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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기를 회수하다
증 언 자 : 정홍섭(남)
생년월일 : 1952.(당시 나이 28세)
직 업 : 부친의 가게 도움(현재 무직)
조사일시 : 1989. 5
개 요
22일부터 26일까지 총기를 회수함. 28일 상무대로 끌려가 1백여 일 동안 고통 받고 풀려남.
죄없이 구타당하고
나는 1952년 광주시 월산동에서 4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전북 금산에서 가져온 인삼, 수삼 등을 집에서 파는 인삼대리점을 하고 계셨으므로 생활은 넉넉한 편이었다.
나는 대성국민학교와 숭일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 일을 도왔다. 분가한 뒤로는 아내가 사촌누나의 여인숙에서 일을 도왔으므로 그곳에서 살았다. 그 여인숙은 금남로 5가 한일은행 옆에 있었다.
1980년 한약방에 아버지 심부름을 다니며 대학생들이 데모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뭔가 생각이 있어 데모를 하겠지만 그로 인해 교통이 마비되는 것은 좀 지나치지 않냐는 생각을 했다.
5월 19일 아내가 눈이 아팠으므로 함께 시내 동구청 뒤에 있는 홍안과에 갔다. 치료를 받고 오전 10시경 밖으로 나오니 공수대 3, 4명이 나에게 달려들었다. 다짜고짜 진압봉으로 내 등짝을 때렸다.
"아이고! 왜 이래요. 데모 안 했어요. 내 나이 서른인데 이 나이에 데모하겠소 "
"임마, 뭣이 어째. 그럼 왜 나왔어?"
"이쪽이 내 집사람인데 눈이 아파서 여기서 치료하고 나오지 않소. 이것 보시오. 안대 한 것 보면 알 것 아니오."
몇 마디 항의를 하자 군화발로 내 목을 찍어버렸다. 옆에 있던 아내가 울면서 사정사정하자 그들은 나를 놓아두고 가버렸다. 아내가 나를 부축하고 공수대를 피해 골목을 돌아 가까스로 집으로 들어갔다. 집에 돌아가 있자니 울화가 치밀었다.
20일 1시경 밖으로 나왔다. 광주역 쪽으로 걷다가 지나가던 미니버스에 올라탔다. 미니버스에 있는 7, 8명의 청년들과 함께 '전두환 물러가라', '계엄해제', '계엄군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깨진 창문으로 손을 내밀어 차체를 두들겼다. 우리들은 광주역-시외버스 공용터미널-학동 등을 돌았다.
차를 타고 돌다 그날 오후 5시경 시외버스 공용터미널로 가보았다. 7, 8대의 택시들이 무등경기장 쪽에서 시외버스 공용터미널로 오고 있었다. 오늘 도청에서 차량시위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광남로와 금남로 진입로엔 공수대가 길을 막고 있었다. 그들은 양 도로에 20명씩 서 있었다. 길을 차단당한 택시들은 도로에 서 있었고, 시민들은 인도에서 상황을 지켜보았다.
얼마 후 무안이라고 씌어진 안내판을 단 시외버스 한 대가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배차실로 들어가려고 하였다. 그러자 빨간 잠바를 입고 모자를 쓴 30대 초반의 남자가 그 차를 세웠다. 그는 운전사에게 다가가 길을 뚫어야 하는데 공수대가 막고 있어 어렵다고 상황을 설명하였다. 그 말을 들은 운전사와 타고 온 손님들이 차에서 내렸다. 버스에 올라탄 빨간 잠바의 남자는 차를 몰아 서서히 공수대 쪽으로 향했다. 서서히 가다 막판에 돌진하자 공수대는 뒤로 후퇴해 갔다. 길이 뚫리자 버스는 금남로를 향해 갔고 그 뒤를 7, 8대의 택시들이 따랐다. 시민들은 차량을 뒤따랐고 나 역시 서서히 걸었다.
15분 정도 후에 금남로 관광호텔 가까이 가보니 앞장섰던 고속버스가 불에 타고 있었다. 그쪽에 있던 50여 명의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빠져나오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택시기사복을 입은 사람들도 있었다. 버스를 운전하고 갔던 사람이 어찌 되었는지 궁금하여 그들에게 물었더니 공수대에게 맞아죽었다고 했다.
