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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장 김씨의 시조 金氏 始祖
1. 일제의 득성 得姓
흉노족 왕자의 신분으로서 흉노의 정통 무예는 어느 정도 익히고 있으나, 한 황실 근위병의 신분으로서 새로이 황실의 무술을 연마한다.
흉노족의 무예는 동작이 크고 세(勢)를 중히 여기며, 주로 공격적인 수법들인 데 반하여, 한 황실의 무술은 동작은 작지만 빠르고, 정확한 가격과 수비에 많이 치중하는 등의 장단점이 있었다.
타고난 체격과 체력 그리고 살아온 생활방식에 따라 자연스레 연성(緣成)된 결과물이다.
일제의 근무태도와 충정(忠正)을 확신한 한무제는 일제에게 황궁 내에서는 언제 어디서든 마음껏 활보(闊步) 할 수 있게끔 일제에게 특별 신분을 부여하였다.
어느 날 저녁 무렵, 일제는 황궁 내에서 우연히 환관 宦官과 대신 망하라의 수상한 밀회를 보고,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망하라의 뒤를 따라갔다.
망하라는 품속의 보검을 꺼내어 다시 한번 더 확인한 후, 황제의 침실로 향해갔다.
황궁 내에서는 근위병 외에는 누구라도 무기를 소지하지 못한다.
무기를 갖고 있음이 확인되는 순간, 역모 逆謀로 낙인이 찍힌다.
그런데 망하라는 칼을 가슴에 품고는 황제의 침실로 가는 것이었다.
망하라는 조금 전에 만났던 환관과 침실 문 앞에서 목례 目禮 인사를 한 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 도중, 너무 긴장한 탓에 섬돌에 발이 걸려 앞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망하라의 품에서 보검이 빠져나와 바닥에 나뒹굴었다.
순간 나타난 일제, 보검을 왼발로 멀리 차버리고, 일어나려는 망하라의 허리를 오른발로 가격하여 다시 넘어뜨린 후, 두 손을 뒤로 결박하였다.
침실 내에서 갑자기 소란이 일자, 이에 놀라 침상에서 눈을 뜨고 바라보는 한무제,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현재 벌어진 상황은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망하라와 환관의 역모가 적나라하게 백일하 白日下에 드러난 사건이다.
다음날 한무제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일제를 근위대장으로 임명한다.
그리고 며칠 후,
역모 제거 공신인 일제에게 성(姓)을 하사(下賜)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성씨(姓氏)에 대한 개념이 없었던 흉노족이었다.
슝노(Shun no : 사람)는 모두가 탱그리(Tangri : 단군)의 자손이며 같은 혈족이란 믿음만 갖고 있어, 성씨에 대한 필요성을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성씨의 개념이 없는 일제에 대해 답답함을 느낀 한무제는 일제에게
“조상들의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본다.
“알타이(Altai)산이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고향입니다”
“알타이가 무슨 뜻이냐”
“석양에 비치는 고향의 산이 금빛으로 빛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황금이란 뜻인 슝노 말로 '알타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라고 답하고 이어
"소호금천씨의 후예로써 우현왕인 휴도왕은 대대로 황금으로 만들어진 인물상을 통해 하늘에 제사 지내는 제천의식 祭天儀式 행사를 지내고 있었습니다"라고 설명하였다.
그러자 한무제는
“근위대장의 조상들은 살던 고향이나 생활방식이 금(金)과 아주 깊은 연관성이 많으니, 성씨를 금씨(金氏)로 하도록 사성(賜姓)한다”라고 발표하였다.
그로서 금씨(金氏)가 최초의 성씨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후,
한반도로 도래한 김씨 金氏 [가야 (김해)김씨와 신라 (경주)김씨]에서 여러 성씨 姓氏가 분파 分派되어 나온다.
김해 허씨 許氏, 인천 이씨 李氏, 안동 권씨 權氏, 강릉 왕씨 王氏, 광산 이씨 李氏, 감천 문씨 文氏, 수성 최씨 崔氏가 갈라져 나온다.
영양 남씨 南氏는 중국의 김씨 金氏가 이후에 별도로 도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금씨, 김씨의 음운 변천 과정
당시 음운 音韻상 금씨는 중국에서 ‘Kiem’으로 발음되었을 거라 유추하는데, 시대 흐름에 따라 명(明) 후반기에 ‘김’으로 발음되기 시작하여 자연스레 우리나라에 도입되었고
그 후, 한글 창제 이후 오늘날 ‘김’으로 발음이 정착한 것으로 다수의 언어학자는 보고 있다.
