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유적지는 어디일까. 외국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국제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방문한 외국 사절단에게 가장 먼저 보여 주는 유적이라면 단연 경복궁을 꼽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프랑스에 가면 제국의 영욕이 점철된 베르사유 궁전을 반드시 둘러보아야 하고 중국에서는 자금성을 빼놓을 수 없듯이 말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경복궁만 있는 것이 아니다. 덕수궁을 비롯해서 경희궁과 창덕궁에다 창경궁까지 있다. 조선 시대 임금들이 개인 취향에 따라 옮겨 다니며 나라를 경영했던 궁궐이 5개나 된다.요즘 말로하면 청와대와 정부종합청사 기능을 겸했던 행정타운이 무려 5개에 달하는 셈이다.
로코코 양식 석조전 품은 덕수궁
파란만장 구한말 역사 서려 있어
일제 때 훼손됐던 경희궁 새단장
역사의 흔적 사라져 되레 아쉬워 조선왕조 500년을 이끌어온 정치 1번지. 당대의 권력자들이 왕권을 중심으로 대립과 갈등이 벌어졌던 현장, 5대 궁궐들을 둘러보면서 역사의 이면에 감춰진 진실을 찾아가는 시간 여행을 두 차례에 걸쳐 떠나본다.
|
덕수궁 석조전. |
■서양식 석조건물 가진 덕수궁 첫 번째 탐방지로 선택한 덕수궁.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 시해된 을미사변 이후 러시아공관으로 피신했던 고종황제가 1897년에 궁으로 돌아와 대한 제국을 선포하고 황제 즉위식을 한 곳이다. 선조가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경복궁과 창덕궁을 대신하기 위해 지은 궁궐이다. 덕수궁 마당으로 들어가면 중심 궁전인 중화전을 비롯해서 석어당과 덕흥전 등이 화려하게 들어서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눈길이 가는 곳은 석조전이다. 서구 열강들이 우리 국권을 넘보던 시절, 근대적 문호개방으로 활로를 찾으려 했던 고종황제가 로코코 양식으로 지은 석조 건물이다. 하지만 완공 후 4개월 만에 한·일 합방이 진행되는 바람에 고종의 침실 겸 개인 접견실로만 사용됐던 곳이다.
석조전 앞에는 '대한제국 역사관'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전기 통신 기술자를 양성하고 토지 조사사업을 시행하는 등 선진 서구 문물 도입하는 데 앞장섰던 고종의 치적을 소개하는 사진들이 걸려 있다.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좁은 시야로 나라를 이끌다 '망국의 한'을 자초한 군주라는 통설을 거부하는 목소리로 들린다.
석조전 오른편에는 덕수궁 돌담길로 나가는 뒷문이 있다.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유명한 곳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덕수궁 돌담길을 함께 걸은 커플은 헤어진다'는 속설이 나돌고 있지만, 이곳을 찾는 청춘 남녀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 분위기다.
|
경희궁 숭정전. |
■새롭게 단장한 경희궁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북한산 쪽으로 10여 분 걸어가면 경희궁에 도착한다. 선조의 다섯째 아들인 정원군이 살던 집을 이복형인 광해군이 '왕기가 서린 집'이라는 이유로 빼앗아 궁궐을 지었다는 곳이다. 훗날 정원군의 아들인 인조가 삼촌인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사실을 생각하면 결과적으로 '왕기'를 거론했던 점술가의 예언이 맞아떨어진 셈이 된다.
경희궁은 탕평 군주 영조가 주로 거처하는 등 주요 궁궐로 자리를 잡았던 곳이다. 최근 개봉된 영화 '사도'에서 영조가 외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후 "개선가를 울리며 경희궁으로 돌아가자"는 멘트를 날리는 장면이 나올 만큼 비중이 높았던 궁궐이다.
|
경희궁 입구에 있는 서울역사박물관. |
하지만 2015년 9월에 만난 경희궁 이미지는 전혀 달랐다. 입구에서 마주친 콘크리트 건물에는 '서울역사박물관'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국유지로 편입시킨 후 경성중학교(현 서울 고등학교의 전신)를 짓는 바람에 궁궐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졌던 곳이다. 이후 그 부지를 민간에 매각하고 서울고등학교가 강남으로 옮겨가는 우여곡절을 겪은 1984년에야 정부 차원에서 시민공원을 조성키로 하면서 복원 작업이 시작됐다.
서울역사박물관 뒤편에는 어전 회의가 열렸다는 숭정전을 비롯해서 새로 지은 전각들이 들어서 있다. 하지만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렸다"고 말하기에는 어딘지 분위기가 어색하다. 역사의 현장을 찾아간 사람들에게 최첨단 기술로 단장한 모습을 보여주는 경희궁. 차라리 일제강점기에 처참하게 훼손됐던 현장을 그대로 보존해 놓는 것이 옳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다시는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뜻에서 말이다.
광복 70년. 정부가 주도한 복원 사업으로 지난날의 흔적들이 이중으로 사라져버린 경희궁. 과거사의 아픔은 그렇게 무뎌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슴 속에 새겨진 상처는 영원히 흉터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진정성 있는 사과를 거부하고 있는 그들의 자세가 바뀌지 않는다면 말이다. 가을비 우산을 들고 찾아간 경희궁. 푸른 잔디밭이 이슬비에 젖어 있었다.
글·사진=정순형 선임기자 junsh@busan.com
여행 팁
■교통편 고궁 탐방의 첫 코스인 덕수궁으로 가려면 열차를 타고 서울역으로 가서 도시철도로 갈아타는 것이 가장 편하다. 서울역까지는 KTX 등 각종 열차가 오전 5시부터 오후 11시 10분까지 수시로 운행한다. 서울역에서는 도시철도 1호선을 타고 1구간인 서울시청역에 내려서 3번 출구로 나가면 된다. 소요시간 2시간 50분. 운임 5만 9천800원(KTX 기준).
■먹거리 서울 고궁 거리를 찾아가는 사람에게 한 번쯤 권해보고 싶은 먹거리가 있다. 진하게 우려낸 육수에 작은 파를 썰어 넣고 끓인 사골 칼국수(사진)다. 버섯과 호박을 곁들인 뒷맛이 깔끔하다. 손으로 반죽한 면발이 쫄깃한 식감을 더해준다. 배추김치와 함께 나오는 백김치가 별미다. 8천 원. 황생가 칼국수. 02-739-6334. 정순형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