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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삶의 최소한의 목표는 바로 기쁨, 무조건 사랑
붓다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은 드문일이다.
깨달음에 대해서 듣는 것은 더욱 드문 일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드문 것은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이다"
기쁨의 초월
모든 제한하는 신념, 위치성, 의심,
집착들의 내맡김은
영적에너지(쿤달리니 에너지)의 유입을 허용하는데,
이는 헌신(측정수준 555)에 수반되는 것이다.
영적진실과 사랑에 대한
지속적 헌신은
저항의 해소를 허용한다.
초월하기 위해서는
모든 집착, 심지어는 자기와 사회가 책임으로 규정한 것조차
포기할 것이 요구된다.
서론
사랑이
점점 더 무조건적으로 되어감에 따라
그것은 내면의 기쁨으로 경험되기 시작한다.
이는 사건들의 만족스러운 전환에 대한
갑작스러운 기쁨이 아니라
모든 활동에 항시 동반되는 것이다.
기쁨은
그 어떤 외적근원에서가 아니라
존재의 매 순간
내면에서 솟아난다.
540수준은 또한 치유의 수준이자 영성에 기초한 자조모임들의 수준이다. 540수준 이상부터는 성인, 영적치유자, 앞선 영적제자들의 영역이다.
이 에너지장의 특징은
엄청난 인내력과 기나긴 역경속에서도
긍정적인 태도를 지속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 상태의 품질증명은 연민이다. 이 수준을 성취한 사람들은 타인들에게 괄목할 만한 효과를 발휘한다.
이들은
한참 동안 똑바로 응시할 수 있으며,
이러한 응시는 사랑과 평화의 상태를 유도한다.
500대 후반에서
사람이 바라보는 세계는
절묘한 아름다움과
창조의 완벽함으로 비춰진다.
일체는
동시성에 의해
저절로 일어나고
사람은 세계와 그속의 모든 것이
사랑과 신성의 한 표현임을 본다.
개인적 의지는
신성한 의지와 융합된다.
사람의 현존은 힘을 느끼는데
그것은 실상에 대한 관습적 기대를 벗어난,
보통의 관찰자가 기적적이라고 칭하는 현상을 촉진한다.
이러한 현상은
개인의 힘이 아닌
에너지 장의 힘을 나타낸다.
이 수준에서 타인에 대한 책임감은
낮은 수준들에서 보이는 것과는
사뭇 다른 성질을 띤다.
여기에는 자신의 의식상태를 특정한 개인 대신 생명의 이익자체를 위해 사용하려는 욕망이 있다.
많은 사람을
동시에 사랑할 수 있는 이 능력에는
사람은
사랑할수록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게 된다는
발견이 수반된다.
임사체험의 특징은
변형을 불러일으키는 효과에 있는데,
사람들은
임사체험을 통해
540에서 600사이의
에너지 수준을 경험하는 일이 잦다.
토론
무조건적 사랑은
영성에 몰두하는 이들,
특히 진지한 영적 헌신자와
수행자들 대다수의 목표이다.
이것은 다른 종교는 물론 기독교의 이상이기도 하다. 세계인구 전체에서 540수준에 도달하는 이들의 인구는 0.4%이다.
하지만
무조건적 사랑은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헌신적 목표로서
그것을 진지하게 선택하는 이들에게
실용적이고 도달가능한 목표이지
단순히 이상적이고 희망적인 상태인 것만은 아니다.
의식측정 수준은
의식진화의 척도상에 있는 한단계를 가리키는데,
그것은
이번 생에 이룬 진보만이 아니라
과거 카르마의 귀결을 반영한다.
전체적인 영적관점에서
이 지상의 삶은
붓다가 언급한 것처럼
최대한 카르마적 이익을 제공하는
일시적 기착지로 보일 수 있다.
동기부여가 강하고
영적으로 훈련된 집단에서는
구성원의 약 50-55%가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는 목표에 도달한다.
앞선 상태들의 발생은
또한 매우 앞선
제일 스승의 가르침을
철저히 따르는 것이나
위대한 화신과의
정렬을 통해 촉진된다.
그러한 스승의 면전에 실제로 있는 것이 갖는 무언의 비언어적 이익은 스승의 오라의 고주파에너지(무언의 가르침, 무심의 전달, 스승의 은총,혹은 축복)의 무언의 전달이다.
