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지 전투: 히틀러가 아르덴느산림지대의 130Km에 걸친 유령전선에 기습을 성공시키겠다는 전략이었다.
유령전선이라고 한것은 이곳이 살을 에이는듯한 추위와 태고의 정적에 잠겼는데 여기서 양군이 두달 가까이나 대치하여 감시를 계속해 왔는데도 불구하고 서로 도발적인 군사행동을 회피하려 한데서 유래 되고 있었다. 이 유령전선에는 미8군단이 배치되어있었는데, 2개사단은 전투손실이 심했고 나머지 2개사단은 모두가 신병으로 편성되어 경험이 부족했다. 히틀러는 여기에 집중공격을 가하고 돌파구를 열어 뮤즈강까지 신속히 전진한다면 그 여세를 몰아 독일 기갑군을 동원해 단숨에 안트와프까지 전진해 연합군을 보급항구로 부터 차단시켜 패배의 날을 연기 시키면 무조건 항복하기 보다는 유리한 평화 조건을 얻을 시간을 벌 수 있으리라고 히틀러는 생각했다.
이 작전은 현실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5년동안이나 전세계의 반을 상대로 싸워 온 히틀러의 생각으로는 물의가 아니었다.
독일군의 공격은 1944년 12월 16일 아침 5시30분에 시작되었다. 히틀러가 이 작전의 성공에 걸은 기갑부대의 돌진이 아르덴트의 무성한 산림과 악천후 때문에 제한된 길목에서 집중적으로 저지 당하고 있었다.
이러한 독일군의 엄청난 계획에 놀라지 않은 미군 지휘관은 없었다.
12월 16일~17일의 양일간 미 제8군단은 눈이 쌓인 전나무 숲에서 밀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25만의 독일군 정예부대의 전진을 필사적으로 막고 있었다.
이때 연합군 최고 사령부의 지휘관들은 아이젠하워를 포함해서 충격에 휩싸여 있었다. 다만 홀로 의욕에 넘치는 자신감을 갖고 고대하던 일대격전을 치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는 조지, 패튼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상급 사령부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다고 패튼은 생각했다.
패튼의 자신감에 아이젠하워는 그에게 강력한 반격을 해주기를 바라면 6개사단의 병력으로 작전을 실행하라고 명령했다.하지만 패튼이 장담한대로 쉬운일만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우선 진행중인 자아르의 전투(제3군은 자아르전투가 진행중) 를 중지하고 전군을 90도 좌선회 시켜 독일군의 저항을 뿌리치고, 게다가 몇천대의 차량을 눈길 속에서 이동시켜야만 되었다.
이것은 실행 계획을 수립하는 단계에서 부터 무리한 계획이라고 여겨지는 것이었다. 그럴수록 자신에 넘치는 패튼이었다.
12월22일 패튼은 3개사단으로 공격을 시작한 다음날 날씨가 좋아져 공군이 지원을 할수 있게 되었다.
때마침 바스토뉴에서 독일군이 포위되어있는 연합군을 섬멸하기 위해 강력한 병력을 계속 증강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는 제4기갑사단에게 아롱~뤼에쥬가도를 따라 바스토뉴까지 진격하는것을 최우선으로 중시한다고 결정했다.
이 결정에 의해 에서의 패튼은 유례없는 명성을 떨치게 된 것이다.
이 결정이야 말로 적절한 것이었다. 패튼의 전임참모장 가페장군이 이끄는 역전의 용사 제4기갑사단은 고속전투여단에게 바스토뉴 외각진지의 독일군 초계선을 돌파하도록 했다.
이들이 상대할 독일제5공수사단은 독일 공군의 지상요원을 끌어모은 오합지졸같은 전력이었지만 대전차포를 앞세우고 미 제4기갑사단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8군단의 건조물 파괴공작은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수행되었는데 이것이 구원부대의 전진에도 방해가 되고 있었다. 그로인해 23일 정오에 바스토뉴에 남쪽 14Km가까이 쯤에 있는 부르논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여기서 전진은 주춤하고 말았다. 24일 지상포격과 전투기의 지원이 있은 뒤 오후1시 30분 전차에 보병을 탑재하여 공격했으나 날씨가 맑아 얼어 붙었던 대지가 진창으로 바뀌어 전차의 기동에 제한을 받게 되고 이는 독일 자주포의 좋은 밥이 되어 11대의 셔먼전차를 잃고 격파 당했다. 할 수 없이 후속 고속기동연대에 바톤을 넘겼다.
