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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새벽 기도
스마트폰 화면의 푸른 빛이 어둠
속에서 떨렸다.
새벽 다섯 시, 윤희는 무릎을 꿇고 앉아 작은 글씨로 빼곡히 적힌 기도 수첩을 펼쳤다.
맨 위에는 '민준이네 가족'이라고
적혀 있었고,
그 아래로 며느리 제시카,
손녀 에밀리와 클로이의 이름이
한글과 영어로 함께 적혀 있었다.
그 밑에는 '수진이네 가족',
사위 제임스의 이름이 이어졌다.
"하나님,
오늘도 저들을 지켜주시옵소서."
윤희의 목소리는 작고 떨렸다.
여든한 살의 목소리는 더 이상
힘차게 기도할 수 없었지만,
매일 새벽 이 자리에 앉는
것만은 포기할 수 없었다.
아들이 미국으로 떠난 지 십팔 년,
딸이 떠난 지 십오 년.
처음에는 몇 년 후면 돌아오겠거니
했는데, 둘 다 그곳에서 결혼하고
집을 사면서 미국이 그들의 진짜
집이 되어버렸다.
"에밀리와 클로이가
건강하게 자라게 하시고,
수진이와 제임스에게도
좋은 소식 주시옵소서."
무릎이 시렸다.
관절염 때문에 오래 앉아 있기가
힘들었지만,
윤희는 기도를 끝내지 않았다.
시차 때문에 지금쯤 샌프란시스코의
민준이네는 저녁 식사 시간,
로스앤젤레스의 수진이네는
아이들을 재우는 시간이었다.
윤희는 눈을 감고 상상했다.
민준이가 여섯 살 에밀리,
네 살 클로이와 함께
저녁 식탁에 앉아 있고,
수진이가 사위와 함께
조용히 저녁을 먹는 모습을.
"저 아이들이 지혜롭게,
의롭게 살게 하소서."
기도를 마치고 일어서려는데
무릎에서 뚝 소리가 났다.
윤희는 벽을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거실로 나가니 남편 병수가
이미 일어나 앉아 있었다.
여든넷의 그는 요즘 들어
잠을 설치는 날이 많았다.
"또 기도했어?"
"응."
"무릎 아프다고 했잖아.
의자에 앉아서 해."
윤희는 대답 대신 웃었다.
병수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도 알고 있었다.
아내에게 새벽 기도는
자식들과 연결되는 유일한
끈이라는 것을.
전화는 일주일에 한 번씩,
화상통화로 겨우 삼십 분.
그 짧은 시간을 제외하면 자식들은
스마트폰 속 사진과 가끔 오는
문자 메시지 속에만 존재했다.
"오늘 토요일이지?
저녁에 민준이 전화 온대."
"응, 한국 시간으로 밤 아홉 시.
내일은 수진이 차례고."
병수는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봤다.
아직 열여섯 시간이 남았다.
그 시간이 어떤 날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어떤 날은 견딜 수 없이 길게 느껴졌다.
오늘은 어떨까.
병수는 창밖을 바라봤다.
동이 트기 시작했다.
또 하루가 시작되었다.
2장. 화면 속 얼굴들
저녁 아홉 시 정각,
윤희와 병수는 식탁 앞에
나란히 앉았다.
병수가 태블릿을 켜고
화상통화 앱을 실행했다.
처음 이 기계를 배울 때는
얼마나 어려웠던지.
민준이가 전화로 한 시간 넘게
설명해주고,
결국 동네 학원에 다니는
손자뻘 되는 대학생을 불러 배웠다.
신호음이 세 번 울렸다.
화면이 깜빡이더니
민준의 얼굴이 나타났다.
"엄마, 아빠!"
"어, 우리 아들."
윤희의 얼굴이 환해졌다.
화면 속 민준은 마흔다섯이었지만,
윤희의 눈에는 여전히 스물일곱에 MBA 유학을 떠나던 그 청년으로
보였다.
민준의 뒤로 거실이 보였다.
큰 창문 너머로 샌프란시스코
베이가 반짝였다.
"잘 지내셨어요?"
"그럼, 잘 지내지. 너희들은?"
곧 화면이 요란해졌다.
여섯 살 에밀리와 네 살 클로이가
우르르 달려들었다.
"할머니! 할아버지!"
"어머, 우리 에밀리, 클로이!"