진지한 영적 제자는
또한 검증가능하게 높은 측정치를 갖는
문헌과 가르침을 구하고
미심쩍은 우회로를 피함으로써 이익을 얻는데,
미심쩍은 우회로는 본래 아스트럴에서 기원한 오락일 뿐이다.
또한 공상적인 영적주장을 피하는 것이 좋다. 그러한 것은 그 대중적 인기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200이하로 측정되는 허구이다.
무조건적 사랑이라는 목표는
매우 단순한 도구로써
이룰 수 있지만,
결과를 내기 위해서는
매일 지속적으로
그것을 살려내야 한다.
무조건적 사랑은
세상속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 존재하는
하나의 상태이자 성질인데,
이는
장애와 모든 한계,
혹은 위치성들과
그러한 위치성이 지불하는 대가를 내맡기려는
자발성의 영적원리들에
진지하게 몰두함으로써 일어나고 출현한다.
무조건적 사랑의 수준에 도달했을때
자명한 것들은
이미 인지되어 있다.
이러한 자명한 한계들의 자리에서
보다 미묘한 것들이 나타나는데,
예컨대 그것은 나는 안다
혹은 나는 그 모든 것을 안다는 마음의 추정이다.
뭔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으로 존재한다는 것과 같지 않다.
성숙된 진정한 영적 집단이나 벗들과 더불어 경험하는 이로움은 공유되는 사례, 통찰, 정보가 갖는 가치에 있으며 또한 타가수정으로 일어나는 영감에 있다.
또한
공식적으로는
영성에 전념하지 않으나
무조건적 자비의 수준에서 활동하는 조직들이 있는데
이들은 상당히 높은 의식주준을 나타낸다.
예를들면 병사가 분쟁의 어느 편에 있는지와는 관계없이 봉사하는 국경없는 의사회(측정수준 500)가 그렇다.
무조건적 사랑의 에고 역동
일차적 목표로서
사랑과의 정렬을 통해
또한 영적 봉헌과 더불어,
의식진화는 참나에서 흘러나오는
강력한 영적 에너지의 주입으로
지지되고 촉진된다.
이 독특한 에너지의 유입은 측정수준 200에서 시작되어 점차로 증가한다. 그것의 관찰가능한 효과는 동물적 좌뇌우위로부터 온건하며 영성 지향적인 우뇌 우위로의 뇌 생리변화이다.
영적 에너지의 가속을 촉진하는 것은
사적인 이득의 추구와 같은
자기애적이고 이기적인 자기이익을
포기하는 것이다.
영적 에너지는
겸손함, 자비, 연민의 의도 및
그러한 것들에 대한 정렬,
그리고 박애, 자비, 친절의 형태로
타인의 고통을 덜어주는 일에 봉헌하려는
의도 및 그러한 봉헌에 대한
정렬을 통해 촉진된다.
영적 에너지는
선형적이고 위치적인 지각이
비선형적 포괄성이라는
더욱 큰 맥락으로 변형되도록 촉매작용을 하는데,
비선형적 포괄성의 맥락은
시간, 공간, 연쇄의 한계들이나
인과관계라는 작동원리에 대한
지각과 신념의 한계들이나
인과관계라는 작동원리에 대한
지각과 신념의 한계를 초월한다.
그리하여 뒤따르는 드러남은 기적적이며 변형력을 갖는 것으로 적절히 묘사된다.
기쁨의 근원은
자신의 존재의 타고난 근원자체애 대한
내적, 주관적 경험에서 비롯되며,
그것은
사적인 자기를
원인적 행위자나
동인으로 추정하는 한계로 인해
저해되지 않는다.
겸손함과 내맡김을 통해
상상적 통제는
신과 신성한 의지에 양도된다.
이것은
세계가 성인다운(측정수준 555) 것으로
또한 사심없는 태도와 행동으로 표시하는 것으로
귀착되는 일이 잦다.
의식이 계속 발전하면서,
존재하는 전부의 타고난 완벽함과
눈부신 아름다움이
휘황한 광휘로서 빛을 발한다.
모든 생명은
타고난 빛비춤이
창조주의 신성을 드러내면서
더욱 아름다워지게 된다.
영적 에너지 흐름의 주관적 경험은
더할나위없이
감미로움으로 느껴진다.
