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 라싸에서 반중국 봉기 발발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1959년 3월 31일 달라이 라마의 티베트 정부가 결국 인도로 망명하게 된다. 1959. 3. 10 티베트 창포(브라마푸트라) 강 기슭의 스투파 | 1959년 3월 10일 티베트 라싸[拉薩]에 있는 달라이 라마의 여름궁인 노불링카 주변에서 중국인민해방군으로부터 달라이 라마를 보호하기 위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이 시위는 곧 중국의 티베트 점령에 맞서 독립을 요구하는 대규모 봉기로 전개되었고 이에 폭력사태를 우려한 달라이 라마는 군중들에게 해산할 것을 촉구하고 중국에는 폭력진압을 자제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진압이 불가피함을 깨달은 달라이 라마는 3월 17일 저녁 라싸를 떠나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인도로 망명했고 중국인민해방군은 시위대를 무력진압했다. 이어 3월 28일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는 티베트 정부 해체를 발표했고, 달라이 라마는 즉각적으로 중국의 티베트 지배를 부인하는 성명을 내놓았다. 이 봉기를 진압한 후 중국은 티베트 사회를 강제로 개조하려 했다. 귀족과 사찰의 재산을 몰수했으며, 인민공사 방식을 도입했고, 티베트 불교에서 거행하는 공공 집회를 완전히 통제했다. 이 사건 직후 인도에 세워진 티베트 망명정부는 독립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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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터넷 링크 [한글 사이트] 티베트 인권·독립협회는 티베트 독립운동의 연대기를 담은 티베트 근대 독립항쟁 일지·연표와 티베트 망명정부가 작성한중국의 무력 침공 당시(1949∼79) 티베트인 사망자 통계, 1959년 라싸 봉기와 달라이 라마의 불교철학과의 관계를 다룬 위스콘신대학교 종교철학과 Jose Ignasio Cabezon 교수의 글 티베트의 독립 이끄는 정치 종교 지도자 달라이 라마 등 다양한 정보를 티베트 관련 국내 서적목록과 함께 제공한다. 경남대학교 유장근 교수는 티베트 독립운동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 사이의 관계와 견해를 논한 글 미국과 중국의 티베트 논의를 보면서를 소개한다. [영어 사이트] 티베트 망명정부는 티베트인들의 기본적인 인권을 촉구하는 1959년 국제연합 총회의 결의안 United Nations General Assembly - Resolution 1353 (XIV)을 비롯한 국제 사회의 각종 결의안, 중국의 티베트 점령 과정을 담은 Invasion and Illegal Annexation of Tibet : 1949∼51, 3월 10일 봉기 과정을 담은 National Uprising 등 티베트 독립운동에 대한 상세한 정보와 최신 뉴스를 제공한다. Tibet Dossier는 중국의 티베트 점령 이후 지금까지 각종 기록을 제공한다. 워싱턴에 있는티베트를 위한 국제 캠페인(International Campaign for Tibet:ICT)은 1949년 중국의 티베트 침공 이전의 티베트 역사와침공 이후의 역사, 망명정부 현황 등을 소개한다. 그밖에 티베트 독립 캠페인은 티베트 역사 연보, 1987년 달라이 라마가 미국 의회에서 연설한 5개 평화안을 비롯해 1992년 중화인민공화국이 발간한 <중국백서> 중 티베트 관련 내용을 소개한다. Copyright ⓒ Encyclopaedia Britannica, Inc. All Rights Reserved. 1922.3.10 비폭력 독립운동 전개하다 경찰에 체포되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인물은 누구인가?” 라는 설문조사를 한다면, 간디가 1위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인도인의 숫자가 워낙 많아서만은 아니다. 그는 누구도 생각하기 힘든 특별한 방법으로 투쟁한 투사이자, 무소유를 실천한 정치지도자였으며, 가장 현실적인 이상주의자였다. 그리고 종교인보다도 더 종교적인 세속인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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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목적이요 비폭력은 수단으로 생각한 인류의 위대한 영혼