에밀리가 화면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할머니, 나 오늘 유치원에서
그림 그렸어요!"
"정말? 뭘 그렸는데?"
"우리 가족이요!
엄마, 아빠, 클로이,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도요!"
에밀리가 종이를 화면에 들이댔다.
알록달록한 크레파스로 그린 그림.
큰 사람 넷과 작은 사람 둘이
손을 잡고 있었다.
"우와, 에밀리 정말 잘 그렸네!
할머니가 제일 예뻐 보인다!"
클로이가 언니를 밀어내고 끼어들었다.
"나도!
나도 할머니한테 보여줄 거 있어요!"
"우리 클로이, 뭔데?"
"내가 노래 배웠어요.
들어볼래요?"
클로이가 '반짝반짝 작은 별'을
영어로 불렀다.
음정이 맞지 않았지만,
윤희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병수도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며느리 제시카가 나타나
아이들을 진정시켰다.
"Girls, let Grandma and Grandpa talk to Daddy too."
"안녕하세요, 어머님, 아버님."
제시카는 한국계 미국인이었다.
부모님이 한국에서 이민 왔지만
본인은 미국에서 태어나 자랐다.
한국말을 조금 할 수 있었다.
"제시카, 애들 키우느라 고생이 많지?"
"괜찮아요.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어요."
민준이 아이들을 방으로 보낸 후
다시 화면 앞에 앉았다.
"엄마, 아빠 건강은 어때요?
병원 다녀오셨어요?"
"응, 지난주에 갔어.
혈압약 조금 바꿨어."
"잘 드셔야 돼요, 알았죠?
제시카가 영양제 보냈는데 받으셨어요?"
"어, 받았어. 고마워라."
민준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엄마, 아빠...
올해도 한국 가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회사 프로젝트가 중요한 시기라서."
윤희의 표정이 순간 어두워졌지만,
금방 밝게 웃었다.
"괜찮아, 괜찮아.
바쁜 거 아는데 뭘.
화상으로라도 이렇게 보는데."
"죄송해요. 내년에는 꼭 갈게요."
"그래, 그래. 네 일이 중요하지."
삼십 분이 금방 지나갔다.
민준이 시계를 보며 말했다.
"엄마, 미안한데
에밀리 피아노 레슨 데려다줘야 해서..."
"그래, 그래. 가봐. 애들 잘 챙기고."
"네. 사랑해요, 엄마 아빠."
"그래, 우리도 사랑한다."
화면이 꺼졌다.
윤희는 잠시 멍하니
앉아 있다가 말했다.
"내일은 수진이 차례네."
"그래."
"수진이는 아직도 아기 소식이 없나 봐."
병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둘째 딸 수진은 결혼한 지 오 년이
넘었지만 아직 아이가 없었다.
몇 번 물어봤지만 수진은 "때가 되면
생기겠죠"라고만 했다.
윤희는 더 이상 재촉하지 않았다.
미국에서 일하는 딸의 사정을
이해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아쉬웠다.
그날 밤 윤희는 잠들기 전 기도했다.
"하나님,
민준이네 손녀들을 축복하시고,
수진이에게도 좋은 소식 주시옵소서."
3장. 일요일의 두 통화
일요일 오전,
윤희와 병수는 교회에 갔다.
삼십 년을 다닌 작은 교회.
교인 대부분이 칠십 대 이상의
노인들이었다.
예배가 끝나고 교인들이 모여
차를 마셨다.
김 권사가 윤희에게 다가왔다.
"윤희 집사님,
어제 민준이한테 전화 받았어요?"
"네, 손녀들 얼굴 봤어요."
"어머, 좋겠다.
손주가 둘이나 있으시니."
윤희는 복잡한 표정으로 웃었다.
손주가 있는 건 감사한 일이었다.
하지만 태평양 건너에 있어서
일 년에 한두 번 화면으로만
볼 수 있었다.
다른 할머니들처럼 손주를 데리고
공원에 가거나,
유치원 학원을 도와주거나,
밥을 먹이거나 할 수 없었다.
박 장로가 끼어들었다.
"요즘 애들은 다 그래요.
자기들 좋은 데 가서 살지.
부모 생각은 안 해."
병수가 조용히 말했다.
"우리가 보낸 거잖아요.
더 나은 기회를 주려고."
"그렇긴 하지."