어둠이 내리자 유동 삼거리 쪽에서 차량들이 불을 켜고 몰려오기 시작했다. 앞에는 대형 버스가 서고 뒤에는 택시들이 줄을 이어 따르고 있었다. 선두가 도청 가까이 가자 갑자기 최루탄이 날아오기 시작했고, 차량들은 피하느라 이리저리 차를 몰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다 집으로 들어갔다.
계엄군은 물러가고
21일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오후 계엄군의 무차별 사격에 많은 시민들이 쓰러진 뒤 시민 스스로 무장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박하게 깨달았고, 총을 든 시민군과 도청에 있는 계엄군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다고 한다.
그날 저녁 나는 20대 청년 두 명과 지프차에 타고 시내를 돌았으나 별다른 기억은 없다. 차를 타고 돌다 새벽에 시민군에 의해 도청이 장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소리를 듣고 조선대에 계엄군이 사용했던 기름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기름을 넣으려고 조선대로 갔다.
조선대 운동장에는 계엄군이 사용했던 천막과 식기 등이 그대로 있었고 드럼통에 휘발류가 들어 있었다. 거기서 기름을 넣고 금남로로 나왔다. 관광호텔 앞에서 시민 몇이 손을 들어 차를 세우고 무등극장 쪽에 시체가 있다며 싣고 가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차를 몰고 가니 무등극장 못 미처 시체 한 구가 가마니에 덮여 있었다. 45세 정도의 남자가 죽어 있었다. 시체를 싣고 서서히 기독교병원으로 가면서 사람이 총 맞아 죽었다고 시민들에게 홍보하였다. 기독교병원에 도착했을 때 외국인 기자 몇이 사진을 찍었다. 찍히면 언젠가 후환이 있을 것 같아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 있을 때 기독교병원에서 3, 4명의 의사가 나와 그 시체를 영안실로 들여갔다.
총기회수 작업
다시 차를 몰고 금남로로 나왔다. 총을 나눠준다고 하여 광주공원으로 갔다. 공원 앞에는 총을 받기 위해 3백여 명의 시민들이 몰려나와 있었다. 외곽에서 총기를 가져온 듯한 트럭 6대가 옆에 있는 것으로 보아 총기의 양은 많은 것 같았다. 우리들은 거기서 카빈 1정씩을 지급받았다.
그곳에서 지산유원지에 계엄군이 있을지 모른다는 소문을 듣고 우리들은 그쪽으로 차를 몰았다. 그러나 지산유원지 앞에 가니 그곳에 있던 시민들이 계엄군이 이미 철수했다고 하였다. 다시 시내로 왔을 땐 정오가 넘어 있었다.
시민들이 총을 들고 다니는 게 눈에 띄었다. 그 중에는 16-17세로 보이는 어린 학생들도 있었다. 총을 다룰 줄 모르는 어린애들이 총을 들고 다니는 걸 보고 어쩐지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오발사고라도 나면 어쩌나, 이래서는 안 되지' 싶어 우리 세 명은 총기를 회수하기로 했다. 지프차를 타고 돌면서 총을 든 학생을 보면 차를 세우고 불렀다.
"자네, 총 쏠 줄 아는가? 모르제. 이렇게 함부로 총을 가지고 다니다 오발사고라도 나면 시민들이 다치지 않겠나?"
"저도 계엄군과 싸울라고 그란디, 왜 총을 뺏어가요?"
"총이란 것은 가지고 있으면 오발사고가 나는 것 아니겠나? 일단 총을 우리에 게 주고 정 받고 싶으면 나중에 도청에 가서 받지."
좋은 말로 설득했으므로 대체로 호응해 주었다. 처음엔 우리들 셋이서 시작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여러 사람이 회수작업을 하였다. 회수한 총기는 전일빌딩 1층 현관에 모았다. 우리들이 회수한 것만 해도 카빈 70정, 수류탄 20개 정도였는데 전일빌딩 1층에 모인 총은 카빈 3백정 정도였다.
