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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로만 칼라(1995년)
김광한
30년 넘게 신(神)을 믿어왔다고 생각했다.글을 쓰면서도 늘 신을 생각했다.그러나 떠날때가 다된 지금도 신과 인간의 관게에 대해 잘 모르겠다.인간은 왜 신을 필요로 하는지.왜 때로는 신으로 인해 고통스러운지도,인간은 본디 행복과 불행 사이에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행복을 쫓아가지만 행복은 한 순간 반짝이다가 떨어지는 유성처럼 순간 머물다가 찰나에 반대편으로 기울어져 버리는 것이고 삶이란 언제나 행복깔린 낙원에서 길고 긴 잠을 잘수 없음을 알아간다.그리고 언젠가는 그 유한의 슬픔을 깨달아가기에 그 모든 것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그 겸손의 자리에 신은 존재하는 것이리라
아주 오래 전에 내가 나가던 성당에서 한 교우를 만났다.이런데서 만나는 사람들이라야 자신의 신앙적인 이야기에 결부해서 자신의 가족과 성직자와의 돈독한 관게를 넌즈시 알려주면서 은근히 자신의 신앙적인 생활을 돋보이게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이 교우는 조금 달랐다. 한국외국어 대학을 졸업하고 알오티씨로 월남전에 참전했고 그러다가 문득 그곳에서 정신적 상처를입어서 알코올에 탐익해 중독자가 돼버린 스테파노(세례명)의 이야기였다.
이 책은 그의 이야기이다.그는 동생이 현직 신부로 있으면서도 신을 절대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나는 그에게 신이란 한번쯤 가져볼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서 그에게 접근, 친교를 가졌으나 결국 그는 동지 섣달에 차디찬 자기 골방에서 술병을 옆에 두고 동사(凍死)했다.
그를 천주교인들만이 묻힌다는 묘지에 묻어주는 것이 나의 일인 것같아 나는 뛰어다니면서 그의 순결한 마지막 신앙을 이야기했다. 그는 지금 용인 천주교 묘지 귀퉁이에 잠들어있다.
약력
1944년 서울 용산 출생
중앙대 문리대 국문학과 69년졸업
시와 시론 소설 당선으로 문단데뷰
한국문인협회회원
백두대간, 로만칼라, 소설 윤유일 등 30여권 소설집 발행
내가 그의 방문을 두드렸을 때는 이미 정오가 지나 있었다. 칠월
중순의 열기가 그의 좁고 냄새나는 방 안에 가득차 화끈거렸고, 부엌에는 반
쯤 타다 깨져 버린 연탄 덩어리가 흉물처럼 널려져 있었다.
"시몬 형제여 ! " -
그의 세례명은 시몬이었다. 시몬은 예수의 제자로서 어부였다.
내가 그를 조용히 불렀을 때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바
깥 문고리가 열쇠로 채워져 있지 않은 걸로 보아, 친구는 방 안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시몬 형제여 ! "
몇 차례 반복해서 불렀으나 역시 안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좁은 부엌으로 내달린 쪽문을 열고 안을 엿보니, 친구는 때에 절
은, 그리하여 극심한 빈궁을 엿보게 하는, 용수철이 헤어진 천 틈
으로 삐져 나온 침대에 벌렁 누워 천장을 향해 눈을 감고 있었다.
방바닥엔 어지럽게 흩어진 책, 담배 꽁초, 휴지 등이 정신없이
널려 있었고, 벽 쪽에는 대학 졸업식 때 찍은 그의 활짝 웃는 흑백
사진이 빛이 바랜채 채 낡은 사진곽에 박혀 있었다.
방 한가운례 있는 조그만 책상 위에는 그리스도의 고상(苦像)이 쓰러져,
누운 채, 슬프고 가련한 얼굴로 절망한 얼굴의 친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 나는 고상(苦像)을 두 손으로 일으켜 세운 다음 제자리에 가져다 놓았
다. 그 고상은 언젠가 그의 황폐할 대로 황페한 영혼이 침몰 직전
내가 사다 준 것이었다.