윤희는 더 이상 대화에 끼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언제나 똑같이 끝났다.
자식들을 해외로 보낸 것은
부모의 선택이었다는 결론으로.
저녁 아홉 시,
이번에는 수진의 전화였다.
"엄마, 아빠!"
"어, 우리 딸."
수진은 마흔둘이었다.
IT 회사의 프로젝트 매니저로 일했다.
화면 속 딸의 얼굴이 조금
피곤해 보였다.
"요즘은 어때? 힘들진 않고?"
"괜찮아요, 엄마.
회사 프로젝트가 좀 바쁘긴 한데
관리할 만해요."
사위 제임스가 뒤에서 손을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어머님, 아버님."
"어, 제임스. 잘 지내?"
제임스는 백인이었다.
키가 크고 친절했다.
한국말을 조금 배워서 서툴게
인사할 수 있었다.
수진이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엄마,
어제 민준 오빠네 통화하셨어요?"
"응, 에밀리가 그림 그린 거 보여줬어.
클로이는 노래도 불렀고."
"그 애들 정말 귀엽죠?
저도 가끔 영상통화로 보는데
너무 빨리 크는 것 같아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윤희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수진아, 너희들은...
아기 계획은 어때?"
수진이 잠시 머뭇거렸다.
"엄마, 사실은요..."
윤희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무슨 나쁜 소식인가.
"저희... 임신했어요.
지금 두 달째예요."
"뭐라고?"
윤희가 벌떡 일어섰다.
병수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 정말이야?"
"네, 엄마.
아직 초기라서 조심하고 있어요.
다음 달에 검사 더 받고 나면
확실해질 거예요."
윤희는 눈물이 쏟아졌다.
병수도 목이 메었다.
"수진아, 축하한다. 정말 축하해."
"고맙습니다, 아빠."
"몸조리 잘해야 돼.
무리하지 말고."
"네, 엄마. 제임스가 잘 챙겨줘요."
제임스가 화면에 다시 나타나
환하게 웃었다.
"어머님, 저도 너무 기뻐요.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실 거예요!"
전화를 끊고 나서 윤희와 병수는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여보, 우리 손주가 하나 더 생긴대요."
"그래."
"민준이네는 둘,
수진이네도 곧 하나.
손주가 셋이네요."
"그래."
윤희는 기쁨과 슬픔이 동시에 밀려왔다.
손주가 태어나는 건 축복이었다.
하지만 그 아이도 미국에서 태어나
자랄 것이다.
자신은 아마 화면으로만 볼 것이다.
갓 태어난 아기를 안아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여보, 우리 LA 갈 수 있을까요?
수진이가 출산할 때?"
병수는 한참을 생각했다.
"글쎄... 한번 알아보자.
건강 검진받고."
그날 밤 윤희는 오래 기도했다.
기쁨과 두려움,
감사와 걱정이 뒤섞인 기도였다.
4장. 할머니의 선물
석 달 후, 윤희는 시장에 나갔다.
손주들을 위한 선물을 사기 위해서였다.
에밀리와 클로이의 생일이
다음 달이었다.
에밀리는 일곱 살,
클로이는 다섯 살이 되었다.
한복 가게 앞에서 윤희는
발걸음을 멈췄다.
쇼윈도에 예쁜 어린이 한복이
걸려 있었다.
분홍색과 노란색.
에밀리와 클로이에게
딱 맞을 것 같았다.
"아줌마,
이거 미국으로 보낼 수 있어요?"
"그럼요. 많이들 보내세요.
사이즈가 어떻게 되세요?"
윤희는 지난번 화상통화에서
본 손녀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에밀리는 이제 제법 컸고,
클로이는 여전히 아기 같았다.
한복 두 벌을 샀다.
그리고 옆 가게에서 한국 전통 놀이
장난감도 샀다.
윷놀이 세트, 제기, 딱지.
손녀들이 한국 문화를 조금이라도
알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집에 돌아와 정성스럽게 포장했다.
한복 사이사이에 편지를 넣었다.
"사랑하는 에밀리에게,
할머니가 너를 처음 본 건
화면으로였단다.
너는 갓 태어난 아기였지.
이제 일곱 살이 되었구나.
할머니가 직접 안아주지 못해서 미안해.
이 한복을 입고 사진 찍어서 보내주렴.