그날부터 26일까지 집에 들어가지 않고 총기회수 작업을 했다. 도청에서 기동타격대들이 조직되어 활동한다는 얘기가 들려왔고, 일부에선 무기를 반납해선 안 된다는 얘기도 있었다. 한편으로 계엄군이 곧 들어올 거라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렇기 때문에 빨리 무기를 회수하고 질서를 회복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엄군과 맞서자는 얘기도 있었으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무모한 짓이라 여겨졌다. 싸움을 해봤자 시민들의 희생만 클 것이기 때문이다.
이곳저곳을 돌다 밤이면 아무 데나 차를 세워놓고 잠을 잤다. 먹을 것은 언제나 넉넉했다. 가는 곳마다 시민들이 김밥, 음료수, 담배, 과일 등을 차에 올려줬다. 그래서 차에는 항상 먹을 것이 가득 실려 있었다. 돌아다니다 시민군 차를 만나면 서로 나누어먹기도 했다. 담배를 건네주고, 과일을 나눠먹고…….
밤엔 여기저기서 총소리가 나 위험을 느끼기도 했으나 꼭 이 일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겼다.
어느 날 아침 총소리를 듣고 전남대 정문 앞 용봉국민학교 앞으로 갔다. 그곳에는 30세로 보이는 남자가 피범벅이 되어 죽어 있었다. 시민들은 무서워 감히 밖에도 나오지 못했고 시체 주위에는 무거운 정적만 감돌고 있었다. 차에서 내린 우리들은 그 시체를 구하기 위해 총을 들고 주변 건물에 숨은 뒤 주위를 살폈다 .
얼마 뒤 우리들이 시체 있는 곳으로 가자 시민들도 하나둘 나왔다. 부근의 할아버지 말에 의하면 주위의 야산에서 계엄군 둘이 나와 자전거를 타고 가는 이 남자에게 총을 쏘고 들어갔다고 했다. 죽은 남자는 작업복 바지를 걷어 입은 것으로 보아 주변의 논에서 일하다 나온 농군 같았다. 얼마 후에 온 기동타격대원들이 그를 지프차에 싣고 갔다.
상무대 생활
그동안 계속 돌아다녔으므로 피로가 쌓였다. 몸도 씻고 옷을 갈아입으려고 26일 저녁 9시경에 집에 들어갔다. 집에 들어가자 가족들은 그동안 어디에 있었냐고 난리였다. 동안의 상황을 대충 설명하고 잠을 자다 새벽녘 다급한 방송 소리에 잠을 깼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계엄군이 광주시민을 다 죽이러 오고 있습니다. 광주시민 여러분, 어서어서 나오십시오. 광주를 지킵시다."
여태껏 들어왔던 소문이 사실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방송 소리를 들은지 얼마되지 않아 총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총소리는 점점 가까와 지더니 상당히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아침이 되어 잠잠해졌을 때 몹시 궁금하였으나 감히 내다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그냥 집에 있었다.
다음날 아침 9시경 마루에 앉아 있는데 경찰 2명이 집으로 들이닥쳤다.
"정홍섭이 어디 있냐?"
순간 뜨끔하여 아무 말도 못하고 그대로 있었다. 그런데 계엄군 서너 명이 뒤따라 들어오며 나를 금방 알아보았다.
"이놈이 바로 정홍섭이잖아."
그들에게 광주경찰서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그간의 행적에 대해 조서를 받고 밖으로 끌려나왔다.
"너 이 새끼, 상무대로 가면 죽을 줄 알아."
경찰들은 나에게 엄포를 놓았다. 나는 대기한 군용 트럭에 실려졌다. 고개를 숙인 채 무릎을 꿇었으므로 밖을 볼 수 없었으나 트럭에는 7, 8명 가량이 타고 있었다. 차에 포장이 덮여있어 어디가 어딘지 모르고 한참을 가다 차가 멈추고 포장이 열려졌다. 내리라고 하여 나오는데 군인이 곡괭이 자루로 우리들을 휘갈겼다. 나중에 알았으나 우리가 내린 곳은 상무대 영창 앞이었다. 그곳에서 고개를 숙인 채 무릎꿇고 있으면서 조금만 움직여도 맞았다.
"이 새끼들, 고개 들어."
하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옆에는 50여 명 정도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내가 잡혀온 지 1시간 30분 후였다. 우리들은 곧 상무대 영창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영창은 모두 7개 소대였는데, 내가 들어간 곳은 1소대였고 그곳에는 80여 명이 있었다. 그중에는 전라북도 말씨를 쓰는 젊은이가 몇명 있었다. 밤에 잠잘 때 옆 사람에게 그들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원광대 학생들이라고 했다.