숨을 내뿜을 때마다 그의 입에서 역겨운 소주 냄새가 풍겼고, 그
것은 좁은 방 안 구석구석까지 배어 있어 견디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의 조그만 눈가엔 말라붙은 눈꼽이 눈 가장자리를 꼭 죄이고
있었고, 헝클어지고 정돈되지 않은 반백의 긴 머리카락은 절망의
늪을 향해 뻗어 있었다.
그의 아내가 극심한 생활고 때문에 보름 전에 세상을 스스로 하
직하고 만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탄생한 곳과는 인연이 먼 벽제 화장터 근처 들판
에 한줌의 재가 돼 흩뿌려진 것이다.
얼마 전까지 이 공간을 메웠던 사람이, 함께 밥을 먹었었고, 비록
사랑의 함량은 남들보다 덜했지만, 늦게 술취해 들어오는 남편 걱
정을 하며 변덕스럽고 까탈스런 사람에게 질책당할까 봐 염려했으
며, 그의 술주정에 보통 여자처럼 잔소리를 했던, 살을 섞으며 살
았던 아내가 이 공간에서 행방 불명이 된 것이다.
그저 잘나지도 않고, 못나지도 않고, 학식은 없지만 하루 세끼
밥 걱정 하지 않을 정도로 친구를 위해 봉사를 하던 아내, 그
내의 모습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시몬 형제여 ! 친구가 왔네 ! "
그제서야 그는 귀찮은 듯 부시시 눈을 떴다. 평소 같으면 그 목
소리에 술병부터 찾았을 그 친구가 오늘은 달라져 있었던 것이디-,
몹시 피로한 얼굴이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는 모두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안히 쉬게 하리라."
하는 성서의 말씀조차 싫은 피로한 얼굴이었다.
한참 동안 그는 낮선 .사람처럼 나를 응시하다가, 술이 덜 깼을
때처럼 늘 하던 표준말과는 아주 다른 국적 잃은 말을 내게 했
다.
"자네가 누군지 나는 알 수가 없네."
그 모습이 몹시 측은했다.
"나야, 이 사람아."
"왜 왔어 ? "
"자네가 염려가 되어서‥‥‥‥
"염려할 때도 있었나?"
그는 아예 내 존재 자체를 부정했다. 아니, 인간 자체를 불신하고
있었다.
나는 그를 침대에서 일으켜 세웠다.
그의 빼빼 마르고 여윈 몸이 종잇장처럼 반짝 들어 올려졌다.
그의 아내가 남기고 간 화장대 위의 꽃병도, 간단한 콜드 크림과
로션도, 밥상 위에 있어야 할 쓰다만 원고지도, 의자도 모두 여기
저기 흩어져 어수선했다.
친구가 덮고 자는 침대 위의 더럽고 때가 낀 이불이 늙은이의
주름살처럼 구겨져 있었고, 책상 위에 늘 함께 있었던 달팽이 모양
의 나무 재떨이엔 담배 꽁초와 담뱃재로 가득차 있었다.
부엌에 달린 쪽마루엔 여기저기 벗어 놓은 그의 고린내나는 양
말짝들이 널려 있었고,안측 의자에는 더러워진 걸레나 다름없는 수건이
길게 걸쳐 있었다.
수건엔 지난 여름 야유회 기념이라고 쓴 글씨가 박혀 있었다. 그
야유회 때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했다.
덧문은 열린 채로 있었다.
방 안은 쓸쓸하고 침침하고 숨이 막힐 듯한 공기로 꽉차 있어서,
나는 그저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이런 광경을 보니 내 마음이 아팠다.
친구에게 뭔가 도움을 줄 수 없는 내 마음은 찢어질 듯했다. 모
두가 정상이 아닌 듯했다.
폐차장과 같았다.
