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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增東國輿地勝覽.....1981년 영인판
桓檀古記.................1986년 임승국 주해
한철학사상사 문경출판사 林均澤 박사
비류(沸流)가 세운 백제
백제의 건국은 여러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후한서(後漢書)와 태평어람(太平御覽)에서는 마한(馬韓)에 속해있던 고리국(櫜離國)에서 나타난 것으로 되어있다.
둘째, 북사(北史)․양서(梁書)․남사(南史) 그리고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마한(馬韓)에서 생긴 것으로 되어있다. 특히 북사(北史)에는 마한(馬韓)에 속한 색리국(索離國)이라 했다.
셋째,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과 위서(魏書)에서는 부여(扶餘)에서 나타났다고 했다.
넷째, 통전(通典)과 통지(通志)에는 위구태(尉仇台)라 했다. 위구태는 부여왕(扶餘王)이라고 되어있다.
다섯째, 수서(隋書)와 주서(周書)에는 유구태(有仇台)라고 적고 있다.
여섯째, 당서(唐書)․구당서(舊唐書)․신당서(新唐書)에는 부여(扶餘)와 별종(別種)이라고 되어있다.
일곱째,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에는 주몽(朱蒙)의 아들 온조(溫祚)에서 백제(百濟)가 건국(建國)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한편 주석에서 우태씨(優台氏)가 온조(溫祚) 아버지로 기록(記錄)되어 있다는 점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주석에 보면 백제의 시조가 비류로 되어있고 우태씨가 아버지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비류(沸流)는 나라를 세우고 도읍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왜 주석에서는 비류가 백제의 시조로 되어있는지 그 이유가 분명하지 않다. 다만 필자가 백제본기를 검토해서 판단을 내려보고자 한다.
북부여에서 결혼한 주몽의 본처 예씨(禮氏)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유유(孺留) 즉 유리가 찾아와 태자로 삼게 되자 비류와 온조는 주몽을 떠나갔던 것이다.
전한(前漢.BC.206년)시 성제(成帝.BC.32~29년) 홍가(鴻嘉.BC.20~17년) 3年의 일이다. 비류가 도착한 곳은 미추홀(彌鄒忽)이란 곳이었다. 이때 온조의 도읍지는 하남성(河南省) 위례성(慰禮城)이다.
비류가 미추홀에 도읍을 하려했으나 땅이 습하고 짠물 때문에 편안하게 살기에는 적당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함께 따라간 신하들이 간하여 온조가 도읍한 하남위례성을 가보도록 권하였다. 이때 비류는 도읍을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신하들이 하남위례성으로 가보도록 간곡히 간하는 바람에 비류는 동생이 있는 곳으로 가보았다. 비류가 하남위례성을 둘러보니 도읍지가 마치 솥처럼 안정되어 백성들이 크게 편안한 것을 보고 부끄러운 나머지 참회하는 마음으로 자결하였다고 적고 있다.
그렇다면 비류는 백제의 시조가 될 수 없는데도 우태씨의 아들 비류가 시조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고대사회의 제도상 장자가 대(代)를 이어야한다는 관습에서 죽은 비류를 위로하고 추모하는 뜻에서 시조라고 기록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우태씨는 백제본기에 있는 것과 같이 북부여왕의 해부루 서손(庶孫:서자의 손)으로 졸본을 내려와 유구태(有仇台)가 세운 졸본부여국에 왕위에 오르고 비(妃:王의 처)로 맞이한 여인이 소서노였다. 그리하여 우태씨와 소서노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는데 큰아들이 비류이고 작은아들이 온조라고 되어있다.
통지(通志)와 통전(通典) 백제편에는 백제의 선조가 위구태(尉仇台)라고 되어있다. 그런데 주서(周書)에서는 백제자는 그 선조가 개마한(蓋馬韓)에 속한 나라이며 부여와는 다른 종족으로 유구태(有仇台)가 처음 나라를 세운 곳은 대방(帶方)의 옛 땅이라고 적고 있다.
그렇다면 백제를 건국한 사람이 위구태(尉仇台)인지, 또한 유구태(有仇台)인지, 온조인지가 아리송하다.
이상 율곤선생님의 저서 " 백제사의 비밀" 에서 발췌하였습니다.
