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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 2566년 12월 셋째주 (12/18) 일요법회, 동지기도 법회, 동안거 바라밀 기도
불광에도 겨울이 깊을수록 봄은 가까워오고 있습니다
추운데 바깥에서 봉사하시는 법회사무국 봉사자 그리고 법회보 접어 나눠주시는 송파17구법회
보광당 안내팀과 간식 나누시는 송파6구, 7구, 9구, 중랑구법회
천수경 독경과 타종, 그리고 집전하신 현수거사님, 사회자 혜안님, 헌향과 헌다하시는 봉사자분들
『보현행자의 서원』 중 「찬양분」
~~~진리의 참모습이 적극적이며, 활동적이며, 원만하며,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변재천녀는 차라리 미묘한 말과 음성을 내겠지만, 저희들은 그보다도 참된 말을 하고, 부처님의 참된 공덕 세계를 믿고, 긍정하고, 찬양하는 말을 하겠습니다.
금주의 법어--불교적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서
금주의 법사--진주선원 원장 원담스님
불광가족 여러분, 만나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오늘 진주에서 새벽 첫차를 타고 서울 도착했는데 서울이 올해 들어 가장 추운 날이라고 합니다. 법당에서 여러분의 미소와 신심을 보니까 따뜻해져서 그렇게 추운 것 같지 않습니다. 오늘 제가 법문으로 자료를 미리 준비해왔는데 법문 시작하기 전에 여러분께서 광덕스님의 말씀(보현행자의 서원 중 찬양분)을 합송했을 때 거기에 다 들어 있는 것같습니다. 그럼에도 또 다른 측면에서 ‘광덕스님의 말씀을 이렇게도 해석될 수 있구나’하는 관점에서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주제는 ‘불교적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우리가 처한 세상은 욕계라 합니다. ‘욕계에 처한 불자가 어떻게 하면 일상을 불교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이런 질문입니다. 깨어 있고, 살아 있는 질문입니다. 세상에서 어떻게 불자로서 일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부처님께서는 3계를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3계는 이미 잘 아시다시피 욕계 색계 무색계를 삼계라 합니다. 색계 무색계는 기초교리에서 다 배우셨겠지만 명상의 선정에 들어가서 체험하기 때문에 그것은 차치하고 일단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상태는 욕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욕계는 불교 교리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지금 현재 우리가 처해있는 현실에 맞게 해석한다면 바로 '자본주의 세계 질서'라 할 수 있습니다.
지구 전체의 경제가 발전해서 자본주의로 들어선 지 벌써 200년은 다 되어 갑니다. 자본주의 세계 질서는 무엇입니까? 자본이란 말은 캐피탈Capital, 여러 자본이 있겠지만 쉽게 떠올리면 화폐 즉 돈입니다. 동산과 부동산이 있고 금융자산이 있는데 오늘날 자본주의를 금융자본주의라 이름합니다. 디지털 상에, 자기 머릿속에 숫자만 있지 직접 체험하지는 못합니다. 백만 달러 혹은 700억이 있다고 상상할 뿐이지 자기가 온라인 통장으로 숫자를 확인할 수 있고 주식 매매할 때 실감하겠지만, 그러나 현실적으로 700억을 동시에 소유해서 행사하는 건 아닙니다. 단지 디지털 상에 숫자로서 왔다갔다할 뿐입니다. 이런 걸 일러 금융자본주의라 합니다. 예를 들어 말씀드렸습니다.
자본은 쉽게 말하면 돈이 모든 것, 인간 생활 전반적인 것을 결정합니다. 돈이 이야기하고 돈이면 다 되는 세상입니다. 돈 그 자체는 무의미합니다. 무인도에서 화폐가 아무리 많아도 그걸 태워서 라면 하나 끓일 수 없고 화장지로 쓸 수도 없습니다. 돈 그 자체는 종이일 뿐인데 그 돈을 효용스럽게 만들어주는 세계 체제가 곧 자본주의입니다.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바닷속에 사는 물고기'와 같습니다. 물고기는 결코 물을 떠날 수 없듯이 어떤 묘수를 쓰더라도, 히말라야 꼭대기에서든지 태평양 밑바닥에 살아도 돈 위주로 돌아가는 이 세계 질서에서는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만큼 강력하여 일상생활 곳곳에 자본의 힘이 깃들어 있습니다.
