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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선운사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이다. 가장 오래된 조선 후기의 사료들에는 진흥왕이 창건하고 검단선사가 중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354년(공민왕 3)에 효정(孝正)이 중수하고, 1472년(성종 3)부터 10여 년 동안 행호(幸浩)선사 극유(克乳)가 성종의 숙부 덕원군(德源君)의 후원으로 크게 중창하여 경내의 건물이 189채나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 거의 타버렸는데, 1613년(광해군 5) 태수 송석조(宋碩祚)가 일관(一寬)·원준(元俊)과 함께 재건을 시작하여 1619년 완성했으며, 그뒤 근대까지 여러 차례 중수되었다. 현존하는 건물은 대웅전(보물 제290호)·영산전(靈山殿)·명부전·만세루(萬歲樓 :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53호)·산신각·천왕문·대방(大房)·요사(寮舍) 등이 있다. 절에 전하는 금동보살좌상(보물 제279호)·금동지장보살좌상(보물 제280호)·동불암마애불상(보물 제1200호)·영산전목조삼존불상(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8호)·석탑(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9호)·범종(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1호)과 중종과 부도 및 탑비(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2호)가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이밖에 다수의 조상(彫像)과 사적비 등이 남아 있다. 부속암자는 현재 4곳만 남아 있지만 19세기 전반에는 50여 개나 되었으며, 절 주위에는 진흥왕이 수도했다는 진흥굴, 검단선사에게 쫓긴 이무기가 바위를 뚫고 나갔다는 용문굴(龍門窟), 전망이 뛰어난 만월대(滿月臺), 동백나무숲 등의 명소가 있다.특히 대웅전 뒤에는 수령 약 500년, 높이가 평균 6m는 되는 동백나무들의 군락이 천연기념물 제 184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꽃이 만개하는 봄이면 사찰 뒤로 꽃 병풍을 펼쳐 놓은 듯한 장관을 이루고, 선운산의 동백숲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4월 중순경 동백연예술제가 열린다.
검단스님의 창건과 관련해서도 여러 가지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본래 선운사의 자리는 용이 살던 큰 못이었는데 검단스님이 이 용을 몰아내고 돌을 던져 연못을 메워나가던 무렵, 마을에 눈병이 심하게 돌았다. 그런데 못에 숯을 한 가마씩 갖다 부으면 눈병이 씻은 듯이 낫곤 하여, 이를 신이하게 여긴 마을사람들이 너도나도 숯과 돌을 가져옴으로써 큰 못은 금방 메워지게 되었다. 이 자리에 절을 세우니 바로 선운사의 창건이다. 검단스님은 "오묘한 지혜의 경계인 구름[雲]에 머무르면서 갈고 닦아 선정[禪]의 경지를 얻는다" 하여 절 이름을 '禪雲'이라 지었다고 전한다. 또한 이 지역에는 도적이 많았는데, 검단스님이 불법(佛法)으로 이들을 선량하게 교화시켜 소금을 구워서 살아갈 수 있는 방도를 가르쳐주었다. 마을사람들은 스님의 은덕에 보답하기 위해 해마다 봄ㆍ가을이면 절에 소금을 갖다 바치면서 이를 '보은염(報恩鹽)'이라 불렀으며, 자신들이 사는 마을이름도 '검단리'라 하였다. 선운사가 위치한 곳이 해안과 그리 멀지 않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염전을 일구었던 사실 등으로 미루어보아, 염전을 일구어 인근의 재력이 확보되었던 배경 등으로 미루어 검단스님이 사찰을 창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선운사 연혁
조선시대에 절을 크게 중창한 이는 행호 극유(幸浩克乳) 스님이다. 1472년(성종 3) 선운산의 한 암자에 머물며 수도하고 있던 행호스님은, 구층 석탑만이 외롭게 남은 채 폐허화된 선운사를 보고 안타까이 여겨 중창을 발원하였다. 이듬해(1473년) 제자 종념(終念) 스님과 함께 상경하여 성종의 작은아버지 덕원군(德源君)에게 중창의 뜻을 밝히고 도움을 청하자, 덕원군은 재물과 함께 직접 원문(願文)을 써주었다. 이에 나주 보을정도(寶乙丁島)에 가서 재목 1천여 그루를 구하고 봄부터 가을까지 기와 20여 가마를 구워, 1474년 가을에 2층의 장륙전(丈六殿)과 관음전(觀音殿)을 완공하였으며 이듬해 봄에는 선왕(先王)의 영혼을 추모하는 수륙재(水陸齋)를 크게 열었다. 1476년에는 천불대광명전(千佛大光明殿)을 조성하였고, 1481년에는 모든 건물의 단청을 마쳤을 뿐만 아니라 지장전(地藏殿)ㆍ동상실(東上室)ㆍ금당(金堂)ㆍ능인전(能仁殿)을 짓고 영산회(靈山會) 등 53불회탱(五十三佛會幀)을 조성하였다. 이와 같이 10여 년에 걸친 극유스님의 중창불사로 인해 선운사는 옛 모습을 되찾아, 숭유억불의 조선사회에서도 왕실의 원찰(願刹)로서 법등(法燈)을 환히 밝히게 되었다. 그러나 100여 년이 지난 1597년(선조 3)의 정유재란 때 어실(御室)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불에 타서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이후 1608년(광해군 즉위년)부터 2년간 승려 수십 명이 근근이 선방과 요사를 마련하고, 수년 동안 힘을 모아 법당 3칸을 지었다.
이러한 사정을 안타까이 여기고 있던 무장현감 송석조(宋碩祚)가, 선운사의 어실은 왕실의 재(齋)를 여는 곳이었으므로 나라의 도움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여 1613년(광해군 5) 봄 일관(一寬) 스님에게 중창을 의논하였다. 이에 일관스님은 원준(元俊) 스님과 힘을 합하여 수많은 집을 돌며 시주를 모으고, 어실을 구실삼아 도백(道伯)으로부터 고창 문수산의 재목을 얻어 보전(寶殿) 5칸을 세운 다음, 상하 누각과 동서 양실(兩室)을 건립하였다.
곧이어 법당ㆍ천불전ㆍ지장전ㆍ능인전 등을 창건하여 1619년까지 6년에 걸쳐 사찰의 골격을 갖추게 되었다. 이후로도 일관ㆍ원준스님 등의 뜻을 이어받은 스님들에 의해 중수와 중건이 계속되어 1620년에 정문ㆍ향운각(香雲閣)과 1624년에 천왕문(天王門)을 세우고 1634년 법당에 삼존상을 조성ㆍ봉안하였으며, 1658년에 시왕전(十王殿), 1659년에 해납료(海納寮)ㆍ삼선료(三仙寮), 1676년에 약사전(藥師殿), 1677년에 나한전(羅漢殿), 1678년에 극락전(極樂殿), 1682년에 칠성료(七星寮)ㆍ청심료(淸心寮), 1691년에 대승전(大乘殿) 등을 창건하였다. 이 무렵 절에서 수행하던 대중은 무려 260여 명에 달하여 당시 사찰의 규모와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이어 1693년에 동운암(東雲庵)을 창건하고 1699년에 미륵전(彌勒殿), 1705년에 관음전ㆍ양계료(養鷄寮)ㆍ양봉료(養鳳寮), 1706년에 팔상전(八相殿), 1709년에 한산전, 1713년에 장육전 등을 창건하였다.
선운사 대웅보전
선운사에 있는 조선 중기의 단층목조건물. 보물 제290호. 선운사의 본전(本殿)으로서 신라 진흥왕 때 세운 것으로 전하며, 지금 있는 건물은 조선 성종 3년(1472)에 중건하여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가 광해군 5년(1613)에 다시 지은 것이다. 건물은 앞면 5칸, 옆면 3칸으로 긴 평면을 이루며, 주간(柱間)이 넓고 기둥이 상대적으로 짧아 넓게 퍼져 있는 모습이다. 막돌 초석 위에 약간 배흘림이 있는 두리기둥을 세워 창방으로 결구하고 그 위에 평방을 놓은 내외3출목의 다포식 건물이다. 공간포(空間包)는 어간(御間)에 3구, 좌우 협간(狹間)과 툇간(退間)에 2구씩 배열했으며 정면 기둥 사이에는 빗살창호를 달고 서쪽 면에만 외짝 출입문을 달았다. 옆면에는 공포를 배열하지 않고 대신 고주(高柱) 2개를 세워 3칸으로 했다. 처마는 부연(附椽)이 있는 겹처마이며 지붕은 다포계 건물에서는 드믄 맞배지붕이다. 내부는 통칸이나 불벽(佛壁)을 1줄 세워 그 안에 불단을 설치했으며, 불단 뒤쪽으로 고주 3개를 세워 여기에 대량(大樑)과 종량(宗樑)을 짜맞추었다. 내부의 천장은 내진(內陳)의 어간만 우물반자이며 나머지는 평반자로 하고 외진에는 빗반자를 설치했다. 내진의 우물반자와 평반자에는 꽃무늬를 장식하고, 빗반자에는 구획을 하여 주악상(奏樂像)을 그려놓았으며 평반자 중 툇간에는 구름 속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용을 생동감 있게 그려놓았다. 이 건물은 정유재란 때 병화를 입어 파괴된 후 1614년(광해군 6)에 재건되었음이 사적기를 통해 확인되었다. 전체적으로 안정감있는 모습은 평야지대의 건물 특색을 잘 보여주는데, 다포계이면서 맞배지붕을 얹은 것이나 내부의 가구재가 간단한 것이 특색이며, 공포의 구성기법은 17세기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다포계(多包系) 맞배지붕에, 벽의 양 측면에는 풍우를 막기 위해 널판으로 풍판(風板)을 대었다. 막돌로 허튼 쌓기를 한 얕은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약한 배흘림이 있는 두리기둥을 세웠다. 정면의 모든 칸에는 빗살 창호를 달았으나 후면에는 중앙 칸에만 창호를 달고 양 측면의 협칸에는 교창(交窓)을 달았다. 동쪽 면은 모두 벽체로 처리하고 서쪽 면에는 외짝 출입문을 달았다. 내부는 통칸으로서 불벽(佛壁)을 한 줄로 세워 그 앞에 불단을 만들었으며, 불단 위에는 흙으로 빚은 소조(塑造) 삼존은 중앙의 비로자나불을 주존(主尊)으로 하여, 왼쪽에 아미타불과 오른쪽에 약사불을 모셨다. 삼존불상 뒤의 후불벽화는 1688년(숙종 14)에 조성한 것으로, 중앙의 비로자나불회도를 중심으로 좌우에 아미타회상도·약사회상도가 각각 자리 잡고 있다. 천장에는 사실감이 돋보이는 커다란 운룡문(雲龍紋)이 그려져 있고, 안쪽 천장에는 우물 정(井)자 모양을 한 우물천장을 설치하여 구름ㆍ학ㆍ연꽃 등으로 장엄하였다. 내부 벽에는 산수ㆍ비천ㆍ나한 등을 벽화로 장식하였고, 닫집과 중앙의 불단 등은 비교적 간략하고 단순한 모습이다. 이 건물은 미술사적으로 조선 후기의 뛰어난 건축기술과 조형미를 지니고 있다.
건축물의 구조 및 특징
선운사는 산중이지만 거의 평지에 가까운 넓은 터에 자리 잡았다. 입구의 일주문을 지나 산쪽으로 올라가면 오른편 전나무 숲 앞에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비문을 짓고 글씨를 쓴 백파(白坡) 선사의 비가 있다. 더 올라가면 천왕문(天王門) 앞에 다다르는데 진입방향과 직교되게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일반적인 산지가람에서는 입구에 산문(山門)들을 중첩되어 있어 진입에 따라 공간의 깊이감이 증대되는데 선운사는 이와 약간 다르다.
주공간은 원래 서로 독립된 2개의 영역이 병렬 형식으로 연결되어 하나의 공간으로 통합된 특이한 배치를 보여준다. 주축상에는 주불전인 대웅보전(大雄寶殿)과 강당인 만세루(萬歲樓), 천왕문이 일렬로 놓이고 이와 직교되게 요사가 위치하여 중심 곽을 이루고 있으며, 대웅보전 동쪽에는 또 다른 축상에 부불전인 영산전(靈山殿)과 요사채가 놓이고 이와 직교되게 명부전(冥府殿)이 놓여 영역을 형성하고 있다. 영산전 뒤쪽에는 팔상전(八相殿)과 산신각(山神閣)이 위치하고 있으며 중심곽 동쪽에는 근래에 신축한 종무소가 있다.
선운사에서 인천강의 계류를 따라 산 위쪽으로 약 1km 정도 올라가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현재 선원(禪院)으로 사용하고 있는 참당암(懺堂庵)이 있고 왼쪽으로 가면 내원궁(內院宮)과 마애불이 있는 도솔암(兜率庵)에 이른다. 대웅전은 석가모니부처님을 봉안한 전각으로 대웅이란 말의 뜻은 인도의 옛말 마하비라를 한역한 것으로 법화경에서 석가모니부처님을 위대한 영웅, 즉 대웅이라 일컫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대웅보전 공포]
선운사 대웅보전은 선운사의 주불전(主佛殿)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이다. 장대석을 4벌대로 쌓은 석축 위에 외벌대의 낮은 기단을 두고 자연초석을 덤벙주초 방식으로 놓았는데 측면 고주의 초석과 활주 초석은 원형 장초석이다. 기둥은 민흘림으로 치목하였으며 일부는 부재의 휘어진 상태를 그대로 사용한 것도 있다. 귀솟음은 약간 있으나 안쏠림 기법은 보이지 않는다.
공포는 다포계(多包系) 형식으로 전후면에만 배열되어 있는데 기둥 위의 주상포(柱上包) 외에 어칸에 3구, 양협칸에 2구씩의 공간포(空間包)를 설치하였다. 제공의 외부 끝은 앙서형이며 내부는 모두 구름 무늬를 새긴 운궁(雲宮) 형식으로 처리하였다. 세부를 살펴보면 대, 중, 소첨차를 모두 갖추었으며 행공첨차의 하부를 화각한 점 등이 일반적인 다포계 법식과는 다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정면 5칸 가운데 어간만 교살 4분합문을 달았고 양협간과 툇간에는 2분합문을 달았으며 양측면의 전협간에는 세살문을 한 짝 달았다. 지붕은 맞배 형식이며 처마는 서까래 위에 부연(浮椽)을 둔 겹처마이다. 내부에는 중앙 후측으로 4개의 고주를 두었고 이에 의지하여 후불벽을 꾸몄는데 그 앞에 불단을 설치하여 석가삼존불(釋迦三尊佛)을 봉안하였다. 가구(架構)는 보편적인 1고주 5량 형식인데 대들보는 전면 평주 위에 걸쳐 고주 몸통에 끼이도록 하였으며 그 위에 동자대공을 세워 종량(宗樑)을 받쳤다. 측면은 2개의 고주를 세우고 그 사이에 종량을 걸었으며 고주와 전후면 평주 사이에는 툇보를 걸었다. 종량 위에는 판대공(板臺工)을 두어 종량을 받쳤다.
금동보살좌상
선운사에 봉안되어 있는 조선 초기의 금동지장보살좌상으로 높이는 1m이다. 머리는 고려시대 지장보살상에서 폭넓게 나타나는 두건(頭巾)을 쓴 모습이며, 두건을 묶은 좁은 띠가 이마를 두른 후 귀를 덮고 양 가슴부분까지 내려와 있다. 풍만한 얼굴에 조그마한 아래턱 주위로 살집이 많은 이중턱을 이루어 후덕한 인상을 주며, 목에는 굵게 주름진 삼도(三道)가 표현되어 있다. 하체는 무릎 높이가 낮아서 상체에 비해 빈약한 편이고, 결가부좌한 다리는 옷에 덮혀 있어 보이지 않는다.오른손은 어깨 높이까지 들어서 엄지와 넷째손가락을 맞댈 듯 굽혔고, 왼손은 아랫배에 붙여서 엄지와 중지를 약간 구부렸는데 비교적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어깨에서 끈으로 매듭지은 독특한 치레장식이 특징적인데, 이는 고승의 진영이나 불ㆍ보살상에서 보이는 형식이기도 하다.