나는 1소대에서 얼마 있다 3소대로 옮겨졌다. 그곳엔 1백20명의 사람이 있어 매우 비좁았다. 3소대에는 교수님들이 많다는 얘기를 옆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들었다. 당시는 몰랐으나 전남대 오병문 교수, 정상용 씨, 정해직 씨 등이 함께 있었다. 우리들은 매일 정자세로 앉아 있다 불려나가 조사를 받아야 했다. 조사를 받으면서 많이 맞았으므로 일단 불려나간 사람들은 시퍼렇게 멍이 들어 걷지도 못하고 땅바닥을 기어서 돌아오곤 했다.
다른 사람들이 며칠 만에 한 번씩 불려나간데 비해 나는 거의 매일 불려 나갔다. 뭔가 있을 것 같은데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그런 것 같았다. 불려나가면 탁구대 앞에 앉아 사복수사관 앞에서 자술서를 써야 했다. 그간의 행적을 하나도 빠짐없이 적었으나 그들은 매우 자세한 것을 요구했다. 시간, 분, 초까지 따지려 들었고, 만났던 학생들의 인상착의를 대라고 하였다. 처음 10일 동안은 매일 같은 내용의 자술서를 쓰다 많이 두들겨맞았다.
"야, 이 새끼야, 여기서는 이렇게 써놓고 여기서는 왜 요렇게 썼냐, 이 새끼야."
심지어 글자 받침 하나까지 꼬치꼬치 트집을 잡았다. 놈들은 되지도 않는 말로 트집을 잡으며 눈을 감게 한 다음 곡괭이 자루로 사정을 두지 않고 때렸다. 한 대 맞으면 머리가 멍멍할 정도로 충격이 컸다.
몇 대 맞고 기절한 후 깨어나면 온몸에 느껴지는 통증으로 미루어보아 기절한 상태에서도 많이 맞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조사가 끝나고 기진맥진해져 영창 안으로 들어가면 통증에 끙끙 앓아야 했다. 심하게 때려 온몸에 멍이 들면 며칠 동안 부르지 않았다. 그러다가도 '다 끝났나 보다'고 생각할 무렵이면 여지없이 다시 불려나가곤 했다.
교수님들도 불려나가면 녹초가 되어 돌아왔다. 그걸 보며 우리들은, "그래도 명색이 교수님인데, 일반인들처럼 대우가 이래야 되겠냐. 차라리 우리를 때리면 달게 받겠다" 는 말들을 했다.
구타당하는 것 못지 않게 배고픔도 커다란 고통이었다. 군용 스푼으로 세 스푼 정도의 밥량으로는 몸을 지탱하기도 힘들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어느 날 3소대에 있던 사람들은 단식을 하기로 하고 아침과 점심을 굶었다. 배가 몹시 고픈 그날 오후 김춘배라는 헌병 상사가 와 우리들 중 한 사람을 끌어내더니 곤봉으로 때리기 시작했다. 비명소리를 들으며 처음엔 겁이 나 숨죽이고 있던 우리들은 구타가 계속되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상무대가 떠나가도록 악을 쓰자 그때서야 때리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 사람은 반죽음 상태로 영창으로 돌아왔다. 그런 일이 있은 뒤로 차츰 밥량이 많아졌다.
나에 대한 수사는 7월 말에 가서야 끝났다. 구타당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우선 살 것 같았다. 처음엔 눈동자마저 돌리지 못하고 정자세로 앉아 있었으나 간수들과 얼굴이 익어감에 따라 다리를 뻗고 앉을 수도 있게 되었다. 비좁던 자리도 우리들 중 일부가 1, 2차로 석방됨에 따라 조금은 여유가 생겼다.
석방
내가 상무대에 잡혀간 지 5일 후 1차 석방, 한 달 후 2차 석방이 있었다. 나는 1, 2차 석방 때 나가지 못하다가 3차로 석방되었다. 들어간 지 1백여 일이 지난 9월 초순이었다. 석방된다는 말에 따라 20여 명이 3소대에서 나올 무렵 소대 안에는 아직도 30여 명이 남아 있었다. 영창에서 나와 바로 집으로 가지 못하고 다시 상무대 교회로 끌려가 정신교육을 받았다.
