이며, 동남으로는 임둔태수 인장이 발국된 지금의 요령성 금서시까디가 그 경계일 것이다. 또 서로는 북경 부근 지역에서 서남쪽은 지금의 갈석산 및 천진시 지역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대한 근거를 약사 기록 문헌에 의하여 비정하였다.
여러 기록을 보면, 평양의 위치는 개주시(개평) 부근, 진황도시()昌黎) 부근, 또는 광령현 지역이라는 기록 간에 다소 차이는 있지만 평양 왕검성은 지금의 평양이 아니고, 요서 지방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평양의 위치는 한 곳이 아니고 요서 지방에서 여러 번 이동되었을 수도 있다.
또 수양제의 고구려 침략 당시 고구려의 영토는 수양제 침략 경로에 명시된 바와 같이 영양왕 때는 조백하 동서쪽이 모두 고구려 땅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