폐차장에서 부서진 자동차를 다시 형태를 망가뜨린 채 분해해
부속품을 여기저기 널려 놓은 듯한 장면 같다고나 할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누가 이 시대의 천재를 이렇게 망쳐 놓았을까? 창조주가 창조의
질서를 계획한 그 바깥의 모습이었다.
그의 얼굴에서 죽음의 그림자가 비쳤다.
한때 그는 어떤 중견 신문사의 편집국장이었다.
우두커니 망연자실하고 있는 내게, 친구가 억지로 몸을 반쯤 침
대에 기대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네는 내가 불쌍하다고 생각하겠지. 그래, 자네가 내게 상투적
으로 쓰는 구원이란 글자는 이미 행방불명이 됐네, 마누라는 죽어
버리고, 애새끼들은 뿔뿔이 제 갈길로 가 버리고, 나만 남은 거야.
송장 같은 꼴이 돼 갖고‥‥‥ 자네는 내 한심한 꼬락서니를 보고
뭔가 말해 줘야겠다고 생각하겠지 ? 아주 그럴듯한 음성으로 소피
스트(궤변)처럼 자네가 읽은 훌륭한 책들의 내용과, 그 구절들을
적당히 인용해서, '절망한 사람들이 마침내 구원받았다. ' 그런 류의
이야기를, 나가이 다가시(永井) 박사의 이야기를, 목사나 신부들처
럼 하고 싶겠지. '이 세상은 살 만한 세상이고, 나보다 더 참담한
상황에 빠졌던 사람들이 역경을 헤치고 마침내 일어싫다. 이럴수록
힘없고 보잘것없는 인간들은 하느넘에게 매달려야 한다고, 그
좋은 예가 구약에 나오는 욥이라고 생각하겠지, 그것이 자네의
상투적 용어란 걸 나는 슬프게도 잘 알고.있네, 그러나 이제 나는 아무
것도 믿지 않네. 나를 혼자 있게 내버려'두는 것이 나를 편안하게
만드는 한 방법이란 걸 자네에게 말해 주고 싶네, 자네는 모든 걸
하느님의 뜻으로 돌리겠지만, 나에겐 그런 하느님이란 필요가 없어
졌네. 절망만을 주는 하느님을 나는 원치 않네. 한때 나도 자네처럼
천주의 어린양이 되려고 무척 애썼네, 그러나 어린양은 점차 나를
못생기고 힘없는 숫염소, 비루먹은 숫염소로 만들어졌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나는 그뜻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겠네."
나가이 다가시(永井降) 박사는 일본 전후(戰後), X선을 통해
일본인들에게건강을 준 사람으로, 그 자신 백혈병으로 죽어간 사람이었다. 그는
원자 폭탄으로 가족들이 모두 죽어 버리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다
하늘에서 말씀이 들려 이 말을 수용하고 죽을 때까지 환자를 치료
했던 사람이다. 그가 들은 그분의 말은 '이 세상이 다하고 역사가
소멸하더라도 이 말씀은 남아 있는 것이다. 서로 사랑하라, 이것이
너에게 주는 말씀이다. '라는 성서의 말씀이었다.
친구는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제법 긴 꽁초를 신경질
적으로 집어 들고 있었다.
내가 라이터를 켜 주었다.
그의 눈에는 증오인지 분노인지 알 수 없는 눈물이 고였다. 쪽문
틈으로 화려한 빛이 들어왔다.
그는 방바닥에 흩어진 쓰다 만 원고지를 한 뭉치 집어다가 빛구
멍을 아예 막아 버렸다. 그에겐 이제 술도 필요없게 되었다.
술취한 그에게 바가지를 긁던 마누라가 없어졌기 때문에, 술 마
시는 것에서 해방이 되자 이제 그 술은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나는 그에게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내가 할 말을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술 한 병 사올까?"
그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귀찮은 듯이 말했다.
"자네에게 부탁이 있네."