4개대대의 포병과 1개대대의 셔먼전차가 맹렬한 포화를 뿜으며 루모아빌의 제5공수사단을 격파하고 독일군 250명이상을 포로로 잡았다. 이날 하루를 루모아빌에 공격에 다써버려 이 이상은 전진하지 못했다.
바스토뉴까지는 아직도 10Km가 남아 있었고 미제4기갑사단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재공격은 [최후의 1인까지 싸우라] 하는 패튼의 명령을 충실히 지키는 길고도 고난의 전투였다.
드디어 12월26일 오후4시쯤 제101공수사단을 독일군에서 구출한 이 끝나고 동시에 그의 이름은 전 미국에 명성을 떨치게 된것이다
패튼이 제3군을 자아르강의 교두보에서 눈 덮인 아르덴느로 이동시킨 다시말해 혹한의 유럽땅에서 3만3천여대의 차량을 연 25만Km나 이동시키는 불가능을 부하장병에게 시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패튼의 특유의 대담함 실행력과 지휘력으로 군수송면으로도 업적을 남겼다고 이의가 없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군수송면의 한 공적에 지나지 않는다고 혹평하는 이도 있다.
미9군 종군기자였던 로버트 멜리엄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아르덴느의전투가 패튼 덕에 이겼다고 믿고 있다. 확실히 제3군은 바스토뉴를 탈환했다. 하나 독일군의 주력부대가 최초의 열흘동안 벨기에 북서부에 미제1군에게 공격의 화살을 돌리고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적다. 바스토뉴 주변에 격전이 전개된것은 도시가 독일군에 포위 되었을때가 아니고 열흘뒤 브루?과 안트와프를 탈취하겠다는 야망을 히틀러가 버리고 남쪽으로 군을 돌렸을때 생겼다는 사실이다.]
확실히 패튼이 북진중에 싸운 독일군은 제7군의 2류전력인 보병 4개사단으로 명백하게 진격을 지연시키기 위해서만 배치되어 있던 약체였다. 이 동안에도 북부방면에서 미제1군이 독일군 정예부대인 제5, 6기갑군등 4개군단의 중압을 막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 패튼의 견제작전이 없었다면 사실 제1군은 극히 위험한 전황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은 적의 측면을 찌르는 패튼 작전의 제일 목적이 되었던 것이다.
최근 학자들 사이에는 바스토뉴는 전술적으로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다고 보는 이가 늘고 있다. 오히려 에서 독일군의 결정적인 패인을 준것은 크라크장군(제4기갑사단의 전투여단 지휘관)의 상비트 방위전에 있었다고 보고 있다.
당시 상비트와 바스토뉴를 공격한 독일 제5기갑군의 만트이펠이 지적하고 있듯이, 상비트는 예상외로 버티어냈고 그 결과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SS제2기갑군단의 행동개시가 휠씬 늦어지고 말았다.
이 결과 독일군의 진격은 예정보다 5일이나 늦어지고 상비트의 배후 비엘사룸에 있는 미군의 소탕에 또 2일을 소모해야 했다. 덕분에 미제1군은 방어선을 정비할 시간을 벌수 있었고 우연하게도 바스토뉴의 미군들도 구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패튼의 공헌도는 어찌 되었든 그는 에서 명성에 상처를 입지 않았던 오직 한명인 미군 사령관으로써 각광과 추앙을 받았다.
패튼은 미국의 전통적인 영웅상의 조건 - 힘차고 속되고 사나이다워야 하는 - 을 전부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대중의 마음 속에서 바스토뉴의 구출과 결부 되어 버렸다. 미국민에게 있어서 바스토뉴의 방위 작전은 곧 인 것이다.
그건 그렇고 바스토뉴의 구출도 끝나고 패튼 휘하에는 6개사단의 병력이 집결해 있었다.
1945년 1월 1일 6개사단은 바스토뉴 돌출부를 더욱 넓히기 위해 남부에서 공세 작전에 들어가고 독일군의 측면에 깊이 파고 들어갔다.
1월 3일과4일 양일 바스토뉴는 독일군 8개사단(SS제6기갑군의 4개사단이 포함)의 맹렬한 연계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또한 악천후로 인해 공군의 지원을 바랄수도 없었으나 미제3군은 악착같이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바스토뉴 서부에 가해지는 독일군의 압력을 경감시키기 위해 패튼은 부득이 배치한 신참의 미보병사단을 투입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었다.