타고르(오른쪽), 앤드루와 함께 한 간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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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세기의 가장 위대한 인물이 경찰에 체포된다는 것은 참 이상한 일 아닌가. 그가 도대체 어떤 범죄를 저지를 수 있었을까? 1922년 3월 10일 밤 10시 30분, 경찰차 한 대가 마하트마 간디가 머무르고 있는 사바르마티의 아슈람(수행자들의 거처)에 도착했다. 한 경찰관이 차에서 내려 간디가 있는 방갈로로 걸어왔다. “선생님을 구속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준비되는 대로 동행해주십시오.” 경찰이 자신을 체포하러 왔는데도, 간디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간디는 아슈람 식구들을 모아놓고 신에게 찬송과 기도를 올렸다. 간디는 폭력을 쓰지 않는 투쟁의 어려움을 실감하고 있었다. 감옥에 가는 것이야 추호도 두렵지 않았다. 그가 꿈꾸는 것은 정당한 방법으로 국민과 함께 ‘진실’을 구현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진실의 완전한 비전은 비폭력의 완전한 실현 이후에야 나타난다.” 그는 당당하게 경찰차를 향해 걸어갔고, 사바르마티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그가 가지고 간 것은 담요 두 장과 여분의 허리감개 한 장, 그리고 힌두 경전 <바가바드 기타>와 몇 권의 책이 전부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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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 앞에서 얘기하는 것도 두려워한 겁쟁이 소년, 열세 살에 혼인하다 간디 집안은 상인 계급에 속했지만, 간디의 증조부부터는 지역의 유지로서 지방 왕국의 수상으로 활동했다. 간디는 1869년 10월 2일 포르반다르에서 태어났다. 당시 인도의 거의 전역이 영국의 식민지가 되어 있었고, 특히 간디가 태어난 지역은 이미 오래전에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포르반다르는 오늘날의 구자라트 주에 해당하는 인도 서부에 있는 해안 도시이다. 간디의 본명은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였다.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의 마하트마는 인도의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가 부른 이름으로, 나중에 위대한 스승에 대한 전 국민의 호칭이 되었다. 위대한 인물들은 대체로 어린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간디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지극히 평범하다 못해 부족하기까지 했다. 학교에 들어간 간디는 구구단을 외는 것이 힘들었고, 남들 앞에서 얘기하는 것을 어려워했다. 간디가 특별한 인물이 될 조짐을 보인 사건이 있기는 했다. 영국인 장학관이 교육 검열을 나왔을 때였다. 받아쓰기 시험을 보는데, 간디가 ‘솥(kettle)’이라는 단어의 철자를 틀리게 쓰는 것이었다. 교사가 이를 보고 옆 친구의 석판을 보고 적으라고 눈치를 주었으나, 간디는 끝내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중에 교사가 나무랐지만, 간디는 정상적이지 않은 방법을 배울 수는 없었다고 고백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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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읽은 책 중에 간디에게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슈라바나라는 전설적인 효자에 대한 희곡이었다. 슈라바나가 눈먼 부모를 멜빵으로 업고 순례를 떠나는 것을 보고 간디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연극 <하리슈찬드라>는 간디에게 중요한 원칙을 제공한 작품이었다. 신들이 하리슈찬드라 왕의 진실을 시험하기 위해 기부금을 요청하자, 왕이 자신의 왕국을 포함한 모든 것을 내주었다는 이야기였다. 모든 것을 잃고 화장터에서 일하고 있는 왕에게 옛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왕비가 아들의 시체를 화장하러 왔다. 왕이 몰라보자 왕비가 “바로 당신의 아들입니다”라고 말하자, 모든 것이 원상태로 돌아갔다. 여기서 간디는 진실(진리)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함을 배웠다. 간디는 당시 조혼 풍습에 따라 열세 살에 카스투르바이 마칸지와 혼인했다. 어린 시절에 혼인하고 보니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으나 차츰 그는 정욕에 집착하게 되었다. 학교에서도 아내를 생각했고, 잠깐 떨어져 있는 것도 견딜 수 없었다. 그러다가 간디에게 평생 양심의 가책을 준 일이 생겼다. 간디는 병석에 누운 아버지를 열심히 간호했는데, 어느 날 밤늦게 삼촌이 교대해주러 왔다. 아내를 보고 싶은 간디는 곧장 침실로 가서 아내를 깨웠는데, 밖에서 하인이 불렀다. “아버님께서 매우 위독하십니다.” 간디가 얼른 나가서 무슨 일이냐고 되물으니, 하인은 아버지가 운명했다고 말했다. 