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량불변의 법칙
글쓴이: 김양규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고 생각하는 존재이지만 감정의 동물이기도 하다.
사람만큼 감정에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 존재도 없을게다.
역사가 생긴 이래 이성이 감정을 지배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고 한다.
사람은 항상 감정에 의해 이성을 움직여왔다.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기 때문이다.
기를 가볍게 하는 대화법을 공부하면서 감정의 중요성을 새삼 확인한다.
사람에겐 감정이라는 미묘한 느낌이 있는데 그 감정이 이성을 지배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감정을 충분히 인정하거나 존중하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다.
어릴 때부터 감정을 무시하는 습관을 키워왔는데,
흔히들 입에서 감정따위야, 기분따위야 하는 말로 치부되곤 했었다.
감정은 곧 기분이며 우리가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는 부수적인 것이란 생각이다.
이 잘못된 생각때문에 얼마나 많은 실수를 범했는지 모른다.
감정을 잘 캐치하고 존중해주면 한결 나아졌을 삶의 질.
감정을 무시함으로 말미암아 형편없이 떨어져버린 삶의 질.
얼마든지 고상하게 즐길 수 있는 삶을 동물의 세계와 다름없이 보내진 않았던가.
남과 나, 서로의 감정을 존중하고 인정해주지 않으면 영락없이 그렇게 전락하고 말지 않던가 말이다.
질량불변의 법칙이라고 했다.
감정의 질량 역시 불변하다는 말이다.
한번 생긴 감정은 그냥 둔다고 없어지거나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말안하고 있어도 안으로 차곡차곡 쌓여 나중에는 엄청난 파워로 폭발하고 만다는 말이다.
감정은 욕구때문에 생긴다.
욕구가 크면 감정도 크고 욕구가 작으면 감정도 작다.
욕구란 기대하는 마음이다.
기대치가 크면 감정의 표현도 크고, 기대치가 작으면 감정의 표현 역시 작게 마련이다.
그래서 사소한 것에도 크게 반응하는 사람에게는,그가 나에게 기대하고 있는 바가 크다고 생각하며 오히려 감사해야 한다고 했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과도하게 반응하는 사람 역시,그가 나에게 기대하고 있는 바가 많다고 생각하고 감사하라고 했다.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관심이 없으면 기대하지도 않을 것이고 기대하지 않으면 감정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무관심만큼 무섭고 차고 냉랭한 것이 또 없다.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다.
아무리 지적이고 인격적이고 영적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되려고 훈련하고 발버둥치며 애를 쓰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정의 동물인 것은 어쩔 수 없다.
감정은 인간성에서 온다.
인격에서 온다.
사람의 육체에서 온다.
그래서 감정적이라는 말은 육체적이란 말이다.
그건 영성이 아니라 인성이란 뜻이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인성의 지배를 받는 존재이다.
영적으로 훈련받고 배우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속에 내재된 육적인 감정의 영향을 떨칠 수 없는 것이 사람이다.
그래서 영적으로 홀리하고 대단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육체의 감정을 이기지 못해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많이 본다.
사람은 원래가 감정의 동물이요 감정의 지배를 받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기도할 때도 감정을 기도해야 한다.
나의 감정이 이렇습니다. 저렇습니다.
나의 감정이 요동을 칩니다..
이렇게 기도하며 감정을 바로잡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감정은 지금 바닥을 헤매고 있는데 지적으로, 이성적으로만 기도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과의 대화에서 남의 감정과 욕구,나의 욕구와 감정을 모두 존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배워왔듯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일게다.
나의 감정과 욕구를 하나님께 있는 그대로 아뢰고 그 욕구와 감정이 바로 처리되게 해달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리라.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정확하고도 세심하게 뚫어볼 수 있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때 비로소 제대로 감정의 처리가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