그러나 1월 5일이 되자 독일군의 공세는 약화하기 시작하고 퇴세가 뚜렷해졌다. 독일 만트이펠(제5기갑군)은 북방에서의 몽고메리의 반격에 대비하여 병력을 먼저 철수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히틀러는 바스토뉴 탈취 계획을 포기하는 상태에 놓이게 된다. 패튼은 다시 전진할수 있게 되었다.
1945년 1월 11일 그의휘하 제11기갑사단은 후파리제 지역에서 제1군 2기갑사단과 성공리에 합류했다. 이리하여 독일군의 돌출부는 붕괴되고 그 뒤로는 잿더미로 변한 전쟁터를 정리할 따름이었다.
1월 29일 는 끝났다고 하는 공식 발표가 있었다.
패튼은 특별 공식기자 회견을 열고 그답지 않은 겸손한 어조로 [내가 한일이라면 명령을 내렸을 뿐이지]
그러나 그주 주말에 패튼의 일기장에는
[본 작전중 제3군은 미국 역사상의 어떠한 군대보다, 혹은 아마도 세계역사상 어떠한 군대보다도 보다 광범하게 보다 신속하게 행동했고 또 단시일 안에 보다 많은 부대를 전개 시켰던 것이다]
이 자존심이 패튼의 숨김없는 본심이었을 것이다.
결국 발지 전투에서 독일은 전차 600대 항공기 1600대를 잃고 7만명의 사상자와 5만명의 포로로 잡히는 참패를 당했다.
모든 예비병력마저 다잃은 히틀러에게 그나마 위안에 된것은 연합군이 침공을 6주정도 연기시켰다는것 뿐인것이다.
권율은 임진왜란 초에 광주목사(光州牧使)로 있으면서 군사를 일으켜 전공을 세워 전라도 순찰사(巡察使)가 되었는데, 그 뒤 중국 명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서울을 수복하려고 군사를 이끌고 수원성(水原城)에 머물다가, 1593년(선조 26) 2월 1만여 병력을 행주산성에 집결시켰다. 권율은 조방장(助防將) 조경(趙儆)을 시켜 행주산성을 수축하게 하고 목책을 만들게 하였으며, 병사(兵使) 선거이(宣居怡)는 금주(衿州:始興),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은 강화(江華), 충청감사 허욱(許頊)은 통진(通津:金浦)에서 각각 그를 지원하기로 하였다.
한편 일본군은 이 무렵 총퇴각을 감행하여 서울 부근으로 집결할 때였으므로 그 병력이 대단하였을 뿐만 아니라, 1월 말의 벽제관(碧蹄館)에서 승리한 직후여서 그들의 사기 또한 충천해 있었다. 2월 12일 새벽 일본군은 3만여 병력으로 내습, 여러 겹으로 성(城)을 포위하고 3진으로 나누어 9차례에 걸쳐 종일토록 맹공격해왔다. 이에 권율은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왜군과 맞서 치열한 싸움을 계속하였으며, 심지어 부녀자들까지 동원되어 관민(官民)이 일치단결하여 싸웠다. 이때 부녀자들이 긴 치마를 잘라 짧게 만들어 입고 돌을 날라서, 석전(石戰)으로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혔는데, 여기에서 ‘행주치마’라는 명칭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있듯이 당시 행주산성의 싸움은 치열하였다. 마침내 일본군은 큰 피해를 입고 퇴각하였는데, 권율은 이를 추격하여 130여 명의 목을 베었으며 적장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깃카와 히로이에[吉川廣家] 등에게도 부상을 입혔다. 행주산성이 전투는 임진왜란의 3대첩(三大捷) 중의 하나로, 권율은 이 공로로 도원수(都元帥)가 되었다.
행주대첩
이여송의 명나라 군사가 평양성을 탈환하고 서울을 향해 내려올 때, 수원 가까이 있던 전라 순찰사 권율은 군사를 몰아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으로 진군하였다.
관군 2,300명과 승병 500명을 거느리고 행주산성에 도착한 권율은 준비를 갖추고 이여송의 명군을 기다렸다. 명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서울에 모인 일본군을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권율 장군의 계획은 어긋나고 말았다. 벽제관 싸움에서 이여송의 명군이 일본군에 패하여 평양으로 되돌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권율은 용기를 잃지 않고 적을 맞아 일대 격전을 치를 각오로 전투 준비를 하였다. 우선 산 둘레에 말뚝을 튼튼하게 박아 목책을 세우고 화살과 돌을 모아들였으며, 물을 담을 독과 항아리를 거두어 들여 왜군들이 쳐들어오기를 기다렸다.
