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新서울기행 ㉔ > 송파구
2014년 1월호 서울사랑 매거진에서...
글 윤재석(언론인)
역사의 영욕이 공존하는 수변도시 송파구
흔히 서울을 ‘600년 고도(古都)’라고 일컫는다. 하지만 그건 종로구와 중구를 에워싼 한양 도성을 기준으로
했을 경우 얘기다. 송파구 기준으로 보면 이 용어는 수정돼야 한다.
2000년 전 고대국가 백제의 수도로 서울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기 때문이다.
‘2000년 전 도읍’의 현장
고구려 동명왕 고주몽의 셋째 아들 온조(溫祚)는 자신이 주몽의 후계자가 될 수 없음을 깨닫고 남하해 기원전 18년
백제를 건국하고, 한강 유역인 이곳을 도읍으로 정했다. 이후 21대 개로왕이 고구려와 전투 중 아차산에서 사로잡혀
숨져(475년) 문주왕이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천도할 때까지 493년 동안 송파는 한성 백제의 수도였다.
이 시기가 고대 왕조 국가의 기틀을 갖추고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운 백제의 전기 시대다.
따라서 1963년 송파가 경기도 광주군에서 서울시 성동구로 편입되는 순간, 서울은 ‘2000년 고도’로 수정했어야 했다.
2000년 고도답게 송파엔 백제 문화유산이 즐비하다. 우선 석촌동에 있는 석촌고분. 지하철 8호선 석촌역에서 약 500m
서쪽에 있는 석촌고분은 3~5세기에 축조한 백제 초기 고분으로, 계단식 돌무지무덤이 포진하고 있다.
중국 지린(吉林) 성 지안(集安) 현 장군총과 유사해 초기 백제와 고구려의 관계를 유추할 수 있는 귀중한 유적이다.
하지만 한동안 높은 담장과 불편한 출입문으로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또 시설이 노후 되어 인근
주민에게 외면 받는 죽은 유적이었다.
그러다 2009년초 새 단장에 들어가 그해 7월 30일 시민에게 개방했다. 송파구는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담장을 허물고,
주택가에 있던 정문을 대로변으로 옮겼으며, 진입로 5개를 추가로 설치했다. 녹지 광장을 조성하고 가로등과 벤치,
화장실 등 편의 시설도 새로 갖춰 지금은 주민이 즐겨 찾는 산책 코스가 되었다.
고대인까지 안은 몽촌토성
방이동 올림픽공원 안에 있는 몽촌토성 역시 백제 초기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북으로 한강이
감싸고 남으로 남한산이 솟아 있으며, 동서로 비교적 완만한 구릉과 평야가 펼쳐져 있는 이 일대엔 수많은 백제 고분과 고성이 분포한다. 석촌고분과 비슷한 3~5세기에 축조한 것으로 추정하며, 주로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한 방어용 성격을 띠고 있다. 원래 지형을 그대로 이용해 구릉 상에 축성해 성벽을 만들었기에 일정한 정형이 없으나 전체 길이는 약 2.3km나 된다.
1983년부터 3년간에 걸친 토성 발굴을 통해서 토기·기와·철기·청동기·석기 등 수많은 유물이 출토됐다. 이들 유물로 보아 토성을 축조하기 오래전에도 고대인이 거주하고 있었을 것으로 본다. 유물들은 현재 몽촌역사관에 전시되어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있다. 대표적 유물로 백제 시대의 움집터 3동, 돌무덤 4기, 토광묘 2기, 저장 구덩이 13개와 움집터로 추정하는 유구 2개소, 파괴된 옹관묘 1개 그리고 당시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색상의 토기류를 들 수 있다. 몽촌토성은 위치나 유물상 등으로 보아 한성 백제기에 군사적·문화적으로 중요한 성곽으로 판단하고 있다. 풍납동에 있는 풍납토성과 함께 백제 초기의 왕도(王都)를 구성하는 성터의 하나로 추정한다.