주몽에 대한 기록은 정사에 모두 있으나 소서노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이외에는 찾아볼 수 없다.
소서노는 백제본기에 의하면 졸본 사람으로 연타발(延陁勃)의 딸로 되어있다.
소서노가 첫 남자와 결혼한 상대는 우태(優台)라고 했다. 우태는 북부여왕 해부루(解夫婁)의 서자의 손자라고 되어있다.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朱蒙)은 졸본부여(卒本扶餘)에서 도읍했다. 본래 졸본부여(卒本扶餘)의 국왕이었던 우태씨(優台氏)는 소서노(召西奴)와 결혼하여 비류(沸流)와 온조(溫祚) 두 아들을 두고 있었다.
우태씨가 죽자 소서노는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을 데리고 졸본에서 살고 있었다. 주몽이 졸본으로 와 소서노와 결혼하면서 비류와 온조를 얻게 되었을 때는 졸본부여국의 강역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셈이다. 그러니까 22세의 주몽이 소서노와 만났을 때 졸본부여국의 영역은 작은 소국(小國)인 제후국 수준이었다. 그 당시 비류와 온조의 나이는 열 살 안팎인 듯하다.
주몽의 본부인 예씨에게서 낳은 유리가 장성하여 찾아왔을 때는 10년이 지난 후로 보아진다. 그러니까 비류와 온조는 20세 안팎으로 태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두 형제였다.
뜻밖에 주몽의 본 아들인 유리(類利)가 찾아와 유리를 태자(太子)로 삼게 되자 비류와 온조는 회의를 느끼고 어머니 소서노와 양아버지인 주몽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전문(前文)의 해설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백제(百濟)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시조설(始祖說)에 의문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분명히 말한다면 비류와 온조는 부여에서 주몽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북부여왕(北扶餘王) 부루(扶婁)의 서자 손이었던 우태(優台)씨는 일찍 졸본으로 내려와 부여(扶餘)라는 이름으로 나라를 다스려 온 것으로 보아야한다.
특히 우태씨는 졸본(卒本) 사람인 연타발(延陁勃)의 딸 소서노(召西奴)와 결혼하여 비류(沸流)와 온조(溫祚)를 낳았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우태씨가 죽은 후 홀로 비류(沸流)와 온조(溫祚) 두 아들을 데리고 살던 소서노(召西奴)는 주몽(朱蒙)과 결혼함으로 인해 비류․온조가 주몽(朱蒙)의 아들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 율곤선생님의 저서 " 백제사의 비밀" 에서 발췌하였습니다.
이상의 내용으로 보면 비류는 미추홀에 도읍을 하려했으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백성들을 편안하게 살게 해줄 수 없는 것이 부끄러웠던 나머지 참회하는 마음으로 자결을 하였고 결국 비류는 미추홀에서 도읍을 정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비류가 장남이었던 관계로 고대사회의 제도상 관례에 따라 백제의 시조로 가추증되었고 사실은 온조가 백제의 시조로 되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죽은 비류를 위로하고 추모하는 뜻에서 시조라고 기록한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고 생각이 됩니다. 따라서 기원후 378년까지 나라가 존재했었다고 하는 이야기는 잘못 된 정보로 보아야겠습니다.
다음은 기원전8937년 이후의 역대단군에 대해서 알려 드리겠습니다.
조현우님 께서 보신 문장이
" ...요임금이 단군인줄 모르고 있는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은 정말 지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제가 저술한 한민족사를 보면 년대표가 부록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단군은 한 사람이 아니고 BC. 8937년 반고 환인씨로 부터 내려온 단군은 수 없이 많아요.
현재 우리나라에서 단군 단군 하는 사람은 요임금입니다. BC.2333년 약 오천년 역사라고 하는 것은 바로 요임금을 두고 하는 말임을 한국에서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어요. 정말 한심한 일이지요. 역사의 깊이를 탐구할 생각은 하지 않고 무조건 중국의 왕인줄로 알고 있으니 한심한 일이지요. ..."
라고한 문장 같은데 기존 학교에서 배운 역사관으로는 매우 이해하기 힘든 장면입니다.
어렵게 설명하지 않고 간단히 쉽게 설명하겠으니 더 궁금하시면 홈페이지 구석구석 검색을 해서 찾아 읽어 보시기바랍니다.