겉옷 안에는 수평으로 가로질러 가슴까지 올라온 군의(裙衣)를 띠매듭으로 단정하게 동여매었다.이 보살상은 선운사 도솔암에 봉안되어 있는 고려 후기의 선운사지장보살좌상(禪雲寺地藏菩薩坐像, 보물 제280호)과 목걸이 장식이나 밋밋한 가슴표현 등이 유사하지만, 머리가 크고 하체가 빈약하여 신체비례가 부자연스러운 점, 목이 짧고 어깨가 올라가 움츠린 듯한 자세, 간략한 장식과 형식적인 옷주름 등은 고려 보살상의 양식에서 벗어난 것으로 조선 초기의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선운사지장보살좌상과 함께 그 예가 드문 지장보살상의 하나로, 조선시대 지장신앙의 양상을 보여주는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지장보살상은 일제강점기에 도난을 당한 적이 있는데, 이때 영험함을 보인 사실로 인해 더욱 널리 추앙받고 있다. 1936년 어느 여름에 일본인 2명과 우리나라 사람 1명이 공모하여 보살상을 훔쳐간 뒤, 거금을 받고 매매하여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부터 지장보살상이 영이(靈異)를 나타내기 시작하여, 소장자의 꿈에 수시로 나타나서 "나는 본래 전라도 고창 도솔산에 있었다. 어서 그곳으로 돌려 보내달라"고 하였다. 소장자는 다소 이상한 꿈으로만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이후로 병이 들고 가세(家勢)가 점점 기울게 되자 꺼림칙한 마음에 보살상을 다른 이에게 넘겨 버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지장보살이 소장자의 꿈에 나타났으나 그 역시 이를 무시하였고, 집안에 우환이 끊이지 않게 되자 다시 다른 이에게 넘기게 되었다.
그후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면서 이 보살상을 소장한 사람들이 겪은 일들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마지막으로 소장하게 된 사람이 이러한 사실을 고창경찰서에 신고하여 모셔갈 것을 부탁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당시 선운사 스님들과 경찰들이 일본 히로시마로 가서 모셔오게 되었는데, 이때가 도난당한 지 2년여 만인 1938년 11월이었다. 당시 잃어버린 보살상을 다시 모시고 온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찍은 사진에도 사건에 대한 개요가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당시 주지는 '이우운(李雨雲)'으로 기재되어 있다.
도솔암 지장보살좌상
대좌(臺座)와 광배(光背)가 모두 없어지고 불신(佛身)만 완전하게 남아 있는데, 상체가 늘씬하고 당당하여 고려 후기의 장곡사금동약사여래좌상(보물 제337호)이나 문수사금동불좌상과 흡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길상좌(吉祥坐)를 한 탄력적인 하체나 부드럽고 단아한 어깨선, 상ㆍ하체의 비례 등이 전체적으로 균형잡힌 형태를 지니고 있다. 머리에는 두건을 썼는데, 이마를 감싼 후 귀 뒤로 넘겨서 어깨까지 천을 늘어뜨린 모습이다.
이러한 형태의 두건을 쓴 지장보살〔被巾地藏〕의 모습은 고려시대에 널리 유행하였던 도상적 특징으로, 현존하는 많은 고려불화에서 그 예를 살펴볼 수 있다. 얼굴은 둥글고 단아한 인상을 주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이목구비 등을 세부적으로 꼼꼼하게 표현하였다. 양 귀에는 만개한 화문(花紋)을 띠로 연결하여 귓불에 묶은 이식(耳飾)을 착용하고 있어,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보살상이 원형 고리를 길게 늘어뜨려 매달고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른 특이한 형태라 하겠다.
오른손은 가슴 부분에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댄 중품인(中品印)을 취하고 왼손은 가슴과 배 중간쯤에 들어 법륜(法輪)을 잡고 있는데, 이는 육도중생을 구제한다는 의미로서 보주(寶珠)ㆍ석장(錫杖)ㆍ법륜 등의 지물을 들고 있는 지장보살의 일반적인 특성을 표현한 것이다. 앉은 자세는 오른발을 왼 무릎에 올린 모양으로 발을 실감나게 표현하였다. 어깨나 소매ㆍ무릎 등에 몇 가닥의 간단한 주름만을 표현하여, 상에 나타난 선묘는 유려하게 휘어지는 맛과 함께 단순ㆍ명쾌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 보살상은 고려 후기의 불상양식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우아하고 세련된 당대 최고의 걸작이라 할 수 있다.
도솔암의 서편 암벽 칠송대(七松臺)에 새겨진 높이 13m, 너비 3m에 이르는 거대한 마애불상이다. 전설에 의하면 백제 위덕왕(재위 554∼597년)이 검단선사(黔丹禪師)에게 부탁하여 암벽에 불상(마애불)을 조각하고 동불암이라는 공중누각을 짓게 하였는데, 조선 영조 때 무너졌다고 한다. 불상은 낮은 부조로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이며, 머리에는 뾰족한 육계가 있다. 방형(方形)에 가까운 평면적인 얼굴에 눈은 가늘고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으며, 우뚝 솟은 코에 앞으로 내민 일자형의 두툼한 입술이 소박하고 익살스러운 미소를 띤 것처럼 보인다. 귀는 어깨에 닿을 정도로 길게 늘어져 있고, 목은 표현하지 않아서 상체 위에 머리를 올려놓은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상체는 방형에 가슴이 넓고 평면적이며, 결가부좌한 넓은 하체에 손과 발 역시 체구에 비해 큼직큼직하다. 투박한 두 손은 활짝 편 채 아랫배에 가지런히 붙여져 있다.
불의(佛衣)는 통견(通肩)으로 두꺼운 편은 아니나 옷주름선이 선각으로 형식화되어 있고, 평평한 가슴 아래로 선명하고 단정한 군의(裙衣)의 띠매듭이 가로질러 새겨져 있다. 대좌는 비교적 높은 2단으로 되어 있는데, 상대(上臺)에는 옷자락이 늘어져 덮여 있고 하대(下臺)는 간략한 연꽃무늬의 연화좌로서 전반적으로 마멸이 심한 편이다.
광배는 표현되지 않았고, 가슴에는 사각형으로 큼직하게 복장(腹藏)구멍을 나타내었다. 머리 위에는 사각형의 구멍이 여러 개 뚫려 있고 부러진 서까래가 꽂혀 있는 것도 있는데, 이는 불상을 보호하기 위해 지붕만 있는 누각 형태의 목조 전실(前室)을 마련하였던 흔적으로 보인다. 이 불상은 고려 초기의 거대한 마애불 계통 불상으로 크게 주목받고 있다. 사람들은 이 마애불을 미륵불이라 부르고 있는데 불상의 배꼽에 신기한 비결(秘訣)이 숨겨져 있다는 전설이 전하여, 동학농민전쟁 무렵에 동학의 주도세력들이 미륵의 출현을 내세워 민심을 모으기 위해 이 비기를 꺼내가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선암사의 고승
설파상언(1707~1791)
조선 후기의 승려로 화엄학에 밝았다. 대법사의 이름은 상언(尙彦 1707~1791)이고 호는 설파, 속성은 전주이(李)씨. 호남 무장현(茂長縣 :지금 고창군 무장면) 사람으로 효령대군의 11세손이다. 부친은 태영(泰英)이고 모친은 파평윤씨이다. 조실부모하고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스스로 살길이 없었다.
19세에 고창 선운사(禪雲寺)에 투신하여 운섬(雲暹) 장로에게 머리 깍고 연봉(蓮峯)과 호암체정(虎巖體淨, 1687~1748 환성지안의 제자임) 두 화상에게 게송을 받았다. 또 회암정혜(晦菴定慧 1685~1741) 스님에게 배웠다. 선종(禪宗)의 계보로 말하면 서산(西山)에게 7세손이 되고 환성지안(喚醒志安 1664~1729)에게 손자가 된다. 33세에 대중들의 강력한 요청으로 용추(龍湫) 판전(板殿)에서 강좌에 올랐다. 스님은 어릴 때부터 대단히 총명하였는데 여러 이름난 스님들을 참방함에 미쳐서는 불교의 진리에 대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즉시 이해하였다. 신묘한 이해는《화엄경》에 더욱 풍부하였다. 반복하여 공부한 것은 한강의 모래알 수처럼 많고 강송하는 소리는 꾀꼬리 울음같이 퍼지었다. 마침내 그 틀린 점을 바로잡고 그 귀취를 통일하여 근세 바보의 꿈 이야기같은 견해를 씻어 버렸다. 배우기를 원하는 자가 날마다 모여들어 각각에게 깨달음의 길을 제시하였는데 그 설이 무궁무진하였다.
삼승오교(三乘五敎)에 다 통했지만, 특히 화엄에 조예가 깊었다. 청량(淸凉)이 찬초(撰抄)한 "소과(疎科)"를 밝게 해석하고 일목요연하게 순서를 정하여 "화엄은과(華嚴隱科)"를 펴냈다.
옛날 청량대사(淸凉大師:징관澄觀?~839 중국 당나라 스님)가 《화엄경수소연의초》를 지었는데 그 뜻이 은미하여 강해하는 이들이 괴롭게 여겼다. 스님이 한번 보고 동그라미 쳐서 소(疏)니 과(科)니 표시하여 각기 귀결됨이 있게 하였다. 마치 나그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듯이. 이윽고 승재와 부영 등이 스님에게 사뢰기를 "《화엄경소초》 가운데 인용한 것에도 틀리고 쓸모없는 것이 없지 않으니 어찌 해인사로 옮겨가 여러 판본을 고증하여 다른 점을 보충하지 않습니까?" 하자 스님은 가서 머물며 비교 고증한 뒤에야 그만두었다. 이로부터 금강산에 유람한 것은 두 번, 묘향산 한 번, 두류산은 늘 참선하였다. 영조 46년(1770)에 징광사(澄光寺: 순천시 낙안면 소재)에 불이 나서 소장되었던《화엄경》80권 책판이 다 소실되었다. 스님이 탄식하며 "여기에 마음을 다하지 않는다면 감히 여래에게 예배할 수 있겠는가?" 고 하였다. 그리하여 재물을 모아 다시 판각하였는데 사람과 하늘이 도와 봄에 시작하여 여름에 마쳤다. 그 불명확한 부분은 오직 스님이 입으로 외운 것에 의지하였다. 책판이 완성(영조 50년, 1774)된 뒤 새로 장판각을 영각사(靈覺寺: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소재)에 세워 보관하였다. 그 며칠 전에 호랑이가 절 뒤에서 땅을 후벼팠었고 승려의 꿈에서도 신이 고하기를 '이곳은 여래의 대경(大經)을 간직할 만하다.' 고 하였었다. 《화엄경》을 장판각에 봉안할 때 상서로운 빛이 공중에 서리니 모인 사람들이 다 신기하게 여겼으나 스님은 우연일 뿐이라고 하였다. 이 뒤로 영각사에 우거하였다. 어느 날 주지에게 이르기를 "절을 이전하지 않으면 반드시 물에 무너질 것이니 어찌 도모하지 않는가?" 고 하였으나 말을 듣지 않았다. 얼마 안 있어 큰 물이 져서 절이 과연 무너지고 승려들도 많이 빠져 죽었다. 그제야 대중들이 그 신통함에 감복하였다. 만년에는 금강산, 묘향산, 두류산 등으로 편력하면서 참선을 했으며, 지리산의 영원암(靈源庵)에서 10여년을 지내는 동안 염불을 일과로 하여 하루에 1만편을 암송했다고 한다.
정조 14년(1790) 섣달에 작은 병에 걸렸고 15년(1791) 1월 3일에 기쁜 표정으로 열반에 들었다. 나이 85세 법랍 66세였다. 이날 제자 27명이 받들어 다비하였다. 여러 고승이 달려와 통곡하였고 하계의 중생들도 서로 고하며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스님은 일찍이 근세에 화장할 때 사리(舍利:화장한 뒤 남는 영롱한 구슬)가 나온다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다비함에 미쳐 상서로운 빛이 7일 밤 동안 사라지지 않았으나 끝내 한 개의 사리도 나타나지 않았다. 저술에는 "청량초적결은과(淸凉抄摘抉隱科;화엄은과)" 1권과, "구현기(鉤玄記)" 1권이 있다 하나 현존 여부는 미상이다.
백파 긍선(1767∼1852)
백파 긍선(1767∼1852) 스님은 조선시대 선문(禪門)의 중흥주로 추앙받는 고승으로서 법호는 백파(白坡), 법명은 긍선(亘琁)이며 속성은 전주이씨이다. 전북 무장에서 태어나 12세에 출가하여 선은사(禪隱寺) 시헌(詩憲) 스님의 제자가 된 뒤 연곡(蓮谷) 스님에게 사미계를 받았으며, 21세 때 상언(尙彦) 스님으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 그뒤 평안북도 초산의 용문암(龍門庵)에서 수행하다가 도를 깨우쳤으며, 지리산 영원암(靈源庵)으로 가서 상언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고 1년간 공부를 계속하다가 영구산 구암사(龜巖寺)에서 설봉 회정(雪峰懷淨) 스님의 법통을 계승하였다.
26세 때에 백양산 운문암(雲門庵)에서 강좌를 열어 대중 1백여 명에게 선강(禪講)을 한 뒤 20여 년 동안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1811년에는 "불법의 진실한 뜻이 문자에 있지 않고 도를 깨닫는 데 있는데도 스스로 법에 어긋한 말만을 늘어놓았다"고 참회한 뒤, 평안북도 초산 용문동으로 들어가서 5년 동안 수선결사운동(修禪結社運動)을 전개하였다. 그 뒤 다시 운문암에서 수도와 포교로써 선법을 현양하여 크게 이름을 떨쳤으며, 사람들이 '호남선백'이라고 불렀다. 이때 선의 지침서인 『선문수경 禪門手鏡』을 저술하였는데, 이 책은 당시 선사들 사이에서 일대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1830년에 다시 구암사로 돌아와서 선강법회를 열어 후학들을 지도하였고, 1840년부터 화엄사(華嚴寺)의 선사영당 옆에 작은 암자를 짓고 좌선하다가 1852년 4월에 입적하였는데, 그때의 나이 86세, 법랍 74세였다.다비 후에 제자들이 구암사에 탑을 세우고 영정을 화장사(華藏寺)에 봉안했으며, 1858년에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찬한 비를 선운사에 세웠다. 법계는 휴정(休靜)의 4대파 중의 하나인 편양문파(鞭羊門派)에 속하며, 화엄사상과 선을 겸수하는 가풍을 지닌 지안(志安)의 문손으로서 법맥은 휴정-언기(彦機)-의심(義諶)-설제(雪霽)-지안(志安)-체정(體淨)-상언-회정-긍선으로 이어진다. 대표적인 제자로는 유형(有炯)ㆍ한성(翰醒)ㆍ정관(正觀) 등이 있다. 율과 화엄과 선의 정수를 모두 갖춘 거장으로서, 평소에 교유가 깊었던 김정희는 초상화를 그린 뒤 그를 '해동의 달마(達磨)'라고 격찬하였다.
스님은 김정희, 초의(草衣) 선사 등과 선문의 요지에 대해 거침없는 상호토론을 벌여 근세 불교계의 가장 치열한 교리논쟁을 유발시킴으로써 당시 불교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으며, 이러한 논쟁은 이후로도 제자들에 의해 계속 이어졌다. 이처럼 한말의 격변기를 살면서 전통 선지를 재정립하여 산문(山門)을 충실히 지켜나가고자 힘쓴 대종장(大宗匠)의 면모를 읽을 수 있다.
저서로는 『정혜결사문 定慧結社文』ㆍ『선문수경』ㆍ『육조대사법보단경요해 六祖大師法寶壇經要解』 1권, 『선문염송사기 禪門拈頌私記』 5권, 『금강경팔해경 金剛經八解經』 1권, 『선요기 禪要記』 1권, 『작법구감 作法龜鑑』 2권, 문집인 『백파집』 4권 등이 있다.
환응 탄영(1847∼1929)
환응스님은 1847년 4월 전북 고창(당시는 무장현)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김기우(金基愚) 선생이고, 모친은 박씨(朴氏). 14세 되던 해 고창 도솔산 선운사에서 성일(性鎰)스님 상좌로 출가해 탄영(坦泳)이란 법명을 받았다. 이어 보월(寶月)선사에게 사미계를 받고 16세부터 백양사 운문암에 주석하던 경담(鏡潭)스님에게 내전(內典)을 두루 배웠다. 1865년(19세)에는 경담스님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선.교.율을 고루 갖춘 경담스님은 화재로 소실된 운문암을 중창했다. 환응스님은 순창 구암사(龜岩寺) 설두(雪竇)스님과 순천 송광사 우담(優曇)스님 회상에서 교학을 깊이 공부했다. 31세에 경담스님에게 입실(入室)하여 환응(幻應)이라는 법호를 받은 후 운문암에서 25년간 강석(講席)을 열었다. 백양사와 산내 암자인 청류암(淸流庵)에서도 후학을 지도했고, 노년에는 운문암 곁에 우은난야(愚隱蘭若)를 짓고 참선수행에 전념했다.시문(詩文)조차 수행에 방해가 된다고 하여 짓지 않았을 정도로 율행(律行)에 청정하였으며, 관세음보살과 영산(靈山) 16아라한에게 조석으로 분향, 공양하기를 만년까지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12년 일제의 사찰령으로 전국의 사찰이 31본산체제로 개편된 뒤 대중의 간청으로 백양사(白羊寺) 주지를 맡아 3년간 승풍과 기강을 바로잡았다. 후임 주지는 환응스님의 전강제자인 만암스님이다. 1915년에는 광성의숙 숙장겸 강사로 도제 양성에 힘썼다. 1921년 제자 호명(浩溟)스님이 고창 선운사(禪雲寺) 주지가 된후 동운암(東雲庵)에 주석했다. 1929년 1월 7일 개최된 조선불교선교양종(朝鮮佛敎禪敎兩宗) 승려대회에서 교정(敎正)으로 선임됐다. 교정은 지금의 종정(宗正)으로 조선불교에서 차지한 환응스님의 위상을 짐작 할 수 있다. 당시 함께 교정으로 추대된 스님은 다음과 같다. 한암(寒岩, 漢岩).해담(海曇).동선(東宣).한영(漢永).용허(龍虛).경운(敬雲)스님. 환응스님은 1929년 4월7일(음력) 오전 11시 고창 선운사에서 시적(示寂)했다. 세수 82세, 법납 64세. 다비후 수습된 사리가 사흘이나 방광하는 신이(神異)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후학으로는 호명(浩溟).영호(映湖, 朴漢永).만암(曼庵) 종래(鐘來).장조(長照) 스님 등이 있으며, 1942년 6월 선운사에 비가 모셔졌다.
