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서적 보도자료 지혜사랑 266 <<오상五常>>
이 책에 대하여 오랜만에 플라톤이 좋아할 시편들을 읽었다. 진솔한, 꾸밈없는 ‘공화국’ 건설에 한 몫 할 것 같은 시. 홍영택의 시는 쉽고도 정감 있다. 여린 부리로 모이를 쪼는 참새, 모친이 쓰시던 요강, 매미, 모기 등. 한 마디로 시적 대상들이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시집은 시인이 공개하는 일기책이라 할 수 있다. 홍영택의 시가 바로 그 전형이라 할 것인 바, 『오상』은 홍영택의 삶을 파노라마 형태로 보여준다. 보릿고개시절, 막노동시절, 만학도 시절, 그리고 그의 말처럼 지금 시를 쓰며 ‘세상에서 가장 죄 짓지 않고 가장 죄 없는 사람’이 되려는 시절. 열 길 물속보다 더 깊은 한 길 사람 속. 하지만 『오상』만은 시인 홍영택의 속을 거울인 양 훤히 비춰주고 있다. ― 구광렬 시인, 소설가, 울산대 명예교수
벽은 문이 있다고 생각하면 있고/ 벽에 문이 없다고 생각하면 없다,// 살아있다는 건/ 사방의 벽 속에 갇혀 있다는 것/ 그 벽에는 열릴 문이 숨어 있다.// 누구나 열 수 있는 희망의 문/ 마음만 있으면 열 수 있는 문/ 누구에게나 문은 열린다.// 모든 벽은 문/ 문 없는 벽은 없다, - 「벽」 전문
바닥은 틈이다/ 만물은 바닥에서 시작하고/ 바닥에서 이루어진다// 바닥은 바탕이다/ 생각, 소망, 주식, 꿈… / 바닥의 단골 메뉴다/ 바닥이라야 만물이 자란다// 바닥은 기회다/ 음양의 변곡점이다/ 음양이 변신하여 순환하는 곳/ 생존의 본능이다 - 「바닥」 부분
「벽」에서 시인은 “벽은 문이 있다고 생각하면 있고/ 벽에 문이 없다고 생각하면 없다.”라고 선언한다. 마음이 벽에 문을 만들기도 하고, 만들지 않기도 한다. 사방 벽에 갇혀 문을 모르는 이들은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게 아니다. 문이 있다고 생각하면 벽에 문이 생기는데, 사람들은 이 생각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누구나 열 수 있는 희망의 문”이지만, 마음을 내지 않으면 결코 이 문은 열리지 않는다. 마음을 낸다는 건 무지와 무명에서 벗어나려는 의지를 내보이는 일과 다르지 않다. 벽에 숨은 문을 두드리는 사람만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올 수 있다. “모든 벽은 문/ 문 없는 벽은 없다.”라는 이 시의 결구는 바로 이 지점을 가리키고 있다. 문 없는 벽은 없는데도, 무지에 빠진 사람들은 늘 벽에는 문이 없다고 생각한다. 보이는 것에 현혹되어 보이지 않는 것에 새겨진 진실을 외면한다. 벽 속에 숨은 문은 「바닥」이란 시에서는 ‘바닥’을 상상하는 마음으로 변주되어 나타난다. 바닥은 틈이고 바탕이고 기회이다. 틈이 없으면 만물이 피어날 수 없고, 바탕이 없으면 만물이 자라날 수가 없다. 바닥은 “음양의 변곡점”이며 “음양이 변신하여 순환하는 곳”이다. 양(陽)이 양만 고집하고, 음(音)이 음만 고집하면 음양은 오행(五行)으로 거듭날 수 없고, 당연히 만물로 피어날 수 없다. 인용하지 않은 부분에서 시인은 바닥을 “절망과 희망의/ 틈”으로 표현한다. 절망과 희망이 중요한 게 아니라 절망과 희망 사이에 드리워진 ‘틈’이 중요하다. 틈이 있으면 절망은 희망으로 변하고, 희망은 절망으로 변한다. 틈은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호흡과 같다. 숨을 쉬지 않는 생명은 있을 수 없으므로 틈이 없는 생명 또한 있을 수 없다. 문과 바닥의 상상력으로 시인은 지금과는 다른 세계로 가는 시의 길을 모색하는 셈이다. ‘벽 속의 문’은 한편으로 ‘길 아닌 길’과 통한다. 「길 아닌 길」에서 시인은 “길 아닌 길이 큰 길이 된다/ 길 아닌 길이 하느님의 길”이라고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길 아닌 길을 두려워한다. 무엇이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길 아닌 길로 들어서지 않으면 새길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벽 속에 문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곧 길 아닌 길로 들어서지 않으려는 사람이 아닐까? 「산다는 건」을 참조한다면, 삶 속에서 새길을 찾는 일은 “속세의 칼바람에 감기드는 일/ 악다구니 속 멍드는 일/ 세파에 멀미 나는 일”과 같다. 감각에 매인 몸이 원하지 않는 새길로 들어서면 당연히 몸살이 날 수밖에 없다. 몸살이 나지 않으면 감각에 젖은 몸은 변하지 않는다. 무지/무명에서 벗어나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이던가. 죽을 듯이 아픈 이 몸살을 견뎌야 비로소 벽 속에 숨은 문이 보이고, 길 아닌 길이 보인다.