일부 불자는 동명사 시위하러 가서 자리가 더러 비었지만 그래도 추운 날씨에 많은 불광불자님들이 법회에 동참하셨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자본주의 세상에 태어났으면 어떻게 말씀하셨을까? 그 점이 바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시다시피 자본주의 폐해는 곳곳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활로서 실감하고 있습니다. 빈부격차는 절대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는 모든 정치가와 혁명가들이 평등을 약속했건만 인간성이 바뀌지 않으면 평등사회는 결코 오지 않을 희망입니다. 자유와 평등은 함께 가기 아주 힘듭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욕계 중생이라서 그렇습니다. 욕계에 태어나는 우리 중생의 의식 수준이 우리의 삶을 결정합니다. 욕계 중생의 수준에 가장 딱 맞는 경제체제는 자본주의 체제입니다. 우리가 만들어낸 세상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런 세상에 끼어들었을까요?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그런 업을 가지고 있다가 지금 이때, 자본주의 시대에 태어났습니다.
빈부격차 날로 늘어납니다. 또 자본이 가는 곳마다 자원을 개발한다는 명목하에 자연을 파괴합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자원으로 개발하여 소비하려고 합니다. 생활은 어마어마하게 편리해졌습니다. 반면에 자연은 황폐해졌습니다. 그리고 기존의 전통적인 마을공동체, 다정하게 인간의 정이 통했던 모든 마을공동체는 다 부서지고 도시에서 뿔뿔이 흩어져 타향 객지 낯선 사람으로 만납니다. 물론 불광법회에서는 다정한 도반으로 만나겠지만요. 불광법회를 나가는 순간 우리는 천지사방으로 흩어져서 믿을 만한 구석이 하나 없는 도시인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믿을 만한 구석을 찾아서 헤매봅니다. 그것이 집이고 가족입니다. 그러나 집과 가족도 경제 사정에 여유가 있어야 우애가 있고 화목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돈입니다.
많은 경제 학자, 세계 체제를 비판하는 사람들, 문명 비판가들은 자본주의 폐해를 비판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소유냐 존재냐’의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이 말씀하길 ‘사회적 성격론 social character’을 얘기했어요. 어느 사회에 적응해 살게 되면 그 사회에 사는 사람의 성격이 바뀐다는 말입니다. 북한이나 중국 전체주의 체제에 살게되면 전체주의적인 성격의 사람이 되기가 쉽고 또 자본주의 체제에 적응해서 살면 자본주의적 성격의 인간이 되기 쉽다고 합니다. 자본주의 체제에 적응해서 살면 탐욕이 증장하고 경쟁심이 증장하고 개인주의가 증장하는데 이 세 가지가 자본주의 인간의 특징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사람탓을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 개개인을 만나보면 착하고 양심적으로 살려고 노력하는데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하죠. 이 자본주의 체제라는 게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연(緣), 즉 환경적 요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 사회적 조건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어요.
어떻게 여기에 욕심부리지 않고 살 수 있겠어요? 자본주의는 탐욕을 증장시킵니다. 똑같은 이익을 놓고 내가 먼저 많이 가져가려고 해야 나한테 이익이 좀 더 옵니다. 왜냐하면 내가 먼저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탐욕도 그냥 나쁜 건 아닙니다. 적정한 탐욕과 지나친 탐욕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건 지나친 탐욕입니다. 저 정도 돈이 있으면 그 정도에서 이웃과 나누면 좋을 텐데 더 많이 바라는 사람들이 있죠? ‘재벌집 막내 아들’, 요즘 드라마가 재미있죠? 재벌집 막내 아들의 진양철 같은 회장을 보면, 그런 사람은 돈의 논리에 빠졌기 때문에 멈출 수가 없어요. 멈출 수 없는 이것이 문제입니다. 자본의 수레바퀴는 한 나라의 대통령도 멈출 수 없어요. 여러분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참 좋은 분이라 저 분이 대통령 되었으니 희망이 있겠지, 하지만 아닙니다. 그 분도 미국 경제 시스템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서 굴러가는 것이 자본주의 질서입니다.