석전 정호(1870∼1948)
석전 박한영(朴漢永) 스님은 조선왕조의 국운이 기울어 가던 고종 7년 즉 1870년 8월 18일(음력)에 전북 완주군 초포면 조사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박성용(朴聖容) 公이었고 어머니는 진양(晋陽) 강씨(姜氏)였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와 어린 형제들과 유년 시절 고향 땅에서 농사를 지으며 가난하게 살았다. 그러나 타고난 총명과 남다른 학문의 관심은 마을 서당을 가까이하면서 점차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다.
17세 되던 해에 어머니가 전주 위봉사에서 금산화상(錦山和尙)의 삶과 죽음에 관한 생사법문을 듣고 전해주어 이것에 크게 감동한 바가 있었다. 이 일대사(一大事) 인연이 계기가 되어 1888년 19세 되던 해 금산화상의 법제자가 되어 법호를 정호(鼎鎬)라 하였다. 1890년 21세에 장성 백양사 운문암의 김환응(金幻應) 스님에게 사교(四敎, 능엄경, 기신론, 금강경, 반야경, 원각경)를 사사받고 1892년 23세에는 순천 선암사의 김경운(金擎雲) 스님에게서 대교(大敎, 화엄경, 염송, 전등록)를 배웠다. 25세(1894)에 안변 석왕사를 비롯하여 신계사와 건봉사에서 안거하였고, 이어 26세(1895)에는 순창군 구암사의 설유처명(雪乳處明) 스님의 법을 이어 당호를 영호(映湖라 하였다. 석전(石顚) 또는 석전산인(石顚山人)이라는 시호도 갖게 되었는데 이것을 일찍이 추사 김정희가 백파(白坡)스님에게 '석전(石顚), 만암(曼庵), 구연(龜淵)'이라는 글씨를 지어주면서 "훗날 법호 가운데 도리를 깨친 자가 있으며 이로써 호를 삼으라"는 부탁에서 설유처명 스님에게 유전되어 박한영 스님에 와서 그 이름이 전수된 것이라고 전해진다. 석전스님은 이후 여러 곳에서 불법의 강론을 열었다. 30세 되던 해부터 산청의 대원사, 장성의 백양사, 해남의 대흥사, 합천의 해인사, 보은의 법주사, 구례의 화엄사, 안변의 석왕사, 동래의 법어사 등에서 대법회를 열어 그때마다 청중들의 가슴 속에 돈독한 불심을 심어갔다.
1908년 스님의 춘추 39세 되던 해 서울에 올라와 불교개혁운동에 참가하게 된다. 1910년 스님의 세수 41세시 일제의 조선 강점은 그 마수를 드러냈다. 이 기회를 틈타 해인사 이회광이 연합맹약 7조약을 체결하여 한국불교와 일본불교를 합종하려 한 데 대하여 한용운(韓龍雲)빦平貶?陳震雄)빋窪쓿?金鍾來) 등과 함께 반대하여 한국의 불교전통은 임제종(臨濟宗)임을 밝히고 일제의 한국불교 말살정책에 정면으로 맞섰다. 43세 되던 1912년에는 중앙불교전문학교(현 동국대학교의 전신)의 교장에 취임하였다. 그 이듬해인 1913년(44세)에는 해동불보(海東佛報)를 창간하여 종횡무진으로 불교의 자각과 불교개혁운동을 주장하였다. 1914년에는 고등불교강숙이 설립되어 숙사가 되었다. 1916년에는 중앙불교학림이 설립되어 강의를 맡아 후학지도에 열정을 보이셨다.석전스님은 개운사에서 학인을 지도할 때 중앙불전 교장도 겸했다. 개운사에서 불전까지 걸어 다녔다. 외출에서 돌아온 어느날. 책상에 놓인 ‘과자’를 집어 무심코 입에 넣었다. 그런데 맛이 특이했다. 시자를 불렀다. “무슨 과자 맛이 이렇게 고약하냐?” 깜짝 놀란 시봉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그것은 과자가 아닙니다. 세수하실 때 쓰시라고 어느 교수님이 가져온 ‘신식 세수비누’입니다.” 그말을 듣고 스님은 미소만 지었다고 한다. 제자 서정주는 생전에 “(노스님의 그같은 일을 전해 들은) 학인들은 또 한바탕 웃음판이 벌어졌다”면서 “천진하고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지녔던 스님의 일상은 늘 그러하셨다”고 회고했다.
“공장 굴뚝에서 연기를 뿜는 듯 하는구먼.” 1934년 봄 어느날 개운사 별채 툇마루에 앉아 담배를 피우던 미당(서정주)은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어느 순간 석전스님이 나타났던 것이다. “육당(최남선)은 서른세살까지 피우던 담배를 역사 공부하려고 끊었다. (너는) 공부하려고 왔다며, 그까짓 것 하나 끊지 못하냐.” 크게 꾸지람을 한 것은 아니지만 몸둘 바를 몰랐다. 미당은 <월간 해인> 기고에서 “꾸지람을 들은 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들고 있던 담배를 떨어뜨리고 멍하니 땅만 보았다”면서 “스님의 가슴 속에서 울리는 소리에 쓰라린 눈물이 고여 있음을 깨달았다”고 했다.
“석전사(師)을 만나매, 내전이고 외전이고 도대체 모르는게 없을만큼 박식했다.” 석전스님의 한시를 모은 <석전시초(石顚詩抄)> 서문에 육당 최남선이 쓴 글이다. 당시 최고 엘리트였던 최남선은 “나는 누구에게도 물어볼 것이 없는데, ‘석전선생’에게는 물어볼 것이 있다”고 했다.
위당 정인보도 <석전상인소전(小傳)>이란 글에서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한영과 함께 길을 갈라치면 한국 땅 어디를 가나 그는 모르는게 없다. 산에 가면 산 이야기, 물에 가면 물 이야기…, 이른바 사농공상(士農工商) 무엇에 관한 문제를 꺼내든지간에 화제는 고갈될 줄 몰랐다.” 그외에도 신석정, 서정주, 이광수, 조지훈, 김달진, 김어수 등 당대의 ‘재주꾼’들이 스님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또한 안재홍, 홍명희, 홍종인, 안오성, 모윤숙, 고희동, 김복진, 이동영, 김동리, 오세창 등도 가깝게 지냈다. 일제 강점기 대표적인 민족신문였던 동아일보 창간호에 스님 ‘축사’가 게재된 것도 당시 위상을 비추어 볼 수 있다. 어느 법회나 스님에게 법문을 청할 때는 청법가를 한다. 설법을 하게 될 스님이 법상에 오르면 모든 대중이 청법가(또는 청법게)를 하는 것이 상례이다. 그러나 석전스님은 예외였다. 청법가가 끝나기 전에는 결코 법상에 오르지 않았다. “법문은 부처님께서 설하는 것이고, 나도 대중과 함께 부처님 법을 배우는 것인데, 어찌 앞에 나설 수 있겠느냐.” 당신도 불법을 배우는 입장에서 법회에 참석했고, 비록 설법은 하지만 ‘청법을 하는 입장’이라는 것이다. 당대 최고의 석학이며, 불교계의 가장 큰 어른이면서도 하심하했던 스님을 누가 따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석전스님은 불교 유신을 위한 6가지 과제를 제시했다.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유효한 불교집안의 숙제이다. △참다운 계정혜 △이타행 △학교설립과 인재양성 △포교의 현대와 △생산불교로의 전환 △인민에 대한 자선사업 등이다. 학교 설립과 인재양성은 “고루한 사문적인 훈화에만 힘쓰지 말고 학교를 세워 지식을 보급시켜 영재를 길러야 한다”는 소신이다.
스님은 1934년 불교전문학교장 자격으로 신년사를 발표했다. “무한한 고난 없이는 큰 성공이 없다”는 신년사는 나라를 빼앗긴 조선인들에게 희망의 메시지였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지(智)에 둥글고 행(行)에 모 나자. 원지방품행(圓智方品行)하야 살자. 품행에 있어서는 좀 더 방정(方正)하고 그 동작에 있어서는 좀더 단정하자. 그리고 언제까지나 취생몽사(醉生夢死)할 것이냐. 각오가 있을 뿐이다. 그 각오야 말로 이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것은 속성(速成)을 바라지 말라는 것이다. 조숙(早熟)하지 말라는 것이다. 무한한 고난이 없이는 큰 성공이 없는 법이다. 무량아승지겁에 만행◎◎하여서 묘익집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 성취가 있기 전에 그 목적을 위하야 무◎의 각고를 쌓고 쌓은 후에야 비로소 위대한 성공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곧 신년을 이바지하여 중생에게 외치는 새 신호이다.
57세 되던 1926년 서울 안암동 소재 개운사 대원암에 참다운 불교인의 양성을 위한 불교강원을 설립하여 이후 20여년 간 불교의 지도적 영재를 배출하니 청담, 운허 조종현 스님을 비롯하여 신석정, 조지훈, 김달진, 김어수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당시 가까이 사귄 명사로는 최남선, 정인보, 변영로, 홍명희, 오세창, 권동진, 김경희, 안종원, 민형식, 윤희구, 여귀형 등을 들 수 있다. 그 외에도 특히 만해 한용운과 두터운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1929년 조선불교교정에 취임하여 조선불교 최고 지도자로서 폭넓은 도량으로 종단을 이끌었으며, 1931년 62세 때에는 불교전문학교의 교장으로 선임되어 고등교육 일선에서 불교를 전하고 도제양성에 온몸과 마음을 다 바쳐 불교중흥과 조국광복의 인재양성에 몸바쳤다. 1933년 64세 되던 해 중국 땅의 불교유적을 돌아보았으며, 그 후 광복을 맞이하여 새롭게 조직된 조선불교 중앙총무원의 초대 교정(敎正, 宗定)에 취임하여 한국불교의 새로운 종단을 이끌었다. 76세시 정읍 내장사로 내려와 1948년 세수 79세로 사바세계와 인연을 다하니 법랍 61년이었다. 그해 2월29일 세연을 다할 겨울에 아무런 기별도 없이 해질 무렵 불쑥 나타난 석전스님은 반갑게 맞이한 주지스님에게 "나 여기서 죽으려고 왔다"는 천진한 말 한 마디 남기고 미소지었다. 물론 당신의 열반을 예언하고 점지(點指)한 걸음이었다. 모름지기 석전의 방하착(放下着)은 실로 초연적이었다. 일찍이 석전의 시문집을 영인할 무렵 덧붙인 서(序)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세간의 물욕을 먼지처럼 털어버리신 스님의 풍모는 그대로 고담한 매화(梅花)가 눈 속에서 피되 허울을 다 벗어버리고 두세송이 꽃으로 짙은 향기를 던지는 것과 추호도 다름이 없다"고 석전의 모습을 여실히 비유한 시인 신석정(辛石汀)의 지적이 새롭다. 사실 석전스님은 학문에 있어서나 교(敎)와 선(禪)에 정통하고 내외서(內外書)에 이르기까지 세속 선비가 따르지 못할 만큼 뛰어났다. 선서(禪書)의 영향은 벽파스님의 영향이 컸을 것이며, 외학(外學)의 조예나 시(詩), 문(文)의 통달은 스승 설유처명의 영향이라는 사실은 쉽게 수긍이 간다. 스님의 생각은 늘 이 사회와 대중을 안목에 두고 불교를 생각하고, 불교를 실현하려고 하였다. 각종 불교지의 논설들은 시종일관 불교 자체의 비판과 자각의 촉구였다. 그리고 스님의 불교관을 화엄적 세계관이라고 볼 수 있으며 원융적(圓融的) 실천(實踐)의 화엄사상(華嚴思想)이 그의 불교적 이상이요, 세계관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시
스님은 많은 한시를 남겼다. 그 가운데 ‘돌대(石臺)’라는 제목의 시를 소개한다. 이 시는 미당 서정주가 은사의 한시를 모아 정리한 유고 가운데 하나다. 출처는 동국역경원에서 발행한 <석전 박한영 한시집>.
白級層岩頂(백급층암정) 孤庵若爲橫(고암약위횡) 巒山章分穢貊(만장분예맥)
雲海捿蠻荊(운해서만형) 扁額擎虹貫(편액경홍관) 斷碑己蘇生(단비기소생)
有言古井頂(유언고정정) 佛躍跏趺成(불약가부성)
백층 바위 꼭대기 가로놓인 외로운 암자 산등성이 하나로 예맥이 갈라지고
구름 바다에 만과 형이 이어지네 달린 액자에 놀란 무지개 꿰었으며
끊어진 빗돌 이미 깨어났어라 전설 얽힌 옛 우물 마루 부처님은 벌써 가부좌 틀었네.
그동안 책임자가 누군지 정확하지 않았던 고등불교강숙(高等佛敎講塾)의 숙장(塾長)이 석전스님이었음이 확인됐다. 본지는 동아일보 1948년4월14일자 ‘박한영 대종사 입적’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노사는 불교계 유일의 대학자로서 일즉이 고등불교강숙 숙장과 현 동국대학의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장을 역임했다”는 내용을 확인했다. 1914년 7월 30본산주지총회 결의로 불교사범학교는 고등불교강숙으로 명칭이 변경됐으며, 이듬해 11월 중앙학림(中央學林)으로 교명이 바뀌었다.1914년 7월부터 1915년 11월까지 1년 4개월간 고등불교강숙 책임자가 누구였는지 불분명했으며, 석전스님은 숙장이 아닌 숙사(塾師,강사)로 알려져왔다. 또한 1948년 6월16일자 동아일보는 “시내 수송동 태고사(지금의 조계사)에서는 19일 오후1시부터 조선불교중앙교무대회를 열고 새 교정(敎正)의 선거와 구(舊) 교정 박한영스님의 추도식을 거행한다”고 보도했다. 동국대 국문과 김상일 교수는 “박한영 스님이 고등불교강숙 숙장을 지냈다는 사실은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다”면서 “숙장을 지낸 사실이 확인되어 스님 행장을 조명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 행 장
석전 정호(1870∼1948) 스님은 근대불교의 선구자적 역할을 한 분으로서 호는 영호(映湖) 또는 석전(石顚), 법명은 정호(鼎鎬)이다. 속성은 밀양박씨이며, 박한영(朴漢永)이라는 속명으로 더욱 잘 알려져 있다. 전북 전주에서 태어나 19세에 전주 태조암(太祖庵)으로 출가하여 금산(錦山) 스님의 제자가 되었다. 21세에 장성 백양사(白羊寺)의 환응(幻應) 스님에게 4교(四敎)를 배우고, 선암사(仙巖寺)의 경운(擎雲) 스님에게 대교(大敎)를 배운 뒤, 구암사(龜巖寺)에서 처명(處明) 스님의 법을 이어받았다. 1896년 구암사에서 개강한 뒤 해인사ㆍ법주사ㆍ백양사ㆍ화엄사ㆍ범어사 등지를 다니면서 법회를 크게 펼쳐 불경을 강의하였다. 1908년 쇠퇴한 불교를 혁신하려는 뜻을 품고 상경하여 불교개혁운동에 힘을 기울였으며, 1911년 해인사 주지 이회광(李晦光)이 일본 조동종(曹洞宗)과 우리나라 불교와의 연합을 꾀하였을 때, 한용운(韓龍雲)ㆍ성월(惺月)ㆍ진응(震應)ㆍ금봉(錦峯) 스님 등과 함께 한국의 불교전통은 임제종(臨濟宗)임을 내세워 연합조약을 무효화시켰다.
1913년에는 『해동불교 海東佛敎』를 창간하여 불교유신을 주장하고 불교인의 자각을 촉구하였다. 1914년에는 고등불교강숙(高等佛敎講塾), 1916년에는 불교중앙학림(佛敎中央學林)의 강사로서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았고, 1926년 서울 안암동 개운사(開運寺)에 선불장(禪佛場)이라는 강원을 개설하여 불교계의 영재들을 배출하였다.