풍납토성에서도 고대국가 증거 나와
최근 풍납토성과 관련해 한 역사학자가 새로운 이론을 제기해 관심을 끌고 있다. 이 교수는 풍납토성에 대한 방사성
탄소 동위원소 측정 결과를 토대로 “백제의 모체가 되는 십제(什濟)의 형성 시기는 기원전 2세기까지 올라가야 한다”며 “기원전 1세기 말 또는 기원후 1세기 초에 십제가 백제로 성장했다”는 새로운 주장을 폈다.
88올림픽 최대의 선물, 올림픽공원
몽촌토성지(사적 제297호)가 몽촌토성을 둘러싼 올림픽공원은 88서울올림픽이 송파구에 선사한 소중한 공간이다.
지하철 8호선 몽촌토성역 1번 출구로 나오면 파리의 개선문과 흡사하게 우뚝 선 ‘세계평화의문’을 만난다. 여기서부터
전체 면적 43만8천 평의 거대한 올림픽공원이 시작된다.
서울시가 1천823억 원의 사업비를 들여 1984년 4월에 착공해 꼭 2년 만에 완공한 이 공원은 86서울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치른 후, 지금은 체육·문화예술·역사·교육·휴식 등 다양한 용도를 갖춘 종합 공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세계평화의 문을 지나 몽촌호를 오른쪽으로 끼고 시계 방향으로 돈다. 국민체육진흥공단 옆 서울올림픽기념관을 지나면 서울올림픽파크텔과 팔각정에 이른다. 호수 건너편으로 가서 몽촌토성, 피크닉장을 지나면 몽촌역사관에 당도한다.
이어 88호수를 지나면 올림픽수영장과 체조경기장, SK핸드볼경기장, 우리금융아트홀, 경륜장, 한성백제박물관,
소마미술관으로 이어지면서 공원을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다.
이게 다가 아니다. 공원 동쪽 끝엔 각종 종목의 메달리스트 산실인 한국체육대학교와 체육중·고등학교가, 길 건너엔 방사형으로 독특하게 배열한 올림픽선수촌아파트가 포진해 있다. 공원 북쪽을 성내천이 휘돌아 한강과 합류하는 것도 공원의 풍치와 쾌적성을 더해준다. 남1문 쪽엔 테니스경기장과 K-아트홀태권도공연장, 올림픽컨벤션센터가 각각 자리한다.
이들 시설 중 지붕이 있는 경기장에선 국내 톱가수와 아이돌의 공연도 이따금 펼쳐지고, 공원 곳곳에 다양한 메뉴의
레스토랑이 있어 산책뿐 아니라 식사를 즐기기 위한 내방객의 방문도 끊이지 않는다.
연탄재로 개발한 잠실 대단지
이제 지하철 8호선 몽촌토성역에서 한 정거장 떨어진 잠실역으로 향한다.
롯데월드 맞은편 주공아파트 5단지를 제외하고 이 일대는 모두 재개발이 이뤄져 고층 아파트가 즐비하다.
잠실 아파트 단지다. 잠원동 일대가 원(原)잠실인 데 비해 동(東)잠실로 불린 이곳의 개발사엔 흥미로운 비화가 있다.
박정희 정권의 영동지구 개발의 일환으로 1970년대 초반 잠실을 개발하기로 했는데, 강남 곳곳에서 우후죽순으로 개발이 이뤄지다 보니 흙과 모래가 부족했다. 더군다나 잠실 도처에 섬과 호수 샛강이 즐비해 이곳을 메울 막대한 양의 토사가 필요했는데, 막막했다.
이때 대체재로 등장한 것이 바로 연탄재. 당시 수도 서울의 주 난방 연료 겸 취사 연료이던 연탄은 자고 나면 무한정 쏟아져 난지도로 향하던 처치 곤란한 쓰레기였다. 그걸 토사 대신 잠실 단지를 메우는 재료로 쓰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그래서 한때 잠실 아파트의 안전도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지만, 재개발까지 거쳐 고층 아파트군이 끄떡없이 들어선 걸 보면 연탄재의 강도도 만만치 않은 것 같다.
잠실벌에선 아직도 ‘쎄울’이 잠실종합운동장을 향해 걷는다.