그래서 이게 어마어마하게 무서운 일인데 그것을 사람들이 각성하지 못합니다. 사실 그것은 인간, 지구 인류의 공동업이라고 해야됩니다. 공업共業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아요. 탐욕과 경쟁심, 서로 이웃끼리 경쟁하게 되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서로 경쟁 상태에 들어가기 때문에 공동체의 우의가 조성되기 아주 힘들어요. 그리고 개인주의, 나는 나대로 살겠으니 나를 간섭하지 말라, 나에게 최소한 30억만 있으면 이 사회에서 쩨쩨한 일 하지 않고, 직업 없이 자유롭게 살 거라고 그럽니다. 요즘 일부 MZ세대가 그럽니다. 여러분은 다 수긍합니까? 서울에서는 30억 가지고 잘 산다고 할 수 없고, 한 100억은 있어야 될까요? 내 수중에 자급자족할 만한 돈이 있으면 이웃을 돌아보지 않고 공동체와 상관없이 살 수 있을까요? 노매드 nomad, 신유목민이라 어딜 가든지 돈이 있어서 돈을 쓰면 통하는 세상이므로, 카드나 디지털로 금융계좌가 즉시 결제되는 이런 시대를 신-유목민 시대라는 겁니다.
천릿길도 마다 않고 오신 원담 스님의 귀한 법문에 귀를 기울이고 계십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자본과 불교는 동시에 갈 수 없다. 자본이 먼저고 불교가 뒤따라 갈 수는 없다. 그러면 자본에 봉사하는 불교가 된다는 취지로 가르치십니다. 불교가 먼저여야 되고 자본이 뒤따라가야 된다. 자본주의 체제를 수정하고 바꿔야 된다는 것입니다. 출가한 스님 같으면 자본주의 안에서 자본주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자본주의 안의 섬'처럼 살아라 하는 것이 승가를 만들게 된 동기입니다. 승가, 스님들 출가 공동체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됩니다. 그래서 스님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 일을 하면 안 됩니다. 이윤을 추구하면 안 됩니다. 신도들의 호의에 의해서, 공동으로 나누고 그렇게 살려고 부처님께서 승가를 만들었어요. 이해가 되시죠?
자본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볼 때 부처님의 공동체, 저기가 우리가 가야할 곳이구나, 저렇게 살아야지, 이렇게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삼기 위해서 출가 공동체, 상가Sangha를 만든 겁니다. 그래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 등대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세속에 자본주의 안에서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될까요? 그것이 중도를 취하는 것인데, 그에 맞게 팔정도를 가르치셨죠. 한 나라의 승가는 거기에 몸담고 사는 불자의 의식 수준에 달렸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어떤 정치학자가 얘기했죠. 그 나라의 민주주의는 그 국민의 의식 수준에 달렸다. 한 나라의 정부 수준은 그 국민의 의식 수준에 달렸다고 말씀했죠. 똑같이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불자들 의식 수준이 그 나라의 승가의 질을 결정한다. 그럼 오늘 한국 승가에 문제가 많고 불교 집안에 여러 가지 잡음이 있어 혼돈 상태라면 우리 불자들의 의식도 그런 겁니다. 우리는 재가와 출가를 막론하고 함께하는 업, 공업중생으로 한 배를 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도도히 흐르는, 변할 것 같지 않은 거센 자본주의 물결에서 우리는 어떻게 최소한도로 불자의 양심을 지키면서 일상에 불자답게 불교적으로 살 것인가? 이 질문이 의미가 있기 때문에 다음에 다른 질문이 따라오게 됩니다. 