할머니는 네가 세상에서
제일 예쁠 거라고 믿어.
사랑하는 할머니가"
클로이에게도 비슷한 편지를 썼다.
편지를 쓰는 내내 눈물이 떨어졌다.
택배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
윤희는 공원 벤치에 앉았다.
다른 할머니들이 손주들과 놀고 있었다.
한 할머니가 세 살쯤 된 손자를
그네에 태우고 밀어주고 있었다.
아이가 까르르 웃었다.
윤희의 가슴이 쪼그라들었다.
자신은 손주들과 저렇게
놀아본 적이 없다.
에밀리가 태어났을 때 민준이가
항공권을 보내줬지만,
윤희와 병수는 건강 문제로
가지 못했다.
클로이가 태어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모호한 상실.'
손주들이 존재하지만,
함께 있지 못한 상태.
할머니이지만 할머니 역할을
할 수 없는 상태.
며칠 후 민준에게서 문자가 왔다.
"엄마, 한복 받았어요!
애들이 너무 좋아해요.
사진 보낼게요."
사진이 도착했다.
에밀리와 클로이가 한복을 입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배경은 샌프란시스코의 거실이었지만,
아이들은 완벽한 한국 아이처럼 보였다.
윤희는 사진을 확대해서
한참 들여다봤다.
에밀리의 눈은 민준을 닮았다.
클로이의 입매는 제시카를 닮았다.
하지만 둘 다 윤희의 피가
흐르는 아이들이었다.
"여보, 사진 봐요. 우리 손녀들."
병수도 안경을 쓰고 들여다봤다.
"예쁘네."
"한복이 잘 어울리죠?"
"그래."
두 노인은 화면 속 손녀들을
오래 바라봤다.
만질 수 없는 아이들.
안아줄 수 없는 아이들.
하지만 분명히 자신들의 피를
이어받은 아이들.
5장. 새 생명의 소식
여름이 왔다.
수진의 배가 불러왔다.
매주 화상통화 때마다
윤희는 딸의 배를 보며 흐뭇해했다.
"수진아, 몸은 괜찮아?"
"네, 엄마.
좀 피곤하긴 한데 괜찮아요."
"입덧은?"
"이제 많이 나아졌어요."
"성별은 알아?"
수진이 환하게 웃었다.
"아들이에요, 엄마. 손자예요."
윤희는 손뼉을 쳤다.
병수도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병수네 집안 대를 이을
손자가 태어나는구나."
"네, 아빠.
이름은 아직 생각 중이에요.
한국 이름도 지어주시겠어요?"
"그럼, 그럼. 아빠가 잘 생각해볼게."
병수는 그날부터 책을 뒤지기 시작했다.
작명 책, 한자 사전.
손자의 이름을 짓는 것은 할아버지의
특권이자 책임이었다.
며칠 후 병수가 윤희에게 말했다.
"지혜 지(智) 자에 의로울 의(義) 자는 어때?"
"지의? 좋네요."
"지혜롭고 의롭게 자라라는 뜻이지."
윤희는 남편의 손을 잡았다.
"수진이가 좋아할 거예요."
그날 저녁 수진에게 전화했다.
"수진아, 아빠가 한국 이름 지으셨어.
지의(智義). 지혜로울 지에 의로울 의."
"와, 좋은 이름이에요!
제임스한테도 말해볼게요."
일주일 후 수진에게서 답이 왔다.
"엄마, 제임스도 좋아해요.
영어 이름은 Daniel로 하기로 했어요.
그래서 Daniel Jiui Kim이 될 거예요."
"다니엘 지의. 좋구나."
출산 예정일이 석 달 앞으로 다가왔다.
윤희와 병수는 진지하게 의논했다.
"여보,
우리 LA 가야 하는 거 아닐까요?"
"가고 싶지. 하지만 우리 몸이..."
병수는 최근 심장에 문제가 생겨
약을 먹고 있었다.
윤희도 무릎이 나빠 오래 걷기가
힘들었다.
10 시간 넘는 비행은 두 노인에게
위험할 수 있었다.
"병원에서 물어봅시다."
다음 주 병원에서 의사는 고개를
저었다.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장거리 비행은 심혈관에
무리를 줄 수 있어요.
특히 환자분 나이에는."
윤희는 집에 돌아와 울었다.
첫 손자가 태어나는데
곁에 가지 못한다.