행주산성에 조선군이 주둔해 있다는 소식을 들은 왜군들은 선조 6년(1593년) 2월 이여송의 명군을 쳐부순 고바야카와를 선봉장으로 무려 3만 명의 정예 부대가 벌판을 까맣게 메우고 밀려들었다.
적은 해가 질 무렵까지 아홉 차례나 맹렬히 공격을 가해 왔으나 굳건한 행주산성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부녀자들까지 앞치마에 돌을 날라 군사들을 도왔다. 드디어 왜군은 2만 4,000명이나 되는 시체를 남겨 놓은 채 물러가고 말았다.
권율 장군이 지휘한 이 행주산성의 대승리는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크게 기록되었으며, 부녀자들이 치마에 두르고 돌을 날라 온 앞치마는 이 때부터 행주치마라고 불리었다. 또한 권율 장군은 이 행주 대첩의 공로로 도원수, 곧 총 사령관이 되었다.
임진왜란 중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 김시민의 진주 대첩, 권율의 행주 대첩을 가리켜 임진왜란의 '3대첩'이라 한다.
http://210.218.32.140/history2/images/6_chosun/ce07.jpg
행주조선시대에는 우리가 잘 알고있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등이 있죠... 임진왜란은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친 왜군의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입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원인은 우리나라의 사정 계속된 평화로 국방에 소홀히 함 정치가들 사이에 당파 싸움이 많았고 일본을 얕잡아 보았으며 조세제도의 문란으로 민심이 혼란 이율곡이 10만 양병설을 주장하였으나, 무시되었죠.
일본의 사정으로는 계속된 내란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통일하여 반대세력의 관심을 돌리기 위하여 전쟁을 발발시켰죠. 계속된 내란으로 군인들의 전투력이 강했던 때였고 포루투칼로 부터 들여온 조총이라는 새로운 무기를 만들어 사용했죠.정치가들의 혼란으로 국방에 소홀하였던 것이 외세 침입의 빌미가 되었죠... 임진왜란은 아주 어이없게 나온 겁니다.
병자호란은 1636년(인조 14) 12월∼1637년 1월에 청나라의 제2차 침구(侵寇)로 일어난 조선·청나라의 싸움으로 우리나라 최대의 굴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1636년 4월 후금의 태종은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청(淸)이라고 고쳤으며, 조선이 강경한 자세를 보이자 왕자·대신·척화론자(斥和論者)를 인질로 보내 사죄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고 위협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은 주화론자(主和論者)보다는 척화론자가 강하여 청나라의 요구를 계속 묵살하였다고 합니다.
병자호란:12월 2일 이런 조선의 도전적 태도에 분개한 청나라 태종은, 청·몽골·한인(漢人)으로 편성한 10만 대군을 스스로 거느리고 수도 선양[瀋陽]을 떠나, 9일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왔습니다.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은 백마산성(白馬山城:義州)을 굳게 지켜 청군의 침입에 대비하였으나, 선봉장 마부대는 이 길을 피하여 서울로 진격하였죠.(얼마나 허탈하겠습니까--;) 13일에서야 조정에서는 청나라 군의 침입사실을 알았고, 14일 적은 개성(開城)을 통과하였습니다.
14일 밤 인조도 강화로 피난하려 하였으나 이미 청나라 군에 의해 길이 막혀,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백관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피하였습니다. 그러나 남한산성에는 식량조차 50여일 분 정도밖에 없었고 특히 그해는 혹독한 추위로 많은사람들이 얼어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결국 1월 30일 인조는 세자 등 호행(扈行) 500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와, 삼전도(三田渡)에 설치된 수항단(受降壇)에서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례(降禮)를 한 뒤, 한강을 건너 환도하였습니다.. 청나라는 맹약(盟約)에 따라 소현세자·빈궁(嬪宮)·봉림대군 등을 인질로 하고, 척화의 주모자 홍익한·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 등 삼학사를 잡아, 2월 15일 철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로써 조선은 완전히 명나라와는 관계를 끊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었죠. 이와 같은 관계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할 때까지 계속됩니다.
조선시대에는 더 많은 전쟁이 있었지만 너무 길어질것 같아 생략하겠습니다.--;;
근대에는 한국전쟁(6.25)이 가장 큰 이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을 기해 북한 공산군이 남북군사분계선이던 38선 전역에 걸쳐 불법 남침함으로써 야기된 한국에서의 전쟁인데요 북한에서는 남한이 먼저 침략해 들어왔다고 하는데 속된말로 말하자면 다 구라에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됨에 따라 한국은 일본의 불법적인 점령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카이로회담에서 나라의 독립이 약속은 되어 있었으나,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남과 북에 미소 양군이 분할 진주함으로써 국토의 분단이라는 비참한 운명에 놓이게 되었죠.