자본주의에 이어서 국가주의-우리 국가가 최고다, 민족주의-우리 민족이 최고다, 좋게 말하면 부국강병으로 한민족중심-국가를 만들자는 집단의지입니다. 최근 우리나라가 무기 수출해서 수입을 많이 올리면 좋을 것 같지만 부처님께서는 사람 죽이는 무기를 만들지 말라, 무기를 비축해놓지 말라고 했는데 그게 무슨 자랑거리가 되겠습니까? 그렇게 좋아하는 것은 바로 국가주의 발상입니다. 물질주의, 돈이면 다다. 돈이 인생의 전부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불자들이 입으로 이런 말을 공공연하게 말하는 버릇은 반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족중심주의, 즉 일상 생활 가운데서 자본주의에 빠져서 국가주의적 발상을 하고 물질주의적인 생활방식으로 살고, 가족중심주의적, 자기 가족밖에 모르며 지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팔정도와 육바라밀을 실천할 수 있는가 라고 물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스승님들이 불교를 가르치는데 두 가지 방식으로 접근합니다. 여러분이 불광사를 찾아오시기 전까지 인생사 희비고락에 휩싸이면서 여러 가지 말 못할 고통과 고민을 겪고 이 종교 저 종교, 이 절 저절, 이 스님 저 스님, 찾아다니다가 불광사 오기까지 얼마나 우여곡절이 많았겠습니까? 여기에 오면 스님이 따뜻하게 ‘어서 오세요, 잘 왔습니다.’ 격려하고 위로해주고 이렇게 하면 잘 될 것이라 안내해주고 따뜻하게 맞아주는 자기 위안이랄까, ‘공부는 이렇게 하고,마음은 이렇게 쓰고, 수행은 이렇게 합니다’ 하며 개인 향상을 도와주고 가족 관계는 이렇게 풀라면서 위안해주고 가족의 화목을 도모해주는 이런 정도로 안내합니다. 이게 모든 사찰에서 기본적으로 해야할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멈추게 되면 바라밀이라든지 광덕스님의 사회적 메시지가 빛이 멈추게 되는 거죠. 더 나아가 자기 개인의 고통이 어느 정도 진정이 되어 마음의 행복을 얻은 사람은, 가족 관계가 다 해결되고 어느 정도 정돈된 사람은 나아가 사회적으로 내가 도울 일이 없나, 사회에 기여할 일이 없나, 사회에 빛과 소금이 될 역할을 찾아야 된다고, 그런 활동을 안내하는 이 두 가지가 병행해야 됩니다.
이것을 티벳불교에서 어떻게 접근하느냐 보면, 우리나라 고려시대 때 중국은 원나라였고 그때 티벳불교가 상당히 타락했어요. 왜냐하면 쿠빌라이 황제가 티벳불교를 특별우대해서 자기 왕사, 국사로 삼았어요. 팍파존자에게 어마어마한 권력을 주니까 다른 티벳스님들도 덩달아 권력자가 되어서 계율이 방만해지면서 민중에게 피해를 주는 상당한 타락상을 보였어요. 그때 대개혁자 쫑카파 대사가 일어나 티벳불교를 개혁했어요. 비구계를 도입하고 계율을 청정하게 헸습니다. 그리고 기본 텍스트, 출가 입문에서부터 최고의 깨달음까지 가는 불교 텍스트를 완성했는데 그것이 보리도차제광론, 람림Lamrim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세 가지 수준, 하사도 중사도 상사도로 분류했습니다. 불교에 입문하지 않은 사람은 하사도에 들지 못하며, 하근기라 할 하사도는 불교에 삼귀의 오계를 받아서 특별하게 수행은 없고 일상에 보시와 오계를 잘 지켜서 이 생에 자기 몸 건강과 가족의 화목을 확보하고 집안에 우환이 없으며 다음 생에 좋은 곳에 태어나기를 발원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일부가 한걸음 더 나간 불교를 원하여 발심합니다. 어차피 이 세상에 부자로 잘 살아도 결국은 죽음이 있지 않느냐, 다음 생에 하늘나라에 가서 욕계천상, 도리천에 태어나봐야 거기서 수명이 다하면 또 다시 욕계로 떨어지는 욕계의 허물이 있으니까, 완전히 욕계에서 떠나려는 발심을 하는 사람이 생기게 됩니다. 그 분들은 바로 중근기로 오늘날 남방불교, 초기불교에서 위빠사나하는 불교, 탐진치 삼독을 끊고 열반을 지향하는 수행방식이 중사도로 아주 좋습니다. 부처님은 기본적으로 중사도를 권하셨습니다.
