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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인디언(Native American) 이야기
미국 개척사(開拓史)에 따르면 1607년, 영국에서 104명의 청교도(Pilgrim)들이 탄 배 ‘5월의 꽃(May Flower)’은 신대륙(New World/미국)으로 건너간다.
그러나 당시 십여 년간 아메리카 대륙을 휩쓴 극심한 가뭄과 흉년으로 1년 뒤 살아남은 사람은 104명 중 38명밖에 되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때 이주자들이 그나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은 원주민들인 인디언들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고 한다.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들은 콜럼부스가 1492년 10월,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여 이곳이 인도인 줄 알고 원주민들을 ‘인도사람들(Indians)’이라 부른 데서 연유한다. 지금도 미국 앞에 있는 여러 섬들을 ‘서인도제도(西印度諸島)’라 부르고, 실제의 인도는 후일 ‘동인도(東印度)’라고 부르게 되었다. 따라서 지금의 인디언이라는 명칭은 오류가 있고, ‘아메리카 원주민(Native American)’이라 부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청교도들은 정착 초기에 원주민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잇달아 유럽에서 들어오는 이주민들은 넓고 비옥한 토지와 금광(金鑛) 등에 눈독을 들여 원주민(인디언)들을 산간오지(山間奧地)로 쫓아내고 자신들이 좋은 것들을 모조리 독차지한다.
자신들은 문명인이고 원주민들은 미개인들이라는 오명을 씌우고..... 누가 미국의 역사를 짧다고 했는가?
아메리카 원주민의 역사는 결코 짧지 않을 뿐더러 그들의 문화는 결코 야만적이지 않았다. 속속 밝혀지는 원주민들에 관한 이야기들을 살펴보면 그들은 위대한 정신문명을 갖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일례로, 체로키Cherokee Indian) 부족은 사냥도 했지만, 주로 농사를 지으며 한곳에 정착해 살았고, 동물의 가죽으로 만든 원뿔형 천막(Tepee) 대신 흙으로 집을 짓고 살았다. 특히 1809년, 세쿠오야(Sequoyah)라는 문자를 만들어 1828년부터 영어와 섞어서 ‘체로키 피닉스(Cherokee Phoenix)’라는 신문을 찍어낼 정도였다.
근처에 사는 백인들보다 훨씬 문맹률이 낮았으니 누가 야만인이고 누가 문명인인지 그 기준이 모호해진다. 그들은 또 일찍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여 성경과 찬송가까지 부족어로 번역해서 암송했다고 한다.
체로키 인디언 부족은 1850년 미시시피강 서쪽에서는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 고등 교육기관(Cherokee Female Seminary)도 세운다. 수천년 간, 아메리카 대륙에 거주하여 온 원주민은 지역이 워낙 광대하다 보니 종족도 무척 많았다.
대충 적어보면 나바호(Navajo), 아파치(Apache), 수우(Sioux), 체로키(Cherokee), 코만치(Comanch), 푸에블로(Pueblo), 베어(Bear), 크로우(Crow), 썬(Sun), 이글(Eagle), 라코타(Lakota), 플랫헤드(Flathead), 왐파노아그(Wampanoag), 와바나키(Wabanaki), 세네카(Seneca), 모나키(Monachi), 카이오와(Kiowa), 샤이엔(Cheyenne), 네즈퍼스(Nez perce), 오논다가(Onondaga), 쇼니(Shawnee), 위네바고(Winnebago), 블랙푸트(Blackfoot), 퐁카(Ponca), 미네콘주(Minneconjou), 아라파호(Arapaho), 델라웨어(Delaware), 코요테(Coyote), 카이오와(Kiowa), 코치티(Cochiti), 벳저, 오지브웨, 카치나, 사이드콘, 모타바토....
수우(Sioux)족 만도 7개의 다른 계파가 있다고 하니 옛날에는 대충 꼽아도 600여 부족이 있었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은 개인의 이름을 이름을 하나같이 보통명사나 서술형으로 지었다.