간디는 정욕 때문에 아버지의 임종을 보지 못했던 것을 평생 수치스럽게 생각하게 되었고, 그것이 평생 성적 욕망을 멀리하는 계기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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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내 카스트루바이와 함께(19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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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유학을 통해 변호사가 되었으나, 편한 길을 택하지 않아 간디의 생애는 크게 네 단계로 나눌 수 있다. 1889년까지의 인도에서의 어린 시절, 1891년 귀국할 때까지의 영국 유학 시절, 1893년부터 1914년(45세) 영구 귀국할 때까지의 남아프리카 시절, 그 이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인도에서 비폭력 독립운동을 펼치던 시절 등이 그것이다. 이 네 시기 중 첫 번째와 두 번째가 진실을 탐구한 단계라면, 세 번째와 네 번째는 진실을 탐구하면서도 동시에 관철하기 위해 싸운 단계였다. 간디는 자신의 자서전 부제를 ‘나의 진실탐구 이야기’(The Story of My Experiments with Truth)라고 했다. 이 제목을 함석헌 선생은 ‘나의 진리실험 이야기’로 번역했다. 이는 간디가 일찌감치 정답을 정해놓고 살아간 것이 아니라 진실 또는 진리를 탐구하면서 살았음을 말해준다. 그런 의미에서 간디의 전 생애는 끊임없는 자기 계발의 역사였다. 자기 계발이라고 하니, 마치 성공하기 위한 처세술을 말하는 것 같지만, 간디에게 그것은 진리를 찾는 일이었다. 어린 시절에 읽은 구자라트의 교훈시는 삶의 중요한 원리가 되었다. “물 한 잔을 훌륭한 식사로 갚고/정다운 인사를 열렬한 절로 갚고/동전 한 닢을 황금으로 갚고/목숨을 건져주면 목숨을 아끼지 마라./모든 말과 행동을 그렇게 존중하고/아무리 작은 봉사도 열 배로 갚으라./그러나 참된 성자는 모든 사람을 하나로 알아/악을 선으로 즐겁게 갚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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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유학 시절의 간디(18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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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는 서사시 <라마야나>와 <바가바드 기타>,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의 <천국은 네 마음에 있다>와 존 러스킨의 <이 마지막 사람에게도> 등이 중요한 스승이었다. 예를 들면 톨스토이의 책에서 “악은 악으로 갚지 말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보고 비폭력을 새삼 확인했고, <바가바드 기타>에서 크리슈나가 아르주나에게 “행위의 결과를 보지 말고 오직 의무를 생각하라”는 것을 보고 실천의 원칙을 배웠다. 그는 잘못한 것이 있으면 철저히 반성함으로써 진실에 다가가고자 했다. 처음부터 완벽한 인간이었거나 뛰어난 인간이어서 위인이 된 것이 아니라 부단한 노력을 통해 훌륭한 인간이 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견디기 힘든 일이 많았지만, 신(진리)에 대한 굳건한 믿음으로 이길 수 있었다. 간디는 훗날 이렇게 말했다. “진리는 신이다. 신을 발견하는 길은 비폭력이다. 분노와 두려움과 거짓을 버려야 한다. 당신 자신을 버려야 한다. 정신이 정화되면, 당신은 힘을 갖게 된다. 그것은 당신 자신의 힘이 아니다. 그것은 신의 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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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에서 역무원과 경찰관에게 쫓겨난 후 민권운동 전개하다 간디가 사티아그라하(간디의 투쟁방식을 표현한 조어), 즉 진실관철투쟁을 전개한 데는 특별한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1893년 압둘라 회사의 초청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에 갔을 때였다. 간디는 압둘라가 끊어준 일등칸 표를 갖고 기차에 올랐다. 한 승객이 간디를 발견하고는 역무원을 불렀다. 역무원은 간디에게 짐칸으로 옮기라고 했으나, 간디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차표를 보여주었지만 그들은 코웃음을 치더니 경찰관을 불렀다. 경찰관은 간디를 기차 밖으로 끌어내고는 짐도 밖으로 던져버렸다. 이런 일은 간디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남아프리카에 사는 인도인들, 아니 유색인 전부에게 해당되는 것이었다. 