그런데 불교가 발전함에 따라 일부 대 아라한들 가운데 나는 해탈해서 일신에 아무 근심걱정이 없지만 뒤에 남은 저 중생들은 내가 무여열반에 들고 나면 어떻게 하느냐고 각성하신분들이 나타났습니다. 유가사지론의 보살십지 중 제6현전지에 가면 일부 대심 아라한들이 대승의 보리심을 크게 일으켜서 무여열반에 들지 않고 세세생생 중생과 함께 하리라는 큰발심을 한다는 대목이 있어요. 또한 싯다르타의 과거 전생, 전생 4아승지 10만겁 전에 아득한 전생부터 수많은 공덕, 바라밀행을 닦아서 마침내 이 생에 완전한 석가모니 부처를 이루신 예를 따라 가기를 발원하신 거죠. 석가모니 부처님은 전생에 보디삿따(보살)로서 보살행을 했다고 자타카에 나오듯이 그 길을 닦는 분은 바로 상사도입니다. 상사도는 보리심을 발합니다. 일체 중생과 운명을 같이 하면서 세상이 힘들고, 중생들이 내 뜻과 같이 따라주지 않더라도, 세상이 쉽게 변하지 않더라도, 중생을 아무리 가르쳐도 변하지 않더라도, 제자가 끊임없이 배신하더라도 이 세상에 다시 와야겠다. 왜냐하면 내가 끝까지 사랑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발심한 사람이 바로 상사도, 보살의 길을 가는 겁니다. 이렇게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진주에서 새벽 4시에 첫버스를 타고 불광법회를 찾아주신 원담스님, 귀하신 법문에 감사합니다
티벳불교, 쫑카파 대사의 가르침에 의하면 하사도의 길은 개인의 안심과 가족의 평화를 부처님 법으로 추구하는 길인데 오늘날 일부 사람들이 낮춰 불러서 기복불교라 하지요. 기복불교는 폄하하고 나쁘게 말하는 건 아닙니다. 기복불교의 한계를 넘어서라는 겁니다. 기복불교에서 멈추면 가족중심주의, 이기적인 불교에 머물게 됩니다. 사회에 더 넓게 영향력을 주기 위해서 사회문제에 개입하고 사회에 빛과 소금 역할을 한다면 불교의 위상이 올라가고 잠재적으로 불교의 포교 역량이 제고되지 않겠느냐는 점에서 기복불교를 넘어서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중사도, 해탈을 지향하는 불교로 사실은 남방불교인데 우리나라에서도 위빠사나가 퍼지긴 했지만 굉장히 약합니다. 자본주의 시대에 과감하게 해탈하겠다는 것은 이야기 꺼낼 수도 없을만큼 열악한 환경입니다. 더군다나 용감하게 일체 중생을 내가 책임지겠다, 모든 중생의 고통을 내가 대신 받고 행복으로 인도하겠다는 발심을 한다는 것이 바로 보리심인데 그것이 거의 돈키호테와 같은 발상입니다. 그것이 바로 대승불교이며, 그렇게 살라고 가르칩니다. 이 두 가지를 제자들 의식수준에 맞게 가르칩니다.
우리가 따르는 한국불교는 대승불교입니다. 대승불교는 초기불교에서의 개인적인 알아차림, 사념처-사띠파타나, 자기 몸과 마음을 알아차려서 번뇌에서 벗어나 마음을 안온하게 만드는 수행방식인 사념처를 가르쳤습니다. 거기에 머물지 말고 사회적인 알아차림, 사회적인 지성으로 사회 어디에 누가 불평등한 대접을 받고, 누가 고통받고 있으며, 누가 사회적인 약자이고, 누가 관심을 받아야할 대상인가? 내가 누리는 경제적 이익으로 말미암아 타자가 고통받는 사람은 없을까 하는 식으로 깨어 있는 것이 사회적인 알아차림입니다.
