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그들은 이 태종대 언덕을 기억하리라
송도해안산책로, 송도해변, 태종대 지나는 절경 해안길
아침부터 더위가 기승이다. 모지포는 매미소리에 파묻혔다. 바람길을 가로막은 냉동창고에서 빠져나온 컨테이너들이 덜컹이며 도로를 질주한다. 인적 드문 모지포는 조선지대 몰지포(沒稚浦)로 기록된 작은 포구로, 앞바다는 수심이 얕고 배후산지는 장군반도가 병풍을 친 듯 두도 코앞까지 뻗어 있다.
장군반도는 장군산에서 지명이 유래한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부산포에서 대승을 거두는 과정에서 휘하 정운 장군이 전사하자 그를 기리기 위해 ‘장군산’이라 이름 하게 됐다.
감천항이 매립되기 전만 하더라도 모지포 일원의 바다는 각종 어류의 밭이었다. 뭍에서 문전옥답이라 부르듯 모지포 앞바다는 해안선과 맞물린 해저 지형이 만들어 내는 다양한 수중환경으로 인해 뛰어난 어장으로 알려졌다. 그래서인지 아주 오래전부터 이 바닷가에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 허나 지금은 각종 개발에 묻혀 겨우 명맥만 유지할 정도로 쇠락했다.
모지포 삼거리 산호집 아지매는 몇 안 되는 증인이다. 불행하게도 그녀는 매립 과정에서 집앞까지 출렁였던 바다에 대한 권리는 물론이고 자칫 업으로 먹고사는 가게마저 빼앗길 판이다. 혹이나 종점을 모지포로 잡는다면 막걸리 한잔 할 일이다.
모지포 삼거리에서 약 200m 차로를 따라 가면 혈청소가 있다. 국립수의과학검역원(동물검역소) 영남지원으로 일명 동물의 혈청을 검사하는 곳이다. 그래서 약칭 ‘혈청소’인데 그대로 고유명사화되었다.
암남공원 진입로는 혈청소 담벼락을 따라 이어지고 곰솔과 상수리나무 등의 교목이 들어서 우둑하니 그늘을 드리웠다. 모퉁이를 돌아서면 2002년 부산비엔날레 출품작인 ‘토다유스케’의 설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무엇을 말하는지 얼핏 보아 감 잡기 힘든데, 작품 옆에 작은 안내판이 있어 해석을 단다. 캔 깡통을 짓이기듯 자연석재가 원통 철재 가운데를 뭉개 놓은 그 작품은 현대문명에 대한 경고로 풀이된다.
송도해안산책로는 대부분 철재데크로 길 연결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큰 길을 따라 직진하지 말고 우측 오솔길을 따라 간다. 두도(頭島)까지의 오솔길은 평탄하게 이어지면서도 산자락을 따라 들고 남이 있어 걷는 맛이 좋다. 35번 초소를 지나자 암남공원의 위용이 드러난다. 남쪽을 향해 붉은 병풍처럼 치솟은 해식대가 시선을 압도한다. 해식대를 이루는 암석은 1억3,000만 년 전 형성된 옆줄무늬 퇴적암이다.
이윽고 두도를 조망하는 전망대다. 특별한 전망시설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냥 앞이 개방된 공간으로 조망이 일품이다. 감천만 입구 홍등대와 구평 쪽 백등대가 지척이고 때마침 자귀나무가 꽃을 피워 한 점 그림으로서 손색이 없다. 두도는 파도에 씻겨 곳곳에 해식동이 있다. 뭔가 숨겨진 보물이라도 있을 듯 한걸음에 건너 뛰어 밟아보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 ▲ 태종대 순환도로를 산책 중인 수녀들.
35번 초소를 거쳐 비탈을 오른다. 숨이 가쁘고, 여름 해는 금방 몸을 데운다. 땀이 비 오듯 흐를 즈음 길은 내리막으로 이어지며 수직으로 내려꽂히는 해안절벽의 풍광을 바람을 맞으며 즐기게 한다. 중간 중간 샛길이 있지만 이정표가 제시하는 대로 따라 가면 된다. 천선과 나무에 열매가 맺히기 시작하고 말나리와 원추리가 드문드문 피었다.
34번 초소를 지나면 음수대가 있어 목을 축이고 벤치에서 쉬어갈 수도 있다. 거기 유독 몸집이 굵은 소나무 두 그루가 있어 눈길이 간다. 최소 300년 이상 되어 보이는 소나무는 밑둥치가 몇 아름이나 되어 암남공원의 터줏대감임을 알 수 있다.