1929년 조선불교 교정(敎正)에 취임하여 종단을 이끌었으며, 1931년에는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불교전문학교 교장으로 선임되었다. 광복 이후 조선불교중앙총무원회의 초대 교정으로 선출되어 불교계를 이끌다가 만년에 정읍 내장사(內藏寺)에서 노년을 보내다가 입적하니 나이 79세, 법랍 61세였다. 금봉ㆍ진응스님과 함께 근대불교사의 3대 강백(講伯)으로 추앙받았다. 경사자집(經史子集)과 노장학설을 두루 섭렵하고 시와 문장에 뛰어난 대고승으로서의 면모뿐만 아니라, 불교계의 향방을 바로잡기 위해 거침없이 활동하는 실천적인 인물로서 평가받고 있다. 1945년 초 정읍 내장사로 자리를 옮겨 매곡(梅谷)스님에게 “여기서 세상 뜨려고 왔네”라며 만년을 보냈다. 광복후 전국승려대회에서 교정으로 추대됐다. 1948년 4월 8일 내장사에서 원적했다. 세수 79세, 법랍 61세. 저서로 <정선치문집설> <정선염송급설화> <석전시초> <석전문초> <계학약전> 등이 있다.
한편 석전스님 강맥은 운허용하.운기성원.운성승희.고봉태수.성능복문.철운현종.명봉.학봉 스님으로 이어졌다. 운허스님 맥은 지관.월운.홍법.묘엄스님 등으로, 운기스님은 혜남.도형스님 등으로 계승됐다. 운성스님은 지운.일귀스님 등에게 강맥을 전했다. 또한 고봉스님 맥은 우룡.고산스님과 비구니 일현스님이 받았다. 성능스님의 강맥은 명성.자민스님에게 이어졌다. 월운스님의 맥은 지안, 홍법스님의 맥은 종범스님이 계승하는 등 석전스님의 강맥을 이어받은 후학들이 한국불교 교학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말사소개
내소사
전북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에서 북쪽으로 1.2km 정도의 거리에 있는 내소사는 백제 무왕 34년(633)에 창건 되었다고 전한다. 혜구(惠丘)두타 스님이 이 곳에 절을 세워 큰 절을 '대소래사', 작은 절을 '소소래사'라고 하였는데 그 중 대소래사는 불타 없어지고 지금의 내소사는 소소래사이다. 보유한 문화재로는 국가 지정문화재 4점과 지방 유형문화재 2점이 있다.
또한 잘 보존된 봉래루 화장실 등 옛 건축물과 근래에 신축한 무설당, 진화사, 범종각, 보종각, 선원, 회승당 등의 건축물이 도량에 조화롭게 잘 자리 잡고 있다. 근대의 선지식인 해안대종사가 출가하고 설법한 도량이다.
보물 제291호로 지정된 대웅전은 조선시대 때 건립된 것으로 전면에 꽃살무늬를 조각한 문짝을 달았는데 이들은 모두 정교한 공예품들이며, 단청이 없어 더욱 자연스러운 고찰분위기를 자아낸다. 추녀 아래 귀한 대와 내부 충량머리는 용머리를 조각하였으며, 전내 후불벽에는 백의관음보살좌상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후불벽화로는 가장 큰 것이다. 경내에는 이 외에도 고려 동종, 법화 경절본사본, 영산회 괘불탱화 등의 국가지정문화재와 설선당과 요사, 삼층석탑 등의 지방유형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다.
내소사에는 수령이 약 5백여 년이 되는 느티나무(할아버지 당산)와 높이 약 20m, 둘레 7.5m의 약 천여 년쯤 되는 느티나무(할머니 당산)가 있으며, 봉래루 앞마당에는 하늘을 찌를 듯한 수령 300여년으로 추정되는 거목 "보리수"가 자리하고 있다. 절 입구 울창한 전나무 숲길은 전나무 향기 가득한 매력적인 산책로다. 더욱이 전나무 숲길을 벗어나면 일주문 앞까지 단풍나무 터널을 이루고 있어 가을이면 단풍 나들이의 진수를 맛 볼수 있다. 주변에 개암사, 직소폭포, 격포해수욕장, 채석강, 변산해수욕장, 월명암, 낙조대, 와룡소, 가마소, 적벽강 등이 있다.
내장사
개암사
개암사는 부안에서 보안을 향해 내려가다, 봉은에서 개암저수지를 휘돌아 올라가면 울금바위 아래 자리 잡고 있다. 이 절은 백제무왕 35년(634년)에 묘련왕사가 변한에 있는 궁전을 절로 고쳐 지을 때 묘암의 궁전을 묘암사, 개암의 궁전을 개암사라 부른데서 비롯되었다. 40여년후 통일신라 문무왕16년(676년)에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이곳에 들어와 절을 다시 지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고려 충숙왕(1313년)때에는 원감국사가 순천 송광사에서 이곳으로 들어와 중창하면서 황금전, 청련각, 청허루등 30여동을 지어 큰 사찰이 되었다고 한다.
문수사
문수사는 전북 고창과 전남 장성과의 사이에 놓여 있는 문수산(621m)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고수면소재지에서 고수도요지를 지나 위로 올라가면 조산저수지가 나오고, 왼쪽 골짜기를 타고 6km 정도 비포장 길을 오르면 울창한 숲이 우거진 산등 서향으로 문수사가 있다. 물이 맑고 숲이 좋은데도 인적이 드물어 오염이 전혀 되지 않은 곳이다.백제 의자왕 4년(644년) 신라의 명승 자장율사가 당나라로 건너가 청량산에서 기도를 거듭한 끝에 문수보살의 가르침을 받고 귀국한 후, 우연히 이곳을 지나다가 산세가 당나라 청량산과 흡사하여 문수산에 있는 굴속에서 몇 일간 기도하자 역시 문수보살이 나타나므로 이곳에 절을 지었다고 전한다. 지방유형문화재 제51호인 대웅전과 52호인 문수전 그리고 154호인 부도전이 있으며, 문화재 자료인 문수보살상과 기타 금륜전, 명부전, 한산전, 요사채, 종각 등이 남아 있다. 대웅전은 소규모의 건물로 맞배지붕이 특이하다. 우거진 녹음 사이로 계곡물과 가을단풍이 천년 고찰과 잘 어우러져 보는 이의 발길을 잡는다.
천연기념물 463호로 지정돼있는 진입로의 단풍나무 군락은. 단풍나무숲으로는 국내 최초 문화재로 수령이 100년에서 400년이나 된 단풍나무 노거수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석씨원류』는 석가모니의 일대기와 이후 서역 및 중국에서 불법이 전파된 사실 기술한 것이다. 성종 17년(1486)에 왕을 이 주관하여 간행되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져버렸다. 이후 사명대사가 일본에 건너갔을 때 『석씨원류』 1질을 가지고 귀국하여 인조 26년(1648)에 최서용, 해운법사 등이 다시금 간행하였다.
시도유형문화재 제31호 (고창군)선운사 범종
전라북도 고창 선운사에 있는 조선 후기의 범종으로 높이 103㎝, 입 지름 93㎝이고, 종을 매다는 고리인 용뉴를 포함한 전체 높이는 129㎝이다.
용뉴는 2마리 용으로 만들었다. 한국 범종의 특징인 소리의 울림을 도와 준다는 용통이 없는 대신, 종 윗면에 1개의 구멍을 뚫었고, 어깨부분에는 2줄의 선을 돌렸다. 선 안쪽으로 글씨를 새겼는데, 조선 순조 18년(1818)에 다시 만든 것임을 알려준다. 몸체 중앙에는 3개의 돌출된 선을 둘러 위와 아래로 구분해 놓았다. 윗부분에는 꽃과 덩굴로 장식한 4개의 사각형 유곽대를 만들었고, 그 안에 가운데가 돌출된 모양의 유두를 9개씩 두었다. 유곽과 유곽 사이에는 두 손을 마주 잡은 채 서 있는 보살을 양각하고, 머리위로 8개의 작은 원을 만들어 원안에 범자를 하나씩 새겨 넣었다. 3줄의 선 아래에는 42인의 이름으로 보이는 기록이 있고, 그 아래로 2줄의 선을 둘렀다.
이 종은 신라와 고려 종에서 보이는 유곽과 유두를 가지고 있지만, 용통이 없고 2마리 용으로 만든 용뉴, 몸체 가운데와 종 입구 위에 두른 횡선이 있는 조선 종의 모습을 하고 있다. 종신(鐘身)의 높이 103㎝, 구경 93㎝, 견경(肩徑) 56㎝로서, 그 위에 쌍두용뉴(雙頭龍뉴)가 있어 전체높이 129㎝에 이른다. 종신은 융권대(隆圈帶)로 3개로 구분하였고, 구연상(口緣上) 19㎝에 2조 돌대(突帶)가 있고, 그 위에 중구(中區)에 종기(鐘記)가 있어 총 42인의 이름이 보이고 있으며, 이 동종(銅鐘)은 조선 순조(純祖) 18년(1818년)에 다시 주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종기가 있는 상구(上區)는 3조의 융권대로 구분하고, 4개의 유곽(乳廓)을 주출(鑄出)하였는데, 유곽은 길이 28.5㎝, 폭 28.0㎝의 방구주연(方區周緣)을 4.5㎝ 너비의 연화당초문대(蓮花唐草紋帶)로 획정하고, 내면에 3조3열 9개의 유(乳)가 있다.유곽 사이에는 높이 21.5㎝의 보살입상이 양각되어 있는데, 유곽과 보살상 상부에는 8개의 작은 원이 있고, 원안에 범자(梵字) 1자씩이 양각되었다.용추는 머리부분이 외방을 향한 쌍두용(雙頭龍)을 투각(透刻)하였고, 복잡한 세부처리는 주조한 다음 동편(銅片)을 잘라 부착시키는 수법을 사용하였다. 음관(音管)은 없고 대신 종신 윗면에 1개의 원공(圓孔)을 뚫었다.무게는 종기에 650근이라 하였고, 구연(口緣)두께는 7㎝이다.
선운사 참당암 약사전안에 있는 이 불상은 곱돌로 만든 좌상으로 높이 80cm이며 무릎의 폭은 50cm이다. 머리에 두건을 썼으며 이마에는 목이 좁은 띠를 둘렀다. 이마에 백호가 있고 얼굴은 균형이 잘 잡혀 있으며 양볼은 상당히 살이 쪄 있다. 양귀는 눈썹꼬리 윗부분에서부터 어깨 바로 위까지 내려와 있다. 눈썹은 초승달처럼 가냘프게 처리되어 있고 눈은 반쯤 뜨로 이쓰며 눈꼬리는 위로 치켜 올라가 있다. 콧날은 오똑하며 어깨는 곡선으로 처리되어 있어서 유연한 느낌을 준다. 오른손은 배쪽으로 구부려 엄지와 인지 및 장지로 보주를 들고 있고, 왼손은 무릎위에 가볍게 올려 놓았다. 발은 결가부좌를 하고 무릎과 다리위에 덮여진 의상의 주름은 매우 두껍게 되어 있다. 보물 제279호 금동보살좌상과 제280호 지장보살좌상 등과 유형이 같은 것으로 약사여래상이라기 보다는 옥제 지장보살좌상이라함이 옳을 듯 하다.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이마에 테를 두르고 있는 점, 두건의 하단이 어깨 좌우에 주름을 지으며 덮고 있는 점, 두건의 끈 역시 양어깨에서 전면에 내려진 점, 풍만한 얼굴에 가는 눈꼬리, 작은 입, 반달형 눈썹, 통견의(通肩衣)의 옷섭 폭이 넓은 점, 앞가슴에 경식(頸飾)을 장식한 점, 두터운 귀부분 목의 좁혀진 삼도(三道) 좌우에 흘러내린 어깨의 선 등이 위의 금동여래좌상과 흡사하다. 다만 의습(衣褶)은 더욱 간략화되었고, 수인(手印)도 금동좌상처럼 섬세하고 사실적이 못되며 결가부좌한 무릎은 두껍고 높다. 오른발이 노출되어 발바닥이 위를 향하고 있는 점, 무릎의 의문(衣紋) 등은 금동지장보살상의 형식을 따르고 있으나 더욱 간략화되었다. 수인은 이례적으로 왼손이 무릎위에서 촉지인(觸地印)을 짓고 있으며, 오른손은 가슴 앞에 들어 보주(寶珠)를 무지(拇指)와 인지(人指) 사이에 집어들고 있다.
이러한 납석제좌상은 그 크기나 상호(相好), 의관 등이 금동보살좌상과 공통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며, 사찰측에서는 이를 전형(典型)으로하여 금동보살상을 주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도솔산 북쪽 기슭에 위치한 선운사는 진흥왕(재위 540∼576)이 처음 짓고 검단선사가 다시 지었다고 한다. 조선 성종 3년(1472) 극유에 의해 10여 년에 걸친 공사로 건물이 189채나 되는 큰 규모의 사찰로 성장하였다. 선운사의 배치는 매우 독톡하다. 계곡 옆길을 따라 올라가면 우측으로 천왕문(天王門)이 나타나며, 이 문과 바로 연이어 만세루-대웅전이 배치되어 있다. 보통의 산지 사찰이 진입로에 정면으로 선문을 배치해 선문(禪門)에서 일정한 깊이를 갖고 강당이 나타나는 것과 비교하면 색다른 구성이다. 또한 문(門)-루(樓)-대웅전의 중심 축선이 전체 배치의 한쪽 부분에 치우쳐 있는 것 역시 일반적인 방법은 아니다.만세루는 본래 고려시대에 지어진 건물이지만 19세기 말에 중건된 익공계(翼工系)구조의 맞배지붕 형식을 취하고 있다. 넓은 평면에 비하여 높이가 낮은 규범적이지 못한 루형식과 불규칙한 형태의 부재들의 사용은 당시 목재의 부족으로 인하여 자투리 부재(部材)나 자연간목(自然幹木)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어려움을 느낄 수 있게 한다. 기둥들은 모두 자연 그대로의 둥근 기둥을 사용하였으며, 특히 모서리 기둥은 큰 자연목을 껍질만 벗기고 다듬지 않은 채 그대로 사용하였다.자연석 기단위에 덤벙주초를 사용했으며, 기둥의 일부 배흘림이 있는 기둥을 사용했으나, 넓은 평면에 비해 높이가 낮은 누 형식이며 불규칙한 형태의 부재료들을 사용한 것은 당시 목재가 부족하여 남은 재료를 사용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원목을 다듬지 않은 채 사용하여 단순한 구조와 장엄한 형태를 보이고 있으나, 내부공간의 처리는 조형적으로 잘 정리되지 않은 듯한 느낌을 준다. 자연목을 껍질만 벗겨 사용하기도 하였다. 정면 9칸 중 어칸(御間)과 협칸(夾間)에 비해 2배 정도 넓으며, 좌우협칸은 대칭을 이루고 있다.특히 뒷면이 대웅전과 마주보며 개방된 것은 설법을 위한 강당으로서 그 기능을 효율적으로 활용토록 한 것으로서, 전면의 판창(板窓)은 강당 및 대웅전의 앞마당과 강당을 포함하는 공간에 영역성을 부여하면서 앉아 있을 때는 시각의 마주침이 일어나지 않는 적당한 높이로 계획되어 있어 통풍과 전망을 가능케 하고 있다.천정은 연등천정이며 바닥은 우물마루로 하였다
백파율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이 비석은 선운사 입구로 들어서서 오른쪽 숲 속의 부도 밭에 세워져 있다. 조선조의 억불정책에도 불구하고 오랜 침체기를 헤치며 조선후기 불교의 참신한 종풍(宗風)을 일으킨 화엄종주(華嚴宗主) 백파율사의 업적이 적혀 있는 이 비석은, 네모난 받침 위에 몸통을 세우고 지붕돌을 씌운 모습으로 되어 있다.
이 비석(碑石)은 조선(朝鮮) 철종(哲宗) 9년(1858)에 건립(建立)한 것으로 비명(碑銘)은 조선시대의 대명필가(大名筆家)인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선생이 썼다. 백파율사는 조선의 억불정책(抑佛政策)에도 불구하고, 불교(佛敎)의 오랜 정체기를 헤치며 조선(朝鮮) 후기(後期) 불교의 참신한 종풍(宗風)을 일으킨 화엄종주(華嚴宗主)이다. 이와같은 백파율사의 업적을 추사 김정희 선생이 찬양한 내용이 적혀 있는 이 비석은 추사의 글씨체 연구와 율사의 업적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산내암자
참당암
참당암 대웅전은 의문화상이 신라 진평왕의 부탁으로 지었다고 하는데 여러 차례 수리를 거친 것으로 지금 있는 건물은 조선시대의 것이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다. 이를 다포 양식이라 하는데 앞면에 짜인 공포는 전형적인 18세기 다포 양식을 보이고 있는 반면, 뒷면은 기둥 위에만 공포가 있는 주심포 양식을 취하고 있다. 이는 건물을 수리할 때 고려시대의 부재를 재활용한 것이라 짐작한다.