불교를 배운다는 것은 불교 교리에 국한 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 전체를 다 배우는 일입니다. 사람에 관한 한 두루 배우는 인간학이 되어야 하고 휴머니스트, 인본주의, 인문학 소양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세상을 잘 아시는 분, 세간해 世間解이셨기 때문에 세상이 어떤 식으로 고통받고, 세상에 고통받는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고, 어떻게 돌아가는지 상세히 아셨습니다. 여러분도 알아야 됩니다. 이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고, 권력체제, 경제체제는 어떻게 돌아가며, 자본주의 질서는 어떻게 돌아가고, 이렇게 가면 누가 갈수록 힘이 세어지고, 누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통받고 소외 당하는지, 왜 이렇게 되는지 알아야 합니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장수 100세 시대에 죽는 날까지 배운다는 건 얼마나 좋습니까? 불교를 한다는 건 끝까지 배운다는 겁니다. 인간과 세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불교 이전에 인간 문제, 사람에 대한 사랑이 문제입니다.
대승을 수행할 때 동기를 이야기합니다. 동기는 바로 보리심, 보디찟따bodhicitta로 보디bodhi는 보리로 깨달음, 찟따citta는 마음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상대적인 보리심은 완전히 깨닫지 못한 우리의 상태에서 내가 깨달으려는 열망으로 깨달으려고 결단하는 마음, 내 인생은 '마하반야바라밀로 가야지' 결단하는 마음입니다. 그 결과로 완전한 도피안과 공성을 체득한 마음, 열반을 증득한 마음이 절대적 보리심입니다. 절대적 보리심은 가야할 목표이고 상대적 보리심은 항상 내 마음에 빛처럼 밝히고 있어야 할 마음의 횃불입니다. 너는 뭣 때문에 사니? 네 인생의 목적은 뭐니? 할 때 잠시도 주저 없이 이 말이 나와야 합니다. 보리심! 아니면 광덕스님이 말씀하신 보현행원의 길이 나와야 합니다. 독립투사들이 항상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듯이 불자들은 보리심이 세뇌(좋은 의미의 '세뇌', 각인이라고 해야 겠죠)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왕좌왕 흔들리게 됩니다. 삼독이 치성한 욕계에 떨어져서 내 양심 하나 지키기 힘든 이 세상에 나는 무엇을 믿고 살 것인가 하면 믿을 것은 불법이고 보리심밖에 없다고 믿고 살아도 흔들리는 판국이지만, 흔들린다 해도 최소한 10분 안에 빨리 돌아와야 합니다.
보리심을 일으키는 자기 선언입니다.
-나는 이기적 방식으로 세상을 살기보다는 이타적 삶을 살겠습니다.
-나는 세속적 가치를 추구하기보다는 출세간적 가치를 지향하겠습니다.
-나는 인간의 가능성을 완전히 발현하여 생사에 자재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스님과 함께 호궤합장하고 보리심의 서원을 합송합니다
보리심을 삶의 동기로 삼은 사람을 보리심 행자라 하는데 보리심 행자가 매일 합송하는 <보리심의 서원>을 함께 호궤합장하고 합송하겠습니다.
-나와 허공에 가득한 중생이 지금부터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삼세 일체불의 공덕을 한 몸에 구현하고 계신 석가모니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팔만사천 다르마에 귀의합니다. 성스런 승가에 귀의합니다.
-나는 모든 중생의 이익을 위하여 부처를 이루겠습니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법을 전하여 깨어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모든 사람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여 행복으로 인도하겠습니다.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하고 중생의 업과 번뇌가 다할 때까지 나는 열반에 들지 않고 세상과 함께 하면서 보살의 원행을 완성하겠습니다.
