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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9:30> 가상칠언(架上七言)-6, 다 이루었다, 예수님의 사명, 세례요한의 사명, 바울의 사명, 교회의 사명, 사명이 있는 자
1. 서언
■ 오늘 말씀의 제목 “다 이루었다”가 수동태로 되어 있음에 유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다 이루어졌다”입니다. 이것은 예수님도 그의 사명을 하나님 안에서 성령으로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이 땅에서 이루는 것도 사실 능동이 아니라 수동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이루신 것입니다. 그래서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 가상칠언에 대한 말씀을 지금까지 다섯 번 말씀을 전하고, 오늘 여섯 번째인데, 이 말씀을 들을 때마다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자이시다는 것입니다.
이 땅의 그 누구도 가상칠언과 같은 말씀을 할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 예수님 만이 할 수 있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인 “다 이루었다” (헬, 테텔레사타이)도 누가 죽음 앞에서 이런 말씀을 할 수 있습니까?
유명했던 사람들 그 누구도 죽음을 앞두고 “다 이루었다”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 한국의 유명한 고승, 승철스님이 죽기 직전에 열반송으로 했던 고백이 인터넷에 올라와 있습니다. “나무위키”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캡쳐해 보았습니다. 8년동안 눕지 않고 앉아서 자고 수도했던 사람입니다.
수미산과 같은 많은 죄업으로 무간지옥에 떨어져 한이 만갈래나 된다는 것입니다. 이 내용이 조작되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수미산, 무간지옥, 죄업, 수레바퀴 등은 다 불교에서 나온 용어들입니다.
→ 하나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면, 누구나 100살을 살아도, 그가 대통령을 했어도, 죽는 순간에는 이런 한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옥가는 것을 그가 아는 것입니다. 허무한 인생이었음을 알고 한을 품고 가는 것입니다. 다시 돌아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윤회설은 비성경적입니다.
거지 나사와 음부로 간 부자 이야기를 우리들은 알고 있지 않습니까?(누가복음 16: 19-31)
■ 모든 인생은 들의 풀과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1: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그러니 모두가 덧없는 인생들인데, 그런 인생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죽어도 영생이 있고, 상급이 있으므로 소망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 솔로몬은 우리들이 부러워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모든 영광을 누리고 살았지만, 말년에는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이 그의 고백입니다. 그래서 전도서는 1장 헛됨으로 시작하다가 12장 헛됨으로 마치다가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키라,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전도서 1:2]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12:8]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12:13] 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그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 허무한 인생이 의미 있는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다 불타 없어지는 것입니다.
영원한 것만 남는 것입니다 (고전 3:13).
[고린도전서 3:13]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불에 타지 않고 영원한 것은 천국이며, 영원한 생명이며, 하늘 상급이며, 말씀입니다.
▶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면서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할 때 이 영원한 것들이 주어져 헛된 인생들이 의미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2.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사명”과 관련이 있는 말씀입니다.
다 이루었다를 “사명을 다 이루었다”고 해도 되는 것입니다.
▶ 사명(使命)의 뜻이 무엇입니까? 사신이나 사절이 왕으로부터 받은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맏은 명령인 것입니다. 맡겨진 임무가 있는 것입니다. 이게 사명입니다. 영어로 Mission이라 합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사신입니다 (고후 5:20, 엡 6:20)
사명을 다 한다는 것은 내의 꿈과 내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보내신 자의이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내 뜻을 이루었다고 사명을 다했다고 하지 않습니다.
1) 그러면, 예수님께서 다 이루신 사명은 무엇입니까?