선운사의 암자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녔으며, 지금은 산내암자로 사격(寺格)이 위축되었지만 본래 참당사 또는 대참사(大懺寺)로 불리었던 거찰(巨刹)이었다. 삼국시대 의운(義雲)스님에 의해 설립되었는데, 창건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한다. 의운스님이 도솔산 법화굴(法花窟)에 살고 있을 때 산 아래 죽포 포구에 돌배 한척이 들어왔다. 이 배는 속인들이 보려고 다가가면 바다로 멀어지곤 하다가, 의운스님이 제자들을 이끌고 포구로 나가서야 저절로 다가왔다. 이윽고 배에서 노를 젓던 한 금인(金人)이 나타나 여러 불상과 경전과 보인(寶印)을 스님에게 전해주고 떠났다. 그날 밤 스님의 꿈에 금인이 나타나서 "나는 우전국의 왕인데 불상을 모신 곳을 찾아 해동의 여러 산천을 두루 돌아다니넌 중, 도솔사에 대참(大懺)의 신령스러운 기운이 서린 것을 보고 이 곳으로 왔으니, 청컨대 집을 짓고 편안히 모시도록 하시오"라고 당부하였다.
이에 스님은 산 가운데 터를 잡고 진흥왕의 도움으로 절을 세우고 '대참사'라 하였으니, 이때는 581년(백제 위덕왕 28)이었다. 이 절이 삼국시대 의운스님이 세운 것이라 하더라도, 당시 이곳은 신라와 세력다툼이 치열했던 백제의 영토였기 때문에 신라의 진흥왕이 시주한 것은 후일에 첨가된 내용일 가능성이 크다. 창건 이후의 역사는 전하지 않고 고려시대에 1328년(충숙왕 15)부터 이듬해까지 중수가 있었으며, 1346년(충목왕 2)부터 1398년(태조 7)까지 약 52년에 걸쳐 점찰신앙(点察信仰) 법회가 개설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여러 차례의 중건이 있었는데 먼저 1530년(중종 25)에 재중수하였고, 이어서 1614년(광해군 6), 병자호란 뒤인 1642년(인조 20), 1794년(정조 18)등 4차에 걸친 중수가 있었다. 당시는 법당 동쪽에 승당, 서쪽에 미륵전, 위로는 약사전, 아래로는 명부전등 여러 전각을 갖추어 조선 후기까지만 해도 독립된 사찰로서 번성하였으나, 성종대(1469~1494)이후 선운사가 산중의 중심도량이 되면서 상대적으로 차츰 사세가 약화되었다. 현재 참당암의 전각은 대웅전과 약사전(藥師殿)·응진전(應眞殿)·명부전(冥府殿)·도솔선원 ·요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참당암 대웅전은 보물 제803호이며, 약사전에 봉안되어있는 약사여래불상(실제로는 지장보살상으로 보아야 함)과 참당암 동종은 전북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도솔암
발굴조사에 따르면 이 곳에서 출토된 기와에 ‘도솔산 중사(兜率山仲寺)’라는 명문이 있어 당시에는 절이름을 중사라고도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에 들어오면 도솔암은 상도솔암 하도솔암 북도솔암 등 세 암자로 나뉘어져 독자적인 이름을 갖게 된다. 상도솔암은 지금의 도솔천내원궁으로서 1511년 지은(智誾) 스님이 중창한 뒤 1694.1829년에 각각 중수하고 1705년에 중종을 봉안하였는데, 조선 말 이후 내원궁만 남기고 퇴락하였다.
하도솔암은 현재 마애불상이 있는 곳으로서 1658년에 해인(海印)스님이 창건하였으며, 북도솔암은 지금의 대웅전이 있는 자리로서 1703년(숙종 29)에 최태신이 창건하였다. 이처럼 각기 독자적인 암자였던 것이 근세와 와서 북도솔암을 중심으로 하나의 암자로 통합된 것이다. 현재 도솔암의 전각은 대웅전 나한전 도솔천내원궁 요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도솔암내원궁에는 보물 제280호인 지장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마애불좌상은 보물 제 1200호, 나한전과 내원궁은 각각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동운암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무장현감 송석조(宋碩祚)와 일관(一寬)·원준(元俊) 스님 등이 대대적으로 중창을 하였던, 1614년(광해군 6) 무렵인 것으로 추측된다. 그뒤, 1693년(숙종 19)에 중창하여 1970년대까지만 해도 명맥을 이어왔으나, 지금은 법당과 칠성각만이 남아 있다. 법당에는 석가삼존불을 봉안하였으며, 53불회도로 구성된 후불탱화와 신중탱화 등이 있다.
후불탱화는 선운사에서 1481년(성종 12)에 53불회도를 조성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이 전통이 조선 후기까지 이어져 1693년의 중창시에 이 불화를 함께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석상암
선운사와 함께 백제 때 창건된 기록이 전하며, 이후 1665년(현종 6)에 학철(學哲)스님이 중창하였다. 현재는 법당과 칠성각만이 남이 있으니, 주변 네 곳에 건물터가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본래는 규모가 큰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법당은 최근 건물로서 옥돌의 관세음보살좌상을 봉안하였고, 보살상 뒤에는 1765년(영조 30)에 조성된 후불탱화를 중심으로 같은 해에 조성한 칠성탱화·지장탱화·신중탱화 등이 좌우에 모셔져 있다.
고창 선운사 동불암 마애불(高敞 禪雲寺 東佛菴 磨崖佛)
고창 선운사는 김제 금산사와 함께 전북도내에 있는 조계종단의 2대 본사로 많은 불교유적과 유물을 간직한 명승고찰이다. 이곳의 도솔암 서편으로 오르는 길의 칠송대(七松臺)라 불리는 암벽 남쪽면에 새겨진 동불암 마애불은 1969년 5월 처음 발견되었는데 1973년 전라북도 지방유형문화재 제30호로 지정되었다가 1994년 보물 제1200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발굴조사지역은 정남향한 마애불의 남쪽 전면에 형성된 100평 정도의 계단상대지(階段上垈地)로 유구는 대부분 유실되어 규모나 형태는 짐작할 수 없었다. 토층은 지표에서 40∼50㎝까지 부식토인 표토층과 그 아래 50∼100㎝까지 황갈색 사질점토인 성토층의 2개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부식토층에서는 조선시대 건물지유적 일부인 암거 및 요사채의 연도시설로 보이는 유구와 함께 고려청자편·기와편·조선백자편이 나왔고, 사질점토층에서는 백제ㅕ育絿킷鏶ㅀ疵좃척育?기와와 토기편들의 출토와 함께 직사각형의 석재부 석렬유구가 확인되었다.
출토유물은 막새기와, 평기와, 청자기와, 토기류, 청자류, 백자류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막새류는 통일신라∼고려시대의 것이 대부분으로 수막새는 연화문(蓮花紋)·당초문(唐草紋)·초화문(草花紋)·귀목문(鬼目紋) 등이 새겨지고 연화문 사이에 「지정23년(至正二十三年)」과 시주자 이름이 명기된 것도 있었으며, 암막새에는 2개 이상의 문양이 서로 혼용된 것 등 여러 양식이 조사되었다.평기와는 백제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긴 분포상황을 보이고 있는데 백제기와에는 넓고 깊은 선문이 있어 다른 지방의 것과 구분되며 암기와의 내면에는 각 통쪽을 연결한 끈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통일신라기와는 마애불 앞 하층 탐색갱에서 다량 출토되었는데 단선문(短線紋)·격자문(格子紋)·긴 사선문등이 새겨져 있다.
선운사금동보살좌상
선운사에 있는 조선 초기의 금동보살상. 보물 제279호. 높이 약 100cm. 손의 지물(持物)은 확인되지 않으나 머리에 두건(頭巾)을 쓰고 있어 지장보살로 추정된다. 오른손은 앞으로 들어 엄지와 약지를 맞댄 듯하고, 왼손은 배 앞에서 수평으로 들고 있다. 이마에 두른 두건의 띠가 양쪽 귀옆으로 흘러내려 배 앞까지 이른다. 얼굴은 긴 네모에 가까운 살찐 형으로 턱에 군살이 있고 치켜올라간 눈꼬리, 작고 콧날이 예리한 코, 굴곡진 선으로 된 입술 등 이목구비가 중앙에 몰려 작고 예리하게 조각되었다. 짧은 목에 삼도가 있고 밋밋하게 드러난 가슴에는 3줄 장식이 달린 목걸이가 있다. 신체는 비만하며 여래상의 법의와 같은 옷을 통견으로 입었는데, 옷주름이 두텁게 형식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가슴 높이까지 올려입은 군의와 띠매듭 표현은 조선 초기 불상들과 맥락을 같이하나 왼쪽 어깨 앞에 가사를 묶은 띠매듭과 그것에 매달린 네모난 치레장식은 독특한 것으로 고승의 영정이나 조상조각에서 볼 수 있는 표현이다. 옷주름은 배 앞의 군의에 새겨진 촘촘한 세로 주름과 무릎을 덮는 일률적인 가로 주름대에서 더욱 형식화되어 있고, 굴곡 없는 신체와 마찬가지로 손가락도 밋밋하고 길게 과장되어 있다. 이 상의 비만하고 생동감없는 얼굴과 신체표현, 장식적이면서도 형식화되어 부자연스러운 의습 표현 등은 원각사탑(1467)의 부조상이나 무위사목조아미타삼존불상(1576), 기림사건칠보살좌상(1501) 등과 부분적인 비교가 가능하며 대체로 15세기 후반의 제작으로 추정된다. 같은 경내의 도솔암에 있는 금동지장보살좌상과 함께 고려말 조선초의 지장신앙을 알려주는 중요한 예이다.
선운사동불암마애불상
선운사 도솔암으로 오르는 길 옆 절벽에 새겨진 마애불좌상.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0호. 높이 13.0m, 너비 3.0m. 이 마애불에는 백제의 위덕왕이 검단선사에게 부탁해 암벽에 불상을 조각하고, 암벽 꼭대기에 동불암(東佛庵)이라는 공중누각을 짓게 했다는 전설이 있다.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는 이 마애불상의 상체는 낮은 부조로 양각되어 있고, 하체는 선각의 흔적만 남아 있어 미완성인 듯하다. 머리에는 뾰족한 육계가 있는데 육계와 머리의 구분이 불분명하다. 이마에 백호가 있는 얼굴은 평면에 눈·코·입을 빚어 붙인 듯 어색한 모습이지만 눈꼬리가 치켜올라간 가는 눈, 우뚝한 코, 앞으로 쑥 내민 듯한 입술 등은 익살스런 표정을 자아낸다. 귀는 어깨에 닿을 정도로 직선으로 밋밋하게 늘어져 있으며, 턱과 상체가 맞붙어 거의 드러나 있지 않은 짧은 목에는 삼도(三道)가 가늘게 선각되어 있다. 상체는 각이 진 어깨에서 팔뚝까지 밋밋한 4각형을 이루고 있는데 윤곽만 표시되어 있다. 법의는 통견인 듯하며 옷주름은 평평한 가슴에 가로질러 새긴 4줄의 군의(裙衣)단과 띠매듭이 선명하다. 두 손은 손가락을 펴서 아랫배 부분에서 손끝을 맞대고 있으며 그 밑에는 큼직한 두 발이 선각되어 있다. 대좌는 높으며 층단을 이루었는데 상대에는 옷자락이 늘어져 덮여 있고, 하대에는 간략하게 복련(伏蓮)이 새겨져 있다. 광배는 표현되지 않았고 불상 주위에 목조 전실(前室)의 가구(架構) 흔적으로 생각되는 네모난 구멍이 남아 있다. 이 마애불은 전체 규모가 커서 거불(巨佛)을 새기려 했던 것으로 보이나 기술이 부족한 석공의 소작인 듯하며, 상체의 군의 표현으로 보아 고려 말기나 조선 초기 불상을 모방한 마애불로 추정된다.
도솔암금동지장보살좌상
선운사의 도솔암에 봉안되어 있는 고려시대 금동보살좌상. 보물 제280호. 높이 96.9cm. 대좌와 광배는 없어졌으며 두건을 쓰고 법륜(法輪)을 든 지장보살좌상이다. 오른발을 위로 올려 결가부좌한 길상좌(吉祥坐)의 자세로 앉아 두 손은 아미타구품인 중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을 결한 채 왼손에 법륜을 가볍게 쥐고 있다. 머리에 쓴 두건은 귀 뒤로 넘겨져 어깨까지 덮어 내려오며 그 끝부분에 영락장식이 매달려 있다. 얼굴은 약간 살이 찐 둥그스름한 형에 이목구비가 조화를 이루며 뚜렷하고 단정하게 표현되어 있다. 신체표현은 알맞게 살이 찌고 균형이 잡혀 안정감을 주며, 오른쪽 어깨에 걸친 둥근 옷자락, 왼쪽 어깨 앞에 표현된 형의 옷단 처리, 내의를 묶은 띠매듭과 승각기 치레장식 등은 장곡사(長谷寺) 금동약사불좌상이나 문수사금동아미타불좌상과 같은 고려 후기(14세기) 불좌상의 착의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목은 짧고 삼도(三道)가 표현되어 있으며 가슴에는 3줄의 장식이 늘어진 목걸이가 있다. 양 손목의 팔찌, 손에 든 법륜, 승각기 치레장식의 연주무늬[連珠紋]와 꽃무늬, 목걸이 등이 정교하게 표현되었다. 전체적으로 보아 신체를 감싸는 옷주름은 번잡스럽지 않고 손이나 발도 부드러운 윤곽을 이루며 자연스럽게 조각되었다. 이 보살상은 두건의 형태나 법륜을 든 손 모양 등 세부묘사가 고려시대 지장보살도에서 보이는 상들과 흡사하다. 조각상으로는 드물게 전해오는 고려시대의 지장보살상으로, 지장신앙의 유행과 함께 고려미술의 귀족적이며 세련된 일면을 보여주는 중요한 상이다.
진흥굴앞에 있는 장사송(천연기념물 제354호)
도솔암 길옆에 있는 이소나무는 나이가 약 600년으로 추정된다. 높이가 20m 줄기 둘레 3m에 이르는 크고 오래된 나무로서 지상 1.5m되는 높이에서 8개의 가지가 사방으로 펼쳐져 멀리서는 큰 우산 모양으로 보인다. 이곳 사람들은 이 나무를 장사송 혹은 진흥송이라고 부른다. 장사송이라고 불려지는 것은 이곳의 옛지명이 장사현이던 사실에서 온 것이라하며 진흥송이라는 이름은 이 나무 옆에 있는 굴인 진흥굴과 관련있다고 한다. 이 장사송과 같이 소나무는 선운사에서 심원가는 좌측에 경수산 아래쪽에 여러 그루가 보인다.
삼인리의 송악(천연기념물 제367호)
일본이 패망되기 직전 다른 것보다도 선운사의 송악을 가져가고 싶었으나 바위에 붙어 자라는 생장습성 때문에 바위와 함께 가져가지 않는한 생존 가능성이 없어 포기했다는 얘기가 전해질 정도로 크기와 진귀함을 더해주고 있는 선운사 송악은 줄기 둘레가 80cm에 이르고 나무의 높이도 약15m나 되는 거목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내륙에 자생하고 있는 송악중에서 가장 큰 나무이고 꽃은 10-11월 에 황록색으로 피는데 짧은 가지끝에 여러개가 둥글게 모여서 달려있다. 송악은 본래 따뜻한 지역 에서만 자라는 늘 푸른 넝쿨 식물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남부의 섬이나 해안 지역의 숲속에서 주로 자라지만 동해안쪽으로는 울릉도까지 서해안쪽으로는 인천 앞바다의 섬까지도 퍼져있다. 그러나 내륙에는 이곳이 송악이 자랄수 있는 가장 북쪽이 된다. 남부지방에서는 송악을 가리켜 소가 잘 먹는 식물이라고 해서 소밥이라고도 한다.
미당 서정주
未堂 서정주시인 2001년 12월 24일밤 타계
한국 현대시의 거목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 시인이 24일 밤 11시 7분 삼성서울병원에서 노환으로 타계했다. 향년 85세.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극한에까지 끌어올린 '시선(詩仙)'으로 추앙받던 서정주 시인의 타계로 한국 현대 시사는 한 장을 접게 됐다. 1915년 전북 고창 출생인 미당은 중앙불교전문학교(현 동국대) 재학중이던 1936년 등단해 '시인부락(詩人部落)'을 창간했으며, 첫 시집 '화사집(花蛇集)'(1941) 이후 '80소년 떠돌이의 시'(1997)까지 평생 시작을 계속하면서 15권의 시집을 낸 한국현대시의 증인이었다.
