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셀러를 통해 본 사회 문화사
---『아주 특별한 책들의 이력서』(릭 게코스키, 차익종 옮김, 르네상스)
나는 유신말기에 대학을 다녔다. 그 당시 시론을 강의한 교수는 절제된 감정을 표현한 예로 정지용의 시 「유리창」을 들었다. 아들의 죽음을 두고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 외로운 황홀한 심사”라 표현한 이 시의 감동이 얼마나 컸던지 아직도 그 구절은 잊히지 않는다. 시의 리듬을 강의할 때는 김지하의 장시 『오적』을 예로 들었지만 당시 그 교수는 월북시인 정지용이나 ‘저항시인’ 김지하란 이름은 절대로 말하지 않았다. 혹 문제가 되면 빨갱이라는 비판을 받아 교수 자리를 떠나야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억압된 현실을 이야기해주려는 노력을 한시도 아끼지 않았다.
서지학 전공자인 다른 교수는 4년 내내 수업시간에 책만 읽어댔다. 그는 책을 읽어가다가 자기가 아는 이름이 나오면 그 사람의 책을 얼마나 어렵게 구했는지, 그 책을 어느 학자가 연구용으로 빌려달라고 했는데 절대로 보여주지 않았다는 등의 이야기만 해댔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이가 이두를 최초로 해독한 일본인 학자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이다. 그의 이름을 한자음으로 읽어 말했던 터라 소창진평이란 이름 또한 30년이 지난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그래서 내게는 서지학이란 학문이 절대로 달갑지 않았다.
릭 게코스키의 『아주 특별한 책들의 이력서』를 읽으면서 나는 어이없게도 정말로 한심했던 대학시절이 떠올랐다. 그 시절 나는 수업에 만족할 수 없어 게걸스럽게 책을 읽어댔다. 책을 읽는 것이 마치 무슨 저항이라도 되는 것처럼. 릭 게코스키 또한 우리식으로 말하면 서지학자인 셈이다. 유명저자의 책 초판을 구해서 판매하면서 책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으니 말이다.
어쩌면 이 책은 책 장사꾼에 불과한 이가 성공담을 늘어놓는 자전적 이야기에 불과할 수도 있을 것인데도 내게는 사회•윤리주의 비평, 심리주의 비평, 역사•전기적 비평 등이 어우러진 탁월한 문학비평으로 읽혔다. 책 내용은 촌철살인적인 평과 간단한 줄거리가 소개될 뿐이지만 문학작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수많은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게다가 이 책은 베스트셀러를 통해 들여다본 제대로 된 사회사이자 문화사이기도 하다.
책 뒤표지에는 저자를 “희귀본 거래라는 ‘투기’의 세계와 문학평론이라는 ‘인문’의 세계를 행복하게 결합시킨 인물”로 소개하는 글이 실려 있다. 책은 BBC 라디오 프로그램을 바탕으로 한 것이어서 그런지 단 한순간도 긴장감을 놓을 수 없는 추리소설처럼 정말로 흥미진진하다. 한국 출판시장에서 결코 실패하지 않는 일종의 ‘출세담’(또는 ‘성공담’)과 닮아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희귀본을 구해 판매하는 이야기는 그냥 이야기를 끌어가는 뼈대로 도입되었을 뿐 이만큼 문학작품들을 제대로 설명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나는 언젠가 「밀리언셀러를 만드는 8가지 법칙」이란 글을 쓴 적이 있다. 8가지 법칙은 밀리언셀러는 임자가 따로 있다, 목숨을 걸고 달려드는 사람이 있어야 성공한다, 밀리언셀러는 때를 만나야 한다, 밀리언셀러는 제목 싸움, 초자가 대박을 만든다, 밀리언셀러는 도와주는 사람이 따로 있다, 밀리언셀러는 유행어를 낳는다, 밀리언셀러를 펴내면 망하기 쉽다 등이다. 그런데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책들은 모두 한때 베스트셀러였지만 지금은 당당하게 고전의 반열에 오른 책들이다. 이 책들 또한 이런 법칙에 정말로 딱 맞아 떨어졌다.
출판업자에게 ‘대박’을 가져다 준 책들은 한결같이 여러 출판사를 전전한 기구한 운명을 지니고 있다. 가장 짧은 기간에 가장 많이 팔린 조앤 K. 롤링의 『해리포터』 시리즈는 펭귄이나 하퍼콜린스 같은 유명출판사 등 열두 군데 출판사로부터 퇴짜를 맞았다. 아동성애의 내면세계를 동정적으로 그린 블라디미르 노보코프의 『롤리타』는 다섯 출판사로부터 줄줄이 거절당했는데 어느 출판업자로부터는 “앞으로 천 년 동안 돌덩이에 눌러둬야 한다.”는 악평을 받기도 했다.