그러나 북한에 진주한 소련 군정당국은 남북간의 왕래와 일체의 통신연락을 단절시킴으로써 38도선을 남북을 가르는 정치적 경계선으로 만들었으며, 공산화통일이 보장되지 않는 어떠한 통일정부수립도 거부함으로써 한반도의 반영구적인 정치적 분단을 강요하였습니다. 한반도에서의 지배권 강화를 목표로 하는 소련의 기도와 적대정부의 출현만은 절대로 반대하는 미국의 입장이 타협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한국의 통일독립 문제의 해결은 극히 어려웠으며 이 문제를 위해 개최된 미소공동위원회도 결렬되고 말았습니다.
여러가지 문제로 다투던 여러해가 지나고 결국 소련은 1950년 6월 25밤 불법으로 남침하여 조금씩 한반도를 삼켜가기 시작했습니다. (6.25때 함락되지 않은 곳은 부산 뿐이라죠^^)그때 당시의 사람들의 생활은 비참했습니다.. 여자들은 미군의 매춘부나 창기가 되어야만 먹고 살 수 있었고 아이들은 고아가 대다수였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구걸을 하고 먹고 살았습니다.(몽실언니라는 책을 보면 6.25때의 참상을 알 수 있을것입니다)
그 후 9월 16일의 인천상륙작전을 전환점으로 하여 전세를 반전시킨 유엔군은 패주하는 북한군을 추격, 10월에는 평양을 수복하고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진격하였습니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12월에는 북한지역에서 철수하게 되었고, 38선이 돌파된 후인 1951년 1월 4일 대한민국 정부는 다시 서울을 철수하게 되어 전선은 현재의 휴전선 일대로 고착되었습니다.
6. 25는 세계의 전쟁문제로 봐서도 심각한 전쟁문제였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그저 군인들이 국가의 경계선에서 지들끼리 치고박고 싸웠기 때문에 민간인의 희생이 적었으나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이제는 멀리서 가만히 앉아서도 '단추'하나로도 도시 몇개는 그냥 파투낼수 있을 정도로 발달했죠... 그리스,로마시대때는 사망자의 1~3%정도가 민간인이었으나 베트남 전쟁때는 사망자의 70%가량이 민간인, 6.25 전쟁에는 무려 99%가량이 민간인이었다죠.
대1950.6.25 북한군의 남침
6월 25일 새벽 4시경, 북한인민군은 7개 보병사단,1개 기갑여단 및 특수전부대를 포함, 총 10만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38도선 전역에서 기습 남침을 시작 하였다.
1950.6.26 유엔안보리, 북한군 침공중지 결의
한국의 사태를 보고 받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군의 불법 남침 중지, 38도선 이북으로의 철수’결의안을 찬성 9, 반대 0, 기권 1로써 가결하였다. 이 결의는 유엔이 집단안전보장조치로써 침략을 저지하고 평화의 회복을 달성하려는 첫 번째 시도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950.8.1 미 제 8군사령관, 낙동강방어선으로 철수명령
북한군의 계속되는 공세에 밀려 후퇴하던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선을 최후의 교두보로 선정하고 이 선에서 총반격을 실시한다는 작전을 계획하였으며, 미 제 8군 사령관 워키중장은 8월 1일 전군에 낙동강방어선으로의 철수를 명령하였다
1950.8.5 인민군의 8월 공세 시작
북한인민군은 8월 5일부터 낙동강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한 공세를 시작하였다.이에 맞서 국군 및 유엔군은 왜관·다부동, 창녕,·영산, 마산, 포항, 안강 등에서방어전을 전개하여 적을 격퇴하였다
1950.8.16 B-29 폭격기, 융단폭격
1950.8.16 B-29 폭격기, 융단폭격아군을 공격하기 위해 낙동강 건너편에 집결해 있으리라고 예상되는 북한군을 격멸하기 위하여 유엔군사령관의 명령으로 출격한 B-29폭격기 98대가 왜관서북쪽 낙동강변 일대에 960톤의 폭탄을 투하 하였다. 이것은 6.25전쟁에서 전무후무한 대량의 융단폭격이었다
1950.8.31 ~ 9.8 인민군의 9월 공세
8월 공세에서 성과를 얻지 못한 북한군은 다시 9월 공세를 시작하여 왜관·다부동,창녕· 영산, 마산, 포항 등을 공격하였다. 한때 영천과 경주가 위기에 빠지기도 했으나 국군 및 유엔군은 사투를 벌여 적을 물리쳤으며, 이후 인천상륙작전과 더불어 이곳에서 반격할 기반을 조성하였다.
