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주님의 더 큰 도구로 쓰일 재목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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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년의 레지오 마리애 쁘레시디움 주회 모습. |
당시 김금룡이 보통 사람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생각과 행동을 거침없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장차 교회의 큰 일꾼으로 쓰시려는 주님의 특별할 안배가 있었기 때문이다.
김금룡은 교리를 제대로 깊이 이해하고 교회 상식도 널리 알기 위해 성경과 교리서, 경향잡지 등을 열심히 읽고 어려운 부분이 있으면 본당에 파견되어 있던 사제, 수녀 그리고 선배 교우들에게 이해될 때까지 질문하고 해답을 얻고는 했다.
열심히 기도하고 가난한 이웃을 위해 몸과 마음을 던지던 그는 상가(喪家) 봉사에서도 눈에 띄는 존재가 되어 가고 있었다. 1950년대에는 오늘날처럼 본당마다 연령회가 조직되어 있지 않았다.
당시 같은 본당 교우라면 대개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 삶에서 일어나는 일을 서로 돕고 살던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
교우가 병들어 위태하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 집에서 청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기꺼이 방문하여 살펴본 다음에
세상을 떠나려는 이가 회개하여 주님 앞으로 나아갈 준비를 잘하도록 권고하여 선종할 수 있도록 예비하게 하여야지 그냥 죽도록 버려두지 말아야 한다”(「텬쥬셩교례규」, 상장규구,
선종을 돕는 공부)는 교회 가르침대로 교우가 선종하기 이전부터 방문하여 위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선종하면 위령 기도(연도)를 바치고 형편과 능력에 따라 부조하고 봉사하였기 때문이다.
이 상가 봉사에도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은 누구보다 앞장섰고 헌신적이었다.
당시 도회지 사람 가운데 천주교 신자가 아닌 이가 죽으면 가족 외에는 시신을 보거나 만지는 일을 금기시하고 천하게 여기는 관습 때문에 장의사 또는 동네에서 온갖 궂은일을 맡아 하던 이들에게 시신을 맡겼다.
그러나 우리 교우들은 시신을 “우리 주 예수님의 팔다리와 몸이요 성령의 궁전이었음을 깊이 생각할 것”(「텬쥬셩교례규」)이라는 가르침대로 대개 교우의 손으로 염습하고 입관했다.
그러나 시신을 만지는 일은 아무리 착한 마음이 있더라도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곱게 선종한 이도 있지만, 불행히도 화상이나 물에 빠져 죽거나 사고로 돌아간 시신들을 보고 만지는 일은 웬만한 비위나 담력이 없는 이는 감히 엄두도 못 낼 만큼 험난한 일이었다.
하지만 시신의 상태가 아무리 험악해도 절대 불편한 기색을 보이거나, 마지못해 한다는 식으로 대충하는 적이 없었다. 늘 정성을 다해 씻기고 수의를 입히고 묶은 다음에 관에 모셨다.
비록 신자가 아니더라도 조건 없이 열심히 염습하고 입관하는 이런 천주교 신자들에게 자기 가족의 시신을 부탁하는 이들도 많아졌다.
나아가 기대 이상으로 진지하고 품위 있게 처리하고 기도까지 바치고 허드렛일도 망설이지 않고 도와주는 교우들의 이웃 사랑에 감복하여 천주교에 입교하는 이들도 많았다. 김금룡은 이 상가 봉사에도 가장 적극적이고 탁월한 솜씨를 발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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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의 목포 북항(뒷개). |
무리한 부탁에 응답하다
선교사들은 이처럼 점점 드러나는 김금룡의 특별한 모습을 유심히 눈여겨보고 있었다.
악착같이 돈 버는 일에만 매달리지 않을뿐더러, 이웃의 딱한 처지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의협심과 늘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험심,
그리고 무엇보다 강렬한 신앙심을 지닌 그가 주님의 일꾼으로서 합당한 재목임을 알아차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산정동본당 주임 둔(Dunne, 都) 신부가 어느날 김금룡을 사제관으로 조용히 불렀다.
“가이오씨, 제가 대단히 어려운 부탁을 하나 할까 하는데, 들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지만 어려워하지 마시고 말씀하십시오. 신부님!”