'부탁 ? "
"그래. 내 부탁은 자네가 집으로 돌아가 주는 거야. 혼자 있고
싶네."
그가 거듭 말했다.
나는 이제 그에게 아무런 도움을 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유능한 카운슬러도 그의 절망을 위로해 줄 말이 얼른 생
각나지 않았을 것이다.
"가 주게. 이것이 내 부탁이고 나를 위해 주는 일이네."
집에 돌아온 그 밤에 나는 그를 위해 울면서 기도했다.
내 친구를 위하여, 그의 천재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마음 착한
천재의, 천재를 받아 주지 않는 인정머리없는 속물들의 회개를 위
하여, 겸손을 가장해 친구를 멸시한 사람들의 회개를 위하여, 생계
를 담보로 약한 자를 억압하는 가진 자들의 강퍅한 마음이 풀리기
를‥‥‥ 절망하는 사람들의 팅빈 가슴에 한 줄기 소나기 같은 빛을
내려주소서.그 가슴을 채우게 하소서.친구여,제발 죽지 말아 다오.
나는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워 기도했다.
또 한 사람 이 세상 어딘가에 그의 영혼이 떠돌, 그의 아내의 한
맺힌 넋을 위하여, 집 나간 그의 아들들을 위하여, 아이들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위하여, 몹쓸 놈이라고 욕설을 퍼웃는 그의 동료들을
위하여 기도를 했다.
바로 한 달 전, 그는 다니던 직장에서 파면을 당했다.
대낮부터 술에 취해 사람에게 덤벼든다는 이유에서였다. 그가 편
집국장으로 온 지 6개월 만이었다‥‥
그의 대듬은 아주 정당한 것이었다. 그의 잘못은 아무것도 없었
다. 그러나 술을 마셨다는 것이 잘못이었다. 개인 회사에서 사장은
자신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질서를 지키지 않는 사람은 해고를
얼마든지 할 수 있게 돼있다. 사장의 말은 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업자가 되었다. 과거의 예로 보아, 나이 사십이 넘어
직장을 얻기란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없었다.
몇 군데의 술집을 거쳐 집에 돌아온 것은 새벽녂이었다. 그의 비
좁고 깨끗치 못한 방에는 아내와 큰녀석, 작은녀석이 그 시각까지
자는둥 마는둥 각기 다른 생각을 갖고 누워 있었다.
문 쪽을 향해 첫째 아들, 둘째 아들, 맨 끝에 봉제 공장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온 그의 부인이 뒤척거리면서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
고 있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질 듯 한 손으로 겨우
부엌 앞에 기대 있다가, 이윽고 쪽문을 발로 걷어찼다.
이때, 그 순간까지 참아왔던 뱃속의 오물들을 토해 냈다.
"윽윽 ! 윽윽 ! "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빨갛고 거무죽죽한 내용물을 뱉어 낸 그
는, 방문을 열고 전등 스위치를 찾았으나 잡힐 리가 없었다.
몸이 중심을 잃었기 때문이다.
문지방을 간신히 지나 방 안으로 들어선 그는, 중심을 잃은 몸으
로 비틀거리면서도, 누군가 한 사람 자신을 부축해 줄 것을 은근히
기대했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여지없이 어긋나 버렸다. 가족들은 그를 외
면해 버렸던 것이다. 가족들은 눈을 뜨고 있었지만 일어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지겨웠기 때문이다.
형광등 스위치는 그의 손이 달려 있는 방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그는 그걸 잡으려고 발을 옮겼다.
그러자 잠든 줄 알았던 큰녀석의 입에서 신경질적인 비명이 튀
어나왔다.
"누구야, 이건 ! "
큰 아들은 그의 이마를 밟은 사람이 아버지인 줄 알았지만 짐짓
모른체했다.
"도둑이야 ! 도둑 ! "
큰아들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상대가·아버지인 줄 알자,
"아버지 또 술 취했어 ! "
하며 원망 섞인 푸념을 했다.
