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기시감(旣視感)
임병식 rbs1144@hanmail.net
최근 보수단체와 진보단체간에 빚어지고 있는 독립운동가 서훈문제를 보면 양진영의 골이 좁혀지기는 커녕 더욱 심하세 깊어지고 있음을 느낀다. 조국이 해방된지가 언제인데 아직까지도 이념문제가 건건히 부짖치고 있다. 나뉘어진 여론을 보면 한쪽에서는 일제 강점기 무장투쟁의 선봉에 섰던 인물인 만큼 당연히 서훈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을 취하고, 반대편은 해방공간에서 월북하여 6.25를 일으킨 세력에 일조한 사람이므로 어불성설이라고 한다.
두 주장이 첨예하게 맞붙고 있다. 그런데 이 주장들은 따져보면 둘 다 이유가 있고 어느정도 내세우는 설득력도 있어 보인다. 그 중심에 서있는 인물이 약산 김원봉이다.
그는 일제가 거금 100만원의 현상금을 내걸고 검거하고자 혈안이 되었던 인물이다. 그는 독립투쟁과정에서 일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기민한 행동과 뛰어난 변장술로 신출귀몰하게 활략하며 일제에 항거했다.
그렇지만 해방이 되자 그는 설자리가 없었다. 아니, 잠시 잠깐 운신할 곳이 있었으나 해방정국에서 바로 그 자리를 잃고 말았다. 친일파 숙청을 위한 위원회가 꾸려졌으나 이승만정권의 노골적인 방해공작으로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이런 상황이 되자 약산은 더 이상 자랑스러운 독립운동가가 아니었다. 그저 독림운동의 전력을 숨기고 조용히 숨죽이며 살아가야만 하는 초라한 처지에 내몰렸다. 그는 이때 적반하장식으로 친일파 핵심인 악질 노덕술에게 따귀를 맞는등 수모를 당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그는 노덕술에게 따귀를 얻어맞고 하루 낮밤을 이불을 둘러쓰고 서럽게 울었다고 한다.
그는 월북을 결심했다. 해방된 조국이 친일파에 의해 포위되어서 숨통을 조여 오는 것을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나중 김일성이 6.25 전쟁을 일으키자 한물에 휩쓸리게 되었다. 이 부분은 그의 인생역정에 씻을 수 없는 치명적인 오점이다. 따라서 한편에서 반대하는 것처럼 이 이력은 그에게 독립운동 서훈을 주는데 국민정서상 문제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그에 대한 평가는 한 면만을 볼 것이 아니라 전 생애를 놓고서 독립운동 업적도 중히 평가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더욱이 남한이나 북한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끝내 경계인으로 살았고 결국은 북한체제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끝내 처형당한 것을 상기하면 한 인물의 평가를 너무 좁게만 보는 것은 놓친 부 분이 많다는 생각에서다. 더구나 오늘날처럼 일본이 과거의 잘못을 전혀 뉘우치지 않고 적반하장 식으로 대하며 막말을 쏟아내고 있는 마당에서는 일본이 좋아할 분열의 모습을 보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근자에 사학계의 어느 원로는 다름과 같은 명쾌한 해법을 내놓았다. 해방된 때를 기준으로 선 친일 후 독립운동 공훈은 독립유공자. 그리고 선 독립운동 후 해방 당시 친일은 친일파 . 고개가 끄덕여진다. 초지일관 독립운동가로 남았다면야 오직 좋을까 마는 그렇지 못한 지도자가 많았으니 아쉬운 대로 내놓은 고육지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데, 이 문제는 약산처럼 해방 후까지 변절을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월북한 경우가 많았으니 민족이 지혜를 모아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닌가 한다.
일전에 몸담고 있는 문학단체에서 군산 근현대사 박물관 탐방을 간다기에 동참하게 되었다. 박물관에 소장된 유물들은 어느 곳에나 있는 엇비슷한 것들이었지만 인근에 있는 조선에 진출한 은행들은 눈길을 끌었다. 역사성을 살리기 위해서 보존에 힘쓰고 있는 것이 우선 문에 들어왔다. 거기서 주목되는 것은 일인들의 조선 진출을 돕기 위해 은행들이 돈을 저리로 빌려주었다는 것이다.
빌린 돈으로 구마모토 같은 악질수탈자들은 농지를 무려 여의도의 열배가 넘게 소유했단다. 빌린 돈으로 조선인에게 고리로 빌려주면서 땅문서를 담보로 잡고 만약에 제 날짜에 갚지를 못하면 가차없이 토지를 차지해 버렸단다. .