자연은 무위(無爲)를 실천한다. 무위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무언가에 집착하지 않는 행동을 의미한다. 자연은 꽃을 피우는 일에 연연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꽃을 떨어뜨리는 일에도 연연하지 않는다. 자연은 시간을 산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물의 변화를 묵묵히 받아들인다. 평생을 살 돈을 벌었으면서도 여전히 돈을 벌 욕심에 불타는 인간과는 다른 지점을 자연은 바라본다. 「무위자연」에서 시인은 “채우고 비우는 건/ 생명의 속성/ 존재의 본질”이라고 분명히 밝힌다. 자연은 채울 때는 채우고 비울 때는 비울 줄 안다. 이것이 자연이 행하는 무위다. 인위에 매인 인간은 어떨까? 비우는 마음을 팽개치고 오로지 채우는 마음에만 집중한다. 부처가 왜 제법무아(諸法無我)를 소리 높여 외쳤겠는가? 무아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일을 이루는 모순을 실천한다. 「한 줌의 재」에 표현되듯, 모든 생명은 시간이 흐르면 한 줌의 재로 변한다. 하늘을 찌를 듯이 드높았던 나무라고 다르지 않고, 모든 이들에게 존경을 받던 스님이라고 다르지 않다. 죽음은 생명을 가리지 않는다. 다만 누군가는 그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누군가는 고통스레 죽음을 맞이한다. 우리는 생명은 죽는다는 사실만 안다. 죽음 너머를 모르기에 우리는 죽음을 한없이 두려워한다. 어떻게든 죽음으로부터 도망가려고 한다. 하지만 태어나면 죽는 게 자연 이치다. 자연 속에서 태어난 인간이 자연 이치를 벗어날 수는 없다. 태어남이 자연이듯, 죽음 또한 자연이라고 말하면 어떨까? 시인은 이 속에서 생(生)의 의미를 발견한다. 자연 이치를 거스를수록 인간은 그만큼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다. 생은 “한 줌의 재”에 이르는 어떤 도정을 가리킨다. 다만 사람마다 그 길을 대하는 마음이 다를 뿐이다. 전체 5부로 구성된 이 시집의 소제목에 시인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오상(五常)을 덧붙이고 있다. 인간의 윤리를 표현한 오상은 자연 이치를 표현한 오행(五行)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인(仁)은 오행 상으로 목(木)과 통하고, 예(禮)는 오행 상으로 화(火)와 통한다. 신(信)은 토(土)와 통하고, 의(義)는 금(金)과 통하며, 지(智)는 수(水)와 통한다. 오행의 자연 이치가 오상의 인간 윤리를 낳는 원형으로 작용한 셈이다. 홍영택이 공부하는 시(詩)는 어찌 보면, 오행과 오상이 만나는 어떤 지점에서 뻗어 나오는지도 모른다. 자연 이치를 탐구하는 일만으로 시작(詩作)이 이루어질 수 없다. 시작이란 자연 이치를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언어로 인간이 실천해야 할 윤리를 표현한다.
― 홍영택시집 『오상五常』, 도서출판 지혜, 값 10,000원 저자 소개 홍 영 택
홍영택 시인은 해방둥이로 태어나 보릿고개에서 자랐다. 건설현장에서 막노동하며 기술을 배우고, 해외 건설현장에서 청춘을 보냈다. 귀국 후 정유공장에서 퇴임하고, 만학에 심취되어 첫 저서인 산문집 『못다 핀 인동초 꽃』을 출간했다. 홍영택 시인의 첫 시집인 『오상五常』은 전체 5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시집에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오상五常을 덧붙이고 있다. 인간의 윤리를 표현한 오상은 자연 이치를 표현한 오행五行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시인은 언어로 실천해야 할 윤리를 표현한다. “책은 감정이 없으면서/ 내게 감동을 준다/ 책은 말이 없으면서/ 내게 이야기한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사랑을 아는 사람// 헌책은 옛 애인/ 새 책은 새 애인”(「책」)이라는 ‘만학의 즐거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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