'국화 옆에서'를 비롯해 '자화상' '푸르른 날은' '귀촉도' 등 민족적 정서와 가락을 담은 그의 많은 시는 국민적 애송시로 사랑받아 왔으며, 여러 차례 노벨문학상 후보로 추천되기도 했다. 서라벌예대ㆍ동국대 교수, 문인협회장, 예술원 회원을 역임했으며 예술원상, 대한민국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미당은 부인 방옥숙(方玉淑)여사가 별세한 직후인 지난 10월 중순부터 폐렴 등 노환에 따른 합병증으로 치료를 받아왔으며, 아들들이 살고 있는 미국행을 시도했으나 병세가 악화돼 11월말 삼성서울병원에 입원했었다. 유족은 장남 승해(升海ㆍ60ㆍ재미 변호사) 차남 윤(潤ㆍ43ㆍ재미 의사)씨 등 2남.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러지며 발인은 28일 오전 8시. 장지는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선영.
선운사 매표소 가기전 좌측에 있는 미당 서정주 시비
선운사 골짜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이러 피지 않했고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되어 남았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니다.
미당 서정주[선운사 동구]
동 백 꽃
[가수 송창식 "선운사"]
선운사에 가신적이 있나요
바람불어 설운 날에 말이예요
동백꽃을 보신 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 말이예요
나를 두고 가시려는 님아 선운사 동백꽃으로 와요
떨어지는 꽃송이가 내 맘처럼 하도 슬퍼서
당신은 그만 당신은 그만 못 떠나실거예요
선운사에 가신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동백꽃 지는 그곳 말이예요
선운사에 가신적이 있나요..." 가수 송창식의 애절한 노래 가사와 함께 연상되는 선운사 동백꽃은 선운사 만큼이나 유명세를 타고 있습니다
선운사 동백나무 숲은 매표소 부근의 산부터 시작하여 약 1km를 선운사 대웅전을 감싸안고 이어지는데 선운사 동백꽃을 볼려면 시기를 잘 맞추어야 한다. 남쪽 여수 오동도에서 동백이 개화하였다 소문듣고 선운사에 온다면 미당 서정주님의 [선운사 동구]에서 처럼 아직이른 것이다. 매년 기후 차이는 있지만 4월 중순부터 5월 중순경이면 만개한 동백을 볼 수 있다. 선운사 동백을 자세하게 볼려면 대웅전내에서 벗어나 선다원을 지나면오른쪽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는데 약 300m정도 오르면 문닫힌 암자가 보이는데 이곳에서 보면 인적이 드물고 동백꽃이 여기저기 떨어진 광경을 볼 수 있다. 동백꽃은 다른꽃처럼 한잎 한잎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송이째 떨어져 오랫동안 자신의 붉은 자태를 잃지 않는다하여 동백의 여인의 절개를 상징한다는 이야기가 있다.겨울을 상징하는 꽃으로는 동백꽃을 떠올리기가 쉽다. 동백나무는 차나무과에속 하는 늘푸른 작은키나무로 한자로는 동백(冬柏), 산다화(山茶花)라고 부른다. 동백 나무는 다른 식물들이 활동하지 않는 겨울에 타는 듯한 붉은 빛의 꽃을 피운다가 봄이되어 다른 꽃 들이 피시작하면 꽃이 지기시작한다.
옛사람들은 동백나무 망치를 만들어 주술에 이용하거나 병마를 막는데 이용하였는데, 동백나무 망치를 마루에 걸어 놓으면 귀신이 집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을수 있다고 생각했었다.일본에 서는 전염병이나 재난을 막기위해 이 망치를 허리에 차는 풍속이 있다고 한다. 또한 전염병을 옮 기는 귀신이 동백나무 숲에 숨어있다가 꽃이 질 때 함께 떨어져 죽는 다는 미신도 전해온다. 동백나무 꽃이 질때는 꽃봉오째 뚝뚝 떨어진다. 그래서 애절한 마음을 동백꽃에 비유한 시와 노래가 많다.
동백꽅이 떨어지는 모습이 사람의 머리가 뚝 떨어지는 것과 같다하여 불전에 바치 거나 병문안때 가지고 가지 않는다. 일본에서는 이를 춘수락(椿首落)이라하여 불길함을 상징한다. 동백나무는 많은 열매를 다는 까닦에 다산의 상징으로 생각되었고 이 나무가 여자의 임신을 돕는 다는 믿음도 있었다. 그런데 겨울에 꽃을 피우는 동백나무는 어떻게 꽃가루받이를 할까? 추운 겨울 동안은 벌, 나비와 같은 곤충들이 날아다니지 않는다. 그러나 동백나무의 꿀을 좋아하 는 아주작고 귀여운 동박새라는 새가 있어 꽃가루를 옮겨주어 열매를 맺게하여 준다.추운 겨울 적당한 먹이감이 없는 동박새에게는 동백나무가 가지고 있는 꿀은 더할나위 없이 좋은 식량이 된 다. 서로에게 도움을 주어 살아나가고 있는 공생관계인 것이다. 동백나무는 재질이 단단하여 얼레빗, 다식판, 장기쪽, 가구 등 다양한 생활용구의 재료로 사용되어왔다. 뿐만아니라 열매에서 짠 기름으로는 어두운 밤 등불을 밝히고 옛여인들의 머리결을 윤기 나고 단정히하는 머릿기름으로 쓰이기도 했다.
상 사 화
선운사 입구 계곡주의 꽃무릇
옛날 선운사에 멋있게 생긴 젊은 스님이 한분 계셨습니다 며칠간 불공드리러 온 젊은 처녀는 어느덧 그 스님을 연모하게되었습니다. 스님을 연모한 처녀는 애틋한 사랑을 나름데로 표현을 했지만 스님은 처녀의 마음을 알 리가 없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스님을 연모하는 마음은 커져가고 끝내 병이되어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그녀가 묻힌 무덤에 핀꽃이 상사화라고 합니다. 상사화는 석산(石蒜)이라고 하는데, 한자를 풀이하면 "돌마늘"이라고 한다. 상사화가 자생하는 조건은 응달이어야 하고, 습기가 충분해야하며, 키는 60-70Cm에 봉우리가 10Cm정도된다
겨울에 눈속에서도 푸른 잎을 유지하며, 9월 말경 선운산 계곡을 중심으로 3Km 군락을 이룬다. 상사화는 중국에서 홀씨가 날아와 가까운 서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생장이 적당한 곳에 뿌리를 내렸는데 아마도 선운산이 조건이 잘맞아 집단 분포된 것 같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상사화가 거의 없었던 것이으로 기억하고 있으며, 상사화가 예전부터 집단을 이루었더라면 미당 서정주님께서 동백꽃만 시로 읊었을까하는 생각이다.
상사화를 보기위해서는 조금의 노력이 필요하다. 항상 추석 전후로 해서 피는데 특히 선운사 골짜기에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새벽녘에 붉게 피어오른 상사화는 순간 핏빛으로 착각할 정도로 섬찟할 정도로 아름답기 그지없다. 잎과 꽃이 만날 수 없는 사연이 있는 꽃 상사화는 당신의 아픈 기억을 떠오르게 할지도 모른다.
꽃무릇의 아름다운 자태▶
相思花는 꽃과 잎이 서로 달리 피고 지므로, 서로 만나지 못함을 人間世界에서 서로가 떨어져 사모하는 情에 비유하여 불리어진 植物의 固有名이다. 相思花는 수선화과 상사화속의 多年生 球根草로서 24 節期中 驚蟄∼春分(2월5일-2월20일) 무렵에 새싹이 오붓하고 매우 수줍은 듯 이 흙을 밀고 올라온다. 이 싹은 매우 부드럽고 탐스럽게 자라며 풀잎으로서는 매우 우아한 자태로 봄을 보낸다. 그리고 夏至(6월20일) 무렵이 되면 그 우아한 잎은 그 무엇을 기다리다 지친듯 축 늘어지면서 잎이 시들다가, 장마가 시작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잎이 자랐던 곳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이다.
잎이 시들어 버린 곳은 매우 깨끗한 빈땅처럼 되었다가, 三伏이 끝나는 伯仲(음7월15일) 무렵에 淸雅한 꽃대가 꽃봉오리를 이고 올라오기 시작한다. 七夕을 前後하여 꽃대가 올라와 꽃을 피우는 것이 銀河水의 烏鵲橋에서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것이라도 보려는 듯 하다. (자신은 꽃과 잎이만나지는 못하면서…) 꽃대 줄기가 자라는 것을 유심히 보면 아침저녁에 유독 많이 올라와 매우 빠른 속도로 자란다. 무엇을 보려는 듯 바쁘게 올라오기 시작하면 한곳에 10여 개의 꽃줄기가 수북하게 올라와 꽃을 피우는데 파란 줄기 위에 분홍색의 꽃이 4-6개씩 백합처럼 생긴 화판에 긴 수술을 내민다.
佛甲山에 自生하는 것은 노란색도 있다. 相思花는 寺刹의 한적한 양지쪽 반 그늘이나 가정 뒤뜰에 있는 장독대 한쪽 또는 사립문 뒤쪽에 한 두포기씩 심어 가꾸던 花草이다. 전해 내려오는 그대로 임을 그리며 보고싶어도 만나보지 못하는 哀切한 哀恨이 담긴 花草로서 사람의 往來가 많되 한적한 곳에 소박하게 10여 일간 피었다가, 질 때에는 파란 꽃대만 길게 남기고 깨끗이 사그라진다. 그리고 내년 봄을 기다리는 것이다. 선운사 홈페이지에서 보여준 사진의 꽃은 수선화과 상사화속 球根草로서 寒露∼霜降무렵(10월5일-10월 20일)에 새싹이 나와 겨울을 지내고 이듬해 6월5일경에 잎이진다. 우리가 양념으로 사용하는 마늘과 生長時期를 같이 하는 石蒜이란 植物이다. 石蒜花는 9월20일경에 만발하는데 꽃줄기와 잎이 같이 發芽 되지만, 꽃줄기의 生長力이 좋아 꽃줄기가 빨리 올라온다. 꽃이 한창일 때 잎은 지표면에서 꽃줄기를 감싸고 있는 것이다. 섬이나 호남지방의 산기슭이나 풀밭에서 群落을 이루며, 꽃은 밝은 적색이며 잎이 좁다. 이러한 石蒜을 相思花라고 부르는데 나는 생각을 달리 한다. 花葉不相見하는 것은 同一하다고 할 수 있지만, 이 植物의 固有名은 石蒜이다. 石蒜花를 꽃과 잎이 피고 자라는 形態가 비슷하다고 하여 相思花와 같은 이름으로 부른다면, 그에 걸맞게 지어진 固有名을 갖고있는 相思花는 繁殖이 약하여 群落地가 드물고 보기도 힘들어서 일반 사람들에게 相思花는 잊혀져 石蒜花를 相思花라 할것이며, 옛 어른들께서 보고 불렸던 相思花는 어찌 되는지요? 石蒜花라 하여 꽃이 달라지거나 아름다움이 덜 한다면 모르겠지만, 그러지 아니하는데 굳이 固有名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려져 後世에 와전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그리고 한적한 곳에서 소담하게 꽃을 피우며 自生하는 相思花를 생각해 보았으면 하며, 선운사에 群落을 이루어 초가을의 綠陰속에 붉은 꽃을 피우고 한 겨울 눈 속을 푸르게 수놓는 石蒜花를 그 이름 그대로 빛을 냈으면 합니다.
자세한 문의는 e-mail이나 불갑농예원 (061-352-8176),원광대학교원예학과 박윤점 교수님께 상사화에 대한 문의를 하십시오.
먹거리
풍천 장어 [바다와 민물이 만나는 인천강 뻘 풍경]
선운사 입구에 인천강이 흐르는데 이곳에 풍천장어가 서식하는 곳이다. 선운사 풍천장어는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이곳의 돌무덤에 살며, 돌무덤에서 잡은 것이 풍천장어이다. 최근에는 인천강 주변에사는 주민들이 인천강의 풍천장어를 살리고자 사단법인 인천강지킴이를 발족하여강 주변을 청소하고 수질을 정화 계도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들의 노력으로 5급수이던 인천강이 2007년 현재 2급수로 측정 되어 풍천장어 서식하기에 아주 좋게 만들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장어 치어를 매년 방류하여 인천강은 전국 최고의 풍천장어 명산지로 발돋은 하는데 커다란 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풍천장어의 맛은 양념과 굽는 방법에 있다고 한다. 어느곳이 좋은지는 알 수 없지만 최초는 50년 이전에 한두군데서 시작하여 90년대 초를 기점으로 선운산 풍천장어가 방송매체를 통하여 알려지면서 지금은 60여군데가 성업중이다.
특이 성수기는 3월 - 5월, 9월 - 11월에는 선운산골짜기 전체가 장어굽는냄새가 가득차있다. 물론 주말에는 사전예약없이는 그나마 맛보기 힘들정도로이며, 선운산 풍천장어와 곁들어진 복분자주는 복분자에서 자세히 소개하도록 하겠다.
복분자
[선운사 특산주 복분자주]
복분자 열매만으로 빚은 술이 복분자 술이며 복분자는 나무 딸기의 일종으로 사전에는 고무딸기라고 적혀있다. 선운산의명물인 복분자술은 부녀자들이 깊은 산중에서 공해를 모르고 자생한 복분자 열매를 7-8월경 채취하여 만들 술이다. 술맛은 공기가 들어가지 않도록 옹기 그릇에 밀봉하여 2-3년을 경과해야 일품이며 술빛 색깔은 아침에 함초롬이핀 해당화처럼 맑고 빨갛게 물들어 일찍부터 정력제로 각광을 받아왔다. 복분자 열매를 따고 술을 빚는 작업을 할 때는 금남의 구역으로 통제된 상태에서 부녀자들만의 정성으로 이루어져야 했으며 음양의 이치에 따라 남정네들에게 보양이 되었다는 말이 전해온다. 복분자라고 이름한 것도 이 술을 마시고 소변을 보면 오줌통이 넘어졌다는 데서 연유했다고 한다. 이처럼 정력에 좋다는 복분자술도 지금은 시류에 밀려 생산이 시원치 않게 되었으나 최근 아산면 탑정마을에 복분자주공장을 만들어 도처의 특산품판매점 및 슈퍼에 판매되고 있다. 뭐니뭐니 해도 복분자주는 선운사풍천장어와 곁들여야 제맛이 나고 더 이상의 정력제는 없다.
* 참고로 북한 김정일 생일날 현대아산의 정몽헌회장께서 김윤규 사장의 권유로 북한에 보낸 선물이 선운사 복분자주라하여 더욱 명성이 드높다.
* ASEM회의시 건배주로 채택되어 세계적인 명주로 평가
작설차
석상암 가는길 우측에 우룡스님 거처
선운사에 오면 작설차를 찾아야 하고 작설차 맛을 보지 않는 선운사 관광은 어딘지 모르게 공허함을 느낄 정도로 유명한 것이 선운사 작설차이다. 사찰에 가면 흔히 작설차를 대할 수 있다지만 선운사의 작설차 맛을 따를 수 없을뿐더러 그 감칠맛이란 중국차 이상이라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 작설차는 차나무의 어린잎을 따서 만든 녹차의 일종이다. 작설차라고 이름한 것은 차나무의 어린 잎이 참새혀 끝만큼 자랐을 때 채취하여 만드는데 연유되었고 연한 잎을 채취하는 시기는 봄철의 곡우절 전후로 어린 잎의 길이가 참새 혀만큼 자란다. 제조과정 역시 복잡하여 구증구포 (아홉번 쪄서 아홉번 말림)하는 번거로움과 잔손실이 뒤따라야 한다. 뿐만 아니라 작설차는 다기에서 끓이고 찻잔에 옮기는 절차가 전통다도를 거쳐야 싱그러운 맛이 난다. 작설차를 계속 마시면 간이 좋아지고 눈이 밝아지며 정신도 명경지수처럼 맑아진다고 한다.
석상암 가는길의 녹차밭 풍경
선운사의 작설차는 선운사 명물가운데 제1위에 꼽히는 진귀한 식품이다. 작설차는 참새혀끝 만큼 자랐을 때 채취하여 만든다는 데서 나온말이다. 그만큼 양이 적고 맛이 가장 좋을시기에 만든 작설차는 예전부터 이곳 스님들의 정신수양에 따라다니는 음료였던 것이다. 원료가 되는 차는 동백나무숲 수킬로미터 주변에 자연산 녹차나무가 자생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석상암가는 길에 대단위로 재배를 하고 있다. 이 진귀한 작설차는 몇해전까지만 해도 일반인들이 마실 수 있었으나 지금은 상표등록이 마무리 될 때 까지는 스님들만 마실 수 있다고 한다. 선운사에 오시면 스테미너의 최고 식품 풍천장어에 요강을 뒤짚을 만큼 대단한 술 복분자주를 마시면 원기가 너무 충만하니 작설차를 마셔 안정을 되 찾아 귀가하는 것이 좋을 듯 싶다.