■ 하나님의 뜻인 구원의 계획을 다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 다 이루었다(헬, 텔레오의 완료 수동태), 수동태로 사용될 경우 자신을 온전힌 헌신했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동사
그것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루신 것입니다. 자신을 헌신함으로 완전한 속죄를 이루신 것입니다 (수동태), 죄 값을 다 지불하신 것입니다. 다 갚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구원의 계획은 창세 전부터 계획되어 있습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스스로 수치를 가리기 위하여 스스로 ①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해입은 그들에게 동물을 죽여 만든 ②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시는 것으로 시작으로(창 3:21), 수많은 ③ 동물 제사를 보여주심으로 피를 흘려야 죄 사함있다는 진리를 알게하셨습니다.
마귀의 머리를 밟을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것을 말씀하셨는데(창 3:15), 마침내 약 2000년 전에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그리스도 예수가 오셔서 어린 양으로 죽으시고 피를 흘리게 하셔서 대속 제물이 되어 하나님의 뜻인 우리들의 구원의 계획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그가 이루어 놓으신 구원을 우리 인간들이 취하여 누리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잔과 세례를 떠나가게 해 달라고 했지만, “내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신 것입니다. 한마디로 십자가의 죽음은 구원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입니다.
■ 동시에 성경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다 이루셨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성경의 예언된 말씀을 이루어 가시는 삶이며, 또 그대로 되기를 원했습니다.
[마태복음 26: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요한복음 19:28]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예수님은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이 응해지고 예언이 이루어지는 삶이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대로 되기 위해서 그것을 선택한 것도 있지만 그냥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 이루었다가 완료 수동태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도 다른 성자들과 차이가 너무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의 “다 이루었다”의 이 고백은 이 땅에서의 속죄사역의 사명 완성입니다.
인류의 구원을 위한 법적 근거를 마련하신 것입니다.
최종적인 구원은 종말적 심판 때에 일어날 것입니다. 그때까지도 우리들의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중보자로 사명을 감당하고 계시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만물을 새롭게 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었다(헬, 게고난, 완료형, 능동태)”(계 21:6)를 선포하실 때가 진정 구원의 완성의 때인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이 땅에서 3~3.5년의 짧은 기간 동안 그의 사명을 완수한 것입니다.
사명을 완수했다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을 모두 구원했다는 것도 아니며, 모든 사람들을 다 고쳐주었다는 말도 아닙니다.
구원의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믿으면 죄 사람을 받고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믿으면 제사장들 만이 들어갈 수 있는 성소, 지성소까지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믿으면 더 이상 동물 희생제사를 드리지 않아도 됩니다. 믿으면 모든 저주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믿으면 되는 근거를 마련하신 것입니다.
3. 달란트 비유, 므나 비유는 우리들의 사명에 관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 달란트 (헬, 탈란톤, 탤런트)는 6,000일 노동자 임금, 므나(히,마네) 100일 노동자 임금
달란트 비유는 사람에 따라 사명의 분량이 많고 적음이 있음을 보여주고, 열 명에게 준 므나 비유는 누구나 똑 같이 한 므나의 사명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비유입니다. “열”은 만수이므로 그래서 작지만 누구나 사명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비유인 것입니다.
이 비유의 공통적인 것은, 주인이 맡겨주신 달란트나 므나를 장사하여 남긴 사람은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칭찬을 받고, 남기지 못하고 그대로 돌려준 자에게는 악한 종으로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기지 못한 자는 있는 것도 빼앗기게 되고, 반대로 남긴 자에게는 더 많은 것을 맡기고,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게 되는데, 남긴 만큼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눅 19:11-27, 마 25:14-30)
우리들에게는 달란트, 므나라는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장사하여 무조건 남겨야 합니다. 달란트, 므나는 화폐 단위이지만 우리들에게 주신 재능, 재물 등을 말씀하고 있으므로 실제 장사가 아니라 그것을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사용하는 삶입니다.
1) 달란트, 므나 비유에서 주인의 종들은 최소한 은행, 취리하는 자들에게 맡겨서 이자라도 남겼어야 했습니다.