나무에게 말을 건다. 손바닥을 수피에 대고 맥박도 살핀다. 숱한 세월 모진 풍파 속에서도 건재한 소나무의 존재에 감사드리며 출렁다리를 건넌다. 장난기가 발동해 풀쩍풀쩍 뛰면서 따라오는 동행자를 놀리기도 한다. 그렇게 노닥거리며 걷다 보니 동도 너머 영도가 보이기 시작한다.
108계단을 내려 돌아서면 공원 입구로 연결된다. 1996년 이전만 하더라도 민간인은 출입이 금지된 구역으로 비교적 자연이 잘 보존되어 있어 해안 식생대가 뛰어난 편이다. 현재 이 길은 서구청이 자랑하는 볼레길로도 알려져 있다.
해안산책로 가는 길에 방파제 주차장으로 내려선다. 낚시꾼들로 만원이다. 고등어 철이나 학꽁치가 들 때면 그야말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신기하게 어떤 초보자라도 빈손으로 가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송도해안산책로는 대부분 철재데크로 길을 연결했다. 예전에는 이곳을 걸어서 다니리라곤 꿈도 꾸지 못했다. 배를 타고 들어와 고둥이며 해삼을 건져내었다. 이 바다가 매립되었더라면 이 호사를 어디서 누렸을까? 생각하면 끔찍한 일이다. 시민들의 끈질긴 저항과 반대로 백지화되긴 했지만,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 부산시는 송도와 영도 사이 남항에 220만 평의 인공섬을 건설하고자 했다. 예정대로 추진되었다면 이 바다에 기댄 수많은 삶들이 같이 묻혔을 뿐 아니라 일대의 무수한 유무형의 자원들조차 사라졌을 것이다. 서울에서 휴가를 내어 방문한 동행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한다.
다시 구름다리를 건넌다. 송도해안산책로는 구름다리 두 곳과 주변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 4~5곳을 두어, 걷는 재미와 경관을 즐기도록 했다. 산책로가 끝나는 지점에 암남어촌계가 있다. 암남포구는 송도해수욕장 끝머리 해녀촌과 같이 있다. 이 포구는 아침이 좋다. 새벽 조업을 끝내고 귀항하는 배들이 등대 사이 삿갓구름을 쓴 영도 봉래산을 뒤로하고 들어오는 광경은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그림이다. 산책로는 어른 허리 높이의 호안벽을 따라 해수욕장으로 이어지며 주변 해안을 조망하기에는 그만이다. 음수대와 발 씻는 곳이 갖추어진 화장실은 여행자 안내센터의 기능도 한다.
- ▲ 송도해안산책로는 편도 30분이면 풍경을 즐기며 완주할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즐겨 찾던 덕성관
송도해수욕장은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활처럼 굽은 해안의 양 끝에 귀신고래와 돌고래가 막 솟구쳐 오르는 찰나의 모습으로 멈추어 있다. 이 바다에 고래라니, 하긴 못 올 이유도 없다. 송도는 최고의 해수욕장으로서의 명성을 되찾기 위해 부단한 노력이 투입되고 있다.
어찌보면 송도는 한국 근대의 또 다른 현장이기도 하다. 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송도해수욕장은 한때 수질오염과 백사장 침식이 심해 사망선고를 받기도 했다. 1910년 일제의 강점이 본격화되고 일본인의 이주가 많아지면서 거류민들이 송도유원주식회사를 설립하면서 1913년 본격적인 개발이 이루어졌다. 2011년 현재 전국 350여 해수욕장이 개장한다고 보았을 때 송도는 국내 1호 공설해수욕장으로서의 지위를 가진다. 가장 호황기는 1960~1970년대로서 1964년 거북섬과 송림공원 사이 케이블카와 구름다리를 설치하는 한편 해상에는 다이빙대를 설치하고 나무보트를 운영하는 등, 한국 최고의 피서지이자 신혼여행지로 이름 높았다. 당시 송도해수욕장을 무대로 찍었던 영화만도 수십 편에 이른다. 이같은 명성은 1980년대를 고비로 쇠락을 거듭하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송도가 극적인 부활에 든 것은 2005년 이후다. 모래유실을 막기 위한 수중방파제(잠재)의 설치와 해안조경을 비롯한 정비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송도는 2008년 ‘전국 20대 우수해수욕장’으로 거듭났다. 현재 고등어 축제며 현인가요제를 비롯해 다양한 축제가 송도해수욕장을 무대로 펼쳐지고 있다. 해안도로 옆에는 모텔로 이름을 바꾸긴 했으나 1940년대 첫 선을 보인 덕성관(德成館)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모텔은 1960년 부산군수기지사령부 초대사령관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 즐겨 찾던 곳이다.