1950.9.15 인천상륙작전
1950.9.15 인천상륙작전맥아더 유엔사령관은 북한군의 후방을 차단하고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 261척의 함선과약1천대의 비행기를 동원하여 인천으로 대대적인 상륙작전을 실시하였다. 이 작전이 성공함으로써 북한군은 완전히 붕괴되었고, 전세는 반전되어 국군과 유엔군이 반격과 추격을 감행할 수 있게 되었다.
1950.9.28 수도 서울 탄환
인천에서 상륙한 미 제 10군단 주력과 낙동강전선에서반격을 실시한 미 제8군 주력이 적을 추격하여 마침내 수도 서울을 탈환하였으며, 9월 29일에는 서울 수복을 기념하는 역사적인 환도식이 중앙청에서 거행되었다.
1950.10.1 국군, 38도선 돌파 북진
반격을 실시한 국군 및 유엔군은 9월 30일 드디어 38도선에 도달하여 대망의 북진을 기다렸다. 그러나 유엔군사령부로부터는 정식 북진명령이 하달되지 않은 상태에서 구두명령에 의해 국군 제3사단 제 23연대와 수도사단의선두부대가 동부전선에서 38도선을 돌파함으로써 북진작전의 막이 올랐다.
1950.10.25 중공군, 제1차 공세 개시
1950.10.25 중공군, 제1차 공세 개시유엔군의 항공정찰을 피하여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고 야간행군으로 북한지역의 산악지대에 잠입한 중공군의 대군이 처음으로 공세를 개시, 국경선에 접근한 국군 및 UN군 부대들을 포위·격파하였다.
1950.10.26 국군, 압록강 초산 도달
한만국경선으로의 공격명령을 받은 국군 중에서 제6사단 제7연대의 선봉부대가 26일 최초로 압록강변에 도달하였다. 9월 16일 낙동강 전선에서 반격을 개시한지 41일 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 부대도 곧 중공군의공격을 받아 급히 철수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1950.11.21 미 제10군단, 두만강 혜산진 진입
중공군의 공세를 받아 미 제8군이 청천강선으로 철수한 서부전선과 달리 동부전선에서는미 제10군단이 계속 북진을 실시하여 미 제7사단의 선두부대가 국경도시 혜산진을 무혈점령하였고, 국군 제3사단은 합수, 백암까지, 수도사단은 청진까지 진출하였다.그러나 이들 부대들도 중공군의 포위공격을 받아 철수하게 되었다.
1951.3.15 국군, 서울 재탈환 및 북진
1951.3.15 국군, 서울 재탈환 및 북진거침없이 공격하던 중공군은 남으로 진출할수록 병참선이 길어지고 그 병참선이 유엔 공군의 공격을 받으면서 전투력이 약화되었다. 한편, 워커 장군의 뒤를이은 리지웨이 제8군사령관은 위력수색 작전으로 적의 위치와 전투력을 확인토록 하면서 반격을 실시하여 전선을 북으로 밀어올리고, 3월 중순에는 수도 서울을 다시 탈환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세를 몰아 38도선까지 진격한 후 이 선을 돌파하여 재차 북진하였다.
1951.4.12 맥아더원수 해임, 리지웨이 장군 유엔군사령관 임명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그 자신의 명령에 철저히 복종하지 않는 맥아더 유엔군사령관 겸미 극동군사령관을 해임하고, 그 후임으로 미 제8군사령관인 리지웨이 장군을 임명하였다. 이로써 6.25 전쟁을 더 이상 확대하지 않는 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1951.6.23 말리크 소련 유엔대표, 휴전회담 제의
1951.6.23 말리크 소련 유엔대표, 휴전회담 제의
북진하여 한만 국경선 가까이 도달함으로써 남북 통일의 일보직전까지 이르렀던 국군과유엔군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게 되자 미국은 군사적인 수단으로 한반도를 통일한다는 목적을 포기하고 정전을 모색하게 되었다. 한편, 소련과 중공도 이런 사태를 인식하였으며, 마침내 유엔 주재 소련대사 말리크가 라디오 연설을 통해 정전의사를 표시 하므로서 전쟁을 중지하기 위한 양측의 합의가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한국전쟁을 도와준 참전국으로 총21개국이 있습니다.