우룡스님과 작설차
선운산의 작설차는 선운산 3대 진미중에 으뜸으로 꼽고 있다. 또한, 그 명성은 이미 불교계 및 작설차 맛을 아시는 분들은 논할 가치가 없다고 할 만큼 품질과 역사를 인정하고 있다고 한다. 홈지기도 선운사를 찾을 때마다 선운산 작설차를 찾았으나 선운산작설차는 팔수 없다고 한지 오래다. 그렇다면 선운산에 작설차는 없습니까 라고 물으면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유를 찾아 결국 석상암 근처 기와에 은둔하며 작설차와 생을 함께하고 있는 우룡스님을 찾은것이다.
선운산 작설차의 역사는 백제시대부터 올라간다고 한다. 선운산동백꽃, 꽃무릇 그리고 녹차나무가 선운산을 깔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선운산 차나무가 온 산을 덮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룡스님을 만나서 왜 선운산작설차는 팔지 않으십니까? 질문을 하니 말없이 웃기를 한참..., 결국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결론은 돈이 문제가 아닌가 싶다.
고창 선운산의 3대 진미중 으뜸인 선운산작설차를 상품화 및 공장을 세울 수 없는 이상 야릇한 파워게임과 견제 등등 ... 정말로 안타깝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신성하고 진귀한 음식을 놓고 무슨 게임을 하고 있다니... 선운산의 작설차를 일반인들에게 드리고 싶고 팔고 싶어도 현재의 여건이라고 한다. 결국 짐작컨데 선운사와 고창군은 지금이라도 모든 욕심과 탐욕을 버리고 우리나라 최고의 명품 선운산작설차를 만드는데 일조를 하여야 할 것이다.
고창수박
맛,당도,생산량등이 전국에서 으뜸상표가된 고창 수박은 출하시기에는 모두가 고창수박으로 탈바꿈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증거는 그만큼 고창수박의 브랜드가 우수하다는 증거가 되는 셈이다.
고창 대산면 수박밭 풍경
고창 수박이 출하되는 시기에는 전국의 수박값의 판도가 변할만큼 고창수박은 맛과 당도에서 월등한 품질차이 나는 것은 당연하다. 이유는 대산면,무장면,공음면등 일대의 성분좋은 황토에다 적당한 일조량과 고창 수박의 품종개량으로 오늘의 고창수박이 있게하였다. 끝없는 지평선을 이루는 수박단지 계획은 고창 농촌지도소장의 열의로 일구어낸 지역 특화사업의 좋은 본보기가 됐다.
고창관광
모 양 성
모양성 답성놀이(고창여고생)
조선 단종원년(1453년)에 축성된 국내 유일의 자연석 성곽(1.6Km)으로는 국내에서 가장완벽하게 보존된 성이다. 호남의 곡창지대와 노령산맥의 첫머리 부분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모양성은 부녀자들이 정교하게 쌓았다는 전설이 있으나 성벽에 새겨진 각자를 보면 전북,전남,제주등 각 고을마다 책임구역이 정해져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모양성을 축성한후세 번의 전쟁을 치루었는데 첫 번째는 정유재란, 두 번째는 동학혁명세 번째는 6.25라고 한다. 지금은 매년 음력 9월 9일 전후로해서 모양성제를 성대히 치룬다.
벚꽃핀 모양성 성문
예전에는 일부 무너진 성곽과 성내에는 고창여고가 자리하였으나, 고창을 아끼는 사람들에 의해 꾸준히 개보수 한결과 지금은 어느곳 하나 정성이 가지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말끔하게 단장되어 있다.
눈덥힌 모양성 성문
모양성에는 예부터 부녀자들이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한바퀴 돌면 다릿병이 낫고 두바퀴 돌면 무병장수하고 세 바퀴 돌면 극락 장생한다 하여 매년 윤삼월 초엿새,열엿새,스무엿새 등 여섯수가 든 날은 저승문이 열리는 날이라 하여 다른 지방에서도 성을 밟기 위해 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모양성 바깥쪽의 아름다운 꽃길 풍경
모양성은 부녀자들이 만들어서 정교하다는 전설이 있는데 풀이하자면 고창의 남자와 여자들이 패를 나누어 성을 쌓기로 시합을 하였는데 남자들은 여자들 쯤이야 하며 상갑리 섬틀봉에 큰 바위만(지금의 고인돌군) 골라 열심히 쌓고 있었는데 멀리보인 고창 읍성에는 성이 쌓일 기미가 보이지 않자 남자들은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 잠을 잤는데 만세소리가 들려와 눈을 떠보니 벌써 고창읍에 자리한 모양성이 완성된 것을 보고 땅을치며 한탄했다는 전설이 있으며, 지금도 상갑리 섬틀봉에는 쌓다만 큰돌이(고인돌군) 여기 저기 흩어져 있다는 전설이다.어린이에게는 역사의 교훈장으로 연인들에게는 데이트 코스로 가족들에게는 휴식의 장소로 꾸며져 있으며, 이곳에서 취사는 금지되어 있어 김밥정도로 소풍을 오면 좋다.
모양성 객사 전면모습 고창읍성의 전적 (고창향토문화연구소장 이기화)
고창읍성은 단종 원년(1453년)에 축성된 석성이어서 전적의 연원은 사적 기록으로 보아 선조 30년(1597)의 정유재란이라 하겠다. 그 후 고종 31(1894)의 갑오동학 농면혁명 때와 광무3년(1899) 영학당 산건 그리고 을사보호조약 체결(1905) 이후 경술 국치(1910)에 이르는 의병항쟁기 등 네 차례의 전적을 들 수 있겠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의 기록은 왕조실록과 호남절의록이 상반되게 쓰고 있다.
고창여고생들이 모양성 축제때 모양성 축성을 재현하는 모습
고창읍성의 현상
(고창향토문화연구소장 이기화)
1. 성길이 : 거의 원형으로 축성된 고창읍성의 둘레는 1,680m이고 외성이 따로 없는 이성의 해자의 길이는 약 2,800m에 이르고 있다.
2. 성너비 : 상부 표면의 여첩기단폭은 약 80Cm이나 중간부 1.4m 하부의 퇴폭은 2m에 이르고 있다.
3 . 성너비 : 평지에 쌓은 것이 아니라, 장대봉(108m)의 산세를 최대한 이용하여 축성하였기 때문에 일정한 성 높이의 숫자화는 매우 어렵다. 그러나 원래의 자연지반 위에 인위적으로 쌓은 부분은, 고지대에서 3-4m, 저지대에는서는 4-5m에 이르고 있다. 고창읍성에 관한 각종 기록에도 그 높이를 12척으로 표시하고 있다.
4. 축성양식 : 석축 요령은 모제석축이 아니라 모서리 이름으로 축성하였다. 석축의 공법은 외면만 석축을 이루고 내면은 흙과 잡석으로 다져서 축석하는 내탁법을 쓴 물림쌓기를, 아랫돌을 3분식 뒤로 물려 쌓아 약 4도 가량 벽면의 경사를 약간 유지하는 석축 방식으로 축성 하였다. 그리고 읍성이면서도 산성화한 절충 성곽의 평산으로 알려진 고창읍성은 포곡 형산성유형으로 장대봉의 동서 계곡을 둘려싼 주위의 산 능선을 따라 원형으로 축조되었다. 다시 말하면 장대봉을 정점으로 하여 북쪽을 향해 '小"자형으로 뻗어내린 산지와 그 사이의 계곡으로 이어지는 평지를 망라하여 축성한 평산성의 축성 형태를 띠고 있다.
5. 지리 : 성의 최고 정점은 해발 108고지 장대봉이고, 최저 지점은 해발 60m의 서문수구, 북문수구 근처이다. 동은 진산인 방등산과 서는 성원평을 건너 서산에 남은 봉맥을 넘어 취령산 북은 전면의 자연방어물인 고창천을 건너 성산이 있어 흥덕으로 통하는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노령산맥에 이른 호남 내륙의 루트를 차단하는 길목이 되고 있다
인촌 김성수 생가
인촌 김성수선생은 구한말로부터 6.25전후까지 우리 근대사에 있어서 가장 암울했던 65년간의 세월을 살다간 민족의 선각자였고 겨레의 스승이었다. 인촌은 1891년 10월11일(음9월9일) 전라도 고창군 부안면 인촌리에서 김경중의 장남으로 태어나 세살 때 큰아버지 김기중의 양자로 출계(出系)했다. 본관은 울산이고 조선 인종때의 거유(巨儒) 하서 김인후의 13대 손이다. 6세 때부터 한학을 공부하다가 1908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1914년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했다.귀국 후 1915년 중앙학교를 인수해 민족교육의 터전을 마련하였으며 1917년에는 경성직뉴주식회사를 인수, 경영하다가 1919년 10월에 경성방직주식회사를 설립했다.
1920년 4월에는 동아일보를 창간함으로써 30세에 교육 산업 언론을 통한 민족의 실력양성과 국가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1929년 12월 구미 선진국의 교육문물을 시찰하고 1년9개월 만에 귀국한 인촌선생은 1932년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함으로써 숙원이었던 고등교육기관 설립의 꿈을 이룩하였으며 해방후 1946년8월 보성전문학교를 기초로 하여 고려대학교를 발족시킴으로써 민족사학의 터전을 다졌다.
해방후 애국지사들이 한국민주당을 창당하고 참여를 권해 왔으나 처음에는 이를 거절했다. 그러나 1945년12월 고하 송진우 선생이 흉탄에 쓰러지자 주위의 강청에 못이겨 한민당 수석총무(당수)를 맡았다. 1951년5월 피난수도 부산에서 제2대 부통령에 피선되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과 뜻을 같이 할 수 없어 1년만에 사임하고 말았다. 1953년 환도 이후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도 이승만 독재에 대항할 민주세력의 대동단결을 위해 노심초사하다 1955년 2월18일 65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졌고 장지는 고려대학교 구내 인촌동산이었으며 1962년 건국공로훈장 복장(複章)이 추서되었다.
김성수 생가(전라북도 기념물 제 39호)
이건물은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이며 정치,언론,교육,문화등 여러 분야에 걸쳐 우리 근대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인촌 김성수(1891-1955)선생의 생가이다. 이곳은 1977년 8월 수당선생이 자비를 들여 옛모습 그대로 보수함과 동시에 없어진 건물을 복원하고 노폭 5m의 진입로도 개설완공한 것이다. 지금은 간척지로 변했지만 그당시에는 생가근처까지 배가 들어 올 수 있었으며 자택에서 보면 곰소,변산반도가 눈앞에 들어온다. 99칸정도의 사대부집 살림살이를 구경할 수 있으며, 깔끔하게 정돈된 정원과 재잘거리는 새소리가 정취를 더해준다. 인촌 김성수에 대한 평가가 분분하지만 근대사의 중요한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그가 태어난 환경과 배경을 연구하는데 보탬이 될 수 있는 이곳생가에는 시비거리가 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는데 사학자들의 해석을 풀이하면, 이곳 생가에는 대문이 2개가 있다는 것이다. 정면에 1개가 있고, 가장 뒷편인 안채바로 옆에 대문이 하나더 있다는 것이다. 안채의 대문에서 산등성이 하나 넘으면 배를 타고 도주할 수 있는 도주로용 대문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가진자들의 불안함인지, 민족 운동을 위해 피신을 해야하는 지는 해석의 차이는 이곳을 찾아 보는이들의 몫이다.
찾아가는길 :
선운사에서 나오면 연기식당이 있는 삼거리가 보이고, 이곳에서 좌회전 하면 심원면소재지,동호해수욕장,법성포가는 22번 국도가나온다. 이곳에서 약 3km를 달리면 인촌 김성수 생가 표시판이 나오면 우회전해서 다시 4km달리면 된다.
고 인 돌
고창군 위치 및 지형 고창군은 전라북도의 서남단에 위치하며 동경 126도 46분, 북위 35도 18분부터 35도 34분에 해당한다. 면적은 603.046km2정도로서 전라북도의 7.5%가 되며 북쪽으로는 부안군,동쪽은 정읍군.전남 장성군.영광군, 서쪽은 바다로 둘러 있다. 또한 고창군은 반등산(742m), 벽오봉(640m), 문수산(620m), 고산(537m)등 명산이 둘러있고 선운사 뒤로 흐르는 장연강의 본류는 모두 노령산맥의 서쪽 비탈에서 발원하여 고창군의 중앙을 관류, 서해에 유입하는 관계로 지세는 자연히 동남부가 높고 서북부가 낮으며 남동부에 구릉지대를 형성하고 서북부에 평야지대를 이루어 31.4km의 고수천, 고창천, 주진천, 인천강, 자연강으로 불리우는하천 유역은 예로부터 비옥한 농경지로서 농경에 적합한 지역이었을 뿐만 아니라 바다를 통하는 문화교류도 활발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기후는 해양성 기후의 특색을 나타내며 일조율이 58%로 맑은 날이 많고 겨울철에도 눈이 많고 온난한 편이다. 연 평균기온은 26.5도, 그리고 연 강수량은 1107.2mm이다.
고창군 고인돌 현황
고창군은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조밀한 고인돌의 분포지역으로 그 수는 대략 2,000여기가 된다. 고인돌의 주요 분포지로는 고창읍 도산리.매산리.월암리.죽림리.월곡리,고수면 황산리.신기리.조산리, 아산면 학전리, 심원면 하전리.월산리, 신림면 무림리.가평리, 부안면 용산리.수동리, 공음면 구암리, 상하면 하장리 등 거의 전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이중 아산면 운곡리에는 상석 높이 5m, 가리 7m, 세로 5m 정도의 우리나라 최대크기의 고인돌이 자리하고 있으며, 도산리에는 북방식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다.
죽림리 상갑리 고인돌군 현황
죽림리.상갑리 고인돌군은 고창읍에서 북서편으로 약 9.5km 남짓한 지점에 자리한 매산마을을 중심으로 동서로 약 1,764m 범위에 분포되어 있다. 이 일대의 표고는 15m에서 최고 표고 199m 정도인데 대부분의 고인돌은 죽림리 매산마을을 기점으로 동서에 걸쳐 산줄기의 남쪽 기슭을 따라 표고 15-50m의 범위내에 군을 이루고 등고선을 따라 분퐇하고 있다.
경사도는 죽림리 지역의 경우 표고 60m를 기점으로 경사도가 크게 증가하며 경사도 10%미만의 평지가 19.7에 해당하는 194,600m2, 10-30%rk 14.3%에 해당하는 141,100m2를 차지하고 있다. 인접한 도산리 지역은 10%미만의 평지는 8.8%에 해당하는 2,975m2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전부 경사도가 10-30%의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데 이 일대 고인돌군은 주로 경사도가 낮은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상태다. 토지 이용을보면 전형적인 농촌 토지이용 형태로 남쪽에 논을 중심으로 한 농지가 분포하고, 북쪽으로는 경사면을 따라 산림이 형성되어 있으며, 논과 산림의 경계선상의 완만한 사면에 취락과밭이 동서로 길게 분포하는데 고인돌은 산림과 농지 사이의 경계선상에 주로 분포하고 있다.죽림리 및 상갑리 일대의 고인돌은 1965년 국립박물관에 의해서 3기가 발굴조사된 이래 1990년 전라북도와 원광대학교의 주관으로 3개월에 걸친 현지조사에 의해 442기가 조사되었으며 파괴.매몰된 108를 합하면 550여기가 확인되었다. 그러나 조사이전의 파괴된기수를 합하면 대략 1000여기 내외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도깨비 도로
[도깨비도로]
제주도에만 있는 것으로 알려진 신비의 도깨비 도로가 고창 석정온천 부근에서 발견되어 요즘 언론에 알려지면서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하고있다. 이곳은 고창군청- 솔재 - 백양사로 이어지는 준국도 15호선이 새로이 4차선으로 단장되면서 생겨난 도로이다. 이곳을 찾을려면 먼저 고창군청에서 광주방면으로 약 2km를 달리게 되면 석정온천을 들어가는 2차선 도로가 좌측에 있고 사진과 같이 신호등이 있다. 그리고 오른쪽에 적색보도 블럭이 끝나는 지점있다. 이곳은 내리막 도로인데 차의 클러치를 중립에 놓게되면 후진이 되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난다. 반대 방향에서는 오르막길인데 차가 올라가고 있는 것처럼 착시현상이 일어난다. 이부분부터 4차선으로 약 100m가 도깨비 도로의 시작이며 육안으로 보면 약 15도 정도의 경사진게 분명하다.