푸른 천둥, 사냥하다 죽다, 나무배 끌고 가, 머리맡에 두고 자, 동쪽에서 온 사람, 뿌리내린 옥수수, 노래하는 물, 검은 주전자, 흰 찌르레기, 덤불을 치우는 자들.... 그리고 신기한 것 중 하나는 라코다족 언어에는 욕설이 없다고 한다.
미 중북부 사우스다코다(South Dakoda) 주의 러쉬모어산(Mt. Rushmore)에는 위대한 4명의 미국 대통령 얼굴이 새겨져 있다. 미국 정부의 요청으로 독일 태생의 조각가 보그럼(Gutzen Borglum)과 그의 아들이 2대에 걸쳐 완성한 이 조각은 1927년에 시작하여 14년이 걸렸는데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3대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끈 16대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미국 경제를 부흥시킨 26대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Jr.)’가 그들이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자신들이 신성한 산으로 여기는 이곳에 이런 거대한 조각상이 들어서자 수우족 추장인 ‘서 있는 곰(Standing Bear)’은 크게 분노하여 미국 대통령의 조각을 하던 보그럼의 조수였던 코자크 지올코브스키(Korczak Ziółkowski)에게 아메리카 원주민 영웅이었던 ‘성난 말(Crazy Horse)’의 조각을 간곡히 부탁하는데 ‘성난 말’의 이야기에 크게 감동한 지올코브스키는 사재 174달러로 그의 부인과 6명의 자녀들과 함께 1947년에 조각을 시작한다.
수우(Sioux)족 오글라라(Oglalas) 부족의 위대한 전사 ‘성난 말(Crazee Horse)’의 기념조각을 다코다주 ‘블랙 힐스 국유림(Black Hills National Forest)’에 조각하기 시작하는데 러쉬모어에서 15마일(27km) 떨어진 곳이다.
지올코브스키는 74세로 죽기까지 740만 톤의 돌을 깨뜨려냈고 그가 죽고 난 후에야 그 가족들에 의해 겨우 얼굴이 완성되었다. 미국 전역의 인디언(원주민)들과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현재 머리 부분 87.5피트(26m)와 44피트(13m)의 머리카락만 조각된 상태인데 완성되면 높이 563피트(약 170m), 길이 641피트(약 192m)로 세계에서 가장 큰 조각상이 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재 미미한 후원금으로, 몸통까지 완전히 조각되려면 한없는 세월이 걸릴 것이지만 지올코브스키의 자녀들은 자신들이 죽으면 손자, 손녀들에까지 유언으로 남겨 끝까지 완성하겠다고 했다고 한다.
<작은 큰뿔사슴 계곡(Little Bighorn) 전투>
1876년, 미국 중북부 몬태나(Montana)주에서 미 기병대와 인디언 간에 역사에 길이 남는 전투가 벌어졌는데 바로 ‘리틀 빅혼(Little Bighorn) 전투’이다. 당시 미국 정부는 수우족 보호구역에서 금광(金鑛)이 발견되자 인디언을 쫓아내기 위해 군대를 동원했다. 남북전쟁의 영웅인 커스터George Armstrong Custer) 중령이 지휘하는 제7 기병대가 급파돼 인디언(원주민) 토벌에 나섰다. 그러나 수우(Sioux/Sue)족 테턴 부족의 위대한 추장 ‘앉아있는 황소(Sitting Bull, 1831~1890)’와 오글라라(Oglalas) 부족의 추장 ‘성난 말(Crazy Horse)’이 이끄는 인디언 연합군에 참패한다.
1876.6.25, 인디언들은 상당수가 활을 들고 싸웠지만, 총을 든 기병대를 협곡(峽谷)에 몰아넣고 전멸시킨다.