일부에서는 조선왕조가 건국된 후 음양오행설 陰陽五行說의 금극목(金克木 : 쇠가 나무를 이김, 즉 金씨가 李씨를 누름)의 상극관계 相剋關係를 해소하고자 (‘금’을 ‘김’으로 발음하도록 유도하였다)라는 시중 市中에 떠도는 이론이 있으나, 이는 음운 변천 과정 시기와 조선왕조 건국 시기가 묘하게 일치하는 바람에 호사가 好事家들이 만들어낸 가상 假想의 이야기일 뿐이다.
금을 김으로 발음한다고 ‘금극목’이 ‘목극금’으로 바뀌어지는 것은 없다.
아예, 금 金씨를 토 土씨나 좌 坐씨로 바꾸어 ‘목극토 木克土’로 만들면 몰라도,
당시에는 ‘금’씨로 발음되었고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사실적이며 바람직하나, 본서 本書에서는 이미 관습화되어 버린 관계로 소설의 초기나,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쓰고 읽기 편리하게 현재 통용되는 ‘김’으로 표현하기로 한다.
2. 투후 秺侯의 유래
김일제는 사성 賜姓을 받고 직위도 황궁 내에서 손가락에 곱을 정도의 고위직에 올랐으나 처신에 있어 한 치의 모자람이나 거만함이 없었다.
김일제의 천성이 우직하여 이에 반한 한무제는 자신의 딸인 공주를 김일제에게 출가시키고자 넌지시 운을 떼어 보았으나 김 일제는 한사코 고사 固辭한다.
자신은 권력에 욕심이 없으며, 자신의 본분인 황제의 안위에만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겠다는 뜻이다.
황제의 부마 駙馬도 고사 固辭하는 김일제.
조정대신들 조차 김일제의 흠잡을 데 없는 충심과 처신술에 탄복한다.
한무제는 임종 臨終 직전,
김일제에게 투후 秺侯라는 유사 이래 전무후무한 작위 爵位를 내린다.
투후라는 작위는 그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는, 김일제만이 유일하게 받고 그 자손들만이 특별하게 누렸던 벼슬인 셈이다.
굳이 따지면 한 성(省)의 실질적인 통치권자이니 왕(王)과 같은 직위라 볼 수 있다.
황제의 형제나 가까운 인척은 대부분 왕이라 호칭한다.
그러나 같은 호칭의 왕이라도 격이 다르다.
봉토를 가진 왕이 있고 봉토 없이 허울만 왕인 자들도 많았다.
봉토를 가진 왕이라도 넓은 봉토와 작은 봉토를 가진 왕이 있다.
한성 (一城)을 봉토로 가진 왕이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왕의 신분 身分이다,
투후의 봉토(封土)는 감숙성과 산동성이다.
왕이라도 2개 이상의 성을 동시에 관할 경우는 극히 드문 사례다.
그러니 김일제는 왕 중에서도 2개의 큰 성 省을 관할하는 실제적인 권세가 아주 강한 왕이 된 것이다.
감숙성과 산동성은 김일제 조상들인 동이족의 옛 터전이다.
특히, 산동성은 흉노족인 우현왕은 금인(金人:금으로 만든 인형)으로 제천의식 祭天儀式을 지내던 장소이기도 하고, 당시까지도 동이족의 후예들인 부여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기도 하다.
특히 해안가에 거주하는 주민의 대다수가 부여의 맥 족들로 추정된다.
당시,
황하 이남에선 유일하게 동이족이 많이 거주한 지역인 셈이다.
체격이 크고 힘이 센 동이족들이 많이 살다 보니, 국력도 강성하여 진(秦)이 중원을 통일할 때도 마지막까지 버틴 나라가 산동의 제 濟나라다.
제 齊나라는,
중국 춘추 시대에 산동성 山東省 일대에 있던 나라다. (BC 1123~BC 386)
주 周나라 무왕 武王이 중원 천하를 평정하는데, 지대한 공을 세운 병법 兵法의 대가 大家 태공망 太公望에게 봉하여 준 나라로 29대 739년 만에 그 가신 家臣인 전씨 田氏에게 빼앗겼다.