ⓐ전투원 파병국 : 미국, 그리스, 남아공, 영국, 터키, 프랑스, 네델란드, 뉴질랜드, 룩셈부르크, 벨기에, 이디오피아, 캐나다, 콜롬비아, 태국, 필리핀, 호주
그렇지만은 병력의 절대다수가 미군이 차지를 했고(약38만여명) 그외의 국가들은 많게 몇만명에서 적게는 몇십명(룩셈부르크가 48명 파병)을 파병한국가도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국가가 우리를 도운이유는 미국의 압력혹은 자금원조(다수의 국가가 자금원조의 대가로 한국파병), 이해관계등으로 볼 수있습니다.
14.이디오피아 : 당시 38도선 최전방 지역으로 북한군과의 치열한 전투로 유명했던 춘천 방어전투(서울로 가는 길목인 춘천을 사수한 전투로 이 전투에서 시간을 많이 끌어주어 인민군들의 작전계획이 지연됨)에서 공을 세움
1.전쟁과 문명의 관계.
전쟁이 생김으로서 문명이 발전하는것 아닌가요?
이제까지의 역사만보더라도 1차세계대전 2차세계대전 후
엄청난 과학발달이 생겼고 문명과 문명과의 전쟁으로 더욱더
커다란 문명이 발생했습니다.
물론 전쟁이 좋다는것은 아니지만 전쟁이 문명일 발달시키는
한가지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2.산업이란?
인간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일상적으로 종사하는 생산적(生産的) 활동.
3.산업 종류라면 이런걸 말하는건가요?
A 농업, 수렵업 및 임업(01-02)
01 농업
02 임업
B 어업 (05)
05 어업
C 광업 (10-12)
10 석탄, 원유 및 우라늄 광업
11 금속 광업
12 비금속광물 광업; 연료용제외
D 제조업 (15-37)
15 음·식료품 제조업
16 담배 제조업
17 섬유제품 제조업; 봉제의복 제외
18 봉제의복 및 모피제품 제조업
19 가죽, 가방 및 신발 제조업
20 목재 및 나무제품 제조업; 가구 제외
21 펄프, 종이 및 종이제품 제조업
22 출판, 인쇄 및 기록매체 복제업
23 코크스, 석유 정제품 및 핵연료 제조업
24 화합물 및 화학제품 제조업
25 고무 및 플라스틱제품 제조업
26 비금속 광물제품 제조업
27 제1차 금속산업
28 조립금속제품 제조업; 기계 및 가구제외
29 기타 기계 및 장비 제조업
30 컴퓨터 및 사무용 기기 제조업
31 기타 전기기계 및 전기 변환장치 제조업
32 전자부품, 영상, 음향 및 통신장비 제조업
33 의료, 정밀, 광학기기 및 시계 제조업
34 자동차 및 트레일러 제조업
35 기타 운송장비 제조업
36 가구 및 기타 제품 제조업
37 재생용 가공원료 생산업
E 전기, 가스 및 수도사업 (40-41)
40 전기, 가스 및 증기업
41 수도사업
F 건설업 (45-46)
45 종합 건설업
46 전문직별 건설업
G 도매 및 소매업 (50-52)
50 자동차 판매 및 차량연료 소매업
51 도매 및 상품 중개업
52 소매업; 자동차 제외
H 숙박 및 음식점업 (55)
55 숙박 및 음식점업
I 운수업 (60-63)
60 육상운송 및 파이프라인 운송업
61 수상운송업
62 항공 운송업
63 여행알선, 창고 및 운송관련 서비스업
J 통신업(64)
64 통신업
K 금융 및 보험업 (65-67)
65 금융업
66 보험 및 연금업
67 금융 및 보험관련 서비스업
L 부동산 및 임대업 (70-71)
70 부동산업
71 기계장비 및 소비용품 임대업
M 사업서비스업(72-75)
72 정보처리 및 기타 컴퓨터 운영 관련업
73 연구 및 개발업
74 전문, 과학 및 기술 서비스업
75 사업지원 서비스업
N 공공행정, 국방 및 사회보장행정 (76)
76 공공행정, 국방 및 사회보장행정
O 교육 서비스업 (80)
80 교육 서비스업
P 보건 및 사회복지사업 (85-86)
85 보건업
86 사회복지사업
Q 오락, 문화 및 운동관련 서비스업(87-88)
87 영화, 방송 및 공연산업
88 기타 오락, 문화 및 운동관련 산업
R 기타 공공, 수리 및 개인 서비스업(90-93)
90 하수처리, 폐기물처리 및 청소관련서비스업
91 회원단체
92 수리업
93 기타 서비스업
S 가사 서비스업 (95)
95 가사 서비스업
T 국제 및 외국기관 (99)
99 국제 및 외국기관
대공황 부터 간략히 예기하자면,
2차세계 대전 으 로 인한 미국의피혜대공황의 상황은 이렇습니다. 상점에 물건은 남아돕니다. 하지만 돈이 없어서 못사죠. 상점주인? 안팔려서 물건 안들여옵니다. 물건만드는 기업? 상점에서 안팔리는데 더 만들려고 하겠어요? 노동력 줄이고 월급 줄입니다. 가난해진 노동자 더욱더 돈이 없어 상점 못갑니다.