그는 남아프리카에 사는 인도인들의 인권을 위해 싸우기 시작했다. 이듬해에는 본국의 인도국민회의(1885년 창립)를 염두에 둔 나탈인도국민회의를 조직하여 본격적으로 진실관철투쟁을 전개하게 된다. 대중의 열화와 같은 지지를 받은 간디인 만큼 우리는 그가 대단한 화술을 가졌으리라 짐작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1895년 잠시 귀국한 간디는 뭄바이 집회에서 첫 대중연설을 했다. 수줍음을 많이 탄 데다가 매부를 간호하느라 지쳤던 그의 목소리는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할 수 없이 다른 사람이 올라와 대독하자 청중들은 그 내용에 크게 감동받았다. 간디의 힘은 유창한 언변이나 화려한 외모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직 ‘진실(진리)’을 향한 열망에 있었다. 간디는 이 진실의 힘으로 차츰 세계인의 주목을 끌었다. 1914년 간디는 남아프리카에서 정부와 협상한 후 진실관철투쟁을 중지하게 된다. 그때까지 그는 벌써 세 차례나 투옥되었다. 어린 시절 몹시도 겁쟁이였던 그의 모습은 이제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강한 신념 앞에서 투옥은 그에게 결코 위협이 될 수 없었다. 백인들에게 뭇매를 맞은 적도 있지만, 그의 기는 전혀 꺾이지 않았다. 남아프리카 시절 그는 자신의 투쟁을 표현하는 말로 ‘사티아그라하’를 사용하게 되는데, 사티아(Satya)는 진실(진리)이요, 아그라하(Agraha)는 확고함이니, 곧 진실관철투쟁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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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에 돌아와 인도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1915년 남아프리카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간디는 영구 귀국했다. 이제는 오랜 외국생활을 통해 배우고 확립한 진실과 그 실천원리를 고국에서 실현할 때가 되었다. 22년 만에 귀국한 그는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고국의 현실을 살펴본 후 남아프리카에서 함께 온 사람들과 공동체를 만들었다. 그는 아메다바드의 코츠라브(나중에 사바르마티로 옮김)에 아슈람을 만들었다. 이곳에서 간디는 자상한 아버지였고, 그의 아내 카스트루바이는 그들의 어머니였다. 간디는 아슈람을 통해 자신이 진리로 생각하는 무소유의 공동체를 만들어나갔다. 그는 불쌍한불가촉천민을 아슈람에 들어와 살도록 했다. 아슈람에 들어온 사람은 누구나 일을 해야 했고, 계급에 상관없이 똑같은 월급을 받았다. 간디는 또 비하르 주 참파란에서 농민해방운동을 펼치고, 아메다바드의 방직노동자 파업을 지원하는 등 비폭력저항운동을 구체화했다. 또한 자신이 법률 공부를 했던 영국을 믿고 제1차 세계대전에 연합군으로 참전한 영국에 협조했다. 당시 간디가 원했던 것은 인도의 자치정부였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승전국인 영국은 약속을 어기고 오히려 인도인의 자유를 제한했으며, 재판 없이도 투옥할 수 있는 롤래트 법안(Rowlatt Acts)을 통과시켰다. 간디는 영국에 대한 비협조 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전국적인 파업을 주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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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커타에서 구식 물레를 돌려보고 있는 간디 이런 과정에서 간디가 두려워한 것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국민이 희생되는 것이었고, 둘째는 국민들 스스로가 흥분한 나머지 폭력을 쓰는 것이었다. 1921년 웨일즈 왕자(훗날 에드워드 8세가 됨)가 인도를 방문했을 때, 인도국민회의는 일절 환영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뭄바이에서 폭력사태가 일어나고 말았다. 왕세자를 환영하는 친영인사들의 행사를 시민들이 방해하면서 사고가 일어난 것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는 것을 보고 간디는 납세거부 운동을 중단했다. 모틸랄 네루와 자와할랄 네루 부자가 투옥되는 등 수많은 사람들이 투옥되었다. 두 달 만에 정치범이 3만 명을 넘어섰다. 그러나 식민정부 경찰은 간디만은 쉬 체포하지 못했다. 간디를 체포했을 경우의 사태를 그들은 두려워했던 것이다. 간디는 비폭력의 원칙을 수호해줄 것을 국민들에게 호소했다. 1922년 고락푸르의 차우리차우라에서 또 한번의 폭력사태가 일어난 후 간디는 슬픔을 금치 못했다. 그는 아직도 자신의 아힘사(불살생, 비폭력을 뜻하는 산스크리트) 원칙에 입각한 사티아그라하에 국민들의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고 비협조 운동을 중단했다. 1922년 3월 10일 마침내 경찰은 마하트마 간디를 방문했다. 