단군조선(壇君朝鮮) 제1기는 반고환인씨(盤固桓因氏) 부터 시작되어 천황씨, 지황씨, 인황씨, 거방씨, 구황씨, 섭제씨, 연통씨, 서명씨, 거령씨, 구강씨, 초명씨, 탁광씨, 구진씨, 황신씨, 이령씨, 대괴씨, 귀외씨, 기호씨, 감자씨, 태봉씨, 염상씨, 개맹씨, 대돈씨, 영양씨, 무당씨, 태일씨, 공상씨, 신민씨, 기제씨, 차민씨, 진방씨, 하성씨, 회괴씨, 동호씨, 황담씨, 이광씨, 계통씨, 길이씨, 궤거씨, 희위씨, 호락씨, 사황씨, 소홀씨까지 44세를 이어오면서 60氏의 단군(桓因, 桓仁)이 존속했다. 역년 5038년간 입니다.
"처음으로 밝혀진 한民族史 494p 부록" 에 그 년표가 실려져 있습니다. 이는 '환단고기'를 고증한 것이 아니라 청나라때 장계종의 저서인 '역대신선통감'에서 밝혀낸 것입니다.
단군이란 최고통치자, 또는 '하늘에 지내는 제사를 주관하는 신과 같은 사람'을 뜻하는 용어로 한사람만을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상고시대에 최고 통치자가 되면 그를 단군으로 불렀던 것입니다.
bc8937년 음력 10월 3일에 천황씨가 간지법(干支法)을 만들어 환인천제께 바쳤는데 이때 부터 한民族의 역사가 정식으로 시작 되었으며 처음으로 하늘의 별자리를 연구하여 만든 달력이 시작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간지법(干支法) 입니다.
환단고기를 중심으로 상고사를 정리하면 부족한 점이 너무 많고 또한 우리가 놓쳐 버린 것들을 평생 찾을 수 없게 될 수가 있어서 중국측사서를 중심으로 연구를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성과가 있었습니다.
율곤선생님의 저서를 많이 읽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다음은 단군조선의 역사를 간단히 요약하였습니다.
반고환인씨(盤固桓因氏) 이후 천황씨, 지황씨, 인황씨, 거방씨, 구황씨, 섭제씨, 연통씨, 서명씨, 거령씨, 구강씨, 초명씨, 탁광씨, 구진씨, 황신씨, 이령씨, 대괴씨, 귀외씨, 기호씨, 감자씨, 태봉씨, 염상씨, 개맹씨, 대돈씨, 영양씨, 무당씨, 태일씨, 공상씨, 신민씨, 기제씨, 차민씨, 진방씨, 하성씨, 회괴씨, 동호씨, 황담씨, 이광씨, 계통씨, 길이씨, 궤거씨, 희위씨, 호락씨, 사황씨, 소홀씨까지 44세를 이어오면서 60氏의 단군(桓因, 桓仁)이 역년 5038년간 존속하다가
단군조선(壇君朝鮮) 제2기는 유소한웅 시대로 접어들었으며 이때 부터 문화가 급속도로 발전하여 전쟁무기나 병기의 발달도 급속화 되었습니다.
그 후 BC.2357년에 요임검때 와서 단군조선(壇君朝鮮) 제3기가 시작 되었고,
요 . 순(堯 . 舜) 시대를 거쳐 하나라 주나라 은 . 상(殷 . 商) 시대를 거쳐
단군조선 제4기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로 접어들었습니다.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주(周)나라가 망한 뒤 진(秦)나라의 득세하고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말기가 시작되었을 때 고구려 . 백제 . 신라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 당시에 큰 나라였던 고구려, 백제, 신라 속에서 삼국(三國)이었던 위(魏 AD.220∼265년), 촉(蜀 AD. 221∼263년), 오(吳 AD.222∼280년) 세나라는약 40년 동안 전쟁을 했습니다.