그것은
가슴부분을 통해
밖으로 흘러나가는 것은 물론
등을 타고 올라가
뇌 자체속으로 흘러드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가슴을 통해
저절로 밖으로 흘러나간 영적에너지는
일정한 거리를 지나
외부의 사건들에 영향을 미칠 수조차 있다.
영적 에너지는
또한 그 장속에 들어있는
타인들의 주관적 상태에 영향을 미치는데,
이것은 고양시키는 효과를 갖는다
(전통적인 스승의 은총)
영적에너지(쿤달리니)는
지각에서 영시로의 변형, 그리고
제한된 선형으로부터
존재의 무제한적인 비선형적 본성으로 변형을
가능하게 해준다.
이것은
조건(카르마를 포함하여)이 유리할 때
잠재성이 현실화됨으로 말미암아
전부가 존재속으로 들어오는
기본적 실상의 표현이다.
이 확증은 또한
의도와 영적 정렬로 촉진된다.
그래서 기적을 행하는 사람은 없다.
기적이란
촉매처럼 작용하는
영적 에너지장 자체의
비개인적 귀결인데,
영적 제자의 영적의도에 대해
촉매작용을 하는
앞선 스승들의 오라에서 방사되는
에너지 역시 마찬가지다.
500대 후반에서는
세상에서 효율적으로 기능하는 것이
여전히 가능하지만,
일상적인 노력과
상업의 세계를 떠난 것과
자신의 사회적 세계 및
과거직업을 버릴 것을 요구받을 수도 있다.
지속적인 영적정렬과
수행을 통해
영적 에너지는
계속 흘러 황홀경(측정수준 575)의 수준까지 증가할 수 있는데,
이것은
일상의 세속적 기능을
무력화시키게 되고
그로 인해
관습적인 노력의 세계에서
물러날 것이 요구된다.
세상은
그러한 상태에 대한
혹은 타인들이 분개하거나 불안하게 느낄수조차 있는
그런 이행의 실제적 필요성에 대해
이해가 거의 혹은 전혀 없다는 사실을
미리 각오해 두는 것이 최선이다.
600수준에서
되돌아오는 평온한 고요와는 달리,
주관적으로
황홀경의 상태는
매우 높은 에너지이거나
지칠줄 모르는 능력이다.
창조의 아름다움은
눈부시게 절묘하며,
모든 창조의 타고난 신성과 완벽함은
찬란하고 압도적인 강렬함으로
빛을 발한다.
황홀경의 힘은
주관적으로 경험되며,
그래서
운동수행의 에너지와 강도는
다할줄 모르게 된다.
피로함은
생기지 않으며,
먹기 위해서 멈추거나
심지어 기본적인 생리적 기능을 수행할 필요조차 없다.
그 대신
예를들면 사람은
음식, 휴식이나 일시적 중단없이
몇시간이고 계속해서 쉬지않고 춤출 수 있다.
의식측정이 없다면
세상은
그 상태가 병리적인 것이지,
혹은 신성한 도취의 하나인지
알지 못할 것이다.
(참고로 영적 상태와 병리적 상태에 대한 감별진단을 삽입한다)
진정한 영적상태 | 병리적 상태 |
삼매 | 긴장증 |
빛비춤 | 과대성 |
깨달음 | 종교망상 |
독실함 | 병적 완벽주의 |
영감 | 상상 |
통찰 | 환각 |
진정한 영적스승 | 가짜구루 |
헌신 | 광신, 과도한 종교열 |
몰두하는 | 강박적, 사교에 세뇌된 |
영혼의 어두운 밤 | 병리적 우울 |
초연함 | 위축, 무관심 |
무집착, 수용 | 수동성 |
초월적 상태 | 함구증 |
신뢰하는 | 순진한 |
앞선 상태 | 정신병, 자기우월광 |
지복 | 다행감 |
겸손함 | 낮은 자존감 |
영적나눔 | 개종시키기 |
몰두 | 종교열 |
영감어린 | 메시아적 |
신충격 | 정신분열증적 와해 |
영적 황홀경 | 조증상태 |
진짜 영적 지도자 | 영적 정치인, 사교 교주 |
자유로운 | 정신병질적 |
가르치는 | 통제하는 |
비록 황홀경의 상태가
영적으로 앞선 공동체들에서 인지되고
그 주관적 경험에 대해서는
라마크리슈나 같은
유명한 신비주의자들이 묘사한 바 있지만,
세상은
그러한 상태에 대해 알지 못하며
세상에게 그것은 정말
이해불능이다.