그러면서 그들은 인근 곡창지대의 쌀을 수탈하기 위해 바닷가까지 철도를 부설했다. 그 흔적이 지금도 곳곳에 남아 있고 주위에는 반듯반듯한 일제시대 건물이 즐비하게 있어서 당시의 시대상을 엿보게 해주었다.
나는 은행뒤편에 서 있는 수백 년 된 느티나무를 보면서 ‘이 나무는 그런 아픔 민족사를 훤히 보았겠구나’하는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그래서 한동안 눈이 떼지지 않았다. 그런 답답한 마음이었을까. 나는 다음 답사코스에서 씁쓸한 마음을 더욱 지우지 못했다. 바로 직전에 안중근의사가 감옥 생활을 하던 곳을 재현해 놓은 방을 방문했던 것이다.
채만식문학관을 들렀을 때는 약력이 눈에 크게 들어왔다. 긴 생애를 살지 않았음에도 작품을 무려 1000편이나 쓰고, 그중에는 '탁류'같은 주목받은 작품도 남기고 있어서였다. 하지만 이력을 보니 대번에 어떤 기시감이 들었다. 이광수, 서정주, 장지연, 최남선 등과 같이 독립운동을 하다가 나중에 변절한 문인들처럼 그 또한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앞서 몇 년 전에 미당문학관을 들려서 그가 뛰어난 문학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조선청년들을 가미가제특공대에 내모는 등의 이력을 보고서 크게 실망했는데, 여기서도 다르지 않았다.
처음에는 항일운동에 앞장서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나 나중에 변절하여 친일문학가가 된 사람이었다. 그걸 보니 마치 이광수를 보는 듯 하고 서정주를 보는 듯해서 안타까웠다. 아무리 당시가 엄혹한 시절이었다하더라도 그리고 끝없는 회유와 협박이 있었다 하더라도 왜 지조를 지키지 못했을까. 한용운이나 이육사 같은 분의 길을 왜 걷지 못했을까.
못내 아쉬웠다. 친일로 인해 문학작품들이 빛이 바래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적어도 그것이 어느 역사학자가 제시한 ‘선 친일 후 항일’이라도 했더라면 생애를 돌아보아 평가라도 하겠는데 그런 자취가 아니라서 마음이 씁쓸하였다. 그런 점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겨내고 끝가지 나라를 배신하지 않은 문인은 그 남긴 작품이 좀 미흡하더라도 기려서 알려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돌아오는 오는 차속에서 오래토록 해보았다. (2019)
첫댓글 해방 후 친일 반민족세력을 척결하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입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온갖 고초와 위험을 감수했던 애국투사들이 정작 해방된 조국에서 홀대를 받고 민족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 참담한 현실,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색출하여 응분의 벌을 받게하려던 의로운 이들이 오히려 떼죽음을 당하고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던 자들이 주축이 되어 국군을 창설한 슬픈 역사가 아직도 구석구석에 뿌리를 박고서 활개를 치는 나라 현실...문인들의 친일 반민족행위는 차라리 짠해보이는군요. 상상이 아니라 모두가 팩트이기에 더욱 한스럽습니다.
해방될때까지 끝까지 변절하지 않고 지조를 지키고 산 문인들이 적었음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사람으로서 늘 아쉽고 부끄럽게 생각했는데, 채만식 문학관을 둘러보면서도 그런생각5이 들어서 씁쓸했습니다. 특히 군산은 곡창지대에서 생산하는 쌀을 수탈하기 위해 일제가 은행을 두곳이나 세우고 일인들이 특히 많이 진출하여 살았던 곳이고, 어떤 자본가는 주변의 논을 여의도의 10배나 소유한 슬픈 역사가 서린 곳입니다. 한데 이곳에 세워진 문학관조차 친잎파를 기리고 있어서 답답했습니다.
리영희 선생님의 자서전에 북한은 친일파를 다 처단하여 일제치하의 잔재를 없앴고 대한민국은 정부만 바뀌어 친일파들이 그대로 행사를 했기때문에 친일이 잔재해있는거라고 이광수나 미당이 있다면 동주같은 문인도 있었으니 그나마...
해방이후 친일파를 청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만것이 민족사에 두고두고 화근이 되고 있지요.
일제는 약산에게 김구 선생보다도 높은 최고 현상금을 걸었는데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320억 원이나 됐다고 합니다. 하지만 약산이 월북해 북한 정권에서 고위직을 지냈다는 이유로 지금까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훈장은 받지 못하고 있으니 안타깝네요. 2005년 이후 사회주의 운동가라도 서훈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려 몽양 여운형 선생 등 54명이 독립유공자로 인정을 받았지만 약산은 그때도 제외되었지요. “남과 북 모두에게서 버림받은 비운의 독립운동가”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인데, 어찌됐든 해방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건 확실하니 서훈을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약산 김원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