낚시 바늘도 없이, 강가에서 흘러가는 세월을 낚시하는 것으로 유명한, 강태공 姜太公이 제나라의 초대 初代 왕이다.
관포지교 管鮑之交로 유명한 명재상 관중과 안영도 제나라의 대신이다.
강태공 역시, 동이족의 대표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동이지사 東夷志士란 별칭도 갖고있다. 강씨 姜氏의 시조가 된다.
초한지의 대장군 한신.
한신 韓信도 제나라를 함락시킨 후,
이곳저곳을 둘러보니 인재 人材도 많고 기후는 온화하고, 땅은 기름지고 해산물도 풍부한 산동성이 상당히 탐이 났다.
그때,
유방이 항우의 대공세에 밀려 생명의 위협을 느끼자, 한신에게 급히 병력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한신 대장군은 느긋하게
“먼저, 나를 제왕 齊王으로 임명해달라”고 하였다.
“지휘관이 왕이 되어야만, 백성들과 무장 武將들이 믿고 따른다”는 구차스런 변명도 덧붙였다.
- 사실 한신은 초기에는 유방에 의하여 한 군의 대장군 직위에 올랐고, 유방의 수하 맹장 번쾌 등을 데리고 출발하였다. 이후, 항우의 오른팔 격인 용장 용저를 죽이는 등, 연전연승의 뛰어난 병법을 발휘하여,
주변 제후국을 통합시켜나가 이때, 한신은 거의 반 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당시, 한신의 군세가 위세를 떨치자, 책사 괴통이 한신에게 '유방은 믿을 수 없는 사람이니 독립을 하자'고 누차 제의도 하였고,
얼마 후,
세 불리 勢 不利를 느낀 초패왕 항우도 한신에게 세사람이 초, 한, 제나라를 각자 건국하여,
천하를 분할 통치하자는 천하삼분론 天下三分論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그러니, 소설 <삼국지 연의> 속의 ‘천하 삼분론’은 제갈공명이 창안하고 제기한 것처럼 묘사하였으나,
실은 그 보다 400여 년이나 앞선, 초패왕 황우의 발상이었다.
만약, 한신이 이들의 의견을 받아 들어 그렇게 했다며, 이른 시기에 삼국지 三國志가 형성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
이에 분노한 유방이 항우는 제쳐두고, 한신부터 토벌하고자 했다.
지략가 장량이 중재를 한다.
“폐하와 한신 중에 누구의 군사가 더 많습니까?”
“한신이 더 많지”
유방이 불퉁거리며 답한다.
“수하의 용맹한 장수는 누가 더 많이 거느리고 있습니까?”
“한신이 더 많지”
유방의 목소리에 점차 힘이 빠진다.
“지금 처한 상황이나, 지리적 요건은 누가 더 우세합니까?”
“한신이 더 유리하지”
이제, 유방의 목소리는 기어 들어간다.
“그런데, 어떻게 한신을 토벌할 수 있습니까?”
유방은 입을 꾹 다물고 커다란 눈만 좌우로 부라린다.
얼른 제왕 齊王의 옥새 玉璽를 크고 화려하게 만들어 한신에게 하사 下賜한다.
이때부터 유방과 한신 사이의 신뢰감에 금이 가기 시작하였다.
결국, 천하통일 후에 이일을 빌미로 한신은 숙청당한다.
이처럼 천하명장 天下名將이라는 한신도 탐을 낸 땅이 산동성이다.
춘추 전국시대 이후 산동반도에서 개국한 나라들은 모두 제(濟)라는 국호를 사용하였다. 다른 지역에선 사용한 적이 없는 국호다.
한반도 백제(百濟)의 국호(國號)와도 무관(無關)하진 않다.
백제는 본시 졸본부여(고구려의 주몽)에서 분리되어 나오면서 소서노와 온조가 나라를 건국할 때 십제(十濟)라고 국호를 칭하였다.
그 후 세력이 커지자 국호를 백제로 바꾸었다.
한때, 산동 반도의 강성 强盛했던 ‘제나라’ 나라보다 백배(百倍)나 크고, 힘이 센 백제(百濟),
이는 이후 백제의 대륙진출설(大陸進出說)이 되는 상당한 근거(根據)가 된다.