이러한 상황하에 그당시 주류경제학인 고전학파에서 뚜렷할 해결책을 찾지 못했습니다. 고전학파의 모형의 해답은 그저, 기다리라는 해답만 내줄 뿐이였죠. 가이브레쓰는 이러한 상황을 독과점의 폐허라고 주장했지만, 그리 설득력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이 때 케인즈가 등장합니다. 케인즈는 미국경제의 1920~1950의 발전을 일으킨 위인이라고 할 수 있죠. 케인즈는 고전학파와 달리 상점에 쌓여있는 재고를 지적했습니다.(실제로 이러한 총수요의 부족은, 당시 기업가들도 쉽게 지적했던 부분입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고전학파 신봉 경제학자들만이 애써 부정하려 했었죠.) 케인즈는 대공황의 원인을 정확히 분석하여 유효수요의 부족으로 인한 완전경쟁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의 결함을 문제점으로 지적하였습니다.
요약해 보자면, 유동성선호 이론, 물가/급여 경직성으로 인한 세이의 법칙(총저축=총투자 라는 이자율 결정 모형)의 균형이자율에 회의를 가졌습니다. 즉, 이러한 투자=저축이라는 고전파의 메카니즘에 반박을 가합니다.
즉, 저축투자 메카니즘으로 결정된 이자율이 화폐의 투기성,일반 사람들의 유동성 선호,물가/급여 경직성으로 인해 고전학파의 완전고용 균형점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주장입니다.
이러한 완전고용시장과 물가/급여 경직성의 GAP 은 사람들의 투자.소비 심리의 반영이므로 고전학파의 완전고용시장은 현실에서 불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GAP을 케인즈는 정부지출로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즉,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정부가 나서서 일자리/수요를 창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대공황 이후 미국의 정책은 루즈벨트의 정부지출의 확대로 일축됩니다. 이 때가 미국경제의 부흥기입니다.(루즈벨트는 역대 4선이나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테네시 강 유역 개발 등의 대규모 국책사업을 통해 노동자를 고용하고, 봉급을 지불합니다. 제조업은 그에 따라 활발해지고 노동자들 주머니에 돈도 생깁니다. 상점에 다시 물건이 팔리기 시작하고 공장이 다시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상황에,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납니다. 공장들 짓겠죠? 무기를 만들어야 하니깐요. 일자리는 계속 창출되고, 경기는 호황을 누리게 됩니다.
GDP 또한 급격히 증가되고, 경제규모 또한 엄청나게 커지죠. 물론 환경은 다르지만, 일본의 경우도 2차세계대전 패전이후로도 경제가 급속히 성장합니다.
즉, 전쟁에 따른 엄청난 총투자의 발생이 실질임금을 상승시켰고, 총소비 또한 커지게 됩니다. 이로 경제의 GDP 또한 커지고, 경제유형의 중화학화(군수산업의 경우 대표적인 철강을 비롯하여 많은 산업이 중화학공업과 같이 발전합니다.)로,
자본의 한계효용도 급격히 늘어납니다. 이상이 미국의 20세기 초반의 경제패권을 유럽으로부터 건네받게 된 이유입니다.
그럼, 유럽도 전쟁에 참여했지 않느냐고 물어보시는 분이 있을텐데..
유럽은 다릅니다. 유럽은 그 자체가 끔찍한 전장터였기 때문에, 미국처럼 전쟁에 따른 경기호황을 누릴 수 없는 상황이였습니다
첫댓글 열심이 돌아다니며 읽으며 찾았더니 않사용해 ㅡ,,ㅡ
수고..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