영적현상 :싯디
의식수준이
540에서 500대후반으로 상승하면서
이성과 습관적인 논리적 개념화
혹은 원인과 결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저절로 일어난다.
그러한 현상은
영적에너지(쿤달리니)의 점진적 지배에 수반되며,
의지작용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맥락의 장의 귀결로서 일어난다.
그것은 자율적으로 일어나는 것으로 목격된다. 이는 고전적으로 싯디로 불렸으며, 논리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초자연적 혹은 기적적/신비적 힘'을 가리킨다.
싯디는
출현 초기에는 산발적일 수 있지만
의식이 발전하면서 잦아지고
때로는 지속적이 된다.
그것은
의도에 따른 것이 아니며
저절로 일어난다.
싯디는
원격투시, 예지, 투시, 투청, 초감각적 지각, 사이코메트리, 동시에 두곳에 존재하기,
자연발생적 치유와 변형을 포함하는 기적적인 일의 발생과 같은 능력들을 포함한다.
거기에는 또한
독특한 촉진작용이 있는데
그러한 것을
미리 예측하거나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와 같은 능력이나 현상은
개인의 통제하에 있지 않다.
그것은
원인과 결과의 귀결이 아니다.
제자들은
그것이 사적인 나 혹은
자기와는 무관하게 일어나기 때문에
그것을 사적인 것으로 주장하지 말라는
사전경고를 받는다.
그래서 앞서 말한 것처럼 기적을 행하는 사람은 없는데, 왜냐하면 기적은 오직 영의 귀결이기 때문이다. 영적 에고의 팽창을 방지하는 것은 정직성과 겸손함이며, 영적 에고의 팽창은 이득을 위한 이용이라는 유혹으로 귀착된다.
싯디 현상은
출현하여
다양한 기간에 걸쳐 강해지게 되는 경향이 있다.
일부는
사라지고
덜 두드러지는 듯한데,
어떤 것들은
영구적으로 지속된다.
쿤달리니 에너지의 흐름은
그 자체가 기이한데,
그것은
에너지가 등을 따라 올라가서
뇌속으로 들어가고
마치 가슴차크라를 거치는 것처럼 나타나서,
그 다음
세상속으로 흘러가는 동안에는
주관적으로
그 감각이
오직 절묘하다고 묘사될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세상에서
쿤달리니 에너지의 현존은
진정으로 경이로운 일의
펼쳐짐을 촉진한다.
일들은
의도하지 않고 벌어지는 것으로 목격된다.
그것은 마치
신성한 성질들이
평범한 물질적 세계를 초월하는
높은 영역들을 경유하여
나타남속으로 이끌려 들어오는 듯하다.
결국에는
명백히 기이한 것이
새로운 실상이 되는데
이제 사람은
표면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마치 조율된 것처럼
저절로 나타나는
다른 차원에서 사는 듯 하다.
그 장의 힘은
카르마적 잠재성이
조화로운 펼쳐짐 속에서 나타난 현실로 출현하는 것을
자율적으로 촉진한다.
그 역학은
비선형적이고
따라서 지성에게는 이해불가능한데,
지성은
인과관계라는 선형적이고 뉴턴적인 모델의 한계들을 추정하며,
출현이나 신성한 질서, 조화를
개념화하지 못한다.
기쁨과 황홀경의 초월
모든 제한하는 신념, 위치성, 의심,
집착들의 내맡김은
영적에너지(쿤달리니 에너지)의 유입을 허용하는데,
이는
헌신(측정수준 555)에
수반되는 것이다.
영적진실과
사랑에 대한 지속적 헌신은
저항의 해소를 허용한다.
초월하기 위해서는
모든 집착,
심지어는 자기와 사회가 책임으로 규정한 것조차
포기할 것이 요구된다.
그래서
관계, 위치, 직위, 사회적 역할은
결국 참나를 각성하거나
깨달음의 상태에 도달하려는
몰두에 넘겨진다.
망설이고 꺼려하는 헌신자는 의심에 매달리며 순진하게 '그렇지만 이건 어떻게 된거지?라고 묻는다. 해결책은 모든 '그렇지만'들과 신과 신성한 섭리에 내맡기는 것이다.