이번에 그가 옮긴 곳은 둘째 아들의 이마였다. 작은녀석도 비명을
질렀다.
"누구야 ! 누구 ! "
상대가 아버지인 줄 알자, 이번엔 큰 소리를 질렀다.
"아버진 도대체 뭣하는 사람이에요. 매일 술만 마시고. 지겨워
못살겠어,"
그는 이 말에 무척 화가 났다. 자신을 뭣하는 사람이냐는 말에
분노를 한 것이다.
"이놈들이 이젠 저의 애비도 몰라보네, 불효 막심한 자식,"
큰아들이 눈을 똑바로 뜨고 따졌다.
"불효 막심한 놈으로 만든 게 누군데요? 아버진 그런 말씀할
자격이 없어요."
그는 그 말에 두 녀석의 귀싸대기를 번갈아 되는 대로 훔쳐 갈
겼다.
아이들의 울음소리에,그의 열 살이나 아래인 아내가 이불을 걷어
젖히고 벌떡 일어났다. 그렇잖아도 이때쯤 뭔가 한 마디 해 주고
싶던 참에 구실이 잡힌 것이다.
그녀는 형광등을 켜자마자 악다구니를 쳤다. 아주 상스러운 호칭
을 써가며, 악에 받쳐 소리쳤다,
"야 이 개새끼야. 네가 뭔데 애들한테 손찌검을 해 ! 네가 남편
이냐? 나가 ! 어유, 저 귀신 같은 건 죽지도 않고 또 들어왔네.
귀신도 눈이 삐었지, 저런 걸 안 잡아가고 누굴 잡아간담! "
그녀는 그것으로 성이 차지 않았던지, 곁에 놓여 있던 달팽이 모
양의 나무 재떨이로 그의 이마를 쳤다.
그러자 친구의 이마에서 피가 흘렀다. 친구는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손으로 찍어 형광등 불빛에 비춰 보았다.
"어,피 !"
아내가 던진 재떨이는 15년 전 신혼 여행 때 제주도 기념품 가
게에서 제법 비싸게 주고 사온 것이었다.
그 재떨이가 15년이 지난 후 흉기로 돌변한 것이다.
"어, 피 ! 이것들이 ! "
친구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술김에 합세해서 자기를 해친다는 생
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니, 그들은 가족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미움과 증오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는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미처 구두도 신지 못했다. 그리고 집
에서 몇 미터 떨어져 있지 않은 파출소로 달려갔다.
새벽 두 시가 지난 파출소 안엔 늙은 차석과 방범대원 두 명이
졸고 있었다. 그가 피를 흘리며 들어서자, 그들은 관내에 폭행 사
건이 발생한 것으로 보고, 우선 그의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닦아
주었다.
"폭행 사건이로군."
차석이 그에게 물었다.
"누구에게 맞았소? 범인이 누구요?"
술 취해 꼬부라진 목소리로 그가 대꾸했다.
"아주 나쁜 놈들입니다. "
"깡패요 ? "
"깡패는 아니고‥‥‥
"관내에 깡패는 없는것으로 아는데‥‥‥‥ 술 취해 누구와 다퉜소?"
"아닙니다. "
':그럼 누구요? 범인을 찍어야 우리가 조치를 취하지."
"아주 나쁜 놈들입니다. "
"몇 명이오 ? "
"세 명 입니다. "
"집단 폭행이군,"
"그렇습니다. 집단 폭행이죠."
"장소가 어디요 ? "
"요 앞입니다. "
"때린 놈들 그대로 있습니까?"
"있습니다. 도망가진 못할 겁니다. "
"인상 착의는 ? "
"한 명은 여자고, 두 놈은 젊은 놈입니다. 세 명이서 합세해 내
이마를 쳤습니다. "
"뭣하는 사람들이오 ? "
"묻지만 말고 빨리 출동하십시오."
차석이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우리가 뭘 알아야 하지 않소?"