문득 혁명과 쿠데타의 차이점을 생각하며 영도로 향한다. 해안에서 보아 서편 육지 쪽은 장애물이 많아 항해해선 안 된다는 뜻의 ‘거북섬동방위표지’가 파도에 섰다. 2송도라 부르는 영도 영선동 해안과 영도의 주산인 봉래산과 중리산, 태종산이 해안선을 이루고 대형선박들이 쉬고 있다.
송림공원을 돌아 방파제 길을 따라 5분 정도 가면 남항대교가 있다. 암남동과 영선동을 연결하는 1.9km 남항대교는 보행로가 따로 있어 많은 사람들이 이용한다. 다리 입구는 왕복6차로의 상판 교각이 만들어 낸 그늘이 크다. 나들이 나온 인근 주민들이 여름 한낮을 즐기고 있다. 바람 많고 그늘 좋아 여름 피서지로는 최고다.
남항대교에서 바라보는 파노라마는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풍광을 선사한다. 바다 가운데 높은 곳에서 천마산과 구덕산-엄광산-구봉산-수정산으로 이어지는 원경의 스카이라인과 남항의 홍등대와 백등대 안쪽 원도심과 자갈치 인근의 근경은 남항대교가 제공하는 팁이다. 바라보면 정중앙 자갈치에서 거대한 갈매기 두 마리가 비상하고 다리 아래로는 흰 물살을 일으키며 고깃배가 빠져 나가는 중이다. 가슴이 트이는 순간이다. 그때 바람이 모자를 낚아챈다.
- ▲ 1 거북섬동방위표지판 뒤 암남공원과 동도가 모자지간처럼 그렇게 세월을 같이하고 있다. 2 중리해안 끝에 있는 해녀촌. 대부분 제주 해녀 출신이다. 3 구름다리 위에서의 즐거운 한때. 4 한가로운 송도해수욕장 너머 영도 봉래산에 삿갓구름이 드리웠다.
중리해녀촌에서 해산물 안주 삼아 한 잔
반도보라아파트를 돌아서면 절영로 입구다. 카페 타이타닉이 수문장 역할을 한다. 산책로는 우레탄을 깔아놓아 푹신푹신하다. 지척에 파도가 몰려와 자갈을 자갈자갈 씹고 있다. 좌측 가파른 언덕에 한국의 산토리니로 회자되는 영선동 산동네가 있다. 무지개 색상으로 색을 입힌 피아노계단을 오르면 백련사 쉼터가 전망대 역할을 하고 이어진 골목을 따라 마을을 돌아볼 수 있다. 내처 걸으면 절영로 아래 파도광장으로부터 길이 열린다. 중리해안까지 약 3km 머리 나무섬과 남북형제섬이 수평선에 기대어 떠 있다.
비둘기낭을 지나면 돌탑과 출렁다리, 무지개분수 등 아기자기한 볼거리가 널려 있다. 7호 광장을 통과해 중리해안으로 가기 위해 경사도가 높은 철제 데크 계단을 오른다. 내내 평탄한 길을 가다 태평양전망대로 오르는 길은 다소 숨이 가쁘다. 절영해안길은 IMF(국제구제금융) 외환위기 사태 직후 공공근로사업으로 진행됐다. 특히 젊은이들의 참여가 많았다는 점에서 팍팍한 세상살이를 읽는다.
10년 전 산책로 공공사업에 참여했던 젊은이들은 나중에 걷는 사람을 위해 심심하지 말라고 길바닥에 그들의 희망을 새겨 넣기도 했다. 꽃이며, 돌고래, 새들이 길 위에서 날아올랐다. 그도 재미라, 뚜벅이들은 하나하나 디카에 담으며 희망을 나눈다.