간디의 투옥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분위기가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인도 시민들의 독립운동에 위협을 느낀 식민정부는 신속하게 재판에 회부했다. 3월 18일 아메다바드의 법정에서 간디는 말했다. “나는 석방되더라도 똑같이 행동할 것입니다. 법적으로는 고의적인 범죄에 해당하지만, 나로서는 국민의 최고 의무를 다했을 뿐입니다. 나는 내게 주어질 수 있는 최고형을 요청하며, 그 형을 달게 받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간디는 이른바 ‘선동죄’로 6년 징역형을 선고 받았으나, 1924년 2월 5일 병보석으로 풀려나게 된다. 선동죄라는 애매한 죄목으로 탄압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선동이었음을 식민 정부는 알고 있었을까. 이 시기를 전후하여 간디는 명실공히 인도국민회의의 최고지도자가 되었으며, 인도 국민의 정신적 등불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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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월 30일, 힌두교 광신자에게 피살당한'위대한 영혼' 이후에도 인도의 독립과 국민의 권익, 하층계급의 인권을 위한 간디의 행진은 계속된다. 영국의 지배를 무력화하기 위해 그는 직접 물레를 돌리며 옷감을 짜서 입는 운동을 전개했으며, 각 종교간 화합을 역설했고, 불가촉천민을 구제하기 위한 잡지 <하리잔>을 창간했다. 1947년 8월 15일 인도는 독립하지만, 간디가 그토록 열망하던 종교를 뛰어넘는 통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파키스탄이 이슬람 국가로 분리 독립한 것이다. 아무리 위대한 인물일지라도, 아니 위대한 인물일수록 적이 있는 법인지 모른다. 힌두교 광신자들에게는 카스트를 부정하고 이슬람교도 인정하는 간디가 적으로 보였다. 1948년 1월 30일 간디는 힌두교 광신자 나투람 고두세에게 피살당하고 만다. 간디는라마 신의 이름을 부르며 저세상으로 갔다. 그는 이미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 1월 26일 그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만일 내가 광신자의 총탄에 죽게 되면, 웃으며 죽어갈 것입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더라도 결코 눈물을 흘리지 마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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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히르 지역 소수 이슬람교도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한 '평화의 행진.'가파르 칸, 손녀 마누와 함께(왼쪽), 말년 간디(오른쪽) 간디의 생애를 간단하게 요약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우며, 그의 사상 또한 만만치 않다. 그만큼 그의 생애는 파란만장했고, 그의 사상은 난해하다. 난해하다 하여 그의 생각이 칸트처럼 정교하게 짜여 있다거나, 니체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것이 아니다. 간디는 오늘날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사람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신념을 구축했고, 따라서 그 신념을 철저히 실천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애와 사상은 또 몇 개의 단어로도 대변할 수 있다. 아힘사, 사티아그라하, 브라흐마차리아(감각의 완전한 통제)가 그것이다. 불살생을 실천하기 위해 간디는 평생 채식을 했으며, 진실을 관철하기 위해 투쟁했으나 그 방식은 비폭력이었으며, 욕망의 굴레를 벗어나 브라흐마차리아 또는 해탈에 이르기 위해 금욕을 실천했다. 간디는 분명히 인도 독립의 최고 영웅이다. 그러나 그는 일반적인 영웅과는 다르다. 