“지금 압해도에는 천주교 신자들도 많이 있고 앞으로 신자가 될 만한 사람들도 많이 있지만, 공소를 체계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유능한 일꾼이 없어서 참으로 어려움이 많습니다. 가이오씨께서 이 압해도에 있는 공소의 회장으로 가실 수 있겠습니까?”
“아시다시피 써야 할 곳은 많은데 본당으로 들어오는 돈이 거의 없는 저희 형편에서 정기적인 보수를 약속할 수는 없습니다.
대신에 공소 신자들이 교무금으로 내는 쌀과 공소에 딸린 밭에 농사를 짓고 지내시면 굶지는 않으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물론 이렇게 어려운 부탁을 하는 제가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보고 많은 날을 고민해 봐도 주변 사람 중에 가이오씨밖에는 압해도로 갈 사람이 없습니다.
참으로 염치없는 말씀이지만 제 부탁을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가이오씨가 그곳으로 가지 않으셔도 잘못은 아닙니다. 그러니 며칠 깊이 생각하시고 결정되면 저에게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아닌 이들이라면 할 말도 못되고 들을 말도 못 되는 억지에 가까운 소리였다.
목포본당 초대 주임 데예(Albert Deshayes) 신부가 산정동성당을 건립한 1898년 이듬해부터 도서 지방 선교를 시작하여 안창도, 도초도, 비금도, 자은도, 압해도 등지에 공소를 설립하였다.
따라서 압해도는 긴 역사만큼 신앙생활을 오래 한 교우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공소였다. 목포의 사목자들은 특별히 신경을 썼고,
산정동본당에서 회장을 파견하거나 압해도에 거주하면서 공소 회장으로 선임된 이들의 노력으로 신앙 공동체가 잘 보존되어 있었다.
당시 교회는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교우들을 본당 신부를 대신해 “예비신자 교육, 춘추 판공 준비, 공소 재산 관리, 공소 예절 주관,
공소에서 유아세례·대세·종부·혼인성사 집행 등”(가톨릭대사전)을 담당하는 공소 회장의 역할이 점점 더 전문화되고 체계화되어야 한다는 시대적인 요청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외적인 요소 말고도 회장은 “덕행이 있고 착한 표양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 세상에서 사람을 가르쳐 그가 기꺼이 받아들이게 하는 기묘한 이치는 권력이나 재물을 통해서도 아니고 학문이나 언변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덕행과 착한 표양으로만 가능한 것”(「회장 직분」)이라는 교회의 요구에 가장 부합한 교우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둔 신부가 김금룡을 불렀던 것이다.
김금룡은 장사를 거의 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지만, 목포와 고향인 무안에 집과 땅이 있어서 굶지 않고 살 수는 있었다.
그러나 서울에서 하숙하면서 사립 대학교에 다니는 아들의 뒷바라지에 적지 않은 돈이 계속 들어갔고, 아직 한참 일해야 할 장년 가장이었다.
혼자 겨우 굶지 않을 정도의 식량만 확보되는 압해도 공소에 아내까지 데리고 가서 함께 살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그리고 보수 문제는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김금룡이 압해도로 떠난다면 겨우 세 명뿐인 가족이 세 살림을 해야 하는 참으로 난감한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런 어려운 문제에 김금룡이 대답하는 데는 몇 분 걸리지 않았다. 신자가 된 이후에는 삼종기도에 있는 마리아의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루카 1, 38)라는 고백을 언제고 기꺼이 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신부님, 저에게 그런 자격이 있는지, 그리고 제가 얼마나 잘할 수 있을지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신부님께서 가라고 하시니 가겠습니다.”
오늘날의 압해도는 목포와 무안 양쪽으로 다리가 놓여 있기 때문에 몇 초만 달리면 갈 수 있는 육지와 다름없는 곳이 되었다.
그러나 다리가 놓이기 전까지는 목포 사람들이 예전부터 ‘뒷개’라고 부르던 북항에서 배를 타고 8분 정도 걸리는 섬이었다.
김금룡은 압해도에 대한 기초 조사라든가 도회지와는 달리 기초 생필품을 구하기도 쉽지 않은 궁벽한 섬인 압해도에서 꼭 필요할 것 같은 물품들도 구입하지 않았다.
그저 덮고 잘 이불과 간단한 옷가지 몇 벌, 그리고 현 하롤드 신부가 감사의 표시로 수여한 십자가와 성모상을 간직하고 1957년 10월에 뒷개에서 압해도행 연락선을 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