"갑시다. "
"좋소, 갑시다. 당신이 앞장서시오. 김씨, 권총 좀 챙겨 주시오."
김씨는 방범대원이었다. 방범대원이 챙겨 주는 권총을 허리에 차
고 차석이 일어섰다. 차석은 나이가 나이인지라 약간 겁을 먹은 듯
떨고 있었다.
"도망하지 않았을까? 나는 파출소를 지켜야 하는데‥‥‥‥
차석이 말했다. 난폭한 폭행 피의자를 겁내는 말투였다.
"그대로 있을 겁니다. "
"아는 사람입니까 ? "
방범대원이 묻자 차석이 이를 정정했다.
"면식범인가 ? "
"모르는 사람입니다. "
"시비를 했군. 당신이 먼저 시비를 건 거 아냐?"
"아닙니다. 그 사람들이 이유없이 저를 때렸습니다. "
"그럴 리가 있나. 당신이 먼저 시비를 걸었겠지. "미국말"을 하는
투로 봐서‥‥‥‥
"정말입니다. 나는 어디까지나 피해잡니다. "
"술 마시다가 선생께서 옆손님들에게 말참견을 했겠지. 옆자리에
끼어서 깐죽대니까, 그런 거 아냐?"
"제가요. ? "
그때 차석이 말했다.
"김씨가 혼자 다녀와, 우리는 파출소를 지킬 테니까."
"알겠습니 다. "
범인을 체포하기 위해 파출소를 홀로 나온 방범대원은 그가 비
틀거리며 인도하는 대로 따라갔다.
그는 자기 집으로 방범대원을 인도했다.
"자, 들어오십시오."
방범대원은 폭행당한 장소가 포장 마차나 술집이 아니고 가정집
이라는데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그는 형광등이 켜진 자기 방으로 먼저 들어갔다. 그 방엔 아내가
두 아들과 함께 신세 한탄을 하고 있었다.
"어디요 ? "
"여기요."
방범대원이 그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
그가 손짓했다.
"바로 저 세 사람입니다. 저 사람들이 나를 이 꼴로 안들었습니
그가 범인을 찍었다.
방범대원이 보아하니 범인이란 사람들이 양순하게 생긴 아녀자와
고등 학교 학생들인 것을 알고 우선 반항할 것 같지 않아 물었다.
"당신들이오? 이 사람 이마에 피를 내게 한 사람들이 ?"
어안이 벙벙해진 세 사람, 아내는 남편이 이제 머리가 돌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남편을 보자 울음부터 터뜨렸다. 이제 볼장 다
봤다고 생각했다.
방범대원과 눈길이 마주친 남편,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처벌해 주십시오, 이런 것들은 아주 혼내 줘야 합니다. 합세해서
구타했습니다. "
그리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의 아내가 얼굴을 묻고 흐느끼고
있었다. 뒤따라 그의 두 아들이 울음을 터뜨렸다.
영문을 모르는 방범대원이 자신의 직무 수행상,
"자, 파출소로 갑시다. "
하고 으름장을 놓다가, 웬일인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알아차렸다.
그래서 그의 아내에게 물었다.
"이 사람 누구요 ? "
아내가 대답했다.
"애들 아빠예요. 술에 취해 정신이 나갔나 봐요."
"애들 아빠라면 당신 남편이오?"
"맞아요,"
방범대원은 맥이 탁 풀렸다. 오래간만에 한 건 하려 한 것이 수
포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여보, 당신이 이 집의 가장이 아닙니까? 마누라한테 얻어 터
지고 파출소에 와서 신고하는 사람 당신말고 이 세상에 또 있겠
소? 별 싱거운 사람 다 왔네, 어서 잠이나 한숨 자요. 알코올 중
독이로군."
방범대원은 툴툴거리며 파출소로 돌아갔다.
첫댓글 일송정님께서 쓰신 작품이네요!!
인생의 깊은 고민과 답이 담겨져
있을것 같은 책일것 같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성향의 책입니다