큰 이행은 또한
필요한 현실적 적응을 하고
남들이 필수적인 변화를 수용하도록 도움으로써
타인들에게
책임질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이 이행은
확신은 물론
상당한 용기와 인내심을 필요로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남아있는 의심, 집착,
죄책감 등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의식의 큰 도약이라는 결말은
좀처럼 진지한 가능성으로 고려되는 일이 없으며
대부분의 수행자들은
미리 경고받지않는다면
사전계획을 세워놓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러므로
진지한 제자들은
정보를 알아야 하고
또한 의식의 앞선 상태들을
인지할 수 있는
영적동맹이나 관계를 맺어야만 한다.
자기가
참나식(일식과 같이 자기가 참나에 의해 가려짐)으로 인해
줄어들면서
그러한 내적상태가
점차 우세해진다.
그에 따른
내외적 변화는
예상했던 것보다
더욱 중대하다는 사실이 판명된다.
점차로
높아지는 의식수준들의 출현은
새 안경을 낄때와 같은
적응기간을 요구하며
따라서
지남력의 변동으로 인해
세속적 기능이
주기적으로 손상될 수 있다.
이 재적응에서 현상들은
원인과 결과라는
평소의 추정된 전체와 지각을 거치는 대신
저절로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고 있음이 발견된다.
기쁨은
더이상 사람이 얻어내는 것이 아니며
어떤 작인이나
사적인 결정을 매개로 하지 않는
장이 가진 힘의 고유한 귀결이다.
또한
행위를 하는 자는
사실상 없다는 것이
점차로 밝혀지고,
사람은
카르마적 잠재성이
추정적이고 이원적인
인과율 너머에 있는
실상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부터
자율적으로 펼쳐지는 것을 목격한다.
그리하여
삶은
고유한 매력과 즐거움의
끝없고 연속적인 드러남이 되는데
이것은
처음에는 경이로워보인다.
그 다음에
기적적으로 보이는 것은
창조인 진화의 잠재성이
부단히 펼쳐지는 것일 뿐이라는 각성이 오는데,
이로써
주관적 시간경험은 녹아버리고
오직 있음에 대한 인식으로
대체된다.
이와 비슷하게
변화에 대한 지각은
잠재성의 실현이 나타남으로 인해
현실화되고 있는 것으로
창조의 진행의 점진적 출현으로
대체된다.
과거도 미래도 없는 것처럼
지금은 없으며,
과거나 현재, 미래는
패러다임 한계의 귀결인
전적으로 환상적인 맥락화라는 것이 이해된다.
모든 신념체계 및 위치성들의 내맡김과 더불어
창조의 펼쳐짐은
저절로 드러난다.
펼쳐지는 과정은
표상들이나 불확실성,
일시적 의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며
이러한 것은
믿음과 헌신에 내맡겨져야 하는데,
왜냐하면 거기에는
자문에 응해줄 수 있는
정말로 앞선
영적 스승이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하나의 진동 주파수로서
의식의 장자체속에
내재하는 인식이
출현하는 패러다임의 실상을 펼치고 드러내준다.
참나의 광휘로 말미암아
드러나는 광채들은
말이 없다.
세계는 그때
현상이라기 보다는
본질의 한 드러남이 된다.
자기현시는
인식을 통해
점차로 신성으로 인지되고 확인된다.
이 커다란 패러다임 전환은
예측될 수도 혹은
정말 상상될 수조차 없으며
그것의 시작은
때로 모호하게
신충격으로 묘사된다.
그 귀결은
심원한 외경인데
이로인해 마음은
신성의 현존속에서
침묵에 들고
600수준에서 사라진다.
이제부터 전부는
부단한 펼쳐짐으로
있는 그대로 일뿐이며,
전부는
시작도 끝도없고,
그때, 지금 혹은 미래와 같은
분리도 없는 것으로
그 자체를 드러낸다.
각성은 더이상
정신화, 생각의 귀결로 일어나거나
사적인 자기라는 작인을 통해 일어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사적자기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영적원리에 충실한 것은
큰 변형에 있어
필수조건인데,
그중
'믿음, 헌신, 내맡김'은
그러한 변형의
제일가는 양식이다.