※ 은행(헬, 트라페자,돈 바꾸는 상), 취리하는 자들(헬, 트라페지테스,환전상)
오늘날로 본다면, 달란트, 므나를 가지고 자기가 직접 장사하지 못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맡겨서라도 조금의 이익을 주인에게 남겨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사역을 간접적이라도 도와서라도 남겨야 하는 것입니다.
선지자를 영접하면 선지자의 상을 받는 원리입니다 (마 10:41)
[마태복음 10:41]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사역하시는 분들에게 물이라도 한잔 드리는 것도, 나는 못하더라도 그들이 잘 할 수 있도록 직 간접적으로 후원하시고 도우시고 격려하는 것도 은행 이자라도 드릴 수 있는 사역이라 생각합니다.
■ 달란트, 므나 비유에서 우리들이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① 우리들에게 재능, 재물의 달란트나 므나를 맡기신 주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재능, 물질은 내것이 아닙니다.
② 주인을 위하여 그것을 사용하므로 반드시 무엇을 남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③ 그래서 반드시 결산할 날이 있다는 것입니다.
④ 그 결과에 따라 심판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기지 못한 자는 무익한 종으로서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겨 슬피 울며 이를 갈며 지옥에 가게 되고, 남긴 자는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게 되고 고을을 다스리게 되는 천국에 간다는 것입니다.
2) 지금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달란트가 있는데, 혹시 악한 종처럼 땅에 묻어 놓고 있거나 수건으로 싸 보관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혹시 그러시다면, 아직 기회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의 남은 인생의 시간은 아직 사명을 감당할 충분한 시간이 있습니다. 지난날에는 사명을 잃고 나를 위해 살았다면, 앞으로 남은 시간은 얼마를 사시던 간에 사명을 감당할 기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그의 사명을 완수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감옥에 있는 날까지 포함해도 3년 미만입니다. ※사역시작 26년, 죽음 29년
■ 세례요한의 짧은 인생을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안타깝습니다.
오래동안 광야에서 살면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낙타털 옷을 입고 마치 나실인과 같이 살았는데, 그 짧은 기간 사역하고 천국에 간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역을 마치고 간 것입니다. 그래도 그는 하나님 앞에서 사명을 다하고 간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에게도 3년 이상 인생이 남아 있다면 소망이 있습니다.
■ 그리고 예수님도 30세 전까지는 목수로서 살았습니다.
30세가 지나서 3~3.5년 공생애를 사시면서 그의 사명을 다하신 것입니다. 모두 다 짧은 공생애를 사시면서 그 사명을 다하신 것입니다.
→ 그러므로 아직 우리들은 포기하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입니다. 살아 있으매 사명이 없다고 하기에는 너무 이릅니다.
모세는 80세에 시작을 했습니다. 아직 여러분들에게는 사명을 감당할 기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4. 사명이 없는 자가 없습니다. 누구나 있습니다.
보통 사명이 있다고 하면 신학교 가서 목사가 되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도 당연히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사명은 누구나 있는 것입니다.
▶ 우리들이 왕 같은 제시장이라고 하면서 사명이 없다고 하면 모순입니다(벧전 2:19).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다 사명이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 우리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사명이 없다고 하면 이상합니다 (롬 8:14, 갈 3:26).
아들인데,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사명이 없을 수 없습니다.
▶ 우리들이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면서 사명이 없다고 해도 말씀과 맞지 않습니다.
달란트, 므나를 종들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우리들이 태어난 목적은 사명이 있기 때문에 태어난 것입니다.
망치도, 못 하나도 자기 사명이 있는데 어찌 인간이 없겠습니까?
1) 모든 피조물들에게 부여된 공통적인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피조물들은 모두 하나님을 찬송을 하고 영광을 돌려야 하는 사명입니다.
[이사야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시편 96:7] 만국의 족속들아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2) 그리고 각자에게 주신 독특한 기름부으심으로 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다른 것입니다. 저와 다윗의 기름부으심은 다르고 여러분들과 저의 기름부으심도 다릅니다.