이날, 커스터 중령이 지휘하던 미군 정예 기병대 305명이 전멸했는데 백인들 입장에서 보면 커스터 중령이 비극의 주인공으로 영웅이고, ‘앉아있는 황소’와 ‘성난 말’ 추장은 미개한 야만인들로 치부했겠지만 인디언(원주민)들 입장에서보면 두 추장은 불멸의 영웅이다.
뛰어난 전략가이자 용맹한 전사였던 ‘성난 말(Crazy Horse)’은 1877년, 생포돼 저항하다 총을 맞아 숨졌고, ‘앉아있는 황소(Sitting Bull)’는 이후 전투에서도 여러 차례 이겼으나 영원한 승리는 불가능했다. 굶주림과 기병대에 쫓겨 캐나다를 떠돌다가 1890 자신을 체포하려던 인디언 경찰의 총에 죽는다.
성난 말( (Crazy Horse)은 전투에서 용맹했으며 아버지를 죽인 원수의 아내와 자식을 살려주고, 비무장한 적에게는 무기를 건네준 후 다시 싸움을 벌인 진정 ‘남자다운’ 전사로, 수우족은 그를 ‘인디언의 자존심을 지킨 마지막 전사’로 영원히 기억한다.
미합중국 건국초기, 미국 백인들이 원주민(인디언)들에게 저지른 만행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데 나라가 부강해지니 백인들의 만행과 원주민(인디언)들의 고통은 모두 묻히게 되었지만 지금도 미국 곳곳에는 원주민들의 피눈물 자국이 남아있고 아직까지도 현재 진행형이다. 현재 원주민(인디언)들은 미국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데 평균 실업률은 80%로 연방법과 원주민 자치법의 갈등으로 일자리 창출이 어렵다고 한다.
또 한가지는 한때 평원을 누비던 그들의 용맹한 기상과 자유분방함이 현 시대에 적응하기 어렵고, 샤먼(Shamanism:巫俗)을 신봉하는 그들의 종교는 미개한 것으로 매도당하며,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빛나는 투쟁들이 폭력과 탄압으로 무참히 짓밟힌데 대한 패배감, 그들의 역사와 전통은 깡그리 미개(未開)한 것으로 치부되고 열등민족으로 무시당하고 있는 점 등이 그들을 좌절시킨다.
1930년까지 투표권이 없었을 만큼 눈에 보이는 차별정책과 보이지 않는 사회적 제약이 많았으며 보호구역에 주거제한을 당하고 있다. 미국의 대부분 지역에서는 도박이 금지되고 있지만 원주민 보호구역은 도박업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규정이 있어 이들은 쉽게 도박과 술, 마약에 빠져든다고 한다.
열악한 주거 환경으로 인한 높은 질병, 낮은 의료 혜택, 급격한 환경변화로 인한 식생활 변화와 불균형적인 영양관리, 높은 실업률로 인한 정신적 스트레스 등으로 미국에서 가장 높은 자살률을 보이는 것이 원주민(인디언)들의 현실이다.
이것이 현재 미국 원주민(인디언)들의 끝나지 않은 비극이다.
<워체스터(Samuel Worcester) 목사 사건>
1828년 조지아주의 워드(Ward) 계곡에 살던 체로키(Cherokee) 인디언 소년이 백인 장사꾼에게 갖고 놀던 금덩어리를 판 것이 비극의 시발점으로, 계곡에 금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백인들은 금광 일대의 땅을 보유하고 있던 체로키 부족의 추방을 서둘렀다.
조지아(Georgia) 주 의회는 체로키 땅을 몰수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연방정부의 앤드류 잭슨(Andrew Jackson/제7대) 대통령은 인디언 강제이주 법안을 통과시켰다.