갓 태어난 아기를 안아보지 못한다.
"여보, 저는 괜찮아요. 그냥 갑시다."
"안 돼. 당신 쓰러지면 어떡해.
수진이한테 걱정만 끼치는 거야."
병수의 말이 맞았다.
윤희는 결국 포기했다.
수진에게 전화했다.
"수진아, 미안하다.
엄마 아빠가 못 갈 것 같아."
"괜찮아요, 엄마.
건강이 더 중요하죠.
화상으로 보여드릴게요."
하지만 수진의 목소리에도
아쉬움이 배어 있었다.
6장. 화면 너머의 사랑
가을이 왔다.
수진의 출산일이 다가왔다.
어느 날 새벽 네 시,
윤희의 전화가 울렸다.
민준이었다.
"엄마, 수진이가 병원 갔어요.
진통이 시작됐대요."
"뭐라고?"
윤희는 벌떡 일어났다.
병수도 깼다.
"지금 제임스가 같이 있고,
저도 병원 가는 중이에요."
"민준아, 네가 왜 병원에?"
"제가 샌프란시스코에서
LA로 내려왔어요.
동생 출산하는데 혼자 두고
싶지 않아서요."
윤희는 눈물이 났다.
아들이 동생을 위해 달려갔다.
자신들이 가지 못하는 자리를.
"고맙다, 민준아."
"괜찮아요, 엄마.
제가 엄마 아빠 대신 곁에 있을게요.
계속 연락드릴게요."
몇 시간 후 민준에게서 사진이 왔다.
수진이 병원 침대에 누워 있고,
민준이 손을 잡고 있는 사진이었다.
오후 두 시, 한국 시간으로
다음 날 새벽 여섯 시.
민준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 아빠! 태어났어요!"
"정말?"
"네! 건강한 아들이에요.
3.2킬로그램!"
윤희와 병수는 서로를 껴안고 울었다.
"수진이는?"
"잘 있어요. 지금 아기 안고 있어요.
화상 연결할게요."
화면이 켜졌다.
병원 침대에 수진이 누워 있고,
품에 작은 아기를 안고 있었다.
제임스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엄마, 아빠. 우리 지의예요."
카메라가 아기에게 가까이 갔다.
작고 빨간 얼굴.
눈을 감고 있는 아기.
"어머, 우리 손자..."
윤희는 화면에 손을 뻗었다.
만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병수도 안경을 벗고 눈을 닦았다.
"수진아, 고생했다."
"고맙습니다, 아빠."
민준이 카메라를 들고 말했다.
"엄마, 아빠, 제가 대신 안아봤어요.
엄마 아빠가 안으신 것처럼요."
"고맙다, 아들아."
한 시간 동안 그들은 화면으로
아기를 봤다.
아기가 하품하는 것,
손을 움직이는 것,
울음을 터뜨리는 것.
모든 순간이 소중했다.
일주일 후 택배가 도착했다.
수진이가 보낸 것이었다.
상자를 열자 아기의 발도장과 손도장이 찍힌 액자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편지가 있었다.
"엄마, 아빠,
제가 지의를 낳을 수 있었던 건
엄마 아빠가 저를 이렇게
키워주셨기 때문이에요.
지혜롭게, 의롭게 사는 법을
가르쳐주셨기 때문이에요.
곁에 계시지 못해서 미안하시다고
하셨지만,
엄마 아빠는 항상 제 마음속에 계세요.
그리고 이제 지의에게도
할머니 할아버지 이야기를
많이 해줄 거예요.
내년 여름에는 꼭 한국 갈게요.
지의도 데리고요. 그때까지 건강하세요.
사랑하는 딸 수진이가"
윤희는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병수는 발도장 액자를 벽에 걸었다.
그날 저녁 민준에게서도 전화가 왔다.
"엄마, 에밀리랑 클로이가
사촌 되었다고 너무 좋아해요.
다음에 화상통화 때 아기 인형 가지고 할머니한테 보여드린대요."
"그래? 착하네, 우리 손녀들."
"엄마, 내년에 저희도 한국 갈게요.
애들이 할머니 할아버지 보고 싶다고
해요."
"정말?"
"네. 에밀리가 일곱 살이 되니까
이제 할머니 할아버지가 누군지 알아요.
항상 '할머니는 언제 만나?'라고
물어봐요."