그후 남조(南朝), 북조(北朝), 송(宋), 제(齊), 양(梁) 그리고 북위(北魏), 동위(東魏), 서위(西魏), 북제(北齊), 북주(北周) 등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 당시는 고구려 20대 장수왕(長壽王 AD.341∼421년) 이후이며, 고구려 25대 평원왕(平原王 AD.522∼563년) 때까지 지속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백제는 21대 개로왕(蓋鹵王 AD.400∼425년)에서 27대 위덕왕(威德王 AD.529∼577년), 신라는 19대 눌지마립간(訥祗痲立干 AD.414∼454년)에서 24대 진흥왕(眞興王 AD.537∼572년) ***
전국시대(戰國時代)는 그야말로 전란이 지속되는 시기로 고구려는 수(隋 AD.589∼618년)나라와 30년간 전쟁을 하였습니다.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작전으로 고구려, 백제가 망한 것으로 史書에는 기록하고 있으나, 고구려 백제가 망할 무렵 수(隋), 해(奚), 말갈(靺鞨), 왜(倭) 등이 복합적으로 협공하므로 어쩔 수 없이 고구려 백제는 망한 것입니다.
원래 신라와 당나라는 고구려 백제 속에서 기생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南朝(宋 齊 梁 陳 後粱)와 北朝(北魏 東魏 西魏 北齊 北周)는 자연 소멸되고 말았으며 이때 唐나라는 고구려가 소유했던 강역 모두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당나라는 고구려 땅, 신라는 백제 땅을 가졌을 뿐 신라가 통일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식민사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고 무조건 신라가 통일하였다하여 통일신라란 말을 거리낌없이 난발하고 있는 실정 입니다. 이것은 역사를 잘못 안 것이므로 하루빨리 고쳐야 할 일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한民族의 역사적 통일은 단군조선 1, 3기 입니다. 이때는 모두 선(禪)과 도(道)를 통한 성군(聖君)이 선정을 했기 때문입니다. 신라가 대성업을 이룩한 것은 독자적 행위가 아니므로 신라통일을 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신라가 망한 것은 56대 경순왕(敬順王 AD.927∼935년) 때 입니다.
그 후 고려가 생겨났습니다.
이하생략합니다.
中國古今地名大辭典에는 복희, 염제, 신농씨, 黃帝, 소호금천씨, 전욱고양씨, 제곡고신씨, 요, 순, 하, 은, 주, 진(秦), 한(漢), 서한(西漢), 동한(東漢), 후한(後漢), 삼국(三國), 위(魏), 촉(蜀), 오(吳), 진(晋), 서진(西晋), 동진(東晋), 남조(南趙)는 송(宋), 제(齊), 양(梁), 진(秦), 후양(後粱), 북조(北趙)는 북위(北魏), 동위(東魏), 서위(西魏), 북제(北齊), 북주(北周), 그리고 수(隋), 당(唐), 무주(武周), 오대시(五代時), 북송(北宋), 남송(南宋), 거란(契丹), 요(遼), 서요(西遼), 금(金), 몽고(蒙古), 원(元), 명(明), 후금(後金), 청(淸) 등은 모두 고조선(古朝鮮)이 뿌리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고양씨와 고신씨
고구려의 조상은 고양씨라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있다. 요즘 중국에서는 일만년의 역사를 만들기 위해 고양씨를 내세우고 있으나 한마디로 웃기는 얘기이다.
고양씨는 헌원황제(軒轅黃帝.BC.2679년)의 孫子이다. 黃帝의 연대가 BC.2679년(眞B.C.3957년)이면 지금으로부터 4683년 전에 불과하다. 더구나 황제의 손자인 고양씨의 연대는 황제보다 125년이나 아래인 BC.2554년에 불과하다.
다시말해 고양씨(高陽氏.BC.2554년)는 지금으로부터 4558년 전이다. 중국에서 일만년 역사를 내세운다고 하면서 전욱고양씨(顓頊高陽氏)를 내세워 일만년의 역사를 만들겠다고 하니 한마디로 가당찮은 말이다.
역사는 간지법으로 기록하고 있다. 간지법을 모르면 역사연대를 알 수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중국에서는 간지법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일만년의 역사를 내세운다고 하면서 불과 4558년밖에 되지않은 고양씨를 앞세워 일만년의 역사를 꾸미겠다는 것은 중국에는 간지법을 아는 역사학자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1910년부터 손문에 의해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서면서부터 역사를 정책적으로 말살해 왔기 때문이다. 그 이후 중국은 공산국가로서 모택동 정부에서는 역사를 국법으로 통제해왔기 때문이다.