체로키 부족을 돕고 있던 백인 선교사 새뮤얼 워체스터 목사(Samuel Worcester)는 이에 항의하다가 조지아 주법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구속되었는데 1832년 미 대법원의 존 마샬(John Marchal) 대법원장은 당연히 ‘체로키 부동산 몰수법’은 위헌(違憲)이라고 판결했다. 그러나 잭슨 대통령은 대법원의 판결을 깡그리 무시했고, 1년이 지난 뒤에도 워체스터 선교사는 풀려나지 못했다. 인디언들은 절망에 차서 외쳤다.
‘법이 있었지만 우리에게 해로운 법뿐이었고 우리는 미국의 법정신에서는 보이지 않은 투명인간들이었다.’
1838년 5월, 윈필드 스콧(Winfield Scott) 장군은 7,000명의 병사들을 풀어 조지아주 뉴 에코타(New Echota)에 모여 살던 체로키 부족을 포위하고 1만 6천여 명을 임시수용소에 강제로 수용했다.
그 뒤 체로키인들은 병사들의 감시하에 인디언 영토(Indian Territory)라고 불리던 오클라호마주에 있는 탈레쿠아(Tahlequah)까지 1,600여 킬로미터(4천리)의 거리를 마차를 타거나 또는 걸어서 강제이주 당한다.
도중에 겨울을 만나, 모진 추위와 영양부족으로 1만 6천 명 중 4천 명이 숨졌으니 총만 안 쏘았을 뿐이지 사실상 대량학살이나 다름없었다.
당시 인디언들을 호송하던 미군 사병 존 버넷(John Burnett)은 80세가 되던 해 당시를 회고하는 글을 남겼다.
‘차가운 비가 내리던 1838년 10월의 어느 날, 그들은 무슨 짐승처럼 645대의 마차에 태워졌다.
그 날 아침의 비애와 엄숙함을 잊을 수 없다. 추장 존 로스(John Ross)가 인도한 기도가 끝나자 나팔이 울려 퍼졌다. 이어 마차가 구르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일제히 일어서서 작은 손들을 흔들며 정든 산과 집들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버넷은 그 여정(旅程)이 ‘눈물의 길’이 아니라 ‘죽음의 길’이라고 썼다. 1839년 3월 26일 탈레쿠아에 도착할 때까지 이 눈물의 길, 죽음의 길을 따라서 무덤이 행렬을 이뤘다는 것이다. 꼬박 10개월이 걸린 죽음의 대행진(行進)이었다.
희생자 중에는 추장 존 로스의 부인도 있었는데 기독교 신자였던 그녀는 하나밖에 없던 이불을 아픈 아이한테 주고 결핵에 걸려 숨졌다고 한다. 박물관에 전시된 체로키의 기록을 보면 담담하게 당시의 고통이 기술되어 있다.
‘3주가 지나자 남매 5명이 매일 한 명씩 차례로 숨졌다. 우리는 그들을 길옆에 묻고 계속 갔다.’
‘마차에서는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매일 노인과 아이들이 죽어 나갔다. 온통 눈물과 슬픔의 범벅이었다. 나는 살아있는 동안 결코 웃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아틀란타(Atlanta)에서 북쪽으로 2시간 30분, 노스캐롤라이나(North Carolina)주의 스모키 국립공원(Great Smoky Mountains National Park) 산록에 체로키 보호구역(Cherokee Indian Reservation)이 있는데 나는 2005년에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그곳에서 본 체로키 인디언들의 삶의 흔적과 침체된 그들의 생활이 뇌리에 깊이 남아있다.
선입견 때문인지 인디언들은 활기가 없어 보였으며, 같이 사진을 찍었던 중년의 인디언 녀석은 자칭 ‘성난 말(Crazy Horse)’이라며 몇 가지 장신구를 입히고 관광객들과 사진을 찍으며 1달러를 요구한다. 내가 장신구를 걸치고 옆에 서니 술 냄새가 코를 찌르는데, 같이 사진을 찍자고 손녀를 불렀더니 손녀는 겁에 질려 울면서 도망을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