그는 남들보다 뛰어난 사람도 아니었으며, 획기적인 이론이나 발명품을 개발한 것도 아니었고, 특별한 지위를 누린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 가장 위대한 영혼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보통 사람’이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최고의 진리를 찾고자 했고, 종교인이 아닌데도 종교인보다도 철저하게 계율을 지켰으며, 가장 실천하기 힘든 비폭력・반문명의 방식으로 진실을 추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간디의 실천행위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때는 시대에 맞지 않는 것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간디가 실천해 보인 무욕의 사상과 무소유의 공동체는 오늘날 자본주의의 무한경쟁으로 인한 부작용이 심해지면서 새로이 조명 받고 있다. ‘보통 사람’이 이룩한 경지가 영웅으로 태어난 이의 경지보다 훌륭하다면 그가 바로 진정 위대한 이가 아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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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추천하는 덧붙여 읽으면 좋은 책 마하트마 간디에 관한 책은 매우 많으며, 각자 나름대로 훌륭하다. 관련 영화도 몇 편 있다. 그만큼 그가 이 세상에 끼친 영향력은 막대하다. 간디에 관한 많은 책 중 몇 권만 소개하는 것이 불공정할 수도 있으나, 어차피 모든 책을 소개할 수 없으니, 필자가 특별히 소개하고 싶은 책만 언급한다. 여기에 빠뜨린 책을 독자들이 채워준다면,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마하트마 간디는 인도에서 거의 신에 가까운 존재로 추앙 받고 있다. 도시마다 마하트마 간디 거리가 있고, 그를 화장하고 남은 재가 보관되어 있는 곳은 모두 성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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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간디를 진정으로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오히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신적인 존재로 추앙하다 보면 그를 모르고서도 아는 것처럼 착각하게 되어 그의 실체는 없고 이름만 남게 된다. 간디는 그의 인간적인 노력을 세심하게 들여다볼 때 그 위대함이 더욱 분명하게 보인다. 그런 점에서 간디의 인간적인 면모를 찬찬히 들여다보고자 했던 두어 권의 책을 소개한다. 제프리 애쉬의 <간디 평전>(실천문학사)은 간디의 모든 것을 담고자 한 노력이 돋보이는 평전이다. 저자는 간디의 가족관계에서부터 그가 어린 시절 집안의 물건을 훔쳤던 일, 늙어서 브라흐마차리아에 대한 실험을 했던 것까지를 세심하게 살펴보고 있다. 문체에서부터 미화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보인다. 그럴수록 신화적 존재였던 간디보다 이 책에 출현한 간디에 대한 존경심이 커지는 것은 왜일까? 간디의 자서전은 여러 판본으로 읽을 수 있지만, 함석헌이 번역한 <간디 자서전(나의 진리 실험 이야기)>(한길사)과 박홍규가 옮긴 <간디 자서전(나의 진실추구 이야기)>(문예출판사)을 추천한다. 함석헌은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짊어지고 온 우리 시대의 지성이다. 그의 마음속에 간디가 깊이 자리잡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책이다. 깐깐한 지식인인 박홍규는 간디를 아주 냉정하면서도 명료하게, 다시 말하면 인간적인 관점에서 평가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간디의 위대함이 필자도 동감하는 바로 그 위대함이다. “간디는 거짓말이나 거짓된 짓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런 짓을 한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만천하에 고백하며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 사람이기에 위대하다. 처음부터 순결한 영혼이어서가 아니라, 우리처럼 불결한 영혼이었지만 그것을 반성하고 진실하게 살려고 평생 노력했기 때문에 위대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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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세계인물> 관련글 이어보기ㅣ 간디와 같은 시기에 독립운동으로 투옥된 자와할랄 네루의 딸이자 인도 최초의 여성 총리를 지낸 인디라 간디
- 글 차창룡 / 시인, 문학 평론가
- 글을 쓴 차창룡은 1989년 <문학과 사회> 봄호에 시를발표하면서 등단했다. 1994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됐으며, 제13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다. <고시원은 괜찮아요>,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 등 다수의 시집으로 독자들과 만나고 있다.
발행일 2009.03.10
이미지 gettyimages/멀티비츠, <간디 평전>(실천문학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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