왕복 10차선 도로 중앙엔 88서울올림픽의 전 종목을 형상화한 철제 조각상이 나그네의 눈길을 끈다. 20여 분 걸어 종합운동장에 당도했다. 시즌이 끝나 휑하니 을씨년스러운 잠실야구장과 서울시학생체육관을 지나 쭉 들어가면 올림픽주경기장.
86아시안게임 개·폐막식과 88서울올림픽 개·폐막식이 열린 역사적인 곳이다.
1981년 9월 30일, 오후 11시 45분. 서독(당시)의 소도시 바덴바덴에서 올림픽 유치 도시 선정 결과를 발표하는 안토니오 사마란치 당시 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이 TV 화면에 나타나 “쎄울!”을 외친 지 7년 만인 88년 9월 17일 한낮, 10만 관중이 들어찬 이곳에선 태권 격파에 이어 누구도 예상치 못한 광경이 벌어졌다. 보름 동안 열린 세계인의 축제는 올림픽 참가 사상 최초로 우리나라가 종합 4위에 오르는 쾌거를 이루고 성화를 껐다.
뒷구정과 새마을시장 먹자골목
맞은편 아시아선수촌아파트 쪽으로 건너와 아파트 동문을 조금 지나 건널목을 건너면 갑자기 휘황한 거리가 나타난다. 이른바 ‘뒷구정’으로 불리는 백제고분로9길이다. 압구정보다는 못하지만 와인 바부터 곰장어구이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먹을거리가 도열한 먹자골목이다. 인근엔 모텔도 즐비하다. 이 길을 쭉 따라가다가 길이 끝나는 곳에서 오른편으로 꺾어 걷다가 보면 신천 새마을시장이 나온다.
서울은 물론 전국 대부분의 재래시장이 리모델링으로 현대화되었지만, 이곳은 주위의 재개발에도 아랑곳없이 지붕도 얹지 않은 채 허름한 골목 그대로다. 친구나 후배들과 가끔 이 시장을 찾곤 한다. 시장 안에 홍어애탕을 잘하는 식당, 전(煎)에 막걸리를 파는 선술집 등이 포진해 있기 때문이다. 요즘 같은 겨울철엔 애탕집을, 한여름엔 전집을 주로 찾는다.
여기서 발동이 걸리면 송파구청 맞은편 먹자골목으로 진출해 7080카페에서 몇 곡 뽑기도 한다.
국내 최대 농수산물 시장, 가락시장
이제 가락시장(서울시농수산식품공사)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생선 냄새와 각종 채소 냄새에 상인들의 호객 소리로 부산한 가락시장. 유사 도매시장인 용산시장과 중부시장이 서울의 농수산물 상권을 장악해 농어민은 싼 가격에 물건을 넘기고, 소비자는 비싼 값에 물건을 구입하는 폐단을 없애기 위해 정부가 투자·설립한 최초의 공영 도매시장이다.
1985년 6월 청과와 수산시장 개장을 필두로 1986년 6월 축산 시장, 1988년 5월 청과 시장 순으로 개장하면서 전국에서 농·축·수산물이 집결하는 최대의 시장으로 발돋움했다.
여기서 웃지 못 할 일화 하나.
가락시장이 서면서 중부시장을 강압적으로 옮기려 했지만, 중부시장 건어물 상인들이 똘똘 뭉쳐 반대하는 바람에 지금도 을지로 4~5가엔 시장이 건재하고 있다. 지하철 8호선 가락시장역에서 남쪽으로 두 정거장 가면 장지역이다. 장지역에서 나오면 세 채의 거대한 건물이 보이는데, 전임 시장 시절 비닐하우스촌을 철거하고 2009년 7월 개장한 ‘가든 파이브(Garden 5)’로 규모가 코엑스몰의 6~7배에 이른다.
음울하게 서 있는 굴욕의 삼전도비
발길을 다시 북쪽으로 돌려 석촌호수에 이른다.
롯데월드의 상징인 로티와 로리상이 있는 맞은편, 그러니까 석촌호수 서호(매직아일랜드) 동북쪽 끝에 당도하면 허술한 지붕 아래 거대한 대리석 비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라는 오만한 이름의 비석(사적 제101호)이다. 폭 1.4m, 높이 5.7m의 대리석(32톤)으로 1639년에 세운이 거대한 비석은 병자호란에서 패한 조선이 청(淸) 태종(홍타이지)의 강압에 못 이겨 그의 공덕을 적은 ‘굴욕의 비석’이다. 삼전도는 남한산성에서 47일 동안 항전(抗戰)하던 인조가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은 치욕의 장소다.
