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9월 1일 오후 2시 40분
영동고속도로 상행선 62킬로미터 지점에서
28명의 승객을 태운 강원여객 직행버스는
늦여름 비로 한껏 입을 벌린 섬강에 추락, 24명의 목숨이 스러지다.
그 스물여덟명중에 장재인의 아내, 강원도 내면고등학교 불어선생 최영애와
두사람의 아들 장호군이 있었다.
덕수상고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교사이자 시인이었던
장재인이 주말 부부의 상봉을 위해 자신을 만나러 오던
아내와 아들의 사고 소식을 들은 것은
마중을 위해 나가 있던 구의동 버스 터미널.
그러나 급하게 달려간 사고의 현장에서
아내의 시신을 만난 것은 사고일로 부터 닷새가 지난 날이었고
다시 여드레가 지난 사고 13일째, 아들 호는 분간하기 힘든 모습으로
아빠의 품에 안기다.
처자의 장례를 치르던 그날 여주의 고대병원 뒷쪽 남한강둑 전주에
그 사람 장재인도 목을 매고 지금 이 가족은 남한강 공원묘지에
한개의 관을 안방 삼아 가운데에 호가 눕고 왼쪽에 아내가 눕고
오른쪽에 재인이 누워 피안의 세계에서 꽃피고 지는 모습을
함께 보며 살아가고 있다.
그들 묘지 앞에는
仁同張公在仁之墓 配 崔英愛 子 鎬
의 돌비석이 서있고
그 비석의 글자보다 기구하고 서러운
사랑의 유서한 장이
재인의 살아 글자체로
관 안에 남아
이 가족의 이부자리가 되고 있다.
- 故 장재인 교사의 주머니에서 발견된 유서내용 중 일부 -
생사의 차이가 이렇게 간결한 것을, 무던히도 애를 쓰며 살아왔습니다,
하늘이 지워주신 짐의 무게와 고뇌의 깊이를 용케도 감내케 하시더니 자그마한 행복의 기억들과 함께,
이제는 모든 짐을 벗겨 주십니다. 험한 삶을 위로하던 처자는 모질게 살다 희망의 입구에서 쓰러지고,
차마 간직할 수 없는 가엾은 고운 추억들만 남겨 두었습니다.
세상을 붙잡으려다 처자를 버리고, 이제 처자를 부여안기 위하여 세상을 버리려 합니다.
불행한 사람의 삶에 뛰어들어 고생만 하던 고마운 아내! 아들의 뒤를 따라 다시 강으로 뛰어들어 갔다는 아내처럼 저도 처자를 따라 떠나려 합니다. 이것은 사고 현장에 도착한 이래 강물을 바라보며 제 마음에 간직해오던 유일한 소망이었습니다.
행여 살아남아 보람된 일을 해야 한다는 생의 의무감을 생각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저희 세 식구가 지닌 쓰라린 사랑의 메시지보다 더 생생한 삶의 경종이 어디 있겠으며,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일깨워주고자 하는, 생을 초월한 선택이 어찌 소극적인 결심일 수 있겠습니까?
이제는 더 이상 여한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하늘의 섭리라고 믿으며 저희들의 행복을 찾아가오니 부디 슬퍼하거나 애석해 하시지 마시고,
살아계신 분들은 나름대로 행복을 찾아 따사롭게 살아주십사 하는 것이 저의 마지막 소망입니다.
저희 세 식구 하늘나라에서의 다시는 헤어짐이 없는 만남과 행복을 기원하여주시기 바랍니다. 살아 계신 분들은 제가 없어도 능히 견딜 수 있지만 저희 세 사람은 함께 있지 않고서는 한시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항상 헌신적이고 겸손하며 빈곤한 저를 풍요럽게 하던 가없이 고운 아내와 아들이 저를 부르며 달려오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저희 세 식구의 주검은 가운데에 아들, 아들의 왼편에 아내, 오른편에 저의 순서로 나란히 관 하나에 묻어주시고, 묘지는 장인어른의 뜻을 존중하여주십시오. 저와 아내의 결혼 반지는 그대로 끼워두시기 바랍니다. 먼 훗날, 부모님과 장인 장모님 모두 돌아가신 후에는 다시 화장하여 강물에 띄워줄 것을 부탁합니다. 사랑스런 아내와 아들을 다시 만날 것을 생각하니 더없이 평온하고 즐겁습니다.
- 1990년 9월 15일 02시 -
첫댓글 한적한오후 찡함니다 잘보았슴니다.....
휴일 저녁 눈시울을 적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