7호 광장은 1975년에 만들었다 하여 75호 광장인데 5자를 빼버리고 행운을 의미하는 차원에서 7자만 넣어 부른다. 기슭에 ‘사자정’이란 누각도 있어 이곳에서의 일출이나 월출을 즐기는 사람이 많다. 중리어촌계까지는 약 1km 남짓. 이곳에 시집 온 지 얼추 60년이 넘었다는 할머니를 만나 옛 이야기 전해 듣는다. 한마디로 어려운 삶이었다. 그럼에도 7남매 시집장가 다 보낸 세월이라고 했다. 바다만이 한결같다고 하셨든가.
중리해녀촌이 분주하다. 허접한 평상에는 삼삼오오 해녀들이 따 올린 소라, 해삼 등의 해산물을 안주 삼아 맛을 찾는 이들이 제법 있다. 태종대에서 남항대교 구간 해녀들이 운영하는 노상주점은 중리를 비롯해 4곳 정도 있다. 제주 해녀들이 터를 일구었고 지금은 그들의 딸, 며느리가 대를 잇고 있다.
중리에서 가지까지는 약 3km, 중리산 작전도로와 산길을 통해 이동한다. 해녀촌을 벗어난 초입에 기묘한 형상의 장승 하나가 수문장처럼 서 있다. 대장군은 출타 중인지 지하여장군 하나가 큰 대자로 팔 다리를 벌린 채 서 있다.
산길을 비스듬히 오르다 21번 초소에서 작전도로를 따라 산자락을 휘감아 돈다. 남외항에 정박 중인 크고 작은 선박들이 평화롭다. 걸어왔던 송도며 암남공원이 눈에 들어온다.
체육공원을 돌면 태종산을 배경으로 감지해안이 펼쳐진다. 몽돌해안 절반을 포장조개구이집들이 차지했다. 가족단위 나들이객이 주를 이룬다. 어른들이 술 한잔에 감지해변의 휴식을 즐기는 한편 아이들은 너나없이 물수제비를 뜨고 있다. 첨벙첨벙 물 위를 뛰어가는 납작한 돌 하나, 은비늘로 파닥이는 수평선에 가라앉는다.
원래 감지해변은 동삼동 하리의 아랫서발에 해당하는 곳으로 절영도의 팔준마(八駿馬)가 물을 먹었다는 감연(甘淵), 감지(甘池) 또는 감정(甘井)에서 유래한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말들의 모습이 간간이 보였다. 하마 세월이 또 흘러 그 말들의 울음소리도 지워졌다.
- ▲ 1 감지해변으로 가는 중리산 들머리 지하여장군이 기묘하다. 2 모지포에서 암남공원 들머리에 있는 토다 유스케의 부산비엔날레 출품작. 3 암남포구 옆 가수 현인 동상이 서 있다. 그는 갔지만 그 시절의 노래는 계속 흐른다. 4 남항대교 위에서의 바라본 자갈치와 부산원도심.
시원스레 펼쳐진 조망은 해방감 그 자체
태종대 입구로 가는 고개를 오르다 곤포의 집과 태종대관리사무소로 연결된 숲길을 빠져나오면 순환도로가 시작된다. 1974년 개설된 순환도로를 따라 워밍업하듯 걷다 태종사를 지나 2호 매점에 이르면 숨어 있던 남쪽바다의 절경이 드러난다. 태종산을 휘어돌 때마다 다가서는 풍광은 보는 이를 압도한다. 비탈에 선 해송군락 아래 해안절벽으로 몰려와 부서지는 파도의 흰 포말이 연기처럼 피어난다. 시원스레 펼쳐진 조망은 해방감 그 자체다.
일찍이 삼국을 통일한 태종무열왕이 활을 쏘며 놀다 간 곳이라 하여 ‘태종대’라 명명된 이곳은 그 오래된 명승에 걸맞게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명도에 답하고 있다. 늘 바다를 접하는 부산사람조차도 새삼 감탄해 마지않는다. 하물며 서울을 비롯한 내륙지방에서 온 방문자들은 예술이라며 난리다.