더구나 1958년부터 중국은 문화혁명이 시작되어 부르조아적인 것을 철저히 통제시켜 왔다. 공산국가의 일인독재하에서 역사교육은 있을 수 없다. 만약 역사를 제 마음대로 기록하거나 말하는 자는 국법으로 처단했기 때문에 학자들은 입을 봉하고 살았다.
1992년부터 한중간 국교가 수립되고 중국이 사회주의 정책으로 전환하면서 시장경제 체제로 바뀌어갔다. 그때부터 鄧少平 정권은 역사인식을 갖게 되어 서서히 개방의 물꼬를 트기 시작했다.
물론 1987년 이후부터 조금씩 문호가 개방되고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역사의 중요성을 인지하게 된 것은 강택민 주석 때이다. 이때부터 중국은 이붕 총리의 주도아래 고적연구소를 중국 대학내에 18개소를 설치하고 본격적으로 고대사와 역사에 눈을 뜨기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1996년 초부터 18개 대학에서 문헌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하려는 움직임이 싹트기 시작했다.
필자가 중국 연변대학교 박문일 총장의 초청으로 1996年 3月에 갔을 때 이미 고적연구소 소장으로 임명된 최문식 교수가 있었다. 그때 필자는 삼국지동이전이나 후한서동이전 중에서 강의해 달라는 박문일 총장의 부탁을 받고 고적연구소를 찾아갔을 때 이십오사 중 이권과 고대성씨사전 일권밖에 없었다. 다시말해 96년도만 하더라도 역사 책은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필자는 한달 동안 후한서동이전 원문으로 역사학과 대학원생들에게 강의한 후 한국으로 돌아와 명문당을 통해 수백권의 책을 연변대학에 무료로 발송하였다. 물론 필자가 저서한 책 전질을 고적연구소와 도서관 그리고 朴文一 총장과 崔文植 소장에게도 기증하였다.
중국은 역사에 눈뜬 지가 불과 10년 남짓하다. 물론 중국학자들은 한자원전을 숙독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있기 때문에 역사원전으로 된 것은 한국학자에 비하면 훨씬 빠른 편이다. 약 10년 동안 중국학자들은 많은 저술과 론문도 발표하였다. 하지만 역사의 맥이라 할 수 있는 간지법은 아직도 확실하게 알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간지법은 한민족의 자연철학사상으로 엮어진 것이므로 중국학자들은 단지 60갑자만 다시 되돌아 오는 것으로만 알고 있을 뿐 간지의 연대법은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앞에서도 言及했듯이 전욱고양씨(顓頊高陽氏.BC.2554년)는 지금으로부터 불과 4558년밖에 되지않은 인물을 내세워 일만년의 역사를 만들겠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발상이기 때문이다.
간지는 천지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간지의 두 글자는 천지이지만 간지 속에 인이 있기에, 간지는 천․인․지 삼원일체 사상으로 되어있는 것을 중국대륙 학자들이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중국사회과학원에 근무하고 있는 역사학자는 역사를 깊이 있게 연구한 사실이 없고 연륜 또한 짧다. 그러기에 불과 4558년밖에 되지않은 황제의 손자를 내세워 일만년의 역사를 만들겠다고 하는 것은 넌센스이며 간지법을 모르고 있다는 증거이다.
간지는 자연법으로 엮어진 율법이다. 고로 일건천간의 약자가 간이다. 지는 삼곤지지의 약자이다. 그러기에 간은 일이자 하늘에 속하며 지는 삼이자 땅에 속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이가 빠져있다. 이는 기인중에 해당하므로 사람에게는 마음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러기에 천지인 간지만 있고 사람인 마음이 빠져있는 것이다. 즉 일천 . 이인 . 삼지로 형성되어 천 . 인 . 지 삼원일체로 자연이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중국학자들이 모르고 있기 때문에, 지금으로부터 4558년밖에 되지않은 전욱고양씨를 일만년 전의 인물로 등장시키겠다고 대대적으로 언론에 보도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2004년 8월 20일자 조선일보와 인터넷 신문 오마이뉴스에 발표한 것이 증거이다.