역사는 묘하게도 돌고 돌아,
예전의 통치자였던 흉노의 우현왕의 자손인 김일제가 다시 그 지역, 산동성의 통치자로 자리 잡게 되었다.
당시 조선과 흉노의 경계 및 분리 자체가 불분명한 상황으로, 흉노도 조선처럼 단군(텡그리)의 자손이란 의식이 강하고 조상을 모시는 제례나 생활 습속이 유사하였다. 따라서 요서 방면의 흉노족은 산동. 요서지역에 웅거하였던 번 조선족의 일파인 선비족일 가능성이 크다.
선비(鮮卑)족 중에서도 모용선비(慕容鮮卑) 족일 가능성이 짙다.
이는 신라의 고분이 돌무지 덧널무덤의 구조와 순장 및 여러 풍습 등이 모용선비 족과 유사하다.
중국이 자랑하는 소설가 김용 金鏞의 무협 소설에도 자주 등장하는 위맹한 모용씨, 그 위명이 천하를 휘어잡는 천하무적의 최고 무예가 武藝家.
북방 北方의 거대명문 가문 巨大名門 家門인 모용세가 慕容勢家다.
모용가는 중원의 왜소한 신체 구조인 하화족으로서는 어떻게 해 볼 수조차 없었던, 어마무시한 무용 武勇을 뽐내는 종족이었다.
* 김용 金庸,
본명은 자량융(간체자: 查良镛, 정체자: 查良鏞, 한자음: 사량용)이다.
김용 金庸이라는 필명 筆名은 사량융 査良鏞의 "용 鏞"자를 파자 破字한 것이다.
홍콩에서 생활하였으며 신문기자 당시, 무협지 武俠誌를 처음으로 창안하여 신문에 기고하였다. 무협지의 효시 嚆矢다. 신문 ‘명보 明報’를 창간하여 사설을 기고하여 ‘왼손에는 사설, 오른손에는 소설’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박학다식하고 문장력이 뛰어나, 프랑스, 영국 등 여러 나라로부터 훈장도 수차 수여 받았으며, 그가 쓴 소설 중 일부는 교과서에 실어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무협지가 인기를 끌자 60~70년대 우리나라의 주요 일간지에도 일반소설과 더불어 무협소설이 한동안 연재되기도 하였다.
모용 선비족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한가 하면, 천하무적이라는 한민족의 대영웅 고구려의 광개토태왕조차도 정면 대결을 회피했던 유일한 종족이다.
광개토태왕은 모용 선비족과는 전투를 하지않고, 지속적으로 회유정책 懷柔政策으로 일관하였다.
동이족의 같은 종족이란 개념도 있었겠지만, 그보다 모용 선비족이 워낙 용맹하고 무용이 뛰어났기에 그렇게 한 것으로 보여진다.
투후 김 일제의 위상이 높아지고 활동 범위가 넓어지자 당시, 초원에서 세가 약해진 흉노족의 무리가 삼삼오오 짝을 지어 투후의 그늘 아래로 모여든다.
모여드는 흉노족들, 만약 김일제가 부왕(父王)인 우현왕의 왕위를 그대로 물려받았다면, 모두가 자신의 관할 백성들이다.
따라서 섭섭하지 않게 돌보니 소문이 퍼지면서, 더 많은 수의 흉노인들이 감숙성과 산동성으로 집결한다.
그렇게 모여든 흉노족의 수가 김일제의 사후에는 3, 4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김일제의 뒤를 이은 후손 투후들도 아버지의 유훈에 따라 이들을 최대한 보살핀다.
한(漢)의 조정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잘 알면서도 묵인 默認한다.
왜냐하면,
만리장성 이북 以北의 초원에 거주하는 흉노족의 머릿수가 줄면, 그에 비례 比例하여 북방의 골칫거리가 그만큼 줄어드니, 오히려 내심 內心으로 환영하는 분위기다.
산동성은 이후 김일제의 후손들에 의해 이 지역의 특성을 최대한 살리는 또 다른 역사의 시발점이 된다.
산동 지역의 부여의 맥족 貊族들 역시 언어와 생활 습속이 유사하고, 같은 핏줄이라는 동이족이란 명분으로 투후부를 중심으로 하여 결집하고 활발하게 움직였다.
- 12. 원보
첫댓글 우리의 족보네요. 감사...
노예에서 근위병으로........
삶의 희망을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