나중에 노벨문학상 수상작이 된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은 무려 스물두 군데 출판사로부터 연속해서 퇴짜를 맞았다. 이 책을 펴낸 출판사의 첫 검토자는 “허황되고 지루한 판타지. 별 볼일 없고 따분함. 요령부득”이란 가혹한 평가를 내렸지만 눈 밝은 젊은 편집자의 기를 꺾지 않으려는 출판사 대표의 아량 때문에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소개되는 20권의 문학작품 거의 모두가 이런 기구한 운명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다면 책에 실린 문학작품들이 그런 운명을 지닐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대부분 그 당시 시대정서와 맞아떨어지지 않는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남보다 반 발짝 앞서가는 ‘새로운 감성’ 때문이다. 집단농장화, 숙청, 강제 노동수용소 등 1,500만 명의 인민을 학살한 소비에트 공산주의의 폭정을 꼬집은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은 사회주의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보다 우월하다는 인식을 가진 1930년대 영국 사회주의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외설’이라는 이유로 미국 세관에 압수당한 적이 있는 제임스 조이스의 『오딧세이』, 동성애를 다뤄 작가를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아동성애를 다룬 『롤리타』 등은 시대정서에 앞선 감성 때문에 고난을 받았다.
술과 마약과 섹스에 절어 사는 비트세대로 명명된 젊은 세대의 자아 발견 여정을 그린 잭 케루액의 『길 위에서』도 가는 곳마다 박대를 받았다. 무슬림 예언자 아내들에 관한 추잡한 꿈을 담은 대표적인 마술적 리얼리즘의 소설 『악마의 시』를 펴낸 살만 루시디는 어떤가? 그의 사생활은 처절하게 파괴되었으며 책을 펴낸 출판사는 폭탄 테러 공격을 받았고 일본어 번역자는 살해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 소설들은 결국 독자들의 열렬한 사랑 때문에 모두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지루한 ‘동어반복’으로 독자에게 외면 받는 한국문학을 주례사 비평으로 칭송해대는 사람들이 꼭 되새겨 보아야 할 대목이다.
결정적으로 도움을 준 사람이 없었다면 그 기구한 운명은 결코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존 케네디 툴의 『바보들의 연합』은 출판해주려는 출판사를 찾지 못해 낙담한 작가가 자살한 다음, 작가 어머니의 집요한 강요로 마지못해 읽고서는 책의 가치를 찾아낸 교수이자 연작 장편 베스트셀러 저자였던 워커 퍼시의 안목이 아니었다면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나중에 형식과 내용의 완벽한 결합, 즉 급진적인 현대시의 목소리가 모더니즘적 회화의 옷을 입고 선을 보인 결과물이라는 평가를 받은 T.S. 엘리엇의 『시들Poems』은 신경쇠약에 시달리던 버지니아 울프가 남편이 차려준 출판사에서 수제 제본으로 펴낸 책이었다. 문학계에 가장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켜 수많은 출판업자로부터 외면받았을 뿐만 아니라 출간과 동시에 영국과 미국에서 판매 금지되었던 『율리시즈』는 책을 출판한 경험이 전혀 없었지만 야심만만한 알부자였던 서점 경영자 실비아 비치의 용단 때문에 절체절명의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이 책이 일깨워주는 또 다른 중요한 진실은 책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한 서평의 힘이다. 사실 이 책에 소개된 20권의 책 모두 안목 있는 서평자의 도움이 없었으면 빛을 보기 어려웠음을 명백하게 증명한다. 『길 위에서』의 꼭지 제목은 아예 ‘서평 한 꼭지의 힘’이다. 작품의 진가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 써놓고도 6년 동안이나 출판할 곳을 찾지 못했던 이 소설은 길버트 밀스턴이 쓴 서평이 <뉴욕타임스>에 게재되자마자 대단한 반응이 나타났다. 독자들은 너나없이 허겁지겁 책을 사려고 서점으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보수적인 고정 서평자가 휴가를 가고 없을 때 길버트 밀스턴이 대타로 서평을 쓸 수 있었다는 것도 대단한 행운이었다.
과도한 할인과 경품으로 점철한 마케팅 때문에 책의 가치가 한없이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 우리 현실이 서러워서였을까? 이 책을 보면서 정말 부러웠던 것은 독서문화가 수집문화로 정착된 서구문화였다. 우리도 초판본이 높은 가격에 거래되는 경우가 없지 않지만, 작가 서명이 들어간 초판본을 수억 원대의 높은 가격에 사고파는 수준은 아니다. 사실 그런 문화도 영문학 황금기를 제대로 공부한 저자처럼 해박한 지식과 통찰력, 뛰어난 감각과 능수능란한 글쓰기의 소유자가 이끌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과도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사람이 이 책을 읽는다면 누구나 한 순간에 기분이 좋아질 것이다. 감히 책 애호가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서평문화> 2008년 봄호
첫댓글 도서관이랑 친구 해야 겠네요
여름 방학때 ....
감사 합니다
목록을 정했는데.....
수정하고 선택 폭이 늘어서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