다윗은 다윗왕국을 이루는 사명을, 모세는 출애굽 사명을, 베드로와 바울은 세계 선교의 사명을 감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다 마치고 그들은 순교하거나 죽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각자가 사명이 있음을 깨닫고, 발견하여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직 우리들이 살아있다면 그에게 사명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 “사명이 있는 자는 죽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죽으심으로 사명을 다했습니다. 세례요한도 사명을 다하니 목이 베어 순교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대부분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를 당했습니다.
물론 모두 순교로 죽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사명을 잊고 살다가 죽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가 정말 믿는 자라면 그가 사명을 마칠 때까지는 데려가지 않을 것입니다.
3) 이 사명을 잃거나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창 8:1-12).
① 노아의 홍수 때에 비둘기도 그 사명을 잘 감당했습니다.
비가 그치고 물이 줄어들고 있을 때에 노아가 바깥 상황을 알기 위하여 비둘기와 까마귀를 방주에서 내 보냈습니다.
비둘기와 까마귀가 오늘날 본다면 우리들이 사명을 부여 받은 것입니다.
② 먼저 까마귀를 내 보냈습니다. 까마귀는 부정한 새입니다. 그런데 이놈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왜, 돌아오지 않았을까요?
→ 잡식성인 까마귀는 떠 돌아다니는 시체를 보고 그것 먹는다고 사명을 잃은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이 세상의 먹는 것, 입는 것에 취하여 하나님께서 이 땅에 우리들을 보내신 사명을 잃은 것과 같습니다. 이런 인간이 되면 안됩니다.
부정한 새로 구원을 받지 못하는 인간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③ 그래서 노아는 다시 비둘기를 보냈습니다. 비둘기는 정결한 새입니다
그 비둘기는 발 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다시 돌아왔습니다. 정결한 새이므로 시체에 앉을 수 없습니다. 그가 돌아온 것은 아직 물이 가득차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노아는 다시 칠 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 보냈는데, 이번에는 비둘기가 그 입에 감람나무 새 잎을 물고 옵니다. 노아는 어느 정도 물이 줄어들고 감람나무가 물 위로 드러나 잎이 돋은 것을 알게 됩니다.
다시 칠 일을 기다려 비둘기는 내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물이 완전히 말랐다는 것을 노아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비둘기는 노아가 명령한 사명을 완수한 것입니다.
정결한 새로 사명을 감당하고 구원을 받는 인간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비둘기도 자기의 사명을 감당합니다.
4) 불순종과 같은 죄는 사명의 길을 중단시킬 수 있습니다.
모세는 원래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그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을 한번 저지르게 됩니다.
충분히 상황은 이해가 갑니다.
그들이 신광야 가데스에 이르렀을 때에 물이 없어 회중들이 모세와 아론에게 다가와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더라면 좋을 뻔하였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회중을 이 광야로 인도하여 우리와 우리 짐승이 다 여기서 죽게 하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나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 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 (민 20:3-5)
라고 다툴 때에,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고 회중에게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민 20:10) 하면서 반석을 두 번을 치게 됩니다. 반석을 명하라 했는데 말입니다.
영적으로 이미 호렙산에서 지팡이로 쳐서 갈라진 바위이므로 (출 17:6) 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두번 반석을 치는 것을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은 영적 행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민 20:12)라고 하신 것입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요청했을 때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신 3:26)
그래서 그는 가나안 땅을 요단강 동편 모압지방에서 보기만 보고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이 일로 그의 사명이 끝이 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대를 이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은 여호수아의 사명으로 바뀌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안하면 다른 사람들이 그 사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5) 대산교회에 부여된 사명도 있습니다.