티벳수행에 의하면 세 가지가 중요합니다. 첫째는 출리심, 둘째는 보리심, 셋째는 공성에 대한 지혜입니다. 출리심은 초기불교에서도 말씀하셨는데 정사유에 속합니다. 세 가지 정사유가 있는데 욕계-출리-정사유로 욕계를 벗어나겠다는 결심으로서, 이 세상은 안주할 곳이 아니라 원하든 원하지 않든 떠나야 할 곳입니다. 이 세상을 떠나갈 때 부처님 앞에 잘 닦은 선업만이 따라갈 겁니다. 무상을 각성하는 겁니다. 한국사람에게는 세 가지의 독립이 필요한데 첫째는 부모로부터의 독립, 둘째는 자식으로부터의 독립, 셋째는 배우자로부터의 독립입니다.
우리가 불교수행하는 것은 마음이 복잡하기 때문인데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분이 나쁘거나 우울하면 걱정 근심이 오래 갑니다. 해야할 생각이 있고 안 하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해야될 생각은 법문 기억하는 것, 학생이 배운 것을 기억하며, 사업가가 하는 사업 생각은 주의 집중을 해야되는 것으로 망상이라 하지 않습니다. 생활에 도움되지 않고 시기 적절하지 않고 통제되지 않는 생각이 자꾸 왔을 때 그것을 망상이라 하고 그것이 심해지면 저 혼자 중얼거리게 됩니다. 심한 것은 수행으로 고쳐지지 않는 반면 심하지 않는 번뇌가 오면 내 마음이 살아있다는 증거로 생각하면 됩니다.
생각이 있는 것을 인정하여 다행으로 생각하세요. 죽은 시체는 생각이 없습니다. 살아 있는 한 생각은 일어납니다. 생각 일어나는 걸 싫어하지 말고, 생각을 알아차리기만 하면 됩니다. 희망이 보이죠. 부처님께서는 마음은 거대하고 보이지 않는 감각기관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감각기관, 참 묘하죠. 우리 몸은 바늘로 찌르면 즉시 아픔을 느끼죠. 그와 똑같이 마음은 깨어 있는 감각기관입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하면 마음이 아프거나 상처를 입기도 하고, 마음이 빛나기도 하고 어두워지기도 합니다. 여러분 모두 마음이 있는데 그 마음을 이것! 이라고 확신을 못합니다. 확신을 얻으면 마음을 봤다고 해서 견성했다, 혹은 소를 찾았다, 안심입명을 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큰 비결이나 고행을 요하지는 않습니다.
마음을 뇌과학자는 머리에 있다 하거나 심장에 있다고도 하는데 편리한 해석일 뿐 마음은 어디에도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비유하자면 마음은 태양과 같고, 생각은 빛과 같아서 생각이 대상을 향해 나가서, 대상을 따라 자꾸 돌아다닙니다. 만경창파에 돛단배를 타고 물결치는 대로 표류하는 것이 생각 따라 사는 삶인데 생각의 흐름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물에 뛰어들면 됩니다. 빛줄기를 타고 나가는 것을 생각따라 가는 것이며, 빛줄기를 타고 가다가 떨어지면 바로 거기 그 자리에 태양이 변함없이 빛나고 있어요. 생각따라 흘러가거들랑 바로 생각에서 뛰어내리세요. 빛이 태양으로 돌아오는 것이 회광반조이고 한 생각이 나기 전, 일념미생전입니다. 망상이 치성한 것같아도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생각에서 뛰어내리면 바로 그곳이 마음!입니다. 생각 바로 밑에 마음이 살아 있습니다. 광덕스님 말씀처럼 마음은 무궁무진하고 본래 청정하며 무한한 공덕이 갖춰져 있으며 장소도 없고 써도 다하지 않으며 영원무궁한 모든 보살의 원행이 거기에서 나온다. 그것이 바로 마음자리잖아요.
잠시 눈을 감고 티벳의 통렌수행, 주고 받기 수행을 하겠습니다. 주는 것은 내가 닦은 공덕과 행복을 주고 다른 사람의 고통은 내가 대신 받는 겁니다.(법회보 참조)
다음에는 티벳수행자들이 항상 하는 랑리탕파의 ‘마음 바꾸는 여덟 가지 게송’을 합송하겠습니다. 랑리탕파는 쫑카파 시대에 홀로 동굴수행을 했던 수행자였습니다. (법회보 참조)
사두 사두 사두 감사합니다.