제주도 5.16도로와 마찮가지로 오르막길에서 차를 멈추면 당연히 내려와야 하지만 올라가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현장은 경사가 낮은곳이 높게 보이는 일종의 착시현상이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제주도의 5.16도로에 도깨비도로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제주도 관광시 필수코스로 여행객들이 들르곤 하는데 이제는 멀리 비행기를 타고 갈 필요 없이 이곳 고창 도깨비도로에 오면 기이한 현상을 가족 또는 연인과 함께 신비함을 체험할 수 있다. 고창읍 주변에는 모양성, 고인돌군, 석정온천등 볼거리가 많아 새로운 관광명소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신재효 생가
신 재 효
양반의 신분과 넉넉한 가정 생활에도 불구하여 타고난 끼를 버리지 못하여 판소리를 새로 집대성한 인물
우리나라 판소리의 대가 신재효는 고창에서 태어나 판소리 여섯마당,즉 춘향가, 심청가,수궁가,흥보가,적벽가,변강쇠가의 가사를 정리하고 판소리의 이론을 정립하였다. 본래 판소리는 열두마당이었으나 음악성이 약하거나 사실이 조잡하거나 내용이 허술하여 자연도태되어 지금은 여섯마 당만 전해지고 있다.신재효는 원래 재산이 넉넉한 집에서 태어난 양반이 었으나 타고난 끼를 버리지 못하고 판소리에 심취되어 성조가,오섬가,어부사등 많은 작품과 후진을 길러내어 고창에는 김소희를 비롯한 유명한 명창을 발굴하였으며, 전주 대사습놀이의 뿌리를 내리게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신재효 고택은 모양성입구에 자리하여 지금도 보존되어 있으며,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해 신재효 고택옆에 동리음악당을 신축하여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고창 모양성 입구 우측에 새로 보수,단장된 신재효 생가있고, 생가안에는 난초,모란등 아름다운 정원을 볼 수 있다. 소담하지만 그시절 그장단과 소리가 귓가에 멤도는 것같은 느낌이다.신재효 생가 옆 모양성 주차장옆에 동리 국악당을 새로이 단장하여 후세 명창을 길러내고자 어린학생들의 창소리가 연일 울려퍼지고 있다
삼 호 정
삼호정은 옥천조씨 3형제분[인호(현동),덕호(후동),석호(석동)]의 호를 호(湖)가 셋이어서 지었다고 한다. 조공 형제 삼인이 여기 은거하여 도를 구하면서 백씨 상호는 인천강으서 심신을 세쇄(洗灑)하고 중씨 중호는 덕천강에서 조석으로 수조 했으며 계시 하호는 석천강에서 관개함이라 하고 작은 정자를 호(湖)의 위에 지어 삼호라 편객하고는 월석 화조에 꽃다운 물가를 따라 소일하고 술통과 시로 이륜을 펴고 마음껏 즐기니 사람은 티끌로 더럽힘이 없고 호는 찌꺼기로 더럽힘이 없는 청호로는 이 분들이 없어서는 안되겠고 정은이 호가 없어서는 안되겠더라. 지취를 기록하여 서를 하고 시를 서술하였다
소재지 : 고창군 아산면 용계리(영당)
삼호정은 고창에서 선운사가는 중간쯤인 아산면 원평(인천장)에서 200m정도 선운사 방면으로 가면 볼 수 있으며, 좌측에는 인천강이 흐르고 강건너편에 두루미 서식지가 보여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삼호정 뒤로는 옥천조씨 지평공파의 영당(덕천사)이 자리하고 있다.
무장 읍성
무장 읍성 진무루
무장면 성내리에 있는 이 성은 1991.2.21 사적 제346호로 지정되었으며, 성의 남문인 진무루에서 무장초등학교 뒷산을 거쳐, 해리면으로 가는 도로의 좌편까지 뻗어 있는데 성의 둘레는 약 1,400m,넓이는 43,847평 이다.성내에는 객사,동헌,진무루 등 옛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고 건물 주변에는 여러가지 유구들이 산재해 있다. 그동안 흙으로만 축조된 토성으로 알려져 왔던 이 성이 공사때에 성벽 동쪽 끝부분의 단면이 드러 났었는데 성곽일부가 흙과 돌을 섞어서 축조된 것임이 밝혀졌다.
1915년에 발견된 「무장읍지」에 의하면 조선 태종 17년(1417) 병마사 김저래가 여러 고을의 백성과 승려 등 주민 20,000여명을 동원하여 그해 2월부터 5월까지 만4개월 동안에 축조했다고 전한다. 한편 1894년 일어났던 동학 농민혁명은 이곳 무장읍성에서 맨 처음 봉기하였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설화·민요
〔설 화〕
선운사 가먼 그 밤도 많이 나고 뭣도 많이 난게, 그 법당 안에큰 절 그가, 여 중들도 거쳐허고 그 동네서 놀러도 오고 그런,사람이 많이 모타서 놀아요. 근디 하릇 저녁은 느닷없이 내기가 나네, 뭣 내기냐. 그 밑에 니려 오면 냉기동이란 동네가 있어요.냉기동이라고. 그 동네 가서 김씨가 만덕에 아들하나 낳어. 만덕아들은, 가가 나가 몇살이냐, 한 일곱 살 여섯 살 그정도라 말여
."그 애기를 데리고 여그를 오먼 우리가 추렴을 내서 먹고,못델고 오먼 못 델고 온 덕을 내서 먹는다." 아, 그런 느닷없는 얘기가 난게, 젊은 청년 하나가 썩 나서서,"내가 데릿고 올란다고, 내가 데릿고""어떡하먼 느기 꼭 거 가서 디릿고 올래"거그한 그 법당 거그서 리수로 헌다먼 칠마장돼요. 그래서 거르를 내려가. 내려 가는 디, 그 어느때던고 달은 밝고 그 김씨 내오분이 그 어린 것을 가운데다 품고, 잔단말여."김생원, 김생원"문을,"어쩐 일인가, 자네가?""아, 우리가 절에서 시방 무단지 장난나서 내기가 났오. 집의 아들을 데릿고먼 그 사람들이 한탕낸다고 그러고, 못 데리고 오면 나보고 내라한다""허허, 우리 귀헌 아들이지마는 자네들 장난났단게"무심없이 애기를 참 잠들은 놈을 깨서 주워. 그래 그놈 업고 와요. 업고와서 큰 절 대문간 밖에다 시워 놓고, 시워 놓고 재벌 들어갔어. 다짐받을라고, 이 청년이, 애기는 것다 거까지 데려다놨은게, 진짜로 데리고 왔거든."저 녁석이 진즉 가져왔더니,
우리 내기 헌대로 못 허겠냐고 말여, 내가 데리고 와먼 느그 한잔 댔다고"말여. 재벌 애기를 델러 대문밖이로. 애기가 없어. 달은 휘헝청 밝거든. 소동이 날 것 아녀, 절에서, 열댓이 놓았더니, 한 이십명이 놀았더니 하고,"아무래도 큰일났다" 난리가 나버렸어. 애기가 없어져 버렸으니 난리가 나지. 자. 큰일났어. "저그 산거실 어느 고랑이 가먼 호랑이가 새끼를 낳었다고 허드라.
아매, 그놈이 이 근방 댕기다가 애기를 업어간게 사실이다" 그것도 평가가 돼버렸네. 가만히 한참때 그지마는 그 애기를, 넘의 애기를 갖다가 호랭이 물려 보낸 생각을 하먼 기가 맥히거든요. 그곳 젊은이들이 나와 살릴 수가 없고. 그서는 그 바로 그 내원절이라고 내원절 뒤에 가서 대밭이 있어, 시방도 대밭 조까 있어. 거 가서 대 한나를 비었어. 대 한나를 그저 한발씩 끓어서 죽창을 맨들었어. 죽창을 맨들아서 등잔불에 끄터리 살짝 구갖고 이놈들고, 거그 인자 나무허러 댕기고 어찌고 헌게 대게 인자 호랭이굴을 짐작허든 모양여. 그리고 호랭이허고 퇴끼허고는 아무 눈이 많이 와도 동쪽이나 남쪽으로 문을 내재, 북쪽으로 문을 안내. 그러먼 그 달이 뜨면 달이 비치고, 해가 뜨면 해가 비쳐, 문악이. 깍 끼는 금수장대로 그냥 대막대기 물고 나오나봐. 호랭이가 새끼가 둘이.그서 아 그적으는 그냥 독 올른 사람이라, 가랭이로 다리 하나를 딛고, 하나는 딛고, 찢어서 독단 우에 냇뻐리고 호랭이 굴 안에 앉었어. 그 대창 그놈 들고, 아 그서 그러 애기를 업고 와, 호랭이가. 저그까금 올라와, 호랭이가 이자, 그 애가 그놈 읍꼬. 그러먼 호랭이가 새끼난 짐승은 쥑감, 넋이나 빼지 아주 쥑이든 안해, 피를 빨아 멕일라고. 피를 새끼를 메기라고 피를 안내. 짐성을 잡으나 사람으로거나 피를 안내고 업고는 그 애기를, 그래서 애기 그놈을 내려 놓고, 요만큼 내려 놓고 꼬랭이로 굴을, 꼬리로 새끼 있는 굴. 이다. 집어너 내둘러. 그런게 그놈을 어느, 틈에 그냥 감었어. 손을 꼬리, 꼬리를 감어 갖고 그냥 대창을 그냥 똥구녁 어디다 대고는 어디 가슴에다 대고 빵 차주더니 밀었어. 근게 요새 쓸개 반찬 그 꼬챙이 뀌듯기 뀌어져버릿어. 호랭이가. 확 그냥 잡어댕긴게 그냥 저는 그냥 퍼득이다 그냥 들어가먼 어떻헐라고 꼬쟁이 뀌어 버렸어. 그래는 호랭이 훌덕훌덕 뛸 것 아니요. 그래갖고 애기를 본게 펄덕펄덕 살어나. 안죽고 들어 애기는 겁을 모리재, 뭣이 뭣인줄, 그래서 그놈을 코를 빨고 어찌 업고 등락 업고 내려온다 말여. 내려오느디, 거그서는 또 절에서는 그냥 대, 대막대기를 든담,
뭔 꽹쐐기를 든담 인자 죽 쫓아 올라온단말야. 혼자 보낼 수 있을 것여. 사람들 죽 따라온제. "애기 찾었다" 또 인자 저쪽으서는 어메, 아버지는 그냥 칼을 들고, 낫을 들고, "이놈이 내 새끼를 호랭이 물려가 죽어 있을라고" 그서 이놈을 코를 빨고, 따순물을 디서 멕이고 숨이 차났어, 야기가, 살았단 말여. 그놈 사주를 본게 그날 저녁으 호랭이가 거그를 갔어. 애기를 물어갈라고.
그날 저녁으 그짓거리가 안났이먼 그래 호랭이가 떱석 물려갔어. 그, 사람 장난 허는 통에 호량이가 못 물어갔어. 그래 갖고 살었단 말여. 근게 김씨가 그 자식보단 귀허게 알어. 결의 형제를 허고 살림살이도 반분 해주고 그랬드라요. 그것이 선운사의 전설이요.
이 지방에는 여러 개의 짤막짤막한 설화가 전한다.
〈진흥왕과 선운사 전설〉은 신라 진흥왕이 불교에 심취한 나머지 왕위를 물려주고 선운사에 들어가 스스로 법운자(法雲子)라 칭하고 중으로서 일생을 마쳤다 하는데, 도솔암은 왕비를 위해, 중애암은 공주를 위해 진흥왕이 건립했다는 이야기이다.
〈밤내골 달래의 효심 전설〉은 겨우 열두 살 소녀인 달래가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새벽마다 지성으로 불공을 드렸는데, 어느 날 신령이 나타나 마을 앞 냇가의 버드나무 밑에 가면 뱀의 알이 있을 것이니, 그것을 삶아서 먹으면 아버지의 병이 나을 것이라 해 신령의 말대로 했더니, 아버지의 병이 깨끗이 나았다는 이야기이다. 이로부터 그 내를 뱀내〔蛇川〕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각시바위전설〉은 불심이 깊은 어느 여인이 운선암에 불공을 드리러 갔다가, 중이 유방을 만지자 젖꼭지를 자르고 자살해 버렸는데, 그 뒤 중이 그 여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양춘암이라는 바위에 초상을 새기니 먹구름이 끼면서 젖꼭지가 떨어져 피가 흘러나왔다는 이야기인데 지금도 여전히 피가 흐르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검당마을과 염정설화〉는, 선운사에서 멀지 않은 바닷가에 검당마을이 있었는데, 이 이름은 고려 때의 고승 검단(黔丹)에서 연유된 것으로, 검단이 선운사에 머무르고 있을 때 선운사 골짜기에 본거를 정하고 백성들을 괴롭히던 도둑들을 타일러 이 곳에서 소금을 굽게 해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주었다는 이야기이다.
〈말과 되바위 전설〉은 백제 초기에 최씨성을 가진 장수가 큰 바위를 가지고 중국으로 가던 중 만리장성의 성쌓기가 끝났다는 소식을 듣고, 그 바위를 아랫마을에 버리고, 그 밑에 굴을 파고 살면서 바위에 구멍을 파서 주민들에게 말〔斗〕과 되〔升〕로 쓰도록 했다는 이야기로 지금도 말바위·되바위라고 한다. 그 밖에 〈깨진 바위 전설〉·〈애기바위와 구두쇠영감 전설〉·〈망북단의 사연 전설〉 등이 전한다.
〔민 요〕
이 지방에는 전라북도의 다른 지방과 마찬가지로 노동요 중 벼농사와 관련된 민요가 많다. 벼농사에 부르는 민요에는 봄에 논물을 대기 위해 물두레질을 하며 부르는 〈물두레질소리〉, 모를 심으며 부르는 〈모심기소리〉, 논에 김을 매며 부르는 〈논매기소리〉, 논매기나 추수를 끝내고 돌아오면서 혹은 놀면서 부르는 〈장원질소리〉가 있다.
〈모심기소리〉는 3분박 4박자로 메기고 받는 〈상사소리〉가 불리는데, 선율은 〈농부가〉로 알려진 민요와 같다. 논매기는 대개 ‘초벌’·‘두벌’·‘세벌’이라 해 세 번을 매는데, ‘초벌’과 ‘두벌’에는 선소리꾼이 긴 사설을 촘촘히 엮어서 메기면, 김매는 일꾼들은 “어기야 아.” 하고 받는다.
초벌과 두벌의 〈김매기소리〉는 메기는 소리나 받는 소리가 모두 일정한 장단이 없는 자유리듬으로 불린다. 세벌 〈김매기소리〉로는 전라남도 나주지방과도 같은 〈절사소리〉를 부른다. 가을에 추수가 끝나고 들에서 마을로 돌아오며, 그 해에 가장 일을 열심히 한 일꾼을 뽑아 소에 태우고 놀면서 부르는 〈장원질소리〉로는 〈풍년가〉의 원형인 〈지화자소리〉를 한다.
이 밖에도 전래민요로 〈반닥지타령〉·〈거무타령〉·〈꼬리까기요〉 등이 있다. 〈반닥지타령〉에서 반닥지는 오지자배기를 말하는데, 그것을 깨고 아까워하는 뜻과 함께 정든 낭군과의 사별로 깨어진 사랑의 안타까움을 연결시켜 노래한 것이다.
그 일부를 보면, “열일곱에 산 반닥지/사랑에홀사 내반닥지/일흔일곱에 깨고나보니/유정할사 내반닥지/사발에 사촌 들어보소/오가리 오촌 들어보소······.”하는 것으로 그릇을 의인화한 노래이다.
〈거무타령〉은 “······이 많은 잔치에 왔다가·그냥 갈 수 있느냐/술이나 한탕 불러가/이 술에 저 술에 도파술/술일랑은 불렀시나/너물채소를 불러봐/주먹같다 고사리너물/고부자 장장 콩너물/이골저골 양해너물/한푼두푼 풋너물/들었다 놓았다 잡채너물······.”과 같이 거미를 노래한 것으로, 잔치에 구경 온 거미가 술·너물·탕·고기 등을 맛보는 장면이 계속된다. 약간 가사가 다른 〈거무타령〉도 있다.
〈꼬리까기요〉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일종의 언어유희라고 할 수 있다. 앞의 말을 받아 계속 이어가는 민요로, 동요에서도 가끔 볼 수 있는 형태이다.
“동무야 나무가자/배아파서 못가겠네/먼배 자라배/먼자라 업자라/먼업 솔업/먼솔 전주솔/먼전주 뉘비전주/먼뉘비 전주뉘비.”이 〈꼬리까기요〉는 이 지방에서 불린 〈동무타령〉과 비슷하다.
소요산에는 질마재라는 고개가 있고, 그 고개이름을 따서 그 옆 마을을 질마재마을이라 한다. 그 곳의 여인들 사이에서는 강강술래놀이가 전해오는데, 그 연희에 따르는 민요로 〈강강술래〉·〈남문열기〉·〈담넘기〉·〈지와밟기〉·〈덕석몰이〉·〈징금마야〉 등이 있다.
그 가운데서 〈지와밟기〉의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어디꼴 지양가/지야꼴 지야네/멧장이나 볼○능가/서른댓장 볼○네/어디꼴 지양가/지야꼴 지야네/멧장이나 볼○능가/서른댓장 볼○네/멧장이나 볼○능가/서른댓장 볼○네.”
그 밖에도 〈들노래〉·〈기음노래〉·〈노리개타령〉·〈베틀가〉·〈과부노래〉·〈댕기노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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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는 선운사 상사화만 생각나요.^^
불곡사 주변에도 심으면 참 예쁠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