간지법에는 상원갑자년부터 시작된다. 상원갑자원 속에 상원갑자 . 중원갑자 . 하원갑자가 60번을 반복하므로 총체적 상원갑자 회로가 한바퀴 도는 데는 3,600년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중원갑자원 속에 상원갑자 . 중원갑자 . 하원갑자 역시 60번을 한바퀴 도는 데는 총체적으로 3,600년이란 세월이 필요하다.
또한 하원갑자원 속에도 상원갑자 . 중원갑자 . 하원갑자가 역시 한바퀴 도는 데 총체적 3,600년이 걸리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10,800년이 지나므로 상원갑자원이 60번, 중원갑자원이 60번, 하원갑자원이 60번을 회전하므로 인해 완전하게 생명의 한 주기(一周期)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고로 역사학자가 간지법을 모르면 역사학자로서의 자질이 없는 것이다.
한민족의 선조들은 위대한 자연사상인 간지의 율여법을 연대로 사용해 왔다. 다시말해 간지의 연대가 역사이다. 고로 조상임들은 간지법으로 역사를 기록했으므로 한치의 연대 착오가 없었던 것이다.
고구려가 고씨의 성을 사용하게 된 것은 고양씨로 부터라는 설이 있고 또한 고신씨라는 설이 있다.
삼국사기의 고구려 19대 광개토왕 17년 3월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十七年 春三月, 遣使北燕, 且敍宗族, 北燕王雲遣侍御史李拔之, 雲祖父高和句麗之屬, 自云高陽氏之苗裔.
본문을 해설해 보기로 한다. 17년 봄 3월에 북연에 사신이 파견되었다. 종족에 대하여 공손하게 차례를 펴는 과정에서 북연왕이었던 운은 왕을 모시던 어사 이발지(李拔之)를 맞이한 자리에서 고구려의 먼 조상의 아버지로부터 고씨는 구려에 화합하여 속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고양씨의 후손이 스스로 일어나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전욱고양씨(顓頊高陽氏.BC.2554년)는 전술한 바와 같이 황제의 손자로부터 고구려가 기원된 것으로 보아야한다. 한편 삼국사기 백제 마지막 王이었던 의자왕 제육권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高句麗亦以高辛氏後姓高氏라고 적고 있다. 즉 고구려 역시 고신씨(高辛氏.BC.2476년) 후로부터 성을 고씨라고 되어있다. 다시말해 고구려의 조상은 황제의 증손자인 제곡고신씨(帝嚳高辛氏)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했다.
어찌 되었던 간에 고구려의 운조(雲祖:먼 조상)는 고양씨가 되었건 고신씨가 되었건 고구려의 조상임은 부인할 수 없다. 다만 황제로부터 후손으로 뿌리가 내려오고 있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황제는 4명의 왕후로부터 25명의 아들을 두었으나, 머리가 나쁜 11명은 성을 하사받지 못했다. 그중 14명만 성을 하사받았는데 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이름은 다섯 명이 고작이다.
황제의 아들 창의는 전욱고양씨(顓頊高陽氏)를 낳았다. 고로 황제의 손자인 고양씨로부터 구려 또는 고구려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황제의 아들 현효(玄囂)는 교극(蟜極)을 낳았는데, 교극의 아들이 제곡고신씨(帝嚳高辛氏)이다. 이는 산해경과 사기 오제본기에 기록하고 있다.
고씨의 뿌리가 이어져 내려 온 것은 문헌상으로 보면 제곡고신씨(帝嚳高辛氏.BC.2476년)이다. 고신씨의 뒤를 이은 사람은
요단군왕검(堯壇君王儉.BC.2357년)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之一".....五聖大師1981년 영인판
삼국유사 고조선편에는 분명히 요임금을 堯壇君王儉으로 기록하고 있다. 요왕검의 뒤를 이은 사람은 순(舜.BC.2284년)임금이며, 다음은 하, 은, 주로부터 삼한으로 이어져 고리국(櫜離國) 후로 구려, 부여를 거쳐 후에 고구려로 내려옴을 볼 수 있다.
고로 고양씨가 황제의 직계 손자라면 고신씨는 직계 증손자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고양씨로 본다면 친오촌 조카벌이 고신씨이고 고신씨의 입장에서 보면 큰아버지뻘이 된다. 여하간 고구려의 운조는 황제의 후손임을 정사가 잘 입증해주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