동지를 며칠 앞두고 동지 축원하시는 혜담스님
찬탄곡 ♬그리움의 노래♬를 부르시는 마하보디합창단
불광법회 불광사 정상화 기도 발원하시는 대원5구 명등 도안 거사님
현안 보고 하시는 법회장님, 모범 국선대리인으로 선정됨을 축하드립니다
법회 후 기념촬영하시는 혜담, 원담스님과 늘 애쓰시는 임원님들
법회 후 대웅전에서 금강경 독송하시는 중입니다
불광인의 선서
우리는 횃불이다. 스스로 타오르며 역사를 밝힌다.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 용맹정진하여 바라밀 국토 성취한다.
우리는 불광법등입니다. 전법으로 바른 믿음을 삼겠습니다.
보현행원으로 보리 이루리!!! 마하반야바라밀!!!
* 통렌수행을 해보자.
내가 이제까지 미움을 투사했던 그 사람의 고통을 들이쉬고, 그 사람의 행복을 내쉰다.
내가 이제까지 원망을 투사했던 그 사람의 고통을 들이쉬고, 그 사람의 편안을 내쉰다.
내가 이제까지 쌓아온 서러움을 들이쉬고, 이제 편안해짐을 내쉰다.
내가 이제까지 쌓아온 한을 들이쉬고, 이제 한이 풀렸음을 내쉰다.
내가 이제까지 억눌렀던 욕구를 인정하면서 들이쉬고, 내 욕구를 다정하게 대하겠다고 생각하면서 내쉰다.
내 안에 있는 아직 미성숙한 어린애 같은 나를 들이쉬고, 이해하고 용서하며 내쉰다.
당신 안에 있는 아직 미성숙한 어린애 같은 성향을 들이쉬고, 이해하고 용서하며 내쉰다.
내가 살아오면서 세상에 투사한 분노를 들이쉬고, 세상을 이해하고 용서하며 내쉰다.
내가 살아오면서 세상이 내 뜻대로 안 된다고 비난하거나 저주했던 것을 들이쉬고, 세상을 이해하고 용서하며 내쉰다.
내가 살아오면서 피해자를 자처한 걸 들이쉬고, 가해자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이해하고 용서하며 내쉰다.
들이쉬면서 ‘모든 것을 용서하리라’, 내쉬면서 ‘모든 것이 행복하기를’.
들이쉬면서 ‘가해자도 없고 피해자도 없다’, 내쉬면서 ‘우리 서로 사랑하리라.’
끝으로 랑리탕파의 ‘마음 바꾸는 여덟 가지 게송’을 합송합시다.
마음 바꾸는 여덟 가지 게송-
제가 일체중생 모두를 여의주보다 더욱 큰 뜻을 이루는 생각으로
항상 사랑하게 하소서.
어디서 누구와 만날 때 나 자신 누구보다 낮게 보고
마음 깊이 남을 사랑하게 하소서.
모든 행에 자신 마음을 살피고
번뇌 생기자마자 자타自他에 해가 되기에
곧바로 제거하게 하소서.
나쁜 성질의 중생들이 죄와 고통으로 시달리는 걸 볼 때
얻기 어려운 보물을 얻었다는 마음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나에게 남이 질투로 비방 등의 맞지 않는 손해는 내가 받고
이익은 남에게 올리게 하소서.
누구에게 내가 이익 준 기대 컸던 그가
아주 맞지 않는 해를 끼쳐도 바른 선지식으로 보게 하소서.
요약하면 직접과 간접으로 이利, 락樂은 모든 어머니에게 올리고
어머니의 해침과 모든 고통 은밀히 내가 받게 하소서.
이들 모두 또한 팔풍의 번뇌가 물들지 않고
모든 법을 신기루로 아는 마음으로
집착 없이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끝. 감사합니다.
첫댓글 귀한 법문,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