윤희는 또 눈물을 흘렸다.
기쁨의 눈물이었다.
한 달 후 토요일 저녁,
특별한 화상통화가 열렸다.
민준이네 가족과 수진이네 가족이
모두 접속했다.
화면이 둘로 나뉘었다.
왼쪽에는 민준, 제시카, 에밀리, 클로이. 오른쪽에는 수진, 제임스, 그리고 작은 지의.
"할머니, 할아버지!"
에밀리와 클로이가 소리쳤다.
"어머, 우리 손주들 다 모였네!"
에밀리가 아기 인형을 들어 보였다.
"할머니, 저 이제 언니예요!
동생 돌보는 법 배웠어요!"
"우와, 에밀리 대단한데?"
클로이도 지지 않고 말했다.
"나도! 나도 아기 좋아해요!
지의 보고 싶어요!"
수진이 카메라를 지의에게 돌렸다.
아기가 작은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봤다.
"언니들이 보이니, 지의야?"
민준이 웃으며 말했다.
"에밀리, 클로이,
내년에 한국 가면 지의도 만날 거야."
"정말요? 와!"
윤희는 두 가족을 번갈아 보며
가슴이 벅찼다.
비록 화면 속이지만,
손주 셋이 모두 건강하고
행복해 보였다.
아들과 딸도 훌륭하게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통화가 끝난 후 병수가 말했다.
"여보, 우리가 심은 대로 거두는 거야."
"맞아요."
"민준이랑 수진이한테 지혜와 의로움을 가르쳤지.
이제 그 아이들이 손주들한테도 똑같이 가르치고 있어."
"그러게요. 우리가 못 가도,
우리 가르침은 계속 전해지는 거네요."
윤희는 창밖을 바라봤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었지만,
윤희의 마음은 따뜻했다.
"여보, 내년 여름까지
우리 건강해야 해요."
"그럼. 손주들 안아줘야지."
"에밀리, 클로이, 그리고 지의까지."
"셋 다."
윤희는 남편의 손을 잡았다.
여든을 넘긴 두 노인의 손은 주
름지고 거칠었지만,
그 안에는 따뜻한 사랑이 흘렀다.
그날 밤 윤희는 마지막 기도를 올렸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제 자녀들이 당신의 지혜로
살게 하시고,
손주들에게도 그 지혜를 전하게 하시니.
비록 태평양이 우리를 갈라놓았지만,
당신의 사랑은 그 거리를 넘어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시니.
내년 여름, 손주들을 안을 수 있게
저희를 건강하게 지켜주소서."
침대에 누워 잠이 들기 전,
윤희는 스마트폰의 사진첩을 열었다.
에밀리, 클로이,
그리고 갓 태어난 지의의 사진들.
윤희는 한 장 한 장 넘기며 미소 지었다.
"잘 자거라, 우리 손주들.
먼 곳에서도 잘 자거라."
꿈속에서 윤희는 인천공항에 서 있었다.
게이트가 열리고 민준이가, 제시카가, 에밀리가, 클로이가 걸어 나왔다.
다른 게이트에서는 수진이가, 제임스가, 아기를 안고 나왔다.
윤희는 팔을 벌렸다.
손주들이 달려와 품에 안겼다.
따뜻했다.
정말 따뜻했다.
"할머니!"
"할머니!"
윤희는 에밀리와 클로이를
한쪽 팔에 안고,
다른 손으로는 지의의
작은 손을 잡았다.
실제보다 더 따뜻했다.
멀리서 빛이 비쳤다.
태평양을 건너온 빛.
어둠을 뚫고 온 빛.
그 빛 속에서 윤희는 웃었다.
병수가 옆에서 손주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의인의 아비는 크게 즐거울 것이요,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로 말미암아 즐거울 것이니라."
윤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자식들,
정말 지혜롭고 의롭게 자랐어요."
"그럼. 그리고 손주들도
그렇게 자랄 거야."
꿈은 계속되었다.
공항을 나와 집으로 향하는 길.
손주들이 손을 잡고 걸었다.
윤희와 병수는 뒤에서 천천히 따라갔다.
태평양을 건너온 아이들.
하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한국이 있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었다.
그리고 지혜와 의로움이라는,
세대를 넘어 전해지는
가장 소중한 유산이 있었다.
윤희는 평온하게 잠들었다.
얼굴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