그것은
일체의 신념체계의 내맡김을 요구하고,
모든 두려움은
단지 위치성과
그것의 지각에 대한 매달림에서 기인하는
환상이라는 이해를 요구할 뿐이다.
그러한 환상에는
익숙하고 관습적인
실상의 패러다임에 대한 충성과
그에 대한 믿음이 포함된다.
그 무엇도
사실상 에고가 지각한 대로는 아닌데,
왜냐하면
선형적 차원은
추정일뿐이고
비선형적 절대는
연쇄적 이해나 이해력보다는
저절로 드러나는
완전히 다른 원리들에 따라 작동하는
전혀 다른 패러다임이기 때문이다.
실상에서 존재는
그것의 의미이자
그것과 동일하다.
존재에는
주어, 술어나 동사가 없으며,
그 이해를 언어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가능한 최상의 진술은
'그 어떤 것의 의미는 그것의 존재이다'
라는 것이다.
정체가 그것의 의미이다. 모든 서술과 정의는 이원적 추상이자 정신작용임이 명백해지는데, 이원적 추상과 정신작용은 그러한 것의 원래 정의를 우회적으로 구체화한다.
진실은
전부임으로서의 그 존재로 말미암아
자율적으로 자명하다.
추정된 주어와 목적어의 이원적 분리라는 인공물이 없다면 전부를 둘러싸는 존재의 하나임이 바로 그 자체의 정의이자 의미이다. 그래서 고양이는 고양이임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고양이라는 것을 알고 따라서 그 자신의 실상에서 이원적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아는 자와
아는 대상은
하나이자 동일한 정체이다.
영적 황홀경과 기쁨의 초월은
무슨일이 있더라도
전부를 신에 내맡기려는
자발성에 달려있는데,
묘사가 불가능한
어떤 차원에 속해있는
황홀경의 절묘한 상태조차
내맡겨져야 한다.
그러한 상태자체가
이제는 유혹이며
깨달음의 상태로의 진화를 늦출 수 있다.
처음에는
그런 영광스러운 조건을
신에게 내맡기는데 대한
꺼림과 낙담이 있는데,
하지만
이 경이로움조차 또한
놓아야 한다는 인식이 솟아난다.
그 걸음을 떼어 놓아야 한다는
격렬한 고통과
그에 대한 망설임은
그러한 조건과 경이에 대한 집착이
부지불식간에 이미 생겨났다는 것을
드러내준다.
그 다음
몰두와 의도로 인해
이 또한 "오 주님 당신께" 내맡겨져야 한다는
확신이 든다.
그리고
그것을 내맡김과 함께
무한한 평화가 압도해 오는데,
이는
600수준으로
모든 이해나 묘사를 넘어서 있다.
그 상태에서는
신의 평화의 현실임이
저절로 드러난다.
첫댓글 붓다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은 드문일이다. 깨달음에 대해서 듣는 것은 더욱 드문 일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드문 것은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무조건적 사랑으로 갈 수 있을까요?
-삶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
-삶으로부터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
-존재하는 모든 것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
-존재하는 것을 변화시키려는 욕구를 놓아버리는 것
-세상은 있는 그대로 완벽하기 때문에,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것에는 어떠한 관심도 두지 않겠다고 하는 것.
깨달음에의 큰 이행은 또한 필요한 현실적 적응을 하고 남들이 필수적인 변화를 수용하도록 도움으로써 타인들에게 책임질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이 이행은 확신은 물론 상당한 용기와 인내심을 필요로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남아있는 의심, 집착, 죄책감 등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의식의 큰 도약이라는 결말은 좀처럼 진지한 가능성으로 고려되는 일이 없으며 대부분의 수행자들은 미리 경고받지않는다면 사전계획을 세워놓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러므로 진지한 제자들은 정보를 알아야 하고 또한 의식의 앞선 상태들을 인지할 수 있는 영적동맹이나 관계를 맺어야만 한다.
영적 동맹관계를 맺어아!!
기쁨의 초월
모든 제한하는 신념, 위치성, 의심, 집착들의 내맡김은 영적에너지(쿤달리니 에너지)의 유입을 허용하는데, 이는 헌신(측정수준 555)에 수반되는 것이다. 영적진실과 사랑에 대한 지속적 헌신은 저항의 해소를 허용한다. 초월하기 위해서는 모든 집착, 심지어는 자기와 사회가 책임으로 규정한 것조차 포기할 것이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