대산교회의 사명은 교회의 존재 이유입니다. 개인 사명이 교회의 사명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연합되면 더 좋은 효과를 거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나 다른 사람들 보시기에 우리교회가 작은 교회로 보여지지만 그 비젼은 엄청나게 큽니다. 그렇게 될 것을 여러모로 보여주셨습니다. 저는 그것이 다 이루어질지 모르지만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그때 그때 주의 음성을 들으며 인도함을 받고 나아갈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여기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각자의 개인 사명을 교회 사명과 연결시켜 보세요.
각 자가 내가 이 교회에서 무엇을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이것을 고민하여 기도하며 사명을 찾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찬양선교로, 어떤 분들은 문서선교로, 어떤 분들은 영상선교로, 어떤 분들은 인터넷선교로, 어떤 분들은 해외 선교로 직접 나가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교회에서 선교를 나가겠다고 자원하는 청년들이 많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100명의 선교사를 보내고 싶은 마음이 저에게 있습니다.
최소한 삼십 가정당 (100명)한명 정도는 보내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집니다.
저에게는 많은 비전들이 있습니다. 다 우리교회 사명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고아원 사역, 미혼모 사역, 대안학교 사역, 선교회 운영, 선교재단 운영, 선교훈련원 등 이런 비전을 가지고 있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대부분 돈이 들어가는 영적 사역들입니다. 여기에 이미 오신 분들이 각 기관에 책임자, 리더, 간사로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준비된 자가 그 자리를 차지할 것입니다. 비전을 가지고 기도하시면서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연세 있는 분들로 얼마든지 동참의 기회가 있습니다. 고라 자손의 고백처럼 성전 문지기도 좋지 않습니까? (시편 84:10)
[시편 84:10]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6) 지금까지 오래동안 여러분들을 위한 삶을 산 것으로 족하지 않습니까?
이제는 주를 위해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사명을 찾아 가야하지 않습니까? 주를 위하여 무엇이라도 해야하지 않습니까?
■ 바울은 목숨을 다하여 그의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우리들이 도전을 받아야 할 분입니다.
그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롬 1:1), 이것을 부르심을 소명이라고 합니다 (calling, 임금이 신하를 부르는 명령)
그리고 그에게 주어진, 맡겨진 사명을 목숨을 걸고 다했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24)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딤후 4:7)
사도행전을 보면 그가 잡힐 줄 알면서도 기꺼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잡힙니다(행 21:10-14). 그리고 로마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로마 황제에게 상소를 합니다(행 25:11).
결국 그는 자신의 고백과 같이 마침내 그는 순교를 당했습니다. 로마 시민이기 때문에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64년 경). 십자가형에 비하면 고통이 적은 형벌입니다. 그의 사역 속에서 이미 수많은 고통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
이 땅에서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지 않고 먹고 마시면서 놀면, 음부에 간 부자와 같이 그 곳에서 고통을 겪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6:25]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이 땅에서의 짧은 고통은 저 천국에서 영원한 기쁨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짧은 유흥은 저 지옥에서 영원한 고통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닝은 공평하십니다.
▶ 사명이 크고 작은 것, 남이 알아주고 안 알아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사명을 발견하고 바울처럼 달려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땅에 태어난 것은 잘 먹고 잘 살기 위함도 아니요, 그리고 나만 구원을 받고 천국에 가기 위함도 아닙니다.
바울처럼 하니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기 위함입니다.
그는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마치 경주하는 자가 상을 향해 달려가는 자와 같이 달렸습니다 (딤후 2:5, 히 12:1)
[빌립보서 3: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우리들은 이런 순교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해와 선교를 나가지 않더라도 이 자리에서 사명을 작게라도 감당해야 하지 않나요?
성도 여러분들, 달란트처럼 큰 사명을 부여받지 못하고 므나와 같은 작은 사명을 부여받았다고 할지라도 우리들이 눈을 감는 순간, “다 이루었습니다”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처럼 하늘의 상급, 면류관을 쓸 수 있도록 (딤후 4:8, 약 1:12) 주님께서 부여하신 사명을 감당하시어 헛되지 아니히는 영원한 천국과 상급을 기업으로 얻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