입구로부터 약 1.8km에 이르면 등대 자갈마당으로 향하는 계단이 있고 1906년 대한제국 시절 세운 등대가 하얗게 빛난다. 등대에서 남쪽으로 절벽 비탈로를 따라 10m쯤 가면 억겁의 세월을 비바람에 침식되어 낮아진 넓은 자리가 있으니, 태종대인 것이다. 건너편이 신선대로 바위 하나 우뚝 솟아 있다. 왜국에 잡혀간 지아비를 부인이 신선대에서 먼 바다를 바라보며 오랜 날을 애타게 기다리다가 그대로 몸이 굳어 바위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는 망부석이다. 그 망부석 아래 절벽 지층에 새겨진 무늬가 마치 몽유도원도 같다. 난해한 그림이지만 절벽의 미학이 이토록 빛나는 곳이 있을까. 파도가 용솟음친다. 신선바위 벼랑 오솔길에는 7,000만~6,500만 년 전 살았던 오리부리공룡으로 추정되는 발자국 화석이 있어 자연사의 산현장이기도 하다.
태종대 입구로 향하기 위해 왔던 길을 되돌아서 3분 거리에 있는 전망대에서 주전자섬을 본다. 세 가지 금기의 섬이다. 불을 피워서도, 용변을 봐서도, 남녀의 사랑행위도 해서는 안 된다. 이를 어긴 사람은 급살을 맞았다고 하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전해진다. 요즘은 전망대에서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서 주전자섬을 집어들 듯 디카에 담아보는 사진 찍기가 유행이다.
전망대 입구에는 1976년에 세운 모자상이 있다. 전망대는 본래 자살바위라 불리던 곳으로, 1950~1970년대 초 영도다리에서 속출하던 자살자들을 경찰이 단속하자 자살자들은 이곳을 최후 장소로 선택했는데 그 수가 급증하자 이를 방지하기 위해 모자상을 세운 것이다. 전망대 이전의 시설은 구명사(求命寺)란 절이었지만 공원화 계획에 의해 지금의 전망대로부터 1km 지점 골짜기로 이전했다.
전망대 난간에서 내려다 본 200m 높이의 까마득한 절벽 아래는 세상을 비관해 목숨을 던진 사람들의 안타까운 사연들이 파도처럼 일렁인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자살자들의 마음을 돌려 보기 위해 세웠다는 모자상의 건립에도 불구하고 자살자들은 한동안 더 늘어났다는 것인데, 바다는 그 사연에 침묵하고 있을 뿐이다.
최근 전망대 근처에 멸종위기종인 매가 깃들었다. 킷 킷 하고 우는 특유의 날카로운 울음이 반갑다. 태종대에는 이동 중인 새들의 중간 휴식처로서 근래 들어 이를 관찰하는 탐조객들의 발걸음도 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태종대는 난대성활엽수인 생달나무, 후박나무, 동백나무, 참식나무, 다정큼나무, 사스레피나무 등 200여 종의 수목이 우거져 이들의 먹이 자원이 풍부하다 보니 생물학적 관점에서도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는 것이다.
전망대로부터 1.5km 지점 바다를 향해 우측은 곤포의 집이고 좌측은 태원 자갈마당인 거기에 비석 여섯 개가 있다. 비탈 외진 곳에 서 있는 비석의 주인공들은 북양 어장 개척길에 폭풍을 만나 침몰한 어선의 선원들이다. 아마도 그들은 이 언덕을 기억하리라. 항해의 시작점인 남항을 빠져나와 난바다로 나아갈 때 선미에서 멀어지던 등대와 손 흔들며 빛나던 태종대 언덕을 북양의 어느 심해에서 꿈처럼 간직하고 있으리라.
INFORMATION
거리 및 소요시간 17.8㎞, 8시간
교통 시작점인 모지포 암남공원은 시내버스7, 9-1, 71번을, 종료점에서는 시내버스 101번을 이용하면 된다.
개요 천혜의 자연림과 해안절경을 자랑하는 암남공원을 출발하면 데크길, 구름다리 등으로 연결된 송도해안산책로를 따라 걷게 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해수욕장인 송도해수욕장을 지나 최근 개통된 남항대교를 통과하게 되는데 남항대교에서의 조망이 뛰어나다. 그림자조차 끊어버릴 정도로 빠르다는 절영마(絶影馬)를 타는 기분으로 절영 해안 산책로를 지나면 중리산과 태종대가 연달아 마중 나온다. 태종대는 한반도의 모든 해안 비경이 몰려 있다고 할 만큼 기기묘묘하다. 영도등대 아래 높이 100m가 넘는 수직단애 위에 절묘하게 놓인 산책길이 백미. 간식은 삶은 고구마가 제격이다. 조선 영조 때 일본에 통신사로 갔던 조엄 선생이 대마도에서 고구마를 가져와 처음으로 심은 곳이 영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