"칼로 여자 유방을 도려냈다는 얘기, 이런 것은 일체 유언비어니까 그렇게 알고, 27일 도청을 장악했을 때 정부요원들이 가발 쓰고 들어가서 도청 안에 있는 수류탄이며 안전핀이며 이미 다 빼냈다. 여기 있었다는 얘기, 누구한테도 얘기하지 마라. 부모들한테도 얘기하면 안된다."
이제나저제나 끝나기만 기다렸으나 교육은 3박 4일 동안 계속되었다. 가까스로 교육이 끝나자 광주시장의 배려라며 와이셔스 한 장과 운동화 한 켤레씩을 주었다. 옷을 입고 나오다 상무대 앞에서 아내와 만나게 되었다. 내가 영창에서 나오는 날 사촌누나의 여인숙에 자주 드나들던 형사의 연락을 받고 그날부터 3박 4일 동안 매일 상무대 앞에 나와 기다렸다고 했다. '어디 다른 곳으로 끌려갔나?' 싶어 애를 태우던중 나를 만났다고 울먹였다. 3대의 버스에 분승하여 상무대를 빠져나오면서 마치 지옥에서 빠져나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집에 돌아와 며칠간 몸져 누웠다. 온몸이 쑤시고 아팠다. 자꾸 옆구리에 통증이 와 얼마 뒤에 중흥동 효성병원에서 엑스레이를 찍은 결과 갈비뼈 4, 5번이 부러졌으나 아물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물고 있다고 하여 특별한 치료를 받지 않고 집으로 돌아와 자가치료를 하였다.
단방약을 많이 먹었고, 타박상을 입은 전신을 찜질했다.
1983년도엔 하루빨리 5월의 진상을 밝혀 나처럼 억울한 사람의 한을 풀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5·18 광주민중항쟁동지회에 가입했다.
일자리를 구하고 싶지만
몸이 불편해 일을 못 하고 있다. 1983년 운전면허증을 취득하여 유창교통 소속 차를 몰았다. 그러나 6개월 후에 이유도 모른 채 사표를 강요당하고 회사에서 쫓겨났다. 그후 유아용품을 취급하는 곳에 취직하였으나 그곳에서도 2개월 뒤 쫓겨났다.
"자네, 이참에 말 들어보니까 행실이 안 좋다고 하더구만." 이것이 쫓겨나게 된 이유였다. 확실한 이유를 물었으나 자세한 이야기는 해주지 않았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파출소 한번 드나든 적이 없는데 행실이 안 좋다니!' 어이가 없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내가 5·18과 관련되었다는 사실 때문이었을 것이다.
비가 오면 온몸이 쑤시는 등 아직도 후유증이 있으나 일을 할 수 있는데 놀고 있자니 답답하다. 그후 아직까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집에 있다. 생활은 아내가 사촌누나의 여인숙을 관리하는 수입으로 꾸려가고 있다.
주위 사람들의 권유로 1988년 11월, 평민당 정상용 의원 사무실에 5·18 부상자로 신고를 하였다. 지금껏 신고하지 않은 것은 부상자라면 눈에 띄는 외상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5·18을 생각하면 한마디로 치가 떨린다. 5·18 하면 공수대가 떠오르고, 이어 얼룩무늬 군복이 연상되었고, 얼룩무늬가 있는 옷은 보기도 싫었다.
아직도 그날의 상흔이 내 가슴에 남아 있다. 하루빨리 진상규명이 되어야 한다. 첫째 사망자가 몇 명인가 하는 것을 밝혀야 하고, 둘째, 발포명령자는 누구인가 밝혀야 한다. 집단발포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청문회에서 '자위권 발동'이라고 했는데, 거기엔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것이다.
보상은 최소한 상처가 충분히 아물 때까지 치료해 주는 수준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된다. 아직까지 고통 속에 신음하고 있는 부상자들이 많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부상자들을 먼저 치료해 주는 것이 무엇보다 급선무일 것이다.(조사.정리 최정숙)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 감사합니다.
사랑과 행복이 함께하는 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