여기에 홍타이지가 자신의 흔적을 확실히 각인시킨 것이다. 삼전도비는 비의 존재만큼이나 그 운명이 비극적이다.
1963년 대홍수 때 석촌 호수 주변에서 발견된 뒤 석촌동 백제고분군 근처로 이전했다가, 1983년 동쪽으로 300m쯤 떨어진 곳으로 다시 자리를 옮겼다. 그런데 인근 주민들이 ‘사적 주변 100m 건물 신축 높이 제한’ 규제로 재산권 행사를 못 한다며 민원을 제기해 수난을 받았다. 비는 서울시의 의뢰로 서울시립대의 고증을 거쳐 2010년 4월 25일 지금의 자리에 둥지를 틀었다.
조선 서민의 애환 담긴 송파나루
이제 동호 쪽으로 건너가 송파대로를 따라 잠시 내려간다. 동호 동남쪽 끝에 당도하면 송호정(松湖亭)이라는 작은 정자가 나오는데, 그 곁에 있는 석재 표지석 자리가 바로 송파나루터(松坡津址)다. 송파나루는 경기 동남부, 관동, 충청, 영남, 호남 등과 한양을 이어주던 조선 후기 나루터다. 특히 한양과 경기도 광주(廣州)를 잇는 중요한 나루터로, 땔나무와 담배 등을 한양에 공급했다. 따라서 송파는 나루터보다 시장의 기능이 더 컸다. 조선 시대 이곳에는 270여 호의 객줏집이 있어 전국의 10대 상설시장 중 하나로 번성을 누렸다.
한양 주변의 일반 상인들이 시전 상인(市廛商人)들이 쥐고 있는 물산의 독점권인 금난전권(禁亂廛權)을 피하기 위해, 삼남 지방이나 관동 지방에서 들어오는 물품들을 이곳에서 미리 사들여 도가 상업(都家商業)의 근거지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작가 김주영의 3부작 <객주>에서 쇠살주(소의 흥정을 붙이는 이) 조성준과 강경의 거상 김학준의 원한, 시전의 대행수 신석주와 보부상 출신 천봉삼의 반목을 중심으로 얘기가 펼쳐지는 곳도 송파장이다.
그럼 송파나루와 송파장은 왜 이 터에 자리 잡은 것일까? 예전엔 올림픽 대교 남단 부근에서 시작된 송파강이 지금의 석촌호수를 휘돌아 지금은 없어진 부리도(浮里島: 정신여고 부근) 오른쪽을 돌아 잠실종합경기장 중앙을 관통했다. 그러니까 잠실 아파트 단지는 홍수가 나면 범람하던 섬이었던 셈. 따라서 유속이 느리고 선박의 드나듦이 쉬운 석촌호 부근이 나루가 된 것은 자명한 이치다. 그러던 송파나루는 1925년 을축년 대홍수와 교통의 발달로 쇠퇴했고, 1960년대까지 뚝섬과 송파를 잇는 정기선 운항으로 그나마 명맥을 유지했다.
그러다 1970년대 초 강남 개발이 진행되면서 샛강 매립과 교량 건설로 나루터는 없어졌다.
예전에 소나무가 빽빽이 들어서 있다고 해서 이름 붙은 송파구는 이젠 서울 자치구 중 가장 인구가 많은 곳이다.
2012년 11월 기준으로 69만1천842명이다. 그래서 60만9천725명인 노원구와 함께 국회의원 지역구가 세 곳이나 된다.
올림픽 개최지의 특혜로 널따란 녹색 공간을 보유, 석촌호수 생태 복원 사업, 성내천 생태 복원, 장지천 복원 등 잇따른 지천 복원과 2015년에 완성할 ‘워터웨이 프로젝트(Waterway Project)’를 통해 쾌적한 수변 도시로 거듭나고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